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에 따르면 세 종류의 신언자들이 있다.첫째는 에베소소 2장과 4장에 언급된 신언자들이고. 둘째는 사도행전21장에 언급된 신언자들이고. 셋째는 고린도 전서14장에서 언급된 신언자들이다. 엡 2장 20절과 4장 11절. 12절에 언급된 신언자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안배하신 사람들이다.(고전 14:3-5)
첫번째 종류의 신언자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안배하신 사람들이다. 모든 믿는 이들이 이러한 신언자는 아니다. 이러한 첫번째 종류의 신언자에 관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9절에서 "다 신언자들이겠습니까," 라고 말하였다. 모든 믿는이들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안배하신 신언자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믿는이들이 세번째 종류의 신언자는 될수있다. (고전 14:1.5.31)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모든믿는 이들이 신언자가 아니라고 말했으나. 14장 에서는 모든믿는이들이 신언자가 될수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여러종류의 신언자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신언자에 대해 명백한 모순처럼 보이는 이 문제를 해결할수있다. 신언하는 것은 다만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웨스트는 그가 번역한 신약성경에서 "신언하다" 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를 "다른 사람에게 신성한 계시를 나누어주다."로 번역하였다.(고전 14"4 하) 신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받고 소유할수있었으며. 그런다음 이러한 말씀을 유기적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의 건축을 위하여 말해낼수있다.
우리는 형제자매들에게 어떻게 신언해야 하는지를 서둘러 가르치지 말아야한다. 우리는 유치원생들에게 논문을 쓰도록 가르칠수 없다. 먼저는 반드시 초등학교에 가서 글씨 쓰기 를 연습해야하고.계속해서 문장을 만드는 것을 배워야한다. 오직 문장과 문장을 어떻게 연이어 작성하는 지를 배운후에야 논문을 쓸수있을 것이다.
우리는 소그룹집회에서 복음전파를 장려하고.새로운 사람들을 얻은후에 먼저는 반드시 가정집회을 통해 그들을 보양하고 보살펴야한다. 그들이 자란후에 우리는 그들을 소그룹집회로 인도해야한다. 소그룹 집회에서는 서로 진리를 가르치고 배우며, 영적생명의 성장를 추구해야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인 교회를 건축하기위해 신언하도록해야한다. 신언은 모든 은사중에 뛰어난 은사이다. 우리가 신언하는 기능을 얻기위해서는 반드시 추구해야한다. 소그룹집회는 교회생활과 교회 봉사의 주된부분이다.
복음전파 복음전파는 반드시 각 사람이 직접 다른 사람들의 가정을 방문함으로써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어야한다. 복음전파는 결코 복음집회를 소집하여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만일 큰 복음집회만 있다면 믿는 이들은 하락하여 단지 레위인으로서 봉사할것이며. 소수의 사람만이 제한된 복음의 제사장으로서 봉사할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믿는 이들이복음의 제사장으로서 갖고있는 영적인기능이 말살될것이다.
마 18:19, 여러분가운데 두 세사람이 이땅에서 무엇을구하든지 마음을 같이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께서 그들을 위하여 다 이루어주실것입니다. 행 2:46. 그들이 날마다 한마음 한뜻으로 성전에 모이고. 이집 저집에서 떡을 떼기를 꾸준히 계속하고 고전 1:10. 형제님들. 이제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같은 것을 말하고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게 하여. 같은 생각과 의견으로 조율되도록 하십시요. 빌 2:2.여러분은 같은 것을 생각하고, 같은사랑을 가지며. 혼안에서 연결되고, 한가지 것을 생각하여. 나의 기쁨이 넘치도록 해주십시요. 빌 4:2. 내가 유오디아에게 권유하고 순두게에게도 권유합니다. 주님안에서 같은 것을 생각하십시오. 롬 15:5-6.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라 서로 같은 생각을 갖게 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한마음 한뜻으로 그리고 한입으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예수님은 믿는이들이 하나되도록 기도하셨고. 사도행전 2장에서오순절날에 완결되신 영이신 그분 자신을 부어주심으로써 그분의 기도를 성취하셨다. 그것는 하나의 사실이었다. 하나의 사실이 성취된후에는 그하나를 실행할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사실로서만 하나가 있고, 현재적이고 실지적으로 한마음 한뜻이 없다면, 우리가 갖는 하나는 객관적이고 추상적일 것이다. 즉, 그것은 우리에게 실지적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부어짐으로 성취된 하나를 적용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한마음 한뜻을 반드시 실행해야한다. 여러분이 성령안의 침례를 체험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한마음 한뜻을 가져야한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시어 한마음 한뜻을 실행하게 하셨다. 땅에서 두사람이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 기도할때 축복이있다. 한마음 한뜻이 없이 가정집회들을 갖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방문하고 소책자들을 나누어주기 위해서는 한마음 한뜻이 필요하다. 한마음 한뜻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행함이 공허할것이다.
비록 내가 여러해 동안 성경을 연구해 왔지만. 나는 최근까지도 하나는 몸과같고 한마음 한뜻이 몸속의 심장과 같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리의 질병은 다만 겉의 신체에 있는 질병과 같지않고, 몸속의 심장에 있는 질병과같다. 나는 주님께서 내게 보여주신것과 나의 순수한 양심에 따라 솔직하고도 정직하게 진실을 말하고있다.
우리는 우리의 질병이 무엇인지를 알필요가 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질병은 우리에게 한마은 한뜻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병든 심장을 지닌 하나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를 지키고 적용하고. 하나를 사용하고 누리며. 하나를 살기 위해서 우리는 한마음 한뜻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 한마음 한뜻은 사도행전 1장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그러나 그 이전에 그들은 한마음 한뜻안에 있지않았다. 주님의 죽음이전에 제자들은 서로 타투었으며 기도할 능력이 없었다. (마26:40-45)주님께서 부활하신후 생명주시는 영을 제자들에게 불어넣으신후 제자들 백이십명은 몸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그 하나안에서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기도를 꾸준히 계속하였다.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을 나누는 경계표는 성령침례가 아니었다. 경계표는 백이십명의 성도들의 한마음 한뜻이 었다. 우리가 성령안의 침례를 체험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한마음 한뜻을 가져야한다.
획일화와 하나는 같은 것이 아니다. 가족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아버지.어머니 또 자녀들이 있을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나이가 다르고 성숙의 정도가 다르다. 그런 가족에서 모든 구성원을 같은 나이로 획일화 시킬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하나일수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안에서 형제 자매들 가운데 성숙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성숙의 정도 차이를 없애는 것은 잘못된것이며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생활의 실행에는 가족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가 필요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한다면 한마음 한뜻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한마음 한뜻이 될것을 요청했다. 또한 고린도 교회에게도 권면했다. 바울은 이 자매들이 주님을 사랑하지만 한마음 한뜻을 상실해 버린 것을 알고 있었다. 누가 옳은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는 한마음 한뜻이 필요하고 하나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교회의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축복을 얻는 길을 반드시 보아야한다. 한마음 한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같은 생각과 같은 의견으로 조율되어야한다. 주님의 일과 교회생활과 영적인생활에서 가장 심각한 손상시키는 요인은 우리의 의견이다. 에베소서 4장2-3절은 그 영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킬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엡 4장 2-3절: 모든일에 겸손하고 온유하며. 또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안애서 서를를 짊어지고 화평의 매는 띠로 그영의 하나를 힘써 지키십시요. 이러한 미덕들은 우리의 타고난 인성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성안에 있는 것이다. 4장3절에 있는 그영의 하나를 말하기 전에 여기에서 이 미덕들이 언급된사실은 그 영의 하나를 지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이러한 미덕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라킨다.
여기에서 하나는 그영의 하나이지만. 이하나는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하는 것이다. 하나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지 그영의 책임이 아니다. 여기에 신성에 해당하는 그영의 하나와 인성에 해당하는 하나를 지키는 것이 모두있다. 만일 우리가 그영의 하나를 지키지 않고 그영의 하나만을 가진다면 결핍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하나를 지켜야한다. 우리는 겸손하고 온유하며 오래 참음으로써. 또한 사랑안에서 서로를 짊어짐으로써 그영의 하나를 지켜야한다. 그러므로 그영의 하나를 지키려면 이러한 변화된 미덕들이 있는 인성이 필요하다.
요엘 1장 1-4절 "여호와 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늙은 자들아 들어라 이땅에 사는 온 백성아 귀를 기울여라. 너희가 사는날이나 너희 조상이 살던 날에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이있느냐. 이일이 너희 자녀에게 전하여라. 그리고 너희 자녀는 또 그 자녀에게 전하게 하고. 그들은 또 그 다음 자녀에게 전하게 하여라. 갉아 먹는 메뚜기가 남긴 것을 떼로 몰려드는 메뚜기가 먹고 떼로 몰려드는 메뚜기가 남긴것을 핥아 먹는 메뚜기가 먹고,핥아먹는 메뚜기 가 남긴것을 먹어치우는 메뚜기가 먹었도다".
대신언서와 같이 소신언서는 이스라엘을 사랑으로 징벌하시고 이스라엘을 통치적으로 다루시며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그분의 경륜안에서중심과 전부이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이끌어와 복원의 시대인 왕국을 가져온다는 것을 밝혀주는데. 복원의 시대이니이왕국은 날고 파괴된 우주를 새 예루살렘이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안으로 이끌 것이다.
미가5장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아 7장10-12절 :나는 내사랑하는자에게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 구나. 내 사랑하는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일찍 일어나서 포도원으로가서 포도움이 돋았는지.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거기에서 내가 내사랑을 네게주리라.
아가서 6장을 끝으로 하여 아가서는 끝나야 할것 같지만. 7장에서 솔로몬은 포도원의 주인이며. 이포도원들은 많은 수고를 필요로한다. 이제 술람미가 된 시골소녀는 그의 동역자가 되어야한다. 이것은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들이 결국에는 주님의일에 참여할 필요가 있음을 가리킨다. 주님의일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격을 갖츨필요가 있으며. 우리의 자격은 영적인 장비에 달려있다.
즉 우리가 신성한 생명의 모든 속성들로 장비된는 것에 달려있다. 아가서 7장1절부터 9절상반절까지에서 우리는 한 연인인 술람미가 주님의 일을 위한 일꾼으로 장비된것을 본다. 우리는 그녀의 자격조건에 대한 묘사를 보았다. 이제 우리는 그녀가 사랑하는 분과 함께 일하는 것을 볼것이다. 아가서 7장10절에서 연인은 사랑하는 분의 갈망을 위해 사랑하는 분께속했다고 고백한다.
11절은 그녀가 사랑하는 분과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온 세상를 위한 일을 수행하기 원한다는것을 계시한다. 이것은 그녀가 종파적인 사람이 아님을 가리킨다. 주님의 일에서 우리의 일을 열어놓고, 우리주머니 속에 넣지않기란 쉽지않다. 우리는 일을 열어놓기를 배워야하며. 그럼으로써 다른이들이 그곳에와서 머물고, 우리가 다른곳에가서 머물수있게 된다. 이것이 한일을 한몸안에 두는것이다.
아가서는 진리를 강조하지않으며. 진리를 오직 한번만 언급하고있다. 아가서4장8절의 아마나라는 말은 진리를 의미한다. 하지만 아가서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일하기 위해 생명의 성숙이 필요하며, 우리가 주님과 하나되는 것이 필요하고. 우리의 일이 그분의 몸을 위한 것이어야함을 본다. 우리 주님은 솔로몬이시며 우리는 술람미가 되어야한다. 즉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한다. 사실상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되어야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살았기 때문에 참된 술람미였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배필로서 일하며 모든 포도원을 돌본다. (아 8:11) 이것은 우리의 일이 몸을위한 것이여야하며, 단지 한도시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 우리는 온세상을 위해 일해야한다. 이것이 지방교회들을 세우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에대한 완전한 인식 안으로 이끌었던 바울의 일이다.
그녀는 주님과 함께 포도원에 내려가 포도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를본다.(12절) 그녀는 생명의 징조를 주님과 함께보고 있으면 열매를 맺을 소망이 보이는 지역을 주님과 함께 생각해 보고있다. 그녀는 해방되었다.그러므로 모든 성도에 관한 것이 다 그녀의 관심사가 되었다. 아주어린 믿는이에게서 아주 조금이라도 생명의 징조가 나타나고 열매를 맺을 소망이 보이면 그녀는 관심을 갖는다. 그들이 누구에게서 산출되었고.
그들이 우리의 집회에 참석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것은그 들이 주님께 무엇을 드릴수 있는가 이다. 주님의 일에서 주님과 이러한 교통을 하는것은 생명에 있어서 주님과 완전히 연합된결과이다. 거기에서 내가 사랑을 네게 주리라. 거기에서 는 어디인가. 들과 마을과 포도원이다. 즉주님의일이다. 주님의 일안에서 내가 내사랑을 네게 주리라. 우리는 주님의 일안에서 우리의 사랑을 주님께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과거에 일은 항상 그녀의 마음을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것이었다.
돌보아야할일이 많으므로 그녀는 주님의 발앞에서 갖는 교통을잃었다. 어린 믿는이들의 경우에 일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발전시켜주지 못한다. 오히려 일이 그들과 주님사이에 장벽이 된다. 이것은 불완전한 연합의 표시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체험은 완전한 단계에 들어갔다. 그녀는 능히 주님의 일을 주님 자신께 연결시킬수가 있고. 이 세상까지도 주님께 연결시킬수가 있다. 이제그녀는 주님의 형제들을 주님께 연결시킬수있다.
이제 그녀는 주님께서 일하시는 장소에서 자신의 사랑을 주님께 표현할수가 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일을 주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수가있다. 그녀는 일을 한후에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고 더 이상 일로 인하여 주님께 속한 무언가를 잃어버릴까 염려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