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11장(그리스도에 관한 세가지 암시)


구약 2012-07-29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41452.html

호세아서 14장 4절부터 8절까지는 호세아서 2장15절부터 23절까지.3장 5절.6장 1절부터 3절까지 10장 12절에 계시된 것과같이 복원된 이스라엘을 묘사한다.
호세아 11장1-6:
                   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르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5.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가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것이라.
                    6.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눅24장16절
그들의 눈이 가려져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 받는 이 말들이 무슨이야기 입니까. 라고 하시자 그들이 스프뉴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중에 그로바라는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대는 예루살렘에 나그네로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동안 거기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슨일입니까.라고 하시니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나사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온 백성앞에서 일이나 말에 능력있으신 신언자 이셨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우리의 관원들이 그분을 넘겨주고 사형선고를 받으시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분이시라는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일이 일어난지 이미 삼일째 입니다. 더구나 우리중 어떤 여인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그들이 아침일찍 무덤에 갔었으나 그분의 시신을 보지못하고 돌아와서 말하였습니다.
천사들이 예수님께서 살아계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사람들 중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과연 여인들이 말한 대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뵙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 어리석은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신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이 더딥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과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시고 모세와 신언서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전체에 걸쳐 자신에 관한 기록들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셨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봉사 2012-07-29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41445.html
과거 여러해동안 나의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일 중에서 나는 기적적인 은사들과 능력을 지닌 재능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존재와 그들이 행했던 것은 지방교회의 건축에 혼란과 손실을 가져욌다.  결국 지방교회은 바울이 디모데 전서3장에서 기록한
대로 그러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건축 될수있다.

이러한 사람들 아래서 교회는 점차벅으로 견고하게 건축될것이다. 나는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능력있고 기적적인 은사를 갖고 있으며.
재능있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교회 건축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을 보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유능한 사람들이었지만, 디모데 전서 3장에서 바울이 언급한 자격들을 갖추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의 영적인 능력으로 30센티 미터를 건축할수 있었지만 그들의 존재로 인해 35센티 미터를 허물어버린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로 무언가를 건축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존재로인해 더 많은것을 허물어뜨린다.

모든 죄들은 다 보편적이지만 주님의 일꾼은 어떤 특별한 죄들을 범할수있는데. 곧 하나님의 일에서 범하는 죄들이다.
우리는 이일에 특별히 주의 해야한다. 일에 관련된 죄는 반드시 교만이나 질투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육체가 들어나고 자아의 뜻이나오고.
아무렇케나 말하고. 경솔하게 제한하는 이러한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일과 관련된 특별한 죄이다.
봉사를 하지않는 사람은 성소에 대한 죄를 짓지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일반적인 죄외에 성소에 대한 죄를 지을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세게에서나 세속적인 세계에서는 사람의 존재보다는 사람의 재능과 능력을 보고 일하는데 관심을 집중한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가하는 일보다 우리의 존재를 더 관심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부류의 사람인지를 주의 하시며.
어떤부류의 생활을 사는지를 주의 하신다.

예수님은 이땅에 사셨을때 끊임없이 고난을 받으셨다.  그분의 이름인 예수는 고난의 사람. 슬픔의 사람을 의미한다.(사 53:3)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나사렛 예수님을 따르며.
고난과 박해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건축을위하여 고난에 참여해야한다.
만일 우리가 복음전파나 성경을 가르치는 그러한 활동에만 관심한다면 우리는 환영을 받고 인정을 받을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전파나 가르침의 목표가 교회건축이라면 우리는  종교인들에게 반대를 당할것이다.

--워치만니--


분량의 한계에 따라


봉사 2012-07-2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41293.html

고후 10:13-14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분량을 벗어나 자랑하지 않고. 분량을 재어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에 따라 자랑하는데. 여러분에게 간것도 그분량의 한계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가서는 안될 사람들이 아니며. 우리의 범위를 벗아나 스스로 지나치게 나아간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어서 여러분에게 까지 나아간 사람은 우리가 처음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3절에 있는 분량은 하나님께서 한계를 정해 주신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우리의일이나 체험을 우리의 분량에 꼭 맞게 할당하셨다.  더나아가 하나님은 그분에 대한 누림도 우리에게 꼭 맞게 주셨다 
우리모두는 주님을 위한 봉사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일에는 항상제한이 있다는 것을 배울필요가 있다.

이것은 교회의 봉사에 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봉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직 어는정도의 분량만을  우리에게 할당해 주신다는 것과 우리가 스스로 지나치게 뻗어나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깨달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제한과 우리의 관할구역을 알고.다른사람들의 영역 안으로 넘어가지 말아야한다. 바울과같이 우리는 우리의 한계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측량해주신 정도에 다라움직이고 행동해야한다.

사도행전 16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유럽으로 부르신 것이 바울에게 분명해졌다는 것을 안다. 그는 하나님의 재어주심에 따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아가야에 갔다.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는  다 바울의 한계아래 있었다.
그러므로 유대주의자들은  이 영역에 들어와서 문제를 일으키지 말았아야 했다. 이것이 이구절을 쓸때 바울의  깊은 속에 있던 느낌이었다. 그는 완전히 하나님의 제한아래있는 사람의 좋은 본이다.

나는 특히 청년들에게 이부분의 말씀을 연구하며. 어떻게 교회 봉사에서 처신하며 어떻게 주님의 회복안에서 움직여햐 할것인지를 이말씀에서 배울것을 격려한다.
청년들이여. 여러분은 자신의 한계와 제한을 알아야한다. 이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알마만큼 측량하셨으며 얼마만큼 여러분에게 할당하셨는지를 알아야함을 의미한다.

이런제한과 한계는 매우 실지적으로 우리의 육체를 처리한다. 우리의 타고난 사람은  제한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아시기 때문에 경계와 제한을 정하시어  우리가 그분께서 우리에게 할당해 주신 분량안에 머무르도록하신다.



믿음의 분량에따라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


봉사 2012-07-19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41292.html
고전 12:18.그러나 에제 하나님은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들을 가가 몸에 두셨으니.
롬 12:3-5.  나는 여러분 각 사람에게 말합니다. 마땅히 생각해야 할것이상으로 자신을 더 높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분수에 맞게 생각 하십시오. 모든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많은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각 사람이 서로 지체들입니다.

고린도 전서 12장 18절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몸인 각지체에게 분명한 위치와 분명한 임무와 분명한 직임이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교파의 조직안에서는 좋은 배경과 사회적인 지위와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 언변이 좋거나 은사가 있는 사람을 인도자로 삼는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주님앞에서 계시가 없고 믿음이 없고 체험이 없으며,다만타고난 것들을 교회 가운데에 가져올 뿐이다. 이것은 몸을 공급할수없다. 그뿐아니라 몸안에 죽음을 가져온다. 몸의사역은 이런 타고난 것들로 결정되는 것이아니다.
한지체가 몸 안에서 기능를 발휘하는 것은 주님 앞에서 그가 얻은것과 믿음의 분량에 따라야하며.동시에 하나님께서 안배하신 순서에 따라야한다.

그러므로 첫째로.우리는 한면으로는 몸을 공급할내용이 있도록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와 체험을 추구해야하며. 
              둘째로. 몸안에 있는 질서. 즉 하나님께서 몸안에서 안배하신 순서를 알아야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분량에 기꺼이 제한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분량을 넘어서자마자. 머리의 권위를 넘어서고
기름바름에서 벗어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분량을 넘어설때 몸의 질서를 해치게 된다.

그리스도의몸은 유기적인 생명이며. 사람의 안배로 좌우될수 있는 것이아니다. 각 지체는 반드시 머리에세서 오는 생명을
얻어야하고. 합당한 질서 아래 기능을 발휘해야한다. 머리와의 관계사 합당할때 우리는 몸 안에 있는 우리의 위치를
자연스럽게 지키게 된다.

로마서 12장 3절은 "마땅히 생각해야 할것 이상으로 자신을 더높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뉘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순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라고 말한다. 만일 여러분이 믿음의 양이 바울보다 더크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제 정신이 아니다. 여러분은 분수에 맞게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분수에 맞게 생각한다면 "바울 형제님는 태산이지만. 나는 작은 돌멩이에 불과하다"라고 말할 것이다.
성도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신이 장로들보다 더 크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것은 생각이 분명하지 못한 것이다.

장로들은 여러분보다 적어도 5센티미터는 더 크다. 그들은 여러분 보다 영적으로 적어도 약간은 더 크고 더 연장하다.
냉철한 생각이 없이  우리자신을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높게 생각하는 것은 몸의 생활의 합당한 질서를 소멸시킨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몸의 생활의 실행을 다루었다. 몸에 대한 결정에는 한가지 중점이 있는데. 그것은 곧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자신를
 더 높게 생가하지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이 분량에 따라 분수에 맞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할당해 주셨을 뿐아니라 나누어 주셨다. 하니님은 우리에게 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믿음을 주셨지만.
양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양의 문제는 여러분이 얼마나 성장하는지에 달려있다. 만일 여러분이 오늘 사도 바울만큼 자란다면.
여러분이 받아들이는 믿음의 분량은 크게 넓어질것이다. 하나님는 먼저 질에 있어서 우리에게 동일한 믿음을 할당해주셨으며.
그런다음 양에 있어서 믿음을 나누어주셨다. 여러분이 어떤종류의 믿음을 갖는지는 하나님의 할당하심에 달려있다.

여러분이 얼마난 많은 믿음을 갖는지는 하나님의 나주어 주심에 달려있다. 하나님의 나누어 주심은 여러분의 태도에 달려있다.
만일 여러분이 분수에 맞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믿음를 더많이 나누어 주시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믿음을
감소시키실지 모른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터키여행 2012-07-17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41249.html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한 지방. 곧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도시의행정구역내애 세워진 최초의 교회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마태복음 18장 17절에서 가리키신바와같이 그 지방에 있는 교회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마태복음 16장18절에서 계시하는 우주적이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우주적인 교회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문제(한 지방에 교회를 세우는 것)에 관한 기록은 신약전체에 걸쳐 일관적이다.

요한 계시록을 일곱교회에게 보낸 것은 일곱도시에 있는 일곱 지방교회에 보낸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생활의
실행이 한도시에 한교회를 갖는 실행. 곧 한도시에 오직하나의 교회만 있는 실행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어느도시에도 하나를  초월하는 교회가 없었다.

이것이 길이난 구역이 아닌. 도시나 지방를 경계로 하는 지방교회이다, 한지방교회의 관할지역은 그 교회가 위치한
도시 전체를 포함해야한다. 즉 그 도시의 경계보다 더 크거나 작아서는 안된다.
그 경계내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이 그 도시안에서 하나의 유일한 지방교회를 구성하다.

고린도 전서 1장2절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교회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교회의 존재와 표현과 실행을 위한
고린도라는 지방을 보여준다. 그러한 지방은 지방교회들의 지방적인 터가 되며.
바로 이 터 위에 지방교회들은 각각 건축된다.(행 8:1.13:1.계1:11)
행8장1절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핍박이 나서 사오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13장1절:안디옥에 있는 교회 곧 그지방에 있는 교회에 신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나바와...
계1장11절:네가 보는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일곱교회.곧 에베소.서머나.버가모,두아디라.사데. 빌라델피아.라오디게에 있는
교회에게 보내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의 존재와 표현과 실행을 위해서 교회는 한터. 한 장소가 필요하고 신약에 따르면 그장소는 지방이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는 고린도라는 도시의 터위에 건축되었다. 안디옥에 있는 교회는 안디옥이라는 터위에 건축되었다.
뉴욕에 있는 교회는 뉴욕시라는 터 위에 건축된다. 그러므로 지방은 자연적으로 교회의 터가 된다.

워치만니 형제님은 하나님께서 지방이라는 터 위에 교회를 건축하시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지구상 어는곳이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함께 모여 한 교회가 되어야한다. 만일 지방이라는 합당한 경계가 없다면 교회들을 세우는
경계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 남부 켈리포니아에는  한국복음교회라고 불리는 한 교회가 있다.

그 믿는 이들은 그들의 터로  한국을 사용했다. 또한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의 터를 아주쉽게 세운다.
예를 든다면 늘프른교회.비젼교회.생명샘.봉한샘.사랑.큰믿음.소망.순복음.제일.제이.제삼등....  식당을 세우는 것보다
교회를 세우는 것이 더 쉽다.
모든 교파들은 남침례회. 장로회.감리회.루터교.셩결교등 분열적인 많은 터를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본에 따라 한도시에 한교회를 갖는다면 하나를 지킬수 있다. 
한 믿는이가 어떤 도시에 가면 그 도시에 있는 교회회안에 반드시 있어야한다. 만일 내가 도쿄에 간다면
나는 도쿄에 있는 교회에 속해야 한다.

만일 내가 런던에 간다면 나는 런던에 있는 교회에 가야한다. 만일 내가 댈러스로 간다면 나는 댈러스에 있는
교회 집회에 참석해야한다. 그렇다면 자연히 분열은 없을 것이다. 성경은 믿는 이들이 어덯게 모여야 하는 지에
대한 본을 세웠다. 

그리스도인들의 처음모임은 예루살렘에 있었다. 사도행전 8장 1절은 그모임을 예루살렘에 있는교회라고 불렀다.
예루살렘은 큰도시이지만 그 도시에 단지 한교회만있었다. 비록 한 도시에 한 교회가 있지만 교회가 반드시
한 장소에서만 모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이는 장소는 여러곳에 모일수있으나.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그 도시가
교회의 유일한 지방적인 터라는 것을 알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