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의 규화목 공원 -식물이 보석이 되는 이야기..


성경백과 2010-12-2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23455.html

 

 

아리조나에 있는 규화목 공원에 다녀 왔습니다.

 

 

수만년 물속에서 죽음을 거쳐...

 

 

 
압력을 받고 ..

 

 

자신의 본성은 모두 내어 보내지고..

 

 

외부에서 집어 넣어지는 광물질의 공급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양은 그대로 나무이나..

 

 

남겨진 내용은 그대로 아름다운 돌이 된...

 

 

벽옥의 모습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죽지 않은 나무들은 그대로 썪어 흔적도 남지 않았지만

 

 

자신을 내려놓고 그분의 요소를 받아 들인다면...

 

 

 
이렇듯 아름다운 내용물을 담아
열 두가지 보석의 어떠함을 담은
아름다운 돌로 변화 된답니다..
 

 

식물의 생명이 돌이 되고
돌이 보석이 되는 이야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일생을 그분에게 의지하고 드림으로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먹고 마시는 이야기...
 
그뿐 아니라 그것이 다듬어져 테이블도 되고
집을 건축하는 재료도 되고...
  
넘치는 공급과 소망과 가능성을 마음껏 누리고 돌아 왔습니다!
 
*^_^*
 
 
모셔온이야기.. 




영을 좇음


진리의말씀 2010-12-2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23454.html

영을 좇음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날마다 영을 좇아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믿는이들을 항구적인 신령함에 머물게 할 것이다. 또한 믿는이를 육체의 세력에서 지키며 항상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사탄의 공격을 받지 않게 한다. 우리가 영의 기능을 안 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즉시 그것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 시도 풀어 놓아서는 안 될 순간순간의 일이다. 오늘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성령의 가르침만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 것이다. 많은 믿는이가 실패한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 단지 성령의 가르침만 받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또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영적 지식으로 만족하지 말고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을 귀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자주 사람들에게서 「십자가의 길」에 대해 듣는다. 대체 「십자가의 길」이란 무엇인가? 십자가의 길은 다름이 아닌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은 자기의 뜻과 애호와 자기의 사상까지도 죽음에 넘기는 것을 요한다. 영의 직감과 계시를 좇으려면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

 

아마 모든 영적인 믿는이는 앞에서 우리가 말한 것같은 영의 기능에 대해 어느 정도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단지 때때로 그러한 체험이 있을 따름이다. 이는 그들이 아직도 영의 모든 기능과 법칙을 명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항상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인지를 모른다. 이러한 진리를 들을 때 간혹 그들의 체험이 그 진리의 진실성을 증명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체험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의 직감이 충분한 성장을 가졌다면 그들은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항상 영을 좇아 행할 수 있게 된다(무릇 영 밖의 있는 것들은 모두 바깥 세계임을 주의하라). 많은 믿는이는 영의 법칙을 모르기 때문에 영을 좇아 행하는 생명이 정함이 없고 실행하기 어려운 일정한 표준이 없는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영 안에 있는 성령의 인도만을 좇으려고 결심하나 그들이 아직 직감의 인도가 믿을만한지를 모르기 때문에 담대함과 경건한 마음을 잃어버리는 믿는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것은 그들이 아직 직감의 뜻을 아는 일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직감의 모든 느낌이 의미하는 바를 모른다. 그 직감이 그들더러 행동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멈추라는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영의 합당한 상태를 모른다.

 

결국 그들은 계속적인 영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 많은 때에 그들은 그들의 영을 정상적인 상태로 보존하지 않으므로 영이 역사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물론 때로 그들이 직감의 계시를 얻지만 여전히 왜 그 때 직감에 계시가 있고 다른 때에 힘써 얻으려고 해도 계시를 얻지 못하는지를 모른다. 그들은 그 실제 안에 있을 때에도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부지불식간에 영의 법을 좇아 행하므로 계시를 얻게 된 것이다. 그들이 다른 때에 간구하기는 했으나 영의 법대로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시를 얻지 못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항상 부지불식간에 영의 법을 좇아 행할 수 있다면 그들은 항상 영의 인도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영의 계시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위해서는 영의 법칙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영의 모든 느낌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 의미를 알도록 배워야 하고 또 이렇게 해야만이 영의 요구를 좇아 행할 수 있고 항상 영을 좇아 행할 수 있다. 영을 좇아 행하기 위해서 영의 법칙을 아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많은 믿는이들은 그들의 영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를 일생의 체험에서 가장 놀라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체험을 매일 갖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이것이 믿는이의 일생에서 한두 번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영의 법대로 영을 좇아 행한다면 그들의 생명이 높이 이끌려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영적 체험을 평상시에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아주 특별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영적 체험은 믿는이들이 날마다 가질 수 있는 정상적인 체험임을 모른다. 이 위치를 떠나서 어두움 가운데 사는 것이야말로 비정상적인 체험이다. 때때로 우리는 어떤 사상같은 것을 얻는다. 만일 우리가 분별할줄 안다면 그 사상이 우리의 영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혼에서 나온 것인지를 살필 것이다.

 

어떤 사상은 영의 불탐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상은 혼의 조급함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다. 믿는이는 이것들을 분별하기를 배워야 한다. 만일 주의한다면 믿는이는 영에 속한 것과 혼에 속한 것을 쉽게 구분할 것이다. 언제든지 믿는이는 자기의 온 존재의 각 부분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알아야 한다. 생각할 때에는 그 사상의 근원을 알아야 하고 무엇을 느낄 때에는 그 느낌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아야 하며 일할 때에는 그 힘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이 무엇이 영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알고 그것을 좇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느낌을 좇아 행하지 않을 수 있고 이것은 우리 몸에 임한 것들이 혼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영에 속한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우리가 알듯이 혼은 바로 우리의 「자각(自覺)-혹은 자기의식」이기 때문에 많은 자기 성찰과 자기의식은 완전히 혼에 속한 것이며 가장 해롭다. 이것은 이러한 종류의 자기 성찰과 자기의식은 항상 자신을 생각하므로 믿는이 자신을 속박하기 때문이다. 또 이로 인해 자아의 생명은 자라게 된다. 자고하는 것은 대개 이러한 자기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 동시에 또 한 종류의 「자기 분석」이 있는데 이것은 영적 노정에서 불가결한 지식이다. 이것을 통해서만 믿는이는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좇아 행하는지를 알 수 있다.

 

해로운 자기의식은 자기의 승패를 생각하므로 자기를 높이거나 열등 의식을 갖는다. 유익한 자기분석은 오직 자신의 사상과 느낌과 애호의 근원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각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그분의 뜻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두뇌가 없는 사람같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지나친 자기의식은 제거해 버려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의 모든 진행 상황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활동을 힘써 살피는 것은 필수적이다.

많은 믿는이들이 이미 거듭났지만 언제나 자기에게 영이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에게 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영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 뿐이다. 혹 그에게 영의 직감이 있으나 그러한 직감이 영에서 비롯된 것임을 모를 따름이다. 참되게 거듭난 신자가 의지하여 사는 참된 생명은 바로 그의 영의 생명이다. 만일 그가 가르침 받기를 원한다면 영의 직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혼은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으나 영은 그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혼은 아름다운 경치와 조용한 대자연을 보며 듣기 좋은 음악과 외부 세계에 속한 것들을 볼 때에 즉시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감정이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영은 그렇지 않다. 만일 성도의 영이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다면 그의 영은 혼과 독립되기 때문에 혼과 같이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활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은 어떤 상황에서도 활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믿는이가 참으로 신령하다면 자기의 혼에 어떤 느낌이 있든 없든 육신에 힘이 있든 없든 그의 영은 언제나 활동할 수 있다. 이는 그가 항상 활동하는 영을 좇아 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말한다면 혼의 느낌과 영의 직감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혼의 느낌은 많은 부분에서 영의 직감과 같다. 이 두 가지는 믿는이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히 같아보일 때가 있다. 이러한 상황이 자주 발생하지는 않지만 간혹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정말 분별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만일 이러한 때에 급히 행동을 취한다면 믿는이는 속임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인내로 기다리고 그 느낌의 근원을 거듭 시험해 본다면 성령은 적절한 때에 진상을 그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영을 좇아 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결코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 혼에 속한 믿는이는 누구나 어떤 것에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믿는이는 대개 감정이 아니면 이성에 기울어진다. 이러한 신자는 영에 속하고 영을 좇아 행하려고 할 때에 자주 전에 그들이 기울어졌던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위험이 있다. 감정에 속한 신자는 이때 자기의 명철한 이성을 영의 인도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면에 이성에 속한 성도는 자기의 열렬한 감정을 영의 인도로 착각한다.

 

그도 과거 자신의 냉냉한 생활이 혼에 속한 것임을 알고서 현재 자신의 감정이 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서로 위치를 바꾼 것일뿐 여전히 똑같이 혼에 속한 것임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영의 기능을 기억해야 한다. 영의 인도를 따른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이것은 바로 직감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인 지식이든 교통이든 양심이든 이 모든 것이 직감을 통해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바로 이 직감으로 말미암아 믿는이를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믿는이는 무엇이 영적인 것인지를 판단하지 말고 직감을 좇아 행하기만 하면 된다. 만일 우리가 성령을 좇고자 한다면 반드시 직감 안에서 성령의 뜻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목숨을 다하듯 성령의 은사를 추구한다. 많은 때에 이러한 추구는 기쁨을 구하는 것일 뿐이고 또한 이 배후에 「나」가 있을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자주 느낌에서 성령의 강림하심을 느끼고 그의 몸을 다스리는 외부의 능력이 있어서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불덩이같이 뜨거움을 느낀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의 침례라고 생각한다. 물론 성령도 사람에게 어떤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감정을 의지해 성령을 추구하는 것은 큰 해로움이다. 이것은 사람의 혼 생명을 격동시킬 뿐 아니라 또한 사탄의 거짓된 역사를 유발시키기도 한다.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 어떻게 주님의 임재를 느끼거나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는가를 느끼는데 있지 않고 우리가 직감에서 영을 좇아 행하고 영 안에서 우리에게 성령이 계시해준 것을 좇아 사는 데 있다. 얼마나 많은 때에 우리가 본 「성령의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 천연적인 생명을 의지해 사는 것에 불과할 뿐이며 거기에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이 없고 영적 세계를 해부해 주는 예민한 직감도 없다. 감정이 아닌 직감으로 주와 교통하는 이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 안에 영의 작용에 관한 기록을 읽어본 후에 우리는 영이 감정과 같이 뜨거울 때도 있고 이성과 같이 냉정할 때도 있음을 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체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엇이 영에서 나온 것이고 무엇이 혼에서 나온 것인가를 구분할 줄 안다. 만일 믿는이가 직감으로 참되게 하나님을 알고 이 직감을 좇아 행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서 헛되이 생각 안의 추론이나 감정에서 성령의 감동을 느끼려는 것을 추구한다면 그는 여전히 육체를 좇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영적 생명을 생기 없는 상태에 떨어지게 할 것이다.

 

바울의 행위에서 우리는 영의 직감을 좇아 행해야할 중요성을 더욱 깨달을 것이다. 그는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계시하시기를)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 갔노라』(갈 1:16-17). 전에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계시는 영 안에 속한 것이다.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아 계시록을 쓸 때에도 그는 영 안에서 계시를 받은 것이다(계 1:10). 성경은 동일하게 계시가 믿는이의 영 안에 있는 것이라고 증거한다.

 

사도는 당일 영 안에 계시를 받아 주 예수를 알고 하나님이 그를 이방인에게 보낸 것을 알게 된 것은 이 영의 인도를 좇아 행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는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사람의 의견과 사상과 사람의 이론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또한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영적인 선진들」을 만나서 이 일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묻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영의 인도를 좇아 행했다.

 

그가 직감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했다면 그는 또 다른 증거를 구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볼 때에 영 안의 계시는 그를 인도해 주기에 충분하였다. 당시에 주 예수를 이방인 가운데 전파한 것은 창조적인 행동이었다. 만일 사람의 혼을 좇아 행한다면 많은 사람의 뜻을 모아 보고 몇몇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며 특별히 먼저 전도 경험이 있는 사람의 말을 들어볼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가장 영적인 사도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상관치 않고 오직 영을 좇아 행했다.

 

이로 보건대 우리가 마땅히 좇아 행해야 할 것은 소위 영적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우리 영 안에서 주님 자신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이다. 그러면 영적으로 성장한 자의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 나름대로의 용도가 있다. 그들의 깨우침과 가르침은 여전히 도움을 주는 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여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영 안에서 주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얻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얻은 감동이 참된 영 안의 계시인가를 확증할 담력이 없을 때에 주 안에 깊은 체험이 있는 분의 가르침은 큰 도움이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그렇게 계시한 것을 당시 바울의 체험과 같이 이미 확실히 알았다면 오늘날 사도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 단락의 문맥을 읽어 보았다면 여기서 사도가 주의하는 것은, 그가 전한 복음이 다른 사도들에게서 전수(傳授)된 것이 아니라 계시로부터 얻은 것임을 볼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요점이다. 우리가 전파한 복음은 누구에게서 들은 것이나 무슨 책을 읽거나 생각으로 무엇을 연구해서 얻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복음이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것이 아니라면 그 복음은 아무런 영적 가치가 없다.

 

오늘날 어린 신자들이 누구를 「스승 삼는 것」을 중요시 하고 영적으로 진보한 이들은 정확한 신앙을 후대에게 전달하는 것을 중요시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아무런 영적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우리가 믿고 전파하는 것이 계시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다 무(無)로 돌아간다.

 

믿는이가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부터 많은 놀라운 사상을 전달 받으면서 그 사람 자신은 영 안에서 빈곤하고 공허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새로운 복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종들의 전파를 멸시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선지자의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동시에 우리에게는 계시가 절대 불가결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계시가 없다면 과거 전파한 모든 것은 다 공허한 것이다.

 

우리가 얻은 진리가 영 안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일 때 비로소 우리의 전파는 영적인 효과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에게서 많은 것들을 도매로 사들였지만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된다. 모든 그리스도의 사역자에게 있어서 영 안의 계시는 마땅히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해야 한다. 이것이 사역자의 첫째 자격이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이 영적인 일을 할 수 있고 영을 좇아 행할 수 있다. 오늘날 자기 지혜와 사상을 의지해 사역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가장 정통적인 신앙을 가진 믿는이들 가운데서도 생각으로만 진리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죽은 것들이다. 우리가 전파한 것이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에게서 얻은 것인지를 자문해 보자.

 

 

사탄의 공격

우리의 영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성령이 성도와 교통하는 기관-사탄은 믿는이가 영의 기능을 알고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을 가장 시기한다. 사탄의 목적은 믿는이가 혼 안에 살면서 『영을 소멸하는 것이다.』 사탄은 믿는이의 몸에 여러 가지 이상한 느낌이 충만하게 하고 생각에 여러 가지 방탕한 사상이 충만하게도 한다. 그는 바로 이러한 느낌과 사상으로 믿는이의 영적 지각(知覺)을 혼란시킨다. 이렇게 하여 믿는이들로 혼란된 상태에서 무엇이 영에서 나온 것이고 무엇이 혼에서 나온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게 한다. 사탄은 믿는이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기 영 안의 지각(안타깝게도 많은 신자들은 아직도 이것을 모르고 있다!)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사탄은 전력을 다해 믿는이의 영을 공격한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러한 영적 전쟁에서 믿는이는 절대로 자기의 느낌과 돌발적인 사상을 좇아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기도한 일은 결코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지 말라. 많은 믿는이들은 그들이 기도할 때의 모든 사상을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기도가 그들의 행한 모든 일을 그릇되지 않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이 기도한 일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생각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기관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 안에서 우리를 가르치신다.

사탄은 감정과 사상을 사용하여 믿는이가 혼을 의지해 살고 영을 좇아 행하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이것보다 더 무서운 수단을 사용한다. 만일 그가 믿는이들이 사상이나 느낌으로 겉 사람 안에 살게 하는 일을 성공시키면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믿는이 안에 거짓된 영을 만든다. 이것은 먼저 믿는이 안에서 어떤 지위를 얻은 다음 많은 느낌을 조작해 내는 것이다. 만일 믿는이가 이러한 느낌들을 거절하지 않는다면 그 느낌들은 믿는이 안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하여 얼마 안 되어서 그것들은 영의 작용을 이기거나 영의 지각에 제재를 가하게 된다.

만일 믿는이가 사탄의 책략을 모른다면 그는 자신의 영의 작용을 중단시킬 것이다. 그리고 거짓된 느낌을 좇는 것을 영을 좇아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이 영의 지각이 멈출 때 사탄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믿는이를 속이게 된다. 사탄은 믿는이로 하여금 하나님이 이제 새롭게 된 생각으로 그를 인도한다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은밀하게 그의 영을 사용하지 않는 과실과 사탄의 역사를 덮어버린다.

 

영의 활동이 멈출 때에 사람은 성령과 동역할 수 없게 된다. 자동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부터 온 모든 것도 끊어지게 된다. 믿는이가 이렇게 거짓된 영의 지각과 돌발적인 사상을 좇은 결과로 그는 완전히 육체와 혼을 좇아 행하게 되고 참된 영적 생활도 상실하게 된다. 만일 믿는이가 살피지 않는다면 사탄은 그를 더욱 심하게 공격할 것이다. 이때 사탄은 믿는이의 감정이 하나님의 임재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게 하면서도 그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므로 감지할 필요가 없다고 일러준다. 혹은 믿는이가 끝없이 고통을 느끼게 하고 그것이 영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받는 것이라고 일러준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탄은 거짓된 영을 사용하여 믿는이를 속여 그로 실지로 자기 뜻을 따르게 한다. 이러한 체험은 영적인(그러나 살피지 않은) 믿는이에게 있는 체험이다.

 

영적인 믿는이는 그의 모든 행위와 처신을(영적인) 이성을 좇아 행하도록 영적인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그로 일시적인 감정의 작용으로 무엇을 하지 않고 또한 자극이나 생각 속에 어떤 돌발적인 사상으로 무엇을 하지 않게 한다. 믿는이는 마땅히 당황하지 말고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것은 영적인 시야의 검사를 거쳐야 하고 또한 영 안의 직감에서 나온 지식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을 취해야 한다. 결코 자극이나 감정이나 돌발적인 사상으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거나 멈추기 전에 먼저 잠잠하고 냉철하게 고려해 보고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영을 좇아 행하는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살피고 시험해 보는 것이다. 영적 생활에서 믿는이는 결코 엉뚱하게 나날을 보내지 않고 자기에게 임하는 사상이나 느낌(즐거운 것이든 근심스러운 것이든)등 모든 일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사탄에게서 온 것인지 아니면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자세히 생각하고 살펴 아야 한다.

 

믿는 이가 임의로 행하는데 습관이 되므로 하루 동안 만난 일이 무엇이든 그 환경에 안연히 처하여 사탄이 그들을 위해 안배한 것을 받아 들일 때가 많다. 그들은 시험해 보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의 명령은 『범사에 헤아려(시험해)보라』(살전 5:21)고 한다. 영적인 믿는이의 능력과 특징은 바로 이 점에 있다. 그는 『영적인 말로 영적인 것들을 풀이한다』(고전 2:13 원문 참조). 여기서 「풀이하다」는 원문에서 「비교하다」, 「시험하다」, 「조합해 보다」, 「판단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영적인 믿는이들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성령은 영적인 믿는이에게 이러한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생활 가운데서 그는 자기에게 임한 모든 일을 시험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악령의 갖가지 속이는 생활 가운데서 하루하루를 보내기가 어려워진다.

 

사탄의 참소

믿는이가 전적으로 영의 직감의 인도를 좇아 행하는 가운데 사탄의 또 한 종류의 공격은 믿는이의 양심을 거짓된 것으로 만들어서 그를 참소하는 것이다. 믿는이는 자기 양심을 거리낌 없이 보존되게 하려고 양심의 책망을 받아 들이고 양심이 정죄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탄은 바로 이 점에서 믿는이의 갈망을 이용하여 믿는이를 참소하고 그로 그 참소를 자기 양심의 책망인 것으로 오해하게 한다. 이러므로 사탄은 자주 믿는이의 평강을 잃게 하고 힘들게 노력하게 하며 전진하기 위해 필요한 두렵고 떠는 마음을 상실하게 한다.

영적인 믿는이는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할 뿐 아니라 또한 자주 우리 속에서 우리를 참소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탄은 믿는이를 혼란케 하여 자신의 잘못을 알게 함으로써 그에 따른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참소한다. 사탄은 믿는이에게 두렵고 떠는 마음이 있어야 영적 노정에서 진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양심을 조작하여 만든 참소로 믿는이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착각하게 함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게 한다. 그러나 믿는이의 문제는 악의 영의 참소와 양심의 책망을 구분하지 못하는데 있다.

 

많은 때에 믿는이는 양심의 책망을 착각하여 악한 영의 참소로 생각하므로 결국은 하나님을 거스리게 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안의 이러한 소리를 상관하지 않는다면 더이상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참소는 더 격렬해진다. 그러므로 영적인 믿는이는 일부러 양심의 책망을 기꺼이 순종해야할 뿐 아니라 또한 악한 영의 참소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악한 영의 참소 중에 어떤 것은 믿는이에게 죄가 있으므로 참된 것인 것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실지로 믿는이에게 죄가 없는데 악한 영이 믿는이에게 죄가 있다고 느끼게 한 것이다. 만일 믿는이에게 정말 죄가 있다면 즉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백하여 보혈의 씻음을 구할 수 있다(요일 1:9). 만일 자백했는데도 참소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악한 영의 소리인 것이다.

 

만일 믿는이가 자기가 정말 틀렸다는 것을 앎으로 양심의 책망을 받거나 자신이 틀리지 않았고 그것이 단지 악한 영의 참소라는 것을 알기를 원한다면 그는 마땅히 자기에게 죄를 미워하는 진실한 마음이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양심인가, 악한 영인가를 묻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즉 만일 그것이 정말 틀렸다면 나는 그 죄를 제거하고 자백하기를 원하느냐를 물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원하고 죄를 미워한다면 설사 우리가 참소하는 소리를 따라 행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담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당신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때에 악한 영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을 가지고서 우리를 참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뜻을 정했다면 믿는이는 어떤 일이 자기 자신이 한 일인지를 상세하고 확실하게 살피고 판단해야 한다. 만일 믿는이 자신이 어떤 일의 장본인이라면 그는 그 일이 정말 틀렸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그는 마땅히 성경의 가르침과 직감의 인도를 따라 자신이 정말 틀렸다는 것을 알고난 후 하나님께 죄를 자백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죄를 범하지 않았는데도 당신이 정말 죄를 범한 것처럼 사탄은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

 

악한 영은 여러 가지 느낌을 사람에게 넣어 주기를 좋아한다. 그는 사람을 즐겁게도 하고 슬프게도 한다. 그는 사람이 선하다고 느끼게도 하고 아주 악한 존재라고도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믿는이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느낄 때에 실지로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때에 우리 자신이 옳다고 느끼지만 실지로는 틀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자신이 잘못했다고 느낄 때에도 그가 실지로는 틀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지 그가 자신이 틀렸다고 느끼는 것일 뿐 실지로는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이의 느낌이 어떻든 자신이 어떤가를 정확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자신이 죄를 범했는지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모든 참소에 대하여 믿는이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즉 그 참소의 근원을 안 후에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자신이 성령의 책망인지 악한 영의 참소인지를 모른다면 그는 조급하지 말고 잠잠히 확증을 기다려야 한다. 만일 책망이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고 또 그것을 제거하기 원한다면, 현재 그의 기다림은 그의 무지일 뿐 그의 반항이 아닌 것이다. 믿는이는 마땅히 외부의 강압적인 힘의 영향을 받고 사람에게 죄를 자백하는 것을 절대로 거절해야 한다. 이는 대적이 이러한 행동을 취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어쨌든 성령이 우리에게 준 참된 자책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반면에 사탄의 목적은 우리를 참소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참소는 믿는이로 하여금 자주 자신을 참소하게 할 뿐이다. 그가 이렇게 하는 데에는 믿는이를 괴롭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만일 영적인 믿는이가 처음에 사탄의 참소를 받아 들였다면 사탄이 장래에 거짓된 평강을 믿는이에게 주어 실패할 때에도 괴로워 하지 않게 한다. 이것은 가장 해로운 것이다.

양심의 책망이 있을 때에 죄를 자백하고 보혈의 씻음을 구하면 아무 문제가 없게 된다. 그러나 사탄의 참소는 믿는이가 사탄이 참소하는 것을 제거했는데에도 그 참소하는 소리가 여전히 멈추지 않는 그것이다. 양심의 책망은 우리를 보혈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반면에 악한 영의 참소는 거의 믿는이를 낙심케 하고 자신은 구제불능인 자로 생각하게 한다. 사탄의 목적은 참소로 말미암아 믿는이들이 『우리는 완전해질 수 없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에 떨어지도록 만드는데 있다.

 

어떤 사탄의 참소는 양심의 책망 위에 가해진다. 실지로 죄를 범했을 때에 양심만이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도 이로 말미암아 참소하게 된다. 이 때에 믿는이가 성령의 뜻을 따른다 할지라도 이 소리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것은 악한 영이 참소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도록 믿는이가 죄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것 외에 또한 성령의 책망과 악한 영의 참소를 구분하기를 배워야 한다. 또한 어느 때에 악한 영의 참소만 있고 어느 때에 양심의 책망 만이 아니라 악한 영의 참소도 있다는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상 어떤 죄든지(정말 죄라면) 일단 거절하거나 보혈의 씻음을 구하면 성령은 다시 책망하지 않는다.

   

또 다른 위험들

믿는이의 영을 좇아 행하는 생활 가운데 사탄의 위장술과 각종 공격 외에도 영적인 믿는이가 마땅히 알아야 할 다른 위험들이 있다. 많은 경우 우리 자신의 혼에서(악한 영의 위장술이 아님)나온 어떤 느낌 때문에 어떤 행동을 취할 때가 있다. 믿는이는 마땅히 자기의 몸과 혼과 영에도 어떤 느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모든 느낌이 다 영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혼이나 몸의 느낌을 영의 직감으로 착각하지 않는 것이다.

믿는이는 자신의 체험에서 매일매일 무엇이 자기의 참 직감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분별하기를 배워야 한다. 가장 범하기 쉬운 실수는 믿는이가 직감을 좇아야 할 중요성을 깨달은 후에 영 외에 다른 부분들도 느낌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림으로써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사실상 영적인 생활은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 생활은 매우 간단하다. 그러나 이것은 또 한 면에서 복잡한 부분도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여기에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다른 느낌들을 영의 직감으로 착각하는 것이고 둘째는 직감의 뜻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이 문제들은 매일 우리가 부딪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갑자기 펴서 보게된 성경 구절을 가리키지 않음)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받은 감동이 성령에게서 온 것임을 증명하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도 성령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선 그 일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지를 보아야 한다. 이는 성령이 과거 성경을 쓰도록 선지자에게 준 감동의 모양은 결코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이 주신 감동과 다를리가 없다. 성령이 과거 부당하다고 말한 것이 오늘날에 와서 그것을 타당한 것이라고 말할리가 없다. 우리 영 안의 직감은 성경의 가르침의 확증이 필요하다. 직감만 따르고 성경을 따르지 않은 것은 필경 틀린 것이다. 영 안에서 우리가 느끼는 성령의 계시는 성경 안에서의 성령의 계시와 완전히 일치되어야 한다.

 

우리의 육체는 어디에서든지 자신의 능력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을 때조차도 육체의 침입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 완전히 성령의 뜻을 계시해준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따르므로 성령의 뜻에 일치되는 것같이 보이나 실지로는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이는 많은 때에 믿는이가 자신의 천연적인 머리로 많은 성경의 교리를 수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것들을 이해하고는 행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러한 상황하에서 어떤 것에 대한 이해는 육체로 말미암을 수도 있다. 또한 육체의 힘으로 집행하는 위험도 있다. 비록 우리가 이해하고 행한 바가 완전히 성경적 일지라도 그 안의 모든 것이 육체의 범주에 속한 것일 뿐 조금도 성령을 의지하지 않은 것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 영 안에서 깨달은 성령의 뜻에 성경의 확증이 필요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이해한 성경일지라도 그것이 영으로 말미암아 집행되어져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따르는 일에서조차도 육체가 앞장서기를 원한다는 것을 인식해야한다. 영은 직감이 있을뿐 아니라 능력도 있다. 생각에서 우리가 깨달은 교리를 영의 힘으로 집행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아무런 영적 가치가 없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다른 일이 있다. 즉 우리가 지나치게 자신의 영으로 말미암아 살고 행하는 위험이다. 비록 성경에서 믿는이 개인의 영을 중요시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극단에 빠질 위험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믿는이의 영이 이렇게 중요한 지위가 있는 이유는 성령이 사람의 영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을 좇아 행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이 영이 성령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 사람의 영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뜻을 나타낸다. 우리가 받은 인도와 통제는 곧 성령의 인도하심과 통제하심이다. 성령이 사람의 영을 기관으로 삼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영을 기관으로 삼는 성령을 중요시 하고 또한 성령이 사용하는 기관인 사람의 영을 중요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의 영의 역사와 기능을 깨달은 후에 전심으로 자기의 영만을 의지하고 우리의 영이 성령의 종일뿐 직접적으로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영이 아닌 성령임을 망각하는 위험에 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을 떠난 사람의 영은 사람의 다른 기관과 같이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결단코 사람의 영과 성령의 위치를 바꾸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믿는이들이 사람의 영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너무나 모르기 때문에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뜻은 사람 안에서의 성령의 지위가 사람의 영보다 못하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람의 영을 이해하는 목적은 더욱 성령을 순종하고 높이는 방법을 알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도하심을 받는 것과 큰 관계가 있다. 이는 성령이 내려진 본래의 의도는 그리스도의 몸(전체)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개별적인 믿는이 안에 거하는 이유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몸 전체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요 또한 믿는이들이 그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는 단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전 12:12). 성령이 개인을 인도하는 이유는 그분이 온 몸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개인의 길을 인도하는 목적은 몸 전체를 위한 것이다. 한 지체의 활동은 온 몸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 개인의 영이 받은 성령의 인도는 다른 지체들과 연관이 있다. 영적인 인도는 다 「몸」의 인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개인의 영에 어떤 인도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두세」 지체의 영의 확인과 확증이 필요하다. 「몸」 안에서의 이러한 행동은 영적인 일에서 가장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될 사항이다. (선한 뜻으로) 개인의 영을 좇아 단독적으로 행동한 것으로 인해 발생한 실패와 분쟁과 미움과 분열과 수치와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므로 영을 좇아 행하는 모든 믿는이가 받은 인도가 성령에 의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다름이 아닌 그가 영적인 몸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에 있다. 우리의 일과 행위와 신앙과 가르침에 있어서 우리는 지체와의 관계에 통제를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바로 이러한 오류에 빠졌다. 하나님은 가장 뛰어난 사도의 실수를 허락하여 후세에 있는 우리를 가르치셨다. 물론 바울의 오류에서 하나님은 특별히 은혜를 주사 그 일을 잘 통과하게 하였다. 또 그가 잘못을 범했기에 그가 로마에서 증거할 수 있었고 많은 서신을 쓸 시간이 있었다.

 

바울은 자기가 『영에 매임을 받아』(행 20:22)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생각했으나 성경은, 성령이 두로의 제자들을 감동케 하사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다(행 21:4). 우리가 알듯이, 비록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로 사도의 이번 실패를 덮으셨지만 더욱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사람을 인도하는 원칙이 개인적인 것이 아닌 전체적인 것임을 보아야 한다. 영적인 믿는이는 마땅히 어느 때가 사람의 말을 상관하지 말고 단독적으로 전진해야 할 때이고, 또 어느 때가 그의 형제의 말을 들어야 할 때인지를 알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영적인 길 주위에는 함정이 많다.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하고 만다. 우리에게 첩경이 없다. 우리가 배운 지식들이 결코 우리의 영원한 보장이 될 수 없다. 도리어 모든 체험을 스스로 거쳐야 한다. 과정을 거친 사람들은 우리가 그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우리 장래의 당할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깨우쳐 줄 뿐이다. 우리가 어떤 노정을 뛰어넘을 방법을 구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 일이다. 성실히 주를 따르는 사람은 불필요한 실패를 면하게 된다.

 

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 제22장 영적 노정의 위험, 한국복음서원]

 

 

 

 



육체와 자아


진리의말씀 2010-12-1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23300.html

마 16:23-25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뒤로 물러가거라. 너는 나를 실족하게 하는 자로다. 왜냐하면 네가 생각을 하나님의 일에두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에두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십시오.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 혼 생명을 구하고자 하면 혼 생명을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혼 생명을 잃을면 혼 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장 에는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네가지. 곧 사탄과 생각과 자아와 타고난 생명이 나온다.

23장 상반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뒤로 물러 가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주님은 생각에 대해 말씀하셨다. 네가 생각을 하나님의 일에 두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에 두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24절에 자아가 나오고 혼생명이라 불리는 타고난 생명은 25절과 26절에 나온다. 혼생명 (타고난 생명)이 자아이다. 자아는 생각안에 있으며 생각은 사탄으로 점유되어있다.

 

자아는 사탄의 체현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체현이시듯이 자아는 사탄의 체현이다.  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이것을 보여 준다.

주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사탄이 베드로 안에 체현되었기 때문이다. 사탄이 어디에 체현되었는가. 사탄은 베드로의 생각을 점유함으로써 베드로의 혼 안에 체현되었다. 생각은 혼의 주도적인 부분으로서 혼을 대표한다. 사람의 생각을 점유하는 것은 그 사람 전체를 점유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아를 창조하지 않으셨는데. 그러면 이 자아는 어디서 왔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몸과 육체의 차이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선하고 순수하고 죄가 없는 몸을 창조하셨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의 몸 속에 죄를 주입했다. 이렇게하여 몸은 타락하고 파괴 되어 육체가 되었다. 그러므로 육체는 죄로 타락된 몸이다. 우리는 육체를 죄가 더해진 몸이라고 말할수도 있다.

 

사람의 몸 속에 있는 죄는 바로 사탄의 본성이다. 로마서 6장과7장에서 죄는 인격화 되어있다. 왜냐하면 죄는 우리안에 거하고 (롬7:17.20) 우리안에서 활동하고 (8절) 우리를 속이고 (11) 우리안에서 왕노릇하는 (6:12.14) 살아있는 인격처럼 우리가 우리의 의지와 반대로 어떤 것을 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죄는 바로 사탄의 본성이다. 심지어 죄를 사탄이라고 말할수 있다. 죄가 우리 몸안에 주입되었고

현재 우리 몸의 지체들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타락한 육체가 되었다.

 

자아에 대해서도 상황은 유사하다. 몸은 사탄의 어떤것.곧 죄가 주입되었기 때문에 육체가 되었다. 혼은 사탄의 어떤것이 혼에 더해졌기 때문에 자아가 되었다. 혼에 더해진 것이 사탄의 사상 또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자아는 혼에 사탄적인 생각. 곧 사탄의 생각이더해진 것이다. 사탄의생각. 곧 그의 사상이 사람의 혼속에 주입되었을 때 혼은 타락하고 자아가되었다.

 

몸은 육체로 변했으며 혼은 자아로 변했다. 창세기 3장1절부터 6절까지에서 하와는 선과 악의 지식나무의실과를 따 먹기 전에 사탄의 사상과생각을 혼안에 받아들였다.

사탄은 자신의 사상을 그녀의 생각속에 주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녀에게왔다. 사탄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말라하시더냐.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그녀 속에 주입했다. 이러한 말은 하와의 생각에 흥미로운 것이었다. 하와는 사탄에게 대답했고 (창3:2-3).이렇게 대답하자마자 하와의 생각은 사탄의 사상이라는 미끼에 걸려들었다.

 

이러한 사탄의 침입을 통하여 하와의 생각은 공격을 받았다. 그러자 하와의 생각은 그속에 주입된 사탄적인 사상으로 중독되었다. 이후 하와가 그 나무가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 (창3:6)라는 것을 보았을때 그녀의 감정이 움직였다. 그다음에는 하와의 의지가 움직여 선과 악의 지식나무의 실과를 따 먹기로 결정을 내렸고 하와는 그 열매를 따먹었다.

이때에 이르러 혼의 각부분. 곧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중독되었다. 

 

자아는 바로 하나님에게서 독립한 혼이다. 혼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일때. 그혼은 즉시 자아가 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어떤것을 할때마다 자아안에 있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어떤사람이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에게서 독립적이라면 자아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때 사람은 항상 그분을 의지하는 혼이었다. 사람은 혼 (창 2:7)으로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야한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혼의 예로서 우리는 결혼생활을 들수있다.                   아내는 남편을 의지해야한다. 결혼식날 신부가 머리에 수건을 덥는것은. 이것을 말해 준다. 아내가 머리를덮는것은 남편을 머리로 취하고 남편을 의지할것임을 뜻한다. 그렇지 않다면 두 머리가 있을 것이고 . 이것은 서로 상층되고 싸움을 가져오며 심지어 이혼을 낳는다. 아내가 남편을 의지해야 하듯이 혼은 하나님을 의지해야한다.

 

그러나 혼은 자아가 되었다. 자아는 바로 하나님에게서 독립을 선언한 혼이다. 우리가 자아에 대한 이상을 보았다면 자아가 무엇인지를 보았을것이다. 자아는 바로 하나님에게서 독립을 선언한 혼인 것이다.

우리가 이 이상을 본다면 더 이상 하나님에게서 독립적일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자아는 독립적인 것이기 때문에 몸의 건축에 가장 큰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뿐 아니라.

몸. 곧 형제자매들을 의지해야한다. 형제자매들에게서 독립적일때 우리는 자아. 곧 독립적인 혼안에 있게된다.  오늘 우리가 몸에게서 독립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이다. 여러분의 체험을 살펴보면 형제자매들에게서 독립적일 때 하나님으로부터도 독립적이라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형제자매들에게서 분리되어 있을때 하나님에게서도 분리되어있다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어떤사람은 이 말을 들을때 주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 아닌가요".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의 임재를 갖는 것은 우리가 몸을 의지하고 몸과의 관계가 올바른지에 달려있다. 우리가 몸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있다면 어느 곳에서든 주님의 임재를 가질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그분의 임재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임재의 여부는 몸과의 관계에 달려있다.

 

마태복음 16장 21절부터 26절까지에서 베드로는 주님께 어떤악한 일을 하지 않았다. 반대로 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그분을 위해 선한 일을 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주님에게서 독립적이었기때문에.주님은 그에게 돌이키시어"사탄아. 내뒤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심지어 그것이 매우 선한 것일지라도. 주님에게서 독립적일때 자아 안에 있게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의존은 화평을 가져다 준다. 실지로 의존이 참화평이다. 우리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 안에 참된화평이 있는 것으로 알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때 우리는 화평으로 충만해진다.

 

우리가 주님과 몸을 의지할때. 자아가 어떤종류의 화평을 만들어 내고 그 화평을 유지하려고 애쓸필요가 없다. 사람이 만들어 낸 화평은 자아가 유지해야만 한다. 자아가 그러한 화평을 유지하기를 멈추면 그 화평은 사라져버린다. 참된화평은 자아가 유지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과 몸을 의지한다면

자동적으로  화평이 있을 것이다.

 

주님과 몸은 하나이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한다면 몸을 의지하고. 몸을 의지한다면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몸에게서 독립적이라면 자동적으로 주님에게서 독립적이고. 선한 것을 얼마나 많이하려고 하든간에 여전히 자아안에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아안에있기 때문에 사탄과 합병된다. 이렇게 합병된 회사안에서 자아는 총지배인이고 사탄이 사장이다.

 

오 우리는 자아의 이상을 얼마나 보아야하는지. 이 이상을 본다면 주님과 몸에게서 독립적인 것을 미워하고. 몸과 형제자매들과 주님을 의지하기를 사랑할것이다. 우리가 주님과 몸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곳에 자아가 있다.의지할때 자아는 사라진다.

 

옛사람은 바로 우리존재로서 창조되었으나 타락한 사람을 의미한다. "나" 는 옛사람이 자신을 부를때 쓰는 명칭이다. 옛사람이 "나"이며. "나"가 옛사람이다. "혼생명" 은 옛사람의 생명이다.

사람이 소유한 생명이 혼생명이다. 이 세가지. 곧 "옛사람"과 "나"와"혼생명"은 하나이며 동일하다.

옛사람은 아담안에 있는 옛창조물에 속한 사람이며.혼생명은 이옛사람의 생명이고. "나"는 옛사람이 자신을 부르는 명칭이다.

 

"육체"는 옛사람이 살아 표현되는 것. 또는 옛사람의 생활이다. 우리의 혼생명이 살아표현되기 전에는 단순히 옛사람에 지나지 않으나 그것이 살아표현되면 육체가 된다. 성질은 사람의 타고난 성향인데 특히 나쁜기질을 가리킨다.

자아는 우리가 본바와 같이.인간적인 관점과의견으로 표현된 혼생명이다. "타고난조성" 은 우리의 타고난

능력과 역량과 재능이다.

 만일 우리가 이 일곱가지 사항을 함께묶어 본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수있다. 창조되어 "타락한 한사람"이 있는데 그 이름은 "옛사람"이다. 옛사람은 자신을 "나"라고 부른다. 그 안에 있는 생명은 "혼 생명"이고.

그 생명이 살아표현될때 "육체"가 된다. 이육체 안에는 성질내고 화내는 나쁜요소인 "성질" 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육체안에는 또한 좋은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의 의견과 관점은 "자아"라고 불리며. 그부분의 능력과 역량은 "타고난 조성" 이라고 불린다.

 

 

 



고신대 신학과 일부 학생들의 오해를 바로잡음


진리변호 2010-12-1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23299.html

고신대학교 신학과 (지방)교회 비판 논문에 대한 반박 및 해명 글

 

인터넷상에 무분별하게 유통되고 있는 고신대학 신학과 학부생인 김요섭, 김일국, 박상훈, 강혜진, 최종남이 쓴 ‘이단사상연구(지방교회)’라는 글에 대한 (지방)교회 측의 반박 및 해명의 글입니다. 우선 아직 학문적 기초단계에 있는 신학과 학생들의 검증 안 된 의견에 불과한 자료들이 무분별하게 인터넷상에 유포되는 현상을 우려하며 경계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 자료를 포함한 고신교단 측의 (지방)교회에 대한 오해들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고, 고신교단 정순행 총회장님 명의의 해명서를 받아 보관 중에 있음을 먼저 밝혀드립니다.


다음은 위 자료 중 주로 ‘교리적 비판’에 대해 간략하게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반박할 것입니다.


 

1. 신론(삼위일체)


1)비판내용(요약) : ‘지방교회는 우리들처럼 발표된 신앙고백이 없다...신론에 있어서 이들의 가장 잘못된 점은 ‘삼위일체의 설명이 양태론적 설명을 한다는 점이다(그영과 몸, 96쪽, 하나님의 경륜 19쪽)....구약에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신약에서는 아들 예수님이, 지금은 성령님이 사역하신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다. 등대나 전기의 예화는 완전한 양태론적 설명이다‘.


2) 간략한 반박 : 우선 (지방)교회는 발표된 신앙고백이 없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이 논문이 충분한 자료조사 없이 쓰여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1978년부터 <(지방)교회의 신앙과 생활>이란 소책자를 발간한 바 있고, 이 내용은 예장 통합 측 전 이단상담소장 최삼경 목사와의 공개 진리토론 시 우리의 첫 번째 원고내용에 포함되어 한국교계 앞에 소개된 바 있습니다(월간 교회와 신앙, 1996년 8월호 참조). 이 자료를 압축한 형태의 (지방)교회 신앙고백은 (지방)교회 측이 발간하는 신학지인 ‘확증과 비평’ 영문 홈페이지 http://www.affcrit.com/st_faith.html 에 올려져 있습니다.


이단적인 신론 중 하나인 ‘양태론’은 그 어떤 유형이든 결국 한 인격만 남게 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 위격의 ‘동시존재’를 믿는 사람은 결코 양태론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삼위일체의 세 인격들 모두가 우리 거듭난 사람 안에 계신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사실은 고신교단 출신 신학자인 차영배 박사도 위트니스 리 비판논문에서 인정하고 있습니다(월간 교회와 신앙, 2001년 10월호, 131쪽).


“그리스도와 그영(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고, 아버지도 우리 안에 계신다....성경에서 그영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고, 아버지가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은 분명하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 세 분 모두가 우리 영 안에 계신다‘(위트니스 리, 그리스도와 교회의 빛 안에서 본 신약의 개관 (2), 한국복음서원, 2000, 175-176쪽).


이외에도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삼위의 동시존재와 상호내재 하심을 믿습니다.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동시에 거하는 관계 외에도 서로 안에 거하는 것이다. 동 존재는 동시에 함께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한 삼일성에 적용되는 상호내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서로 안에 거한다는 의미이다‘(위트니스 리, 성령,1989, 73쪽).


신학이나 성경내용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위 두 가지 결정적인 증거만으로도 위트니스 리가 정통 삼위일체론을 가졌으며, 양태론 이단이라는 비판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신학과 학생들이 지적한 위트니스 리의 계시록 1장의 금등대의 설명과 전기에 대한 비유는 ‘경륜적인 삼위일체’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에도 위트니스 리는 삼위의 동시존재 상호내재라는 ‘본질적 삼위일체’ 방면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신학생들은 이 점을 간과함으로 (지방)교회의 신론을 잘못 대변하는 심각한 실수를 범했습니다. 참고로, 최삼경 목사는 공개토론에서 삼위일체를 ‘세 인격, 세 영들을 가지신 하나님’이라며 하나님을 ‘세 인격, 한 영’으로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위트니스 리를 양태론 자라고 공격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소속 교단인 예장통합 측 이단대책위원회로부터 아타나시우스 신조와 다른 삼신론 이단 사상을 가졌다고 조사되었습니다.'

 


 


2. 인간론


1)비판내용(요약) : “여기에서는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3분설과 혼합이다. 워치만 니의 “혼의 잠재력”이라는 책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영과 혼은 전적으로 다른 기관이다. 하나는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명칭으로 부르든지 그들은 본질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것이다.“ 지방교회는 인간을 완전히 영과 혼과 육으로 분리한다...”하나님과 사람은 혼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그영과 몸, 36쪽)..비판: 인간의 본질에 대한 개혁주의의 견해는 “이분설”이다“.


2) 간략한 반박: 우선 인간을 ‘이분설’로 보든 ‘삼분설’로 보든 그것은 핵심 신앙 요소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로 인해 남을 함부로 이단이라고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또한 모든 개혁주의 신학자가 다 이분설을 지지하지도 않습니다. 한 예로 안토니 후크마는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오래 봉직했던 저명한 개혁신학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인간은 하나의 완전한 단일체일뿐이라며 심지어 이분론이란 용어조차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그의 저서인 <개혁주의 인간론>(기독교문서선교회, 1999)에서, "삼분론 뿐 아니라 이분론도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347쪽)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이처럼 개혁교단 내에서 조차 이견이 있는 진리항목에서 자기와 다르니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것입니다. 그런 기준이라면 안토니 후크마가 볼 때는 이분설 지지자들 또한 이단이 되고 말 것입니다.


고신대학 신학생들은 위트니스 리가 ‘하나님과 사람이 혼합(mingling)되었다’ 라고 할 때 쓴 ‘밍글링’이란 단어를 오해했습니다. 즉 위트니스 리는 이 단어를 ‘두 요소가 합해져 제 3의 물질을 산출한다’는 ‘유티커스’적 개념으로 쓴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고운가루’와 ‘기름’으로 이뤄진 ‘소제’를 설명한 레위기 2:4에 쓰인 성경용례대로 사용했습니다. 즉 ‘두 요소는 연합될 때 고유의 본질을 유지하며 제 3의 본성을 산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점은 위트니스 리가 요한복음 1:14의 ’육체‘에 대해 설명한 아래 각주내용을 보시면 확인이 되실 것입니다.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1666&q=mingling ). ’밍글링‘은 앞서 언급한 최삼경 목사와의 진리토론집에도 더 상세하게 반박 설명되어 있습니다(누가이단인가, 도서출판, 생명나무, 1999, 120-122쪽 참조).


학생들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자체를 부정하고 오히려 이것을 ‘가현설영지주의’ 라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주와 합하는 자는 한영’(고전6:17)이라는 성경말씀을 대적하고 이단시 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는 말씀과 요14:20 본문이 말하는 것을 아직 체험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시인한 것에 불과합니다.

 


 

3. 죄론


1)비판내용(요약): “지방교회는 ‘죄’를 ‘사단의 화신’ 또는 사단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본다...몸은 단순히 죄의 거처가 되었다...‘죄의 몸’ 또는 ‘사망의 몸’이라고 부른다...비판: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하거나 그 법을 어기는 행위(소요리문답 14번)이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행위이다...만일 사탄이 어떤 세력에 불과하다면 예수님을 시험할 수도 대화할 수도 없을 것이다(알곡과 가라지, 49쪽).


2)간략한 반박: 물론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인 복수의 ‘죄들’(sins)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아울러 그렇게 불순종하도록 안에서부터 충동질하는 단수의 죄(sin)도 말합니다(롬7:20). 롬5:12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sin)가 세상에 들어오고’ 에서의 ‘죄’는 ‘어떤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특정 행위자체’는 사람 안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위트니스 리가 ‘사단의 화신’이라고 할 때의 죄(sin)는 사람 안에서 거하고(롬7:17), 사람이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하고(7:20), 계명으로 말미암아 속이고 죽이며(롬7:11), 안에서부터 각양 탐심을 이루게 하며(7:8), 마음의 법과 싸워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가는(7:23) ‘강한 영향력을 가진 그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만 죄를 ‘불순종의 행위’라고 보는 죄의 정의로는 롬 7장 본문이 묘사하는 ‘죄’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한 예로 롬7:20 본문에서 ‘죄’대신에 ‘불순종의 행위’란 말을 넣어 다시 읽어보시면 금방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신대 신학생들의 착각처럼 위트니스 리는 사탄을 어떤 세력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지방)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탄이 한 면으로 공중권세 잡은 자로 존재하고(엡2;2), 다른 한 면으로 ‘죄’로서 사람 안에 들어와(롬5:12) ‘죄와 사망의 법’(롬8:2)으로 역사한다고 믿습니다. 요일3:10이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음으로 존재하듯 ‘마귀의 자녀’ 또한 그러합니다.


 

4. 기독론


1) 비판내용(요약) : “‘예수 그리스도는 삼일 하나님의 구체적인 표현이다(인생의 비밀 9쪽)...그분은 하나님-사람(God-Man)이시다’ 라고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내용이 있는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한 인격의 세 가지 측면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 참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사람, 즉 하나님과 사람이 혼합된 존재라는 것입니다....비판: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한다. 다만...삼위일체의 두 번째 과정 또는 본질이신 하나님의 표현 정도로만 생각한다. 아주 비성경적이다...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혼합시킨 것으로 보는 유티쿠스 파의 못을 꼭같이 범하고 있다.”


2)간략한 반박: 이것은 선입관을 가진 채 남의 글을 읽을 때 얼마나 엉뚱한 곡해를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좋은 예입니다. 위트니스 리의 ‘예수 그리스도는 삼일 하나님의 구체적인 표현이다’라는 말은 골2:9의 ‘신격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한 인격의 세 가지 측면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골2:9의 참된 의미는 2격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성육신 하실 때, 함께 신격(Godhead)을 이루시는 1격(아버지)과 3격(성령) 하나님 또한 예수 안에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하늘 보좌에는 안 계신다는 말이 아닙니다(마6:9). 골로새서 2:9는 구원을 이루기 위한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도 세 위격들이 상호내재하시고 동시존재 하신다는 본질적인 삼위일체 방면의 특성은 손상되지 않습니다.


(지방)교회 성도들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 한다"느니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혼합시킨 것으로 보아 유티커스의 잘못을 범한다"느니 하는 말은 무책임한 거짓말입니다. 이 점은 위트니스 리가 요1:14의 ‘육체’에 대해 주석한 다음의 내용(영문)을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2369). 배우는 학생들은 남을 경솔하게 단정적으로 정죄하지 않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5. 계시론


1) 성경관


1)비판내용(요약): “성경관: 낡은 성경적 지식에서 온 것이다. 그것은 성경적 가르침에서 온 곳이다. 그것은 옳고 성경적이며 원리적인 대답이다. 그러나 그것은 100% 이상에 어긋나고 100% 그리스도를 거스린다(그리스도냐 종교냐 70쪽)....성경의 어디에 가보아도 여러분의 옷이 얼마나 길어야 된다고 말한 곳은 한 구절도 없다. 여러분은 살아있는 예수에게 가 보아야 한다. 따지고 생각하지 말라. 예수께 가라. 오직 예수뿐이다. 구약에서 말한 것을 듣지 말라(72쪽). 비판:...이들은 구약의 모든 말씀이 예수님과 상반되고 낡은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구약성경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얘기다. 이것은 이들이 주장하는 예수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예수든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곧 성경을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2) 간략한 반박: 고신대 신학생들은 문맥을 무시하고 떼어 낸 <몇 줄 인용문>을 토대로 위트니스 리를 성경에 없는 예수를 믿고, 정작 하나님도 믿지 않는 불신자로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논리의 비약에 빠진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말꼬투리를 잡아 없는 말을 만들어 퍼뜨리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글을 쓴 신학생들은 위트니스 리가 정말 ‘구약에서 말한 것을 듣지 말라’ 고 성도들에게 말했다고 생각하는지 묻고자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가 몇 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구약 전권을 강해한 것을 토대로 만들어진 구약 라이프 스타디는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말한 것을 듣지 말라고 하면서 성도들에게 구약을 바로 이해하도록 강해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우리는 신학생들에게 위트니스 리가 쓴 구약 주석 창세기 라이프 스타디를 직접 읽어보기를 사랑으로 권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안에서 위트니스 리가 누구 못지않게 ‘성경에 근거한 예수님’과 ‘성경을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고 또 사랑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참고로, 구약 라이프 스타디를 방송으로 듣기 원하면 http://www.lifestudy.or.kr 에 가보시기 바랍니다).


2) 재창조론(중건설 gaptheory)


1) 비판내용(요약): ‘재창조론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말 그대로 하나님이 천지를 두 번 창 조하셨다는 이론이다...이 이론은 토마스 찰리, 해리 링어, 펨버에 의해 강하게 주장되어져 왔고 이것이 펨버에 의해 워치만 니에게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또 이것은 아더 핑크, 루이스, 스코필드(세대주의), 프란시스 쉐퍼와 같은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되어져 왔다... 다분히 과학계의 한 학설을 따라가기 위하여 성경의 뜻을 파괴하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2) 간략한 반박: 학생들은 자신들의 글에서 장황하게 ‘재창조’론의 근거와 자신들의 비판적인 논점들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해 자신들과 다르니 워치만 니와 (지방)교회가 계시론에서 이단이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적으로 말해 재창조론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우리의 핵심 신앙을 구성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가 창1:2의 해석에 있어서 어떤 관점을 가졌건 그것은 ‘이견’일 뿐 ‘이단’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견’은 단지 ‘이견’으로 다뤄주면 족합니다. 만일 이런 소소한 진리해석에 대한 이견까지 이단시 한다면 한국 교회 신학자들 내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이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6. 구원론


1) 비판내용(요약):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혼을 높이 올리시고 그 다음에는우리의 몸을 높이 올리시어 결국 우리는 그분과 똑같이 높이 된다“(하나님의 경륜)--TAPE 비판: 그들은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과 똑같이 높아진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영합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성경에 없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이 인간의 부활체가 영화롭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동일할 수는 없는 것이다.“


2) 간략한 반박: (지방)교회의 구원론을 요약해 말하자면, 주 예수님의 속죄의 피로 인해 화목케 된 우리가 생명 되신 주님(골3:4)이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심으로 거듭나고(요3:6), 우리의 혼이 점차적으로 변화되며(롬12;2, 고후3:18), 주님 오실 때 우리의 몸까지 변형(롬8:23)되는 전 과정을 포함합니다(롬5:10, 히2:10, 요일3:2). 이런 구원의 과정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골1:27) 본성에 참여케 하지만(벧후1:4), 경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뜻하는 그분의 신격(Godhead)(골2:9)은 영원히 가질 수 없습니다(행14:14-15).


이 글을 쓴 학생들은 경솔하게 단정하기 전에 성경을 더 자세히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14:20은 ‘그날(부활)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했고, 엡2:22는 ‘너희도...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하여 에베소서2:5-6도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합니다.


 

7. 교회론


1) 비판내용(요약): “비판: 성경해석 방법에 따라 혹은 강조점에 따라 교단이 나뉘어 진 것이 사실이다. 이를 지방교회에서는 비방하고 있다. 이런 분쟁이 나쁘다면 바울과 바나바는 어떻게 볼 것인가? ...그들은 한 지방에 그 지방 이름을 붙인 한 교회만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 하루에 수천명씩 회개하는데 과연 한 집회소만 있어서 되겠는가? ...그들은 자기들의 교회만이 유일한 참 교회라고 한다. 이들은 ...성경에 분명히 밝혀져 있는 교회의 직분에 대해 부인한다. 그러나 이들은 실제적으로 사도(타지방에 가서 사역하는자), 장로(행정, 교육 담당)등의 일을 하는 사람을 인정하고 있어 자기 모순 된 모습을 볼수 있다. 또한 그들은 예배형식, 규범을 무시한다...교회의 예배의식은 초대교회 이전부터 성전과 회당에서 있어 왔으며 에수님도 따랐던 것(눅4:31)을 무시하는 것이라 하겠다...위에서 주장하는 것같이 구원 받은 성도가 심판을 통과하지 못하고 징계를 받도록 어디엔가 놓여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위와 같은 규정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2) 간략한 반박: 위 교회론 비판 안에 많은 세부항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비판내용의 순서를 따라 차례로 반박해 보겠습니다. (1) 주님의 몸된 교회가 여러 교단으로 나뉜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지방)교회 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이 분열을 책망합니다(고전1:12 -13), 양식 있는 신학자들이나 일반성도들도 교계의 분열을 부끄러워합니다. 또한 바울과 바나바의 예는 소극적인 사례일 뿐 분열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2) ‘한 지방에 한 교회’라는 말을 학생들의 잘못된 이해처럼 ‘한 지방에 하나의 집회소’(예배당)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는 ‘예배당’과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이런 교회관은 비성경적임으로 재고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우리는 교회직분 자체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직자 평신도 제도’는 성경에 없음으로 부인합니다. ‘직분’이 ‘계급’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4) 학생들이 비판하기 위해 인용한 해당 위트니스 리 책자 내용은 요한복음 20장이 묘사하는 제자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만남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거기서 다른 단체들의 예배형식을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엔 구체적으로 예배형식을 규정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본인들 생각에 좋은 예배형식을 가지시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를 가지고 남을 이단으로 말하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5) 구원받은 성도에 대한 징계에 대한 기록은 고전 3:12-15, 마14-30(특히 30절)을 잘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7:21-23도 참고로 읽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불신자들을 향하여 말하고 있지 않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8. 종말론


1) 비판내용(요약): “지방교회에서는 그들의 교인만이 3년 반 대환란이 오기 전에 휴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혁주의의 종말론은 통과설이다.”.


2) 간략한 비판 : 본문으로 인용한 위트니스 리의 ‘주님의 재림’ 7쪽 어디에도 ‘(지방)교회 성도들만’ 대환란 전에 휴거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환란 전에 휴거하든 대환란을 통과하든 이 자체가 이단사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역시 이것도 ‘이견’일 뿐 핵심진리가 아닙니다.

 


 

9. 결어 및 대책


1) 잘못된 교리?


1) 비판내용(요약): “...우리들이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그들의 잘못된 교리이다. 양태론 적인 삼위일체 설명과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이 혼합된 존재라는 설명과 죄에 대한 잘못된 설명들이 두드러진다. 인간의 본질을 삼분설로 나누면서..인간의 삼분설 때문이 아니라 3분설로 인해 파생되어진 영지주의에 가까운 이단성 때문에 이단으로 규정한다. 잘못된 성경에 대한 종말의 교리가 그들에게 나타난다.“


2) 간략한 반박 : 결론적으로 이 글을 쓴 고신대 신학과 학생들은 두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했습니다.

 

 첫째는 자료조사 미흡과 제한된 신학지식 때문에 위트니스 리의 글을 ‘오해’한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는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세권의 저서-‘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를 발간한 바 있습니다. 이는 도합 약 2천 쪽에 해당한 방대한 분량입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이런 핵심자료가 아니라 ’경륜적 삼위일체‘ 방면을 주로 설명하는 한 두 권의 책만을 참고하여 성급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시는 아버지, 아들, 성령 세 인격들 모두가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하는 위트니스 리를 ‘양태론’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사람의 혼합’이라고 했다는 비판도 'mingling'이란 단어를 글쓴이의 의도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오해입니다. 롬5:12, 고전 7장에 언급된 단수의 ‘죄’를 ‘불순종의 행위’라고 정의하는 것은 본문에 대입해 볼 때 모순이 드러납니다. 즉 ‘단수의 죄를 불순종의 행위’ 라고 정의하는 것은 적어도 고전 7장 본문 용례에 맞지 않습니다. 이 점은 개혁신학계 내에서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둘째는 ‘이견’에 해당되는 진리항목을 ‘이단’이라고 정죄하여 균형을 상실한 것입니다. ‘3분설’은 초대교부들, 속 생명파, 다수의 침례교인들, 그리고 일부 장로교인들도 인정하는 인간이해 방식입니다. 상대적으로 ‘이분설’은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체험하는데 있어서 치명적인 제약이 있습니다(롬8:6). 그러나 이런 이견으로 상대방을 이단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대환란 통과 문제도 동일합니다. 이것은 종말론의 전부도 아니고 남을 이단으로 정죄할 만한 주제도 아님은 앞에서 지적했습니다. 고신대 신학생들은 죠지래드가 그의 책 ‘복된 소망 재림과 휴거’(도서출판 영문, 1993년) 결론에서 ‘전 환란설 후 환란설은 모두....정통판별의 기준이나 혹은 기독교리의 필수 요소가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양 견해 모두에 대하여 자유와 사랑을 가져야 한다’(216쪽)고 조언한 것을 귀 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2) 교파=이단?


1) 비판내용(요약) : “둘째, 기존의 교회들을 교파라고 규정한다. 교파=이단이라고 생각해서 자신들 외의 다른 교회들을 인정하지 않는 교회론에 대한 문제가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2) 간략한 반박: 단적으로 말해서 (지방)교회 성도들 누구도 ‘교파’를 ‘이단’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여기에 고신대 신학생들의 결정적인 오판이 있습니다. 다만 ‘교파’는 ‘분열’이라고 분별합니다. 이것은 (지방)교회 성도들 뿐 아니라 양식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가 인정하고 마음아파 하고 있는 대목입니다(이종성, 교회론1, 대한기독교출판사, 1995, 152쪽 참조). (지방)교회 성도들이 믿는 교회론은 에베소서1:23, 행8:1, 13:1, 계1:11, 행14:23, 딛1:5 등에 근거한 지극히 성경적인 교회론입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단수)이며 이는 그 구성원인 성도들이 ‘거주하는 지역‘(특정진리, 특정인의 이름이 아닌)을 경계를 기준으로 ’교회들‘(복수)로 불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론은 성경을 깊이 있게 아는 사람들 속에서 점차적으로 공감대를 확산해 가고 있습니다(케빈 길레스, 신약성경의 교회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3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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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영에둠


진리의말씀 2010-12-1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23270.html

로마서 8장 14절 에서 바울이 말하는 그 영의 인도하심은 우리가 영을 따라 행하며.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둘때 나온다. 우리가 영을 따라 행하며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둔다면 우리에게는  그 영의 인도하심이 있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 영을 따라 행하고. 처신하고. 산다는 느낌이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내적인 느낌을 피하거나 불순종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그것이 그 영의 인도하심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이 느낌이 있을때 그것은 우리가 그 영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는 것은 그 영의 인도하심 아래 들어가는 것이다.내적인 생명은 우리에게 느낌을 준다.

 

그것이 사소하다 할지라도 느낌이 있다. 심지어 우리가 그 영의 인도하심 아래 있지 않더라도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그 영의 인도하심도 외적인 환경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영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의 느낌과 의식으로부터 나온다. 이 인도하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신성한 생명의 내적인 느낌에 의한 그 영의 인도하심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호흡처럼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계속적인 문제이다. 그영의 인도하심은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행함에서 각 방면에 걸쳐 정상적으로 지속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