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약 예수님 믿는 것을 평강과 기쁨과 축복을 얻는 것으로만 여긴다면 우리는 단지 보배의 바깥 만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보석을 파는 상점에 가서 보석을 사려는데 보석이 아름다운 상자 안에 넣어져 있었고 당신의 자녀는 그 상자를 그 상자를 원할 뿐 오히려 상자 안의 그 보석을 원하지 않는 것에 비유할수 있다. 구원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 이러하다. 왜 예수님을 믿는가? 고난을 피하고 평강을 구하며 혼의 안식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름다운 상자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 되었는데도 우리는 기껏해야 그 상자만을 원할 뿐 안에 있는 보석을 보지 못한 것과 같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라고 말한다. 이 보배는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며 하나님 자신이다.
신악 전체의 중심은 바로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고 우리 또한 그분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기에 우리는 삼일하나님 안에 있다. 신약의 중심이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평강과 기쁨과 복을 주시지만 이것은 외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구원의 내재적인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며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분은 질그릇인 우리 안에 있는 보배이다..
하나님의 가장 중심적인 목적은 그분 자신이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어떻게 우리의 생명이 되는가? 십자가를 통해서이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 어디에 십자가가있으면 거기에 하나님의생명의 길이 있다. 우리는 도대체그리스도와 십자가가 우리 몸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달라고 반드시 하나님께 앙망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인식할 수있는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구원받은 모든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 그러나 이생명이 우리 안에서 지위를 가질 수 있는지. 우리 안에서 우리와 연합할 수 있는지, 우리 안에 조성될 수 있는지, 또한 우리 몸에서 살아낼 수 있는지 등의 관건은 모두 우리 몸에 십자가의 역사가 있었는지에 달려 있다. 십자가가 우리 안에서 얼마만큼 역사하었는가에 따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만큼 우리 안에서 지위를 얻을 수 있고, 연합과 조성과 살아냄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생명이 어떻게 우리 안에 조성될 수 있는가? 그분의 성분이 어떻게 우리의 성분으로 변할 수 있는가? 그분의 생명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우리의 모든 천연적인 것을 삼키며 우리 안에 충만케 되어 우리의 성분이 될 수 있가? 또한 어떻게 성분이 다시 우리 몸에서 표현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 모든 목적에 도달하려면 오직 한 길 즉 십자가의 파쇄밖에 없다. 오직 십자가만이 그리스도로 사람안에서 지위와 기회와 출구를 갖게 하며, 그분이 하고자 하시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그분이 도달하고자 하는 것에 이르게 한다
당신이 자신을 의지해 사느냐 아니면 그리스도를 의지해 사느냐는 매우 중요한 관건이다. 당신이 만약 자신을 의지해 산다면 이는 구원받기 전과 다를 바가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와 분별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을 의지해 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약 그리스도를 의지해 사느냐 혹은 자신을 의지해 사느냐는 전적으로 우리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 선택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기를 소망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 선택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만약 그분을 의지하여 살지 않고 여전히 어려움 속에 머물러 있다면 이것은 이 방 안에 전등이 있으나 스위치를 켜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럴 때 전력회사는 우리를 어떻게 도울 수 없다. 지금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있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기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의지해 사느냐 또는 그리스도를 의지해 살지 않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