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속의 그리스도


은혜로은글 2011-10-1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33674.html
                                                                           ( 엔게디 )


사무엘상 24:1-4.
사울이 불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라오메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로 야생염소만이 갈수 있는 가장 험준한 바위로 갈새.길가에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 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 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리한후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주를 치는 것은 여호화 쎄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를 가니라. 

다윗는 그의 모든 시련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했고.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행한 사람이었다. 시험당하고있는 동안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다.
비록 다윗이 많은 박해와 고난을 받았지만. 그는 결코 싸우거나 반응하거나 대응하지 않았다. 신약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그는 항상 십자가 아래 있었다.  그는 각종상황 아래서  매일 십자가를 졌다. 그는 불평하거나 비판하거나 반대하거나 유죄 판결하지 않았다. 그는 다루심을 받기 위해 단지 십자가 아래있었다.

하나님의 주권아래 다윗은 십자가의 공과를 받아들였다. 이것으로 인해 다윗은 결국 잃는 이가 아닌 얻는이요. 고난당하는 이가 아닌 누리는 이가 되었다. 다윗이 승리자가 된 반면 사울은 잃는 이요. 고난당하는 이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공과와 부활의 능력으로 십자가를 지는 공과를 배워야한다.


이스라엘의 역사


이스라엘여행 2011-10-15 / 추천수 0 / 스크랩수 2 http://blog.chch.kr/k505/33659.html
                                                          ( 옛날의 카르도길 옛날 상가길이다. 사진앞에있는 기둥은 실재기둥이다 )         


로마시대
로마의 통치는 여전히 유대인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기원 후 66년 가이사랴에서 일어난 유대인과 그리스인 들과의 충돌은 유대인들에게
로마제국에 반대하는 항쟁으로 더욱 가열되었다. 67년에 네로황제가 반란을 제지하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대장으로 60000명의 군사를 보냈다.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은 68년까지 체계적으로 요세들을 하나씩 점령해 갔으며.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과 유대 사막의 몇개의 요새만 남아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타이터스는 성전산을 장악하고 70년에는 성전을 함락시켰다.

사해 근처에 있는 마사다를 포함하여 세개의 요세가 끝까지 항쟁하였으나 3 년에 걸쳐 정복되었다.
129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에 70년부터 주둔해온 로마 제 10군단만 남겨놓고 예루살렘을 로마의 도시로 만들고자 했음으로
율사 아키바의 지휘아래 발 코흐바 독립항쟁이 132년에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발 코흐바의 군대가 승리하는 듯하였으나. 로마군의 전쟁무기로 하나씩 영토를 차례로 함락시켰다.
134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였으며 성전의 함락은 사실상 유대인들이 유대지방에서 살수없도록 추방되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 서쪽언덕에 로마식 도시를 건설하였고. 성전이 있던자리에 주피터신전을 짓고. 동쪽앞에는 감람산을 향하여
주피터 상을 세웠다.

  비잔틴시대  
415년에는 유대사회에서 가장높은 지위인 유대 원로제가 폐지되었고. 비잔틴시대에 유태인들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인 종족이라하여 경멸하였다고한다.
한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리스도교와 믿음이 흡사함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율법과 계명. 민족적성격을 지닌 유대교를  따를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반면
그리스도교는 빠르게 전파되었으며. 로마의 콘스탄틴황제는 모든제국의 개종을 독려했다. 그의 아들 콘스탄틴 2세와 그의 계승자들은 이에 더욱박차를 가했다. 

3세기경 로마를 이어받은 동로마제국의 비잔틴 과 이란지방에 새로이 등장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300백년간의 격돌로인하여 정치적혼란과 경제적피폐. 과중한 세금으로인한 민심의 이탈. 종교적내분으로인한 국론분열 있었다.

395년 로마는 서로마와 동로마(비잔틴)제국으로 분열된다. 이후 100년후 5세기말에 서로마제국은 몰락하고 만다.
로마교회는 동로마 황제의 후원밑으로 들어갔지만. 점차 독자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다.
게르만족의 침입과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혼란스러웠던 상황에서 주민들도 로마의 주교를 교황으로 추앙하기에 이르렀다.

로마교회와동로마체국의 관계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교황권의 독립성을 인정하지않는 동로마황제의 잦은 침해 와 마찰로 항상 논쟁이 
그치지않았다.
특히 726년 비잔틴제국의 황제 레오 3세가 발한 우상파괴령은 로마 카토릭고회에 결정적인 타격를 가하는 것이었다.
당시 로마 카토릭교회는 게르만족에게 기독교를 전도하기 위하여 십자가상 및 예수와 성인들의 형상과 같은 성상을 활용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런데 동로마 황제는 원래 기독교가 우상을 금지한 종교라는 이유로 성상의 활용을 금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732년에 로마교회는 비잔틴제국 과 결별하게 되었고 이후 양 지역은 로마카토릭과 동방 정교회라는 별개의 문명권을 이루게 되었다. 

800년정치적 실력자의 후원을 필요로 하던 로마교황 레오 3세는 게르만족 프랑크왕국의 최고 실력자인 카롤링조의 샤를 마뉴를 동로마제국에 맞설 서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시키게 된다.
이로서 프랑크왕국은 로마문화의 유일한 계승자였던 로마교회와 제휴하여 서로마제국을 부활시켰던 것이다.
 
  이슬람시대
7세기초 비잔틴제국 과 사산조 페르시아제국의 오랜 전쟁으로 마비된 육상 실크로드를 대신한 아라비아 사막을 가로지르는 우회루트가
생기게된다. 그 중심도시가 메카와 메디나 였다.
이러한 시기에 마호메트가 등장하였다. 그는 메카의 명문쿠레이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일찍 부모를 잃고 어려운환경에서 팔레스타인
과 시리아 등지로 대상활동을 하면서 당시 혼란한 사회상에 깊이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를 고용한 여주인 카디자와 결혼한 마호메트는 사업보다는 명상생활을 통해 인간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려 하였다.
오랜명상끝에 그의 나이 40세때되던 610년에 알라로부터 계시를 받아  이슬람교를 세웠다. 그러나 마호메트의 이슬람이 처음부터 주변의 호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당시 상류층의 종교적 권위와 상업적 질서를 위협하였기때문에 메카에서 극심한 배척을 당하였다.
그래서 622년에 마호메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메디나로 이주하여 새로운 이슬람의 발판를 마련하였다. 이것을 해지라고하며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메디나에서 굳건한 이슬람 공동체를 형성한 마호메트는 세차례에 걸친 전투끝에 630년 메카를 정복함으로써 획기적인 교세확장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632년 마호메트가 사망하므로써 후계자 선출문제에 직면하였는데 칼리프라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칼리프는 정치와 종교를 동시에 관장하는 이슬람 공동체의 최고 통치자를 의미한다.

아부바를크(632-634) 우마르(634-644) 우스만(644-656) 알리(656-661) 에 이르는 제 칼리프의 통치시기를 이슬람의 가르침에 충실한
정통칼리프시대라고부른다.
이 시기부터 적극적인 정복이 이루어져. 이시기부터 비잔틴 치하에 있던 시리아가 정복되고.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하였다.
634년과 640년 사이에는 이스라엘땅, 시리아와 요르단이 회교도에 의해 점령되었다.


불과 10년정도의 짧은 기간에 이집트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확장되었다.  당시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던 시대적상황이 이슬람세력이 확장되는 것이 가능케하였다. 
이슬람이 쳐들어오자 그동안 비잔틴의 통치아래 시달려오던 유대인들은 침략자들의 도시정복을 도왔고.
이슬람이 진출하는것을 오히려 환영하였다고 한다. 이시기에 예루살렘 성전산에 두개의 회교사원이 세워졌다.
비잔틴시대에 유태인들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인 종족이라하여 경멸하였고.파괴된 예루살렘성전위에는 황폐한 그대로 방치되어있어다고한다.

이슬람군대는 합리적인 조세제도와 토착주민들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인정해주므로써. 전쟁다운 전쟁을 치르지 않고서도 주변지역을
쉽게 복속 시킬수 있었다.
그때의 아랍제국은 유대인. 그리스도인. 사마리아인들을 성경의 사람들로 인정하고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예루살렘을 향한 성지순례도 모든종교에게 허락하여 이도시를 더욱중요하게 하였으며. 11세기초에는 유대종교법의 최고 귄위를 지닌 율사 아카데미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왔다.

그리스도교인들도 "거룩한 땅" 대한 공감대를 가지고 일찌기 3 세기부터 순례를 왔다.
800년경 압바스왕조의 슐레이만대제는 예루살렘에 호스텔과 수도원을 지었으며 11 세기에는 순례객이 수 백명씩 육로로 혹은 바닷길로 운송되었다.

그러나 급격한 정복으로 영토가 강해지면서 부족간의 이견과 이해관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모하메트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가 칼리프가되자 무아위야가 알리를 암살하고. 알리의 추종세력들이 이탈하여 시아파가 생기게되었다.

1258년몽골의 침략으로 이슬람의 압바스제국이 멸망하였고.이것은 아랍이주도하던 이슬람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제 이슬람세계는 투르크인들이 주도하는셀주크투르크.맘루크 오스만제국의 시대가된다.

영어식발음은 터키이고 이슬람식발음은 투르크이다.

  십자군시대
1095년 동로마제국 황제의 요청하에 교황은 믿는 이들을 모아 십자군을 조직하였다. 십자군의 부름은 열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교황은 십자군에 가입하면 죄를 사하여 줄뿐만 아니라. 사후에 천당에 갈수 있다고 확신을 주었다.
유럽남부로부터 시작한 십자군은 성지를 회교도로부터 해방시키기위해 먼저 콘스탄틴노플까지 출정하였다.

1074년부터 1270년 동안 유럽에서는 여섯치례주된 십자군 원정이 있었다. 
십자군들은 정복한 모든 지역을 요구하는 동로마제국황제와  의견충돌을 하였다. 십자군원정은 예루살렘으로 계속되었으며  증원부대를 욥바항에
도착하게 하였다.
1099년 7월15일 예루살렘은 십자군의 손아래들어갔다. 정복후 예루살렘내의 회교도들과 유대인들은 학살되었다.
십자군시대는 북으로는 티베리아. 동으로는 여리고까지 정복하여 200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성지탈환을 명분으로 한 십자군이 오히려 성지인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점령한 뒤 살육과 노략질을 하여 로마 교황청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렸다.
게다가 원정군대의 대부분이 오합지졸 이어서 유럽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1212년에 교황청은 심지어 수천명의 어린이로 조성된 어린이 십자군를 불러모았는데 그들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상인
들에게 노예로 팔렸다.
십자군의 7차원정은 셀주크투르크인인 살라딘왕에 의해 정복되었다.
   
 셀주크투르크시대와 맘루크 시대와
오스만투르크 시대

셀주크투르크.맘루크는 비회교 국가의 살라딘과 그의 계승자들이 획득한 노예들이었다. 살라딘 왕은 1187년 십자군과의 격렬한 전쟁에서 승리하므로 이스라엘은 셀주크투르크
회교도의 손에 들어갔다. (살라딘 왕은 쿠루드인이었다).
1250년부터 맘루크 왕조가 시작되었다.1260 년 맘루크 의 벨 사령관은 이라크 시리아 를 정복하교 이스라엘까지 침입한 몽고군을 물리쳤다. 오스만제국의 정복까지 십자군시대를 제외한 약 900년간 회교도의 정권이 계속되었으며. 이후 계속적인 쇠퇴를 가져왔다.

 15세기 이후로 중앙 아시아 터키에서 시작된  오스만제국은 갈수록 강해졌으며.1516년에는 시리아 에서 맘루크를 멸망시켰다.
오스만 세력은 남쪽으로 지속된 출정은 일년 후 카이로까지 점령하였다. 16세기말까지 오스만은 경제발전과 주민의 안전을 발전시켜 그들의 수를 늘리는데 이바지한 안정된 정권체제를 이루는데 성공하였다.

16세기 중엽에 절정에 달한 오스만 제국은 17세기에 들어 쇠퇴하기 시작했다. 내부요인으로 귀족및 영주들의 세력이 커지고.군인들의 반란과 과중한 세금. 관료와 군부의 부패등으로 사회적 혼란이 커졌기 때문이다.
19세기에들어상황은 급변한다.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을 계기로유럽의 오스만영토잠식은 더욱 활발해졌다.

1924년 1차 세계대전당시 독일 편에 가담했던 오스만은 패전국이 되어 제국이 와해되는 운명을 맞았다.
거의 모든 영토를 빼앗기고.1299년이래 600년이상 이슬람세계을 지배했던 오스만왕정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으로 독립되었다.
   
    시온니즘
19세기에는 시온주의 운동이 세계 여러나라에서 조직된  이스라엘사람들이 유대땅에 돌아와 마을이 생겨났으나. 많은 어려움에 시달렸다.
1860년 영국계 유대인으로 시온주의자인 몬테피오리경이 힌놈골짜기 서편에 첫 유대인 동네인 "예민모세"를 세웠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즈음하여 영국군은 이집트에서 전진해 나아가 터어키를 유대땅에서 몰아내고. 1917년에 이스라엘땅이 유대인들의 나라임을
인정하는 발포아 선언이 내려졌다.

1947년 11월 29일 국제연합에서 이땅에 아랍인과 유대인을 위한 두 독립 국가를 세울것을 결정했고.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이 독립국가임을
선언하는날 주변의 아랍국가의 상비군이 침입하였다. 전쟁은 여러달 계속되었으며.1949년 여름. 이 신생국가와 이웃국가간에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1967년에 있었던 6일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성 전체를 회복하여 현재까지 점령하고있다. 현재 예루살렘은 네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있다.(유대교.기독교.이스람교. 아르메니아정교)

이스라엘은 전쟁 전보다 3.5배나 되는 영토를 획득하는 전과를 거두고 특히 예루살렘을 완전 장악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의 국적 존재자체를
부정할수없도로 만들었다.

이스라엘전쟁 전보다 3.5배나 되는 영토를 획득하는 전과를 거두고 특히 예루살렘을 완전 장악함으로써 정치적 심리적 이점을 확보하였고 이스라엘의 국가적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도록 만들기도 했다.


  



시편 45편


구약 2011-09-19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33210.html

"딸이여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시 45:10)

여기서 우리는 황후에게 주어진 교훈을 본다. 그것은 듣는 것과 잊는 것이다. 모든 지방교회는 반드시 그영의 살아있는 최신의 말씀하심을 듣는법을 배워야하고. 과거. 곧 옛관계와 옛방식과 옛배경을 잊어버리는 법을 배워야한다. 우리는 우리의 백성과 우리 아버지의 집을 반드시 잊어야한다.

"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우리가 과거를 더많이 잊을수록 우리는 그분의 눈에 더욱 아름답게 된다. 나는 어떤사람들이 그들의 과거를 말하는 것을 들을때 마다 추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모든 과거를 떠나 새길안에서 주님과 함께 전진할때 우리는 왕의 눈에 아름다울것이다.

 

딸은 왕후로서 교회를 상징하며. 그녀의 아버지의 집은 교회의 천연적인 관계를 상징한다. 딸이 그녀의 백성과 그녀의 아버지의 집을잊어버린다고하는 이말은 천연적인 관계를 부인하고 교회를 돌아보는 것에 대한 주님의 말씀과 일치한다. (마10:37)

"그리하면 왕이 에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교회의 아름다움. 그리스도의 임재안에 있는 그녀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살아내는 그리스도의 미덕들이다.

 

왕이 가장 귀히여기는 여인들중에는 열왕의 딸들이 있으며.  왕들의 딸들은 왕족의 신분을 지닌 그리스도의 믿는 이들을 상징한다. 왕이 존귀와 위엄을 지녔을 뿐아니라. 왕후와 그녀주위에 있는 여인들 역시 존귀와 위엄을 지녔다. 이것은  믿는 이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그림이며 예표이다.

 

시편 45편 9절하반절은 왕후는 오빌의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에섰도다. 라고 말한다. 왕후는 교회를 상징하며. 그녀가 금으로 덮여졌다는 것은 교회가 신성한 본성 안에서 나타나는 것을 상징한다. 그녀를 덮고있는 이 금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정금인 오빌의금이시다.

 

  

 

 



시편45편을 쓴 고라의 아들들


구약 2011-09-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33188.html

민 26:9-11.  다단과 아비람이라 이다단과 아비람은 회중 가운데서 부름을 받은자들이니 고라의 무리에 들어가서 모세와 아른을 거슬러 여호와께 반                반역할 때에 땅이 그 입을 벌려서 그 무리와 고라를 심키매 그들이 죽엇괴--고라의 아들들은 주기 아니하였더라.

 

시편 42편 45편부터 48편까지. 84편과 87편은 가장 심오한 시편들에 속한다. 보다 심오한 이 시편들은 고라의 아들들이 섰다. 이것은 주목할만한 것이다.  민수기 26장은 이사람들의 배경을 보여준다. 이장는 고라의 주도하에서 한무리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반역한 내용을 다룬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고라는 삼켜졌지만 그의 아들들은 살았다.

반역을 주도했던 사람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복원에 관한 이모든시편을 썼다. 이것이 참된복원이다.

 

심오한  거의모든 시편이 이 반역자의 아들들에 의해 쓰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놀랍고 기적과 같은 일이다.

하나님께서 지방교회들을 회복하시며. 결국 반역자의 많은 아들들이 찬양하는 시를 쓸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확신한다. 고라 한명이 반역했지만 많은 아들들이 그에게서 나와서 심오한 시편의 기자들이되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은 황폐하게 된 하나님의 건축물을 복원하고. 고라의 아들들을 회복하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위대한 일은

첫째로 지방교회들을 회복하는 것이며.  둘째로 여러분중 수많은 사람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중 많은 사람은 진정 고라의 아들들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은 사탄에 의해 황페하게 된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오직 그분의 집에 거할때에만 우리는 모든 것보다 큰 이일의 위대함을 깨달을 수있다.



세계 최대의 유람선과 초호화 열차여행


사진첩 2011-09-0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33070.html
블로그 > 그리스도를사랑하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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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의 유람선과 초호화열차여행

세계 최대의 유람선 'Liberty of the Seas'호는 로얄 캐리비언 크루즈 입니다.(위 사진)
길이가 339m, 높이 56m에 규모는 16t , 배를 세로로 세워 놓으면 102츨짜리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과 엇 비슷합니다.
총 탑승객 인원은 4,375명으로 1,300여명의 승무원이 이들을 위해 일을 합니다.
'리버티 오브 더 시즈'호 내부에는 객실이 1817,파도타기풀,수영장,암벽등반장,아이스링크,공연장,헬스클럽,,미니골프,유아놀이터,카지노,예식장,쇼핑몰 등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11 개국을 횡단 여행하는 초 호화 열차



오늘은 아프리카 11개국을 횡단하는 초 호화 열차를 소개한다.






이곳은 32석의 귀빈이 동시에 식사를 즐기며, 담소 할 수 있는 레스토랑이다.






호화열차에서 가장 싼 일반 객실의 모습이고,,,,,








이곳 역시 객차내 최고급 레스토랑으로 26명의 손님이 식사를 비롯한

각종 고급주류와 음료수를 마시며, 아프리카 여행의 진수를 맛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손님이 요구하는 사항에 따라 필요한 공간을 자유자재로 변동시켜 그들만의 공간을

일시적으로 만들어 주는 특별 공간이다.




이곳은 로얄 스위트룸의 침실이고,,,,,








아프리카의 자존심이라 부르는 프라이드 아프리카 열차는

1989년 부터 고객을 모시고 있다.


위 열차는 총 72명의 귀빈을 모실 수 있으며, 36명의 승무원이 정성으로

모든 써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아프리카 여행 중에 "프리이드 아프리카호를 타고

여행을 즐긴다면 일생의 가장 소중한 추억이 될 수 도 있다.

그러나 비용은 그리 만만하지는 않을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