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창28:10~22, 요1:51
이번 주 말씀은 벧엘의 꿈에 관한 것입니다.
다 아시는 내용이지만 벧엘의 꿈은 야곱의 꿈입니다. 야곱이 꿈을 꾸고서 그곳을 하나님의 집, 곧 벧엘이라 일컬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야곱이 갑자기 성경에서 제일 의미있는 꿈을 꾸게된 것일까요? 그건 바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갈망을 꿈을 통해 야곱에게 이상으로 보이시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벧엘의 꿈은 야곱의 꿈이자, 하나님의 갈망의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벧엘의 꿈이 왜 하나님의 갈망에 대한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건 창세기 28장의 내용이 바로 요한복음1장에도 같이 언급되면서 요한복음 전체의 내용을 규정할 뿐 만아니라 요한의 글의 결론이자 온 성경의 결론인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인 새예루살렘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즉, 창세기부터 계시록 마지막까지 하나님은 한가지의 꿈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것은 바로 그분 자신의 집을 이 땅 위에 갖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야곱의 꿈 뿐만 아니라 모세를 통해서 장막의 식양을 보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그 장막을 건축하게 하신 것과 신언자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말씀하신 바에도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구약의 경륜이 이 땅 위의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이뤄져 가는 것으로 알 수 있으며 신약에 들어와서는 주 예수님이 실제의 하나님의 성전이셨고 부활 안에서 이 성전을 개인적인 것에서 단체적인 것으로 확장하시는 역사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이 땅 위에 그분 자신의 거처를 갖기를 갈망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를 알지 못하고 그 자신의 축복과 안식과 입지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태중에서 이미 선택하셨고 그 선택은 그분 자신의 갈망을 위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하나님에 의해 창세 전에 선택되었는데 그 선택은 우리 자신의 복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갈망을 따라서 선택된 것입니다.
문제는 야곱이 여전히 이러한 선택을 깨닫지 못하고 그 자신의 축복 만을 추구하는데 있었습니다. 자신의 입지를 위해 태에서 나올 때부터 천연적인 손을 내밀며 책략과 인간적인 방법을 구사하였습니다. 그러고서도 장자권을 얻기 위하여 다급해진 형과 거래를 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야곱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하나님을 향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마도 점점 하늘과 멀어지고 땅만을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야곱에게 역사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지혜롭습니다. 야곱이 그러한 책략과 노력을 하면 할수록 야곱 자신은 더 어려움에 처해지게 되어 급기야 집에서 도망나오게 됩니다. 유숙을 하게될 때에 야곱은 정처가 없었으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하나되어 이 땅에 거처를 얻기를 원하셨지만 야곱은 점점 멀리 나가므로 하나님 자신도 거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그분의 갈망을 야곱에게 꿈으로 계시합니다. 그런데 꿈의 내용은 직접적인 집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다리에 대한 이상입니다. 이 꿈을 꾸고나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으며 그 의미는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꿈의 이상을 보고서는 그것이 집에 대한 하나님의 갈망이었음을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은 물질적인 건축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연합, 신성과 인성의 상호거처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신약의 사도 요한처럼 분명하게 이상을 보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야곱은 자신이 땅에 속한 목적 만을 가지고 살았지만 하늘과 연결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갈망인 것만은 분명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때 비로서 야곱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 자신의 존재를 열어드린 것같습니다. 그 전까지 야곱에게는 하나님이 없었던 것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야곱과 연결되신 것이며 이때로부터 야곱은 지속적으로 하늘(하나님)을 그 자신 안으로 역사할 수 있도록 열게되었을 것입니다.
그 첫번째가 꿈에서 깨고난 뒤의 야곱의 행동입니다. 야곱은 그 자신이 베고 있었던 돌을 세웠습니다. 돌이 처음에는 베게였으나 꿈을 꾸고난 뒤에는 기둥이 되었습니다. 베게는 안식을 위한 것이지만 기둥은 건축을 위한 것입니다. 꿈꾸기 전까지 야곱은 모든 것을 자신의 안식과 만족을 위해서 취했습니다. 그러나 꿈을 꾼 뒤로는 야곱 자신이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기둥이 되어야함을 간증한 것입니다. 물론 기둥은 돌이어야 합니다. 돌은 변화된 인성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러한 간증 뒤에 곧바로 건축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 일생을 통해 변화되어 감으로 건축을 위한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도 교회생활 안에 들어와서도 하나님의 갈망에 대한 이상이 부족하다면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지만 그것이 우리의 안식과 만족 만을 위한 것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에 속한 사다리에 대한 이상을 본 다음에는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리고 체험하는 모든 것은 바로 이 땅에 하나님의 거처를 위한 것이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성분이 우리에게 더해지는 것도 바로 이 거처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영성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렇게 갈망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사람이 된 것도, 그리고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살아내는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집을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집은 다름 아닌 신성과 인성의 연합입니다. 이에 대한 계시는 요한복음에서 더 상세히 나타나있습니다. 먼저는 개인적인 그리스도가 유일한 하나님-사람으로서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장막이셨습니다. 그분의 인성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많은 믿는이들을 포함하여 단체적인 하나님의 집으로 확장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영적 실제를 우리 존재 안에서 더 살아내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 바로 사다리이신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 자신 만을 위해 존재하고 살았으며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심지어는 원수되었던 자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셔서 시간 안에서 우리를 불러 교회 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생활 안에서도 우린 여전히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우리를 위한 하나님, 우리를 위한 교회생활로 살고 있지 않았는지요? 이제 벧엘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갈망에 대한 이상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린 것들을 기둥으로 세워야 합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이 그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늘을 향해 우리의 존재가 열려야 합니다. 그때 하늘의 문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거듭난 영은 하나님의 영과 연합된 영이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서 이 영을 훈련함으로 하늘을 내 존재 안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분으로 우리 자신이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때 하나님의 영원한 갈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이상을 보고 갈망을 가진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사다리가 되실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경륜, God's Economy
단어 하나하나는 쉬운 말인데 굉장히 머리에 안들어오는 말이다
그러나 곰곰히 따져보면 그리 어렵지만도 않다
경륜은 영어로 경제, 즉 Economy이다
economy는 그 어원이 그리스어로 oikos (House)와 Nomos (Law)의 합성어다
말그대로 하자면 가정통치, 가정관리, 가정경영이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부유한 집안에서는 식솔들이 꽤많았다.
혈통상의 직계 외에 친족들, 그리고 클리엔테스 (요즘 용어로 Client)들도 함께 있었으니
상류 귀족집안이라면 수백명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가정에서는 일종의 행정과 경영을 겸하는 가정관리, 가정통치가 필요했고
이는 하나님에게 많은 자녀들이 있고
온 우주를 돌보셔야하는 것으로 보면 Economy는 그 기원이 God's Economy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성경 안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딤전1:4)에 대하여 이해하기란 쉽지 않지만
가장 세밀하고도 정교하게 계시하는 책이 있으니 바로 에베소서이다.
왜냐하면 에베소서의 주제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인데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안에서 기뻐하시는 뜻이 있으신대 그것은 바로 많은 아들들을 얻는 것이다 (엡1:5)
인간의 예로 말하자면 우리가 뭔가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 속에서 기쁨이 넘쳐나는 대상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에게도 영원 안에서부터 그분은 많은 아들들을 얻으시고 그 아들들을 통해 영광을 얻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러한 기뻐하심, 갈망이 있으셔서 그분은 뜻을 세우셨다. 이것이 그분의 뜻의 기쁨(엡1:5)이다.
이 뜻은 하나님이 어떤 의도를 가지게 되셨다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목적이 된다.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계획을 세우시고 계획에 따른 안배를 가지게 되시는데
이러한 계획과 안배의 수행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이다.(엡1:4~6)
하나님의 선한 기뻐하심의 대상인 많은 아들들을 얻기 위하여는
하나님 그분 자신을 사람 안으로 역사해 넣으실 필요가 있다.
이때에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이다.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물려받은 존재는 바로 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뜻의 기쁨을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사람 안으로 역사해 넣으셔서
그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이 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정 안에서의 가정행정, 가정관리인 것이다.
이제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분 자신을 사람들 안으로 역사해 넣으시고
그 결과로 하나님은 무엇을 산출하고 얻으시는지를 볼 것이다.
에베소서의 매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의 적용을 위한 키워드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바로 영이다. 특히 사람의 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이 한 영된 연합된 영을 보게된다.
이것이 왜 하나님의 경륜에 있어 관건적이냐하면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계시를 받는 것도 이 연합된 영이요 (엡1:17)
하나님의 거처로서 하나님을 인간존재 안으로 담아내는 것도 이 연합된 영이요 (2:22)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존재에서 거처를 정하시고 점유하시는 것도 (3:16)
우리 혼의 대표인 생각이 새롭게 되도록 생각 안으로 흘러들어가는 것도(4:23)
내적으로 외적으로 충만케되어 하나님을 표현하는 생활을 하게 하는 것도(5:18)
그리고 하나님의 대적에 대항하기 위한 기도와 말씀의 수단도 (6:18)
모두 이 연합된 영 안에서, 연합된 영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분배하심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 안에 있는 이 연합된 영(이미 하나님의 영과 한 영된)을 인식하고 사용하고 훈련해야하며
이를 통해서만이 우리 사람이 하나님을 내적 존재 안으로 더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린 에베소서의 매 장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그분 자신을 믿는 이들 안으로 분배하시는 것을 보게된다.
에베소서 1장에서는
아버지는 영원 안에서 믿는 이들을 선택하고 예정하셨으며
아들은 시간 안에서 아버지께서 선택하고 예정한 그들을 구속하셨으며
그 영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루신 것들의 보증으로서 우리의 내적 도장이 되신다.
이때 아버지의 선택과 예정, 아들의 구속이 우리 내적 존재 안으로 인쳐짐으로
새겨지고 적용되고 우리 존재와 하나되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유대인과 신약의 믿는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그 영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규례와 종교와 문화 등으로 나뉘어지고 원수되었던 무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사람으로 창조하시어
근원과 기원이신 아버지께로 되돌려지고 아버지께 참여하는 것을 보는데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두 삼일하나님-아버지,아들,그영 안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3장에서는
아버지께서 그 영을 통하여 능력으로 우리 속사람을 강화시키셔서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내적존재 안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도록 하는데
이는 삼일하나님의 우리 안으로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우리들이 모두 하나님의 충만이 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3:19)
하나님의 충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밖으로까지 흘러넘치는 것이다.
즉 우리 사람이 하나님을 속존재 안으로 채워서 밖의 표현으로까지 넘쳐나는 것인데
이는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한 몸안으로 함께 연합되어
이 한 몸 안에서 삼일하나님과 믿는 이들이 하나의 실체가 되는 것이다.(4:4~6)
할렐루야!
삼일하나님과 믿는이들이 한 실체가 되다니....
모든 영적 근원이자 기원이신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믿는 것을 통하여
그 영의 부르심으로 우린 다 삼일하나님 안으로 연합된 것이다.
이 연합된 실체가 바로 한 몸이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에베소서 1장부터 4장까지의 역사의 결과로서
영 안에서 충만해지고(5:18)
주님께 노래하고(5:19)
아버지께 감사하는(5:20) 생활을 살게되는데
이것이 바로 삼일하나님의 분배하심을 받아
하나님을 내적으로 체험하고
하나님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삶이다.
에베소서 6장은 에베소서 5장의 생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우리의 대적에 대해서 깨어 대적하고 전투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 믿는이들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 이러한 전투를 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삼일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
즉, 아들 하나님이신 주님 안에서 굳세게 되고(6:10)
아버지 하나님의 예비하신 완전한 전투장비, 전신갑주를 취하되(6:14~16)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그 영의 검을 사용해야 한다. (6:17)
이렇게 1장부터 6장까지에서 보면
삼일하님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체험한 우리 믿는이들은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이요(1:23)
하나님의 걸작품인 한 새사람이요(2:10,15)
삼일하나님의 충만이요(3:19)
삼일하나님과 한 실체로 연합된 한 몸이요(4:4)
그리스도의 만족을 위한 그리스도의 신부요(5:25,32)
끝으로 하나님의 대적을 패배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전사가 된다(6:13~17)
이것이 이 시대에서는 교회이요
영원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다.
많은 아들들을 얻어서 이것을 이루시기를
하나님은 영원전에서부터 기뻐하셨던 갈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