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djrecovery.or.kr/tml/content.htm
그리스도의 죄수의 편지
주 안에서 예수의 고난과 그 나라와 인내에 동참하고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평안이 있으시길 기도합니다. 돌아보건대 지나간 20여년 동안 어수선한 소문은 많았지만 진정 원하는 교통은 적었습니다. 나의 깊은 속에서의 한결같은 갈망은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과의 생명의 교통이었습니다.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 영안의 자유스러운 교통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주의 풍성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만이 나의 생각의 전부입니다. 주의 회복 안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 !주님의 영광스럽고 존귀한 이름을 부를 때면 우리들의 영은 어느 듯 불타오르며 영안의 만족함은 무어라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신 광대한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들의 영은 그저 무릎을 꿇어 경배할 것 뿐입니다. 그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들은 격정의 눈물과 환희의 눈물이 복받쳐 샘물처럼 솟아오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 많은 나날의 고난의 연속은 아프기 짝이 없지만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오히려 남이 모르는 즐거움이 솟구칩니다. 그것은 주께서 우리를 그의 이름을 위해 수치를 받기에 족한 사람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는 사람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우리들은 여전히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자신이 합당치 못한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오직 그 분만이 찬송을 받으실 주이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다만 그를 위하여 더 헐 때 어떠한 대가라도 지나칠 것이 없습니다.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중심이며 우리들의 신뢰할 만한 분이시요. 우리들은 그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실로 오랜 기간 동안 하나님의 자녀들은 환난에 봉착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실제적인 교통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안에서는 우울을 느끼고 게다가 사람의 생각으로 인한 옳고 그름의 논쟁과 변명이 영적생명에 손상을 주어 혼란과 암혹의 상황은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의가는 길을 혼미케 했습니다. 참으로 그의 긍휼하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은 그의 빛 가운데 무릎을 꿇고 그의 깊은 은혜와 사랑의 손길을 우러러 바랍니다. 그가 우리들을 인도하심으로 우리로 생명의 길을 걷게 하사 우리들이 가진 것과 우리들 자신의 것과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은 버리게 하십니다. 예수를 위하여 자신을 죽음에 넘기우며 예수의 생명을 우리들의 육체에 나타내기를 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남은 날 우리들이 달려야 할 길은 아직도 멀며 우리들이 지금까지 배운 것과 인식한 것을 가지고는 나 자신과 교회 및 사역의 필요에 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의 빈약함과 이상이 해이하여 세상풍파에 요동하다가 잃어버린 바 된 많은 양들과 광대한 사역의 벌판에 안타깝게도 시들어 떨어진 자신이 얼마나 빈약한가를 발견할 때, 우리는 실로 아무것도 사람에게 공급할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찌 주를 향하여 “주여! 긍흘히 여겨 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우리들과 같은 약한 질그릇에 그의 초월의 능력을 나타내 주시기를 간구할 따름입니다.
이러한 날들은 실로 엄숙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높습니다. 하나님의 선발은 엄숙합니다. 만일 지금까지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것. 우리들의 것,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오늘날의 역사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삼십년간의 시간을 들여 우리들에게 결코 평범치 않은 길을 경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생명을 우리들의 몸 위에 한층 더 나타내어 교회의 간증이 부활의 생명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하늘의 통치를 인식케 함으로써 하나님의 놀라운 각종 지혜를 오늘 계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유용한 그릇들을 더욱 더 많이 일으키시어 오늘 이 시대의 사역의 필요를 감당할 수 있기를 간구하는 일입니다. 유용한 그릇이 없이는 사역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 사역의 부흥을 구하려면 먼저 그분께 우리들 자신의 부흥을 구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들에게 역사하실 때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들을 통하여 더 좋은 사역을 갖게 됩니다. 원하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들을 강권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을 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그의 부담을 진 하나님의 자녀들에 의해 풍성한 말씀을 공급받아 무게 있는 영의 사람이 되고 능력을 얻어 잃어버린 영혼을 인도하여 구주를인식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모든 영광이 그분께 영원히 돌아가기만을 기도합니다. 주님께 충성을 다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옥중에서 워치만 니]
형기 20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 쓴 편지인 것 같습니다.
20년 형기를 다 채웠지만 중국당국은 형제님을 석방하지 않았고 그분은 전제로 드려졌습니다.
"응급환자" 생기면 119 보다 1339 에 전화 거세요
사고나 급한 질병 등으로 구급차를 부를 때 흔히 119에 요청한다.
그러나 119보다 1339에 연락하면 더 적절한 응급 가이드를 받을 수 있다.
1339를 운영하는 보건복지가족부 응급의료정보센터는 전문 의료진이 24시간 상주하고 있어
환자 상태에 따라 응급실에 가야할지 말아야할지, 어느 병원 응급실로 가는 것이 좋은지 등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구급차가 필요한 상황이면 119와 연계해 즉시 보내 주며, 동시에 환자가 기다리는 동안
당장 받아야 하는 응급처치법, 상황에 따른 최적의 병원 선택 등을 도와준다.
또 119에 전화해서 부른 구급차는 일단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지만,
1339에 전화하면 의료진이 출동하는 119 구급차에게 어느 병원으로 가라고 알려준다.
예를 들어 심근경색 환자는 집에서 조금 멀어도 심혈관질환 신속진료 시스템이 갖춰진
응급실로 가도록 하는 것이다.
강홍성 서울응급의료정보센터 상황실장은 "1339 접수 중 실제 응급의료기관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은 10% 미만이고, 35~40%가 동네 병원에 가도 되는 경우, 40~50%는 전화상담만으로
충분한 상황"이라며 "1339에 전화해 상담하면 많은 경우 무조건 응급실에 가지 않고도
적절한 처치를 받을 수 있다" 고 말했다
성경에 따르면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체현되셨고. 아들은 그 영으로 실제화 된다. 결국 신격의 셋은 그 영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우리의 체험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영을 받게 되는 이유이다. 회게하고 주님을 믿고 기도 했을때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기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주 예수께서 우리안으로 들어 오시도록 기도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 분은 그 영이시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순간뿐 아니라 매일의 체험에서도 사실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아버지 께 기도하거나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에게 체험되는 분은 그 영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체험을 통해 복합적이며. 만유를 표함한 영이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임을 안다. 우리가 체험하고 누리는 그 영은 심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이다.
요한 복음 14장 26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 안에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이구절에서 아버지는 그영을 보내시는 분이다. 15장 26절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버지로 부터 함께 (from with)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실제의 영이 오실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헬라어 참조)
이 구절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함께 그 영을 보내신다고 말한다. 여기에서의 의미는 (...로부터 함께)이다. 14장 26절에서보내는 분은 아버지 이셨다. 그러나 15장 26절에서는 보내는 분이 아들이시다.
아버지가 보내는 분이었을 때 그것은 아들의 보내심이었다. 아들이 보내는 분이었을 때 그것은 아버지의 보내심이었다.
이구절들에서 그 주안점은 성령이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오시리라는 것이다. 이두구절들에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분이 아버지이자 아들이며. 보내심 받은 분은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보내심을 받은 분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거룩한 삼일성의 완성이다. 성령이 오실때 삼일 하나님이 오신다. 삼일 하나님이 오실때
처음에서 성령으로. 아들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오신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에게 아들로서 아버지와함께 아들 안에서 오시는 삼일 하나님이시다. 삼일 하나님이 도달할때 그분은 성령으로 오시며 성령은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오신다.
성령은 성경에 있는 진리의 큰 항목이다. 그러나 역대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다. 성령은 단지 하나님의 운동력이나 기운으로. 혹은 은사의 일종으로. 또는 믿는 이에게 은사를 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한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이 아버지. 아들. 성령하나님. 즉 삼일 하나님이심을 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있는 말씀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해 준다. 이구절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침례 주고 라고 말한다. 여기에 아버지 와 아들과 성령이 있다. 셋의 어떠함이 있다.
그러나 여기의 이름은 단수이다. (in the name). 그렇다면 이 이름은 누구의 이름을 가리키는 가. 이것은 한 이름안에 셋의 어떠함. 즉 한 분 하나님 안에 아버지. 아들. 성령. 셋의 어떠함이 계심을 암시하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성령은 신격의 삼일성의 세번때 위격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삼일(Triune) 이라는 말도 삼일성(Trinity).세번째위격 이라는 말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러한 말들을 사용하는 것은 성경에 그러한 것에 대한 암시가 있기 때문이며. 진리에 대한 인식을 도우려는 목적에서 이다. 그러나 어떠한 인간의 말로도 비밀한 하나님은 다 표현할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아뭏든 신격의 삼일성의 세번때 위격인 성령은 중요한 진리의 항목이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부분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결핍으로 인해 하나님에대한 합당한 체험과 인식이 결여되어 있음을 느낀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서 미혹되어 믿음에서 파선한 것을 보아왔다. 무익한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의 긍휼을 앙망하며 성경이 계시하는 바 성령에 대한 합당한 인식 안으로 함께들어가기를 구한다. 성령은 우리의 체험과누림을 위해 삼일하나님을 우리에게 이끌어와 적용시키는 분이기에. 그분의 풍성에 참여하고.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그분에 대한 합당한 인식을 소유해야한다.
삼일 하나님 신격의 삼일성
우리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신 삼일 하나님이다. 모든 성경학자들은 삼일성의 세 인격이 구별될수는 있어도 분리될수 없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이 세인격이 분리될수있다고 말한다면 이단이 될것이다. 아들이 땅에 오셨을때 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떠나 홀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아들이 왔을 때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오셨다.
주 예수님은 그분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께서 항상그분과 함께계셨다.
빌립이 주님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요청했을 때. 주님의 대답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을 지적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너희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8-9.)
요한 복음 14장 16-17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 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그리고 다음구절에서 주님은 계속하여 이렇게 말씀했다. 요14:18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여기에서 대명사가 바뀌었다. 이것은보혜사 . 즉 진리의 성령이 오실때 주 예수께서도 함께 오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더우기 23절 에서 주님은 그와 아버지 께서 함께 오셔서 주를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자와 거처를 함께하리라고 말씀했다.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서 우리는 신격의 셋이 구별은 되지만 분리시킬수는 없으며 오히려 그들이 항상함께 한다는 것을 볼수가 있다.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
오늘날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이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과정을 거치셨다는 표시가 없다.
이과정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되셨을때 시작되어 그분의 인생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계속되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은 영원히 변치않는다고 하면서 과정을 거친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반대한다
물론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나도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성육신과 인생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통과 하셨다는 것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변하지않으나 일련의 과정을 통과하셨다. 그분의 본성이나 본질은 변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은 과정을 통과하셨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라.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14절에 사용한 became 이라는 단어는 과정을 암시한다. 또한 고린도 전서15장 45절을 보라. 마지막 아담이 생명 주는 영이되었다과 말한다. 여기에 또 한번의 became 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과정을 거치셨다는 또 다른 암시이다. 하나님 자신이 성육신에 의해 사람이 되셨고 이 땅에서 33년반의 인생을 사셨다. 그 후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음부에 내려 갔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나오셔서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뿐 아니라 그분은 살과 뼈가 있는 영광을 받으신 몸을 갖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지금도 그분은 그러한 몸으로 보좌에 계신다.
그리스도가 성육신 되시기 전 하늘 보좌에 계셨던 주님께는 살과 뼈가 있는 몸이 있었는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은 그러한 분이시며.영원히 그러한 몸을 갖고 보죄에 계실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 과정을 통과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할렐루야. 지금 우리의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과정을 거친 만유를 표함한 생명 주는 영은 삼일하나님의 최종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