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와 직분 어떻게 다른가?


그리스도인의교회생활 2010-07-1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18342.html

 

 

 

위광휘 형제: 은사를 추구함에 대하여 마땅히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1)직분은 예수의 죽음으로 구성된 것이고, 은사는 다만 성령이 밖에서 더한 것이다.

 

워치만 니 형제님: 고린도 전.후서는 은사와 직분이 다름을 말한다. 고린도전서는 은사를 말하고, 고린도후서는 직분을 말한다. 직분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이며, 은사는 다만 성령이 우리의 밖에서 더해진 능력일 따름이다. 고린도후서 4장의 ‘죽음’은 원문에서 하나의 특별한 죽음이다. 헬라어에서 ‘죽음’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생명과 반대되는 것,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에 반대되는 것으로 죽었다고 말할 경우에 쓰이는 일반적인 용법이다. 다른 하나는 “죽이다”의 의미로서 사람을 낳았다고 말하는 것에 반대되는 것으로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는 경우에 쓰이는 또 다른 용법이다. 고린도후서 4장에 있는 죽음은 헬라어에서 “죽이다”의 의미이므로 예수의 죽임(the killing or the slaying of Jesus)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나는 영국에 있을 때 서양의 형제자매들에게 고린도후서 4장의 죽음이란 단어에 대해 우리는 새로운 단어 곧 “죽게 하다”를 쓸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죽음은 곧 당신을 죽게 하는 죽음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예수께서 적극적으로 우리에게서 죽었다는 것이다 이 말이 가리키는 것은 예수께서 당신을 죽게 하는 그 죽음에 넘겨졌다는 것이다. 생명의 사역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요, 한 차례 한 차례의 처리함을 인하여 산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은사는 다만 교회의 초보적인 것이다. 오늘날 주님이 중요시하는 것은, 우리가 직분으로 교회를 섬기는 것이지 은사로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2)교회는 영적인 은사보다도 생명의 직분이 필요하다.

 

한 형제가 연단에 오르면 당신은 즉시 그가 은사 있는 형제인지, 아니면 직분이 있는 형제인지를 알 수 있다. 동남 아시아 사람들은 칼을 사용하여 고무나무를 벤다. 나무 안의 생명이 흘러나오는 것은 칼이 낸 상처로 인하여 산출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직분의 섬김을 설명할 수 있다. 사람은 불 시험을 받을 때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다만 사람에게 은사를 주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우리가 강한 교회가 되는 데 필요한 것은 은사가 아니라 생명의 직분이다. 어린 교회는 당신이 들어갈 때는 아주 뜨겁겠지만 안에 생명이 많지 않다. 다른 한 면으로 당신은 아마 언변이 없는 형제로 인해 조급해하며 그를 대신할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그에게 직분이 있으며 그가 나타내는 것은 은사가 아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성장할 때 많은 직분들이 산출되며 결과적으로 많은 공급이 있게 된다. 모든 형제자매들은 직분과 은사가 다름을 만져야 한다. 교회는 더 많은 직분의 일어남이 있어야 한다. 어린 교회는 은사 있는 형제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상황으로 계속 나가게 할 수는 없다. 은사는 일시적인 것인 반면 직분은 영원한 것이다.

 

(3)은사는 당신이 사용하는 도구이고 직분은 당신이란 사람이다.

 

유성화형제교통: 그리스도의 생명은 믿는 이들 안에 있는 ‘예금’ 이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로부터 온 실재적인 것이며 하늘로부터 온 실재이다. 은사는 단지 어떤 것에 불과하다. 빌려서 자신이 쓰지만 쓰는 사람 본인은 여전히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것은 마치 발람의 나귀가 사람의 말을 할 수 있었지만(민 22:28), 이로 인하여 당신이 나귀를 사람으로 여길 수 없는 것과 같다. 은사는 어린아이가 어른의 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한 무리의 직분 있는 사람을 일으킬 때 그들에게 물론 은사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세워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다만 은사에 의하여 말하는 사람과 이십여 년을 과정 속에서 산출된 직분에 의하여 말하는 사람은 완전히 다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을 자신도 똑 같이 말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한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어린아이가 어른의 말을 할 수 있지만 어린아이가 한 말로 인해 그를 어른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마치 나귀가 말을 한다고 해서 그를 사람으로 여길 수 없는 것과 같다. 은사 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과 직분 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은 외면상으로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크게 다른 것이다.

 

교회가 강할 때 성도들의 영은 밝다. 비록 겉은 뜨겁지 않을지라도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 어린 교회 안에 은사가 있을 수 있지만 직분이 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말할 때 그 말이 그가 한 말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은사가 있는 어떤 사람들은 은사가 없는 사람들보다도 더욱 빠르고 쉽게 타락한다.

 

워치만 니[3집 사역재개 메세지 기록中]



은사는 다룸을 요구하지 않아도, 기능은 절대적으로 필요함


은혜로은글 2010-07-0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18062.html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은사 있는 많은 형제자매들이 좋지 못한 성격 때문에 기능을 나타내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이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다른 각도에서 볼 때, 장로와 집사 그리고 책임자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만약 단지 은사만 근거로 하고 기능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장래 교회에 화가 될 것이다. 단지 은사만 있고 기능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위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반드시 교회에 손상을 입힐 것이다. 청소년 형제자매들은 특별히 주의하기를 바란다. 단지 여러분의 은사만을 주의하고 여러분의 기능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은사만을 주의한다면 여러분은 장차 교회 안의 위험한 인물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은사는 결코 사람이 다룸 받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나 기능은 사람이 다룸 받는 것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많은 은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다룸을 많이 받은 장로는 장로 직분에 있어서 분명 그의 몫의 기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기능은 은사를 포함하지만 은사는 결코 기능을 포함하지 않는다. 기능은 은사에 어떤 것이 더하여진 것으로 사람됨에 은사를 더할 때 비로소 기능을 가지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은사를 가지고 있으나 사람됨이 부족하고, 그의 사람됨 곧 그의 성격은 그의 은사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은사에 어울리는 그의 사람됨과 성격을 가지려면 그는 십자가를 거쳐야 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과해야 한다. 주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배우게 하는 공과는 매우 실제적이다. 예를 들어, 말 하는데 있어서 대충대충 한다든지, 집회 시간이 7시 30분인데 8시가 다 되어서야 온다든지, 이런 사람은 결코 아니다. 이와 같다면, 생명의 공과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은사와 생명은 그렇게 큰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나, 은사의 기능이 나타나려면 생명의 공과를 필요로 한다. 십자가로 더 깊은 다룸을 받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의 속에서 더 깊이 일하도록 허락한 사람일수록 그의 기능은 더욱더 드러날 것이다. 장로나 집사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만약 기능을 근거로 한다면 만의 하나도 실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기능을 무시하고 은사를 중시한다면 그 결과는 매우 나쁜 상황을 가져 올 것이다.

 

일하는 재간과 말하는 능력에 근거하여, 즉 은사를 중시하고 기능을 중시하지 않고 세운 결과는 온 교회를 목 졸라 죽이는 꼴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령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생명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유기적으로 자라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은사는 의지할만한 것이 못 된다. 은사로써 교회 안에서 사람들의 봉사를 단정할 수 없으며 반드시 기능을 보아야 한다. 어떤 형제가 교회 안에서 얼마나 기능을 가지고 있고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그 형제가 해야 할 일이 결정된다. 그러한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결코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없고, 또한 그러한 몫을 가지고 동역할 수 없다. 이것은 특별히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붙잡아야 되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교회 조직의 원칙中]



영의 훈련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


은혜로은글 2010-07-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k505/17817.html

우리 육신의 몸에 혈액순환은 매우 중요하다. 이순환은 영양분을 우리 몸의 곳곳에 전달해주고 또한 우리 몸을 양육한다. 때때로 우리는 몸 안에  혈액순환을 증진시키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할 필요도있을 것이다. 운동을 통해 우리 몸은 더욱 건강해진다. 로마서 10장 12절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주님은 우리에게 풍성하시다고 말한다.  나는 우리가 큰소리로 주님을 부르면 부를수록 우리의 영이 더욱해방되고 우리는 더욱 치료를 받아 강건하게 된다는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주님을 부르는것은 우리를 건강하게 할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부르는것이 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항상 조용하게 입을 다물고 있다면 우리는 매우 약할 것이다.

 

그러나  "오 주예수님. 오 주예수여" "아멘. 할렐루야". 라고 10분동안 외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분이 되실것이다. 우리는 기뻐할것이고.... 주님을 부르는 것이 우리의 힘이 될것이다. (느 8:10). ...주님은 그분을 부르는 모든이에게 풍성하시다. 부르는 것은 다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부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외치는 것. 심지어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을 뜻한다. ....큰소리로 외칠수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크게 "오 주예수여"라고 외쳐야 한다. 이렇게 주님을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고 강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영께서 우리 안에서 순환하시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 순환하는 영은 그안에 신성과 인성 그리스도의 인격과 죽음과 부활을 포함하신 복합되신 영이시다. 이 복합되신 영안에 있는 풍성은 측량할수 없다. 이영께서 우리안에서 순환하실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을 누린다. 이순환이 그리스도의 몸의교통이다.



마가렡 바버 자매님


워치만니 2010-06-24 / 추천수 0 / 스크랩수 2 http://blog.chch.kr/k505/17441.html

"향유 냄새가 가득하더라" (요 12:3)

 

바버 자매님은 50년 이상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 가운데 그녀에게서 직접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한 손으로 다 셀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녀가 우리에게 준 깊은 인상을 희석시키지 못합니다. 나이 많은 자매님 한 분은 젊은 시절 바버 자매님을 본 것을 기억했는데, 그녀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동그란 얼굴을 가졌는데, 그 얼굴은 친절하고, 무게 있고, 경건하며 깨어 있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빛으로 충만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그녀 곁에 있을 때 항상 사람들로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녀가 말할 때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기쁨으로 넘쳤습니다. 그녀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는데 이것은 사람들로 인생의 고통을 잊게 해 주곤 했습니다. 그녀는 후조우 말을 유창하게 했습니다.

 

바버 자매님이 주위 사람들에게 준 영적인 공급에 관해 위의 자매님은 "그녀가 해방하는 말씀은 빛과 생명이 가득했으며 사람으로 모든 것을 떠나 일생동안 주님을 따르도록 만들었습니다." 라고 회상했습니다. 또 다른 나이 드신 형제님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학생이었는데 후에 그녀의 영적인 아들이 되었고 또한 바버 자매님의 동역자이기도 했는데 다음과 같이 기억했습니다.


제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눈빛은 번개같았고 머리결은 은같이 빛나고 얼굴은 마치 천사 같이 빛났습니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어머니의 표정같이 온화했습니다. 그녀의 행동함은 경건했으며 옷은 소박했고 언제나 미소 띠고 친절했습니다. 그녀는 중국에 온 여느 외국인들과 달랐습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깨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평판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좋은 본이었습니다. 그녀가 행한 모든 일이 주님을 위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워치만 니는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나이 든 자매님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그 자매님이 바버 자매였습니다. 그녀가 주님께로 갔을 때, 니 형제님은 그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의견으로는 그녀는 주님 안에서 매우 깊었으며 그녀가 주님과 나눈 교통과 그녀가 주님께 드린 신실함은 이 땅에서 거의 찾기 힘든 것들입니다." 니 형제님은 사역할 때 그리고 개인적인 교통 안에서 자주 그녀를 말하곤 했습니다. 니 형제님은 "내 일생동안, 그녀가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이었습니다."라고 말했으며 "내 인생의 가장 큰 얻음은 바로 바버 자매님을 알게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니 형제님은 1933년 영국과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디 엠 펜튼, 죠지 커팅, 제임즈 테일러, 티 오스틴-스팍스 등의 유명한 크리스챤 인도자들을 만난 후 니 형제님은 " 바버 자매님과 비교 할 만한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1933년에 니 형제님이 동역자들과 섬김에 관해 말했을 때 "만일 바버 자매님이 여기 계셨다면 우리의 상황은 달랐을 것"이라고 그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니 형제님은 그녀를 빛나는 크리스챤으로 여겼습니다. 니 형제님이 그녀가 사는 곳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니 형제님이 주님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상황이 어떠하든 그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로 그의 마음에 결심했었는데 따라서 그는 자신을 이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버 자매를 만나 주님에 관해 말하거나 성경을 읽을 때면 그는 항상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에 있어 부족함을 깨달았습니다.

 

바버 자매님이 파고다 앵커리지에 사실 때, 그녀는 항상 주님을 위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말함을 통해 그분의 뜻을 나타냈을 뿐 아니라, 그분은 또한 그녀의 인격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니 형제님이 이렇게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많은 형제, 자매님들이 성결하게 됨에 관해 말함을 듣고 성결의 교리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결과 관련된 200여 구절들을 찾았습니다. 그 구절들을 외우고 순서대로 배열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성결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 나이 드신 자매님을 만난 날까지 안으로부터 공허했습니다. 그녀는 신성했습니다. 그날 내 눈이 열렸습니다. 성결케 됨이 어떤 것인지 본 것입니다. 내가 만난 그 인격은 신성했습니다. 내게 이것이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 빛이 나로 더 앞으로 나가도록 해 주었습니다. 나는 피할 수 없었는데 이 빛이 성결을 보도록 해 주었습니다."

 

1922년, 바버 자매님은 56세였습니다. 니 형제님이 아직 젊을 때 였는데 구원 받은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가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만질 수 있는 많은 청사진들, 기발한 생각들, 훌륭한 계획들로 가득 했습니다. 그는 그의 이러한 것들이 실행에 옮겨만 지면 놀라울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아주 흥분되어 이 모든 것을 행하기 위해 바버 자매님을 설득키 위해 갔습니다. 후에 그는 "내 계획들에 관해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몇 마디 무게 있는 말을 했습니다. 그 때 빛이 임했고 나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내 일은 아주 천연적인 것이어서 인간의 요소들만으로 가득찬 것이었습니다. 빛이 옴으로써 나는 주님께 단지 주님! 내 생각은 단지 육체의 활동에만 주의 할 뿐입니다. 여기 그러한 것들은 생각조차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의 유일한 동기와 소망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상태까지 이끌려졌습니다.

 

그녀의 글들 가운데, "나는 내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원합니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향한 그녀의 기도였습니다. 여기의 단어들은 어느 유명한 한 나라의 지도자의 전기에서 인용한 것인지도 모르는데, 그가 말하길, "내 자신을 위해서는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내 조국을 위한 모든 것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후에 워치만 니는 이 인상적인 기도문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그녀의 존재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 이 기도가 바버 자매님의 일생을 정확히 나타내고 설명해 줍니다. 

 



마가렛 에미 바버 자매님


워치만니 2010-06-17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k505/17174.html

우리는 이 소책자에서 주님의 종, 중국에서 하나의 신성한 생명의 씨앗이 된 마가렛 E.바버 자매님생각해 보려 합니다.주님의 권익을 위해 영국에서 중국으로 이사하려는 부담을 가짐에 있어서 바버 자매님은 십자가를 깊이 체험했으며 믿음에 의해 사는 것을 배웠습니다.

윗트니스 리 형제님이 쓴 워치만 니의 전기에서(워치만 니: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애나하임: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 1991, 18), 리 형제님은 워치만 니가 도라 유와 마가렛 바버로부터 받은 도움에 관해 말합니다: "니 형제님은 자주 우리에게 그가 구원받은 것은 자매(도라 유)를 통해서 였고, 그가 양육 받은 것도 자매(마가렛 바버)를 통해서였다고 말했습니다. 워치만 니를 디 엠 팬튼, 로버트 고벼, G.H. 펨버, 제시 펜-루이스, 티 오스틴-스팍스의 글들에 소개한 사람도 마가렛 바버였습니다.

 무명한 자요"("As Unknown) (고후 6:9)

 

M. E. 바버는 일반적인 세상 뿐 아니라 믿는 이들 가운데서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막 안의 흐름들"이라는 책 안에 그녀의 이름이 등장함을 알지도 모르는데 그것이 아마 알려진 전부일 것입니다. 그녀는 영국인이었으나 영국 인물 사전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선교사 였지만 데이비드 리빙스턴이나 허드슨 테일러 같이 위대한 일들을 한 사람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한 일의 범위는 넓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일의 대부분은 중국의 작은 구석진 알려지지 않은 마을로 제한되었습니다. "전세계가 나의 교구"라고 말할 수 있었던 요한 웨슬레 같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찬송가들을 썼지만 찰스 웨슬레나 대부분의 크리스챤 찬송가 책들에서 발견 할 수 있는 아이삭 왓츠의 찬송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사랑했으며 영적인 삶에 있어 성숙했었지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많은 글들을 남긴 앤드류 머레이나 마담 귀용 같은 이들과도 달랐습니다.

 

그녀는 마치 이 땅위에 조용히 왔다가 간 외로운 여행자 같았습니다. 그녀는 1866년에 영국의 피젠홀, 써폴크 카운티에서 루이와 마르다 바버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주님은 M. E. 바버가 63세 되었을 때 데려 가셨습니다. 그녀의 짧은 생애 동안 그녀는 주님에 의해 두 번 중국에 가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집을 포기하고 수천마일 떨어진 낙후된 나라로 외롭게 여행했습니다. 그녀는 1930년 3월 1일 그녀가 죽기까지 그녀가 신실하게 계속했던, 주님을 위해 바친 그녀의 최고의 해들을 후조우에서 가까운 작은 마을에서 조용히 보냈습니다. 한 형제님은 그녀의 장례식에서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막14:8)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던 워치만 니 형제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그의 유명한 책인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녀에 대한 그의 감사함을 후에 썼습니다. 마지막 장 \'복음의 목표\'에서 ("왜 이 허비를?" 이라는 제목으로 별도 인쇄됨) 니 형제님은 그녀의 "주여, 주님의 마음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 제 마음은 부숴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를 인용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위해 일하기 위한 자격은 무엇입니까?" 라고 그녀에게 물었는데, 그녀는 "주님을 위해 일하기 위한 자격은 일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녀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많은 중국인 젊은이들 중 일부는 그녀로 인해 걱정했습니다. 그들은 "왜 더 큰 도시로 가서 집회를 세우고 일하지 않습니까?"라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작은 마을에 살았습니다. 마치 그것은 그녀가 그곳에서 사는 것이 허비인 듯 했습니다. 한 형제는 그녀에게 "아무도 당신이 아는 것처럼 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성경을 가장 산 방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방에 필요가 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왜 나가서 무엇을 하려 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여기서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시간, 힘, 돈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허비하고 있습니다"라고 소리치다시피 말했습니다.

 

허비였을까요?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모든 것이 분명합니다. 그녀는 중국에 하나님에 의해 심겨진 바 된 생명의 씨앗이었습니다. 이 씨앗은 정녕 외로움, 수치 당함, 은둔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감사함은 그분은 그녀로 활짝 피어 열매 맺게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서 직접, 간접적으로 영적인 도움을 받았는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놀라운 일은 바로 이것인데: 하나님께서 그녀로 풍성히 열매 맺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살아 있던 동안에는 하나님께서는 그녀로 이 사실을 알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