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광채는 올리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호 14:6) His shoots will go forth; And his splendor will be like that of the olive tree, And his fragrance,like that of the trees of Lebanon.(Hosea 14:6)
호세아서 14장 6절은 "그의 광채는 올리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라고 말한다. 향기는 냄새이며, 냄새를 맡는 것은 가장 섬세한 감각으로서 표시도 없고 촉감도 없지만 사람에게 어떤 인상을 준다. 향기가 있을 때에 우리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향기는 감추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올리브기름은 성령을 예표한다. 우리가 그분의 광채를 지니고 다닌다면 다른 사람들은 향기를 맡을 것이다.(워치만 니, 2집 46권)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의 명성은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호 14:7-8)
Those who sit under his shade will return; They will revive like grain And will bud like the vine; His renown will be like the wine of Lebanon. Ephraim says, What have I yet to do with idols? I respond and look on him. I am like a green fir tree; From Me your fruit is found.(Hosea 14:7-8)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하시려고 또한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셨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롬8:29-30)
Because those whom He foreknew, He also predestinated to be conformed to the image of His Son, that He might be the Firstborn among many brothers; And those whom He predestinated, these He also called; and those whom He called, these He also justified; and those whom He justified, these He also glorified.(Rom.8:29-30)
하나님은 우리를 새 창조물로 만들기 원하시기 때문에, 새로움이신 그분 자신을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하심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셔야만 한다. 성경 66권에서 오직 한 구절, 호세아서 14장 8절만이 하나님께서 푸른 잣나무 같은 상록수처럼 항상 새로우시다고 말한다. 그분은 상록수 이시기 때문에, 그분 자신이 항상 푸른 요소가 되신다. 이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그러한 요소로서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하심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매일 나는 늙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새롭게 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왜냐하면 나는 계속 새로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푸른 나무' 이신 하나님께 속한 무언가가 내 존재 안으로 분배되고 있다. (신성한 계시의 중심 노선, 422쪽)
내가 사람의 줄들, 곧 사랑의 끈들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호 11:4)
I drew them with cords of a man, With bands of love; And I was to them like those Who lift off the yoke on their jaws; And I gently caused them to eat.(Hosea 11:4)
호세아서 11장 4절에 나오는 "내가 사람의 줄들, 곧 사랑의 끈들"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신성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인성의 수준에서,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사랑은 신성하지만, 사람의 줄들로, 즉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 우리에게 도달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끄시는 사람의 줄들은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포함한다. 바로 이 모든 단계에 의해 하나님의 사랑이 그분의 구원 안에서 우리에게 도달한다(롬 5:8, 요일 4:9-10).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곧 하나님의 변하지 않고 굴복시키는 사랑이 우리와 관련하여 효력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이 효력이 있는 것은 그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영어 회복역,호 11:4 각주1)
"난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여자들 중 내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참 심히 기뻐하였고. 그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아가서 2장 1절에서 연인은 자신이 다만 보잘것 없는 평범한(샤론-평원)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멸시받는 생활(수선화)을 하며. 또 한면에서는 낮은 위치 (골짜기)에서 순수하고 신뢰하는 생활(백합화)을 한다는 것을 겸손히 깨닫는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세상을 사랑하는 간음하는 여자들(딸들-약4:4)가운데 있는 그분의 연인이자, 더럽고 믿지 않는 사람들(가시들)가운데 순수하고 신뢰하는 생활(백합화-마 6:28)을 하는 사람인 그녀를 귀하게 여기신다.(영어회복역,아 2:1,2 각주1)
아가서 라이프 스타디의 시작에서 나는 워치만니 형제님에 대한 감사의 말과 보답의 기념과 표현을 하고싶다. 1935년 5월에 워치만니형제님은 소수의 동역자들과 아가서를 연구했으며. 나는 그모임에 열 명이 넘지않는 참석자중 한사람으로 참석하였다. 그 모임은 상해 근처 항주시의 서호 연안에있는 한 호텔에서 있었다.
이 책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가 갖는 네 단계를 묘사하고 있으며. 다음의 네 문장으로 요약될수 있다. 1.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사랑에 매혹되고 그분의 달콤함 안에서 그분께 이끌리어 완전한 만족을 위해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자여야 한다. 2.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됨을 통해 자아로 부터 구출되도록 그분께 부르심 받은 자여야 한다. 3.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있는 하나님의 새창조로서 승천안에서 살도록 그분께 부르심 받은 자여야 한다. 4.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부활을 체험한 후에 그분의 십자가를 통하여 휘장안에서 살도록 더욱 강하게 부르심받은 자여야 한다.
시가서인 아가서에서 우리는 십자가, 부활. 승천 이라는 단어를 찾아볼수없다. 또한 새창조 혹은 휘장안에 라는 말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 책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여러단계를 밝혀 준다고 말할수 있는가.이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아가서에서 다양한 상징들을 통해 계시되었거나 밝혀진 것들을 볼필요가 있다.
십자가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십자가의 상징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부활과 승천이라는 말 대신에 부활과 승천에 관한 상징들이 있다. 그러므로 이책을 읽을 때 가장 어려운점은 이 상징들을 해석하는 것이다.
호세아의 사역 시기는 주전 785년부터 725년까지 육십년 동안이며. 그의 사역의 장소는 북 이스라엘이었다. 그가 사역하던 때에는 이스라엘이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호세아의 사역의 대상은 음란하고 변절한 이스라엘 왕국이었다. 음란은 이스라엘의 위치를 가리킨다. 상태를 말하자면 그들은 간음했으며 위치로 말하자면 그들은 변절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내인 이스라엘의 상황이었다.
호세아가 선지자였을 당시에 이스라엘은 기울어져 있었다. 왕국은 혼란 속에 있었다. 왕과 백성 모두 우상과 간음. 무지,악행.거짓말, 절도, 살인. 기만, 이방과의 혼합, 왕국을 팔아넘기는 등의 일에 연루되어 있었다. 아내인 이스라엘이 음란하고 변절해도 그분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여전히 돌아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 이캑의 중심 사상이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당시에 하나님께 버림받았고. 나중에 주후 70년 타이터스때에도 그러했고 지금까지 회복시키지 않으셨다.
호세아는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여 세 자녀을 두었다. 후에 그녀가 행음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다시 데려왔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묘사하는 예표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좋아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으로인하여 그녀를 택하신 것이다.
호세아서는 매우 풍성하다. 이책에 담긴 많은 풍성은 직접적으로 서술되어있지 않고. 도리어 호세아의 시적인 글로 암시되어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책의 시적인 글이 암시하는 것들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암시된것들의 의미를 알기는 쉽지 않다. 호세아서 11장1절부터 4절까지에서 그리스도를 암시하는 세가지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신 것과 하나님께서 사람의 줄들로 이스라엘을 이끄신것과 하나님께서 부드럽게 그들을 먹이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