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이 처음에 하나님을 만났을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여호와 곧 너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다.(창 28:13)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암시했다. 우리는 모두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을 체험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이삭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과 은혜의 하나님을 체험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하나님을 체험했지만. 우리는 또한 야곱의 하나님을 체험하고 만날필요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번화시키시는 하나님 다루시는 하나님이 되실 것임을 의미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장막의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들 각 사람은 천막에 살았다. 성경이 요셉이 천막에 살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의미 심장하다. 이것은 요셉이 야곱의 삶의 일부였음을 보여준다.
어떤 형제 자매들은 특별히 남보다 총명하고 사려깊고 상황판단과 계산이 빠르고 지략이 뛰어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에 속한 지혜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해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고후1:12) 야곱은 항상 성령의 징계를 체험했다. 결과적으로 야곱은 자신의 총명함을 원하는 대로 발휘할수 없었다.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은 성령의 내적인 징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셩령께서 우리의 외적인 환경에서 행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성령의 징계는 성령께서 모든 사람과 일과 사건을 안배하시는 것을 가리키는 데 이것을 통해 우리는 징계를 받고 있다.
우리가 성령의 징계을 받을 수록 우리는 더 끝나게 된다. 성령의 징계의 마지막 결과는 항상 우리를 허물고 파쇄하고 감소시켜 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바로 성령의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은 새 창조물의 요소가 우리안에 건축 될수 있도록 우리의 옛창조물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신다.
하나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나누어 주는 것은(구원을 체험하는 것은) 첫단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깊은 일을 하기 원하시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안에 이루어 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처리하시는 목적은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우리 안에 이루는 것. 곧 그리스도가 우리안으로 일해 넣어 지고 조성되게 하는 것이다.
주님은 일곱서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기는 자가 될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다. 요한 계시록의 일곱서신의 모든 항목이 다 주님과 관계된 것이라는 점이다.
주님을 알지 못하면 교회도 알수없다.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의 상태에 만족하고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안다면 우리는 사람의 죄와 교회의 죄를 발견할 것이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아느냐에 달려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많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많지 않기 때문에 주제넘는 일들도 잘 용납한다. 우리가 주님을 안다면 우리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임의 대로 하는 것을 정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이 부족하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임의대로 하는 것을 용납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앞에 충성되다면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교회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찻아야 한다. 많은 때 어떤 사람이 임의로 행하는 그리스도인을 용납하고 있는것은 그가 그리스도에 대해 충성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에게 충성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정죄하시는 주님을 아는 계시가 없기 때문이다. 아. 때때로 우리는 주님과 그 백성 가운데서 우리가 누구를 섬겨야 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창 22:1-18절 "이런일이 있은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라고 부르시자 그가 대답하였다. "예 여기 있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여러산중의 하나를 일 러줄터이니 거기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하나님께서는 왜 그러게 하셨는가.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렇게 할수있었는가".
1.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그를 번제물로 바치라고 지시하심으로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브엘세바에서의 생활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번제물을 산출한다. 번제물은 사람을 죄에서 구속하시는 그리스도의 예표라기 보다는 주로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께드려지는 그리스도의 예표 이다. 우리가 교회생활 안에 더 머물수록 교회생활은 우리를 브엘세바에서 모리아로 더 많이 이끌것이다.
저는 브엘세바에서 살고있읍니다.이삭을위한 우물과 에셀나무가 있는 브엘세바에 머므십시요. 어느날 우리는 모리아로 인도 될것입니다.
2.창세기 22장1절부터 18절까지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인해 순종한 것을 본다. 모리아산으로가는 여정을 급하게 시행하지 마십시요.브엘세바에서 모리아로가는 노정의 믿음이 있을때 가십시요.그럴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칠수가 있다.
모리아는 여호와의 이상이란 뜻이다.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것을 체험하고 분명한 이상을 보았다.
3.오늘날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것은 교회생활 안에 있으며. 교회생활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것을 얻는다.
주님의 회복안에서 우리는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여행을 하고 있다. 모리아 산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삭을 바칠것이고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것을 누릴 것이다.
1. 창세기 21장 15-34절 까지에 나오는 두 우물은 두 종류의 생활을 위한 두 근원을 상징한다.
한우물은 혼이라는 광야에 있는 타고난 근원이다. 이근원은 광야에 살면서 이집트에 연결되어 있던 이스마엘로 상징된다. 다른우물은 우리의 영이라는 동산에 있는 구속된근원이다. 이근원은 브엘세바에 살면서 모리아산으로 이끌렸던 이삭으로 상징된다.
2.오늘날 두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다.
한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마엘과 같이 그들의 혼이라는 광야에서 자신을 위해 살면서 세상과 연결되어있다. 또 다른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삭과 같이 그들의 영안에서와 교회생활안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서 시온으로 이끌리고 있다.
심지어 참된 그리스도인 인 우리들도 이삭이 보여주는 예표대로 하나님의 목표에 도달하기위해 우리의 영안에서와 교회생활안에 살지 않는다면 이스마엘처럼 자신안에서 자신을 위해 살면서 세상과 연결되어 있을수 있다.
3.이스마엘의 생활의 근원이었던 그의 우물은 그를 활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활쏘는 사람은 창세기 10장 8절부터 12절까지 에 나오는 니므롯처럼 거친 사냥꾼 곧 광야에서 생명을 죽이는 사람이다. 우리가 혼이라는 광야에 머물며 이스마엘을 위한 우물. 곧 이스마엘의 생활의 근원에서 물을 마신다면, 자신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활로 생명을 죽이는 활쏘는 사람이 될것이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위해 자신의 근원이었던 이집트 에서 아내를 얻어주어 이집트의 것들로 이스마엘을 묶어버렸다.
4.이삭의 우물 곧 이삭의 생활의 근원은 브엘세바에 있었다.
출애굽기15장 27절에서 엘림에는 열두곳의 샘과 일흔 그루의 종려나무가 있었다.
브엘세바에서의 우물은 우리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넌동산의 샘 생수의 우물이라 레바논서 흐른는 시내로구나.(아 4:15)
아브라함은 어린 암양 일곱마리를 값으로 지불하고 그 우물을 되찾았다. 이삭을 위한 우물은 구속된 우물이었다. 이삭은 구속된 물 곧 언약의 물을 마셨다. 오늘날 우리가 마시고 있는 생수는 천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큰 값이 지불되어 구속된 우물이다.
5.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그곳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가는줄기와 매우 가느다란 잎을 가지고 있는 에셀나무는 풍성한 생명의 흐름 을 상징한다. 오늘날 교회생활은 브엘세바에 있는 우물곁에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합당한 교회생활은 모두 에셀나무로서 우리가 의지해 사는 생명나무로 표현한다.
6.아버지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아들하나님은 생명의 체현이시며 영하나님은 생명의 흐름이시다. 아버지 하나님은 생명의 빛이시고 아들하나님은 생명나무이시며 영 하나님은 생명의 강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