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산


찬송 2011-12-1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grace77/35508.html

 

 

 

[출처] 높은 산 (tim222) |작성자 투게더




어느 누가 희생할수 있나?


찬송 2011-12-1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grace77/35507.html

<//embed><//embed></ embed=""><//>


                          "어느 누가 희생할 수 있나" 이 찬송은 앤드류 유 형제님이 지은 찬송입니다. 
                                    곡은 워치만 니의 '대가 없이 사랑케 하소서'와 같습니다. 
                                                    파일을 다운 받아 들으면서 누리세요.

                                                     어느 누가 희생할 수 있나 어느 누가 허비할 수 있나
                                                      그들이 가진 기묘한 풍성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네
                                                        모두 쏟아 소진될지라도 항상 넘치도록 채워지네
                                                       자신 향한 축복 구치 않고 자신 향한 보상 바라잖네
                                                            속박에도 체념치 않고 고난에도 애통치 않아
                                                            솟구치는 사랑의 물결 영원까지 흐르고 흘러
                                                 죽음 삼키는 생명의 넘쳐흐름 파쇄시키는 향기 가득한 부활
                                                          주가 남기신 발자취 따라 묵묵히 따를 자 부르네
                                                         미소 가득한 그들의 얼굴 영광스러운 노정 보이네
                                                      이 길의 가치를 이미 보았으니 즐겁게 모두 포기하리라
                                                      내 인생 마칠때까지 기쁨의 전제로 모두 다 쏟아 부으리
                                                             당신의 임재 떠나지 않게 주여 사랑케 하소서
                                                          당신 안에서 기쁨 간직해 영원히 나의 눈물 그치네

 

                                                              홍콩에서 있던 어느 날 앤드류 유 형제님은
                                               형제님들이 편집 중인 '중국 순교사'를 읽다가 눈물이 그치지 않아
                                                              그 감동으로 이 찬송을 작사하였다고 합니다. 

                                                         워치만 니의 "사랑케하소서"는 십자가를 강조한 반면
                                             앤드류 유 형제님은 십자가의 수확인 부활을 강조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내 눈물 닦아주소서."로 마치는 니 형제님의 찬송과 달리
                                                 "내 눈물 그치네"로 마치는 이 찬송이 그것을 증명해줍니다. 
                                               니 형제님은 순교까지 그의 찬송의 내용과 같이 눈물을 흘렸지만
                                                                   이제는 눈물이 그쳤다는 것입니다.  

                         
                                               찬양의회복에서

                                              by찬송이좋아요

 
 



두번째 기둥-(생명2) 강은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한다


아침부흥 말씀 2011-12-1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grace77/35490.html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 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늪과 습지는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엘 47:9-11)

강이 흐르는 곳의 모든 것이
살아나고 생명으로 충만할 것이다.
강은 생명의이다. 오직 생명만이 살게 할수 있다.
이 흐름 안에서 나무가 자라서 달마다 달콤하고 맛있는 실과를 맺는다
또한 물에는 물고기가 심히 많다.
가축은 엔게디와 에네글라임이라는 두 도시의 이름 안에사 함축되어 있다.
엔게디는 '세끼염소의 샘'이라는 뜻이고,
에네글라임은 '두 송아지의 샘' 이라는 뜻이다.
이 샘들은 어린 가축들, 새끼염소와 어린 송아지를 위한 샘이다.
이것에서 우리는 강의 흐름이 나무들과 물고기와 가축을 산출하는 것을 본다.
강이 흐르는 곳에는 또한 고기를 잡는 것이 있다,.(겔47:10)
 고기를 잡는 것은 인수의 증가를 상징한다.
우리가 속한 교회의 인수가 해가 지나도 증가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고기를 잡지 않았음을 뜻하고,
고기를 잡는 것이 없는 것은 흐름이 없음을 뜻한다
고기를 잡으려면 반드시 흐름이 있아야 한다.
그물 던질 곳과 그물 칠 곳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우리는 인수의 증가를 위해 고기를 잡아야 한다.

에스겔서 47장8절은 강이 동편 바다로 흐른다고 말한다.
지도에 따르면 동편 바다는 사해이다.
집에서 나온 강의 흐름으로 인해 사해의 소금물이 치료될 것이다.
이것은 죽음이 생명에 의해 삼켜지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방교회 안에 풍성하고 깊은 생명의 흐름이 있을 때
많은 생명에 의해 죽음이 삼켜질 것이다.지방 교회 안에 풍성하고
깊은 생명의 흐름이 있을 때 많은 생명에 의해 죽음이 삼켜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교회에 흐름이 없다면,
그 교회는 소금으로 가득찬 '사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강의 흐름이 있다면 죽음은 생명에  의해
삼켜지고, 그 '사해'는 소생될 것이다.

사해와 말라 있는 곳들은 소생되고 죽음은 생명의 의해 삼켜질 수 있지만,
늪은 치료를 얻지 못할 것이다.
늪은 메말라 있지도 않고 물이 흐르지도 않는 곳이다
진흙과 물이 뒤섞여 있는 늪은 물이 차 있는 것도 아니고 마른 것도 아니다.
늪은 타협으로 가득한 상황을 상징한다.
이것은 타협하는 상황이 잇는 곳마다 늪이 있음을 뜻한다.
우리는 '늪'이 된 어떤 상황에도 연루되지 말아야 한다.

교회에 관한 우리의 입장은 반드시 절대적이어야 한다.
만일 교파 안에 서 있디면 절대적으로 서 있으라....
교회의 터 위에 서 있다면 절대적으로 서 있으라.
차거나 뜨거워야 하고 미지근하지 말아야 한다.
미지근한 것은 늪 안에 있는 것이다.
교파와 자유 단체를 포기했지만 여전히 합당한 교회의 터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않다면 늪 안에 있는 것이다.
절대적이지 않고도 교회생활 안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은 늪이다.

여러분이 주님의 회복 안에 있으려면 절대적으로 회복 안에 있으라.
어중간하게 머물러 있지 말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곧장 돌아오라.
중간에 멈춘다면 늪이 될 것이고, 흐름이 전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졸졸 흐르는 시내조차 없을 것이다.
오히려 여러분을 '진흙탕'처럼 되게 하는 물 정도만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여러분은 늪이되고, 늪은 치료를 받지 못할 것이다.

주의 회복 안에 있었던 기간 내내 나는 늪이 치료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요한계시록 22장 11절에서  주 예수님은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여전히
불의를 행하도록 하고, 더러운 사람은 여전히 더러워지도록 하며,
의로운 사람은 여전히 의를 행하도록하고,
거룩한 사람은 여전히 거룩해지도록 하십시오."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주예수님께서 절대적인 것을 바라시고 요구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절대적이기를 배워야 한다.
절대적으로 될 때 우리는 흐름 안에 있게 될 것이며, 이 흐름은
졸졸 흐르는 작은 시내가 아니라 우리가 헤엄칠 수 있는 강이 될 것이다.
이럴 때 이 강이 이르는 곳의 모든 것이 살아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