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서 워치만니에의해 구원받은 우요치의 간증


워치만니 2024-09-2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4331.html

1963년워치만니는 상해 티란차오감옥에서 우요치형제와 같은 감방에 있게 되었다. 우요치형제는 워치만니가 투옥중에 구원시킨 유일한 사람이다.감옥에서 워치만니에게 어떤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알수 없었지만 우요치형제가 풀려난후 감옥에서의 워치만니에 관한 감옥생활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나는 상해에서 왔습니다. 나는 전에 교사였습니다.

1960년에 나는 모택동의 어떤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7년 형을 받아 투옥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극동에서 가장 큰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1963년에 나는 내가 니 아저씨라고 부르던 워치만니 형제님과 같은 방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워치만니 형제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감옥은 열 개의 건물로 되어있는 아주 큰 감옥이었습니다.

각 건물이 6층으로 되어 있었고 각 층에 90개의 감옥이 있었습니다.

한 방에 3명씩 들어간다면 1620명이 한 건물에 들어갈 수 있는 큰 감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만 명 이상이 있는 그렇게 커다란 감옥에서 그렇게 긴 기간

어떤 사람과 함께 투옥되어 함께 있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세 번째 건물에 감금되었을 때 니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나는 그분과 9년 동안 함께 있었습니다. 9년 중에 2년 동안은 우리가 따로 있었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이를 인해 주님께 감사합니다.

워치만니형제님이 주님께 가시기 이틀 전까지 나는 워치만니와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삼 년 전에 내가 처음으로 어느 형제님을 상해에서 만났을 때,

나는 그 형제님에게, 주님을 사랑한 워치만니형제님이

왜 그러한 고난을 받아야 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그 형제님의 말을 듣고

이것이 워치만니의 사역이라는 것을, 고난의 사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워치만니는 그렇게 고난을 받았지만 그분의 사역은 이제 온 땅에 퍼져 있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했지만 주님을 극도로 얻으셨습니다.

그분이 주님을 반사함으로 우리 모두가 주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질그릇이었지만 그분 속에는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배가 있었습니다.

형제 자매님들이여, 내가 직접 간증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정말 견딜 수 없는 모든 고난을 워치만니는 통과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몇 가지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두 번 째로 만난 곳은 안후이성에 있는 바이마오링 강제 노동 수용소 이었는데,

그때 워치만니은 몸이 아주 약해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아 간신히 걸을수 있었습니다.

.

우리가 기거한 곳은 감옥 식당에서 60미터 내지 7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워치만니는 걷지도 못할 만큼 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걸어서 식당에 가서 식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세끼 음식을 가져다 주었 습니다.

어느 날 간수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왜 매일 워치만 니에게 음식을 갖다 주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분은 나이가 많고 약해서 그렇게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2층에 가서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간수는 엄한 얼굴을 하면서 "당치도 않는 말을 하지 마시오"그는 아픈척을 하는 것이오..

스스로 음식을 가져가라고 하시오. 당신은 "다시는 그렇게 하지마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워치만니형제님을 괴롭히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받으러 갔을 때 부엌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아무도 워치만 니를 위해 음식을 받아가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않습니다.

워치만 니가 직접 와서 먹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어 그냥 돌아가서 워치만니 에게 그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분은 아주지혜롭과 인자하신 분이셨습니다.

나는 워치만니가 어떤 좋은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이 좀 생각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결국 그분은 말했습니다.

“그냥 두십시오. 나는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그때 화가 났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하실까? 식사를 안하시겠다는 말인가?’

처음에 나는 그분께 따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합당치 않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그분과 따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음식을 조금 그분께 나누어 드렸습니다.

갑자기 나에게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데,

내가 일을 더 많이 하면 식사를 조금 더 받을 수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점심으로 주는 다섯개의 밥 덩어리 중에서

한 덩어리를 더 받아 여섯 덩어리 중에서 두 덩어리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니 형제님은 두 덩어리만 드셔도 양이 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우리 둘이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1971년 어느날 간수가 나에게 가족들에게서 온 편지를

워치만니 형제님에게 갖다 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편지를 갖다드렸는데,

그 내용은 워치만니 형제님의 부인이 의자에서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니 형제님이 상해로 가서 부인을 방문하도록 허락을 받을 수 있도록 자청해서

니 형제님과 함께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사실상 우리 둘 다 형기를 마쳤기 때문에 더 이상 죄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규정에 의하면 우리는 매년 2주 동안 가족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66년에 일어난 문화혁명 때문에

모든 범죄자들은 가족을 방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족에게 그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분을 보내 주어야 했습니다.

처음에 간수는 “고려해 보게네.”라고 말하였습니다,

나중에는 “당신은 심장병을 앓고있고. 심지어 잘걷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상해에 갈 수 있겠소.”라고 물었습니다.

니 형제님은 그들에게 나와 함께 가면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반 달 동안 기다렸습니다. 다시 간수에게 가서 물었을때.

간수는 우리에게 심각한 얼굴로 말했습니다.“당신은 뭘할수있겠소 당신은 의사도 아니지 않소. 게다가 당신의 아내는 이제 괜 찮아지고 있는 중이오.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소. 우리는 당신의 요청을 고려했지만 승인하지 않을 것이오.워치만니 형제님은 따지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제가 그들과 말다툼을 하려는 것도 막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감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기도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분이 기도하는 것을 보고

“저 사람 지금 기도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니요, 저 분은 기도하는 게 아니라

입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간수가 니 형제님이 기도하는지 조사하러 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니 형제님은 기도하지 않고는 하루도 보낸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내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는 니 형제님이 눈물을 흘리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부인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니 형제님은 아주 슬퍼하셨습니다.

나는 힘을 다해 위로하며 또다시 요청해 보자고 격려했습니다.

“장례식이라도 참석하게 상해에 가 봅시다.” 이번에는 허가를 해 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래동안 기다려도 여전히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간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그녀는 이미 죽었소 당신이 간다고 무엇을 할수 있겠소?”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이여, 누가 이보다 더 고통스럽겠습니까?

워치만니 형제님의 마음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주님을 바라보았고 주님안에서 견고히 섰습니다. 그는 모든것을 견뎠습니다.

며칠후 그분은 약해 지셨고, 체중이 줄어들었고, 9개월 후에 바이원산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은 안후이성 동쪽의 변두리에 있습니다.결국 심장병이 있는 워치만니는 경운기 옆에 나란히 않은채 우리에게 작별을 고 했습니다. 삼일후에 우리는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말했습니다.

"요치 자네가 감옥에서 플려나면 위트니스리를 찻아가게.그리고 그에게 나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해주게. 그에게 여기에서의 나에 모든 상황에 대해 말해주게. 자네가 그를 보는 것이 곧 나를 보는 것일세. 그가 자네에게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내가 자네에게 하는 말일세. 자네가 그에게 자네를 돌봐 달라고 요청하며 그는 분명히 자네를 내 아들처럼 보살펴 줄 걸세".



공산치하에서(1950-1972)워치만니의 고난과순교


워치만니 2024-09-2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4330.html

공산치하에서 워치만니의 연대별 고난과 박해

1949년5월 모택동의 팔로군은 북경과 남경과 상해를점령하고 10.1일 천안문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선포하였다.

1948 년 11월 상해 긴급동역자집회

고령산 훈련은 이러한 불안한 정세를 배경으로한 때 였다.워치만니는 칼막스와 엥겔스를 읽었으므로 공산주의 자들은 일본과 매우 다르게 나올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마르크스 주의 하에서의 기독교신앙에 대한 상태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믿었다. 교회는 주님을 섬길 자유를 갖지 못할 것이며 전체적인 박멸이 올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워치만니는 중국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하늘에서 보이신 이상과 사명을 갖고 있었다. 장개석 과 그의 각료들은 퇴각할지 모르나 하나님의 교회는 그럴케 할수 없었다.그러므로 1948년 11월 워치만니는 상해에서 긴급 동역자 집회를 소집했다. 그것은 우리가 머물러야 할것인가 떠나야 할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와 먼저 교통을 나누지 않고 오히려 우리 모두가 정세를 알기 때문에 위트니스리 형제님은 반드시 중국 대륙을 떠나야 한다고 알렸다.

워치만니는 위트니스리에게 형제님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반드시 대만으로 가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것은 엄숙한 순간 이었다. 거의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약간의기도가 있은 다음 워치만니 형제님은 우리는 이일을 주님앞에 가져가서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봅시다. 라로 말하면서 끝맺었다. 그것이 하나의 결정이 되었다.

중국 북부의 정세 변화로 인해 워치만니 형제님은 주의 회복의 확장을 위해 청도에 있는 장오신 형제와 손풍로 형제와 유효량 형제 등을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대만으로 이주해야 한다고 위트니스리와 교통했다. 우리 두 사람은 그 형제들에게 이러한 결과가 담긴 전보를 보내 주었다.동역자 집회를 마치고서 워치만니 형제님은 여전히 위트니스리에게 상해에 머물면서 새 집회소의 건축을 감독하라고 분부했다.

1949년 2월 두번째 상해 긴급동역자집회의 시작에서 떠날 것인가 머물 것인가에 대해 교통을 나누었다. 집회 서두에서 워치만니형제님은 지 난번 집회에서 선포했던 말을 반복했는데 그 내용은 위트니스가 반드시 중국대륙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워치만니는 얼마동안 기도한후, 이번에는 모든 남은 사람들에게 그의 느낌을 말했다. 워치마니는 자신과 함께 동역하는 형제들은 반드시 주님의 일을위해 남아서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집회를 마치고 워치만니 형제님과 위트니스리는 함께 산보를 했다. 나는 워치만니 형제님께 “왜 형제님은 나를 반드시 중국대륙을 떠나야 하고. 형제님과 다른 사람들은 남아서 사역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결정했습니까.” 라고 물었다

워치만니 형제님의 설명은 이러했다. “형제님,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주님을 신뢰해야만 하지만. 그러나 어느날 원수가 우리 모두를 일소 할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 일이 발생한다면 형제님이 중국 밖으로 나가 있을때. 우리 중 뭔가 남아있을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님은 반드시 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때 워치만니 형제님과 나는 대북에 있는 조정희, 장오신, 손풍로, 유효량, 장유란 형제들에게 그곳의 교회의 온전한 건축을 위해 그들을 그곳의 장로들로 세운다는 편지를 썼다. 후에 나는 새 집회소의 건축을 완성하려고 상해에 머물렀고.워치만니 형제님은 제2기 훈련을 갖기 위해 복주로 갔다.

1949년 4월 나는 훈련센타에 있는 워치만니 형제님으로 부터 상해의 모든 책임을 그 지방 인도자들에게 맡기고.즉시 그가 있는 곳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나는 그렇게 했다.복주에 도착한 후 훈련 센타에 머문 지 얼마 안되어 나는 정세의 변화로 대만에 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것이 1949년 5월의 일이었다.

1950년 3월12일 워치만니는 홍콩에서 상해로 돌아감.

1950년 초, 워치만 니 형제는 홍콩으로 왔고. 오래지 않아 위트니스 리(Witness Lee) 형제도 왔다. 하나님의 이 두 종이 동시에 (한지방)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한다는 것은 정말 자주 있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 집회에 축복이 있었다.원래는 300여 명이 모이던 집회가 단 시일 내에 삼천 명으로 증가되었다. 이것이 홍콩 교회의 첫 번째 대부흥이었다.

얼마 후 워치만니 형제는 귀국을 준비했다 그 때 시국( 時局 )은 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모두 그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 때 워치만니 형제의 돌아가려는 의지는 참으로 굳은 것이었다.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에 가기 전에 그곳에 묶임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지만.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갔던 것이다.

나는 워치만 니 형제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가를 느꼈다. 그의 마음은 무거웠으나 워치만니는 주님과 같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자기를 기다리는 것들을 두려워 하지 않고 그것들을 향해 갔던 것이다.

나는 워치만니 형제님이 대륙으로 돌아가는 일을 매우 염려했기 때문에 어느날 그 와 이 일에 관해 긴 교통을 가졌다. 그는 나에게 “대륙에 그렇게 많은 교회들이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그들을 돌보기 위해 반드시 돌아가야하고 주님의 간증을 위해 그들과 함께 서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한 어머니가 집에 불이 난 것을 알면서도 그녀 자신은 집 밖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면. 그녀는 어떻게 된것입니까.분명 위험한 줄을 알면서도 그 집안으로 뛰어들지 않겠습니까. 비록 내가 돌아가면 위험이 따르고 박해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곳에 아직 많은 형제자매들이 있는데 내가 어찌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워치만니 형제님은 다른 사람들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삼월중순 어는날 그의 처남 장의륜 형제에게 그를 기차역가지 배웅해주도록 부탁하고 대륙을 향해 떠났다. 그는 이것을 아무에게 도 알리지 않았었다. 얼마후 4월1일에 나는 대북으로 돌아갔다.그것이 내가 그를 마자막으로 본 때였다. 그후로 우리는 서신 왕래도 없었고 다시 서로 대면하지도 못했다. 우리는 그가 주님께 갈때까지 다만 그의 친척으로 부터 그에 관한 소식을 간접적으로 들었을 뿐이다.-위트니스 리-

1950년10월부터 중국공산당의 반혁명세력 진압운동이 시작됨.

1951년 1월.1일 워치만니는 신년메세지로 빵의기적에 대한메세지를 전함.

1951년초 상해의 신작로는 종이 깃발과 커다란 적색 명주천을 휘날리는 노동자들과 젊은이들의 행렬로 부산하였다. 북치는 소리와 슬로건의 외침에 따라 거대한 모택동의 초상화 앞에서 춤추었다.공장과 가정에는 혁명위원회가 조직되고. 열성당원들에 의해 사람들에 대한 조사가 있어 사생활이 침해되고.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신고했다. 그리고 비밀 경찰들이 수집한 정보는 “인민의 부를 파먹은 자본 주의자” 들이라고 하여 수색하여 처단시키고 있었다. 그러한 환경속에서 기독교 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높은 수준의 믿음과 용기가 필요 하였다,

1951년5월2일 천풍지(삼자운동 당기관지) 에는 중국에 있는 교회들에게 고발회의 참여 하도록 소환장을 냈다.그리고 전 회중에게 자아비판과 개혁을 하라는 강력한 설득이 있었다.그리스도인들은 정치 집회에 참여하여 배워서 그들의 무관심을 극복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을 교육 시키기 위하여 고소 집회를 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1951년 4월 16일 부터 21일 까지 주은래는 베이징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대회를 소집하였다. 워치만니도 작은무리 지방교회를 대표하는 옵서버로서 이집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 받았다. 워치만니는 이때 종교의 자유가 이정부를 지지하는사람들만 누릴수있는 것임을 간파하였다.

4월 27일는 상해 에서 작가들의 사상 개혁 프로그램에 따른 수천명의 지성인들과 기타 인사들의 구속이 있어던 불길한 토요일 이었다. 몇명의 그리스도인들도 붙잡힌 사람들 속에 끼어 있었으며. 어떤 동역자들은 구금상태에서 주를 위하여 고난과 시련을 받고 있었다.

1951년6월10일 삼자운동은 서양선교사들을 공격하는 대규모 군중집회가 열었다. 선발된 고소인들은 기독교 그룹들을 대표하여 교회 회중들에게 말하였다. 암송된 연설과 각본에 의한 분개와 증오를 보이면서 그리스도 안에있는 그들의 형제들 과 동료들과 선교사들을 중상하며 헐뜯었다.

1951년9월23일 해방일보기사는 선교사들의 활동이 장차 불가능하게 되거나 크게 제한 받을 것이 분명하였다. 선교사들의 선교는 중국교회에 거북스러운 존재로 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삼자운동에 가담하라는 온갖 압력이 들어왔다. 그래서 1951년 거의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모두 중국을 떠나게 되었다.중국인과 외국 기독교인 들의 1세기에 걸친 친교는 이렇게 하여 잔인하고도 급작스러운 종말을 고하였다.

워치만니의 지방교회 박해의 시작

1951년7월 전국의 지방교회들이 공격을받기 시작하였다.1951년11월30일 천풍지에 사설로 남경교회를 워치만니의 비밀조직이라고 공격하였다.

1951년 11월 30일자.삼자운동의 기관지인 천풍지에 난징에 있는 지방교회의 한 신자에 의하여 “시탕가에 있는 교회 비밀조직과 사악한 행위에 대한 폭로라는 제목의 기사가 이렇게 실렸다.”

“나는 처음 시작부터 시탕지방교회(난징)에 속한 신자로서 삼자개혁 운동에 관한 교육를 받은때 까지는 이 교회를 가장 순수한 모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사악한 단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오랫동안 속아 왔지만 오늘 애국의 견지에서. 그리고 종교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참을수 없는 분노로 지방교회를 폭로한다. 참된 반 혁명적인 성격을 은닉하기 위해 시탕가의 책임자들은 집요하게 나에게 지방교회 교회생활을 거듭 강조하였다. 사실상 우리들은 완전히 속았다. ”

“아주 초창기부터 그들은 상해 교회와 주종적 관계를 맺고 워치만니에 의해서 엄격히 지배 되었다. 그들은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마술적 성격을 띄고 있다. 위치만니는 상해에 그의 행정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470개의 교회를 관장하는 비밀 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상해는 이들을 간접적으로 북경. 한코우 . 칭다오. 푸조우 등과 같은 대도시에 세워진 중앙교회 들을 통하여 통솔한다. 워치만니가 교회에 시행하는 악하고 마술적인 지배는 종교의 한계를 훨씬 넘어선 것이다. 그는 전체주의 통치를 무마 시키기 위해 반 혁명적 독약을 퍼뜨리고 교인들의 생각를 지배한다. 그는 철면피하게도 자신을 “하나님의 사도 라고 부른다.”

1951년 연말에 중국내 모든 선교사들이 철수하게 되었다. 적지않은 선교사들이 상해에 머물면서 출국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상해 남양로 집회에 참석하여 워치만니의 성경해석 집회에서 영적인 공급을 받고 새로운 전도열에 용기를 얻고 니 형제님의 따뜻한 개성과 그의 성경해석의 한결같은 도움에 큰 감명을 받았다.

남양로 집회에 참석한 한 중국인 목사는 워치만니는 로마서 1장1절에 대하여 일주일 내내 말하였다고 한다.”매일 저녁 마다 그는 뛰어난 내용의 각기다른 설교를 하였다. 이것을 모두 한데 모으면 길고 자 짜여진 논문이 될것이다. 그것은 그저 놀라운 메세지 였다고 술회하였다.”

1951년 6월10일 삼자운동은 기독교 선교사들의 공적 고발을 위한 거대한 집회를 하였다. 집회는 상해의 개 달리기 경주장에서 열렸다.선발된 고소인들은 주도적인 기독교 그룹들을 대표하여 교회 회중들에게 말하였다. 암송된 연설과 각본에 의한 분개와 증오를 보이면서 그리스도 안에있는 그들의 형제들 과 그들의 동료들과 선교사들을 중상하며 헐뜯었다.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들 과 중국에있는 기독교 를 훼손시키도록 짜여졌다.그리고 이집회에 불참한 기독교인 들은 일일이 다 체크되었고 서로를 대적하게 하였다.

계속 강압적인 운동에 박차를 가한 후. 1951년 8월 11일 63개 "기독교단" 대고소 집회를 열었다.그러므로 기독교 교회들은 국가에 의한 이념에 맞춘 선전의 통솔을 받은 삼자운동의 새로운 사회 질서에따라 움직여져 갔다.

1951년9월 공산주의자들은 남양로 집회소에서 고발집회를 실행해야 한다는 요구를 하였다. 그리고 1952년 삼자 본부로부터 강력한 압력하에 집회가 소집되었다. 삼자의 두 대표가 말하도록 하였고. 교회 지도자들은 제국주의 자라는 그들의 고소는 다만 당황한 침묵만을 불러 일르켰다.아무도 그들의 말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선동적 각본에 의해서 짜여진 고소는 그들에게 오히려 역효과를 내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자아 개혁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소.라고 하였다.그러니 이에 대해 훈련이 필요하오.나는 "워치만니를 여러분의 재교육 책임자로 정하는 바이오".라고 말하였다.그러나 워치만니는 정부의 요구를 따를수 없었다.

1952년 4월10일 워치만니는 상해에서 체포되었다.공산 주의 자들은 장시간에 걸친 릴레이식 심문.수면박탈.간수들의 무자비한 학대,그룹투쟁 회의를 통한 악담등을 통하여 워치만니의 사상을 박탈하려고 하였으나. 워치만니는 심경의 변화나 자백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워치만니에게 자기 생애에 대한 일대기를 아주 자세하게 쓰고 또 재작성하도록 요구 하였다. 그들은 이것으로 꼬투리를 잡아 조작된 증거로 워치만니를 괴롭혔다.

1952년에 워치만니로 부터 찻던 동일한 종류의 자백을 토착화된 참된 예수교회 설립자의 아들 아이작웨이를 강금하고 조작해 냈다.그리고 인민 정부와 보조를 맟추게 하였다.그리고 그들의 지도자(짱디엔닝과 인도자)들을 간첩. 반혁명 주의자.음탕한 생활 등의 불명예스런 조작된 확증으로 고발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그때 워치만 니가 당면하고 있던 운명이었다.

또한 제약회사에 대한 조사를 통하여 세금포탈 에 대한 압박으로 정부는 워치만니 에게 상해를 떠나라고 통보하였다. 드디어 정부의 최종통첩은 더 이상 거부할수 없게 되었다. 슬픔을 참으며 그는 장핀훼이(워치만니의 아내)와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하얼빈을 향하여 떠났다. 그가 50세 되던해인 1952년 4월 10일 그는 국가 안전보장부에 의해서 만주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최초의 심문에서 부패한 실업행위에 대한 5가지 죄목을(뇌물공여.조세회피.국가재산 절취.정부계약사취.정부의 경제정보 불법취득) 범한 무법한 자본주의 호랑이” 로 고발되었다. 그리고 투옥되었으며 제약회사는 정부에 의해 몰수되었다.

당시 감옥은 극도로 불량한 상태 였으며. 육체적인 폭력.협박. 불량식품 . 각종해로운 곤충이 있는 감옥에 갇혔다. 성경책은 즉석에서 압수되었고 외부의 누구와도 연락이 허락되지 않았다.

지방교회의 탄압

1956년1월18일 중국공산당은 워치만니와 지방교회를 탄압하기 위한 대규모 군중집회를 남양로 상해교회 집회소에서 성도들을 소집하여 십이일동안 집회를 하였다.

1956년1월19일 상해 공안국법정에서 워치만니에 대한 비밀청문회열고 워치만니에게 반정부 반혁명분자라는 협의를 씌우고.상해교회안에 숨겨진 반혁명분자 척결운동을 시작하였다. 유성화.장위지.이연여.왕포진을 포함한 상해교회 동역자들과 장로들을 구금하고 같은달부터 시작해서 전국적으로수천명의 인도자들을 체포하였다.

1956년 1월30일 상해 남양로 집회 장소에서 공산당의 잘짜여진 각본대로 고발집회가 열렸다.공산당의 여러차례에 걸친 조사에서 꾸민 고소에 따르면 “워치만니는 1941년 미공군에 가담하여 장개석의 첩자로 활략하였는데. 그가 1950년 봄 홍콩을 방문한 사실상의 목적은 2월6일에 상해의 발전소와 수도국을 폭격하도록 장개석군대 밀사로서 활략하였다. ”워치만니와 그의 도당들은 많은 국민당 당원들을 보호하여 주었다. 이를 테면 지하당원들. 장군들. 도주한 거주자들이었다.그는 이들을 장로 혹은 집사라는 명목으로 그들이 국가 전복을 계획한 장소인 지방교회 집회소로 끌어들였다.

1948년 4월에 있었던 “하나님게 모든 것을 바치라”는 운동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기독교인들에게 "사도행전의 모범을 따르라" 는 거짓된 말을 하며. 신도들 자신과 그들의 재산을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치고. 공산주의 자들에게는 죽음과 파멸을 바치라고 호소 하였다. 이러한 기만은 요원의 불길과 같이 번져 전국적으로 거의 500개나 되는 지방교회 집회소로 퍼졌으며 미화 50만불의 헌금과 상당량의 물품을 거두어 들였다.

남양로 45번지 상해교회 집회소에서 워치만니에 대한 길고 어처구니 없는 고소가 이제 결론에 이르렀다. 로쯔펭이라는 의장은 상해에 있는 부시장을 초대하여 중요한 정치 연설을 하도록 특별히 부탁하였다.그는 사람들에게 "인민 정부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불행하게도 몇 몇 반혁명분자들이 민중의 연합을 방해 하였다"

“지방교회 ”내에 반혁명분자들이 있다. 워치만니와 삼자 운동을 반대하는 그의 일당들은 비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지방교회 ”에 신자되는 여러분들은 더러운 옷을 공적으로 씻는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열성적으로 모든 반대자들을 색출히고 드러내는 데 힘써야 한다" 라고 말했다.

“이 투쟁은 시작되었다. 우리의 투쟁이 승리 할것이다. 지방교회 가운데 숨어있는 모든 반혁명분자들의 뿌리가 뽑힐때까지 우리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이 부시장의 연설에 이어서 남양로 집회소의 한 신자였던 의과대생인 릴리슈가 등장하여 비난적인 발언을 하였다. 워치만니는 반혁명 난봉꾼이며. 철면피한 간음자로서 우리 여성들은 이 말을 듣고 그를 중오하지 않을수 없다고 증언하였다.

인민 일간지는 다음날 바치라는 제목의 만평을 실었다. 여기에는 이층과 아랫층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2층에는 발판 사다리에서 가면을 쓰고 앉아 있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라.” 고 쓰여져 있는 커다란 깔대기에 사람들의 소유물을 집어 넣으라고 강요하고 그곳으로 인파가 밀려가고 있었다.모든종류의 선물은 다 그곳으로 들어갔는데 심지어 노무자들은 자기의 샤스까지 벗고 어린아이의 작은 웃도리마져 벗겨서 아이를 울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래층에는 “반혁명사업을 위하여” 라고 쓰여진 연보궤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2층의 큰 깔대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금.은.시계. 보석.헌금 등이 아랫층의 연보궤를 채우고 무릎위에 매춘부를 않히고. 함게 즐기고 있는 존경하는 워치만니의 발 아래까지 넘쳐 나오고 있었다.

상해에 있는 기독교 목사들과 전도사들은 1956년 2월 5일 부터 워치만니의 범죄사실에 대하여 교인들을 각성시켜 주기 위한 소규모 이름을 조직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남양로 45번지 상해 교회 집회소에서는 주일 예배를 제외한 모든 집회를 이와같은 특별한 세뇌적 가르침을 위하여 중단 되었다.

1956년2월6일 에 당기관지 (천풍)은 워치만니의 사건을 반복하는 11페이지에 달하는 논설을 실었다. 여기에는 “교회에서 잔인한 이리 떼 들을 몰아내자”라는 제목하에 이렇게 보도 되었다. “워치만니의 범죄 사실에서 보듯이 우리들의 경제적 재건을 파괴하며. 인민의 생활과 사회 질서를 위태롭게 하고.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어 왔다는 사실을 볼수있다.

지방교회 내에 이러한 분자들이 있는것은 주님의 성스러운 거룩한 이름을 불경케 한 것이며. 교회의 평판에 오점을 찍고 복음전파의 부패를 조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대단히 영악하고 사약하여 성결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행위는 그들의 말과는 거리가 멀다. 워치만니 자신의 생활은 반복 할수도 없을 만큼 음탕하다.”

지방교회의 형제자매들은 이놈이 다시는 우리의 사랑하는 교회를 교란하거나. 해 할수 없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방해 없이 이제 자유로이 상호 간의 사랑으로 연합 될수있다. “기독교 동지 여러분 ! “우리들의 공동적 승리를 축하하고. 이를 우리의 기쁨으로 받아들입시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를 정화 시키려면 이와같은 이리떼 들을 들추어 내고 추방함으로써 가능하다.”

천풍지 다음호에서도 악독의말 들은 계속되었다. 2월 29일 자의 기사는 3000명 이상의 지방교회에 적을 둔 사람들이 참석한 남양로 에서 있었던. 또 하나의 비난대회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 이대회에는 난징. 창사. 쑤조우. 워시 기타 여러 지역에서 온 대표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참석한 목적은 투옥된 지도자들이 가졌던 상해에서의 직책을 메우기 위한 14인 통솔 위원회의 선출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대회는 1월30일 에 있었던 것보다는 더 큰 감정적인 요소를 불어넣었다. 사람들이 처음에 주저하며 의문시 하던 태도는 어느 정도 극복 되었으므로 천풍지는 모든 사람들이 이제 맹렬한 복수를 요구하는데 가담할 준비가 되었다고 보도 하였다. 15페이지에 달하는 고소와 비난 보고는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다.” 라는 제목 하의 헌신 사설에서 다루어졌다.

1956년 3월 15일 부터 23일 까지 베이징에서 제2차 중국 기독교회의 전국 대회가 있었다. 여기에서 삼자 운둥의 의장인 Y.H.유 는 1954년 7월에 있었던 지난대회 이후의 실적 보고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말하였다. “우리들이 전적인 확신으로 전진하는 이 마당에 신앙의 이유라는 공허한 구실을 내세운 지방교회는 삼자운동을 반대하고 우리의 연합을 깨뜨렸다. “그는 또한 1955년 말에서 1956년 초에 있었던 전국적 켐페인 동안에 교회내에 숨어있었던 빈혁명 분자들을 어떻게 색출해 내었는가를 설명하였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들은 간찹활동를 하였으며.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중국 인민의 종교적 운동을 방해하였다. 교회 안에서 그들은 삼자 애국적 운동을 반대하기 위하여 믿음을 구실로 삼았으며. 종교적인 슬로건으로 동료 교인들을 혼란 시키고 청년들을 타락시켜 기독교 연합을 파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색출로 이제 중국 기독교 교회의 연합을 가로막던 장애물이 제거 되었다. 오늘날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전에 없었던 보다 넓고 공고한 기초 위에서 연합되어 있다.

그리고 지방교회의 대표자들에게 공적으로 고백을 하고 이 운동의 대열에 참여하라는 기회가 주어졌다. 적은무리에 속한 북경의 엔차리 장로와 상해의 미쓰 쑤말리가 바로 이대회에서 비난 하였다. "누가 비난을 하도록 강요하겠는가. 우리들은 다만 제국 주의 지지자 글과 반혁명 주의자들의 무서운 범죄행위를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참을수 없어 그들을 드러내어 고발하는데. 그러한 기회를 사용하였을 뿐이다". 그들은 “양 가죽을 쓴 이리의 숨은 발톱이다"라고 말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지방교회의 일체의 신앙 활동을 정지 시켰다.모든 비 공식적인 성경공부와 기도회와 일체의 인정받지 않은 개인 가정에서의 활동도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기독교 신앙의 자유"는 큰소리로 선포되었지만. 그것은 조건부 자유였으며 인정된 울타리 내에서의 정부의 감독 하에서 제한 된 것이었다.

이러한 일이 있는 동안 워치만니는 투옥되어 있었으며. 1956년 6월 21일 상해에있는 대 법원에 출석하였다. 장장 수시간에 걸친 그의 고소내용을 통하여 그는 그 자신의 교회에서 출회되었음이 알려졌다. 그리고 1952년4월12일 부터 중노동을 포함한 15년의 징역형이 선고 되었다.

장 핀훼이 (채리티 장)

1956년 6월 21일 워치만니의 대 법원 심문과 선고가 있을때에 그녀도 투옥되었다. 그당시 그녀는 병원에서 중병환자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비난대회에 참석하거나 그녀에게 요구된 자백을 통하여 그녀의 건강이 너무나도 나빠져 있었다. 채리티가 풀려 나온 것은 1957년 어느 날이었으며. 그 때부터 집에서의 긴 불면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이제 제일 의과 대학 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카웨이”가의 한 방에서 살았다. 감히 누구도 그녀를 방문하지 못했으며. 공공연히 그렇게 하려면 큰 용기가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반동분자와 관련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녀 자신이 시민의 권리를 박탈당한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접촉을 갖는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형을 받고 복역중인 죄수는 한 사람의 친척을 방문자로 지명 할수있었다. 그래서 5년이 지난 1961년 채리티는 워치만니을 면회 할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그녀는 도시를 가로질러 “티란차오감옥소”로 갔다. 이곳은 상해 제일 구치소이다, 면회는 그들사이에 창살이 가로막힌 방에서 감시하에 이루어졌는데 30분동안 이었다.또한 철저한 검열를 거친 편지를 매달 한장씩 받거나 보낼 수 있었다. 감옥은 1913년 영국인에 의하여 지어졌는데. 회색 담으로 된 으시시한 전통적 스타일의 건물이었다. 워치만니는 작은 독방에 갇혔 있었다. 가구라고는 바닥에 잠자는 나무판자가 하나 덩그러니 놓였있을 뿐이었다. 문 밖에는 200피트 길이의 복도가 있고 이 복도을 따라 감방들이 있는데. 창문들이 바깥 쪽으로 나있었다. 잠자리는 벼룩 과 빈대가 들끓어 도무지 잠을 잘수가 없었다.

하루는 8시간의 노동과 8시간의 교육과 8시간의 휴식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여러 불신자들 속에 끼어 감옥 공장에서 침울한 죄수들과 함께 노등을 하거나 혹은 공기가 탁한 갑갑한 감옥의 안마당에서 일해야만 했다. 죄수복도 없었고 죄수들 자신의옷도 너덜너덜 다 헤어졌다. 그리고 부지런한 사람들의 옷은 여기저기 기워진 자국이 수두룩 하였다. 죄수들은 보기에도 구질 구질하고 딱한 모습이었다.

여자 죄수들에 의하여 준비된 식사는 하루에 세번이었고. 두번은 중식(노동용) 과 경식 (비노동자용)으로 나누어지고. 또 한번은 묽은 죽이었다. 이따금 그들에게 신선한 채소와 고기가 섞인 국이 나오긴 했지만. 여름 더위는 죄수들의 갈비뼈가 툭툭 튀어 나오게하고. 심줄이 울퉁불퉁 솟아 오르게 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목숨만 겨우 부지하며 살았다. 이따금 온수 목욕이 허락되었으며 한달에 두번 이발을 받았다.

겨울에는 난방이 없었고 극심한 추위로 생명이 붙어 있기 위해서는 겹옷이 많이 필요했다. 워치만니는 정치범과 동일한 교육적 교화를 받아야만 했다. 때가 되어 워치만니의 환경이 이 외부에 알려 졌다. 적은 양의 음식.옷. 비누 그리고 현금이 홍콩에서 채리티에게 전해 졌으며. 채리티는 워치만니를 위하여 조금씩 그에게 보낼수 있었다.

한편 이연여 자매와 왕포진 자매 유성화 형제님에 대한 고발과 심문이 1958년 여름에 있었다. 그들은 끝까지 워치만니을 고소하는 것을 거절해 왔으며. 1956년 부터 시작하여 각각 15년의 언도를 받았다.유성화 형제님은 그의 아내와 아들이 그를 찻아와 석방을 위해 설득하고. 애원 하였지만 워치만니를 고발하는 일체의 권유를 뿌리쳤다. 그는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너무도 몸이 약해져서 심문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가출옥으로 석방되어 하둔가의 이전 이층 사무실에서 끝까지 자신의 신앙에 굳건히 섰다가 사망하였다.

1967년 (문화대혁명기간에)13번이나 홍위병들이 여러달 동안 채리티의 집을 약탈하였으며. 그녀의 개인 소지품을 빼았고. 기독교에 관한 모든 것을 부수고 조롱하였다. 결국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녀도 극도의 신경과민에 빠져서 쓰러지기 직전에 있었다. 비록 믿는이들이 그녀을 위로해 주었으나. 하나님만이 그녀를 온전히 붙잡아 주실수 있었다. 모든 종교적 건물은 몰수 되고. 반종교적 선전이 벽에 나붙었다. 천풍지도 출간을 정지하였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우요치형제

1960년 우요치형제는 모택동의정책을 반대했다는 이유로(모택동의대약진운동실패로 수천만의중국인들이 아사함)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1963-1972까지 워치만니와 감옥생활을 하였다.

1963년워치만니는 상해 티란차오감옥에서 우요치형제와 같은 감방에 있게 되었다. 우요치형제는 워치만니가 투옥중에 구원시킨 유일한 사람이다.감옥에서 워치만니에게 어떤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알수 없었지만 우요치형제가 풀려난후 감옥에서의 워치만니에 관한 감옥생활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어느날 간수들은 워치만니불러 그가 믿음을 포기하면 집으로 돌려보내줄수있다고 회유하였으나 워치만니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워치만니는 우요치형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요치 자네가 감옥에서 플려나면 위트니스리를 찻아게게.그리고 그에게 나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해주게. 그에게 여기에서의 나에 모든 상황에 대해 말해주게. 자네가 그를 보는 것이 곧 나를 보는 것일세. 그가 자네에게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내가 자네에게 하는 말일세.자네가 그에게 자네를 돌봐 달라고 요청하며 그는 분명히 자네를 내 아들처럼 보살펴 줄 걸세".

1970년 1월에 워치만니는 상해의 티란차오구치소에서 18년을 보낸후에 시골에 있는 개방감옥 으로 옮겨졌다. 20년의 형기를 눈 앞에두고 채리티의 희망은 일기 시작하였다.1971년 북평에 사는 언니가 방문하였다. 그런데 9월 어느날 그녀는 집에서 무엇을 고치고 있었다. 아마 몇달 후에 귀향할 워치만니를 생각하고 집을 정돈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의자에서 갑자기 발을 헛디뎌 떨어져 여러개의 갈비뼈가 부러졌다. 이러한 사고로 니 자매님은 고혈압 치수가 상승하여 사망하게 되었다.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자신의 친절한 품으로 옮기셨다.

모든 장례가 끝나고 언니은 워치만니가 있는 시골의 개방감옥으로 면회를 갔다. 그는 이미 소식을 듣고 아내를 잃은 슬픔 가운데 잠겨 있었다. 그들은 4월 재회를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1972년 여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4월 12일 워치만니는 20년의 형기를 끝마쳤는데. 이는 그의 공적 선고보다 5년을 더 넘긴 것이었다.

워치만니 형제님은 1952년 2월 3일 에 체포되었다. 그는 심문받고 무고당하여 1956년 에 십오년형을 선고 받았다.1972년 5월 30일 그는 감금중에 죽었다. 이 기나긴 감금기간에 그가 무었을 체험했는지 우리는 알길이 없다.다음 여덟통의 편지는 그가 감금말기에 친필로 쓴 것으로서 단지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약간이나마 그가 감금기간에 받은 고통과 느낌과 소망을 들여다 볼수있다.

핑찐처형:

1972년 4월21일 처형에게 보내 편지에서 “내 병은 큰처형도 아는 바 만성병이요.기관지에 관한 질환"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난 여전히 기쁨을 유지 하고 있읍니다.” 라고 섰다. 이것은 그가 옥에 갇혀 고통당하고 있을때에도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많은 교통을 나누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고. 이 편지에서 워치만니는 성경구절을 인용하지 않은 것은 그에게 그렇게 할 자유가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1972년5월26일

내일아침이면 저는 풍수령을 떠나 산하파농장으로 옮겨 집니다. 오실때 풍수령까지의 표를 끊지 마시고 그곳보다 두 정거장 더 들어간 산하파까지의 표를 끊으셔야 합니다. 이 편지는 그의 처형에게 그가 5월 26일에 풍수령농장을 떠나 더 먼 산하파 농장으로 옮겨진다는 것을 알려주는 편지이다.

6주일이 지난후에 그는 안휘성 광덕현 백운산 농장 14대대로 옮겨졌다. 그 긴 여행이 그에겐 무리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새로운 고난을 당하였을까. 아니면 그의 병이 갑자기 그를 엄습한 것이었을 까. 우리는 아무런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1972년 5월 30일 그가 69세 되던해에 주님의 부름을받고 그의 품으로 갔다는 것 일 뿐이다.



복주에서부흥의 시작.워치만니의 간증2.


워치만니 2024-09-2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4329.html

1923년초 우리는 복주의 한 형제 집에서 집회를 시작했다. 우리는 의자를 빌려서 자리를 배열하고 부근에 있는 사람들을 초청했다. 주님께서 어딴것을 시작하셨으므로 얼마 안가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생겼다. 우리가 사람들을 불러오는 방법은 특별했고 효가적인 것이었다.

형제들은 각기 윗도리에 힌까운을 입고 가운데 앞뒤에 "당신은 죽는다". "예수믿어 구원 얻으라" 등의글을 쓰고 손에는 깃발을들고 입으로는 찬송을 부르며 여러곳을 돌아 다녔다. 그것을 본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하여 많은사람을 집회로 인도했다.

매일매일 이렇게 돌아다님으로써 매일매일 사람들을 이끌어 복음을 듣게 했다. 그들은 방안에 부엌에 응접실에 현관 밖에까지 가득히 않았다. 집회에 쓰던 의자들은 2주일 기한으로 빌려온 것이었다. 그러나 돈이 생기지 않은 채 의자를 돌려주어야 할날이 되었다.

의자가 없이 어떻게 집회를 해야할까. 나는 앞으로 집회에 나올 사람은 모두 자기의자를 자기가 가지고 오라고 광고했다. 이날 오후 노인을 선두로 해서 젊은이 남학생 여학생 등 의자를 든 사람들의 행렬이 계속되어 경찰관을 놀라게 했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리자. 이때 수백명이 구원을 받았다 이때 구원의 기초가 잘 딲여 졌다. 과거에 중국에서는 많은 믿은 이들이 구원에 대해 분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집회를 통해 구원받은 형제들이 각처에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분명해졌다.

우리가 집회를 시작한 지 한달이 되던 때 우리가운데의 여러형제들에게 이제 일정한 집회장소가 있어야 겠다는 느낌이 생겼다. 그때 우리는 돈이 없어 방을 빌릴 방법이 없었다. 하씨 성을가진 어떤 사람이 비교적 낮은 가격으로 방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 방세는 매달 9원이었는데 먼저 3개월분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몇 형제와 같이 기도하여 그 방에 들어가기 위해 먼저 지불해야 할 27원이 우리로서는 큰 액수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돈을 주시기를 구했다.

나는 보통 매주 토요일에 복주의 민강에 가서 바버자매님과 교제 했다. 어느 토요일 내가 그분을 만났을 때 그분은 내게 돈을 주면서 "여기 27원이 있는데 이것은 어떤 친구가 주님의 일에 쓰도록 너에게 전해달라고 내게 준돈이다."라고 했다.

그 금액은 많지도 적지도 않은 3개월분의 방세였다. 나는 돌아가서 즉시 3개월분의 방세를 지불했다. 그후 내가 다시 기도했을때 주님은 또다시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셨다. 이것이 복주에서의 주님의 일의 시작이었다.

많은 믿는이들의 부흥

종래에 나는 그처럼 큰부흥을 본적이 없었다. 매일 매일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든지 우리를 만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았다. 그때 나는 복주의 삼일서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매일 아침 5시에 학교에 가보면 곳곳에서 성경를 읽는 보습들을 볼수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백여명쯤되었다.

우리학교는 전부 여덟 반이었는데 반마다 반장 부반장이 각각 1명씩 있었다. 기이한 일은 각 반의 반장이 다 구원을 받은 것이다. 매일 60여명이 기를 들고 행진을 했고 수십명이 나가서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었다. 복주에는 인구가 10만명 이었는데 온 도시가 이 청년들로 인해 소동했다. 우리는 그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집회를 시작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갈수록 많아졌고 점점 확대되어 부근의 도시에 까지 미치게 되었다.

사역의 새로은 시작

1921년과 1923년 사이에 많은 지방에서 부흥회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집회를 가졌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그분의 뜻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다 지방적인 합일의 입장에서서 주님의 교회를 대표하여 그분을 간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동역자들도 있었다. 나는 마음을 다하여 사도행전을 본 결과 하나님의 뜻을 각 지방에 교회를 건축하는 것임을 보게 되었다. 이것에 대해 나는 분명한 빛이있어 그의 뜻을 명백하게 알게 되었다.

이 계시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다. 이 빛이 없는 어떤 동역자들은 우리의 일의 중점을 보는 관점이 우리와 달라서 우리사이에 마찰이 생긴 것이다. 그들은 다만 복음을 전하고 부흥시키기만 하면 일의 효과를 다 거두는 것이라고 알았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분의 중심적인 뜻은 각지에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요. 다른 일은 모두 부수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러한 부담이 있었다. 그 나이 많은 동역자는 항상 밖에가서 부흥회를 인도했으나 나는 주님께서 내게 보여 주신 이상에 따라 일했다.

우리 두사람은 사역에 대해 받는 빛이 달랐을므로 사역의 길도 달랐다. 하나는 부흥회와 복음전도을 위했고. 또 하나는 각 지방의 교회건축을 위했다. 주님께서 내게주신 분명한 계시는 속히 중국의 크고 작은 도시에 지방교회가 일어나기를 주께서 원하신다는 것이었다. 눈만 감으면 이것이 내 눈앞에 떠올랐다.

분열을 피함

1924년 동역자들이 내게 불만을 가짐으로써 복주교회가 시련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었다. 나는 분열을 피하기 위하여 복주를 떠났다. 얼마 후 나에게 남경으로 가라는 주님의 부르심이 있어 나는 그곳에 가서 집회를 시작했다. 1925년 5월 나는 그곳에서 돌아와 복주에서 가까운 해번의 작은 마을 나성탑에서 방을 빌려 거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구원과 교회의 진리를 중점적으로 다루며. 예언과예표도 말할수있는 잡지를 내야겠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이 느낌은 후에 기독도보(基督徒報)를 낳았다. 원래는 임시적으로 생각한 것이었으나 1925년에는 두번 출간했고. 1926년에는 열번. 1927년에는 그치지 않는 수요를 충당하기위해 열두번을 출간하게 되었다.

1926년 상반기에 나는 하문 고랑서 장주와 동안에 가서 증거했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다. 그 해 하반기에 나는 또 다시 이 지방들을 순회했다. 그때 나는 몹시 피로했기때문에 한 면으로는집회를 하며 한 면으로는 서신으로 교제했다. 본래 예정한 것은 12일간의 집회였으나 9일때 되는날 나는 병으로 눕게 되어 남은 며칠간은 다른 동역자 한분이 계속했다.

복건성 남부의 일은 1926년 하반기에 시작되었고 하문과 동안의 인근지방에 서도 다 집회가 시작되었다. 그후 한의사가 와서 말하기를 하문에서 얻은 내병은 십중팔구는 죽는 병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단 몇개월밖에 살수없다는 판단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다만 내가 생각했던 것은 내가 그 몇년 동안 주님 앞에서 주리고 배운 것을 책으로 써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주님으로 부터 받은 그것을 함께 가지고 무덤으로 들어가야 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나는 곧 "영에속한 사람"의 집필를 준비했다.후에 내가 남경에 돌아왔을때에는 이미 형제자매들이 합일의 입장에서 떡을 떼고 있었다. 나는 자연히 그들과 함께 주님을 기념했다. 나의 옛동창생인 위 광희형제는 금릉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의 소개로 그 학교에서 몇차례 말씀을 전했고 그때 돌아온 두 형제를 영접하여 같이 떡을 뗐다.

이것이 우리의 남경에서의 주님의 일의 시작이었다. 마음을 다하여 "영에 속한사람"을 쓰기 위하여 나는 곧 남경을 떠나 강소성 무석에 가서 제 4부를쓰기 시작했다. 1927년 3월에는 남경에서 군사행동이 있었다. 다른 지방의 형제자매들과 통신할수 없게 된 나는 그곳을 떠나 상해로 갔다.

그곳에 이르렀을때 나는 이미 많은 형제자매들이 각 지방에서 상해로 와 있고 지금도 계속 오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오기 전에 형제자매들은 이미 신가화원에 있는 왕포진자매집에서 떡을 떼고 있었다. 우리가 모두 도착한후 집회장소는 갱경리로 옮기게 되었고 복음서원도 그곳 상해에서 시작되었다.

제 1차 이기는자 특별집회

1927년말 우리는 매일매일 집회소에 모여 기도했다. 그때 강소의 북부와 절강일대의 신도들은 우리의 문서 간증의 도움을 받고 우리와 서신 교제를하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는 한면으로는 그들의 갈망과 추구를 보았고 한면으로는 중국 각처의 신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특별집회임으로 이 집회를 준비해야 겠다고 느꼈다.

1928년 1월 우리는 합동로 문덕리에서 집을 빌렸다. 2월 1일 특별집회가 시작되었다. 그 1차 집회의 중심되는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과 그리스도의 승리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아직 교회의 진리문제를 내놓지 않았었다. 외부에서 이 집회에 참석한 형제자매들은 약 30여명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어떻게 길을 가야 하는가를알게 되었다.

침례를 받고 교파를 떠나는 문제 등은 다 그들 스스로 해결했다. 4년동안 소북에서 구원을 받고 부흥된 사람들은 약 7.8백 명이었고. 10여곳에 집회소가 있었다. 태순지방에도 10여곳에 집회소가 있었다. 그곳에도 구원받고 일어난 사람들이 4천여명 있었다. 이것은 다 주님께서 친히 각 지방에서 일하신 것으로서 근래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1928년 문덕리로 이사한 후 기독도보는 중단되었으므로 계속 부흥보를 발간했다. 성경해석은 1930년에 비로서 출간되었다.우리 몇몇 동역자들이 상해에서 몇 년간 일한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만 주님 자신을 따르고 성경의 진리를 알며 성령의 인도를 받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지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속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고의적으로 문을 닫지도 않고 우리만 옳다고 한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받아 끝까지 충성할 따름이었다. 나는 위중한 병 가운데서 "영에속한 사람"을 썼다. 책을 출간한 후 나의 병은 더욱 악화되어 많은 세월을 침대 위에서 보내야 했다. 땅에 있는 장막은 항상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해에서의 몇년간은 정식으로 어떤 일을 하지 못했다. 근래의 2년 동안 비로서 일을 시작했다고 할수있다. 1931년 또 한차례의 특별집회가 있었다.이 집회의 중심은 새언약과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말씀이었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많은 형제자매들이 외부에서 왔다.

4.하나님께서 맡기신 일

내가 병으로 침대에 누워 하나님의 치료를 받던 그때 하나님께서 내게 분명히 알려주사 나에게 하게 하신일은 아래의 네가지를 포함한 것이었다.

첫째 - 문서를 통한 주님의 일

병들기 전에 나는 각 지방에서 특별집회를 열었을뿐 아니라. 세밀하고 정확한 성경주해를 쓰려는 뜻을품고 있었다. 나는 많은 힘과 시간과 금전을 들여 약 100여부에 이르는 주해를 쓰려고 했다. 그러나 위중한 병에 걸려 "영에 속한 사람" 을 출간한후 나는 비로서 성경 주해 저술은 내가 할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이뜻을 버리지 못했고 항상 여기에 대한 시험이 있었다. 병이 나은 후 하나님께서 내게 알려 주신 것은 그분이 내게 주신 사명은 성경주해 저술이 아니요. 일반적인 복음 전도도 아니요. 예언 해석도 아니요. 오직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것을 중히 여기라는 것이었다.

이러므로 나는 부흥보를 회복하여 영적 생활과 영적 전쟁에서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도와야겠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각 시대마다 그때그때 특별히 필요한 진리가 있는 것이다.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특별한 진리가 있다.

"부흥보"는 지금이 시대의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지금은 준비의 단계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추수되기 전에 먼저 익어야 한다는 것을 (막 4:29) 깊이 믿고있었다. 추수할때가 오면 그들은 들림받게 된다. 교회는 준비가 되었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오늘 하나님의 뜻은 속히 그분의 아들의 몸 곧 교회가 건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도 이르기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엡 5:26-27)라고 하셨다. 원수는 소멸되어야 하며 왕국은 이루어져야 한다.

나의 소망은 주님의 손 안에서 이 영광스러운 일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내가 쓴 모든 것은 오직 단 하나의 목적. 곧 독자들이 새로운 피조물 안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분의 손 안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도록하기 위함 이었다. 나는 지금 나의 모든 저서를 독자들과 나 자신을 영원히 지켜주시는 하나님께 맡기며. 그분의 영이 우리를 인도하여 그분의 모든 진리 안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한다.

둘째 - 이기는 자의 집회

하나님은 나의 눈를 밝혀주사 나에게 각지 교회에서 이기는 자가 일어나 그의 증인이 되게 하심을 보게했다. 그러므로 매년 한차레씩 이기는자의 집회를 열어 집회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계시하신 말씀을 충심으로 전했다.

셋째- 지방교회 건축

주님께서 나를 부르신 것은 부흥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성경의 많은 이론을 듣게 하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부흥사가 되도록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주님께서 내게 계시해주신 것은 한지방 한지방에 그분의 교회를 건축하여 그를나타냄으로서 지방교회의 합일의 간증을 나타내며 모든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분량대로 지체의 봉사를 하여 교회생활을 하게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개인의 승리하는 생활이나 신령함뿐 아니라. 하나의 단체로서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하나님 자신께 드리는 것이다.

넷째- 청년들에 대한 훈련

만일 주님께서 더디 오신다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청년들을 일으켜 후대에서도 계속 그분의 간증을 잇게 하신다. 이미 많은 동역자들이 이 일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적당한 장소를 예비하여 청년들을 훈련하기를 바랐다. 나의뜻은 하나의 신학교나 성경학원을 원한 것이 아니고 청년들이 단체생활을 하면서 한 면으로는 영적생활을 훈련하고 서로 상합하여 성경읽기와 기도를 훈련하며 좋은 인성을 기르고 또한면으로는 죄와 세상과 몸과 육의 생명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그들은 각 지방교회에 돌아가서 성도들과 함께 교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미 상해교외에 있는 진여(眞如)에 1만평 이상 되는 땅을 사 놓고 건축 계획을 진행하면서 곧 청년들이 거기에서 훈련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후에도 계속 내 맘에 눌림이 있었던 일은 대체로 이네가지가 포함된 것이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린다. 우리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이러한 일을 다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무익한 종인 것이다.



간추린 상해교회와 워치만니의 순교


워치만니 2024-09-1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4328.html

상해교회와 워치만니의 순교

1.워치만니는 중국 공산치하에서 많은 박해와 회유를 받았지만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다가 결국 순교했다.워치만니는 감옥에 있던 20년동안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면 플려날 기회가 여러차례 있었지만 자신의 안락한 기회들을 포기하고 주님께서 자신에게 정해주신 십자가의 길을 죽기까지 갔다.

2.생전에 그가 집필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영에 속한사람은 백만부 이상 판매된 책으로 나도 워치만니의 저서가 아니었다면 겨우 구원받은 가련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을 것이다.

워치만니는 죽기전에 쓴 쪽지에서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는 사람의 죄를 속량하기위하여 죽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 이것은 우주가운데 가장 놀라운 사실이다.나는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죽노라"라고 섰다.

3.릴리슈는 워치만니가 두 여자 동역자(워치만니보다 10년연상의 여인)들과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다고 수천명이 모인 군중집회에서 고발하였다. 이것은 중국공산당에 의해 지방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계략이었다.그러나 이 두 자매님들은 1952년에 감옥에 10년동안 투옥되어 많은 심문과 고문과 회유에도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고 워치만니를 비난하지 않았으며. 오랜수감생활과 고문으로 감옥에서 죽었다.

4.그렇다면 릴리슈는 어떤 사람일까 그녀는 자신의 책에서 16세의 여고생때인 1947년9월에 상해교회에서 침례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워치만니가 1952년2월에 공안에 체포되어 아무도 그를 볼수 없었기에 릴리슈가 워치만니를 볼수있는 기간이 불과 5년에 불과하다.

5.워치만니의 사역이 중단했다가 사역을 재개한 때가1948년초이고 그후에도 고령산훈련을 위해 상해를 떠나 수개월씩 두번이나 고령에 머물렀다. 따라서 청년시절에 상해 교회생활을 몇년밖에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상해교회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들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처럼 책을 섰다는 것이 독자들에 대한 기만(속임수) 이다.

6.한편 릴리슈는 아버지가 국민당정부를 지지하는 반혁명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되어 편안한 길을 가고 평생을 무신론자 처럼 살았다고 까지 책에 섰다. 그러나 함께 의대생이었던 쉬페이리자먀는 21년간의 수감생활로 의사가 될수있는 소망도 잃고 폐인이 되어 감옥에서 플려난후 죽었다. 이같이 쉬페이리자매는 주님을믿고 순교의길을 간사람이었지만 릴리슈는 변절의길을 간 사람이다.

워치만니 탄압을 모의한 비밀문서가 공개됌

1.워치만니가 1952년4월에 공안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1956년6월에 중국공안에 의해 끌려나와 재판받기 까지 4년의 불법투옥기간. 그가 당했을 혹독한 고난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 비밀문서를 통해 중국공산당이 워치만니를 제거하기 위하여 어떤 공작했는지 알수가 있다.

2.기독교집회소에 숨은 반혁명분자들에 대한 단속문제를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공산당중앙위원회1955.12.25)

적은무리(지방교회)는 인민정부를 반대하고 국가건설을 훼손하며.종교적인 외투를 입은 반혁명그룹이다. 윈난 .신장. 내몽골 등 소수 민족지역에 침투해 활동하는 적은무리를 엄격히 단속하고 본토로 돌려보낸다.

푸젠성. 저장성. 광둥성등 방어 요세지역에 있는 적은무리교회를 몰아내고 복잡한 해안지역에 있는 적은무리교회를 통제해야 하며 점차교회를 통제해야 한다.

3.그 당시 이계획은 워치만니 반혁명집단을 공개 비판하기 위해 열린 군중집회때 릴리슈와 열명의 상해교회믿는이들이 워치만니를 공개 비판하도록 내 몰렸고. 1956년 2월1일 천여명의 상해교회동역자들과 장로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와 투옥을 통해 그대로 수행되었다.

상해교회의 청년이었던 릴리슈의 배교

1.끝까지 믿음을 지키며순교의 길를 간 신실한이들이 있었던. 반면에 배교의 길을간 이들중 대표적인 사람이 릴리슈이다. 그녀는2013년에 "나의 잊을수없는기억들"이라는 영문책자를 출판했고. 유동근목사는 이 책을 번역하여 한국교계에 내놓았다. 그러나 이책은 릴리슈가 중국공산당의 계략에 의해 거짓증언을했던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기는 커녕 온갖 거짓된자료를 모아 자신을 정당화 하는데 워치만니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에 불과하다.

1956년1월 29일에 상해교회 대부분의 인도자들이 중국공안국에 체포되었고. 그 다음날 종교국이 주최하는 워치만니의 죄상을 고발하는군중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서 릴리슈는 "나는 워치만니 반혁명집단에 가장 중독된 기독교청년이며. 상해 제2의학과대학 학생입니다. 그들의 속임수와 독해(毒害)로 나는 젊은이들을 중독시키는 일을한 공범자 였습니다. 나는워치만니 반혁명집단의 범죄를 고발하고싶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최근 정부가 종교의 외투를 입고 반혁명 활동에 종사해온 워치만니의 반혁명집단을 무너뜨린것에 대해 나는 형언할수없는 기쁨과 통쾌함을 느꼈고 우리에게서 이 큰악을 제거한 정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워치만니는 위트니스리를 대만으로 도피시키고 대만에서 범죄활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장개석의 충실한 앞잡이였습니다"

"1950년 미 제국주의가 광란적으로 조선을 침공했을때 워치만니는 상해에서 열린 핵심맴버 특별모임에서 미국에 저항하고 조선을 돕기 위한 운동에 참여하지 말라고 뻔뻔스럽게 말하였습니다"

"반혁명분자 숙청운동이 시작된후 반혁명분자 왕포진은 "앞으로 전도는 "피"로하게될것입니다.두려워 하지마세요"라고 말하면서 반혁명분자 숙청교육과 보고서 작성을 거절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몇개월 동안 조직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은후 나는 마침내 깨어났고.그들이 싫어졌다. "나는 워치만니가 반혁명집단이 연로한 형제자매들이 아니라. 양의 탈을 쓴 가장위험한 늑대무리이고. 청소년을 독살하는 범죄자의 우두머리 라고 깊이 느낀다"

"이제 이정부가 이 반혁명분자들을 체포 했으니 정말기쁘다.인민의 입장에서 워치만니의 반혁명집단의 추악한 범죄를 폭로하며 반혁명 분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을 벌이기 바란다" (1956년2월2일 해방일보)

2.그 당시 순진한 대학생이었던 릴리슈는 1955년12월에 공안에 초청되어 지속적인 세뇌과정을 거쳤고 중국공산당의 치밀한계획하에 시행한 지방교회 탄압에 동조하는 하수인중 하나로 악역을 담당하게 된것이다.

공포와 압박이 인민을 누르는 정치상황에서 워치만니를 공개비판했던 그의 친누나와 장시캉형제는 자신들의 과오를 뉘우치고 회개 했다. 장시캉형제는 일곱살때 부터 워치만니를 보고 자랐고. 워치만니가 폐결핵을 심하게앓을때 머물던 곳이 바로 장시캉형제의 부친의 집이었다.이때 워치만니는 극심한 고통속에서 영에속한사람 세권을 쓰던시기였다.

장시캉형제는 릴리슈와 함께 상해교회 내부고발자 열명중에 한명이었고.그는 워치만니의 사설도서관 관리인이자 제약회사 재정담당 지배인이었다. 장형제는 릴리슈보다 워치만니와 상해교회 내부사정을 더 잘아는위치에 있었지만 워치만니를 부도덕한사람으로 몰아간 중국공산당의 증거자료들의 서명과 자백서 필체가 조작된 것을 알고. 자신의 초안에 기록관련된 부분을 삭제하고.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말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센디에고 교회에서 생활을 하다가 주님품에 갔다.

워치만니의 아내 장핀훼이자매님 역시 남편이 반혁명분자라서 함께 옥고를 치렀다. 그녀는 남편을 끝까지 사랑했고 릴리슈가 고발한 워치만니와 관련된 모든내용은 "존재하지않는 일들"이라고 말했고 "하늘에서 더높은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그녀는 또한 온갖회유에도 불구하고 죽기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3.그러나 릴리슈는 중국공산당에 의해 조작된 워치만니의 부도덕한일들에 대한 증거들을 보고 믿음이 무너졌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기독교를 탄압한 정부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여. 모택동정권 아래서 순탄하게 의학공부를 마치고 취업도했다.결과적으로 그녀는 믿음을 져버리고 무신론자처럼 살았다.

코람데오형제가쓴 릴리슈의 믿을수없는 증거

1.릴리슈는 중국 공산당 정부 기밀문서의 각본대로 워치만 니와 적은 무리를 와해시킬 내부자 중 하나로 1955년 12월에 릴리슈에게"교회의 두여자 동역자와의 불륜"누드사진이 있는 영화 한조각을 보여주었고. 릴리슈는 워치만니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깊은 수치심과 혼란에 시달렸으며.그녀는 워치만니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게된다. 그후부터 릴리슈는 중국 공산당이 워치만니와 적은 무리를 무너뜨리려는 각본 이행에 자발적으로 동역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회유 작전이 제대로 효과를 본 것이다.

이런상황에서 릴리슈는 연구위원에 임명되어 장시캉형제와 여자 동역자(마오윈춘.장치넨)을 방문하도록 파견되었다고 말했다. 이 두동역자자매들이 60세가 된거예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일이 일어났다는 시기와 장소 조차 모호했다.

2.릴리슈는 자신이 쓴 중국어판에서 1931년에 그런일이 있었다고 섰다. 그러나 후에 쓴 영어판에서는 1926년에서 1931년 사이라고 수정하고. 증보판에서는 1926년에서 1927년 사이라고 다시 날짜를 고쳤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을 마치 직접 목격한 것처럼 증언하려니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워치만니는 1926-1928년 영에속한사람쓸때 심각한 폐결핵을 앓아 그야말로 생사를 오가며 자기 몸 하나도 추수리기 어려웠던때 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여인과 불륜을 저지르고. 심지어 상대의 얼굴부분이 없는 나체사진까지 찍었다고 주장했다.릴리슈의 이어처구니없는 증언들이 신빙성이 없는 거짓임을 알수있다.

장시캉형제의 회개

1.연구위원중 한명으로 그 여자 동역자를 면담했던 장시캉형제는 중국공산당에 의해 "증거들로 제시된 워치만니의자필. 고백서필체와 그의 서명이 위조된것을 발견하고 위사례들을 포함하여 워치만니의 부도덕성을 언급했던 모든 무분을 삭제하고.공개적으로 워치만니를 고소했던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고 감옥에 가게된것이다.

1956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은 상해교회 집회소를 점거했고. 중국전역의 지방교회들에서 수많은 동역자들과 인도자들을 체포했다. 동시에 워치만니의 반혁명분자들을 비난하기 위한 전국적인 대규모 고발대회를 포함하여 워치만니에 대한 대규모 반 워치만니 선전.선동 집회를 가졌다.

1956년6월에 있었던 워치만니의 공개재판에서 릴리슈와 장시캉을 포함한 10명의 교인들이 고발에 가담했다. 총2296쪽에 달하는 기소장에서 중화인민 공화국은 워치만니를 일련의 범죄자로 고발했고.그런 비난들은 다음과 같이 터무니 없는 것들이었다.

"워치만니는 정부전복을 위해 무기를 비축했고. 마약을 거래했으며. 여성을 매춘부로 노예화했고. 물과 수력발전소를 폭파하려고 했으며 거머리가 가득 담긴 소라를 비행기에서 강과 호수에 떨어뜨리라고 장개석에게 조언했고.세균전 수행을 지원했으며 수십억 달러의 공금을 횡령했고.수많은 여성을 강간했다"

2.릴리슈가 쓴책의 내용의 대부분은 장시캉형제의 회고록 초고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장시캉형제는 초안을 작성한 후에 워치만니를 비난하는 증거를 검증했고 자신의 초기 평가를 철회했다. 장시캉형제는 중국공산당이 제시한 워치만니의 자료에 들어있는 서명들이 위조임을 고백하고 1983년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결론

1.같은시기를 기록한 영국인 선교사 앵커스키니어는 자신의 책 Against the Tide (파도를헤치며) 에서 중국의 사회분위기를 기록하였고 (1950-1956). 필리스탐슨이 쓴 "내키지않은 내지선교회 선교사들의 중국탈출"등 이런 관련자료들을 추적 조사한 후에 릴리슈의 책이 사실을 기록했다기 보다는 중국의 격변기에 인권이 극도로 억압된 상황에서 공산정권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여 만들어진 자료들에 기초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2.미국 예일대 역사학교수인 조너선 D.스펜스의 현대중국을 찻아서(1991)에 따르면 1951년 말에 상해에만 15000명의 선동가들이 활동했다. 또한 1952년 4월 한달 동안 상해에서만 3000번의 군중집회가 열렸고. 21만개의 고발장이 정부에 접수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52년4월10일에 먼저 워치만니가. 그 뒤에는 약 일천명의 지방교회 인도자들이 중국 공산당정부에 체포되었다.

3.한편 워치만니가 동역자들의 만류에도 홍콩에서 중국본토로 돌아간것은 주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었다. 주님은 워치만니에게 본토로 돌아가 형제자매들과 함께하여라"라는 분명한 말씀이 있었다.

4.중국공산당의 정치적인 목적은 워치만니의 충격적인 사생활을 폭로"하여 지방교회를 와해시키고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중국 공산정부로부터 소위 음란행위로 고발된 교회 지도자들은 워치만니 만이 아니었다. 예를들면. 참된예수교회의 설립자인 짱디엔잉과 자베이 교회목사인 황위신도 그 희생자들 이었다.

5.처음부터 짱디엔잉은 결코 예수를 참되게 믿지 않았다.짱디엔닝은 Fengyun과 간통을 범했고.마치 남편과 아내처럼 종종관계를 가졌다.그의 행동은 짐승과 같았다. 황위신은 이십년이 넘는동안 여러장소에서여성들과 간음행위를하고 굴욕감을 주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천풍지 1953년 5월4일) 결국 예수가정교회는 정부의 의도대로1952년에 해체되고말았다.

6.워치만니는 이런결과를 예견하고 1949년에 그의 가장 친밀한 동역자였던 위트니스리를 대만으로 가도록 결단하지 않았다면.그가 인도했던 (적은무리)지방교회도 유사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워치만니의 사역은 위트니스리를 거치면서 중국을 벗어나 전세계로 확산 되었다.

7.소련의 스탈린.중국의 모택동.북한의 김일성등 공산주의자들은 잊지도 않은죄를 만들어서 성도들과 분리시키거나 아예 매장시키는효과적인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것은 첫째로 인도자가 간음같은 부도덕할 일을 저질렀다고 조작하는 것이고. 둘째로 주님을 부인했다고 선전하는 것이고. 셋째로 미제국주의의 간첩활동을 했다"라고 고발하는 패턴을 볼수있다.

(내키지 않던 중국 탈출)에서 발췌

"중국에 있는 선교사 사회에서는 스웨덴선교회의 레넬양이 갑자기 잡혀가서 인민재판에 넘겨져 처형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으로 인해 모두 공포에 사로잡혀있었다.체포.구금.인민재판.고발회의.재산몰수.정치범들을 실은 트럭등은 사회의 모든 공동체에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하고있었다.

"인민재판이 시작되었다.부유한지주들.유명한관리들.해외에서 사업하던사람들은 모두 재판을 받았다.죄수들은 밧줄이나 쇠사슬에 묶여 고발하는 사람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그곳에서 사람들이 판결을 내리는 것이었다. 재산을 몰수하라.노동수용소로 보내라! 처형하라!처형하라!

"그때는 날마다 처형될 사람의 명단이 벽에 붙었다. 사람들은 하루에 천명씩 감옥에 잡혀가고 있다고 숨죽여 말했다.양쯔강 언덕에는 어두워질때까지 언제나 사람들의 시체가 있었다.

"그리고 대학에 다니는 수많은 학생들이 믿음때문에 처형을 당하거나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어졌다.(릴리슈는이런상황에서 믿는이들을 비난한 대가로 의대를 졸업하였다)


추가글

*.릴리슈는 2013년에 "나의 잊을수없는기억들"이라는 영문책자를 출판했는데. 유동근목사는 이 책을 번역해서 아무런 증거자료도 없이 단순히 릴리슈가 쓴 책을 인용하여 “워치만 니, 강간 사건으로 교회에서 추방하였다고” 폭로 비난하고있다.

워치만 니가 투옥되기 전인 1942년 초기 여성동역자인 장퀴난 씨 등 두명의 여성 동역자와 간음을 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상해교회는 워치만 니의 사역을 6년 동안 중단시키고 추방조치했다는 것이 유동근 목사의 주장이다. 유 목사는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LILY HSU 박사의 『My Unforgettable Memories』 137~138페이지를 근거로 내세웠다.출처 : 기독교포털뉴스

그러나 워치만니의 가장 가까운 동역자였던 위트니스리는 워치만니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42년 상해에서는 하나의 큰 소요가 발생했다. 워치만니 가 동생의 제약회사를 돕는 일로 인해 그에 대한 상해 교회에 나쁜 소문이 퍼졌던 것이다. 1939년 그는 전반적인 경영에 착수했고 제약회사를 재정비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일했던 몇몇 형제들이 그에 대해 기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를 오해하는 나쁜 소문으로인해 상해 교회전체가 일어나서 그를 반대했고 심지어 집회중에도 그가 사역을 수행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상해에 있는 일본 특무기관이 거짓 기독교 단체를 만들어 상해 교회가 그곳에 가입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상해교회는 당연히 가입하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특무기관은 적어도 두세번 워치만니를 찿아와 대화 했다.

밤에 워치만니는 배를 준비하였다가 이튿날 배를 타고 떠나 버렸다.이처럼 안에도 소요가 있고 밖에도 핍박이 있었으므로 많은 형제자매들이 뒤로 물러나게 되어서 집회도 부득불 잠시 중단하게 되었고. 상해 교회는 문을 닫게 되었다. 그 때 전국에는 오직 두명 만이 워치만 니 를 반대하지 않았다고 어떤 사람은 말했다.

그 한사람은 왕포진자매님으로서 그녀는 상해에서 절대적으로 워치만 니 를 위하여 간증하였다. 다른 한사람은 멀리 북부 산동성 취프에 있었던 위트니스리 였다.위트니스 리는 완전히 워치만니를 위하여 간증을 했다. 유성화 형제는 워치만니를 반대하지도 않았고. 워치만니를 위하여 간증하지도 않았다.당시 상해는 이러한 국면에 처해 있었다. 후에 워치만니는 일본인과 협력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약회사를 상해에서 중경으로 옮기고. 거기에서 계속하여 제약회사를 경영했다"

1942년 반대하는 사람들은 “왜 하나님의 일을 떠나 상업으로 갔소.”라고 질문하였다. 그렇게 다구쳐 질문을 받을때 워치만니 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단지 바울이 고린도에서와 에베소에서 한 일을 할뿐이다.” (행20:34) 그리고 “나는 남편을 잃은 과부와 같다. 그래서 나가서 경제적 필요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였다. 워치만니가 동생의 요청으로 제약회사에 가게된것은 그당시 많은 동역자들이 가난으로 인해 폐결핵으로 죽었기 때문이었다.

유동근목사의 벧엘서원"워치만니와 상해지방교회" 말도안되는 거짓말 소개글

"이 책의 저자 릴리 수 박사는 워치만 니가 세운 상해 지방교회의 초기부터 교회에서 봉사하며 직접 경험했던 워치만 니와 지방교회, 또한 그의 투옥과 죽음까지의 과정에 있었던 이제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실체적 진실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지방교회의 초기 구성원으로서 현재 교회의 신자들의 아픔에 대한 객관적인 발견과 분석을 제공할 것입니다. 본서는 니(Nee)의 삶과 상해 지방교회에 관한 것입니다. 독특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 이 책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영감과 경고의 역할을 하며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며 병들게 하는 워치만 니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에 접근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1.릴리슈는 자신의 책에서 16세의 여고생때인 1947년9월에 상해교회에서 침례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워치만니가 1952년 2월에 공안에 체포되어 아무도 그를 볼수 없었기에 릴리슈가 워치만니를 볼수있는 기간은 불과 4년이고. 워치만니는 1948년 사역이 회복된후 복주의 고령산 훈련부지를 동생의 제약회사경영을 통하여 얻은 수익금으로 구입하여 일년에 두차례씩 수개월간 가르치기 위하여 고령산에 가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당시는 일본군대의 침입으로 인하여 정세가 불안했던 시기였다. 그렇다면 실제로 릴리슈가 워치만니를 본기간은 2년도 채 안될것이다. 1951년도의 릴리슈의 나이가 20살이었고. 중국공산당의 세뇌공작을 통하여 워치만니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한 1956년의 릴리슈의 나이는 25세의 처녀였다.상해교회에서 갓 교회생활을 시작한 새내기 젊은여자인 것이다. 이런 여인인 릴리슈를 워치만 니가 세운 상해 지방교회에서 초기부터 봉사하고.초기 구성원이라고 말할수있는가.



워치만니가 태어난 복주를 다녀와서


은혜로은글 2024-09-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4327.html

어느날 나의 친구는 나에게 워치만니의 책 한권을 주었다. 워치만니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생활” 은 나로 하여금 로마서를 이해하고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므로 워치만니가 태어난 중국의 복건성 복주에 가고 싶었다. 2015년 4월 8일 수원교회 성도들과 함께 복주와 워치만니가 사역했던 지방. 복주.온주.소주. 항주.상해를 방문하고 돌아왔다.그리고 그곳에서 위치만니의 사역을 통하여 얻어진 중국 성도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열정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매우 강한 영을 가진 성도들 이었다.1952년 워치만니는 중국 공산당에 의해 체포되었다.그리고 심문받고 무고 당하여 20년 동안 감금되었다.그는 1972년 감옥에서 죽었다. 그 당시 중국은 모택동의 혁명에 의해 장개석의 국민당을 몰아내고 공산국가를 이룩하였다. 이때의 중국공산당은 하나님을 믿는이들을 회유와 강압과 공포로 무섭게 핍박하던 시기였다

우리는 제일먼저 복건성의 수도인 복주시에 갔었다.복주는 워치만니가 태어난 곳이다. 그곳에서 나는 워치만니를 온전케 했던 마가렛 바버자매님이 사셨던 복주시 민강 변의 마미와 백야담 외국상선들이 드나들던 부두와 조선소. 세관이 있었던 나성탑 과 워치만니가 태어나고 살았던 생가와 초기 복주교회 집회장소 그리고 그가 다녔던 트리니티 대학과 그의 후반기 사역에서 성도들을 훈련시켰던 훈련장소인 고령산을 방문하였다. 고령산은 해발 800m되는 높고 아름다운 산이었다.

워치만니는 1902년에 복주에서 3대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니유청은 미 조합교회 단과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복건성 북부의 조합주의 자들 가운데 첫 번째 중국인 목사가 되었다. 아버지 니 윈쇼우는 2대 그리스도인이었다. 복주에 있는 미 조합교회 단과 대학에서 공부했고. 중국 세관의 관원이 되었다.그의 어머니 린 허핑 도 2대 그리스도인으로서 상해 중서 여자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상당한 수준의 영어실력을 같고 있었다. 워치만니인 니 쑤주는 3대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주에 있는 성공회의 삼일 트리니티 대학에서 공부 하였다. 그가 주님께 일으켜진 후에 영어 이름 워치만니로 바꾸었다.

1920년 워치만니는 17세 때 구원받았다. 주님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마가렛 바버자매님과 자주 접촉을 갖게 되었다.그당시 청나라는 복주를 개방하여 외국 상선들이 많이 드나들던곳이었다. 1895년 29세때 영국 성공회를 통하여 선교사로 마가렛 바버 자매님은 중국에 오게 되었다.그리고 복주시 여자 중학교에서 7년간 교사생활을 하였다. 다른 선교사들은 그녀를 질투하여 엄중한 죄목을 조작하여 그녀를 고발했다.그래서 선교회의 런던본부는 그녀를 본국으로 송환했다.그녀는 십자가의 공과를 배우고 체험하였기 때문에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버 자매님은 영국에서 팬톤형제님을 만났다. 팬톤은 로버트 고벳의 제자였다. 그는 기독교의 오류에 대하여 철저히 이해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파도 아니고 형제회도 아닌 성경에 따른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바버자매님은 펜톤을 통하여 많은 도움을 얻었다.그리고 어떤 선교회와 관련없이 자급으로 중국에 돌아와 복주시 교외 마미에 거처를 정하였다. 그녀는 거기서 많은시간을 기도하였으며 사람들이 찿아오면 복음을 전하거나 생명을 공급하였다. 그녀는 영과 생명에 대하여 상당한 인식이있었다.

우리 찬송가 282장은 그녀가 쓴것이다. 워치만니 형제님은 그것을변역하였다. “고난 받는 것이 내 길이라면, 간고의 길 주가 정하셨다면 ,주님과의 교통 더욱 친근해, 순간 순간 간격없기 원하네” . 주 지체하지 않으리, 은혜 주시기 기뻐해” (506장) 등이 있다. 그녀의 찬송을 부르면 우리는 그녀가 상당히 영적이었으며 또한 기도할줄아는 사람이었음을 느낄수 있다. 바버 자매님은 1930년 2월에 주님께 로 갔는데 그녀는 중요한 모든것을 니형제님에게 주었다. 특별히 귀중한 각주가 많이 적혀있는 그녀 자신이 읽었던 성경책을 니 형 제님에게 주었다.

1920년 워치만니는 여자도자매님의 복음집회를 통하여 구원받았다.1921년 그는 모친과 함께 바버자매님을찿아가서 큰 도움을 얻고 그곳에서 침례를 받았다.그때부터 바버 자매님은 워치만니를 알게 되었다. 바버자매님과의 접촉을 통하여 워치만니는 온전케 되었다. 그에게 어떤문제가 있으면 워치만니는 항상 그녀를 찿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