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


사역의 말씀 2012-01-0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grace77/35981.html



성경이 제오십 년을 희년이라 칭한 것은, 그 해가 되면 잃었던 기업이 원주인에게로 돌아오고, 몸을 팔았던 노예들이 다시 자유를 얻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1장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내려가 거기에서 기업을 잃었을 뿐 아니라, 애굽 왕 바로에게 괴롭힘과 노역을 당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한 폭의 그림은 타락한 사람의 상태를 묘사한다.

타락한 사람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이다. 자신의 몸까지 팔아 노예 된 자이다. 사람은 이 땅에서 대개 두 가지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자기 자신과 자신의 소유물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소유하고 있는 면에서는 모두가 다 똑같다. 그러나 각 사람의 소유물은 같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가옥과 땅, 증권, 은행통장, 처자식, 손자들로 가득한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소유물이다. 사람이 소유한 물건이 얼마만큼이든 간에 대략 이 두 부류로 나눈다.

이스라엘 백성이 좋은 땅에서 노예 된 애굽 땅으로 내려갔을 때, 결국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가나안 땅이 없어졌다. 가나안 땅이 사라진 것이 아니요, 그들이 버려두고 간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가나안 땅의 유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먼저 좋은 땅과 유업을 잃었고, 후에는 그들 자신까지 잃어버렸다. 자유가 없이 바로의 노예가 되었다. 이것은 성경에 묘사된 타락한 인류의 가장 완전한 예표이다.

우리 타락한 인류는 두 가지를 소유하고 있는데, 바로 우리들 자신과 우리의 소유물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타락한 인류가 우리의 기업을 잃어버렸고, 우리 자신 역시 팔아버렸으며, 결국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팔린 노예가 되어버린 한 폭의 그림을 보여 준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의 상태이며, 또한 그들이 예표하는 일반적인 세상 사람의 상태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가련한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택하신 백성을 구속하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애굽 땅에서 구속해 내셨고, 그들 자신으로 자유를 얻게 하셨다. 그들이 홍해를 건넌 후, 대적이 홍해 가운데 떠있는 것을 보고서 그들은 미칠 듯이 기뻐하며 환호했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지난 메시지에서 우리는 중국 문자에 근거해 희년에 하나의 중국어적인 의미를 부여했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이 생각대로 응하고 만사가 뜻대로 됨’이다 모든 것이 생각대로 응하고, 만사가 뜻대로 되고 구속없이 자유롭고, 미칠듯이 기뻐하며 뛰는 것이다.

영어에서 희년은 쥬빌리(Jubilee)로서, 그 뜻은 미칠듯이 기뻐하며 환호하는 것이다. 이 말의 히브리어는 요발(yobal)로서, 그 뜻은 ‘환호하다’, ‘크게 외치다’, ‘나팔을 불다’, ‘사람이 외치다’, 심지어 ‘호각과 나팔을 사용하여 외치다’이다.

따라서 희년이라는 이 말의 원뜻은 외침, 환호함, 나팔을 붊, 선포함 등이다. 비애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요, 애가(哀歌)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요, 바로 복음을 선포하고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내실 때, 그분은 큰 기적을 베풀어 바다를 갈라지게 하여 그들로 건너게 하셨다. 그들은 미리암의 인도로 홍해 바닷가에서 미칠 듯이 기뻐하며 노래했다. 전쟁은 남자들의 일이고, 찬송하는 것은 여인들의 특기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닷가에서 미칠 듯이 기뻐하며 찬송했을 때 바로 미리암이 주도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여인이 되어야 한다. 기뻐하면 할수록 좋다. 옛것을 지키려 하지 말고, 그저 규례대로 예배하는 전통적인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말고, 성경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뻐 뛰어야 한다. 시편에서는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100:1)라고 말한다. 원문의 의미는 당신도 부르고, 나도 외치며, 모두 다 여호와를 향하여 부르짖고 외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어에서는 감히 이렇게 번역하지 못하고 ‘여호와께 환호하다’라고 번역했다.

성경 에스라서에도 환호한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포로 된 땅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할 때, 성전의 기초를 세운 후 온 백성이 큰소리로 환호한 것이다. 거기서는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3:11-13).

어떤 사람은 고린도 전서 14장에서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순서대로 하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고린도 전서 14장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시편도 있다. 시편에서 여러 구절의 말씀이 환호하고 기뻐해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기뻐할 뿐 아니라 기뻐 뛰라고 한다. 희년이 다가왔을 때, 적어도 이스라엘 백성은 천만 명이 여기저기서 큰소리로 끊임없이 환호했을 것이다. 천만 명이 넘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동시에 외치는 것을 보라. 오늘날 합창단이나 성가대는 모두 죽은 방식으로 노래하고 전혀 기뻐 뛰지 않으므로 질서정연하다. 만약 기뻐 뛰며 노래한다면, 질서정연할 수가 없다.

희년은 바로 미칠 듯이 기뻐하는 해이다. 신약 시대는 바로 미칠 듯이 기뻐하는 시대이다. 무엇이 그리스도인인가? 그리스도인은 바로 기뻐 뛰는 자들이다. 오십 년 전 나는 니 형제님이,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만약 미쳐 보지 못했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이 없다.”라고까지 말씀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미쳐 뛰어야 하며, 사람 앞에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이 말만을 붙잡고서, “보라! 니 형제님이 조심해야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물론 당신은 사람 앞에서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미쳐 본 적이 있는가? 성경에는 여러 방면이 있다. 우리는 한 면만을 볼 수 없다. 사람 앞에서 조심해야 하는 것도 옳지만, 조심하는 것이 반드시 조용히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집회 중에서 환호하지만 여전히 조심한다. 우리는 정신 이상이 되어 미친 듯이 외치고 마구 소리지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 면으로 기쁘게 환호하며 또 한 면으로는 조심하여 적당한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제까지 한 번도 미칠 정도까지 이르지 않았다면, 자격이 부족한 것이다. 만약 한 번도 하나님 앞에서 기뻐 뛴 적이 없다면, 자격이 부족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신에게 하나님에 대한 누림이 적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충분히 하나님을 누린다면 반드시 기뻐 뛸 것이다. 당신이 내적으로 하나님을 누린다면 반드시 미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상태이고, 사람 앞에서는 여전히 삼갈 필요가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미칠 정도로 누려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나는 늘 하나님 앞에서 미치곤 하는데, 내 자매조차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매일 엄숙하고 출입이 항상 순서대로 이루어진다고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노인이 항상 미친다는 것을 아신다. 미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신 안에 기쁨이 없다면 미칠 수 있겠는가? 만약 당신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누린다면, 미치지 않을 수 없는 정도까지 이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은혜를 누렸기 때문에, 홍해를 건넌 후, 그들은 모두 기뻐 뛰며 외쳤고, 큰소리로 찬미하며 노래하고 환호해 마지않았다. 이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또한 그들을 이끌어 광야를 통과해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고, 좋은 땅 가나안을 그들에게 분깃으로 주셨다. 지파마다 한 분깃의 땅을 얻었고, 매지파 내의 족속마다 또한 한 분깃의 땅을 얻었다. 각 족속 내의 각 집 역시 한 분깃의 땅을 얻었다. 따라서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집집마다 한 분깃의 땅을 소유했다. 빈궁한 자도 없고 부한 자도 없이 집집마다 균등했으며, 모두 한 분깃의 땅을 소유했다. 모두가 다 지주(地主)였으므로, 사람들은 노예로 갈 필요가 없었다. 소지주도 아니요, 그렇다고 대지주도 아니었지만, 모두가 다 지주였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으므로, 그들은 모두 풍족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땅을 나눈 후 점점 내리막길로 가고 게을러졌다. 어떤 자는 게걸스럽고 게을러서 점점 궁하게 되었고, 따라서 소유물을 팔기 시작했으며 땅조차 팔아버리는 지경에 이르렀고, 몸까지도 팔아 노예가 되었다.

하나님은 지혜 있는 분이시고 모든 것을 아시므로, 곧 간단한 조례를 세우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 사십구 년이 지난 후, 제사십구년 칠월 십일에 전국에 나팔을 불어야 했다. 칠월 십일은 바로 속죄일로, 그날에는 구속에 근거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자유가 선포되어야 했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토지를 팔았다면, 그 토지는 당신에게로 되돌려질 수 있었다. 만약 당신이 몸을 판 노예가 되었다면, 그날에는 다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거기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땅을 팔고 몸도 팔았으리라 믿는다. 기업을 잃었던 모든 자들, 노예 된 자들이 희년의 나팔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춤을 추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미칠 듯이 기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바로 희년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실로 광대하시고 또한 사람으로 믿기 어렵게 하신다. 일단 제오십년이 되면, 땅을 판 사람도 몸을 판 사람도 없게 된다. 모든 집은 또다시 새로이 땅을 갖게 된다. 오십 년마다 한 번씩 평균케 되는 이것이 가장 공평한 평균지권(平均地權)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이런 종류의 평균지권을 실행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 사람의 기업인지를 보기로 하자. 땅이 사람의 기업이라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예표일 뿐이다. 시편 16편 5절은,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라고 말한다. 결코 땅이 당신의 기업이 아니요,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기업이시다. 땅은 예표요, 하나의 상징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의 기업이 되시는가? 창세기 1장과 로마서 9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이 하나님의 그릇임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릇 자체는 빈 것이며, 그릇은 용기(容器)이므로, 응당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릇의 내용이 바로 그릇의 기업이다. 만일 컵 안에 우유가 없다면, 그것은 빈 컵이요, 궁한 컵일 뿐이다. 만약 내가 지금 목마르고 배고파서 어떤 것을 조금 먹고 마시고 싶다면, 나는 내가 마셔서 갈증을 해소시킬 수 있는 우유 한 잔이나, 적어도 맹물 한 잔이 있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나 다만 빈 컵만 있다면, 나의 갈증은 해소될 수 없다. 빈 것은 궁한 것이요, 궁한 것은 빈 것이다. 만약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없다면, 빈 것이요, 궁한 것이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그릇이므로, 하나님이 없다면 빈 것이요, 공허한 것이다.

 


 

찬송가 701장 1절(한국복음서원 刊) 후렴에서는 “헛되고, 헛되네, 헛되고, 헛되네, 바람 그림자 잡는 것 같아.”라고 말한다. 마지막 절 후렴은 “주 없인 공허해. 모두 공허해. 주님 안에만 공허함 없네.”라고 말한다.

 


 

주님이 없으면 사람은 공허하다. 사람의 참된 기업은 토지나 집이 아니요, 처(妻)나 자식도 아니다. 사람의 기업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분의 그릇으로 지으신 것은 그분 자신을 담게 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당신이 이 그릇 안에 하나님을 내용으로 담지 않는다면, 당신은 공허하고 또 궁한 자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신 후 아담에게 다른 것을 알려주시지 않고 바로 아담을 생명나무 앞에 놓아 그로 생명나무를 받아들이게 하셨다. 무엇이 생명나무인가? 생명나무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36편 9절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라고 말한다. 또한 주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바로 한 그루의 생명나무요, 생명강이시다. 그분을 믿는 자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갖게 되며 배부름을 얻는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기업이시다.

 


 

이러할 뿐 아니라, 시편 16편 5절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업이실 뿐 아니라, 더욱이 우리 잔의 소득이시다. 기업은 막연한 표현 방법이지만, 잔의 소득은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업이실 뿐 아니라 더욱 우리 잔의 소득으로서 우리에게 누림을 주신다.

 


 

잔의 소득은 바로 누릴 수 있는 어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업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인 누림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의 소득을 지키신다.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아담 앞에 놓으셨지만 아담이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그는 하나님에 대한 누림의 그 분깃을 잃어버렸다.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때부터, 결과적으로 온 세상 사람들로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했다. 따라서 에베소서 2장 12절은 오늘날 사람들이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누가복음 15장의 그 탕자는 바로 온 인류를 묘사한 것이다. 왕이든 총통이든 청소부이든 구걸하는 자이든 모두 탕자로서 아무 것도 없는 무일푼으로 돼지와 함께 생활했다. 사람이 타락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타락한 것이요, 기업으로부터 타락한 것이다. 사람은 그의 기업과 누림이 되시는 하나님을 잃어버렸다. 이것이 첫 단계이다.

 


 

사람이 타락한 후 둘째 단계는 죄에게 몸을 판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 14절에서 “나는… 죄아래 팔렸도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타락한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없다. 이러할 뿐 아니라, 우리는 죄에게 몸을 팔아 죄의 노예가 되었다(6:9). 죄가 우리를 지배한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죄의 지배 아래 있다. 어떤 사람은 이성이 조금 높아서 사회와 친족과 친구를 위해 이성의 통제를 받아 밖의 몸으로는 그래도 함부로 행하지 못한다. 그러나 생각 안에서는 그들도 역시 제멋대로이다. 누가 마음으로 죄에게 팔리지 않았는가? 우리는 모두 자신을 죄에게 판 자들이다.

 

하나님은 바울을 불러 그에게,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8)고 말씀하셨다. 그 기업은 바로 우리의 산업이 되시고, 또한 우리의 풍부한 소출의 지업(地業)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생육할 땅이 필요하고, 또한 몸이 안식할 집도 필요하다. 시편 16편은,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90편 1절은, “주여, 주는 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라고 한다. 찬송가 441장(한국복음서원 刊)은 이 두 시편을 근거로 하여 쓴 것으로서, 대략적으로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분깃이시고, 우리의 모든 것이시며, 우리의 안식할 처소이심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업이시고, 우리의 거처이시다. 과연 주 예수님은 오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5장에서도 주님은, “너희는 … 내 안에 거하라”(4절)고 말씀하신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기업도 버렸으며, 또한 참된 거처도 없다. 타락한 인류는 참된 거처가 없이 모두 표류하고 유랑하며, 돌아갈 집이 없다. 겉으로 볼 때 그들은 큰 건물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 그들 안에는 안식이 없고 거처가 없다. 사람이 표류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참된 거처이시고, 하나님이 사람의 참된 기업이시다.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희년을 선포하는 것으로서 사람으로 구원받고 기업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누리게 하는 것임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에서 바로 이런 선포를 하셨는데, 즉 희년이 도래함을 선포하신 것이다. 희년은 누가복음 전체를 통제하는 중심 사상이다. 그러나 누가복음 4장의 희년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가 집으로 돌아간 이야기를 철저하게 설명하지는 못하며, 좀더 추가된 해설이 필요하다. 이로 인해,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3절과 14절에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구원받는 것인가? 구원받는 것은 당신의 기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돌아가는 것이요, 새롭게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심을 누리는 것이다. 구원받은 후, 하나님의 영은 당신 안에서 증거가 되시고, 담보가 되시고, 당신의 기업의 근거와 보증이 되셨다. 하나님이 바로 그 기업이시며, 오늘날 그분의 영은 우리 안에서 그 담보물 곧 견본이 되셨다.

 


 

히브리어에서 보증, 담보물은 견본을 의미하며, 견본은 당신에게 미리 맛봄을 주고, 장래에 온전히 맛볼 것임을 담보한다. 따라서 구원받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얻는 것이다. 다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얻는 것이다. 당신에게 하나님이 있다면 모든 것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얻는 것이야말로 구원을 얻는 것이요, 하나님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있게 된다. 하나님이 바로 당신의 기업이시다.

 


 

골로새서 1장 12절 또한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오늘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분깃이 되신다. 그리스도 밖에 있다면, 당신은 세상에서 살 때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다. 당신이 그리스도 밖에서 땅에서 살면 하나님이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오늘 당신은 아직도 그리스도 밖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당신은 아마 어떤 그리스도인은 왜 기쁘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학설이 아니라 실제이다.

 


 

예를 들어, 전등을 설치할 때, 전등이 설치되고 전기에도 연결되었는데, 만약 스위치가 잘못 되었다면 등은 빛을 발하지 못한다. 전기가 있는가? 있다. 전기는 있지만 빛나는가? 빛나지 않는다. 왜 빛나지 않는가? 그것은 휴즈가 연결되지 않았거나, 전기량이 부족하거나, 혹은 전기량이 필요한 만큼 없기 때문에, 전기가 있어도 없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전기가 왔어도 잘 흐르지 않기 때문에 등이 빛나지 않는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하다. 비록 하나님이 있지만 휴즈와 연결되지 않아 전기가 있으나 빛을 내지 못하는 등과 같다.

 


 

바울이 말한 것에 따르면, 전에 여러분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었다(엡 2:12).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그리스도 밖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휴즈가 이미 연결되었으므로, 하나님을 우리의 기업으로 누릴 수 있다. 따라서 희년은 전적으로 하나의 기업을 주의하는 문제이고, 기업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있으면 희년이 있고, 하나님이 있으면 모든 것이 생각대로 응하고 만사가 뜻대로 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로 구속의 나팔을 부는 것이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지금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기쁘게 받으신 희년이다.”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비록 사람은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났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당신을 기다리시고, 당신이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마치 고린도 후서 6장 2절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누가복음 15장은 아주 좋은 예이다. 그 아버지는 우연히 문에 나가서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날마다 집 문을 열어 놓고 문 입구에 서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소원하였다. 따라서 아들이 돌아오자마자 아버지는 멀리서도 그를 볼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즉시 앞으로 달려 나가 그를 안고 입을 맞추었다. 이것이 바로 기쁘게 받으심이다. 탕자가 돌아온 그날이 바로 그의 희년, 곧 하나님이 사람을 받으시는 은혜의 해이다. 하나님은, 타락했다가 회개한 모든 탕자를 기쁘게 받으신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탕자가 돌아온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중국 사람의 말에 “탕자가 돌아온 것은 금고와도 바꾸지 못한다.”는 한마디가 있다. 많은 복음 전하는 자들이 이 비유를 말한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진실로 진실로 말하지만, 사실상 누가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탕자가 돌아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기쁘게 받는 것과 아버지가 아들을 기쁘게 받는 희년이다. 부모 된 우리는 자녀들이 집을 나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데, 그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다. 당신은 혹시 독자(獨子)가 나갔다면 고통스럽겠지만, 만약 열 명이나 여덟 명의 자녀가 있는데 한 명이 나가버렸다면 별로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상 부모 된 우리는 설령 열 두 명의 자녀가 있더라도, 하나하나가 모두 귀하고 사랑스러울 것이다. 아들이 집에서 늘 아버지를 성가시게 느껴 해변가의 나무 아래서 바람을 쐬려고 나갔다 하자. 아들이 바람 쐬러 나가 버릴 때 늙은 아버지는 마음속으로 견디기 힘들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의 주제는 돌아온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아들을 기쁘게 받고, 아들을 안고 입을 맞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다음과 같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작은 아들은 어리석어서 아버지에게 기업의 분깃을 자기에게 돌려달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주었다. 그는 기업을 가지고 밖에 나가 허랑방탕하게다 써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고, 어쩔 수 없이 한 사람을 의지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사탄을 예표한다. 사탄은 바로 왕보다 더 대단하여 그를 돼지 치도록 보냈다. 바로는 기껏해야 당신으로 국고성을 짓게 했지만, 사탄은 사람을 돼지 치도록 보내버렸다.

 


 

성을 짓는 것은 돼지를 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다만 벽돌을 좀 굽고 땀을 흘리면 된다. 그러나 돼지를 치는 것은 돼지와 함께 뒹굴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어야 하나 배를 채울 수 없다. 결국 탕자는 깨닫고 돌이켜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

 


 

영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바로 타락한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의 집의 기업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기업을 떠났고, 또한 몸을 팔아 노예가 되었다. 오늘날 모든 타락한 사람은 대통령이든 임금이든, 빈궁한 자이든 구걸하는 자이든, 어떤 행업(行業)을 하는 자이든, 사실상 모두 돼지 치는 자들이다. 무엇이 돼지를 치는 것인가? 바로 행하는 바가 깨끗하지 못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정치가 어둡다 하지만, 사실 어떤 업(業)이 어둡지 않은가? 어떤 사람은 정치가 첫째로 어둡고, 상업이 둘째로 어둡다고 말한다. 그러면 교육은 어둡지 않단 말인가? 박사 학위를 얻고 의사가 되면 어둡지 않단 말인가? 모든 것이 다 어둡다. 모든 사람이 돼지를 치고 있다. 돼지를 친다는 것의 가장 두드러진 의미는 더럽다는 것인데, 곧 더러운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 사회 가운데 어떤 것 하나 뇌물을 주지 않는 것이 있는가? 또 어떤 것 하나 뇌물을 받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당신이 만약 뇌물을 주지 않는다면 길이 트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번 돈 중에 절대적으로 깨끗한 것이 있는가? 주 예수님은 돈에 이름을 하나 붙이셨는데, 곧 ‘불의의 마몬(mammon)’이다(눅 16:9, 원문 참조). 왜냐하면 돈이란 물건은 그 본질이 불의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의로울지도 모르지만, 돈을 벌려고 하기만 하면 당신은 바로 돼지를 치게 되고 더러운 일을 하게 된다.

 


 

그러면 당신은 아마, 그렇다면 이후로는 책을 읽을 필요도 없고, 일할 필요도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내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실업자가 되거나 빈둥거리지 않기 위해 어찌하든 일을 해야 한다. 일하지 않고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내 요점은 다음과 같다. 즉, 이 이야기는 일단 타락한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돼지를 치러 감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그가 어떤 일을 하든지, 그가 하나님을 떠나기만 하면 곧 돼지를 치는 것이다.

 


 

여러분은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라. 당신이 일을 할 때 깨끗한가? 사회에서 일을 하는 것은 모두 돼지우리에서 뒹구는 것으로, 다만 어떤 사람은 좀 좋은 쥐엄 열매를 먹고 어떤 사람은 좀 못한 쥐엄 열매를 먹는 것뿐이다. 그러나 모두 돼지를 치고 있고 모두 쥐엄 열매를 먹고 있는 것이다.

 


 

이 탕자는 생각해 보면서 자문한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하는가? 내 아버지는 얼마나 부요하신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것이 바로 죄인의 회개이다. 그러나 죄인이 회개한 후, 그의 관념은 집으로 돌아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곧이어,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 15:18-19)라고 말했다.

 


 

그는 일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이렇게 말하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러한 말을 듣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중단시키고 즉시 하인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22-23절)라고 했다.

 


 

그 살찐 송아지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살찐 송아지가 되시며, 회개하고 돌아온 우리 탕자들에게 누림을 주신다. 우리로 말하면, 이것이 바로 희년이다.

 


 

따라서 누가복음 15장은 누가복음 4장에 있는 희년의 예(例)이다. 탕자는 기업을 팔아버렸고, 자신의 몸도 팔아버렸다. 어느 날 그가 기업으로 돌아왔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으므로, 그것이 바로 희년이요, 자유이다. 즉, 모든 것이 생각대로 응하고 만사가 뜻대로 되는 것이다. 집에는 누림이 있고 먹고 마시는 것이 있을 뿐, 수고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레위기 25장에서는, 희년의 때에 파종하지 말고 거두지 말고 다만 먹고 마시라고 말한다. 파종하는 것도 없고 거두는 것도 없다. 다만 먹고 누리는 것이 있을 뿐이다. 땅의 소출을 먹고자 한다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시는 것을 먹으면 되고, 수고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버지가 아들이 품꾼이 되겠다고 하는 말을 듣지 않은 이유이다. 아버지는 그에게 살찐 송아지를 주면서 먹고 마시고 누리게 했다. 여기에 자격이 있는가의 문제가 없고, 모든 것에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기쁘게 받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희년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기쁘게 받으시는 연대(年代)요, 하나님이 사람을 기쁘게 받으시는 때이다.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기쁘게 받으신 것이 가리키는바 참된 희년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성경에서 희년은 복음의 시대요, 바로 오늘이다. 당신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켜 주 예수님을 영접하면 당신은 속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얻게 되며, 이것이 바로 당신의 희년의 시작이다. 이 날부터 당신의 전생애가 희년이며, 영원토록 희년이다. 당신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기업이 되심을 누릴 수 있다. 주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나는 당신의 희년이 갈수록 풍성하고 영원까지 지속될 것이라 믿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년의 기업이다. 할렐루야!

<출처 : 한국복음서원>



주님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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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상의 첫번째 의미는 교통이다. 고린도전서 11장은 믿는이와 주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10장은 믿는이들 간의 관계를 말한다. 만찬은 우리가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고 상은 우리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다. 상은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며』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강요점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라 「함께」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다. 이 「함께 참여함」이 교통이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에서의 「잔」은 단수로 되어 있다. 마태복음 26장 27절에서 말한 「잔」도 단수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잔을 복수로 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복수로 바꿀 때 그 의미가 변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냐? 우리가 한 잔에 함께 참예하기 때문에 여기서의 의미는 교통이다. 만일 우리가 서로 친밀하지 않다면 결코 한 잔 안에서 당신도 한 모금, 나도 한 모금 마실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가 한 잔을 함께 마시고 한 잔 안에서 당신도 한 모금, 나도 한 모금 마시며, 이 많은 사람들이 한 잔을 마신다는 그 의미는 바로 교통이다.



두번째 의미는 하나이다.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임을 볼 수 있다. 10장과 11장에서 말한 떡은 의미가 서로 다르다. 11장의 떡에 대하여 주님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라고 말하는데 이는 주 예수의 육신의 몸을 말한다 10장의 떡은 교회를 가리킨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우리는 이 떡이요 이 떡은 곧 교회이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기념함과 표명과 교통 그리고 하나를 보도록 배워야 한다. 떡이 하나이듯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도 하나이다. 우리의 떡은 오직 하나이다. 당신이 한 조각 떼서 먹고 그가 한 조각 떼서 먹으며 우리 각 사람이 메서 먹은 모든 조각들을 거두어 들인다면 하나가 되지 않겠는가? 이 한 떡이 각 사람 속에 분산되었지만 성령 안에서는 여전히 한 떡이다. 물질적인 떡은 다 먹었으므로 되찾을 길이 없지만 영적으로 이 떡은 여전히 하나이고 성령 안에서 하나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떡과 같이 본래부터 하나이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당신에게 한 부분 주셨고 또 그에게도 한 부분을 주셨으므로 이제 한 분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 속에 흩어져 거하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영적인 존재이므로 나누어졌어도 나누어진 분이 아니라 여전히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리스도를 나누어 주셨고 그에게도 나누어 주셨지만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는 여전히 한 분이시다 떼어진 떡은 성령 안에서 나누어지지 않고 여전히 하나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떡을 떼는 것은 주님을 기념하고 주의 죽으심을 표명하며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통을 가지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하나인 것을 시인하기 위한 것이다 이 한 떡은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임을 표명한다.

<출처 : 한국복음서원>



교회의 입장


사역의 말씀 2012-01-0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grace77/35979.html



교회에는 두 방면이 있는데, 하나는 유일무이한 교회이고 또 하나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이다. 하나는 교회요 다른 하나는 교회들이다. 교회는 무형적(無形的)인 것이고 교회들은 유형적(有形的)인 것이다. 보편적 교회는 조직이 없고 지방적 교회는 조직이 있다. 우리는 다 보편적 교회가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보편적 교회가 어떤 모양인지를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보편적 교회는 영적이고 형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방적 교회는 볼 수 있고 형체가 있는 것이다. 보편적 교회는 생명에 속하고 유기적으로 연합된 것이다. 지방 교회들은 형체가 있기 때문에 장로가 있고 집사가 있어, 형식상의 조직이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의 그 유일한 교회가 여러 교회들로 나누어진 이유는, 바로 지방이 다르기 때문임을 볼 것이다.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교회를 지방에 따라 여러 교회들로 나누었다. 지방을 따라 교회를 세우는 것이 성경의 유일한 방법이며 나눈 이유이고 유일하게 허락된 이유이다. 성경 안의 교회들은 어떻게 나누어져 있는가? 예를 들어, 계시록 2장과 3장의 에베소 교회와 서머나 교회와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와 사데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는 지방적인 원인으로(믿는 이들이 있는 지방이 다르므로) 일곱 교회들로 나누어진 것이다. 이 교회들은 지방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에베소… 라오디게아는 다 지방 이름이다. 이것들은 다 서로 다른 지방이므로 일곱 개의 다른 교회들인 것이다. 지방, 지방들이 교회를 일곱 개로 나눈 것이다. 계시록 2장, 3장의 일곱 교회들이 지방에 근거하여 세워졌을 뿐 아니라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나, 루스드라에 있는 교회, 고린도에 있는 교회, 더베에 있는 교회, 골로새에 있는 교회, 드로아에 있는 교회, 빌립보에 있는 교회, 로마에 있는 교회,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 안디옥에 있는 교회 등 성경에 기록된 기타 모든 교회들이 다 지방으로 나누어졌다.



지방으로 교회를 나누는 이런 방법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이다. 만일 나라를 교회의 범위로 삼았다면 교회의 경계를 항상 바꾸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라는 항상 멸할 수 있고 나라가 망할 때 교회의 경계도 뒤따라 변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도(道)를 교회의 경계로 삼았다면 도의 경계도 항상 변하기 때문에 도의 한계가 변할 때 교회의 경계도 따라 변해야 한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왕조(王朝)나 나라나 도(道)는 쉽게 변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도를 교회의 단위로 삼지 않으시고 나라나 기타 정치 구역으로도 교회 단위의 경계로 삼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성(城)으로 둘러싸인 시와 읍과 면을 교회의 경계로 삼으신 원인은 그 지방의 범위와 명칭이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 교회의 범위는 도대체 얼마나 큰가? 어느 정도로 큰 지방이어야 비로소 한 지방 교회가 될 수 있는가? 형제 자매들이 주의해야 할 한 가지 일은, 성경에서는 결코 교회를 구역으로 나누어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또 몇 개의 교회를 하나의 구(區:중국의 華北區와 같이 시(市 )보다는 큰 단위를 가리킴-역자 주) 아래둔 적도 없다. 비록 아시아에 일곱 교회가 있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에베소나 빌라델비아를 세워 다른 여섯 교회를 관리하라고 한 것을 결코 볼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일곱 교회와 일곱 금등대만 본다. 이 일곱 금등대는 일곱 교회를 대표한다(계 1:12, 20). 구약에서 한 등대는 일곱 개의 가지로 나누어져 함께 연결되어 있다. 여기의 일곱 금등대는 한 등대가 일곱 가지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 뜻인즉, 일곱 개의 다른 교회가 각자 빛을 발하고 각자 그리스도를 향하여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어떤 교회이든지 그리스도의 관리만 받지 다른 교회의 관리는 받지 않는다. 각 등대는 행정상으로 독립되었으며, 다른 등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교회들 각각은 일곱 금등대 사이를 오가는 인자를 향해 책임을 지며, 그들의 대제사장에게 책임을 진다 다른 교회를 향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 없다. 비록 그들이 일곱 교회이지만, 합해져 하나의 연합된 교회가 되어 그들보다 한 단계 더높은 소위 구회(區會)나 연회(年會)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들 각각은 하나의 소위[당회(堂會)], 즉 지방을 경계선으로 한 모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성경은 하나의 도시 혹은 가장 작은 행정구를 지방 교회의 경계로 삼는다. 한 지방 교회가 성경에서 교회의 단위이다. 그것들은 결코 다른 교회와 연합하여 그 중에 비교적 큰 교회를 중앙의 교회로 삼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눈에서 볼 때, 그분은 결코 로마를 중앙의 교회로 세우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결코 어떤 한 지방을 교회의 중앙으로 삼아 다른 교회를 관리하거나 제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조직에는 결코 지상(地上)에 있는 중앙이 없다. 예루살렘은 결코 그 당시의 중앙 교회가 아니다.



이것은 한 지방에 있는 교회는 다른 지방에 있는 교회와 왕래하지 말고 서로 돌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교회들 사이에 조직에 있어서 연합하여 하나의 큰 단체를 이루지는 말아야 하지만, 마땅히 다른 교회들과 주 안의 하나를 함께 지키며 일치된 방향의 추구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 안에서의 우리의 하나는 지방으로 나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힘을 다하여 부축하며 구제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교회가 빛 비춤을 얻었다면 다른 교회는 그 교회를 본으로 삼아 배워야 한다. 그러나 한 지방에 있는 교회는 여전히 독립된 것이다. 행정과 단체에 있어서 독립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주님 앞에서 다른 교회들인 얻은 빛 비춤과 명령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 그들을 본 받으며 부축해야 한다.

모든 교회들은 다 직접 주님에게 책임을 지고 주님의 제한을 받는다. 동시에 성경은 또한 성령이 모든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을 귀 있는 자는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계 2:7, 11, 17, 29, 3:6, 13, 22). 이것은 진리의 균형이다. 성경은 한 방면에서 에베소 교회 사자에게 말씀하셨지만, 말씀을 마칠 때는 또한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말한다.

어떤 교회에게 장점이 있을 때 다른 교회들은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살전 2:14) 데살로니가의 형제들과 같다. 그들이 주 안에 있어 온 날들이 많기 때문에 후에 일어난 교회들은 마땅히 그들을 본받아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은 매우 균형적이다. 한면으로, 한 지방에 있는 교회는 다른 지방 교회와 각각 독립되어 있고 서로 연합되지 않았다. 그러나 또 한면으로, 한 지방에 있는 교회는 다른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을 본받고 그들의 본을 배우고 그들과 일치된 행동을 취해야 한다. 동시에 모든 행동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어서도 안 되고 성경의 본을 따르지 않아서도 안 된다.



교회 안의 지방의 성질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를 방지해야 한다.

교회는 지방적인 것이고 일꾼들과 관계를 갖지 않는다. 일꾼은 어떤 지방에서도 사립(私立)적인 교회를 가질 수 없다. 일꾼이 한 지방에서 구원한 사람은 그 지방 교회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일꾼의 모든 일은 지방 교회만을 위할 수 있다. … 교회가 종파를 이루지 않도록 보호받으려면 영원히 한 일꾼이 교회에게 영향(영적인 방면이 아닌 공식적인 방면을 가리킴)을 주지 않게 하는 일을 반드시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사도는 지방을 초월한 일종의 직분이다. 하나님은 한 사도가 한 교회를 돌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언제든지 사도가 한 교회를 돌볼 때 그 교회는 교회의 지방적 성질을 잃어버리고 그 교회를 돌보는 사도의 색깔을 띠게 된다. 어떤 교회가 어느 한 일꾼에게 속할 때 곧 종파로 변해버린다. 사도가 다스리는 교회는 지방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사도는 각지에 가서 일을 하지만, 하나님께서 안배하신 것은 그가 일하여 사람을 얻은 후에는 형제들 중에서 비교적 좋고 성장한 자를 택하여 감독들로 세우는 것이다. 한 지방에 장로들이 있은 후에는 사도들은 즉시 손을 놓아야 한다. 만일 사도들이 손을 놓지 않으면 이 교회는 지방의 성질을 지니지 않고 사도의 성질을 띠게 된다.

교회의 지방적인 성질을 지키기 위해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교회의 범위가 지방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게 하는 것이다. 현재 매우 유행되는 방법은 각 지방의 신조가 같은 단체를 하나의 ‘교회’로 조직화하거나 하나의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삼아 여러 지방의 단체들을 포함한 선교단체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교회’는 다 지방의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에 지방의 성질이 없다. 그들은 다 신조나 선교 단체를 범위로 삼은 것이다. 그들의 경계는 성경이 말한 경계를 넘어섰다.

어떠한 중심(신조, 교리, 사람 등)으로 각지의 믿는 이들의 단체들을 연결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하나의 큰 ‘연합 교회’를 이루게 할 때, 자연히 이 중심이 범위가 되어 결국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그분을 완전히 떠났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이 여전히 그리스도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중심이 곧 범위임을 기억해야 한다. … 그러므로 사람이 그리스도 외의 어떤 것을 각지의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으는 중심으로 삼을 때에는 자연히 그 어떤 것이 나누는 경계가 되고 누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이고 누가 밖에 있는 사람인가 구분하게 된다. 이 경계는 즉시 지방의 경계를 파괴하고 취소하게 된다.



하나님은 매시대 특별히 어떠한 특별한 사역자들을 일으키셨다. 과거 몇 세기 동안의 교회의 역사는 모두 하나님이 특별히 사용하신 사람들이 일으켜 세운 것이다. 나는 모든 형제를 사랑한다. 나는 루터를 사랑하며 웨슬레를 사랑하며, 다비를 사랑한다. 영적인 위대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모두 하나님에 의해 쓰임받았으나 결국에는 종파를 형성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의 말씀을 거절할 수 없지만, 그들의 교회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은 지방 교회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사역으로 교회를 세우고 나서 교회를 지배했다. 성경에서 복음의 사역자가 한 교회, 혹은 몇 교회의 일을 다스린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지방 교회가 사역자보다 큰 것이다(고전 3:21-23 참조). 이 원칙을 뒤집으면 당신은 즉시 종파가 나옴을 본다. 한 모임이 한 사역자와 사명에 복종한다면 그것이 곧 종파인 것이다. 침례는 진리이다. 우리는 그것을 전파할 필요가 있고 실행할 필요가 있으며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어 주님의 제자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이 명령으로 교회를 세우고 교회로 하여금 이 진리의 사명 아래 복종케 한다면, 이것은 곧 종파를 형성하는 것이다.

나는 상해의 형제이지만 나는 진여에서 사역한다. 많은 사람이 사역으로 교회를 대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역은 영원히 교회를 대치할 수 없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우리에게 속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만일 그러한 일이 있다면 하나님이 사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나는 상해의 형제이지만, 네가 만일 내일 남경에 간다면 나는 즉시 남경의 형제이지 상해의 형제가 아니다.

상해의 믿는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여러분은 그들로 하여금 소극적으로 이것에서 벗어나고 저것에서 벗어나게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것은 그들 자신의 일이므로 여러분은 적극적으로 지방 교회를 말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사람은 다 상해에 있는 교회이며 서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은 커야 한다. 우리는, 상해에 있는 모든 믿는이를 포함할 수 있어야 한다. 사역하는 여러분은 우리의 간증의 성질과 지방 교회의 실행을 분명히 알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도서

교회의 실지적 표현 / 위트니스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