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에 있어서 존 웨슬리는 조직력과 관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믿는이들이 구원받은 후에 한걸음 더 나아가 반드시 온전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유념했다. 그는 부흥된 믿는이들을 온전케하기 위해 1739년에 첫번째의 감리회 조직을 설립했다. 이조직은(Society) 당시에 보편적인 제도로서 믿는이들을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었다. 그리고 웨슬리는 정기적으로 그들을 방문하면서 감찰과 규율의 집행을 책임졌다.
1742년에는 평신도들이 말씀을 전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고 이 조직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증가했다. 1744년 존 웨슬리는 런던에서 1차 연합 회의를 소집하였고. 그 후 몇개의 교구로 나누어 전도사들이 순회하며 돌보도록 하였다. 이 감리회단이 크게 성장했지만 존 웨스리는 성공회를 떠날 뜻이 없었고 오히려 국교회의 일부로 여겨지길 원했다. 그러나 감리교 운동이 독립된 체제를 갖춘 단체로 발전했고.성공회의 신학과 관점이 달랐기 때문에 결국 그둘은 나뉘게 되었다.
또한 존 웨슬리와 휘트필드는 선택과 구원의 진리에 관하여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휘트필드는 칼빈파의 관점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사람이 구원 받는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고 은혜를 베픈 것으로 여겼다. 그반면에 웨슬리는 성공회의 영향을 받아 사람의 행위를 중시했던 알미니안파의 관점을 받아들인 존 웨슬리를 정죄하였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이 양면이 모두 필요한 것이다. 진리에는 두 방면이 있는데 한면으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의 면이 있고 다른 방면으로는 사람의 협력이 필요한 것이다. 존 웨슬리는 사람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 하였다.그러므로 휘트필드는 칼빈파 감리회를 설립하였고, 존 웨슬리는 알미니안파 감리회를 설립하여 나뉘어 지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매우 근면하게 일 하였다. 45년 동안 그의 선교여행은 25만 마일을 초과했고 그 발자취는 영국 독일 네델란드 등에 이르렀으며 그가 전한 메세지 만도 4만여편이 되었다. 그가 죽을때 감리교는 영국에서 이미 8만명의 회중이 있었고 미국에서도 6만명이 넘었다. 오늘날 감리교에는 전세계에 4천만명의 믿는 이들이 있다.이들은 영국과 미국에서 첫째.둘째가는 복음주의 단체이다.
존 웨슬리의 동생 찰스웨슬리는 비교적 칼빈파에 동조하였다. 찰스웨슬리는 형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아이작 왓츠. 패니 크로스비와 함께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다. 일생동안 찰스웨슬리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며 부르는 7천여 곡의 찬송가를 창작했다. "천사노래들려온다". "천만의 입이 있어도" "어디부터 말하리오" "주 예수 승리의 사랑" "고요히 감춘 근원인 주님은" "예수내 사랑" 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찬송가이다.
찰스웨슬리는 모라비안형제회의 영향을 많이받아 죽기전까지 모라비안교회와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었다.
18세기 감리교 운동이 가져온 신선함과 부흥은 그 당시 부패와 흑암중에 있던 영국을 흔들어 깨웠다. 그들은 공의를 추구하고 악습을 버리며 빈민을 구제하는 사회 혁신의 역량이 되었다. 이러한 역량은 훗날 영국의 사법제도에 영향을 미쳐서 유혈혁명을 피하게 했고 또한 영국의 각 복음주의 단체가 전반적으로 부흥되게 했다.이것은 18세기 말 19세기 초 대대적인 해외 선교 운동의 견고한 기초가 되었다.
존 웨슬리.1703년 ~ 1791년
18세기초 영국의 전반적인 영적인 상황과 사회 분위기는 매우 음울했다. 그 주된원인은 바로 전 세기에 있었던 천주교와 개신교 간의 학살때문이었다. 더욱이 영국은 내전이 막 끝난상황이었기 때문에 전란의 염증을 느낀 백성들은 오직 안정되고 평온한 생활만을 요구했고 다른 일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외적으로 유럽대륙은 30년 전쟁과 네델란드이 독립운동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국가들이 신교 와 구교 양진영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 이었다. 천주교의 부패는 이미 세상사람들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루터의 개혁도 생명과 실재가 없는 이론과 가르침으로 떨어져 공식화된 루터주의가 되었다,성공회의 성직자들의 영적상태는 보편적으로 하락했는데 특히 술을 마시는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사회적으로 영국은 산업혁명후 인구집중과 공업화로 사회병패가 날로 심각해졌다.상류층은 부와 오락과 귀족들만의 종교를 소유하고 누렸으며 착취 당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던 하류층은 삶의 아무런 소망도없었다.이러한 상황하에 개혁과 부흥의 필요가 날로 증가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옥스포드 대학에서 존과찰스웨슬리 두형제와 조지 휘트필드라는 젊은이들을 얻었고. 그들은 영적인 불씨가 되었으며. 감리교 운동의 부흥이라는 불길을 가져왔다.웨슬리 두형제는 영국에 이전까지 없었던 큰 부흥을 가져왔다.이러한 부흥은 영국에 영향을 미쳤을뿐아니라.전세계에 까지 영향을 주었다.이들 두형제는 독일의 진젠돌프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독일 경건파노선의 연속이라고 말할수있다,
1703년 존 웨슬리는 링컨주 엡워스에서 새무얼과수 잔나 사이에서 열다섯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엡워스지방의 성공회 교구 목사였고. 어머니는 경건하고 비범한 여성으로서 열아홉명의 자녀들을 낳아 엄격하게 가르쳤다.자녀중 8명은 유아기에 죽었고 존 웨슬리는 15번째 찰스웨슬리는18전째 자녀였다.
1720년 존웨슬리는 옥스포드의 크라이스트 처치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졸업후에는 링컨대학에 들어가 연구했으며 22세때 성공회 목사로 임명되었다.그의 형제 찰스웨슬리도 1726년에 크라이스트처치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였으며 성결를 추구하는 동호회를 만들었다.그리고 존 웨슬리 이 동호회의 인도자가 되었다.
그들은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하고 기꺼이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삶을 살았다.웨슬리와 그의 동급생들은 성결회(Holy Club) 모임을 결성하였으므로 주변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메소디스트 (엄격한) 종교주의자라고 불렀다. 이것은 이상적인 영적생활에 대한 그들의 추구를 묘사한것이다.
존 웨슬리는 졸업한뒤 성결을위해 자신를 드렸지만 자기자신은 영생의 문제에 있어서 아직 분명하지 못했다.
어느날 그는 패터레인집회에 참석하여 진젠돌프에게서온 한형제를 만났는데. 그형제는 당신이 비록 구원에대해서 분명하지 않아도 분명해 질때까지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십시요라고 그에게 말하였다.
존 웨슬리는1738년 5월24일자 일기에서 1738년 모라비안 형제회 피터뵐러의 도움으로 거룩함이나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받을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5월24일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가에 있는 한교회 예배당에 참석하였는데 한 평신도가 마르틴루터의 로마서강해 서문을 읽는것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새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시작이었다. 3주후에 요한 웨슬리는 독일로 건너가 헤른후트를 방문하여 진젠돌프를 만났다.
조지 휘트필드
조지휘트필드는 매우 뛰어난 전도사였다.그는 어릴적 가정형편이어려워 지인의 도움으로 옥스퍼드대학에 들어갔고 일하면서 공부하였다.옥스퍼드 대학에서 웨슬리형제들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홀리클럽에 가입하였다.조지 휘트피드의 강한감동을 주는 설교는 보수파의 불만을 야기했고. 결국 많은교회들이 그를 거절했다.
1730년 휘트필드는 존 웨슬리와 함께 선교를 시작하였는데.그가 복음을 전할때 남자들이 큰소리로 울정도로 매우 강한 역사가 있었다고 한다. 단 한마디의 말만해고 그들이 감동하여 뛸 정도로 휘트필드는 위대한 복음전파자 였다고 한다.1739년 2월 휘트필드와 존 웨슬리는 킹스우드에서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 수천명이 눈물을 흘리며 예수를 믿었다. 그의 말을 들은 광부들의 검은얼굴에는 두줄기의 눈물이 하얀 두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고 한다.
처음에 웨슬리는 야외에서 설교하는 것을 주저하였다.나중에 그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야외로 나가 수만의 믿는이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그당시의 성공회는 성당안에서만 말씀을 전할수있고. 성당을 떠나서는 말씀을 전할수없다고 말하였다.그런데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성당 밖으로 나갔다.
1739년 5월 존 웨슬리가 야외에서 2만명에게 말씀을 전할때 그의 목소리는 모든사람이 들을수 있을 정도로 컸다고 한다. 비록 존 웨슬리가 전한복음은 휘트필드 보다설교가 뛰어나지 못했지만 웨슬레가 전한 복음은 성령의 능력이 가득 하였다. 이로 인해 영국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
웨슬리 형제와 휘트필드의 수고와 전도로 잉글랜드 스코트랜드 아일랜드 각지에 복음이 전파되어 영국복음의 대 부흥을 가져왔다. 1791년 그가 죽기까지 45년동안 북쪽에서 부터 남쪽에 이르기 까지 영국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영향은 18세기동안 영국역사상 없었던 것이었다고 말할수있다.
모라비아와 보헤미아는 오늘날의 체코지방으로서 독일의작센주에 인접한 곳이다.이곳 7.8세기경에 그리스정교와 로마천주교는 그지방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다른 나라보다 일찍이 성경을 번역하는 것을 허용했다.그러므로 많은 학파들이 일어나 변론을 벌였다.
1374년에 후스는 보헤미아 호치네스에서 태어났다.1394년 후스는 찰스(카롤)대학에서 신학학사 학위를 받았고.2년뒤에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1401년에는 신부의 성직을 받음과 동시에 찰스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402년에는 찰스대학교장이 되었다.
1415년 보혜미아의 종교개혁의 지도자 얀후스는 천주교에의해 화영을 당한후 후스의추종자들은 즉시 보혜미아와 모라비아 일대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1420년 7월 14일 후스파 개혁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신성 로마제국 십자군을 후스파의 군대장군인 지즈카는 비트코프 언덕에서 십자군을 궤멸시켰다.그리고 후스를따르던 사람들은 세파로 나뉘었는데. 곧 온건파 와 강경파와 정치에 참여참여하는것을 반대하는파가 생겨났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은파가 보혜미아 형제회의 시작이다. 그들은 1457년에 보헤미아의 쿤발트라는 시골에서 교회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천주교를 떠나 스스로 독립적인 집회를 시작하였는데 이들을 보혜미아의 연합형제단라고 부른다.그리고 보헤미아는 200년동안 천주교 와 후스를 따르는 사람들의 대립으로 매우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독일에서 개신교가 막 일어날때인 1517년에 신성로마 제국황제와 교황이 연합하여 개신교를 박해하고 공격했을때에 보헤미아형제단도 많은 핍박과 진멸을 당하였다.1548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그들에게 나라를 떠나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에 그들은 폴란드의 한지역인 오스트로로크 에 정착하고 그곳에서 복음을 널리 전파하며 교회를 세웠다.
1556년 신임 보헤미아 국왕의 통치 하에서 그들의 귀국이 허용되자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그들의 모임을 다시 시작 혀였다. 교회의 큰 부흥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와 폴란드 세곳으로 확산되었다. 1579-1593년사이에 그들은 성경을 체코어로 번역하였는데 이 번역본은 오늘날 체코 성경의 근간이 되었고 현대체코 문학의 기초가 되었다.
연합형제단에 가입한 이들중에는 귀족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언제닥칠지 모르는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연합형제단의 신앙을 보헤미아 국교로 삼을 것을 구상하였다. 1609 년에 귀족들의 무력적인 위협으로 보헤미아 국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의 헌장에 서명하고 정부가 종교 보호 위원회를 설립하고 개신교의 신앙을 보호해줄것을 서명했다.
1617년 에 천주교를 신봉하고 예수회의 교육을 받고 개혁운동을 반대한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이 되자 그는 천주교를 신봉하는 신하와 결탁하여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장을 폐지했다. 그러나 개신교 를 믿는 귀족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국왕을 선택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며 1618년에 두명의 천주교에 속한 정계인사를 창밖으로 내 단졌다. 그리고 군사를 소집하여 페르디난트 2세를 폐하고 칼빈주의을 신봉하는 팔라티나트 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국왕으로 선출하였으며 예수회 수사들을 모두 축출했다.
쌍방의 충돌은 갈수록 격렬해졌고 불행하게도 페르티난트 2세가 1619년에 신성로마제국황제가 됨으로 지역적인 전쟁이 전체 신성로마제국으로 확대되어 유럽 대분분지역에 까지 번지게 되었다. 이것이 30년전쟁의 막을 올린 것이다. (1618-1648)
1620년 보헤미아에서 빌라호라 전투가 발발하여 천주교가 대승을 거두자 종교개혁운동을 부축했던 귀족들이 참수당하고 국내에는 폭동이 일어났으며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이끌고서 보혜미아와 모라비아를 떠나게 되었다.그때 떠난 가구가 3만 6천여 가구에 달했다.17세기 연합형제단의 믿는이들은 다만 은밀하게 하나님을 경배할수 밖에 없었다.
100년동안 보헤미아연합형제단은 심한 박해를 받자 뿔뿔이 흩어졌 폴란드와 독일등으로 도망을 갔다.그렇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기나긴 밤 뒤에 찿아올 여명을 기다렸다.그리고 100년이 지난 1722년에 크리스티안 데이비드의 인도아래 200명 가량의 보헤미아 형제들의 후예들이 독일의 동남쪽 체코와 폴란드 국경선 지역에 작센주 후트브르크(헤른후트) 진젠돌프의 영지로 피난을 왔다
독일의 후트브르크는 300년전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 진젠돌프가 태어난곳이다.그는 귀족이었으며 모라비아 형제회의 창시자이다.그와 그의 무리는 여기에서 영적인 운동을 시작하였다.그들은 종파를 떠나 초대교회에서 믿는이들이 유기적인기능을 발휘하고 서로하나된것을 회복하고 해외선교의길을 열었다.
그들은 진젠돌프가 안배해 준 새로운 피난처를 헤른후트(주께서지키심)라고 이름을 짓고 그곳에 정착하였다.초기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모라비아 형제들이었고 점차적으로 루터파. 경건파. 칼뱅파. 쯔빙글리파. 슈벵크벨트파 등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며 살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자 만찬. 침례. 종파 등 교리상의 분쟁으로 다툼이 일어났다.
원래그들은 배척과 박해를 피해 헤른후트에 왔지만 이곳에 온뒤 그들의육체와 타고난 기질이 드러나 또다시 서로 배척하는 비극을 재현하고 말았다.
1727년5월12일 진젠돌프는 공약을 만들어서 모든 피난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이곳에서 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그 공약을 지켜야한다고 말하였다.모든 사람들은 공약을 지키기를 원했고 그로인해 서로 싸우지 않게되었다.그러나 아직 그들가운데 완전한 하나가 없고 차이점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해 5월부터 8월까지 진젠돌프는 끊임없이 기도 하였다.
그러던중 8월4일 진젠돌프는 슐레지엔 도서관에서 라틴어로 된 오래된 형제회의 준칙를 발견하였는데 모라비안 형제회들보다 100년전에 형제들이 사용했던 준칙이었다. 이 준칙을 본 진젠돌프는 예상치 못한 기쁨을 안고 헤른 후트로 돌아와 그것을 독일어로 변역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읽게 하였는데. 이준칙의 내용은 그들이 체결하였던 협약과 내용과 유사하였다.이 준칙을 읽는이마다 성령의 확증에 놀라워 하였다.진젠돌프는 모라비안의 믿는이들이 공약을 완전히 받아들여서이전에 있었던 갈등을 플고 잘못을 인정하도록 하였다.1727년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되었다.그리고 그날 모라비아교회가세워졌다.
그날 함께 처음으로 떡을 뗀 만찬집회에서 성령의 부흥과 성령의 옮겨부음이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고 회개 했다.그들은 자신의 편견과 타퉁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했다.그들은 집으로 돌아갈때 서로의 손을 잡고 돌아갔는데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융화된것이었다.
1727년에 진젠돌프와 모라비안의 무리들은협약을 맺었는데 그내용은 세가지의 중점이 있다.첫째는 주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구속의 큰사랑과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것을 중시한다.둘째는 성령충만을 중시한다.셋째는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며 성령의 인도로 사는 것을 중시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후에 모라비안 형제회의 부흥의 주된 특징이 되었고.그들은 성령의주권을 존중하였고 거듭남과 회개의 주관적인 체험을 중시하였으며 복음을 위해 불탓다.모라비안 형제회는 얀후스의 후대로 약200년간의 역사가 있다. 그러나 30년 전쟁때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후 그들의 발자취는 사라졌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었던것의 문서화 된 준칙을 발견하여 그것이자신들이라는것을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을 회복된 모라비아 교회라고 칭하였다.그들은 성직자 계급이 없고 소그룹을 실행하였다.이뿐아니라 소위 애찬을 하며 서로 섞이고 교통하는 것도 모라비안형제회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1727년 48명의 형제자매들이 자신들을 헌신하였고.파수탑에서 파수의 기도를 통하여 온세상에 100년동안 전도의 일을 하였다.수백명의 믿는이들이 세계 각지로 나아가 복음을 전파 하였다.진젠돌프의 해외선교는 19세기의 선교사파송보다 반세기 빨랐다.그들의 20년동안 파송한 선교사와 믿는이들이 비율은 기독교가 200년동안 파송한 선교사와 믿는이들의 비율을 초과한다.
진젠돌프는 또 다른 매우 유명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영국의 요한 웨슬레 이다.1735년 10월 요한 웨슬레그이 동생 찰스 웨슬레는 미국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모라비아형제들과 함께 배를 탓다.그당시 요한 웨슬레는주님을 영접하지 않았고 구원에대해 분명하지않았었다.그는 항해하는 노정 중에 큰 풍랑를 만났다.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당황하고 있었을때 오히려 차분하게 모라비아 해외선교사들과 가족들은 찬송을 부르며 찬미하여는데 요한 웨슬레는 그광경을보고 매우 감동을 받았다.왜냐하면 그들의 생활이 매우 평온하고 안정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선교에 실패한후 영국으로 돌아갔다.
영국에 돌아간뒤 모라비아형제들과 연락하였다.연락을 한뒤 그는 항상 그들과 교통을 하였다.그리고 그들로 부터 믿음으로 구원받는 근거와 그 진리에 대해 분명해 졌다.그는 독일의 헤른 후트로 가서 그들과 함께 하면서그는 영적인 온전케 함을 받아 더욱 풍성한 은혜를 얻게 되었다.훗날 그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나는 일생을 헤른후트의 형제들과 거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나의 주님께서는 그분의 포도원의 다른 곳으로 가서 일하라고 부르신다." 후에 그는 영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그릇으로 영적인 능력이 가득하여 18세기의 전무후무한 대부흥을 가져왔다.결국 그은 한교회가 되지는 못했지만 웨슬레가 진젠돌프에게서 큰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부인 할수없는 사실이다.
종파가 난립하는 17세기에 모라비아 형제들은 종파의 선입관을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위한 유일한 간증을 하기 원했는데 이것은 실로 하나님이 이루신 큰 회복이었다.그들의 하나는 외적인 연합에서 비롯된것이 아니라. 그것은 성령의 역사 였다.
그들의 교회생활은 매우 소박했고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르며 계급의 구분이 없었다. 주님께 기도하고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드리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렸다.또한 그들은 어린이와 청소년의 일을 중요시 했으며. 젊은 미혼의 형제자매들은 각각 형제의 집과 자매의 집에 거하며그곳에서 온전케함을 받았다,
모라비아교회의 주님에 대한 사모함과 사랑과성도들간의 사랑은 계시록에 있는 빌라델피아교회의 실현이라고 말할수있다. 더욱이 이곳은 18-19세기에 주님의 움직임의 중심이 되었고 성령의 흐름이 있는곳이 되었다.
30년 전쟁 후 독일은 정식으로 개신교 지역이 되었으나 교회가 점차 국교회되자 정부의 간섭과 관여를 벗어날 수 없었다.루터 자신은 개인이 하나님과의 주관적인 체험을 갖는 것을 중요시 하였으자 점차로 체험보다는 교의를 강조하는 멜란히톤의 조례식 신앙으로 대치되는 스콜라저 루터교가 발전하였다.
멜란히톤의 조례는 명목상으로는 성경를 근거로 하였지만 실제적으로는 진부하고 융통성이 없고 정체된 교리 해석이었다. 백년이란 짧은기간 내에 루터교는 원래 주의 했던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한 주관적인 믿음에 서 다시 죽은 교리와 의식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더 깊고 의미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추구하는 한무리의 개혁자들이 일어났다. 생명의 체험을 중요시하는 경건주의 운동은 17세기의 유럽에 보편적으로 전개 되었다.그들은 경건한 생활을 추구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경건파라고 불렀다.
이러한 믿는이들은 루터교를 뒤집거나 떠난것이 아니라 루터가 주장한 이상을 하나하나 실행해 냈다. 그들은 자주 가정에서 함께 모여 성경을 읽고 기도 하였다. 집회에서는 한 사람만 말하고 다른사람들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라는 원칙 아래서 함께 누림을 나누었다. 그들은 성겅 읽기를 다만 지식만이 아닌 생명과 양육을 얻는데 중점을 두었다. 성경은 반드시 실재생활가운데 적용해야 하며 성결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살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믿는이들이 회개하고 거듭나는 주관적인 체험과 그리스도가 그들의 중심이 되며 은혜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중요시 하였다.
슈패너와 프랑케
독일의 작센주 할레는 문화와 학술의 중요한 도시이다.인구는 약 27만명이며 이곳에는 독일에서 가장오래된 건축물 과 죽은 루터의 얼굴상. 세계에서 가장오래된 성경학교가 있다.18세기 초 이곳은 하나님께서 회복의 일을한 중요한 곳이었다.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계시록 3장에서 사데교회는 종교개혁이후의 기독교를 말한다고 볼수있다.주님은 사데교회에 대하여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너는 일깨워 그남은바 죽게 된것을 굳게하라 내 하나님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말씀하셨다.
개신교가 천주교를 정복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것의 진리를 회복한것은 교회에게 생기를 가져다 주었다.그러나 1세기도 못되어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었던 이러한 움직임은 이름만 남고 실상은 죽은 상태로 떨어졌다.
새로일어난 국교회는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서벗어나지 못하고 성직자의 목회활동은 공직같이 되어버렸다.
믿는이들의 영성은 타락하고 루터가 주장했던 의롭게 된다는 진리는 루터 종파주의가 되어버렸다.루터교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한 주관적인 믿음에서 다시 죽은교리와 의식으로 떨어졌다.믿는이들은 단지 세례를 받고 성례와 교의를 지키며 시간에맞추어 예배를 드리면 좋은 신도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깊고 의미있는 생활을 추구하는 한무리의 믿는이들이 일어났다.그들은 믿음의실행과 거듭남의 체험을 주의했고. 성경을 읽는것을 중시하며 살아있고 경건한 생활을 추구했다. 이운동의 창시자인 슈패너는 1635년에 태어났다. 젊었을때 그는 제네바에서 공부를하였는데 그곳에서 영적인 사람인 라바디를 만났다.
라바디는 종교개혁의 공허함을 깊이느끼고 성령의 능력과 믿는이들의 기능을 회복하는데 힘을쏟았으며. 믿는이들이 가정에서 모이는것을 격려했다. 슈패너는 그의 영향을 받고 독일에서 그와 같은 진리를 전하기 시작했다.1675년 그는 경건한생활에 대한 책을 출판하여 루터파를 소생시키기위한 5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첫째 예배당에서 목사가 전하는 말만 의지하지 말고 가정에서 소그룹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고.둘째 믿는이들이 모두 제사장에 관한 진리와 실재를 회복하는것이고 셋째는 교리뿐아니라 믿음과 사랑이있어야한다.넷째 신학적인 쟁론을 줄이고 회개을 통해 진정한 경건의 생활을 사는것이다.다섯째는 신학교육의 개혁을 강조하고 주관적인 체험과 경건생활를 주의하고 공허한 신학적교리만 주의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슈패너는 가정집회에서 믿는이들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누림을 나누고.사도시대와 같이 모든사람이 기능을 발휘하는 상호성적인 집회방식을 회복하기를 바랬다.슈패너의 개혁은 루터파 신학자들의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그들은 슈패너가 지나치게 영적인수양을 중요시하고. 교의를 소홀이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슈패너의 개혁은 경건한생활을 추구하는 많은 믿는이들을 매혹시켜 17세기의 독일 기독교에 맑은 물을 주입하였다.
슈패너의 영향을 받는 많은사람들 가운데 청년강사 프랑케가 있었다.그는 1687년 주관적인 회개와 거듭남을 체험했다.후에 프랑케는 드레스덴에서 슈패너와 2개월동안 머물면서 경건주의를 완전히 받아들였다.그는 라이프찌히에 돌아온 뒤에 대학에서 강의하였다.
그러나 루터파의 선재후에게 불안한 마음을 일으켰고 선재후는 소그룹집회실행을 금하였다.1691년 브란덴브르크 선재 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할레에 대학을 세웠다. 슈패너의 추천으로 프랑케는 할레의 그라우카에서 목회를 하였고.할레대학의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30년간의 그의영향으로 할레대학은 경건주의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그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교육기관을 창설 하였다.그가 세운고아원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이 2000명에 달했고 130명의 고아들이 합당하게 돌봄을 받았다.진젠톨프도 이곳 할레에서 교육을 받았다.
독일 동남쪽 체코와폴란드 국경선지역에 작은 도시 헤른후트가 있는데 이뜻은 주님께서 지키심이란뜻이다.300년전 이곳에서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 진젠돌프가 태어났다.그는 원래 귀족으로서 모라비안 형제회의 창시자였다.그와 그의 무리는 헤른후트에서 영적인 운동을 시작하였다.그들은 종파를 떠나 믿는이들이 유기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고 주님께서 하나되게 하신것을 회복하고 그 어떤 기독교 단체보다 더많은 해외선교사들을 보냈다.또한 그들은 서로에게 사랑을 주는 이러한 교회생활을 이방인에게 복음으로 전파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진젠돌프
진젠돌프는 1700년에 태어났다.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몇주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어머니가 그를 헤른후트로 데리고 왔다.이곳은 귀족인 진젠돌프의 할머니가 살던곳이다.그의 할머니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매였으며 당시 독일의 경건파와 자주 왕래 하였었다.경건파의 지도자인 슈패너나 프랑케 를 집으로 초대해서 가정에서 집회를 가졌다.그러므로 진젠돌프는 어려서부터 경건파의 좋은 훈도를 받고 자랐다.
10살때 진젠돌프는 당시 경건주의운동의 중심지인 할레의 패다고기움에서 교육을 받았다.페다고기움을 졸업한 후에 진젠돌프는 비텐베르크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였다. 대학 졸업후 진젠돌프는 학위 이수의일환으로 관례에 따라 유럽각지를 여행하였다.그는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님을 그린 그림을 보고 깊이 매료되었다. 그 그림에는 "보라 이사람을"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끌어낼때 한말이다. "나는 너를 위해 나는 모든것을 버렸지만. 너는 나를위해 무었을 버리겠느냐" 라는 글이 써있었다. 그는 자신를 위해고난받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너무도 깊은 감동을 받고 사로잡혀서 무어라 말할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생토록 주님을 위해 살것을 결심했다.
1721년5월에 진젠돌프는 고향 드레스덴에 돌아와 작센지방의 전문변호사가 되었다.그는 가정을 열어서 서로다른 계급의 귀족이나 평민들이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간증하고 찬송하도록 하였다.그리고 이듬해 4월에 자신의 영지에서 에르트무트와 결혼하였다. 두사람은 귀족 신분을 버리고 한마음과 한뜻으로 그리스도을 섬기기로 결심하였다.
1722년 진젠돌프는 외할머니에게서 베르테르스 도르프영지를 샀다.영지안에는 진젠돌프의성 과 400년의 역사를 가진 루터회 예배당이 있다.어느날 이 영지에 한무리의 사람들이 왔는데 그들은 모라비아에서 온 난민들이었다.그들의 대표자의 이름은 크리스티안 데이비드였다.그들은 체코연합형제단의 후대 였다.모라비아는 체코 동부에 있다,그난민들은 그곳에서 100 여년동안 살다가 종교의 핍박을 피해 진젠돌프의 영지로 온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