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통로는 혼과 몸으로 요약될수있다. 그러나 자세히 조사해 볼때 영의 통로는 마음의 목적. 동기. 목표. 의향 ...마음가짐. 의지 .육체 등으로 나누어 질수있다. 마음의 목적은 마음과 관련되어 있는 반면에 동기와 의향등은 마음이나 혼안에 있다. 육체는 신체적인 몸과 관련되어 있다.
이 모든 영의 통로들이 영을 둘러싸고 있으므로 영이 해방되어 그러한 것들을 통과하여 나올때 그것들은 자연스럽게 영에게 영향을 미치며. 영은 그것들의 요소와 상태를 수반하게 된다. 우리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면 영또한 해방될때 순수하지 않다. 우리의 의도가 깨끗하지 않다면. 나오는 영 또한 깨끗하지 않다.
우리는 과시하거나 경쟁 하기 위한 복음전파에서 ... 이러한 상활을 잘볼수있다. 어떤형제가 복음을 전할때 그의 영은 해방되지만 과시하거나 경쟁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 형제의 마음과 목적과 동기속에 과시하거나 경쟁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목적이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그 결과로 허세를 부리고 자랑하는 영이 나올 것이다. 더욱이 경쟁하려는 동기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경쟁하고 분투하는 영을 만지게 할것이다.
영의 더러움이 영의 통로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영을 처리하는 것은 영 그자체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통로를 처리하는 것이다. 우리가 행동하거나 말하려고 할때 우리는 내적인 의도과 동기가 순수한지 어떤 이기적인 목적이 있는지 자기 지향적인 것니 있는지. 이러한 것들을 처리하는 것이 곧 영을 처리하는 것이다.
자아의 처리와 타고난 조성의 처리는 영적인 체험에서 매우중요하다. 그것들은 생활뿐아니라. 봉사와도 관련되어 있다. 자아를 처리하고 타고난 조성을 처리하는 것은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한 준비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따라 즐거이 봉사하고자 한다면 자아의 처리와 타고난 조성의 처리는 필수적이다. 엄격히 말해서 자아와 타고난 조성을 처리하지 않은 이들은 결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에서 우리의 타고난 존재가 무력하고. 아무 자격이 없음을 깨달아야한다. 우리는 우리가 역량이 있고 능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일들에서는 역량이나 능력이 하나님의 일에는 쓸모가 없다. 우리의 봉사가 혼안에 있거나 육체안에 있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없다. 왜냐하면 육체는 하나님께 굴복할수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들에서 우리의 타고난 존재를 조금도 신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랑하며. 욱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한다.
타고난 조성은 우리의 신체적인 능력과 정신적인 능력의 총체를 의미한다. 타고난 조성은 혼적인?사람의 현저한 특징이며. 옛사람을 살아내는 두드러진 표현이다. 타고난 조성은 사람의 능력과 역량과 지혜와 영리함과 책략들과 기술들과 관련된다.
우리는 인간의 능력과 역량과 지혜와 영리함에 속한 것들을 타고난 조성으로 정의 했는데. 이것은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타고난 생영에서 온 것이지 하나님의 부활생명에서 온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들은 태어나면서 얻은 것들이다. 우리가 타고난 조성을 처리하는 것은 우리의 선천적인 능력과 역량과 지혜와 총명함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고 부활하게 됨으로서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고 유용하게 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어떤이들은 타고난 조성의 처리에 대하여 들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능력과 역량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념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분명한 이러한 관념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분명히 이러한 사람의능력과 역량이 필요하다.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 우리는 이땅에서 하나님의 일에 사람의 협력이 필요함을 보게 된다. 영적인 봉사에서 가장 큰원칙은 사람이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일을 행하실수 있어도 모든일 가운데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과 협력하기 를 원하신다. 우리는 흔히 성도들이 "하나님은 모든것을 하실수 있읍니다 "하고 말하는 것을 듣지만. 그들자신은 힘을 들여서 협력하지 않는다. 이러한 믿음은 헛된 것이다.
하나님은 하실수 있지만 하나님과 협력하고자 하는 이들을 찻고계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협력의 정도에 따라서 일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할수있고 유능하게 되어 모든 면에서 유용한 사람이 되도록 배워야 한다. 이럴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적합한 사람이 될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단지 천성적으로 역량있는 사람을 사용하실수없다. 타고난 능력이 파쇄되지 않는 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장애물이 된다. 타고난 능력은 반드시 파쇄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타고난 능력은 파쇠되고 죽음을 통과하며 부활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능한 사람도 쓰실수 없고 유능하지만. 파쇄되지 않은 사람도 쓰실수 없으시다. 하나님의 손안에서 유용한 이들은 자신의 재능이 파쇄된 유능한 이들이다.
육체와 자아와 타고난 조성. 이세가지 모두는 옛사람읜 표현이다. 따라서 그것들을 처리하는 원칙도 동일하다. 먼저 객관적인 사실을 알아야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과. 주관적인 체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 자신 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육체에 적용하면 육체를 처리하는 것이고. 우리의 의견에 적용하면 자아을 처리하는 것이고. 우리의 능력과 역량에 적용하면 타고난 조성을 처리하는 것이 된다.
타고난 조성을 처리하는 체험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성령의 교통안에 있어야한다. 우리가 자아를 처리하고, 타고난 조성을 처리하는 일에서 계속적인 체험을 갖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교통안에 살아야 한다. 이러한 체험을 적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를 통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적용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영리함과 수단과 역량을 발견하게될때 마다. 즉시로 그러한 것들에 십자가의 죽음을 적용해야 한다.
이일은 단한번 받아들임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적용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날마다 순간 순간 십자가를 타고난 조성에 적용해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 십자가가 계속 우리를 파쇄하는 일을 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 자신 에게서 나와서 하나님 안으로 곧 부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원칙이다. 만일 우리가 이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박힘을 통해 점검된다. 모든 타고난 역량과 능력과 미덕들은 우리 가운데 야수와 같이 될것이다. 이것이 회복안에 들어와 잠시 머물다가 떠났던 역량있는 많은 사람들의 상황이었다.
타고난 능력과 역량은 처리를 받은 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파쇄되고 죽음에 넘겨지는 것은 최종단계가 아니다. 참된 십자가의 죽음은 항상 부활을 가져온다. 창세기 35장 이후에 야곱은 완전히 처리를 받고 끝났으며 성숙함 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삽자가의 처리는 항상 부활에 이르게 한다.
사람의 역량이 십자가에 의해 더 처리 될수록 그사람은 더 유능해 진다.
빌 3장 10-11절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고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부활에 이르고자 합니다.
계 4:5절 그보좌에서 번개와 음성과 천둥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보좌 앞에는 일곱개의 등불이 타고 있었는데. 이 일곱등불은 하나님의 일곱영입니다.
계 5:5-7절 그러자 장로들 중에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그 두루마리와 일곱 봉인을 뗄수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보좌와 네 생물 한가운데에 그리고 장로들 한가운제에 갓 죽음을 당하신 것 같은 한 어린양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 어린양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셨는데 이것은 온 땅에 보내어지신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 그 어린양께서 나아오셔서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받아 드셨습니다.
요한 계시록 4장에는 하늘의 광경이 있고.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하나님은 그보좌에 앉아 계시며.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주적인 행정을 집행하고 하신다.
요한 계시록 5장과 6장 1절까지에서 우리는 사자-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본다. 그리고 사자-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행정의 일곱 봉인을 떼시는 것에 대한 이상을 본다. 장로들 중 한명이 그리스도를 유다 지파의 사자로 소개하지만.요한이 돌이켜 그분을 보았을 때 요한은 갓 죽임을 당하신 것 같은 어린양을 보았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을 위해 어린양이셨지만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싸우는 사자이시다. 하나님의 구속을 위해 그분은 어린양이시고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싸우는 사자 곧 유다 지파의 사자이시다.
창세기 49장 8절과 9절은 유다의 사자이신 그리스도에 관해 예언하지만.요한 계시록에서는 그리스도 께서 유다 지파의 사자이시라는 말을 본다. 그리스도는 구속의 방면에서는 승천하신 후 하늘들에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지만 하나님의 행정를 수행하시는 방면에서는 승천안에서 여전히 서 계신다.
스갸랴서에서는 우리는 일곱눈이 일곱등이라는 것을 알수있다. 그러나 우리가 요한 계시록에서 더 발전된 것을 대할 때 일곱 등은 더 이상 등잔대 위에만 있지 않고 보좌 아래에서 불타오르고 있다. 이 일곱 등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다. 결국 이 일곱영은 하나님의 행정의 가장 중심에 계신 어린 양의 일 곱 눈이시다.
요한 계시록 5장에서 요한이 바라보았을때 그가 본것은 일곱눈을 가진 어린양이었다. 이 사자-어린양은 앉아있지 않고 서계셨으며. 그분의 일곱눈은 번쩍 였다. 이것은 그분의 일이 끝나지 않앗음을 가리킨다. 요한 복음19장에서 다 이루신일은 구속의 일이었다.(30) 그러나 그분께서 서 계신다는 것과 그분의 눈이 번쩍이는 것 같다는 것은 모두 그분께서 행동을 취하고 계심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구속과 관련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승천이후에 하늘들에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지만 (히 1:3.10:12) 하나님의 행정을 수행하는 것에 관해서는 여전히 승천 안에서 서 계신다.
그분은 서 계시며. 그분의 눈은 번쩍이고. 관찰하고 살피고 심지어 타오른다. 눈은관찰하고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구속하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는 관찰하고 살피는 눈들을 갖고 계시면서.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시고 새예루살렘으로완결되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고 계신다.
유다지파의 사자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원수인 반역한 사탄을 이기셨고 그를 패배시키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두루마리를 펼수 있는 자격이 있으시다. 그리스도는 보좌에 앉으신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셨다. 이두루마리는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교회와 이스라엘과 세상과 우주를 구속하시기 위해 어린양의 피로 재정된 새언약.우주가운대 가장 위대한 권리증서이다.
여기에 두루마리는 새 언약. 새 유언이며. 이 봉인된 두루마리 속에 하나님의 경륜이 감추어져 있다. 이 두루마리는 일곱 봉인으로 닫혀있다. 이 두루마리는 주 예수님께서 온 우주를 위해 그분 자신의 피로 제정하신 새언약이다. 5장7절 "그 어린양께서 나 오셔서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 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받아 드셨습니다."
고전 10:16-17절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의 교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가는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이 아니겠습니까. 떡이 하나니요.우리 많은 사람이 한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한떡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상의 교통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피와 몸의 공동참여를 가리킨다. 참여자들인 우리는 주님의 피의 교통과 주님의 몸의 교통안에서 우리자신을 주님과 동일하게 여긴다. 고린도의 믿는 이들은 우상에게 바친 희생제물을 함부로 먹는 것이 사실상 희생제물뒤에 있는 귀신들과 자신들을 하나로 만드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었다.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확실히 그리스도의 피의 교통이 이고 우리가 떼는떡은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이다. 주의 상에는 떡과 잔이 있다. 떡은 두방면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 첫째로 이떡은 예수님의 물질적인 몸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목박히시고 창에 찔리시고.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셔쎴다. 둘째로 이떡은 그리스도의 비밀한 몸을 상징한다. 우리가 주님의 상에 놓인 떡에 참여할때. 우리는 개인적인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단체적인 그리스도를 먹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16절과17절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 해주지 않으셨다."이것은 나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을 지켜 나를 기념하십시요." "주님은 떡과 잔을 취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십시요"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분을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먹으면 먹을수록 그분은 우리와 함께 더욱더 기뻐하신다. 먹기위한 떡과 마시기 위한 잔이 있는 상이다. 주님의 상에서 우리는 주님을 잔치로 누리고 그분의 몸과 그분의 피를 누린다. 이렇게 누리는 것은 우리를 조성시켜서 한몸이 되게 한다. 17절은 "떡이 하나이요.우리많은 사람이 한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모두가 한 떡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은 합당한 교회 생활을 산출한다.
조지 뮬러가 한번은 어떤 형제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형제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주님을 접촉하게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뮐러는 그 형제에게 왜 그렇게 일찍 일어나야 하는지를 물어보았다. 그 형제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드리라고 요구하신 것은 제물의 똥이 아니라 기름진 것이었다고 말했다. (기름진 것은 제물의 가장 좋은 부분이었고, 똥은 가장 나쁜 부분이었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께 우리의 가장 좋은 시간을 드려야 한다. 참으로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헌신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온전케하고. 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고. 주님을 영화롭게 한다 할지라도. 만일 내가 주안에서 기쁨이 없고. 내 속사람이 매일 자양분을 얻지 못한다면. 나의 행한 모든 일들은 옳은 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마땅히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것을 묵상함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고. 격려와 경고와 책망과 가르침을 얻는것임을 알았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때 내 마음은 하나님과 체험적인 교통을 가질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른 아침에 신약을 묵상한다. 나는 성경을 읽을 때 모든 구절에서 축복을 구한다. 이는 대중앞에서 말씀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내 자신의 영적 양식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럴때 내가 번함없이 갖는 결과는 몇분이 지난 후 죄를 자백하거나 감사하거나 중보기도 하거나 간구히게 된다. 읽은 말씀 중에 어떤 인도하심이 있을 때에. 나는 그것으로 자신을 위해서나 남을 위하여 기도한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묵상하는 목적이. 나의 영적양식을 얻게하기 위한 것임을 염두에 둔다.
"하나님의 자녀가 매일 아침 응당 행해야 할일은 그의 속사람을 위하여 양식을 얻는 것이다. 우리 겉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고는 일을 할수 없듯이. 매일 아침 우리 속사람도 양식을 취해야 한다." 나는 나와 함께 신자가 된 사람들에게 이일을 생각해 보도록 친절하고도 엄숙히 부탁한다. 나는 사십년 동안 이방법을 실행해 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으로 이 방법을 소개 한다."
눅24:13 같으날 제자들중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육십스타디온 쯤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면서 일어난 이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 하며 토론하고 있을때에 예수님께서 가까이가셔서 그들과 동행하셨으나 그들의 눈이 가려져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 받는 이말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라고 하시자 그들이 슬픈 표장을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 중에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대는 예루살렘에 나그네로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동안거기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슨 일입니까. 라고 하시니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그분은 하나님과 온백성 앞에서 일이난 말에 능력 있으신 신언자 이셨습니다. 그런데 재제사장들과 우리의 관원들이 그분을 넘겨주어 사형 선고를 받으시게 하고 삽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분이시라는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일이 일어난지 이미 삼일째 입니다. 더구나 우리중어떤 여인 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아침일찍 무덤에 갔었으나. 그분의 시신은 보지 못하고 들아와서 말하였습니다. 천사들이 나타난 것을 보았는게 그천사들이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사람들중 몇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과연 여인들이 말한대로 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뵙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게서 그들에게 오! 어리석은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신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이 더딥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돠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시고 모세와 모든신언서에서 부터 시작하여 성경전체에 걸쳐 자신에 관한 기록들을 분명하게 설명해주셨다. 그들이 가려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은 더멀리 가시려는 것처럼 하셨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간청하여 저녁때가 다되고 날도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와 함께 묵읍시다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그들가 함게 묵으시려고 들어가셨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상에 앉으셔서 떡을 가지시어 축복하시고 떼시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은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러자 그들이 서로 말하였다.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 하시며 성경를 열어주실때에 우리속에서 마음이 불타지르지 않으셨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