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사람들을 접촉하는가
우리가 사람들을 접촉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으로 그들을 양육함을 목표로 그들을 소중히 품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이러한 풍성을 분배하려 한다면 우리 스스로가 성경에 계시된 이러한 풍성으로 조성되어야 한다.
성경은 먼저 쓰여지고 번역되었으며 마지막으로 해석되어지고 설명되어졌다. 우리의 옛 방식에 따르면,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수년 동안 성경을 해석하는 메시지들을 들어왔으나. 우리가 사람들을 접촉할 때 여전히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른다. 이것은 바로 내가 P.S.R.P-기도로 읽기(pray-reading). 연구하기(studying). 암송하기(reciting). 신언하기(prophesying)-를 실행하는 대만 성도들이 본을 따를 필요가 있다고 교통한 이유이다. 이모든 것에 시간이 요구된다. 기도로 읽는 것(pray-reading)은 가볍게 행해질 수 없다. 기도로 읽은 다음 우리는 한 단어, 한 단어, 한 용어 한 용어 , 한 구절 ,한 구절 진리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매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더라](원문 참조)고 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 구절들을 읽는다. 이것이 우리에게 해석해 줄 말씀이 필요한 이유이다.
사도행전 8장은 우리에게 이것에 관한 좋은 본을 보여 준다. 발립이 접촉했던 이디오피아 내시는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고, 빌립은 그에게 [읽은 것을 깨닫느뇨]라고 물었다. 그 내시가[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30-31절)라고 대답했다. 빌립은 이 내시에게 말씀을 해석했고, 그는 주님을 믿고 침례 받았다(35-38절). 몇몇 사람들은 우리 모두의 필요가[순전한 말씀]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 할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사도행전 8장은 우리에게 말씀이 해석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연구는 다른 이들에게 말씀을 해석해 줄 수 있도록 우리를 장비시킨다. 나는 수년에 걸쳐 말씀을 연구함으로, 은혜는 우리가 얻고 누린 바 된 하나님이시며, 실재는 우리에게 실재화된 하나님이심을 보았다. 우리는 그분을 은혜로서 얻고 받으며 누려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실재이신 그분을 은혜로서 얻고 받으며 누려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실재이신 그분을 깨달아야 한다. 비록 이와 같은 요점들이 라이프 스타디에서 분명하게 되었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연구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진리로 조성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로 읽고 연구 할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 1장 1절과 14절과 같이 기도로 읽은 구절은 좋은 기초를 놓는다. 그런 후 우리는 라이프 스타디를 도움으로 이 구절들이 중요한 요점을 연구한다. 이러한 도움으로 우리는 은혜와 실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우리는 한 단어 한 단어 용어 하나하나, 구절 구절의 진리를 연구해야한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우리가 기도로 읽고 연구한 것을 암송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연구에 더하여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종류의 연구는 큰 집회에서 실행되어 질수 없다. 그것은 여섯명에서 열명이 넘지 않는 활력그룹 집회에서 상호적으로 행해질 수 있다.
우리는 앞선 말씀의 해석으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았고, 전 성경에 대한 라이프 스타디를 가지고 있다. 그런 다음 주님은 결정 연구를 갖도록 우리를 한층 더 이끄셨다. 나는 이 연구에 있어서 내가 라이프 스타디를 가지고했었던 것과 같이 .메시지들을 제시 하기위해서 시간을 보냈을 뿐 아니라 개요들을 제시하기 위해서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이 개요의 요점들을 가지고 기도로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며, 신언해야한다. 만일 우리가 개요를 암송함으로 장비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떻게 신언하는지 알 것이다. 최근 추수 감사절 집회개요의 두 번째 요점은, [그분은 성육신을 통하여 그분의 신성을 그 분의 신성의 영광을 숨기는 껍질이 되었다]고 말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은 하나님이시며, 이 말씀은 육신이 되었고, 이 육신은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숨기는 껍질이 되었다. 이것은 바로 집회의 첫 번째 표어가,[그리스도의시성의 영광이 한 알의 밀알이신 그분 안에 감추어져있다]고 말한 이유이다. 밀알의 껍질은 밀알의 생명과 풍성을 감추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은 요점을 가지고 신언한다면, 우리가 접촉한 자들은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듣기 원할 것이다. 기도로 읽고, 연구하고, 외우고, 신언하는 이러한 새로운 방식-P. S. R. P-은 많은 곳에서 말하여졌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것은 모든 교회에게 하는 일종의 훈계이다. 나의 새로운 방법은 P. S. R .P이다. 이것은 우리가 최근 몇 년 동안 해방했던 풍성들을 요리하여 먹는 것이다.
올 겨울 훈련에서 할 부분은,[로마서에 있는 주님의 유기적인 구원에 관한 결정 연구]가 될 것이다. 로마서 5장 10절은,[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한다. [우리]라는 주어는 믿는 이들을 말한다. 한때 우리는 하나님의 대적 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분의 아들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목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우리의 법리적인 구속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의 구원은 우리의 법리적인 구속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의 구원은 우리의 유기적인 구원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요점들을 연구하고 그것들을 암송해야한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신언할 수 있도록 갖추어 질 것이다.
누가 신언할 수 없는가? 우리는 우리가 외울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신언해야한다. 우리가 외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연구한 것이다. 우리가연구한 것은 우리가 기도로 읽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기도로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언할 수 없다. 나는 주일날 집회에 사람들이 신언하는 것을 격려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그들이 말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새 길이 있다. 만일 우리가 말씀의 결정연구를, 해방된 개요의 요점을 기도로 읽고, 연구하고, 외운다면 우리는 참으로 신언하게 될 것이다. 도로 읽지 않고, 연구하지 않고, 외우지 않는 자들이다. 만일 우리가 P.S.R(기도로 읽기, 연구하기, 외우기]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실행한다면, 우리는 주일날 교회집회에서 분명히 신언하게 될 것이다. 이 메시지를 전하기전에 나는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가 만나는 것을 연구했다.[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었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깍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이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내시가 빌립더라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인 자기를 가리킴인 타인을 가리킴이뇨 빌립이 입을 열어 이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32-35절). 이것은 빌립의 복음 전파였다. 사도행전 8장에 있는 이러한 말은 P. S. R. P의 실행이 우리가 만든 새로운 방식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성경 사도행전 8장이 이미 있다. 빌립이 내시에게 응답하고 그에게 그리스도를 복음으로서 전파한 방식은, 빌립이 이사야 53장에 있는 부분을 연구했으며 그가 그 부분을 기억했으므로 그는 복음으로 일종의 신언과 같이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만일 그가 거룩한 말씀의 그 부분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가 그 부분에 관해서 그리스도를 복음으로서 전할 수 있었겠는가? 그이 전파는 그가 익숙한 거룩한 말씀으로 한 참된 신언이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일날 아침집회에 신언하도록 준비됨이 없이 온다면, 이것은 그가 일주일 내내 게으르다는 것을 말한다. 그 주 내내 그는 기도로 읽거나 연구하거나 암송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이것을 실행한다면 그는 주일날 신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메시지에서 교통한 것을 읽은 후, 우리는 교회 안에서 표준이 너무 높다고 느낄지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사실인데 이는 우리가 주의 회복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락한 기독교 안에 머무르길 원치 않는다. 카톨릭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만 미사에 참여하는 것만이 요구된다. 그들은 기능을 발휘하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의 개신교에 있는 자들은 설교를 듣는다. 그들은 집회에서 주님을 위해 말하도록 요구되어지지 않는다. 주의 회복은 다르다.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은 주님을 위해 말하는 기능을 발휘하는 지체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P.S.R.P를 실행해야할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우리는 기도로 읽고, 연구하고, 우리가 연구한 요점들을 암송해야한다. 그런 후에야 자연적으로 우리는 기도로 읽은 것과 연구하는 것과 외운 것이 우리의 신언이 될 것이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좋은 설교자인 어떤 형제가 말하는 것을 듣기 좋아한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기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그 이유는 여전히 기독교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이다. 사도요한의 글은 이상들 안에서의 계시들로 구성되었다 신약의 저자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이상 중에 그러한 계시를 받았다. 그들은 그들이 본 것을 써 내려갔고 이것은 우리에게 전해졌다. 우리는 그들이 본 것을 해석해야한다. 요한복음 1장의 결정 연구에서 우리는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 되셨음을 지적했다(1, 14절). 육신 가운데 그분은 어린양이 되셨다(32절).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분을 알았다. 그런 다음 주님은 나다나엘에게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인자이시라는 것을 계시했다(49-51절).우리는 이러한 요점들을 연구하고 암송해야한다. 그런 다름 우리는 그것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취함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으로 사람들을 양육할 수 있게 장비되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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