이사야 45:15, 열왕기 상 19:9-18, 누가복음 24:13-37, 요한복음 20:11-29, 베드로 전서 1:8
여러분은 성경에서 이러한 진술-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주의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이 질문을 해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 중 어느 누구도 그분의 말씀이 그러한 표현을 담고 있다는 것을 거의 깨닫지 못한다는 것과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으로는 알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분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의로우신 분으로서,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으로서는 알고 있지만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분으로서는 알지 못한다.
이사야가 이 사상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주의하라. 『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그의 진술들 중에 이 진술은 가장 힘을 준 것이다. 그는 그의 상상력의 결과인 공허한 말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함은 사실들의 축적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그 사실들을 살펴 보고 연구한 다음 이러한 결론-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에 이르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이 행하셨던 것들에 대해 보았던 것, 그가 관찰했던 것은 하나님의 수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난다는 것, 그가 하나님의 백성의 체험들을 지켜 본 것, 이 모든 관찰들이 그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게 했다.
왜 이사야가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는가? 여러분이 그의 책을 철저히 읽는다면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행하시고 그들의 사생활에서도 많은 일들을 행하셨지만 그분이 그분 자신을 숨기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끊임없이 일을 하시고 계셨지만 항상 숨으셨다. 매우 많은 것들이 그분에 의해 행해지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행하시는 자가 누구인지는 전적으로 몰랐다. 이사야가 어느 날,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외쳤다.
우리의 인격은 하나님의 성품과는 정반대이다. 그분은 숨기시길 좋아하시지만 우리는 과시하길 좋아한다. 그분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하시지 않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이 없이는 만족할 수 없다. 이 하나님의 기질은 큰 시험과 시련으로 우리를 조성한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고』. 따라서 그는 이 시험을 견디지 못했다. 갈멜산에서 하나님은 분명 그와 함께 계셨지만 그분의 분명한 임재를 허락치 않으셨을 때 엘리야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낙담하여 동굴 안으로 들어 갔다. 하나님이 그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 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어려움을 알고 계셨고 엘리야가 그분이 그분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시길 원했음도 알고 계셨다. 그는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심은 깨닫지 못했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의 증거를 주셨다. 크고 강한 바람이 일어났다. 엘리야는 『주님이 이 안에 계시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바람 안에 계시지 않으셨다. 바람에 이어 지진이 따랐다. 엘리야는 『주님이 틀림없이 이 안에 계시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지진 안에도 계시지 않으셨다. 이어서 불이 있게 되자 엘리야는, 『주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니까 그 가운데 계시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불 안에도 계시지 않으셨다.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었는데 주님은 그 안에 계셨었다! 엘리야는 그분께, 『오직 나만 남았거늘』이라고 말했지만 주님은 아주 부드럽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이 있단다. 엘리야야, 나는 내 자신을 숨긴단다. 너는 내가 그 칠천 명을 어떻게 보존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엘리야는 그가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 생각했었지만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바람 안에도, 지진 안에도, 불 속에도 계시지 않으셨고 몹시 작은 소리 안에 계셨다. 그분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을 그분 자신을 위해 보존하셨었지만 그분의 행동은 그와 같이 감취어져 있었고 선지자인 엘리야조차도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의 일하심에는 숨기시는 본성이 있음을 깨닫기를 원한다. 힘있는 영향력들만이, 거대한 이상들만이 큰 계시들만이 그분께 속해 있다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의 가장 분명한 역사는 우리 존재의 비밀한 곳에서 이루어진다. 종종 그것이 작은 속삭임이나 보잘것 없는 영향력에 불과해서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의 느낌과 거의 분간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능력있는 활동 방법이다.
때때로 우리의 가장 깊은 속으로부터 어렴풋한 제안(나는 그것을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소리라고 해야 할지? 말이라고 해야 할지?)이 온다. 그 제안은 거의 말들이 아닌 말로, 『그것은 천연적인 생명이지만 십자가에 속한 것이다.』라고 이같이 어떤 것을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런 막연한 말들이 하나님의 가장 적극적인 행동의 증거들이다. 여러분은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시고 그저 나일 뿐이라고 판단을 내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이것이 그분의 가장 구체적인 말씀하심이고 행하심이라고 확언한다.
거의 이천 년의 교회 역사를 통해 교회를 보존해 온 것은 바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행동이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 섬길수록 우리는 그분 안에 더 거하게 되고 하나님은 아주 조용한 분이어서 종종 그분의 임재는 발견되지 않음을 더 깨닫는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의 가장 친밀한 방법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어쨌든 우리는 인도를 받고 있고 일은 발생하고 있다. 우리가 종종 가장 큰 인도를 받는 것은 바로 종종 하나님의 이 조용하고도 내적인 활동으로 인한다.
우주의 역사를 주의깊게 살펴 본다면,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주의깊게 살펴 본다면, 인류의 온 역사를 주의깊게 살펴 본다면 여러분은 동일한 결론-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다-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우주가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늘과 땅은 그분의 손이 행하신 것들이지만 육천 년 동안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아 오는 데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성경이 구약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더라도 신약시대에는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그러나 이 독생하신 하나님이 아버지를 나타내려고 오셨을 때 인생-『상한 얼굴』을 지닌 인생,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는』 인생(사 52:14, 53:2)-안에 그분을 감추셨다. 또한 그분은 보잘것 없는 지방인 갈릴리에서는 어떤 선지자나 선한 사람도 나올 수 없다(요 1:46, 7:52)고 유대인들이 말한 작은 읍인 나사렛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분이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분 안에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기란 어려웠을 뿐 아니라 그분이 하나님의 선지자였다고 믿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사렛 사람인 예수 안에 숨으셨다.
내가 언젠가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있었을 때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길 분명히 원하셨던 하나님이 창조로부터 구약 말기까지, 사천 년 동안 사람들에게서 그분 자신을 숨기셔야만 하셨던 것이 놀라운 일로서 떠올랐다. 따라서 그분이 신약시대에 사람들에게 그분 자신을 계시하시려는 특별한 목적으로 하늘로부터 땅으로 오셨을 때 한번 더 그분 자신을 숨기셨다. 즉 사람 안에 그분 자신을 숨기셨다. 그분은 나타나신 후에 숨으시고 그분 자신을 너무나 효과적으로 잘 숨기셔서 어느 누구도 도저히 그분을 인식할 수 없다. 그분은 그러한 방식으로 행하시길 좋아하시는 것 같다. 내가 그것을 그분의 기질이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무례하지 않음을 그분이 알고 계시리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무엇을 하든지 대체로 삼가히 행하는 형제 자매들이 있다 하자. 만일 그들이 여러분에게 물 한 컵을 갖다 준다면 그들은 여러분이 창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기회를 노려 조용히 몰래 들어와서 물을 내려놓고 다시 몰래 나갈 것이다. 여러분이 되돌아서서 물 한 컵을 보지만 누가 그것을 거기에 두었는지는 전혀 모른다. 나는 그와 같이 일을 행하는 많은 형제 자매들을 만났다. 그들이 여러분을 위해 어떤 것을 행할 때는 그것을 아주 조용하고도 비밀스럽게 행하기 때문에 누가 그것을 행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이 그들의 기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전적으로 다른 기질을 소유하고 있는 형제 자매들이 있다. 그들은 항상 지나치게 과시한다. 만일 그들이 여러분에게 물 한 컵을 갖다 준다면 물을 내려놓기도 전에 여러분에게 소리가 들리도록 컵을 요란하게 다룬다. 그런 다음 걸어 나오면서 큰 소리로, 『아무게 형제, 물!』이라고 말한다.
언젠가 한 번은 자매들 중 한 명이 접대하는 자매로 정해져 있는 어떤 교회를 방문했다. 오! 그 자매만이 그 장소를 가득 채웠다. 그녀는 너무도 커서 온 교회를 덮어 가렸다. 나는 그녀의 시야로 인해 장로들이나 집사들이나 형제들이나 자매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내가 보는 곳마다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그녀가 여러분에게 어떤 것을 갖다 준다면 그녀는 항상 그것을 드러내면서 할 것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나는 그것이 그녀의 기질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여러분에게 우리의 하나님은 그와 같지 않으시다고 말하고 싶다. 그분은 결코 어떤 것도 과시하지 않으시지만 너무도 위대하시다. 그러나 그분이 그렇게 숨어 계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그분이 위대하시고 대단히 위대하시며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분은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 안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기에 충분하도록 작아지셨다. 또한 이 사람은 가난한 가정에서 목수-아주 평범한 목수-로 성장하셔서 삼십 세까지 작은 규모로 일하셨다. 어느 누가 그분을 하나님, 무한하신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분으로 생각이나 했겠는가? 참으로 그분은 그분의 공적인 사역으로 들어가신 후 때때로 표적과 기적을 행하시며 비범한 것들을 말씀하셨지만 그런 다음에는 뒤로 물러나서 그분 자신을 다시 숨기시곤 하셨다.
성경을 주의깊게 연구해 본다면 하나님께는 과시하길 싫어하시는 기질이 있으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분은 공개적으로 하시기보다 오히려 비밀스럽게 하시길 좋아하신다. 그분은 우주를 창조하신 후 우리가 그분을 어느 곳에서 찾아야 될지를 모를 때까지 그분 자신을 우주 안에 숨기셨다. 그분이 그분의 거처를 사람 안에 정하셨지만 그 사람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 사람들은 다만 나사렛의 예수라고 불리우는 한 사람을 보았다. 그분을 두번째 만났을 때 그들은 그분이 보통 이상의 지력을 지닌 한 사람임을 인식했다. 세번째 만났을 때 그들은 그분이 틀림없이 선지자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그분을 더 나중에 만났을 때는. 『오, 이 사람은 확실히 선지자 이상의 분이시다!』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분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삼 년 반 동안이나 그분과 동행했던 그분의 제자들조차도 그분에 대한 참다운 인식에 이르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그분이 그분 자신을 끊임없이 숨기시고 계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분 자신을 잠시 동안 나타내시곤 하셨지만 그런 다음에는 다시 숨기시곤 하셨다.
언젠가 한 번은 변화산에서 그분은 그분 자신을 분명하게 계시하셨지만 다시 감추셨고 그분과 함께 있었던 세 사람에게조차도 그들이 보았던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또한 그들은 변형에 대한 목격자들이었을지라도 후에 그들 스스로가 의혹과 믿음 사이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들이 당혹한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이것은 바로 그분이 그분 자신을 계시하시자마자 그분 자신을 한 번 더 감추셨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온 세상에 확산되어 왔지만 자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실제로 지켜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기독교가 지구상에 그렇게 존재할지라도 예수님이 세상에 대해 숨어 계신다는 것은 놀랄 만한 사실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그것에 대한 놀라움이 여러분에게 충격을 주지 않는가? 주 예수님을 믿습니까? 『물론입니다』. 주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여러분은, 『예, 그렇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방인들은 여러분에게, 『어느 곳에서 그분을 만났습니까?』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들만 질문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도 자문해 볼 것이다.
나는 이십여 년 전에 내가 속임당했는지를 의심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예수님을 극도로 사랑했고 진정으로 그분을 믿었지만 그분을 결코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본 적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내 눈으로 결코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나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깜짝 놀란 일은 내가 의심하고 있는 바로 그때 나는 무릎을 꿇고서, 『오 주 예수님, 당신이 너무나 좋습니다. 당신은 너무나 신뢰할 만한 분이십니다.』라고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동안에도 나의 이 생각은 여전히, 『아마 내가 속았던 것일거야. 어디에 예수님이 계시는가? 너는 예수님을 본 적이 있느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생각이 줄곧 질문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의 마음은, 『오 주 예수님, 내가 얼마나 감사를 드려야 할지! 당신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이제 나의 중보자로서 하늘에 계시며 당신의 성령은 내 안에 계십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다만 생명의 그 두 흐름-의심하고 있는 겉 사람과 기도하고 있는 속 사람-을 보라! 종종 이 두 체험이 동시적이라는 것이 놀랍지 않는가?
왜 내가 이 한 가지 사항을 설명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했겠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과 우리와의 모든 교통 가운데서, 우리 생활에서의 그분의 모든 활동 가운데서, 그분의 방법들은 그분의 기질과 함께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우리의 친구들과 교제시, 우리의 기질들에 따라서 불가피하게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와의 모든 관계에서 그분의 기질에 충실하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분의 기질인가? 그 자체를 감추시는 것이 바로 그분의 기질이다. 그분은 매우 활동적이시지만 매우 감추신다. 그분은 참으로 계시지만 너무나 잘 감추셔서 여러분이 그분의 임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 언제라도 여러분이 그분을 인식하게 되면 그분은 그분의 행동을 바꾸시고 그 인식은 사라져 버린다.
우리의 주 예수님은 삼 년 반 동안 그분의 제자들과 친밀한 교통을 가지셨다. 그분은 그들이 그분을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사람으로 깨닫기 시작할 때까지 그분 자신을 그들에게 조금씩 알리셨다. 그들이 그때 그분을 얼마나 누렸는지! 그들은 그분을 보았고 그분을 만졌고 그들 중 한 사람은 그분의 가슴에 기대기까지 했다. 그들이 그분을 소유했다고 참으로 생각하는 바로 그때 그분은 갑자기, 『나는 떠나겠다!』라는 말씀으로 그들을 놀라게 하셨다.
그들 모두는 몹시 낙담했다. 이전에는 그들이 그분을 몰랐었지만 이제 그들이 그분을 알고 이제 그들이 그분을 누리고 이제 그들이 그분을 귀히 여기고 이제 그들이 참으로 그분을 영원토록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 그분이 그들에게서 떠나 가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는가? 그러나 그분이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그분의 제자들은 이전보다도 더 당황하게 된다. 『당신이 떠나가는 것이 무리에게 유익이라고요?』 『물론이란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그분은 누구인가? 『그분』은 여전히 『나』이시다. 『나는 떠나갔다가 너희에게로 오겠다 나는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에게로 오겠다』(요 14:18, 28, 16:5-16).
그분은 떠나가셨다가 다시 오셨는가? 물론 그러하셨다. 그러나 여기에 주목할 만한 사항이 있다. 그분이 떠나가셨을 때는 그들이 그 사실을 알았지만 그분이 다시 오셨을 때는 그 사실에 대해 몰랐었다. 그것은 놀랍지 않는가? 그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마리아가 그곳에 서서 울다가 『예수님이 서 계신것을 보았지만 그분이 예수님이신 것은 알지 못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고 있다. 그분이 『마리아야』라고 부르자마자 그녀는 주님을 알아 보고 그분을 만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분은 만지지 말라고 하신 후 즉시 사라지셨다(요 20:14-17)! 여러분은 알고 있는가? 여러분이 분명히 알지 못할 때는 그것이 그분의 기질이시다! 그분은 모두가 보이지 않게 오시지만 여러분이 그분을 아는 순간에는 사라져 버리신다.
나는 누가복음 24장 읽기를 좋아한다. 나는 엠마오로 가던 그 두 제자가 했던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생각한다(그러나 나는 때때로 내 자신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임을 발견한다!). 그 슬픈 기색을 띤 제자들이 길을 따라 걸으면서 주님의 죽으심에 관해 슬프게 서로 주고 받고 있을 바로 그때 갑자기 어떤 한 사람이 합류한 후 그들이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요?』 그들은, 『당신은 예루살렘에 거하면서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른단 말이요?』라고 말했다.
주님은 얼마나 위대하신지! 그분은 단순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물으셨다. 또한 그들이 길을 따라 서서히 비탄에 찬 그들의 긴 이야기를 쏟아 부을 때도 그분은 참을성 있게 동행하셨고 인내롭게 들으셨다. 그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 그분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말씀하셨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도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낯선 사람에 의해 감명을 받았음에 틀림없었다. 이는 그들이 가려는 촌에 이르매 예수님이 『더 가려하는 것 같이 하시니』, 『저희가 그분에게 강권하여』 그들과 함께 유하시도록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그분께 잡수시도록 청했을 때 그분은 매우 허물없이 주인의 역할을 맡아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다』. 또한 여기에 놀랄 만한 일이 있다. 그들이 볼 수 없었을 때 그분은 들으실 수 있었고 그들이 어리석은 말을 했을 때 그분은 그분의 방법에서 나와 오랫동안 그들과 동행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열리자마자 『그분은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사라지셨다』. 그것이 그분의 기질이다!
여러분이 주님을 볼 수 없을 때 그분은 여러분의 모든 어리석은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분의 방법에서 나와 여러분과 동행하실 것을 확신한다. 나는 어떤 한 형제에게, 『요즈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십니다. 집회들이 몹시 무겁습니다. 입을 열어야만 할 자들이 다문 채 그대로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저버리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나는 그와 같이 말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 감히 계속해서 말하지 못한다. 이는 그분이 내가 어리석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들으시지나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주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 대한 주된 훈련을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으로서 알게 하는 데 계속해서 두셨다. 그분은 사람들 가운데 계시지만 그분 자신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는 않으신다. 그분은 안에 거하시지만 그분의 내주하심을 의식하는 것은 허락치 않으신다. 그분은 정말로 여러분 안에 계시고 참으로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시고 놀라운 일들과 거대한 일들을 하시고 계시지만 그분의 기질은 우리가 말하는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기질이 아니다. 그분은 그분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이시다.
또 다른 하나의 예를 들겠다. 어느 날 밤, 문들은 잠겨져 있었고 그분의 제자들 중 몇 명이 함께 모여 있었을 때 주님이 나타나셨다. 나중에 도마가 그들과 함께 했었을 때,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주님은 그의 약함 안에서 그를 생각하게 되었고 어느날 그분은 그에게 보고 만져보도록 허락하셨다. 그때 도마는 머리를 숙이고,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하면서 경배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말씀하셨다. 『너의 기질은 보기를 좋아하는 기질이지만 나는 볼 수 없는 것을 믿는 기질을 좋아한단다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을 감추길 좋아하기 때문이란다』.
베드로는 그의 첫서신을 쓰기까지 상당한 체험을 갖게 되었고, 『너희가 보지 못한 분을 사랑하는도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이 놀라운 일이다. 결코 본 적도 없는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어느 곳에서 찾아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베드로는 너희가 주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라고 말하고 계속해서,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기뻐하니』(벧전 1:8)라고 말한다. 믿음과 사랑은 보이지 않는 한 분 안에 있다.
주님,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서 당신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 주소서. 우리의 집회들 안에 충만함이 흐를 때 우리는, 『오, 주님이 참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상태는 실제에 대한 증거는 아니다. 또 한편으로 집회 분위기는 무겁고 여러분은 『아! 나는 사랑 해야만 하는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다 대가 지불하기를 얼마나 실행했는가! 나의 생활 가운데서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데 얼마나 실패했는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여러분 자신을 발견할 때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은 그때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일하신다.
때때로 길거리에 나와 있을 때나 방 안에 있을 때,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 주님은 내 인생에서 무엇을 얻고 계시는 것일까?』라는 생각들이 여러분에게 떠오르지만 이러한 일을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심은 깨닫지 못한다. 나는 여러분 존재의 깊은 속에 그렇게 희미하게 기록된 것들과 여러분이 생각했던 그런 작은 제안들은 완전히 여러분 자신의 것이었는데 이는 그것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고 또한 그것들은 주님의 행하심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활 안에서 역사하시지만 그분 자신을 효과적으로 잘 감추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분의 행동에 대해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분은 내적으로뿐 아니라 외적으로-여러분의 가정에서, 사업에서, 여러분의 모든 환경에서-도 역사하고 계신다. 그분은 많은 환경들을 만들어 내시고 여러 면에서 활동하시면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분의 행하심에 대해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하게 하신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이 바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러나 여러분의 생활의 내적 상태든 외적 상태든 모두 그분의 통제 아래에 있다.
교회가 거의 이천 년 동안 이 땅에 지속해 온 이 사실은 바로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 그분의 역사하심의 결과이다. 어떤 일의 수행을 더 크게 과시하면 할수록 신성의 내용은 더욱더 감소하고, 일을 조용히 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것에 대해 더욱더 모르고 신성의 내용은 더욱더 커진다는 것은 흔히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은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께로 처리되기 때문에 그것은 보이는 것에가 아니라 믿음에 근거를 두어야만 한다.
나는 우리가 대체로 중요하다고 의식할 때 하나님이 흔히 가장 능력있게 함께하신다는 것을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우리 중 몇 사람이 깨달을 수 있도록 도움줄 것을 믿는다. 더 큰 것들을 찾지 말라. 그것들 이상의 것들을 찾지 말라. 여러분의 기대를 어떤 큰 이상이나 어떤 큰 체험에 두지 말라. 또한 밖의 어떤 것을 기대하지 말라. 이는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생활 안에서 힘있게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책임은 안에 있는 그분의 음성에 반응함으로서 그분과 동역하는 것이다. 그 음성은 『아주 작은 소리』이고 여러분 자신의 느낌들 중 한 부분에 완전히 속한 것 같아서 그것을 거의 음성으로는 인식하지 못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새겨져 있는 그 음성에, 『아멘』해야 한다. 이는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 비밀스럽게 또한 끊임없이 그곳에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위트니스 리
[일곱 광주리 가득히2,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 한국복음서원]
이제 우리는 생명의 인식에 관한 열 두번째 큰 요점인 「생명의 성장이란 무엇인가」를 보기로 하자. 생명에 대하여 한 걸음 전진된 인식을 가지려면 반드시 생명의 성장이 무엇인가를 또한 알아야 한다. 많은 형제 자매들이 주님을 향한 열성이 뜨거우며 그들이 드린 대가도 적다고 말할 수 없지만 참된 생명의 성장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된 관점과 추구를 많이 가지고 있다. 이러므로 그들 안에서 참된 생명의 성장이 십분 제한을 받는다. 이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이제 우리는 생명의 길에서 정확한 인식과 정당한 추구를 가질 수 있도록 시간을 드려 생명의 성장이 무엇인가를 전적으로 보기로 한다.
생명의 성장이 무엇인가를 보기 전에, 그 반대로 무엇이 생명의 성장이 아닌가를 보기로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인식을 더 깊이 있게 하며 정확하게 한다.
Ⅰ. 생명의 성장은 행위의 개선이 아님
행위의 개선은 바로 사람의 행위를 나쁜 데에서 좋은 데로, 악한 것에서 선한 것으로 고치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악을 뉘우쳐 올바르게 되거나 악을 제하여 선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에 교만했던 사람이 이제 겸손해지고, 항상 남을 미워하던 사람이 남을 사랑하게 되고, 전에 조급해하며 쉽게 화를 내던 사람이 이제 성품이 완만하고 조급하지 않게 고쳐지는 것 등을 행위의 개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의 행위가 개선되는 것이 생명의 성장인가? 아니다.
왜 생명의 성장은 행위의 개선이 아니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행위와 생명은 절대적으로 다른 두 한계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악이 생명 밖에 있는 것이듯 선도 생명 밖에 있는 것이다. 악이 생명이 아니듯이 선도 생명이 아니다. 선과 악은 성질이 다른 것이지만 다 같은 한계에 속한 것이고 생명 밖의 것이기 때문에 모두 생명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선과 악은 두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한 그루의 나무이다. 생명은 다른 그루의 나무이며 다른 한계에 속한 것이며 다른 왕국에 속한 것이다. 생명과 선악(善惡)은 완전히 다른 두 종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의 결심과 노력으로 행위를 상당히 개선했더라도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극히 어리고 약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의 개선이 완전히 생명 밖에 있고, 행위에 속한 것이고 생명에 속한 것이 아니며, 또한 그가 개선한 것이 그의 생명의 성장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장은 행위의 개선이 아니다.
Ⅱ. 생명의 성장은 경건의 표현이 아님
경건의 표현이란 무엇인가? 경건의 표현은 행위의 개선과는 다르다. 행위의 개선은 사람에 대한 것이고 사람 앞에서 전보다 행위가 좋아지는 것이다. 경건의 표현은 하나님을 향한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경외하며 경건한 태도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의 개선이나 경건의 표현이나 다 생명의 성장이 아니다.
어떤 믿는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경외하며 진지하고 행위나 행동을 가볍게 하지 않고 방종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것들이 생명의 자람은 아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을 높은 곳에 계신 분으로만 보고 존경하며 두려워 해야 할 하나님으로만 보기 때문에 경외하는 맘이 생긴 것이고 경건의 표현을 갖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 안에 거하시고 사람의 생명이 되시며 이 생명의 법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람 속에서 사람의 하나님이 되시는가에 대하여 조금도 알지 못하며 체험이 없다. 그들에게 경건의 표현이 있지만 그 표현은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성장으로 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 안에 있는 생명의 성장의 표현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장은 경건의 표현도 아니다.
Ⅲ. 생명의 성장은 열심 있는 봉사가 아님
열심 있는 봉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믿는이가 본래는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하고 아주 냉담했다가 이제 열심을 내고 필사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원래 집회를 자주 참석하지 않다가 이제 집회마다 참석하고, 원래 교회를 관심하지 않다가 이제 교회의 각종 봉사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열심 있는 봉사는 주님을 향한 믿는이들의 불탐과 주님을 섬기는 일에 부지런함을 나타내고 또 그것들은 항상 사람들이 칭찬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열심에는 사람의 흥분과 변덕스러움과 흥미가 섞여져 있을 경우가 많다. 또한 이러한 봉사는 사람의 패기와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고, 사람을 하나님과 더 깊이 연합되게 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더우기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한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열심 있는 봉사도 생명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생명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생명의 성장이 아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구원받기 전에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을 볼 수 있다(행 22:3). 그때 그는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얻지 못했지만 밖에서 자기의 흥분과 능력에 의해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생명과 조금도 관계되지 않을 수 있으며 생명의 상태를 조금도 표명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장은 열심으로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Ⅳ. 생명의 성장은 지식의 증가가 아님
믿는이가 더 많은 말씀을 듣고 더 많은 진리를 깨닫고 더 많은 성경을 이해하고 더 많은 영적 명사를 아는 것 등의 영적 지식도 일종의 성장이지만 생명의 성장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지식의 증가는 다만 그의 생각을 더 통달하도록 진보되게 하고 그의 머리에 더 많은 이해를 갖게 하거나 더욱 이해를 잘 하게 할 뿐, 그로 하여금 생명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인식과 체험에서 자라도록 성령이 그의 안에서 더 큰 계시를 갖게 하거나 생명이 그의 안에서 더 많은 지위를 얻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의 증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케 할 뿐(고전 8:1)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며(고전 13:2) 생명의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장은 지식의 증가도 아니다.
Ⅴ. 생명의 성장은 풍성한 은사가 아님
믿는이가 말씀을 전하거나 병을 치료하거나 방언을 할 수 있는 등의 영적인 은사가 나타나는 것도 상당히 귀하지만 역시 생명의 성장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은사들은 단지 성령의 귀한 능력이 그 사람 위에 더욱 임함으로 있는 것일 뿐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자라고 성숙함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한면으로 성령에게 사용되어 밖으로 더 많은 은사를 나타내어도 성령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을 그의 안에 더 많이 조성하게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은사가 많이 나타나는 것도 생명의 성장이 아니다.
고린도의 믿는이들은 구변과 지식에 풍족하므로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지만(고전 1:5,7) 생명에 있어서는 여전히 아주 어렸고 육체에 속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였다(고전 3:1). 이것은 우리에게 생명의 성장은 은사가 많이 증가하는 것도 아님을 보여 준다.
Ⅵ. 생명의 성장은 능력의 증가가 아님
믿는이가 하나님을 전보다 더 능력 있게 섬기고 말씀 전하는 것이나 간증하는 것이 전보다 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거나 전보다 더 지혜스럽게 교회를 다스리고 사물을 처리하는 것 등은 다 능력의 증가이지만 여전히 생명의 성장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증가된 능력은 성령이 그에게 준, 밖에서 온 능력일 뿐, 성령이 그의 안에서 생명을 조성하여 그의 영을 통해 그의 안에서 나타난 생명의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생명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생명에 속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능력의 증가 역시 생명의 자람이 아니다.
누가복음 9장은 초기에 주님을 따랐던 열 두 제자들이 모든 귀신을 제어했고 각종 병을 치료하는 능력과 권능을 주님으로부터 얻었지만 그 당시에 그들의 영적 생명의 상태가 아주 어렸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것은 능력의 증가가 꼭 생명의 성장이 아님을 충분히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상의 여섯 가지 부정적인 요점에서 볼 때, 생명의 자람은 우리의 행위가 좋게 개선되거나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표현이 있거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열심 있는 봉사나 영적인 지식의 증가나 우리 밖의 은사가 많이 나타나는 것이나 우리의 일하는 능력이 증가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은 다 생명의 성장이 아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것들을 생명의 성장의 원칙으로 삼는다. 대개 사람들은 믿는이의 행위의 어떠함과 경건의 어떠함과 열심과 지식과 은사와 능력의 어떠함으로 그 사람의 생명이 자랐는가의 여부를 결정한다. 이러한 관념은 정확하지 않다. 노란 구리(銅)는 황금을 매우 닮았지만 황금이 아니다. 이와같이 이 여섯 가지 요점 중에는 다소 생명의 성장과 같은 것들이 있으나 생명의 성장은 아니다. 물론 참된 생명의 성장에는 대개 이 여섯 가지 표현들이 있다. 그러나 이 여섯 가지 요점만으로 생명의 성장을 측량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그럼 생명의 성장은 대체 무엇인가? 이것을 우리는 다시 정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Ⅰ. 생명의 성장은 하나님의 성분의 증가임
하나님의 성분의 증가는 곧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성분이 되도록 우리 안에 더욱 조화되며 우리에게 얻은 바 되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이 곧 하나님 자신이며 생명을 체험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임을 말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장은 곧 우리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채워지도록(엡 3:19) 하나님의 본성의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완전히 형성되기까지 하나님의 성분이 우리 안에서 증가하는 것이다.
Ⅱ. 생명의 성장은 그리스도의 신장의 분량의 증가임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지만 우리의 생명으로 오신 하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라고 말한다. 우리 각 사람이 거듭날 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다시 한번 탄생하여 우리의 생명이 되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얻었을 때에는 이 생명이 아직 어리고 성숙하지 못했다. 이것은 곧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신장의 분량이 아직 어리고 적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추구하여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더 많이 살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얻을 때, 그리스도의 신장의 분량은 우리 안에서 점점 증가하며 자라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자람이다. 이 생명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이므로 이 생명의 성장은 곧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장의 분량이 증가하는 것이다.
Ⅲ. 생명의 성장은 성령의 지위의 확장임
우리는 생명이 다만 하나님과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성령임을 말한 적이 있다. 생명의 체험은 곧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생명의 자람은 곧 성령이 우리 안에서 더 많은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운행하심을 좇고, 성령이 우리 안에서 기름바름으로 있는 가르침을 순종할 때 성령은 우리 안에서 더욱 깊고 넓게 위치를 확장하며 우리 안에서 생명이 더욱 많이 자라게 된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장은 곧 성령의 지위가 우리 안에서 확장되는 것이다.
Ⅳ. 생명의 성장은 사람의 성분이 감소되는 것임
앞의 세 가지 요점은, 믿는 사람 속에 하나님의 성분이 증가하고 그리스도의 신장의 분량이 증가하고 자라며 성령의 지위가 확장되었을 때 곧 그의 생명이 성장된 것임을 말했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하나님 편에서 말한 것이다. 이제 다시 우리 편에서 보기로 하자.
첫째로 생명의 성장은 사람의 성분이 감소되는 것이다. 사람의 성분이 감소되는 것은 사람 속의 아담의 옛 창조의 성분이 감소되는 것으로서, 사람의 냄새가 감소되고 하나님의 냄새가 증가하는 것이다. 어떤 형제는 아주 열심이 있고 어느 자매는 매우 온유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생명이 자란 것 같지만 모두가 사람의 성분과 냄새일 뿐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분을 만지거나 하나님의 냄새를 맛보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느 형제나 자매의 생명이 자랐는가의 여부를 보려면 다만 그의 밖의 행위가 어떠하며 경건함과 열심이 어떠하며 그의 지식과 은사와 능력이 어떠한지를 보아서는 안 된다. 반드시 그런 것들 속에 하나님의 성분이 증가했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의 성분이 여전히 많이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사람의 성분의 감소가 곧 하나님의 성분의 증가이다.
믿는이에게 생명 안에서의 참된 성장이 있다면 그의 모든 말과 행동과 생활과 일들 모두가 당신으로 하여금 그가 자신을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존하며 자신의 총명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음을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사람의 냄새가 적은 반면에 하나님의 냄새가 많아진다. 즉 사람의 성분이 감소되고 하나님의 성분이 증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장은 하나님의 성분의 증가일 뿐 아니라 사람의 성분의 감소이기도 하다.
이 점은 상당히 중요하지만, 형제 자매들이 인식하기에 쉽지 않다. 십여 년 동안 말씀의 사역으로 주님을 섬겨 온 우리들도 이 점을 형제 자매들 안에 넣어 줄 수 없었다. 어떤 때에는 우리의 말을 수긍하면서도 형제 자매들이 실행할 때는 여전히 행위의 개선과 열심으로 봉사하는 것 등을 생명의 성장의 표준으로 삼는다.
한번은 어떤 지방에 갔었는데 그 지방 교회의 몇 책임 형제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지방의 어느 자매가 말하는 것이나 걷는 것이 다 확실하고 고요하고 온유하며 참으로 신령하고 생명이 충만하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만일 그런 것이 신령함과 생명이라면 천주교 예배당 안의 마리아상이 더 온유하고 고요하기 때문에 그 자매보다 더 신령하고 생명이 충만한 것이리라고 말했다. 그녀의 그 고요함과 온유함에는 사람의 냄새가 충만하기 때문에 다 사람의 성분이며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믿는이의 생명이 어떠한가를 단정하려면 다만 그의 밖의 표현에 의할 것이 아니라 그가 표현해 낸 것이 어떤 냄새와 성분인가를 만져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냄새인가, 사람의 냄새인가? 하나님의 성분인가, 사람의 성분인가? 그것을 만져야 한다. 많은 때 우리의 보는 눈은 정확하지 않지만 냄새는 항상 정확하다. 당신이 어떤 옷을 아주 깨끗하게 보았겠지만 냄새를 맡아보면 비로소 더러운 냄새가 가득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 속의 생명의 상태를 판정하려면 차(茶)를 맛보는 것과같이 그 냄새를 맛보아야 한다.
Ⅴ. 생명의 성장은 천연적인 생명의 파쇄임
믿는이의 천연적인 생명의 파쇄가 곧 그의 생명이 자랐다는 증거이다. 천연적인 생명의 파쇄란 곧 우리의 천연적인 능력과 재간과 보는 눈과 방법이 다 성령과 십자가에 의해 처리받아 파쇄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형제는 본래 그의 행함과 행동, 심지어 주님을 위하여 일하고 교회를 다스리는 것들도 모두 자신의 천연적인 능력과 재간과 안목과 방법을 의지한다. 모든 것을 자신의 능력과 재간을 의뢰하고 자신의 안목과 방법에 의존한다. 후에 십자가의 처리를 통과하고 환경에서의 성령의 징계를 받아 그의 천연적인 생명이 어느 정도 파쇄되었기 때문에 다시는 자신의 능력과 재간과 안목과 방법을 신뢰하여 사역하거나 일을 처리하지 않게 된다. 천연적인 생명이 이렇게 파쇄된 사람은 다시는 그의 천연적인 생명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며 그의 천연적인 생명을 의존하여 살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생명을 의존하여 사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러므로 그 안에서 생명이 자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장은 곧 천연적인 생명의 파쇄이다.
Ⅵ. 생명의 성장은 혼 각 부분이 정복당하는 것임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인인가를 말할 때에는 육체의 못 박혀 죽음을 주의해야 하고, 생명의 성장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에는 혼이 정복당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생명의 성장은 적극적인 면에서 성령의 지위의 확장이지만, 소극적인 면에서는 혼 각 부분이 정복당하는 것이다.
천연적인 생명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다 혼을 의존하여 산다.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혼 안에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세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혼에 의해 산다는 것은 곧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지에 의해 산다는 것이다. 사람의 혼은 특별히 강하고 두드러져 사람은 그 부분에 의해 살기 마련이다. 일을 만날 때에도 반드시 그 부분으로 대응하게 된다.
주님을 잘 아는 어느 형제는, 사람이 걷다가 부주의하여 벽에 부딪힐 때 항상 코가 먼저 벽에 부딪히는 것처럼 몸의 특별히 돌출한 부분이 먼저 벽에 부딪힌다고 말했다. 우리 혼의 상태도 이와 같다. 생각이 특별히 강한 사람은 일에 부딪힐 때 반드시 생각이 먼저 오고, 감정이 특별히 풍성한 사람은 일에 부딪힐 때 항상 감정이 먼저 움직이고, 의지가 특별히 강한 사람은 일에 부딪힐 때 반드시 의지가 앞장설 것이다.
십자가의 처리를 충분히 거친 사람은 혼의 각 부분이 정복당하여 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깨져 정복되므로 전과같이 두드러지지 않게 된다. 일에 부딪힐 때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사용할까 두려워하게 되며 생각이 먼저 나오지 않고 영이 먼저 나오며, 감정이 먼저 움직이지 않고 영이 먼저 움직이게 되며, 의지가 앞장서지 않고 영이 앞장선다. 이것은 바로 혼으로 하여금 앞장서지 않게 하고 영으로 하여금 앞장서게 하는 것이며, 혼에 의해 살지 않고 영에 의해 사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생명 안에서 자란 사람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장은 혼의 각 부분이 정복당하는 것이다.
앞에서 생명의 성장의 열 두 가지 요점을 본 우리는 참된 생명의 성장은 우리 편에서는 감소되고 파쇄되고 정복당함이요, 하나님 편에서는 증가되고 자라고 확장됨임을 알았을 것이다. 이것들은 생명의 성장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인식이며, 우리가 장차 언급해야 할 영적 체험과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이것들에 대해 철저한 이해와 정확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위트니스 리
[생명의 인식, "생명의 성장이란 무엇인가",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