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7:14.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그대에게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녀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것입니다.
마 1:23. 보아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아라는 뜻이다).
인간처녀에게서 태어난 아기는 임마누엘. 곧 사람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다.(사 7:14.9:6상)
한 아기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되었는데. 그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이름은 기묘자라. 놀라운 조언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화평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그분는 인간 처녀에게서 태어난 인간아기이셨지만. 그분은 또한 하나님 자신이셨다.
이사야는 태어난 아기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하고있다.
신성한 계시릐 원칙에따랄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시는 것을 좌절시키기 위해 사탄이 첫번째로 사용한 나라는 창세기 11장에 있는 바벨이었다.바벨은 바빌론의 고대의 이름이다.
하나님을 거스로도록 사탄이 사용한 모든 이방민족들은 바벨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벨론은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시는 면에서 최악의나라이면 그나라의 왕은 사탄과 하나였다.
사 14:4. 너는 바벨론 왕에 대하여 이 노래를 지어 이르기를 학대하던 자가 어찌 그리 그쳤으며 강포한 성이 어찌 그리 폐하였는고,
사 11-15: 네 영화가 음부에 떨어졌음이여. 너의 비파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너 아침의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위에 좌정하리라. 가장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에 빠치우리로다.
겔 28:13-18.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엿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 내었고 화강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열왕 앞에 엎드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이사야 6:1-8. 웃시아왕이 죽던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차 있었다. 스랍들이 그분을 모셔 섰는데 그들은 저마다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는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여호와여! 온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에 문지방의 기초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찼다.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백성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여호와를 만나뵙다니! 그때에 스랍들 가운데서 하나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들고 나에게 날아와서 그것을 나의 입에대며 말하였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정결하게 되었다. 그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해 갈 것인가.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저를 보내어 주십시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라고 말했다.
날마다 우리는 말을 너무많이 한다. 우리가 하는 말들은 대게가 악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말이 비평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문제나 어떤 사람에 대하여 하는 모든 말이 거의 비평하는 말이다.
한담과 불평과 따지는 것을 제한다면. 우리게게 할말이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사야가 6장의 체험 이전에는 하나님에 의해 씻어지지 않았는가. 물론 이사야는 정결하게 되었지만. 그는 자신이 여전히 부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우리모두가 자신이 완전히 부정하다는 것을 깨달아야함을 가리킨다. 우리가 얼마나 여러번 씻어졌는지에 상관없이. 우리는 여전히 부정하다.
이사야는 정결하게 됨에 대해 말했다. 이사야는 자신이 부정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상징하는 한 스랍에의해 정결하게 되었다. (사 6:6) 제단에서 가져온 타고있는 숯으로 정결하게 되었다.
머리를 덮고 덮지 않는 문제로 서로 의견이 맞지 않다든지 또 다른 것에서 의견과 주장이 달라서 서로 논쟁한다면 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앎이 부족해서 나온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만일 두 형제가 한 사람은 주일에 모이는 것이 옳다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안식일에 모이는 것이 옳다 하며 논쟁하다가 당신 앞에 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확실하게 주일은 옳고 안식일이 완전히 그르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교리적으로는 맞겠지만 당신이 성도들 안에 있는 일을 그와 같이 처리한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교회의 영과 생명도 없게 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을 알고 그리스도를 안다면, 당신은 이 두 사람 가운데 서서 그들을 자신이 굳게 붙잡고 있는 극단에서 나와 중심이신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반드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알도록 이끌어야 한다. 거기에 교회의 실재가 있고 교회의 내용이 있다.
교회를 돌보는 기본 조건은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달려 있다. 만일 믿음에 있어서 하나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조만간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서로 다른 견해가 나올 때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돌보겠는가? 전체가 함께 토론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교리를 말해 줄 것인가? 그렇게 하는 것은 교회를 돌보는 것이 아니다.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는 이 점에 있어서도 목이 마를 때만 우물을 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평소에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을 배워야 한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라고 말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이미 이 일을 실행하였고, 그렇게 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에서 우리는 고린도 교회 안에 다툼과 문제가 있었던 것을 본다. 그들 중 어떤 이는 기적을 주의하고 어떤 이는 지혜를 주의했다.(1:22). 그러나 바울은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했다.(23절). 고린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아는 것 같고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아는 것 같다(2:2). 바울은 13장에 일르러서 고린도 사람들이 설사 모든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만일 그리스도가 없다면 여전히 소리 나는 징과 울리는 꽹과리라고 말한다(1절). 바울은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바울은 이치를 말하고 부활도 말했다(15장). 그릇된 교리를 올바른 진리로 처리했다. 이것은 큰 원칙이다. 우리의 어려움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부족하고, 그리스도를 체험한 것이 부족한 데 있다.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체험이 있을 때만이 비로소 교회를 돌볼 수 있다.
위트리스 리[교회를 돌보는 길中]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전하는 데 매우 은사가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은사는 결코 말씀을 전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본능이다. 당신에게 중심이 되는 것이 있을 때 물론 은사도 필요하다. 그러나 당신에게 은사만 있고 중심이 없다면 당신은 교훈의 풍조를 만드는 공장이 될 것이며, 교훈의 풍조를 만드는 선수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상당히 말 주변이 있어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그러나 그들이 전한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일어나 그리스도를 추구하려 하지 않고 다만 구원받고 천당에 가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들 가운데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그들은 참으로 교훈의 풍조를 만들어내는 선수들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기를 원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전하는 말재주는 없지만 듣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하며 주님께서 그 안에 사시게 한다. 이것이 바로 참된 말씀을 붙잡는 것이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과 교통하다 보면 그의 말이 그리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결과는 당신으로 하여금 주님 안에 살게 하고 주님의 생명을 추구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귀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 비록 그의 입과 혀가 우둔할지라도 당신은 교회 안에 이러한 형제를 예비하셔서 우리에게 진리와 실재를 주신 주님께 고개 숙여 감사해야 한다.
물론 당신에게 진리가 있고 은사가 있다면 더욱 좋다. 바울은 에베소서4장 11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을 구변 있게 잘 썼다. 그러나 바울의 구변은 사람을 빗나가게 하는 교훈의 풍조가 아니다. 그는 말을 마치면서 우리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아 모든 일에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야 한다고 한다. 머리로부터 각 마다를 통하여 풍성하게 공급을 받고 각 지체의 기능을 따라서 연결되고 결합하므로 몸이 점점 자라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할 수 있도록 한다. 우리는 바울이 참으로 말주변이 있음을 본다. 이렇게 높은 진리는 베드로가 결코 말해 낼 수 없는 것이다. 바울에게 이러한 은사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진리를 말할 수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진리를 말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가운데서 살면서 이러한 진리가 그의 사역이 되게 했다.
고린도후서에 그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4:7)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가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고 주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것처럼 점점 그분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른다고 말한다(3:18). 때로 우리는 빛 비춤을 받지만 여전히 죽으려 하지 않는다. 주님은 오셔서 죽이는 역사를 하시어 우리의 겉사람은 날마다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에서 우리는 하나의 사역을 본다. 바울은 빛을 보았을 뿐 아니라 그는 본 그것이 되었다.
이러한 교통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이 교훈의 풍조인가를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어떤 형제는 아마도 시골뜨기 같고 말재주도 없지만 그러나 그 안에 성령이 있어서 그리스도를 공급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다. 또 다른 형제는 말재주가 있어서 말을 시작하면 그칠 줄 모르는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만지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교훈의 풍조를 전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가운데 있는 진리는 반드시 신약의 진리에 부합되어야 한다. 신약의 진리는 하나님께서 육체로 나타나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람과 연결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을 내용으로 삼지 않은 메시지가 있다면 우리는 즉시 그것이 교훈의 풍조인 것을 단정할 수 있다. 이러한 원칙은 우리에게 오늘 이후로 무엇이 교훈의 풍조인가를 분별해 줄 것이고 더 이상 그것에 기만당하지 않게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평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배우는 것이며, 우리의 봉사는 하나님의 아들을 내용으로 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중심 삼아 그분으로써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한 것은 교훈의 풍조이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아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아는 것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주님께서 우리로 그분 자신을 만지게 하시고 그분의 아들을 알게 하시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그런 후에 우리가 만진 것을 형제자매들에게 공급하고 우리가 인식한 하나님의 아들을 분배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한 일이 많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한 것은 교훈의 풍조가 아니라 진리가 된다.
위트니스 리[교회를 돌보는 길中]
--- 서론 ---
이사야서는 저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이다. 일반적인 성경 해석가들은 흔이 이사야를 선지자 중에서 가장 큰 선지자라고 칭한다. 그가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가장 상세하고 광범위하게 썼기 때문이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는 이스라엘 왕국의 선지자 아모스와 호세아. 그리고 유다왕국의 선지자 미가와 동시대 사람이다. 역사가였던 그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에 이르는 네왕조에 럴쳐 가장 긴 기간 동안 선지자로서 사역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믿은 만한 유전과 2세기의 몇몇랍비들의 저서에 따르면 그는 므낫세의 재위기간에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다. 이사야서는 주전 760년경부터 698년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다.
--- 주제 ---
성육신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통한 여호와의 구원
--- 배경 ---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그분을 배역했다.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허물과 패괴함으로 가득하였다. 여호와는 그분의 백성을 징계하셔야 했다. 먼저 그분은 징계에 관하여 예언하셨다. 이어서 그분은 열국을 사용하여 그들을 징계하셨다. 그러나 열국은 하나님의 의도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지나쳤다. 때문에 그분은 또 열국의 심판에 관하여 예언하셨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그분의 궁극적인 갈망 -이스라엘의 징계와 열국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오시게 하며 이스라엘 니라을 회복함-을 계시하셨다.
--- 이사야가 본 이상과 말씀과 부담 ---
이사야는 여호와의 구원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여호와의 구원이다. 이책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시기 위해 한 백성 이스라엘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선민과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 되게 하셨는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 주변에는 이방 민족들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며 민족들은 하니님에 의해 제쳐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의 움직임 안에서 민족들을 소홀히 하실수 없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사랑하시는 백성인 이스라엘과 민족들 모두 이사야의 신언에 매우 많이 연관되어있다.
이사야서를 읽을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다루시는 것에는 두 방면. 곧 그분의 거룩함의 방면과 그분의 의의 방면이 있다는것을 기억해야한다.
거룩함은 선택받은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고. 의는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시며. 민족들이 의롭게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거룩함과 의에 근거하여 이 두부류의 사람들을 각각 다루신다. 하나님은 거룩함으로 인하여 사랑안에서 이스라엘을 징벌하시며. 의로 인하여 민족들을 심판하신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술취한 이들로 가득했고 (사 28장). 남왕국 유다는 위선적인 경배자들로 가득했다. 이 두가지 상태는 이땅의 타락한 인류가 어떤상태에 있는지를 묘사해 준다. 먼저 사람들은 주님 이외의 것들을 사랑함으로 술취해 있고. 들째로 그들은 진실하지 않고 거짓되다. 이구절에 묘사된 이러한 위선적인 경배는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 15:1-14.요4:20-24).
심지어 하나님의 선민 가운데 에도 술취함과 외식이 있을수 있다. 우기가 깨어 있는 영으로 기도하지 않는 다면. 이두가지 것들이 교회생활안으로 들어올것이다.
이사야 29:13절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떠났도다.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이사야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 육십육권 전체에 대한 조망을 가져야한다. 이사야서는 두부분으로 되어있다. 첫 번째 부분은 1장부터 39장까지를 포함하며. 두번째 부분은 40장 부터 66장까지를 포함한다. 이사야서의 전반부 서른 아홉장은 구약 서른 아홉권과일치한다.
나머지 스물일곱장은 신약 스물일곱권과 일치한다. 신약은 침례자 요한으로 시작되며 (막1:1-3). 이사야서 40장도 침례자요한으로 시작된다.(3절)
이사야서 40장에는 사복음서와 일치하는 복음전파(1-5절)와 사도행전과 일치하는 거듭남을 통한 구원(6-8절)과 서신서들과일치하는 변화(28-31절)가 있다.
*영원하신 하나님 주 여호와에 대한 계시*
엘로힘은 창조와 관련되신 하나님의 이름이고.여호와는 사람과 관련되신 하나님의 이름이다.(창 1:1.2:4.사 1:2.4)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위대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12방면의 계시를 보여준다.
주여호와는 자신를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다. 유대인 고아처녀 에스더를 일으키시어. 가장높은 왕의 왕후로 관 씌우셨다. 그리고 에스더는 왕을 암실하려고 음모하는 사람들에 대해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말함으로써 암살당하는 데서 왕을 구원하였다.(에 2:1-23)
그러므로 숨기시는 하나님은 아하수에로왕을 잠못이루게하므로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에 6:1)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속에서 가장 강력하게 일하고 계신다.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음성이라고 인식되지 않는 고요한 음성에 반응함으로 그분과 협력해야한다.
*욥 23:10 우리를 단련하는 믿음의 시련*
욥은 자신의 문제로 하나님과 변론하기 위해 그분을 찿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이상을 주셨다. 욥이 전에는 고난보다 죽음을 원했지만 이제는 단련된 후에 정금같이 되리라고 말했다. 욥은 그의 고난이 그를 단련하기 위함인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베드로는 그의 첫 서신에서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된 금같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정결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벧전 1:7.4:12).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은 여러가지 시험으로 인하여 절망할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뜨거운 불은 우리가 시련을 거쳐 연단되기 위한 주님의 안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 혼의생명을 부인하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때 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혼의 생명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다.(마 16:24-25.요 12:25) 많은 경우 주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통해 우리 자신 을 부인하고 주님을 추구하는 길 외에는 어떤 출구나 다른 방법이 없음을 보여 주신다. 모든 문제가올때 주님께 우리을 마음을 돌이켜야하며.모든 환경으로 인해 감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