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장은 목자와 여인과 아버지에 관한 세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목자는 우리를 찾으러 오신 아들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 여인은 우리속을 철저히 비추시는 성령을 상징하며. 아버지는 타락한 사람들인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받아들이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상징한다.
우리는 신악전체에서 누가복음15장이 신성한 삼일성의 비밀을 가장 분명히 계시하는 장이며 특별히 죄인들을 향한 삼일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다.
신성한 삼일성 전체가 죄인을 보물처럼 여기시어. 죄인을 하나님께 되돌아가게 하는 일에 참여하신다.
세가지 비유는 다 참회하는 죄인의 타락한 상태와 회개보다. 신성한 삼일성의 사랑을 더 강조한다. 신성한 사랑은 아들께서 선한목자같이 부드럽게 돌보시고. 그영께서 보물을 사랑하는 이같이 세밀하게 찾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이 많은 아버지 같이 따뜻하게 맞아들이신다.
주님은 죄인들을 향하신 삼일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계시하시기 위해 누가복음 15장에서 세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드라크마와잃어버린 아들은 잃어버린 한 사람의세 방면이다.
어렸을 때 나는 사랑이 많은 아버지가 어떻게 그 탕자를 받아들였는지에 관하여 많이 들었다. 나는 또한 선한 목자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러나 각각의 비유가 삼일성중의 하나를 가리킨다는 것이나. 이세가지 비유에서 삼일성을 볼수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분명목자는 아들을 가리키고. 여인은 그영을 가리키며.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가리킨다.
누가복음15장에서 왜 아들이 첫째로 언급되었는 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들께서 먼저 언급되신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안에서 오시는 분은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아들께서 구속을 이루시기 위해 첫번째로 오셨다. 아들의 구속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들의 구속이 없었다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속은 하나님의 구원의기초이다.
일단 이기초가 놓이면 우리는 그위에 건축할수있다.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누가복음 15장에 선한 목자로 묘사되신 아들께서 먼저오셨다.
아들께서 구속을 성취하셨으므로 그 영께서 오셔서 우리를 찾으신다. 사도행전은 이것을 암시한다. 사복음서에서는 아들께서 오셔서 구속을 이루셨다. 아들로 인해 구속이 성취된후. 사도행전에서부터 우리는 그영께서 오셔서 우리를 찾으시고 발견하시는 것을본다.
그영께서 우리를 찾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하고 하나님아버지께로 돌아온다. 그때 누가복음15장의 세번때비유에 의하면 아버지는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순서는 얼마나 놀라운가. 여기서 이순서는 삼일성의 위격에 따르지 않는다.
성경의 마지막에 나오는 새예루살렘성에 각각 사방에 세개의 문을 가진 성의 비유가 없다면. 우리는 삼일의 입구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누가복음의 세비유는 삼일의 입구를 묘사한다. 그것은 한 입구이지만 세단계가 있다. 만일 아들 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갈 근거가 없을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분은 문을 여는 기초를 놓으셨다. 아들의 구속다음에 우리를 밖에서 찾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에서 실피시기 위해 그영께서 오셨다. 아들은 밖에서 우리를 찾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영은 우리 존재 안에서 우리를 살피심으로써 우리를 찾기 위해오셨다.
거듭난 우리모두에게는 이런체험이 있다. 그영의 내적 살피심 때문에 우리는 회개하고 본래의 마음으로 되 돌아왔다.
우리는 쥐엄나무 열매를 먹는 탕자가 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 영의 살피심을 통하여 우리는 깨어났고 회개 했으며. 아버지께로 돌아왔다. 아들의 구속에 근거하여 그리고 그 영의 살피심을 통해 아버지는 우리가 그분을 누리고 그분의 풍성한 유업을 누릴수있게 되었다. 우리는 체험안에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안으로 들어가는지를 알필요가있다.
우리가 복음을 들었을때 그영은 우리속에서 운행하셨다. 그때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그영에 의해 감동되어. 욱체되심으로 우리의
구속자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이름을 불렀다. 결국 우리는 아버지께왔고. 아버지 안으로 이끌렸다. 이것이 삼일의 입구이다.
엡 2:18. 이제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영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장 18절에는 신격의 삼일성이 암시되어 있다. 성취하신 아들하나님을 통하여. 적용이신 그영하나님안에서.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간다.
아버지는 먼저 아들안에서 우리에게 오시며. 아들은 또한 그 영으로서 우리안으로 들어오신다. 이제 우리는 아들을 통하여 그영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 그분을 가까이 하며 그분을 누린다.
그리스도는 죽고 부활하신후. 그영으로서 오시어 복음을 전하셨다.(엡 2;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그리스도께서 생명주시는 영이신 그분 스스로 그러한 복음을 전파하시고. 우리가 그러한 복음을 듣고 받아들일때 우리는 무엇을 얻는가.
우리가 받은주된것은 생명주시는 영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일때. 주로 죄들의 용서나 의롭다 함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가 그러한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영접하게 되는 주된것은 그 영이다. 한불신자가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저의 구주이십니다.
저는 당신을 받아들입니다. 주님. 제맘에 오시옵소서."라고 말한다고 하자. 즉시 전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영으로서 그 사람속에 들아가실
것이며. 그사람은 그영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 18절은 그 영에 대하여 말한다. 왜냐하면 그분을 통하여 우리모두가 한 영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영을 가지고 있고, 그영안에 있으며. 그영은 우리를 근원이신 아버지께 이끄신다.
에베소서 2장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살리셨고 우리를 일으키셨고 우리를 하늘들의 영역에 앉히심으로 우리를 그분의
걸작품으로 만드셨다고 말해준다.
그 영께서 오셨을때 그분은 아들의 이름안에서(요 14:26) 어버지와 함께 오셨다(요 15:26).
이것은 그영께서 오셨을 때. 아들도 오셨다는 것을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들께서복음을 전하시 위해 오셨을 때. 그영도 오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복음전파를 듣고 받아들였을 때.우리는 그영도 받았다. 그런다음 그영은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다시 아버지께로 이끄신다.
요 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것이 없느리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생명는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일 1:1-3.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자면. 우리가 들었고. 우리 눈으로 보았고.우리가 주목하였으며. 우리 손으로 만졌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났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난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으며. 이제 증언하며 여러분에게 전해
줍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는 것은 여러분도 우리와 함께 교통을 갖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통은 아버지와 또 그분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첫째 기능은 주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성경의 주제와 내용이시고. 성경은 주예수님에대한 설명과 표현이다. 주예수님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신 반면에 성경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다. 기록된 말씀인 셩경이 살아있는 말씀이신 주예수님을 그 실재로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결국공허한 교리나 문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 성경을 살아있는 말씀이신 주 예수님을 그실재로 갖고 있지 않는다면 그분은 추상적이시고 막연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분을알고 만지기 어려울 것이다.
감사하게도. 우리가 주예수님을 알고 이해할수있도록 우리에게는 성경의 분명한 계시와함께. 성경에 대한 뚜렷하고 명확한 설명이 주어져있다.
신약의 책들은 주 예수님을 계시하고. 심지어 모세의 울법서와 신언서들과 시편과 시가서들을 포함한 구약의 책들도 주 예수님을 계시한다.
사도행전 2장 21절에서 베드로는 계속 말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신약에서의 새로운 실행이 아니다.
그것은 창세기 4장 26절에서 인류의 셋째 세대인 에노스부터 시작되었다.
그 실행은 욥(욥 12:4, 21:10), 아브라함(창 12:8, 13:4, 21:33), 이삭
(창 26:25),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신 4:7), 삼손(삿 15:18, 16:28), 사무엘(삼상 12:18, 시 99:6),
다윗(삼하 22:4, 7, 대상 16:8, 21:26, 시 14:4, 17:6, 18:3, 6, 31:17, 55:16, 86:5, 7, 105:1, 116:4, 13, 17, 118:5, 145:18),
시편 기자 아삽(시 80:18), 시편 기자 헤만(시 88:9), 엘리야(왕상 18:24), 이사야(사 12:4), 예레미야(애 3:55, 57)와
그 밖의 사람들(시 99:6)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구약 시대에 그들은 모두 주의 이름 부르는 것을 실행했다.
이사야도 또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그분을 부르라고 권면했다(사 55:6).
이방인들도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습관이 있음을 알았다(욘 1:6, 왕하 5:11).
북방에서 하나님에 의해 일으킴을 받은 그 이방인도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사 41:25).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시 50:15, 렘 29:12), 갈망이다(시 91:15, 습 3:9, 슥 13:9).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우물에서 마시는 기쁨에 찬 방법이요(사 12:3-4),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욥 27:10), 즉 그분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매일 그분을 불러야 한다(시 88:9).
신약의 희년(jubilee)을 위해 요엘이 예언한 것은(욜 2:32) 바로 그러한 환희에 넘치는 실행(a jubilant practic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