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장


진리의말씀 2011-05-1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29003.html

누가복음 15장은 목자와 여인과 아버지에 관한 세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목자는 우리를 찾으러 오신 아들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 여인은 우리속을 철저히 비추시는 성령을 상징하며. 아버지는 타락한 사람들인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받아들이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상징한다.

우리는 신악전체에서 누가복음15장이 신성한 삼일성의 비밀을 가장 분명히 계시하는 장이며 특별히 죄인들을 향한 삼일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다.

 

신성한 삼일성 전체가 죄인을 보물처럼 여기시어. 죄인을 하나님께 되돌아가게 하는 일에 참여하신다.

세가지 비유는 다 참회하는 죄인의 타락한 상태와 회개보다. 신성한 삼일성의 사랑을 더 강조한다. 신성한 사랑은 아들께서 선한목자같이 부드럽게 돌보시고. 그영께서 보물을 사랑하는 이같이 세밀하게 찾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이 많은 아버지 같이 따뜻하게 맞아들이신다.

 

주님은 죄인들을 향하신 삼일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계시하시기 위해 누가복음 15장에서 세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드라크마와잃어버린 아들은 잃어버린 한 사람의세 방면이다.

어렸을 때 나는 사랑이 많은 아버지가 어떻게 그 탕자를 받아들였는지에 관하여 많이 들었다. 나는 또한 선한 목자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러나 각각의 비유가 삼일성중의 하나를 가리킨다는 것이나. 이세가지 비유에서 삼일성을 볼수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분명목자는 아들을 가리키고. 여인은 그영을 가리키며.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가리킨다.

 

누가복음15장에서 왜 아들이 첫째로 언급되었는 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들께서 먼저 언급되신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안에서 오시는 분은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아들께서 구속을 이루시기 위해 첫번째로 오셨다. 아들의 구속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들의 구속이 없었다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속은 하나님의 구원의기초이다.

일단 이기초가 놓이면 우리는 그위에 건축할수있다.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누가복음 15장에 선한 목자로 묘사되신 아들께서 먼저오셨다.

 

아들께서 구속을 성취하셨으므로 그 영께서 오셔서 우리를 찾으신다. 사도행전은 이것을 암시한다. 사복음서에서는 아들께서 오셔서 구속을 이루셨다. 아들로 인해 구속이 성취된후. 사도행전에서부터 우리는 그영께서 오셔서 우리를 찾으시고 발견하시는 것을본다.

그영께서 우리를 찾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하고 하나님아버지께로 돌아온다. 그때 누가복음15장의 세번때비유에 의하면 아버지는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순서는 얼마나 놀라운가. 여기서 이순서는 삼일성의 위격에 따르지 않는다.



삼일의 입구


진리의말씀 2011-05-1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28962.html

성경의 마지막에 나오는 새예루살렘성에 각각 사방에 세개의 문을 가진 성의 비유가 없다면. 우리는 삼일의 입구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누가복음의 세비유는 삼일의 입구를 묘사한다. 그것은 한 입구이지만 세단계가 있다. 만일 아들 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갈 근거가 없을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분은 문을 여는 기초를 놓으셨다. 아들의 구속다음에 우리를 밖에서 찾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에서 실피시기 위해 그영께서 오셨다.  아들은 밖에서 우리를 찾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영은 우리 존재 안에서 우리를 살피심으로써 우리를 찾기 위해오셨다.

 

거듭난 우리모두에게는 이런체험이 있다.  그영의 내적 살피심 때문에 우리는 회개하고 본래의 마음으로 되 돌아왔다.

우리는 쥐엄나무 열매를 먹는 탕자가 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 영의 살피심을 통하여 우리는 깨어났고 회개 했으며. 아버지께로 돌아왔다.  아들의 구속에 근거하여 그리고 그 영의 살피심을 통해 아버지는 우리가 그분을 누리고 그분의 풍성한 유업을 누릴수있게 되었다.                   우리는 체험안에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안으로 들어가는지를 알필요가있다.

 

우리가 복음을 들었을때 그영은 우리속에서 운행하셨다. 그때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그영에 의해 감동되어. 욱체되심으로 우리의

구속자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이름을 불렀다. 결국 우리는 아버지께왔고. 아버지 안으로 이끌렸다. 이것이 삼일의 입구이다.



그 영


진리의말씀 2011-05-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28779.html

엡 2:18.       이제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영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장 18절에는 신격의 삼일성이 암시되어 있다.  성취하신 아들하나님을 통하여. 적용이신 그영하나님안에서.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간다.

아버지는 먼저 아들안에서 우리에게 오시며. 아들은 또한 그 영으로서 우리안으로 들어오신다. 이제 우리는 아들을 통하여 그영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 그분을 가까이 하며 그분을 누린다.

 

그리스도는 죽고 부활하신후. 그영으로서 오시어 복음을 전하셨다.(엡 2;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그리스도께서 생명주시는 영이신 그분 스스로 그러한 복음을 전파하시고. 우리가 그러한 복음을 듣고 받아들일때 우리는 무엇을 얻는가.

우리가 받은주된것은 생명주시는 영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일때. 주로 죄들의 용서나 의롭다 함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가 그러한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영접하게 되는 주된것은 그 영이다. 한불신자가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저의 구주이십니다. 

저는 당신을 받아들입니다.  주님. 제맘에 오시옵소서."라고 말한다고 하자. 즉시  전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영으로서 그 사람속에 들아가실

것이며. 그사람은 그영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 18절은 그 영에 대하여 말한다. 왜냐하면 그분을 통하여 우리모두가 한 영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영을 가지고 있고, 그영안에 있으며. 그영은 우리를 근원이신 아버지께 이끄신다.

에베소서 2장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살리셨고  우리를 일으키셨고 우리를 하늘들의 영역에 앉히심으로 우리를 그분의

걸작품으로 만드셨다고 말해준다.

 

그 영께서 오셨을때  그분은 아들의 이름안에서(요 14:26) 어버지와 함께 오셨다(요 15:26).

이것은 그영께서 오셨을 때.  아들도 오셨다는 것을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들께서복음을 전하시 위해 오셨을 때. 그영도 오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복음전파를 듣고  받아들였을 때.우리는 그영도 받았다. 그런다음 그영은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다시 아버지께로 이끄신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말씀 2011-05-07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28663.html

요 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것이 없느리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생명는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일 1:1-3.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자면. 우리가 들었고. 우리 눈으로 보았고.우리가 주목하였으며. 우리 손으로 만졌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났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난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으며. 이제 증언하며 여러분에게 전해

             줍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는 것은 여러분도 우리와 함께 교통을 갖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통은 아버지와 또 그분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첫째 기능은 주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성경의 주제와 내용이시고. 성경은 주예수님에대한 설명과 표현이다. 주예수님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신 반면에 성경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다. 기록된 말씀인 셩경이 살아있는 말씀이신 주예수님을 그 실재로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결국공허한 교리나 문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 성경을 살아있는 말씀이신 주 예수님을 그실재로  갖고 있지 않는다면 그분은 추상적이시고 막연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분을알고 만지기 어려울 것이다.

 

감사하게도. 우리가 주예수님을 알고 이해할수있도록 우리에게는 성경의 분명한 계시와함께. 성경에 대한 뚜렷하고 명확한 설명이 주어져있다.

신약의 책들은 주 예수님을 계시하고. 심지어 모세의 울법서와 신언서들과 시편과 시가서들을 포함한 구약의 책들도 주 예수님을 계시한다.



주님의 이름을 부름


진리의말씀 2011-05-07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286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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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장 21절에서 베드로는 계속 말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신약에서의 새로운 실행이 아니다.

그것은 창세기 4장 26절에서 인류의 셋째 세대인 에노스부터 시작되었다.

그 실행은 욥(욥 12:4, 21:10), 아브라함(창 12:8, 13:4, 21:33), 이삭

(창 26:25),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신 4:7), 삼손(삿 15:18, 16:28), 사무엘(삼상 12:18, 시 99:6),

 다윗(삼하 22:4, 7, 대상 16:8, 21:26, 시 14:4, 17:6, 18:3, 6, 31:17, 55:16, 86:5, 7, 105:1, 116:4, 13, 17, 118:5, 145:18),

시편 기자 아삽(시 80:18), 시편 기자 헤만(시 88:9), 엘리야(왕상 18:24), 이사야(사 12:4), 예레미야(애 3:55, 57)와

 그 밖의 사람들(시 99:6)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구약 시대에 그들은 모두 주의 이름 부르는 것을 실행했다.

 이사야도 또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그분을 부르라고 권면했다(사 55:6).

 

 

 

 이방인들도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습관이 있음을 알았다(욘 1:6, 왕하 5:11).

 북방에서 하나님에 의해 일으킴을 받은 그 이방인도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사 41:25).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시 50:15, 렘 29:12), 갈망이다(시 91:15, 습 3:9, 슥 13:9).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우물에서 마시는 기쁨에 찬 방법이요(사 12:3-4),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욥 27:10), 즉 그분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매일 그분을 불러야 한다(시 88:9).

신약의 희년(jubilee)을 위해 요엘이 예언한 것은(욜 2:32) 바로 그러한 환희에 넘치는 실행(a jubilant practice)이다.

 
 
 
신약에서 주님의 이름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요엘의 예언의 성취로서 오순절 날에 베드로에 의해 처음 언급되었다.
이 성취는 하나님이 만유를 포함한 그 영을 그분의 선택한 사람들 위에 경륜적으로 부어 주는 것에 관계되는데,
 이는 그들로 그분의 신약 희년에 참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신약 희년을 위한 요엘의 예언과 성취에는 두 방면이 있다. 하나님 편에서는
그분이 부활한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서 그분의 영을 부어 주시는 것이고,
우리 편에서는 모든 것을 성취하고 모든 것을 달성하고 모든 것을 획득하신 승천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인 우리가 그분이 성취하고 달성하고 얻고
소유하신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에 참여하고 그분을 누리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고전 1:2).
그것은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 우리로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 있는 주요한 실행이다(롬 10:10-13).
 
 
초기의 믿는 이들은
 주님의 이름 부르는 것을 어디에서나 실행했고(고전 1:2),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 특히 핍박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보편적 표시가 되었다(9:14, 21).
 스데반이 핍박당했을 때 이것을 실행했고(7:59),
그의 실행이 그를 핍박하던 사람들 중 하나였던 사울에게 인상을 주었음이 분명하다(7:58-60, 22:20).
 그때에 믿지 않던 사울은 이름 부르는 것을 그들의 표시로 삼고 이름 부르는 사람들을 핍박했다(9:14, 21).
 
 
 그가 주님께 붙잡힌 직후에
그를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 안으로 인도한 아나니아는 그에게 침례 받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
그도 그렇게 이름 부르는 사람이 되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라고 명했다.
디모데후서 2장22절에서 디모데에게 한 말을 통해 그는 초기의주님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 부르기를 실행했음을 가리켰다. 분명히 그는 이것을 실행한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젊은 동역자 디모데에게 같은 실행을 분부하여
디모데도 자기처럼 주님을 누리도록 했기 때문이다.
 
‘부르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에피칼레오(epikaleo)인데,
 그것은 에피(epi-위에)라는 말과 칼레오(kaleo-이름 부르다)라는 말로 구성된 합성어로서
그 의미는 스데반이 했던 것처럼(7:59-60) 알아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 21절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해 말한다
. 이름은 인격을 의미한다. 예수는 주의 이름이고, 그 영은 그분의 인격이다.
 우리가 “주 예수여!”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 영을 받는다.
 
 
 
 
문맥에 따르면, 2장 21절은 17절에서 시작된 요엘의 예언을 인용한 것의 결론이다.
 21절이 그 인용에 대한 결론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모든 육체에게 그분의 영을 부어주신 결과는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들이 구원받는 것임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그분의 영을 부어주시는 것은
 주님의 구원을 그분이 선택한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이다. 구원을 받는 것은
 이 영을 받는 것이고, 이 영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있어서 복음의 축복이다(갈 3:2, 5, 14).
이 영은 우리에게 호흡이 되고(요 20:22)
 생수가 되는(요 4:10, 14) 주님 자신이다.
그분을 우리의 호흡으로 들이마시고 그분을 우리의 생수로 마시기 위해 우리는 그분을 불러야 한다.
예레미야 애가 3장 55절, 56절은 주님을 부르는 것이 호흡하는 것임을 가리키고
,
 
 
 이사야 12장 3절, 4절은 주님을 부르는 것이 마시는 것임을 가리킨다.
 주님을 믿은 후에 우리는 구원받을 뿐 아니라 그분의 풍성을 누리기 위해 그분을 불러야 한다(롬 10:12-13). 그분의 풍성은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그분을 부름으로써 누려진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참 경배이다(요 4:24).
 
 
 
21절을 그 문맥에 따라 살펴볼 때,
우리는 성령이 모든 육체, 즉 모든 인간 존재 위에 부어짐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받게 하려는 목적을 위한 것임을 본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누가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그는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롬 10:12-13).
 
로마서 10장에서 바울은 두 가지 문제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구원받음-에 대해 말한다.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어느 정도 내적인 문제이고,
구원받는 것은 어느 정도 외적인 문제이다.
바울은 의롭다함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으로 믿어 의(義)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음과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 중에서
일으키셨음을 마음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면전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는 여전히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할 필요가 있다.
 
 
 
복음을 전하여
다른 사람들을 구원받도록 도울 때 우리는 그들이 “오, 주 예수여!”라고 주의 이름을 부르도록 격려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주 예수의 이름을 강하게 부르면 부를수록
그의 구원에 대한 체험이 더욱더 강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다.
 
 
 
가령 복음 전파를 듣고
 구원받기 원하는 어떤 이가 이렇게 부드럽고 약하게 기도한다 하자.
 “주 예수님, 당신은 저를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저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렇게 힘없이 기도하는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인지(認知)하기란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령 어떤 사람이 주 예수의 이름을 강하게 부르며 이렇게 말한다 하자.
 “주 예수여! 오, 주 예수여! 나는 죄인입니다. 주여, 그러나 당신이 저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오,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의심할 바 없이 주의 이름을 강하게 부르며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구원받는다.
어쩌면 그는 그분의 구원으로 인해 주 안에서 기뻐서 심지어 제 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도행전 7장 59절에 의하면,
스데반은 돌에 맞고 있을 때 “그가 주님을 불러 말하되 주 예수여, 내 영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했다.
다소의 사울은 이 살인을 마땅히 여겼고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큰 핍박에 가담했다.
9장 14절에 따르면, 사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을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에게서 받았었다.
그가 다메섹에 가려고 의도한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을 체포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초기에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표시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이름 부름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부르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이같이 그것은 하나의 표시가 되었다.
사울 당시에 믿는 이들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었다.
 
 
 
주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나셨을 때,
사울은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말했다(9:5). 나중에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와서 그에게,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들을 씻으라”고 말해 주었다(22:16).
여기서 아나니아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
사울 형제여, 당신은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성도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핍박자로, 즉 믿는 이들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을 체포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이켰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핍박자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 이제는 당신이 한 형제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당신을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당신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어나서 주 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침례를 받으십시오.
 
 
 
 
당신이 침례 받으면서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성도들은 당신도 이 이름 부르는 것을 듣고 심히 기뻐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믿는 이들이 주 예수의 이름 부르는 것을 실행하지 않고 있다.
오직 전통적인 실행들만을 좇고 있는 어떤 이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을 비난한다.
이미 지적했듯이, 주의 이름 부르는 것은 새로운 실행이 아니며, 우리가 고안해 낸 것도 아니다.
 성경에 따르면, 주의 이름 부르는 것은 창세기 4장에서 최초로 실행되었다.사도행전 2장 21절에서 베드로는 계속 말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신약에서의 새로운 실행이 아니다.
그것은 창세기 4장 26절에서 인류의 셋째 세대인 에노스부터 시작되었다.
그 실행은 욥(욥 12:4, 21:10), 아브라함(창 12:8, 13:4, 21:33), 이삭(창 26:25),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신 4:7), 삼손(삿 15:18, 16:28),
사무엘(삼상 12:18, 시 99:6), 다윗(삼하 22:4, 7, 대상 16:8, 21:26, 시 14:4, 17:6, 18:3, 6, 31:17, 55:16, 86:5, 7, 105:1, 116:4, 13, 17, 118:5, 145:18),
 
 
 
시편 기자 아삽(시 80:18), 시편 기자 헤만(시 88:9),
엘리야(왕상 18:24), 이사야(사 12:4), 예레미야(애 3:55, 57)와 그 밖의 사람들(시 99:6)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구약 시대에 그들은 모두 주의 이름 부르는 것을 실행했다.
이사야도 또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그분을 부르라고 권면했다(사 55:6).
이방인들도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습관이 있음을 알았다(욘 1:6, 왕하 5:11).
북방에서 하나님에 의해 일으킴을 받은 그 이방인도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사 41:25).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시 50:15, 렘 29:12),
갈망이다(시 91:15, 습 3:9, 슥 13:9).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우물에서 마시는 기쁨에 찬 방법이요(사 12:3-4),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욥 27:10), 즉 그분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매일 그분을 불러야 한다(시 88:9). 신약의 희년(jubilee)을 위해 요엘이 예언한 것은
(욜 2:32) 바로 그러한 환희에 넘치는 실행(a jubilant practice)이다.
 
신약에서
 주님의 이름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요엘의 예언의 성취로서 오순절 날에 베드로에 의해 처음 언급되었다
. 이 성취는 하나님이 만유를 포함한 그 영을 그분의 선택한 사람들 위에 경륜적으로 부어 주는 것에 관계되는데,
이는 그들로 그분의 신약 희년에 참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신약 희년을 위한 요엘의 예언과 성취에는 두 방면이 있다.
 하나님 편에서는 그분이 부활한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서 그분의 영을 부어 주시는 것이고,
우리 편에서는 모든 것을 성취하고 모든 것을 달성하고 모든 것을 획득하신 승천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인 우리가 그분이 성취하고 달성하고
얻고 소유하신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에 참여하고 그분을 누리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고전 1:2).
 그것은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 우리로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 있는 주요한 실행이다(롬 10:10-13).
 
 
 
초기의 믿는 이들은
주님의 이름 부르는 것을
어디에서나 실행했고(고전 1:2),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
특히 핍박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보편적 표시가 되었다(9:14, 21).
스데반이 핍박당했을 때 이것을 실행했고(7:59), 그의 실행이 그를 핍박하던 사람들 중 하나였던
사울에게 인상을 주었음이 분명하다(7:58-60, 22:20).
그때에 믿지 않던 사울은 이름 부르는 것을 그들의 표시로 삼고 이름 부르는 사람들을 핍박했다(9:14, 21).
그가 주님께 붙잡힌 직후에 그를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 안으로 인도한 아나니아는
그에게 침례 받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 그도 그렇게 이름 부르는 사람이 되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라고 명했다. 디모데후서 2장22절에서 디모데에게 한 말을 통해 그는 초기의주님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 부르기를 실행했음을 가리켰다. 분명히 그는 이것을 실행한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젊은 동역자 디모데에게 같은 실행을 분부하여
디모데도 자기처럼 주님을 누리도록 했기 때문이다.
 
 
 
 
‘부르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에피칼레오(epikaleo)인데,
그것은 에피(epi-위에)라는 말과 칼레오(kaleo-이름 부르다)라는 말로 구성된 합성어로서 그 의미는 스데반이 했던 것처럼(7:59-60) 알아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 21절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름은 인격을 의미한다. 예수는 주의 이름이고, 그 영은 그분의 인격이다. 우리가
 “주 예수여!”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 영을 받는다.
 
 
 
 
문맥에 따르면, 2장 21절은 17절에서 시작된 요엘의 예언을 인용한 것의 결론이다.
 21절이 그 인용에 대한 결론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모든 육체에게 그분의 영을 부어주신 결과는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들이 구원받는 것임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그분의 영을 부어주시는 것은
주님의 구원을 그분이 선택한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이다. 구원을 받는 것은 이 영을 받는 것이고,
이 영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있어서 복음의 축복이다(갈 3:2, 5, 14).
 
 
 
이 영은 우리에게 호흡이 되고(요 20:22)
생수가 되는(요 4:10, 14) 주님 자신이다. 그분을 우리의 호흡으로 들이마시고
그분을 우리의 생수로 마시기 위해 우리는 그분을 불러야 한다.
예레미야 애가 3장 55절, 56절은 주님을 부르는 것이 호흡하는 것임을 가리키고,
이사야 12장 3절, 4절은 주님을 부르는 것이 마시는 것임을 가리킨다. 주님을 믿은 후에 우리는 구원받을 뿐 아니라
 그분의 풍성을 누리기 위해 그분을 불러야 한다(롬 10:12-13).
그분의 풍성은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그분을 부름으로써 누려진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참 경배이다(요 4:24).
 
 
 
 
21절을 그 문맥에 따라 살펴볼 때,
 우리는 성령이 모든 육체, 즉 모든 인간 존재 위에 부어짐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받게 하려는 목적을 위한 것임을 본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누가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그는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롬 10:12-13).
 
로마서 10장에서 바울은 두 가지 문제-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구원받음-에 대해 말한다.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어느 정도 내적인 문제이고,
구원받는 것은 어느 정도 외적인 문제이다. 바울은 의롭다함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으로 믿어 의(義)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음과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 중에서 일으키셨음을 마음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면전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는 여전히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할 필요가 있다.
 
복음을 전하여
다른 사람들을 구원받도록 도울 때
 우리는 그들이 “오, 주 예수여!”라고 주의 이름을 부르도록 격려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주 예수의 이름을 강하게 부르면 부를수록 그의 구원에 대한 체험이
더욱더 강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