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고또한 그것을 위해
세상에 왔습니다. 누구든지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음성을
듣습니다. (요 18:37)
형제들이 와서, 그대가 진리를 붙잡고 진리 안에서 행한다고
증언해 주니, 나는 대단히 기쁩니다. 나는 나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다는 것을 듣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요삼3-4)
우리가 어떤 교희를 건축하느냐는 어떤 진리를 가르치느냐에 달려있다....
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이래로 이천 년 동안 우리 손에 성
경이 한 권도 없었다면, 모든 것은 공중에 떠돌아다닐 뿐, 견고한 것이라고는 아
무것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 영에 관한 것들조차 견고하지 못할 것이다. 그 영
은 말씀에 달려 있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이르신 말이 영
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6:63).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견고한 영이다. 말씀
이 없으면 그 영은 그다지 견고하지 못하다. 말씀이 없다면 그 영은 단지 '환영'
에 불과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다.
우리가 사람들이 거룩한 말씀을 접촉할 때마다 그영을 얻었다는 실례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보았지만, 그 영을 접촉하고 나서 말씀을 얻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이것은 역사이다. 교회를 산출하고 교회가 존재하도록 도우며 교회를 건축하
기 위하여 살아 있는 진리가 절박하게 필요하다는 원칙은 역사를 통해 세위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 안으로 들어가고 이러한 진리가 우리 존재 안으로 조성되도
록 체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질 수 없지만, 이것이 우리의
실행이 되어야 한다. 진리는 다름 아닌 성경 안에 있지만 여전히 성경은 '병따개'
가 필요하다. 우리는 성도들이 성경의 필요성을... 참되고 올바르며 합당하게 깨닫
도록 성도들을 인도해 주어야 한다.
상당히 많은 성도가 여러 해 동안 우리와 함께 집회를 해 왔다. 그러나 나는 우리
가 오늘 그들을 점검해 본다면, 신성한 계시의 내재적인 요소가 그들의 존재한으로
참되게 넣어지고 조성된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라고 믿
는다. 생명의 문제에서만 아니라 진리의 문제에서는 훨씬 더 많이 내재적인 요소가
성도들 안으로 넣어지지 못했고 조성되지 못했다. 나는 참으로 우리 가운데조차도
진리들을 합당하게 제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염려된다.
우리가 읽은 것이 우리 존재 안에서 진리가 될 때, 이러한 자양분은 영원히 남는
다. 내가 받아들인 것은 수증기와 같은 영감아 아니다. 내가 주님에게서 받은 것은
항상 견고한 진리였기 때문에, 그것은 내 안에 남아 있으면서 늘 내게 자양분을 준
다. 여러분은 진리를 소유해야 한다. 진리가 여러분 안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은
여려분의 지성을 통해서이다. 그럴 때 그것은 여러분의 기억에 남아 있게 된다. 말
일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진리는 여러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진리는 여
러분의 지성, 이해력을 통해 여러분 안으로 들어온다. 때그러므로 만일 진리가 여러분
의 기억 속으로 들어온다면, 그것은 지속적이고도 장기간의 자양분이 된다. 그럴
여러분은 축적된 진리를 같게 되고, 계속 지속적인 영양 공급 아래 있게 된다. 그러
면 여러분은 다른 이들에게 진리를 제시하는 법을 알게 되어 다만 영감이나 감동을
줄 뿐 아니라 그들을 견고하게 하고 진리로 조성되게 할 것이다.
기초석이 있는 거룩한 성벽의 한 가지 기능은 땅에 있는 하나님의 신성의 풍성의
권익을 보호하고 하나님께서 완결되심으로 성취하신 것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신성의 풍성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보호할지 모른
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의 풍성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반드시 말씀으로
부터 순수한 진리를 제시해야 한다.
아침부흥을 위햔 거룩한 말씀 #1
지리산 피아골의 오색으로 수놓은 단풍의 아름다움은 환상적 입니다
봄에는 철죽과 진달래가 온산을 붉게 물을 들이더니 가을에는
붉은 단풍으로 온산을 붉게 불태우고 있읍니다
하나님의 걸작품중의 걸작품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1장 21절 상반절에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라고 말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있을때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 감옥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살고 있었다. 만일 누군가가 바울에게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다면, 그는 "나는 그리스도를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다. 우리 하나님-사람들은 우리 자신의 생명,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이 아닌 부활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신성한
생명으로 사람의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을 표현한다(골3:4)
이렇게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과 얻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지 않고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살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지 못했다면 그리스도를 살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또한 그분 안에서 자라고, 그분을 하나님이
할당해 주신 분깃으로 누리고, 하나님의 교통 안에서 그리스도의
풍성에 참여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맛보는 것을 포함한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얻지 못하거나 그분을 맛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장 9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교통, 그리스도의 누림 안으로 부르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또 그분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함으로써 열매맺음으로 그분의 생명으로 성장하는 것 또한 그리스도를
사는 것의 일부이다. 부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신성한 생명으로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자라시게 함으로써
우리가 내적으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형태를 이루며 더욱 그분과 같은 형상이 되기 위한 것이다.(갈 4:19)
또한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우리가 성숙하여 그리스도의 신장의
분량에 이르도록 범사에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는 것이다.(엡 4:15)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다.(빌1:20)...그리스도가 확대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제 안에서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를 볼 수 있기 위한 것이다.
감옥 안에 있었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살아내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스도가 확대되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가 그분의 영의 실제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공급되기 위한 것이다. 이 일은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일어났다. 빌립보서 끝에서 그는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 집 사람
중 몇이니라"고 말한다. 틀림없이 가이사 집 사람
중 몇이 바울을 통하여 믿는 이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바울을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했다. 이것은 바울이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