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어진 보석통해 말씀하심


진리의말씀 2010-11-0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22192.html
 


교회에 관하여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음


 우림과 둠밈을 지닌 흉패에 관한 오늘의 적용은 또한 인도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하여 성도들의 상태와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알도록 마음에 성도들과 그리스도를 품는 것을 필요로 한다. 모든 지방 교회 안에는 마음에 성도들과 그리스도를 품는 인도하는 자들의 무리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인도하는 자들은 주님의 빛 비춤을 보아야 하고 성도들을 읽어야 한다. 그럴 때 그들은 그들의 지방에 있는 교회에 관하여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방법


 우림과 둠밈을 지닌 흉패를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이다. 하나님은 빛을 내고 있는 보석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두워진 보석들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소극적인 상황들을 통하여 말씀하심을 뜻한다. 정상적으로 흉패에 있는 열 두 보석은 우림의 빛 비춤 아래 있었다. 갑자기 어떤 이름이 새겨진 부분이 어두워질 것이다. 이러한 특별한 보석의 어두워짐이 하나님의 즉각적인 말씀하심이었다.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은 흉패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하심은 빛나고 있는 보석을 통해 왔으리라는 것이다. 사실, 그분은 갑자기 어두워진 보석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바울의 서신들과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주 예수님의 일곱 서신도 모두 이 원칙에 따라 기록되었다. 그것들은 교회들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적극적인 것에 따라서가 아니라 교회들의 소극적인 상황에 따라 기록되었다. 고린도에 보내는 바울의 첫째 서신을 예로 들어보자. 만일 고린도에 있는 교회 안에 소극적인 것들이 전혀 없었다면 고린도전서가 기록되었을 것인지 의심스럽다. 바울은 고린도에서의 소극적인 상황에 관하여 그가 읽은 것에 따라 이 서신을 기록하였다. 그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그는 무엇을 기록해야하는가를 알았다. 비록 그의 기록이 소극적인 것에 근거하였지만 이 서신 안에서 그는 교회에게 적극적인 것-그리스도의 풍성을 공급하였다.


 오늘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문제는 너무 많은 어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둠을 드러내실 길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어둠 가운데 있을 때 어둠에 있는 어떤 것을 지적하기가 어렵다. 방안의 천정에 여러 줄의 등불이 있다고 가정해 보라. 모든 등불이 빛을 내고 있다면 어두워진 등불을 발견하기가 쉬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흉패를 통하여 말씀하셨는가를 예증한다. 어떤 보석이 어두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즉각적인 말씀하심이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은 비정상적이다. 빛 대신 어둠이 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말씀하실 방법이 거의 없으시다. 어둠이 알려지려면 먼저 빛의 비춤이 있어야 한다. 방안에 빛이 전혀 없다면 어둠이 드러날 길이 없다. 그러나 모든 등불들이 빛을 내고 있을 때 어떤 등불이 어두워지면 그것을 즉시 알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어둠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암시이다. 어떤 교회 안에서 잘못된 것들이 쉽게 발견될 때 그 교회는 정상적이다. 그러나 어떤 교회 안에서 잘못된 것을 발견하기가 불가능하다면 이것은 그 교회가 어둠 안에 있다는 암시이다. 어둠이 우세할 때에는 소극적인 것들이 드러날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빛이 필요하다. 빛 비춤 아래 드러난 것이 하나님의 말씀하심이다. 하나님은 소극적으로 된 것들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이런 종류의 소극적인 상황은 그리스도가 부족하다는 표시이다. 이런 식으로 소극적인 상황들을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게 된다. 그럴 때 우리의 지방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기 원하시는 것을 알게 되며, 그때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

위트니스리의 출애굽기 라이프스타디에서



우림과 둠밈의 적용


진리의말씀 2010-11-0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22191.html
 

구약에서의 우림과 둠밈의 적용


28 장 30절에 덧붙여, 구약에는 우림과 둠밈에 대한 많은 언급이 있다. 레위기 8장 8절은, 『흉패를 붙이고 흉패에 우림과 둠밈을 넣고』라고 말한다. 민수기 27장 21절에 의하면 주님은 여호수아에 관하여 모세에게,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법으로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좇아 나가며 들어올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에스라 2장 63절과 느헤미야 7장 65절은 동일한 역사적인 상황에 관하여 우림과 둠밈을 말한다. 에스라 2장 63절은,『방백이 저희에게 명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말한다. 우림과 둠밈은 또한 신명기 33장 8절부터 10절까지와 사무엘상 23장 6절, 9절부터 12절, 28장 6절에도 언급된다.


 우림과 둠밈에 관하여 우리는 데이빗 베런의 책 「고대의 성경과 현대의 유대인(The Ancient Scirptures and the Modern Jew)」의 부록에 의해 도움을 받았다. 우림과 둠밈은 열 두 보석에 더하여 흉패 안으로 넣어진 두 가지였다. 히브리어 단어에서 우림은 빛, 조명기(발광체)를 뜻하고 둠밈은 온전함, 완전함을 뜻한다. 우림과 둠밈을 흉패 안에 둘 때 흉패는 판결 흉패가 되었다.


 아론


 구약의 역사에 의하면 우림과 둠밈은 많은 사람들에게 놓여졌다. 그 첫째 적용은 아론에게였다(레 8:8). 아론이 우림과 둠밈이 있는 흉패를 몸에 지니기는 했지만 우림과 둠밈을 사용한 적이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아론이 대제사장이었던 동안 모세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모세는 특별한 사람이었으며, 성경은 하나님이 아무런 수단과 도구나 중개물이 없이 직접 그에게 말씀하셨음을 말해준다. 출애굽기 33장 11절은,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말한다. 민수기 12장 8절은 주님이 모세와는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셨음』을 말한다. 주님이 모세에게 그렇게 직접적이고도 친근한 방법으로 말씀하셨으므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은 아론에게 그분의 뜻을 우림과 둠밈을 이용하여 알리실 필요가 없었다. 아론은 모세보다 앞서 죽었다. 그러므로 아론은 흉패와 우림과 둠밈이 있는 에봇을 입었을지라도 그것들을 이용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아론의 제사장 시절에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에게는 그분이 대면하여 말씀하신 사람 모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를 위한 엘르아살


 우림과 둠밈은 후에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적용되었다. 아론과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해야 할 위치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그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은 모세를 청하여 하나님의 뜻이나 인도하심을 알고자 한다면 제사장에게 가야 한다고 여호수아에게 말하게 하셨다(민 27:21). 그 당시 대제사장은 엘르아살이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관한 계시를 받기 위해 엘르아살에게 가야 했다.


 데이빗 베런의 책 부록에 의하면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아이에서의 이스라엘 자손의 패배를 야기시킨 죄를 가진 자가 아간이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것은 여호수아 7장 16절부터 21절에 기록되어 있다.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지파, 가족, 개인이 드러났다.


 이스라엘을 위한 레위 제사장들


 엘르아살 이후, 우림과 둠밈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레위 족속의 대제사장 각각에게 적용되었다(신 33:8-10, 스 2:63, 느 7:65). 신명기 33장 8절부터 10절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계시를 얻을 자격이 있는가를 본다. 이러한 사람은 거룩할 뿐만 아니라 경건하여야 한다. 경건하다는 것은 경건을 나타내는 것, 즉 하나님과 하나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이다.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을 위할 수 있지만 경건한 사람은 또한 하나님과 하나이다. 신명기 33장 8절과 9절은,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우림과 둠밈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그는 그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못하였다 하며 그 형제들을 인정치 아니하며 그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을 인함이로다』라고 말한다. 9절은 이러한 경건한 자들과 하나님 사이에 전혀 분리가 없었음을 가리킨다. 그들의 식구들조차도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하였다. 이것은 주 예수께서 복음서들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10:37). 주 예수께서는 또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셨다. 구약 시대에도 모세는 원칙상 주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과 동일한 것을 가르쳤다. 우리의 가족과의 관계도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분리되게 할 수 없다.


 신명기 33장 10절은 계속해서,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단위에 드리리로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 의하면 우림과 둠밈을 사용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또한 번제를 드리고 분향하는 사람들이다. 번제와 향은 주님께 달콤한 향기였다. 예표론에서 오직 두 가지만이 하나님께 그러한 즐거운 향기를 주었다. 하나님은 번제로부터 오는 향기를 맡으셨으며, 특별히 성막 안의 향으로부터 오는 향기를 즐거워하셨다. 번제도 향도 모두 그리스도의 예표들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께 번제와 달콤한 향이신 그리스도를 드린다. 분향하는 것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향이신 그리스도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과 하나라면 우리는 그분이 그 달콤한 향기를 누리실 수 있도록 번제를 드리고 분향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도록 우림과 둠밈을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사람들인 제사장들의 자격을 볼 수 있다. 제사장들은 경건한 자들이었고,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하나님께 번제와 향을 드렸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우림과 둠밈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다윗을 위한 아비아달


 사무엘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중의 상황이 비정상적으로 되었음을 본다. 대부분의 제사장들이 사울 왕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며 제사장 아비아달은 다윗에게로 도망하였다. 사무엘상 23장 6절은,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었더라』고 말한다. 의심할 것 없이 우림과 둠밈이 그 에봇에 부착되어 있었다. 사무엘상 23장 9절부터 12절은 아비아달이 사울에 관한 다윗의 질문에 대해 주님의 대답들을 계시하기 위해 우림과 둠밈을 사용하였음을 가리킨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도록 말한 후 다윗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의 연고로 이 성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주의 종의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주의 종에게 일러주옵소서』라고 말했다(10-11절).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주님은 다윗에게 사울이 내려오리라는 것과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겨주리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다윗은 제사장 아비아달이 사용한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두 가지 실질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들을 받았다. 다윗은 우림과 둠밈이라는 하늘에 속한 타자기를 통하여 분명한 대답을 받았다.


 사울에게는 작동하지 않음


 다윗은 경건한 사람이었으므로 주님은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그에게 대답하셨다. 그러나 사울 왕은 경건하지 않으므로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아무런 대답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림과 둠밈은 다윗에게는 작동했지만 사울에게는 작동하지 않았다. 다윗은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사울은 경건하지 않았다. 사실 하나님이 더 이상 그와 상관하려 하지 않으신 때가 왔다. 사무엘상 28장 6절은,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분명히 우림과 둠밈이사울에게 유용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사무엘상 28장 6절은 하나님이 사건을 계시하시는 세 가지 방법-꿈, 우림, 선지자-을 제시한다. 이러한 방법들 중에 당신은 어느 것을 더 좋아하는가? 나는 꿈의 방법을 더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하나님이 꿈을 통하는 대신 직접 나에게 어떤 것을 말씀하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체험을 통해, 어떤 꿈들은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과 그분이 꿈들을 통하여 어떤 문제들을 계시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은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더 좋아하는가? 선지자들이 일으킨 바 된 것은 제사장들과 왕들이 하나님께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제사장들과 왕들과 더불어 계속하실 길이 없었으므로 선지자들이 그분에 의해 일으킨 바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 먼저 제사장들이 있고, 왕들이 있고, 그 다음에 선지자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누군가가 구약의 선지자들의 방식으로, 『주께서 가라사대 … 』라고 선포하는 것을 듣고 싶어한다. 만일 당신이 이런 종류의 말을 즐기고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더 좋아한다면, 이것은 당신이 주님과 가깝지 않다는 암시일 수 있다. 당신이 주님과 친근한 사람이라면 우림과 둠밈을 몸에 지닌 제사장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꿈이나 선지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더 좋아해야 한다. 우리는 꿈꾸는 자들이나 선지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들이다.

위트니스리의 출애굽기 라이프 스타디에서



우림과 둠밈을 통해 말씀하심


진리의말씀 2010-11-0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22190.html
 

하나님이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말씀하심


 출애굽기 28장 30절은,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으로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 가슴 위에 있게 하라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판결을 항상 그 가슴 위에 둘지니라』고 말한다. 데이빗 베런(David Baron)의 저서 「고대의 성경과 현대의 유대인(The Ancient Scriptures and Modern Jew)」에는 우림과 둠밈에 관한 글을 담고 있는 부록이 있다. 이 글에 의하면 흉패 위에 있는 열 두 이름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스물 두 자 가운데 열 여덟 자를 포함하였다. 나머지 네 자는 둠밈이라 부르는 부분품에 부착되었다. 히브리어 단어 둠밈은 「완전케 하는 자들」, 또는 「온전케 하는 자들」을 뜻한다. 그러므로 둠밈이라 부르는 추가적인 부분품을 지닌 흉패 위에서 모두 스물 두 자의 히브리어 알파벳을 볼 수 있다. 타자기 키위에 있는 스물 여섯 자의 영어 알파벳이 단어나 구절이나 문장이나 단락을 형성하는 데 사용될 수 있듯이 흉패와 둠밈 위에 있는 스물 두 자의 히브리어 알파벳은 단어들이나 문장들을 판독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이 글에 의하면 우림은 열 두 보석 아래 있는 흉패 안으로 삽입된 조명기였다. 히브리어로 우림이라는 단어는 빛을 뜻한다. 데이빗 베런의 책에 있는 글은 우림이 연소를 위한 기름을 담을 수 있었다는 것과 이 기름을 태우는 데 사용된 불이 제단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말한다. 이 글을 쓴 권위 있는 그 히브리 학자는 또한 흉패 위에 있는 각 보석 조각을 비추기 위하여 각 보석마다 하나씩, 열 두개의 조명기들이 있었음을 말했다. 그럴 때 투명한 보석들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우림과 둠밈이 흉패에 더해질 때 그것들은 흉패로 하여금 판결 흉패가 되게 했다. 그것들이 더해지기 전에 흉패는 단지 기념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셨을 때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대면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나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방법인 직접적인 말씀하심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제사장이 입은 흉패 위의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 인도를 받았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백성들의 움직임에 관한 인도가 필요할 때마다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인도를 받은 대제사장에게 가야 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이 글의 저자는 여호수아와 아간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우림과 둠밈의 기능을 예증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아간의 죄로 인해 아이에서 패배당하였다(수 7장). 어떻게 아간의 죄가 발견되었는가? 이 글에 의하면 열 두 지파의 각 대표가 성막으로 와서 흉패를 착용하고 있던 대제사장 앞에 섰다. 갑자기 흉패 위의 열 두 조각 가운데 하나가 어두워졌다. 그것은 유다 지파의 보석이었다. 이렇게 하여 유다가 뽑혔다. 여호수아 7장 16절부터 18절은,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고 말한다. 흉패 위의 어떤 보석이 어두워짐으로 인해서 결국 가족과 그 사람이 발견되었다. 이 상황에서 흉패는 아간의 이름을 찍어 내는 하늘에 속한 영적 타자기와 같은 기능을 하였다.


 이 글은 우림과 둠밈의 사용에 관한 예를 인용한다. 그것은 여호수아가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지파들에게 땅을 분배하였다는 것과(수 18:6-10) 우림과 둠밈을 통해 알려진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원수들을 대항하여 싸웠다는 것을(삿 1:1-12, 20:18, 27, 민 27:21) 말한다. 더 나아가, 사울 왕이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형제 자매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그에게 대답하려 하시지 않았다(삼상 28:6). 제사장들이 사울에게 죽임을 당하였을 때 그 아들들 중 한 사람이 다윗에게로 도망했으며 그때 다윗은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주님을 따랐다.


 우리는 흉패가 판결 흉패라 불리웠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신명기 33장 8절과 10절은,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라고 말한다. 우림과 둠밈은 제사장들인 레위인들과 함께 있었으므로 그들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뿐만 아니라 그분의 판결을 가르칠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우림과 둠밈에 관해 다룬 것은 학문에 의한 몇 가지 역사적인 사실들이다. 우리는 아직 우림과 둠밈의 영적인 적용에 관하여 아무 것도 보지 않았다.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번 메시지에서의 나의 부담이 아니다. 나의 부담은 오히려 영적인 적용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트니스리의 출애굽기 라이프스타디에서



우림과둠밈


진리의말씀 2010-11-0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22186.html

교회안에 어떤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신약을 열어서 신약이 그 특별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 지를 보아야한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어떻게 말했는지를 보아야한다.신약의 하나님의 왕국의 성문헌법은 사도들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미국헌법보다 훨씬 더 많은 세칙이 있는 완전한 헌법을 갖고있다.

 

만일 우리가 어떤 문제에 관하여 우리의 성문 헌법에서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발견할수 없거나.혹은 발견할수있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적용해야할지 분명치 않다면 우리에게 즉각적인 말씀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즉각적인 말씀을 얻을수있는가. 주님의 임재안에 들어가서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물며 우리가 무엇을행해야할지 보여주시기를 구해야한다. 그때 우리는 모든글짜를 가진 흉패를 읽어야 한다. 흉패 위에 있는 글자들이 새겨진 보석들은 곧 성도들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한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그리고 가슴으로 예표되는 그분의 사랑하는 역량을 가지고 주님의 임재 안에서 교회 사람들을 읽음으로써 성문 헌법에 있는 것을 언제 어떻게 집행해야 할지에 대해 지시를 받을 것이다.

이것이 사도들의 기록된 가르침에 따라 즉각적인 말씀하심을 받는 것이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가슴에 금띠를 띠고 사랑으로 교회들을 돌보고 계신다. 우리는 그분의 가슴으로상징되는 그분의 사랑하는 역량을 공유할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도들을 사랑하며. 그러한 사랑하는 역량을 가지고 그분의 임재 안에 들어가서 그분을 앙망하면서 흉패의 보석들. 우림과둠밈 .곧 교회의 모든지체를 읽는 것이다.

 



합당한 토론에 관한 추가된교통(2)


진리의말씀 2010-11-0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22124.html

우리는 반드시 어떤 것도 감추지 말고. 독립적으로 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열고 토론하기를 배워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반드시 화를 내지 않고 토론하기를 배워야한다. 이것은 쉽지 않다.  내가 교회안에서 봉사를 시작한 초기 시절에 이러한 중점에 관해 많이 배웠다. 내가 봉사한 처음 몇 년간 나는 토론의 방식으로 많이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성질을 통제할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토론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 성질이 처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주님께 사용될수 있도록 나의 성질이 순수하게 되지 못한것 때문에 회개 했다. 나는 또한 내가 잠잠한 이유를 형제들에게 고백했다. 결국 나는 화를 내지 않고 토론하기를 배웠다.

 

우리는 형제들과 토론할때 주장하지 말아야한다.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성질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사도행전15장은 많은 토론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지만. 우리는 또한 거기에 주장하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25절은 그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주장하는 것을 피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천연적이고, 성질이 있고. 자아 안에 있는한 . 우리의 의견을 고집할 것이다. 합당한 방식으로 토론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십자가의 공과가 많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러한 공과를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의 토론은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우리는 많은 토론을 해야한다. 실지로는 우리가 영안에서 약하고 아직 우리의 성질에서 자유롭게 되지 못했기 때문에 말할엄두를 못내면서도. 하나를 지키기를 원하기 때문에 침묵하는 것이라고 핑계를 대서는 안된다.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은 모두 많은 영적체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토론에 참여할 자격이 있었고. 화를 내지 않고 토론을 했다. 그들이 주장하지 않고 토론했으므로 최종 결정이 설령 그들의 처음의견과 반대된다 할지라도. 그최종 결정을 받아들일수 있었다.

 

토론에서 우리가 한말이 제쳐질때 마음이 상하지 않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화를 내거나 주장하거나 마음 상하지 않고 토론하기를 반드시 배워야한다.

정부의 일을하면서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하거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정치를 한다. 그러나 사도행전 15장에는 마음상하는 것도. 체면을 세워 주는 것도. 정치를 하는 것도 없었다. 형제들은 열려 있었고 진실했다.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정상적이고 합당한 원칙들을 실행에 옮기기는 상당히 어렵다. 수술을하려면 외과 의사는 반드시 자격을 갖추어야하고 그와 그의 수술 도구들은 반드시 소독되어 깨끗하게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의 환자에게 세군을 가져와 환자를 더 아프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역자들과 장로들이 교통에 참여허려면 우리는 반드시 자격을 갖추어야하고  깨끗하게 되어야한다.

 

사도행전15장에 있는 원칙들을 실행에 옮기려할때. 우리는 자신이 십자가의 공과를 배우지 못하고 정결하게 되거나 철저히 다룸받지 못했다면.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토론에 참여하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가 토론에서 마음이 상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육체 안에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육체안에 있지 않다면. 우리의 체면을 지키는 것을 주의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존중하는지의 여부를 관심하지 않을 것이다. 정중한 것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은 사실상 육체를 위해 정치하는 것이지만. 육체는 동역자들과 장로들의 집회에서 입지가 없다.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본은 십자가의 공과를 배운 사람들에 의해서만 실행될수 있다.초기의 사도들과 장로들은 십자가의 공과를 충분히 배웠기 때문에 그러한 토론을 할자격이 있었다.

그들은 할말이 있다고 느꼈으므로 그토론에 참여했지만 주장하거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결과 그들의 토론은 마음 상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한 마은 한뜻으로 끝났다. 그러므로 특별히 동역자들과 장로들 가운데서는 십자가의 공과를 많이 배워야할 필요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