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의 꿈


주간말씀 2014-07-27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jacob/52624.html

성경 : 창28:10~22, 요1:51

이번 주 말씀은 벧엘의 꿈에 관한 것입니다.

다 아시는 내용이지만 벧엘의 꿈은 야곱의 꿈입니다. 야곱이 꿈을 꾸고서 그곳을 하나님의 집, 곧 벧엘이라 일컬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야곱이 갑자기 성경에서 제일 의미있는 꿈을 꾸게된 것일까요? 그건 바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갈망을 꿈을 통해 야곱에게 이상으로 보이시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벧엘의 꿈은 야곱의 꿈이자, 하나님의 갈망의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벧엘의 꿈이 왜 하나님의 갈망에 대한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건 창세기 28장의 내용이 바로 요한복음1장에도 같이 언급되면서 요한복음 전체의 내용을 규정할 뿐 만아니라 요한의 글의 결론이자 온 성경의 결론인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인 새예루살렘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즉, 창세기부터 계시록 마지막까지 하나님은 한가지의 꿈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것은 바로 그분 자신의 집을 이 땅 위에 갖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야곱의 꿈 뿐만 아니라 모세를 통해서 장막의 식양을 보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그 장막을 건축하게 하신 것과 신언자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말씀하신 바에도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구약의 경륜이 이 땅 위의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이뤄져 가는 것으로 알 수 있으며 신약에 들어와서는 주 예수님이 실제의 하나님의 성전이셨고 부활 안에서 이 성전을 개인적인 것에서 단체적인 것으로 확장하시는 역사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이 땅 위에 그분 자신의 거처를 갖기를 갈망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를 알지 못하고 그 자신의 축복과 안식과 입지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태중에서 이미 선택하셨고 그 선택은 그분 자신의 갈망을 위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하나님에 의해 창세 전에 선택되었는데 그 선택은 우리 자신의 복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갈망을 따라서 선택된 것입니다.

문제는 야곱이 여전히 이러한 선택을 깨닫지 못하고 그 자신의 축복 만을 추구하는데 있었습니다. 자신의 입지를 위해 태에서 나올 때부터 천연적인 손을 내밀며 책략과 인간적인 방법을 구사하였습니다. 그러고서도 장자권을 얻기 위하여 다급해진 형과 거래를 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야곱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하나님을 향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마도 점점 하늘과 멀어지고 땅만을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야곱에게 역사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지혜롭습니다. 야곱이 그러한 책략과 노력을 하면 할수록 야곱 자신은 더 어려움에 처해지게 되어 급기야 집에서 도망나오게 됩니다. 유숙을 하게될 때에 야곱은 정처가 없었으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하나되어 이 땅에 거처를 얻기를 원하셨지만 야곱은 점점 멀리 나가므로 하나님 자신도 거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그분의 갈망을 야곱에게 꿈으로 계시합니다. 그런데 꿈의 내용은 직접적인 집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다리에 대한 이상입니다. 이 꿈을 꾸고나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으며 그 의미는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꿈의 이상을 보고서는 그것이 집에 대한 하나님의 갈망이었음을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은 물질적인 건축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연합, 신성과 인성의 상호거처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신약의 사도 요한처럼 분명하게 이상을 보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야곱은 자신이 땅에 속한 목적 만을 가지고 살았지만 하늘과 연결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갈망인 것만은 분명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때 비로서 야곱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 자신의 존재를 열어드린 것같습니다. 그 전까지 야곱에게는 하나님이 없었던 것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야곱과 연결되신 것이며 이때로부터 야곱은 지속적으로 하늘(하나님)을 그 자신 안으로 역사할 수 있도록 열게되었을 것입니다.

그 첫번째가 꿈에서 깨고난 뒤의 야곱의 행동입니다. 야곱은 그 자신이 베고 있었던 돌을 세웠습니다. 돌이 처음에는 베게였으나 꿈을 꾸고난 뒤에는 기둥이 되었습니다. 베게는 안식을 위한 것이지만 기둥은 건축을 위한 것입니다. 꿈꾸기 전까지 야곱은 모든 것을 자신의 안식과 만족을 위해서 취했습니다. 그러나 꿈을 꾼 뒤로는 야곱 자신이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기둥이 되어야함을 간증한 것입니다. 물론 기둥은 돌이어야 합니다. 돌은 변화된 인성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러한 간증 뒤에 곧바로 건축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 일생을 통해 변화되어 감으로 건축을 위한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도 교회생활 안에 들어와서도 하나님의 갈망에 대한 이상이 부족하다면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지만 그것이 우리의 안식과 만족 만을 위한 것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에 속한 사다리에 대한 이상을 본 다음에는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리고 체험하는 모든 것은 바로 이 땅에 하나님의 거처를 위한 것이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성분이 우리에게 더해지는 것도 바로 이 거처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영성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렇게 갈망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사람이 된 것도, 그리고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살아내는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집을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집은 다름 아닌 신성과 인성의 연합입니다. 이에 대한 계시는 요한복음에서 더 상세히 나타나있습니다. 먼저는 개인적인 그리스도가 유일한 하나님-사람으로서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장막이셨습니다. 그분의 인성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많은 믿는이들을 포함하여 단체적인 하나님의 집으로 확장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영적 실제를 우리 존재 안에서 더 살아내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 바로 사다리이신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 자신 만을 위해 존재하고 살았으며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심지어는 원수되었던 자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셔서 시간 안에서 우리를 불러 교회 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생활 안에서도 우린 여전히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우리를 위한 하나님, 우리를 위한 교회생활로 살고 있지 않았는지요? 이제 벧엘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갈망에 대한 이상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린 것들을 기둥으로 세워야 합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이 그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늘을 향해 우리의 존재가 열려야 합니다. 그때 하늘의 문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거듭난 영은 하나님의 영과 연합된 영이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서 이 영을 훈련함으로 하늘을 내 존재 안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분으로 우리 자신이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때 하나님의 영원한 갈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이상을 보고 갈망을 가진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사다리가 되실 것입니다. 아멘..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고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함


주간말씀 2014-01-19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jacob/51231.html
말씀
  엡4:13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믿음에서의 하나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온전한 지식에서의 하나에 이르게 하고, 또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게 하며 그리스도의 충만의 신장의 분량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엡3:17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서

 갈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이제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생명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생명입니다.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어떤 일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매사에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금주의 누림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취하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주예수님은 한 분 인격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이 되실 뿐 아니라 인격이시다. 그런데 그분 자신의 인격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의 인격이 되셔야 한다는 말이다. 그분이 내 안에서 나의 인격이 되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시라는 분명한 말씀은 있지만(골3:2) 그분이 우리의 인격이시라는 분명한 말씀은 그다지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에, 그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거하신다는 말씀은 분명하다.(엡3:17)

  우리 집에 가족이 있고 가족이 4명이라면 4명의 인격이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면 내 안에는 2명의 인격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집 안에서 4명이 각자 의견을 말하고 각자 원하는대로 생활한다면 가정 안에서 함께 생활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억압하면서 생활한다고 해도 평온한 하나의 생활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4명이 점차 같은 생각, 같은 선호, 같은 기호, 같은 결정, 같은 생활방식을 가져야 한다. 그럴때 참된 하나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도 우리 안에서 이러한 생활방식을 가지길 원하실 것이다. 이럴 때에 주님은 잠시잠간 우리 안에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게 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어떻게 그분의 거처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마음과 일치될 때이다. 그분의 느낌, 그분의 원함, 그분의 분위기가 내 안에서 형성될 때에 그분은 비로소 내 안에서 거처를 가지시게 된다.  우리 가족들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다른 이웃들이 한 장소에 모여있다고 하여서 우리는 함께 거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웃들이 모두 돌아가고 가족들 끼리만 남았을 때에 비로소 안식하고 편안히 지낼 수 있게 된다. 왜 그런가? 가족들이 대개는 거의 같은 분위기와 기호와 뜻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와 우리 사이는 다만 가족들 간의 친밀감 만으로는 부족하다. 주님은 그분 자신의 인격의 특성(개성?)이 곧 우리의 인격 안에 있기를 원하시고 그때서야 비로소 안식하시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그런 상태가 내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는가? 부부가 오래토록 생활하면 서로 닮는다고 하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오래된 부부일 수록 동의할 것이다. 심지어 어떤 아내는 자신의 남편을 위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하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그 자신도 그런 음식을 비로소 좋아하게되는 경우도 있다.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추구함으로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분은 자꾸 접촉할 때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 두 인격이 계속 접촉할 때에 뭔가가 일어난다. 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다지 내적인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끼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주님을 실제로 접촉하고 인격과 인격으로 만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가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매우 시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왕을 사랑하는 처녀가 있었다. 그 처녀는 원래는 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사랑이 처녀로 하여금 왕을 사모하고 추구하게 하였으며 그러한 추구로 인해 그 처녀는 왕을 개인적이고 친밀하게 접촉하도록 이끌렸다. 이러한 접촉이 일어날 수록 처녀는 그 왕을 더 사모하게 되었고 이끌리게 되었다. 이럴 때에 처녀는 변화가 있게된다. 그 변화는 천연적인 기질과 성품을 점차 변화시켜 왕에게 어울리는 인격을 가지도록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왕의 인격을 가진 처녀인 술람미가 되도록 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을 영원한 생명으로 영접하였지만 그 생명은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생명이 아니라 아들이신 분인 것이다. (요일5:11,12) 따라서 생명을 얻고 누리고 자라는 면에서는 그분이 생명이시지만 우리 안에서 사시며 우리와 접촉하고 교통하는 분으로서 그분은 한 인격이시다. 이제 이분이 우리 안에서 사시면서 우리는 다른 인격인 그분과  접촉하게 된다. 더 강한 인격이신 그분과 접촉이 이루어질 때마다 그분의 선호와 기호와 맛과 분위기가 우리에게 침투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분을 거절할 수도 있다. 그럴 때에는 그분이 우리 안에서 거처를 얻지 못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 속 존재를 그분께 거처로 내어드릴 때, 즉 그분이 우리 안에서 자유함을 가지실 때에는 분명 그러한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점차 그분으로 변화된다. 아들화될 것이다. 마치 시골처녀가 솔로몬 왕과 같이 되어 술람미가 된 것 처럼...

  이렇게 되면 표현에 있어서 우리의 생활방식이 바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새사람이다. 이러한 새사람은 단체적인 사람이므로 곧 한 새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새사람이 되는 것은 밖의 생활을 곧바로 만져서 바꾸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안에서 인격과 인격이 접촉되어 우리의 원래의 인격이 유일한 인격이신 그분의 인격으로 바뀌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인격의 대치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인격 안에서 그분의 인격의 모든 특질로 채워지고 심지어 우리 자신의 인격이긴 하지만 그분으로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분으로서 우리 자신이 사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그러한 인격과 생활을 가진다면 우리 모두는 아무런 차이도 없을 것이며 아무런 독특함(괴퍅함, 괴상함)도 없을 것이다. 이때에 우리는 여러 사람이지만 한 사람처럼 살고 행동하고 말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단체적이 하나님-사람들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최초의 하나님-사람이셨다. 하나님이셨던 분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살아내셨다. 하나님으로서 사신 사람이셨다. 이제 우리는 사람이었지만 한 분 인격, 바로 이 하나님-사람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가지고 오셨다. 이제 우리 안에 하나님 자신이신 이 생명이 거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사람들이다. 주 예수님이 첫번째 하나님-사람으로서 본을 세우셨다. 그분의 인간 미덕들 안에서 신성한 속성들을 살아 나타내 보이셨다. 사람이셨지만 사람의 천연적인 생명과 생활은 없으셨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살아내셨다. 우리의 생활도 그러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가?  물론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으로 인해 우리가 아무런 일을 하지 않더라도 우린 이미 하나님-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표현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시는 것도 없다. 어떻게 해야하는가? 주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그분의 죄없고 깨끗한 인성 조차도 거절하셨다. 그분은 그분의 죄없는 육체 조차도 장사지내기에 합당한 것으로만 여겼다. (마3:15) 게다가 그분 자신은 한 차례의 침례만 거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인간생활 전체가 침례 아래에서 생활하신 것이었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부터 그분 자신을 죽음에 넘기우고 침례 즉, 장사지내기 합당한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서 처신하였다. 이러한 생활의 당연한 결과는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를 의뢰하였고 아버지와 교통하였고 아버지와 접촉을 통해서 생활하고 일하셨다. 심지어는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조차도 그분은 아버지와 교통하고 계셨던 것이다. (마11:25) 

  따라서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영접한 사람인 우리도 우리 자신의 천연적인 생명과 기질들을 장사지내기에 합당한 것으로 여겨 전혀 의지하거나 드러내지 않는다면 자연적으로 기도의 사람이 될 것이다. 기도의 사람으로서 우리는 항상 주님이 필요함을 깨닫고 그분께 나아가고 그분께 묻고 그분의 어떠함을 따라 생활하고 나타날 것이다.


에베소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경륜


주간말씀 2011-06-19 / 추천수 1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jacob/30422.html

하나님의 경륜, God's Economy

단어 하나하나는 쉬운 말인데 굉장히 머리에 안들어오는 말이다

그러나 곰곰히 따져보면 그리 어렵지만도 않다

경륜은 영어로 경제, 즉 Economy이다

economy는 그 어원이 그리스어로 oikos (House)와  Nomos (Law)의 합성어다

말그대로 하자면 가정통치, 가정관리, 가정경영이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부유한 집안에서는 식솔들이 꽤많았다.

혈통상의 직계 외에 친족들, 그리고 클리엔테스 (요즘 용어로 Client)들도 함께 있었으니

상류 귀족집안이라면 수백명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가정에서는 일종의 행정과 경영을 겸하는 가정관리, 가정통치가 필요했고

이는 하나님에게 많은 자녀들이 있고

온 우주를 돌보셔야하는 것으로 보면 Economy는 그 기원이 God's Economy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성경 안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딤전1:4)에 대하여 이해하기란 쉽지 않지만

가장 세밀하고도 정교하게 계시하는 책이 있으니 바로 에베소서이다.

왜냐하면 에베소서의 주제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인데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안에서 기뻐하시는 뜻이 있으신대 그것은 바로 많은 아들들을 얻는 것이다 (엡1:5)

인간의 예로 말하자면 우리가 뭔가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 속에서 기쁨이 넘쳐나는 대상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에게도 영원 안에서부터 그분은 많은 아들들을 얻으시고 그 아들들을 통해 영광을 얻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러한 기뻐하심, 갈망이 있으셔서 그분은 뜻을 세우셨다. 이것이 그분의 뜻의 기쁨(엡1:5)이다.

이 뜻은 하나님이 어떤 의도를 가지게 되셨다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목적이 된다.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계획을 세우시고 계획에 따른 안배를 가지게 되시는데

이러한 계획과 안배의 수행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이다.(엡1:4~6)

 

하나님의 선한 기뻐하심의 대상인 많은 아들들을 얻기 위하여는

하나님 그분 자신을 사람 안으로 역사해 넣으실 필요가 있다.

이때에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이다.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물려받은 존재는 바로 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뜻의 기쁨을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사람 안으로 역사해 넣으셔서

그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이 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정 안에서의 가정행정, 가정관리인 것이다.

 

이제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분 자신을 사람들 안으로 역사해 넣으시고

그 결과로 하나님은 무엇을 산출하고 얻으시는지를 볼 것이다.

 

에베소서의 매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의 적용을 위한 키워드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바로 영이다. 특히 사람의 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이 한 영된 연합된 영을 보게된다.

이것이 왜 하나님의 경륜에 있어 관건적이냐하면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계시를 받는 것도 이 연합된 영이요 (엡1:17)

하나님의 거처로서 하나님을 인간존재 안으로 담아내는 것도 이 연합된 영이요 (2:22)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존재에서 거처를 정하시고 점유하시는 것도 (3:16)

우리 혼의 대표인 생각이 새롭게 되도록 생각 안으로 흘러들어가는 것도(4:23)

내적으로 외적으로 충만케되어 하나님을 표현하는 생활을 하게 하는 것도(5:18)

그리고 하나님의 대적에 대항하기 위한 기도와 말씀의 수단도 (6:18)

모두 이 연합된 영 안에서, 연합된 영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분배하심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 안에 있는 이 연합된 영(이미 하나님의 영과 한 영된)을 인식하고 사용하고 훈련해야하며

이를 통해서만이 우리 사람이 하나님을 내적 존재 안으로 더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린 에베소서의 매 장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그분 자신을 믿는 이들 안으로 분배하시는 것을 보게된다.

에베소서 1장에서는 

아버지는 영원 안에서 믿는 이들을 선택하고 예정하셨으며

아들은 시간 안에서 아버지께서 선택하고 예정한 그들을 구속하셨으며

그 영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루신 것들의 보증으로서 우리의 내적 도장이 되신다.

이때 아버지의 선택과 예정, 아들의 구속이 우리 내적 존재 안으로 인쳐짐으로

새겨지고 적용되고 우리 존재와 하나되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유대인과 신약의 믿는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그 영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규례와 종교와 문화 등으로 나뉘어지고 원수되었던 무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사람으로 창조하시어

근원과 기원이신 아버지께로 되돌려지고 아버지께 참여하는 것을 보는데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두 삼일하나님-아버지,아들,그영 안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3장에서는

아버지께서 그 영을 통하여 능력으로 우리 속사람을 강화시키셔서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내적존재 안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도록 하는데

이는 삼일하나님의 우리 안으로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우리들이 모두 하나님의 충만이 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3:19)

하나님의 충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밖으로까지 흘러넘치는 것이다.

즉 우리 사람이 하나님을 속존재 안으로 채워서 밖의 표현으로까지 넘쳐나는 것인데

이는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한 몸안으로 함께 연합되어

이 한 몸 안에서 삼일하나님과 믿는 이들이 하나의 실체가 되는 것이다.(4:4~6)

할렐루야!

삼일하나님과 믿는이들이 한 실체가 되다니....

모든 영적 근원이자 기원이신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믿는 것을 통하여

그 영의 부르심으로 우린 다 삼일하나님 안으로 연합된 것이다.

이 연합된 실체가 바로 한 몸이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에베소서 1장부터 4장까지의 역사의 결과로서

영 안에서 충만해지고(5:18)

주님께 노래하고(5:19)

아버지께 감사하는(5:20) 생활을 살게되는데

이것이 바로 삼일하나님의 분배하심을 받아

하나님을 내적으로 체험하고

하나님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삶이다.

 

에베소서 6장은 에베소서 5장의 생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우리의 대적에 대해서 깨어 대적하고 전투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 믿는이들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 이러한 전투를 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삼일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

즉, 아들 하나님이신 주님 안에서 굳세게 되고(6:10)

아버지 하나님의 예비하신 완전한 전투장비, 전신갑주를 취하되(6:14~16)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그 영의 검을 사용해야 한다. (6:17)

 

이렇게 1장부터 6장까지에서 보면

삼일하님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체험한 우리 믿는이들은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이요(1:23)

하나님의 걸작품인 한 새사람이요(2:10,15)

삼일하나님의 충만이요(3:19)

삼일하나님과 한 실체로 연합된 한 몸이요(4:4)

그리스도의 만족을 위한 그리스도의 신부요(5:25,32)

끝으로 하나님의 대적을 패배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전사가 된다(6:13~17)

 

이것이 이 시대에서는 교회이요

영원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다.

많은 아들들을 얻어서 이것을 이루시기를

하나님은 영원전에서부터 기뻐하셨던 갈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