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자교회의 시작과 워치만니의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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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교회의 시작과 워치만니의 박해(1950-1972)

<time>2015년 6월 18일</time><time>2016년 1월 17일</time> 워치만니 Edit

중국의 삼자교회의 시작

1950년 6월 토지 개혁과 농지 정책이 법제화 되었다. 도시들은 한산한 반면 농촌의 마을들은 대중집회와 지주와 부유한 농민등의 인민재판(처형과 처단) 으로 뒤숭숭하였고 가난한 농민들과 노동자들에게 주는 토지의 재분배로 떠들썩 하였다. 다른 모든 일은 정지 상태에 빠지고.교회는 이 기간 동안 문들을 닫았다.

1950년 5월 일련의 집회가 열렸다. 이집회는 공산주의자들의 방식대로 밤늦게 베이징에서 주은래 수상 과 3명의 자유주의 개신교 지도자들 사이에 열렸다. 이 집회를 인도한 사람은 10년간이나 공산주의 비밀당원노릇을 한 상해 Y.M.C.A.의 Y.H.우라는 사람이었다. 주은래는 이 3명을 새 기독교 운동의 대표자로 세우고 이제 새 중국 건설의 중국 기독교을 위한 행동 지침서를 배포하고. 인민 정부의 통솔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였다.

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임시 위원회를 조직하고 미국 반대, 중국 기독교의 세가지 자체 개혁운동을 만들어 냈다. 이 목적은 교회를 자치와 자급과 자활케 한다는데 있었다. 그후 몇달이 지나 주은래에 의해 인정된 기독교 선언문의 전국적인 서명 운동이 있었다. 그리고 9월23일 자 일반 신문에 의하면 선교사들의 활동이 장차 불가능하게 되거나 크게 제한 받을 것이 분명하였다. 선교사들의 선교는 중국교회에 거북스러운 존재로 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삼자운동에 가담하라는 온갖 압력이 들어왔다. 그래서 1951년 일본전쟁 이후에 거의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모두 중국을 떠나게 되었다.중국인과 외국 기독교인 들의 1세기에 걸친 친교는 이렇게 하여 잔인하고도 급작스러운 종말을 고하였다.

적지않은 선교사들이 상해를 머물면서 출국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남양로 집회에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고 갔다.그들은 이 운동의 새로운 전도열에 용기를 얻고 니 형제님의 따뜻한 개성과 그의 성경해석의 한결같은 도움에 큰 감명을 받았다.

남양로 집회에 참석한 한 중국인 목사는 워치만니는 로마서 1장1절에 대하여 이주일 내내 말하였다고 한다.”매일 저녁 마다 그는 뛰어난 내용의 각기다른 설교를 하였다. 이것을 모두 한데 모으면 길고 자 짜여진 논문이 될것이다. 그것은 그저 놀라운 메세지 였다고 술회하였다.”

1951년 1월1일 워치만니는 요한 6장에 빵의기적에 나타난 하나님의 축복의 의미에 대하여 신년 메세지를 교회에 주었다.보리떡과 물고기의 기적을 생각해보라. 이 말씀의 핵심은 손에있는 물질의 양에 있지 않고. 그위에 놓여진 하나님의 축복에 있다.우리들에게 문제가 되는것은 우리들의 물질이나 재능의 많음에 있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 축복은 무었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기대할수 없는 곳에 있는 하나님의 사역이다.보리떡 다섯개로 5천명을 먹이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차게 되었을때 그것은 축복이다. 우리들은 우리가 한것과 비교되는 결과만을 기대한다. 그러나 축복은 우리들 자신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열매이다.

워치만니 는 결론으로 “축복의 생활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상적인 생활이 되어야하며. 하나의 축복에 의한 일이 우리들의 정상적인 일이 되어야 한다.” 고 말하였다.

1951년초 상해의 신작로는 종이 깃발과 커다란 적색 명주천을 휘날리는 노동자들과 젊은이들의 행렬로 부산하였다. 북치는 소리와 슬로건의 외침에 따라 거대한 모택동의 초상화 앞에서 춤추었다.그러고 거리와 골목길에서는 철저한 조직이 이루어지고, 이웃간의 혁명위원회가 조직되고. 공장과 가정에는 조사가 있어 사람들은 사른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사람들의 사생활은 열성 당원 들에 의해 침해 되었다. 그리고 비밀 경찰들이 수집한 정보는 “인민의 부를 파먹은 자본 주의자” 들이라고 하여 수색하여 처단시키고 있었다. 그러한 환경속에서 기독교 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높은 수준의 믿음과 용기가 필요 하였다,

1951년 4월 16일 부터 21일 까지 주은래는 181개 교회 지도자들의 대회를 소집하였다. 워치만니도 이번 집회에 자치, 자급, 자활. 교회들의 그룹을 대표하는 옵서버로서 이집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 받았다. 4월 27일는 상해 에서 작가들의 사상 개혁 프로그램에 따른 수천명의 지성인들과 기타 인사들의 구속이 있어던 불길한 토요일 이었다. 몇명의 그리스도인들도 붙잡힌 사람들 속에 끼어 있었으며. 어떤 동역자들은 구금상태에서 주를 위하여 고난 을 받았고. 정치적 압력으로 시련을 겪고 있었다.

5월2일 천풍지(삼자운동의 기관지) 에는 중국에 있는 교회들에게 고발회의 참여 하도록 소환장을 냈다.그리고 전 회중에게 자아비판과 개혁을 하라는 강력한 설득이 있었다.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정치 집회에 참여하여 배워서 그들의 무관심을 극복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을 교육 시키기 위하여 고소 집회를 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1951년 6월10일 삼자운동은 기독교 선교사들의 공적 고발을 위한 거대한 집회를 조직하였다. 집회는 상해의 개 달리기 경주장에서 열렸다.선발된 고소인들은 주도적인 기독교 그룹들을 대표하여 교회 회중들에게 말하였다. 암송된 연설과 각본에 의한 분개와 증오를 보이면서 그리스도 안에있는 그들의 형제들 과 그들의 동료들과 선교사들을 중상하며 헐뜯었다.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들 과 중국에있는 기독교 를 훼손시키도록 짜여졌다.그리고 이집회에 불참한 기독교인 들은 일일이 다 체크되었고 서로를 대적하게 하였다.

계속 강압적인 운동에 박차를 가한 후. 8월 11일 에 63개 기독교단 대고소 집회를 열었다.그러므로 기독교 교회들은 국가에 의한 이념에 맞춘 선전의 통솔을 받은 삼자운동의 새로운 사회 질서에따라 움직여 졌다.

워치만니의 작은무리 (지방교회)의 박해의 시작

삼자운동의 기관지인 천풍지에 (1951년 11월 30일자) 난징에 있는 작은무리(지방교회)의 한 신자에 의하여 “시탕가에 있는 교회 비밀조직과 사악한 행위에 대한 폭로라는 제목의 기사가 이렇게 실렸다.” “나는 처음 시작부터 시탕교회(난징)에 속한 신자로서 삼자개혁 운동에 관한 교육를 받은때 까지는 이 교회를 가장 순수한 모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사악한 단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오랫동안 속아 왔지만 오늘 애국의 견지에서. 그리고 종교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참을수 없는 분노로 작은무리를 폭로한다. 참된 반 혁명적인 성격을 은닉하기 위해 시탕가의 책임자들은 집요하게 나에게 지방교회 교회생활을 거듭 강조하였다. 사실상 우리들은 완전히 속았다. ”

“아주 초창기부터 그들은 상해 집회와 주종적 관계를 맺고 워치만니에 의해서 엄격히 지배 되었다. 그들은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마술적 성격을 띄고 있다. 위치만니는 상해에 그의 행정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470개의 교회를 관장하는 비밀 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상해는 이들을 간접적으로 북경. 한코우 . 칭다오. 푸조우 등과 같은 대도시에 세워진 중앙 교회 들을 통하여 통솔한다. 워치만니가 교회에 시행하는 악하고 마술적인 지배는 종교의 한계를 훨씬 넘어선 것이다. 그는 전체주의 적 통치를 무마 시키기 위해 반 혁명적 독약을 퍼뜨리고 교인들의 생각를 지배한다. 그는 철면피하게도 자신을 “하나님의 사도 라고 부른다.”

워치만니는 자기 방어를 위해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주님이 책망하실때마다 은혜가 넘치고. 징계를 받을때마다 영적인 열매가 맺히지 않은가. 라고 결론 지었다.”그는 계속하여 우리들이 악한 평판으로 낙심했을때 주님께 엎드리자. 우리들은 이 보배를 질그릇에 담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제거 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 속에 그의 능력을 담아 주신다. 여기에 기독교의 영광이 있다. 어떠한 인간의 연약함이라도 신령한 능력은 무한히 깃들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때즘 공산주의자들은 남양로 집회소에서 고발집회를 실행해야 한다는 요구를 하였다. 그리고 1952년 삼자 본부로부터 강력한 압력하에 집회가 소집되었다. 삼자의 두 대표가 말하도록 하였고. 교회 지도자들은 제국주의 자라는 그들의 고소는 다만 당황한 침묵만을 불러 일르켰다.아무도 그들의 말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선동적 각본에 의해서 짜여진 고소는 그들에게 오히려 역효과를 내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자아 개혁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소.라고 하였다.그러니 이에 대해 훈련이 필요하오.나는 워치만니를 여러분의 재교육 책임자로 정하는 바이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워치만니는 정부의 요구를 따를수 없었다.공산 주의 자들은 장시간에 걸친 릴레이식 심문.수면박탈.간수들의 무자비한 학대,그룹투쟁 회의를 통한 악담등을 통하여 워치만니의 사상을 박탈하려고 하였으나. 워치만니는 심경의 변화나 자백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워치만니에게 자기 생애에 대한 일대기를 아주 자세하게 쓰고 또 재작성하도록 요구 받았다. 그들은 이것으로 꼬투리를 잡아 조작된 증거로 그를 괴롭혔다.

1952년에 워치만니로 부터 찻던 동일한 종류의 자백을 토착화된 참된 예수교회 설립자의 아들인 아이작 웨이를 감금하고 조작해 냈다.그리고 인민 정부와 보조를 맟추게 하였다.그리고 그들의 지도자들을 간첩. 반혁명 주의자.음탕한 생활 등의 불명예스런 조작된 확증으로 고발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그때 워치만 니가 당면하고 있던 운명이었다.

또한 제약회사에 대한 조사를 통하여 세금포탈 에 대한 압박으로 정부는 워치만니 에게 상해를 떠나라고 통보하였다. 드디어 정부의 최종통첩은 더 이상 거부할수 없게 되었다. 슬픔을 참으며 그는 채리티와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하얼빈을 향하여 떠났다. 그가 50세 되던해인 1952년 4월 10일 그는 국가 안전보장부에 의해서 만주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최초의 심문에서 부패한 실업행위에 대한 5가지 죄목을(뇌물공여.조세회피.국가재산 절취.정부계약사취.정부의 경제정보 불법취득) 범한 무법한 자본주의 호랑이” 로 고발되었다. 그리고 투옥되었으며 제약회사는 정부에 의해 몰수되었다.

당시 감옥은 극도로 불량한 상태 였으며. 육체적인 폭력.협박. 불량식품 . 각종해로운 곤충이 있는 감옥에 갇혔다. 성경책은 즉석에서 압수되었고 외부의 누구와도 연락이 허락되지 않았다.

박해와 고난

1956년 1월 18일 수요일 남양로 45번지에 있는 상해 집회소에서 종교국에 의하여 전 성도들이 다 출석해야 하는 일련의 집회가 있었다. 그들은 12일간 계속하여 규탄집회를 강행하였다.이러한 집회동안 워치만니와 그의 동역자들에 대한 고소가 2296페이지에 달하는 고발장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리고 서로를 밀고 하도록 요구되었고, 그들은 워치만니를 민중의 적으로 고발하도록 이끌었다. 두명의 장로들은 엉뚱한 진술을 하였지만. 유성화 형제님과 이연여 자매님.왕포진 자매님은 워치만니에 대한 어떠한 고발도 거절하였다.

1956년 1월 29일 일요일 워치만니에 대한 진상폭로가 상해의 치안 법정에서 있었다.고소의 내용은 그가 비밀리에 조직적인 반혁명적인 음모를 꾸몄으며. 그의 범죄는 5개의 항목에 거쳤다. 그와 그의 공범자들은 제국주의를 지지 하였으며. 국민당 정권을 지지 하였다.그들은 대중노동을 방해하고 청년들을 타락시켰으며.생산을 방해하는 태업을 하였다.그리고 워치만니 자신은 음탕한 생활을 하였다.그리고 워치만니는 다만 “예 와 아니오” 로만 대답하도록 허락되고 어떠한 설명도 용납되지 않았다.

유성화 형제님과 이연여 자매님.왕포진 자매님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수감되었다. 그 다음주 에는 30명의 사역자들과 책임을 맡고있는 형제들이 그들의 지역에서 체포되었으며 전국에 걸친 박멸운동으로 수천명의 형제 자매들이 끌려갔다. 그들은 모두 행방불명 되었으며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은 그들을 방문하지도 못하고 아무런 생계의 보조도 없이 내버려 졌다.

상해 집회소에서의 고발대회

1956년 1월30일 상해 남양로 집회 장소에서 고발대회가 열렸다. 공안부및 종교부의 우두머리들에 의하여 소집된 이 대회에는 2500명의 인원이 참석하였다. 공산당의 여러차례에 걸친 조사에서 꾸민 고소에 따르면 “워치만니는 1941년 미공군에 가담하여 장개석의 첩자로 활략하였는데. 그가 1950년 봄 홍콩을 방문한 사실상의 목적은 2월6일에 상해의 발전소와 수도국을 폭격하도록 장개석군대 밀사로서 활략하였다.”

워치만니는 약품사업에서 폭리를 취한 무법한 자본주의자 였다.원료를 수입하면서 외환관리법을 교묘히 피하여 국가로 부터 172억 유안을 도둑질하였다.1955년과 최근 1956년 1월사이에 염색공장 화재와 폭발은 그가 한것이다. 그리고 5년 전에는 생산파괴을 위한 장기적인 파업을 수행하였다. 워치만니는 결국 제국주의의 앞잡이였다.1921년 이후 그는 여러 선교사들과 독립형제단,런던교회및 해외의 기증자들로 부터 사역을 위한 선물금과 물건들을 받았다.

인민해방 훨씬 전부터 워치만니는 잘 짜여진 종교의 가면을 쓰고 새로운 사회에 대항하는 반혁명 활동을 조직하였다.기독교 집회소 의 설립자라는 구실하에 거기에 숨겨진 반동분자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그는 모든 교회직원들을 위한 훈련강습을 지휘하여 중국을 위한 비상계획을 세웠다. 강의와 토의 집회를 통하여 국가 전복 활동을 모의 하였다.

모택동주석의 능력있는 영도하에 중국이 사회주의 제도를 향하여 밝은 길을 내딛고 있을때 워치만니와 공범들은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마지막 날이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예를 들어 1954년 여름에 있었던 우한의 홍수재난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함으로서 인민의 사기를 꺾었다. 워치만니는 신자들에게 기독교는 정치를 초월한다고 말하고 자아비판과 고발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 고발자는 말하기를 “결혼을 위해 소개 받은 그녀의 남편은 알고 보니 간첩으로서 이제 정부에의해 구금되었다.”라고 하였다.주님을 섬기기 위한 훈련에 자신을 헌신하라는 유혹을 받았는데 그들은 힘들고 모욕적인 일만 맡겼다. 그보다 더 나쁜것은 워치만니는 미국을 지지 하였고. 북한을 지지 하는 국가 정책을 교란 시켰다. 요한 1서2장6절을 인용하면서 그는 젊을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은 “워치만니가 사실상 사랑한 것은 장개석 도당들의 더러운 세상이었다.”라고 논증하였다.

워치만니와 그의 도당들은 많은 국민당 당원들을 보호하여 주었다. 이를 테면 지하당원들. 장군들. 도주한 거주자들이었다.그는 이들을 장로 혹은 집사라는 명목으로 그들이 국가 전복을 세심하게 계획한 장소인 기독교 집회소로 끌어들였다. 워치만니가 보호한 지하 당원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로 밝혀졌다. 전 경찰국장인 천류산.인민의 피를 많이 흘린 반혁명 도당인 루시 캉.그리소 리인신들을 포함한 다수의 인사들이었다.(아마도 그들 중의 얼마는 구 정권하에서 고용되었던 사람들로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전에 가졌던 직책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제 장개석의 지하 당원으로 판명되었다.

워치만니 는 1949-1951년 사이 이러한 사람들을 복음이주 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다는 위장하에 그의 반혁명적인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사람들을 충칭. 쑤조우 및 다른 여러 도시에 있는 기독교 집회소로 배치 시켰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그는 전중국 복음화 계획을 위한 신속한 활동을 개시하여 효과적인 정치적 선전 도구로 삼았다. 그는 거의 광적으로 중국을 15년 내에 복음화 시키는 것이 공산주의 혁명보다 더 낫다고 선전하였다.

그런 계획 중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조치는 1948년 4월에 있었던 “하나님게 모든 것을 바치라”는 운동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기독교인들에게 사도행전의 모범을 따르라 는 거짓된 말을 하며 신도들 자신과 그들의 재산을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치고 공산주의 자들에게는 죽음과 파멸을 바치라고 호소 하엿다. 이러한 기만은 요원의 불길과 같이 번져 전국적으로 거의500개나 되는 기독교 집회소로 퍼졌으며 미화 50만불의 헌금과 상당량의 물품을 거두어 들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단순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들의 유익을 위한다는 핑계하에 형제라고 이름하는 이웃들과 모여 온갖 부패와 탐욕적인 생활을 한 수치를 모르는 무차별의 난봉꾼 이었다고 고발되었다. 공산당의 주장에 의하면 워치만니는 중국인 외국인을 포함하여 백 명이 넘는 여자들을 유혹 하였다는 자백을 받았다고 하지만 여기에 대한 증거는 하나도 제시되지 않았다.

남양로 45번지 상해교회 집회소에서 워치만니에 대한 길고 어처구니 없는 고소가 이제 결론에 이르렀다. 로쯔펭이라는 의장은 상해에 있는 부시장을 초대하여 중요한 정치 연설을 하도록 특별히 부탁하였다.그는 사람들에게 인민 정부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불행하게도 몇 몇 반혁명분자들이 민중의 연합을 방해 하였다.

“기독교 집회소”내에 반혁명분자들이 있다. 워치만니와 삼자 운동을 반대하는 그의 일당들은 비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집회소”에 신자되는 여러분들은 더러운 옷을 공적으로 씻는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열성적으로 모든 반대자들을 색출히고 드러내는 데 힘써야 한다.

“이 투쟁은 시작되었다. 우리의 투쟁이 승리 할것이다. “적은 무리” 가운데 숨어있는 모든 반혁명분자들의 뿌리가 뽑힐때까지 우리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이 부시장의 연설에 이어서 남양로 집회소의 한 신자였던 의과생이 비난적인 발언을 하였으며 다른 사람들도 일어서서 말하려고 하였으나 다음기회에 발언권을 줄것을 약속해주고 집회을 끝냈다..

상해시는 해방일간지를 통하여 1952년 4월10일 워치만니가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이례적으로 발표하였다. 또한 그와 다른 두명인 “장 주체 와 니 홍슈”가 상해 의 제일 구치소에 수감되었다고 보도 하였다. 장은 칭다오의 동역자이고 니 홍슈는 워치만니의 세째 남동생으로서 그는 교인이 아니며. 장개석의 고급 정치 첩자라고 하였다. 그는 공산당으로 부터 홍콩과 상해에 있는 그의 개인적인 재산을 보호해 준다는 약속을 받았으나.결국 반역자로 처단 되었다고 보도 되었다. 그때에 두 형제의 이름을 공적으로 드러낸 것은 워치만니의 간첩행위에 대한 협의를 굳히기 위한 술책이었다.

2월2일 로번 첸이란 감독은 인민해방지에 워치만니와 그의 도당들이라는 비난하는 글을 실었다.후에이엔 교회에서 이 감독은 삼자 운동의 상해 확대 회의에서 사회를 보았다. 여기에서 수많은 목사와 교회 지도자들이 “무서운 견책”에 가담하여 공적으로 고발하였다. 모택동 주석과 공산당들이 워치만니와 그의 일당들을 투옥시킨 것은 완전히 옳고 필요한 조치였다고 찬양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양의 옷을 입은 이리떼 들로서 무서운 극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 집회는 이러한 사약한 지도자들이 정부에 대한 반역적인 행동을 한 용서할수없는 엄청난 죄악들을 말하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한 여인은 이 집회에서 말하기를 워치만니는 반혁명 난봉꾼이며. 철면피한 간음자로서 우리 여성들은 이 말을 듣고 그를 중오하지 않을수 없다고 하였다.증언하였다.

인민 일간지는 다음날 바치라는 제목의 만평을 실었다. 여기에는 이층과 아랫층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2층에는 발판 사다리에서 가면을 쓰고 앉아 있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라.” 고 쓰여져 있는 커다란 깔대기에 사람들의 소유물을 집어 넣으라고 강요하고 그곳으로 인파가 밀려가고 있었다.모든종류의 선물은 다 그곳으로 들어갔는데 심지어 노무자들은 자기의 샤스까지 벗고 어린아이의 작은 웃도리마져 벗겨서 아이를 울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래층에는 “반혁명사업을 위하여” 라고 쓰여진 연보궤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2층의 큰 깔대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금 은 시계. 보석 헌금 등이 아랫층의 연보궤를 채우고 무릎위에 매춘부를 않히고 함게 즐기고 있는 존경하는 니토생의 발 아래까지 넘쳐 나오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계산에 짜여진 방법에 의하여 그들은 가능하면 기독교인들의 마음 속에 쌓여 있는 워치만니에 대한 모든 사랑과 존경마져 완전히 앗아 가려고 하였다. 감히 그의이름조차 공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전국에 흩어진 많은 기독교인들이 조용히 기도로써 그를 지지 하였다.

상해에 있는 기독교 목사들과 전도사들은 1956년 2월 5일 부터 니토생의 범죄사실에 대하여 교인들을 각성시켜 주기 위한 소규모 이름을 조직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남양로 45번지 상해 교회 집회소에서는 주일 예배를 제외한 모든 집회를 이와같은 특별한 세뇌적 가르침을 위하여 중단 되었다. 2월6일 에 당기관지 (천픙지)는 워치만니의 사건을 반복하는 11페이지에 달하는 논설을 실었다. 여기에는 “교회에서 잔인한 이리 떼 들을 몰아내자”라는 제목하에 이렇게 보도 되었다. “워치만니의 범죄 사실에서 보듯이 우리들의 경제적 재건을 파괴하며. 인민의 생활과 사회 질서를 위태롭게 하고.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어 왔다는 사실을 볼수있다. 기독교 교회 내에 이러한 분자들이 있는것은 주님의 성스러운 거룩한 이름을 불경케 한 것이며. 교회의 평판에 오점을 찍고 복음전파의 부패를 조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대단히 영악하고 사약하여 성결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행위는 그를의 말과는 거리가 멀다. 니토생 자신의 생활은 반복 할수도 없을 만큼 음탕하다.”

기독교 집회소의 형제자매들은 이놈이 다시는 우리의 사랑하는 교회를 교란하거나. 해 할수 없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방해 없이 이제 자유로이 상호 간의 사랑으로 연합 될수있다. “기독교 동지 여러분 ! “우리들의 공동적 승리를 축하하고. 이를 우리의 기쁨으로 받아들입시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를 정화 시키려면 이와같은 이리떼 들을 들추어 내고 추방함으로써 가능하다.”

천풍지 다음호에서도 악독의말 들은 계속되었다. 2월 29일 자의 기사는 3000명 이상의 “적은 무리” 에 적을 둔 사람들이 참석한 남양로 에서 있었던 또 하나의 대 비난대회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 이대회에는 난징. 창사. 쑤조우. 워시 기타 여러 지역에서 온 대표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참석한 목적은 투옥된 지도자들이 가졌던 상해에서의 직책을 메우기 위한 14인 통솔 위원회의 선출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대회는 1월30일 에 있었던 것보다는 더 큰 감정적인 요소를 불어넣었다. 사람들이 처음에 주저하며 의문시 하던 태도는 어느 정도 극복 되었으므로 천풍지는 모든 사람들이 이제 맹렬한 복수를 요구하는데 가담할 준비가 되었다고 보도 하였다. 15페이지에 달하는 고소와 비난 보고는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다.” 라는 제목 하의 헌신 사설에서 다루어졌다.

이제 적은 무리 교회에서 온 많은 대표들이 1956년 3월 15일 부터 23일 까지 베이징에서 있었던 제2차 중국 기독교회의 전국 데회에 참석하였다. 여기에서 삼자 운둥의 의장인 Y.H.유 는 1954년 7월에 있었던 지난대회 이후의 실적 보고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말하였다. “우리들이 전적인 확신으로 전진하는 이 마당에 신앙의 이유라는 공허한 구실을 내세운 한 적은무리는 삼자운동을 반대하고 우리의 연합을 깨뜨렸다. “그는 또한 1955년 말에서 1956년 초에 있었던 전국적 켐페인 동안에 교회내에 숨어있었던 빈혁명 분자들을 어떻게 색출해 내었는가를 설명하였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들은 간찹활동를 하였으며.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중국 인민의 종교적 운동을 방해하였다. 교회 안에서 그들은 삼자 애국적 운동을 반대하기 위하여 믿음을 구실로 삼았으며. 종교적인 슬로건으로 동료 교인들을 혼란 시키고 청년들을 타락시켜 기독교 연합을 파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색출로 이제 중국 기독교 교회의 연합을 가로막던 장애물이 제거 되었다. 오늘날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전에 없었던 보다 넓고 공고한 기초 위에서 연합되어 있다.

곧 적은 무리의 대표자들에게 공적으로 고백을 하고 이 운동의 대열에 참여하라는 기회가 주어졌다. 성공회의 쑤이 박사는 나중에 한 그의 연설에서 “적은무리에 속한 북경의 엔차리 장로와 상해의 미쓰 쑤말리가 바로 이대회에서 비난 하였다. 누가 비난을 하도록 강요하겠는가. 우리들은 다만 제국 주의 지지자 글과 반혁명 주의자들의 무서운 범죄행위를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참을수 없어 그들을 드러내어 고발하는데. 그러한 기회를 사용하였을 뿐이다. 라고 말하고 이어서 서양에서 용감한 기독교 지도자들 이라고 부르는 “양 가죽을 쓴 이리의 숨은 발톱에 대하여 말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작은무리 교회집회소에 일체의 신앙 활동을 정지 시켰다.모든 비 공식적인 성경공부와 기도회와 일체의 인정받지 않은 개인 가정에서의 활동이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독립전도자들과 설교자들은 법률의 보호에서 벗어났다. 기독교 봉사의 자유는 큰소리로 선포되었지만. 그것은 조건부 자유였으며 인정된 울타리 내에서의 정부의 감독 하에서 제한 된 것이었다.

이러한 일이 있는 동안 워치만니는 투옥되어 있었으며. 1956년 6월 21일 상해에있는 대 법원에서 그는 전과같이 공판이나 심문이 아닌단순히 그를 정죄하는 공적집회 였다. 장장 수시간에 걸친 그의 고소내용을 통하여 그는 그 자신의 교회에서 파문되었음이 알려졌다. 그리고 그의 고소내용은 유죄임이 판명되고 1952년4월12일 부터 중노동을 포함한 15년의 감금이 선고 되었다.

장 핀훼이 (채리티 장)

1956년 6월 21일 워치만니의 대 법원 심문과 선고가 있을때에 그녀도 투옥되었다. 그당시 그녀는 병원에서 중병환자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비난대회에 참석하거나 그녀에게 요구된 자백을 통하여 그녀의 건강이 너무나도 나빠져 있었다. 채리티가 풀려 나온 것은 1957년 어느 날이었으며. 그 때부터 집에서의 긴 불면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이제 제일 의과 대학 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카웨이”가의 한방에서 살았다. 감히 누구도 그녀를 방문하지 못했으며. 공공연히 그렇게 하려면 큰 용기가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반동분자와 관련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녀 자신이 시민의 권리를 박탈당한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접촉을 갖는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형을 받고 복역중인 죄수는 한 사람의 친척을 방문자로 지명 할수있었다. 그래서 5년이 지난 1961년 채리티는 워치만니을 면회 할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그녀는 도시를 가로질러 “아모이”로 갔다. 이곳은 과거 상해 제일 구치소가 있었다, 면회는 그들사이에 창살이 가로막힌 방에서 감시하에 이루어졌는데 30분동안 이었다.또한 철저한 검열를 거친 편지를 매달 한장씩 받거나 보낼 수 있었다. 감옥은 1913년 영국인에 의하여 지어졌는데. 회색 담으로 된 으시시한 전통적 스타일의 건물이었다. 워치만니는 작은 독방에 갇혔 있었다. 가구라고는 바닥에 잠자는 나무판자가 하나 덩그러니 놓였있을 뿐이었다. 문 밖에는 200피트 길이의 복도가 있고 이 복도을 따라 감방들이 있는데. 창문들이 바깥 쪽으로 나있었다. 잠자리는 벼룩 과 빈대가 들끓어 도무지 잠을 잘수가 없었다.

하루는 8시간의 노동과 8시간의 교육과 8시간의 휴식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여러 불신자들 속에 끼어 감옥 공장에서 침울한 죄수들과 함께 노등을 하거나 혹은 공기가 탁한 갑갑한 감옥의 안마당에서 일해야만 했다. 죄수복도 없었고 죄수들 자신의옷도 너덜너덜 다 헤어졌다. 그리고 부지런한 사람들의 옷은 여기저기 기워진 자국이 수두룩 하였다. 죄수들은 보기에도 구질 구질하고 딱한 모습이었다.

여자 죄수들에 의하여 준비된 식사는 하루에 세번이었고. 두번은 중식(노동용) 과 경식 (비노동자용)으로 나누어지고. 또 한번은 묽은 죽이었다. 이따금 그들에게 신선한 채소와 고기가 섞인 국이 나오긴 했지만. 여름 더위는 죄수들의 갈비뼈가 툭툭 튀어 나오게하고. 심줄이 울퉁불퉁 솟아 오르게 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목숨만 겨우 부지하며 살았다. 이따금 온수 목욕이 허락되었으며 한달에 두번 이발을 받았다.

겨울에는 난방이 없었고 극심한 추위로 생명이 붙어 있기 위해서는 겹옷이 많이 필요했다. 워치만니는 정치범과 동일한 교육적 교화를 받아야만 했다. 때가 되어 워치만니의 환경이 이 외부에 알려 졌다. 적은 양의 음식.옷. 비누 그리고 현금이 홍콩에서 채리티에게 전해 졌으며. 채리티는 워치만니를 위하여 조금씩 그에게 보낼수 있었다.

한편 이연여 자매와 왕포진 자매 유헝화 형제님에 대한 고발과 심문이 1958년 여름에 있었다. 그들은 끝까지 워치만니을 고소하는 것을 거절해 왔으며. 1956년 부터 시작하여 각각 15년의 언도를 받았다.유성화 형제님은 그의 아내와 아들이 그를 찻아와 석방을 위해 설득하고. 애원 하였지만 워치만니를 고발하는 일체의 권유를 뿌리쳤다. 그는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너무도 몸이 약해져서 심문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가출옥으로 석방되어 하둔가의 이전 이층 사무실에서 끝까지 자신의 신앙에 굳건히 섰다가 사망하였다.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

1958년 1월 경제 발전을 위해 생산의 가속화에 목적을 둔 모택동의 대 약진 운동이 시작되었다.그의 무오의 사상은 열성 간부들에 의해 해석되고. 생산을 위한 노동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이일로 인해 지친 교인들은 자연 교회 출석이 떨어졌다.적은무리의 의무적 교화를 위해서는 여성들의 모임과 떡을 떼는 것과 이것을 위한 개인 신자들의 인터뷰를 폐지 시켰으며. 모든 교회에서는 말세와 주님의 재림에 관한 설교는 금지되었다. 모든 가르침은 교회의 연합 과 사회주의 정책에 맞는 것이라야 했다. 성경 해석에 사용된 모든 서적들은 검열을 통해 판단 되었으며 해로운 사상이 담긴 책들은 거절되었다. 교회의 재정 과 임명. 건물과기타 재산은 모두 삼자 애국운동 상임 위원회에 양도 되어야 했다.

1959년 새해는 불꽃놀이도 없었고 새옷을 입는 기쁨도 없었다. 사람들은 어디서나 “그들의 마음을 당에 바치라”는 권면을 받았으며 모든 사람들은 생산에 완전히 점유 되었다. 그러나 모택동의 경제 약진운동은 경제적 위기에 빠져 들고 있었다. 돌이킬수없는 그릇된 경영과 자연적 재난이 겹쳐 음식은 배급제로 되고여러지역에서 기근에 가까운 식량난이 발생하였으며 모택동의 대 약진 정책은 일단 보완되어야 했다. 자연적으로 이러한 기근의 영향은 구치소에도 들어 왔다. 1962년 두명의 허약할대로 허약해 진 나이 많은 작은 무리의 장로들이 10년의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었을때. 워치만니의 체중은 백 파운드 도 되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18개월후 그는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감옥 진료소에 입원되었고. 한동안 노동에서 제외 되었다. 사용하는 약을 홍콩에서 구입하여 그에게 보내어 졌다.

1966년 6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1966년 8월 15일 북경에서의 대 행진에서 홍위병들은 모택동에게 충성할것을 맹세하고. 우리들의 위대한 스승이며 ,최고지도자,지휘자며 인도자라고 하면서 그들의 이념적 정열과 순수성을 과시 하였다, 그의 사상으로 무장되어 그들은 국가 지도자들(지식인들과 종교지도자들 )을 깍아내렸다.유소기를 브르조아인 소비에트 수정주의자라고 공격하였다. 몇달안에 상해에서는 행정부에 봉기가 일어났고. 시 위원회는 무너졌다. 공장들은 문을 닫고 험담을 실은 포스터들이 벽마다 나붙고 격돌하는 무리들이 거리를 나돌아 아무도 개인적인 사생활을 할수없었다. 한편 홍위병은 시정부 정문에 나타나서 “추 웨이진” 이라는 장관을 수정주위자라고 고발하면서 건물에 침입하여 한동안 법썩을 벌였다. 구치소의 감방 과 강의실 까지 침입하여 그들은 악을쓰면서 난폭하게 죄수들을 괴롭혔다. 이 날에 워치만니도 넘어져서 팔이 부러졌더는 증거 가있다.

1967년 4월 워치만니의 15년 간의 형기가 끝났다. 이 기간에 제일 구치소의 대 확성기는 죄수들에게 이렇한 경고방송을 하였다.”만일 5년 혹은 10년의 형기를 받고 형기가 만료되었을지라도 우리가 당신들의 변화에 만족하지 않으면 5년혹은 7년의 형기가 더 부과될 것이다. 그때 세계여러 곳에서 많은 성도들이 그의 석방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채리티도 그 악화된 건강으로 게속 실망하지 않고. 워치만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워치만니의 석방을 묻는 엽서가 “홍콩과 상해”에 있는 두 큰누님 사이에 초조하게 왕래 되었다. “동생이 집에 욌느냐. 동생은 아직 안왔다.”

1967년 에는 13번이나 홍위병들이 여러달 동안 채리티의 집을 약탈하였으며. 그녀의 개인 소지품을 빼았고. 기독교에 관한 모든 것을 부수고 조롱하였다. 결국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녀도 극도의 신경과민에 빠져서 쓰러지기 직전에 있었다. 비록 믿는이들이 그녀을 위로해 주었으나. 하나님만이 그녀를 온전히 붙잡아 주실수 있었다. 모든 종교적 건물은 몰수 되고. 반종교적 선전이 벽에 나붙었다. 천풍지는 이제 출간을 정지하였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1967년 9월 홍콩에 있는 교회 장로들에게 인민 공화국의 고위층으로 부터 한장의 공문이 왔다. 이공문은 워치마니와 채리티는 홍콩에 있는 중국은행지점에 상당량의 미국 달러를 보석금으로 입금하면 중국 밖으로 석방할수있다는 내용이었다.여기에는 전례없는 것이 아니었다. 널리 알려진 사실중에 어떤 정치범은 그의 가족과 함께 북경에서 서구로 이탈되면서 이러한 상호 약속에 의하여 큰 보상금을 낸일이 있었다.그래서 워치만니를 매우 사랑하는 동남 아시아에 있는 중국인 신자들은
빠른 시일내에 보상금을 모아서 지정된 은행에 위탁하였다.

그러나 1968년초 인민 공화국의 소식통으로부터 거래가 끝났다는 전언이 왔다. 돈은 기부자들에게 되돌려 주도록 그대로 반환되었다. 우리는 이 계획의 철회 뒤에 무었이 깔려 있는지 묻게 된다.워치만니는 이러한 석방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라는 것이 그와 가까이 사역에 동참했던 젊은 동역자들의 견해이다. 이것은 십중팔구 사실일 것이다.그가 서구로 이탈을 감행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의 타협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워치만니는 부도덕한 사람들의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었다. 사람들은 의심할 나위없이 그가 누명을 쓰고 그의 죄는 날조된 것임을 알고있었다. 1949 년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중국에서 맡길 새로운 일를 갖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홍콩에서 상해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그것은 외형적인 환경이 어떻든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시기를 원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겓세마네 동산에서주님도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할수만 있으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다.

이것이 비록 허위로 고발되었을 지라도 죄수들은 형벌을 면하게 되지 않을 수있다.우리 주 예수님 자신도 날조된 사실로 고발되었으며 심문받고 처형을 당하였다. “우리가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아니하고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항상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서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워치만니는 1940년대에 큰 붉은용앞에 마주친 아이를 밴여자가 아이를 해산하려고 하는데 대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요한의 격렬한 상징에 이끌리게 되었다.이 아이는 용에게 삼킴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 앞과 그보좌앞으로 이끌렸다. 이 아이가 용으로 부터 탈출한 것은 부활에 대한 상징이다. 이 사내아이는 교회 안에 이기는 자로서그들은 죽기까지 자기의 생명을 돌보지 않았다.

중국 기독교 삼자 애국 운동의 창설자들과 오랜 야간회의에서 수상인 주은래는 그리스도인 들에 대한 공산당의 입장을 분명히 말하였다.”우리들은 당신들이 사회 봉사를 계속하기만한다면 사람들을 회개시키려는 당신들의 노력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우리들은 진리가 결국 이긴다는 사실을 믿는다.그러나 여러분들의 믿음을 거짓이며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옳다면 민중들은 당신들을 거절할 것이며. 여러분의 교회는 망하게 될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옳다면 민중들은 당신들을 믿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당신들이 틀렸다고. 확신하므로 이러한 모험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라고 말하였다.

1970년 1월에 워치만니는 상해의 구치소에서 18년을 보낸후에 시골에 있는 개방감옥 으로 옮겨졌다. 20년의 형기를 눈 앞에두고 채리티의 희망은 일기 시작하였다.1971년 북평에 사는 언니가 방문하였다. 그런데 9월 어느날 그녀는 집에서 무엇을 고치고 있었다. 아마 몇달 후에 귀향할 워치만니를 생각하고 집을 정돈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의자에 서 있다가 갑자기 발을 헛디뎌 떨어져 여러개의 갈비뼈가 부러졌다. 이러한 사고로 니 자매님은 고혈압 치수가 상승하여 사망하게 되었다.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자신의 친절한 품으로 옮기셨다.

모든 장례가 끝나고 언니은 워치만니가 있는 시골의 개방감옥으로 면회를 갔다. 그는 이미 소식을 듣고 아내를 잃은 슬픔 가운데 잠겨 있었다. 그들은 4월 재회를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1972년 여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4월 12일 워치만니는 20년의 형기를 끝마쳤는데. 이는 그의 공적 선고보다 5년을 더 넘긴 것이었다.

워치만니 형제님은 1952년 2월 3일 에 체포되었다. 그는 심문받고 무고당하여 1956년 에 십오년형을 선고 받았다.1972년 5월 30일 그는 감금중에 죽었다. 이 기나긴 감금기간에 그가 무었을 체험했는지 우리는 알길이 없다.다음 여덟통의 편지는 그가 감금말기에 친필로 쓴 것으로서 단지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약간이나마 그가 감금기간에 받은 고통과 느낌과 소망을 들여다 볼수있다.

1972년 4월21일 처형에게 보내 편지에서 “내 병은 큰처형도 아는 바 만성병이요.기관지에 관한 질환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난 여전히 기쁨을 유지 하고 있읍니다.” 라고 섰다. 이것은 그가 옥에 갇혀 고통당하고 있을때에도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많은 교통을 나누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편지에서 그는 성경구절을 인용하지 않은 것은 그에게 그렇게 할 자유가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핑찐처형:

내일아침이면 저는 풍수령을 떠나 산하파농장으로 옮겨 집니다. 오실때 풍수령까지의 표를 끊지 마시고 그곳보다 두 정거장 더 들어간 산하파까지의 표를 끊으셔야 합니다. 이 편지는 그의 처형에게 그가 5월 26일에 풍수령농장을 떠나 더 먼 산하파 농장으로 옮겨진다는 것을 알려주는 편지이다.

6주일이 지난후에 그는 안휘성 광덕현 백운산 농장 14대대로 옮겨졌다. 그 긴 여행이 그에겐 무리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새로운 고난을 당하였을까. 아니면 그의 병이 갑자기 그를 엄습한 것이었을 까. 우리는 아무런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1972년 5월 30일 그가 69세 되던해에 주님의 부름을받고 그의 품으로 갔다는 것 일 뿐이다.



핀란드여행


터키여행 2024-01-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4320.html

1.

2023년 11월4일 토요일아침 6시에 핀란드헬싱키 추형제님집에 무사히 도착하여 간단하게 떡국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집근처 슈퍼마켙에가서 쇼핑을하고 집에 돌아왔다.

오후에 바울형제가 우리를 시내 중심가에있는 대형 쇼핑몰 까지 픽업해 주었다.

그곳에서 점심식사로 수제햄버거를 사서 맛있게 먹었다. 내 생전 그렇게 많은 백인들를 보는것도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추형제님은 우리를 헬싱키에 있는 여러곳으로 인도하여 구경을 시켜주었는데 거대한암석을 파서 만든 특이한 예배당인 암석교회(루터교회)에 갔다.

그리고 루터교회인 백성당에 가보았는데 로마천주교 처럼 우상이 가득하진않았지만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 거대한 기둥으로 지어진 지붕위에 12사도들의 성상과 성당내부중앙에는 천사상과 예수님과 관련된 성화가 있었다.

이 나라는 종교개혁이후로 독일의 루터교를 받아들여 루터교가 국교가 되었다. 루터의종교개혁은 하나님의경륜가운데 놀라운 전환을 가져온것이 사실이지만 여전히 천주교에 속한 영향 아래있음을 볼수있었다.

이나라의 건물들은 15세기이후 18세기를거쳐 만들어진 건물들로서 스웨덴 과 제정러시아의 영향을 받았음을 볼수있다.핀란드는 15세기부터 스웨덴제국에의해 600년간 지배를 받았으며 19세기에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헬싱키 항구앞에는 수오멘린나섬 요새가 있는데 그곳에가보면 핀란드가 어떤역사를 가진 어떤나라인지 알수가 있다.

오늘날 북유럽 국가들이 어떻게해서 발전됀 나라가 되었는지 요새에 설치됀 엄청난 대포의 크기만 보아도 알수가있었다.

많은전쟁을 통하여 핀란드는 고난을 격은나라이다.스웨덴과러시아의 강대국사이에 끼어. 이들 나라들에 의해 전쟁을 격으면서 산업이 발전되었고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우리보다 발전됀 선진국이 되었다.

시내관광을 마치고집에 돌아가는길에 지하철과 트램을 타보았는데 냉전시대 방공호로 사용할수 있도록 설계된 지하철은 에스컬레이터로 가파르게 지하로 내려갈수있도록 되어 있었고. 트램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나라의 기후는 우리보다 날씨가 춥고.쌀쌀하며 해가 늦게뜨고 빨리지며 어둡고 비가 오는 날이 많다.그걸보면 우리나라의 환경은 세계의 어느나라보다 더 복을 받은나라 임을 알수있다.

2.

2023.11월7일 아침일찍 집에서 멀지않은 숲으로 산책을 떠났다. 가는길에 노인복지센타에 들러서 노인들의 취미생활을 하는곳에서 노인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았다.노인들을 위해 운영하는 복지센타의 모습에 매우 인상을받았다.

이나라의 유치원도 교사한명이 4명의 아이들 까지만 돌볼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숲속으로갔는데 자연그대로 보존된 숲속은 침엽수(자작)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라고있었다.

나무들중 어떤나무는 쓰러져있었는데 나무뿌리가 깊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 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돌아온후 점심식사후

2023년 11월7일 스웨덴 으로가기위해 크르즈여객선을 탔다.

추형제님부부와 한배에타고가면서 어떻게 교회생활을 시작했는지 지난 교회생활에서 어떻게 주님과 대화하며 주님의 다루심을 받았는지을 교통하며.앞으로주님께서 유럽땅에서 어떻게 역사하실지에 대한교통을 나누며 오스트리아땅을 위해 기도하였다.

11월7일 아침10시에 스웨덴에 도착하여.셔틀버스를타고 시내 중앙역으로 갔다. 그리고 스웨덴형제. 마리우스형제를 만나서 함께 스웨덴 왕궁쪽으로걸어갔다. 가는길에 노벨센타도 보았고.왕실 근위대도 보았으며 화려한 건축물을 보면서 핀란드보다 더 잘사는 나라임을 알수있었다.이 나라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왕이있는 나라이다.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마리우스형제로부터 스웨덴 스톡홀롬 지방교회의 역사를 들으면서 주님이 스웨덴 땅에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알게되었다. 유럽사람들을 얻는일은 쉽지않은 일이지만 기도가 모든것을 가능케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우리의 힘은 미약하지만 우리의기도는 주님께서 움직이시는 교두보를 얻을것이다.

2023년11월8일 스웨덴 에서 핀란드로 되돌아왔다. 11월9일 아침일찍 에스토니아 탈린으로 가기위해 크루즈유람선을 탔다.에스토니아는 중세 유럽의 건물들이 잘보존된 도시이다.

이곳에는 30여명의 성도들이 모이고 있다. 오사마형제님은 우리를 만나기위해 부두에 나와있었다. 우리는 레스토랑으로 가기위해 구시가지를 관통 하여갔다.

이나라는 구소련의 속국이었기때문에 동구유럽처럼 핀란드보다 경제가 낙후 되어있었고..소련의 영향을 받아 도시안의 건물의 분위기 나 전철은 여전히 중국의 하얼빈에서 본 구소련식 전차가 다니고 있었다.

지금은 이 나라도 E.U에 가입되어 신시가지는 발전되어 가고있었다.

에스토니아 탈린교회 형제님을 만나 교통하면서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의 전쟁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위한 전쟁임을 확신 할수 있었다.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유럽으로 우크라이나 성도들이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그러므로 유럽땅의 교회들의 인수가 증가하고 있다고한다.

이러한 유럽땅에 부흥은 이스라엘과 아랍과의 전쟁을중재할 적그리스도의 산출을 재촉하고 있다.

이스라엘역사는 교회역사와 밀접한 관계가있다.이스라엘의복원은 제3성전의 재건을 가져올것이고.교회는 이기는자를 산출히기 위하여 더욱큰 핍박과고통을 같게될것이다.

유럽에는 중세유럽의 모습이 많이 보존된 두나라가있다. 체코의 프라하와 에스토니아의 탈린 이라고 한다.

우리는 탈린의 중세도시에 가보았다. 중세도시의 사람들은 성안에 집을지짓고 살았다. 광장이 있고 광장옆에 성당과시청이있고 빵집도있었고 약국도 있었다.성벽은높게 쌓았으며. 성안으로 들어가는 작은 아취형 문을 통과하여들어갈수 있도로 되어 있다.

문을통과하면 까만 망토를입고 얼굴은 없는 성을지키는 수호신들이 서 있었다.그때의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어땟는지 상상할수있다.

2023년 11월10일 오스트리아로 갔다.공항과연결된 열차를타고 숙소에도착 하였다. 유럽은 기차가발전된 나라임을 알수있다.여러종류의 기차를 보았다.

오스트리아는 역사가 깊은나라이다. 미국은 역사가 짧은나라이기때문에 유럽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만난 유럽 젊은사람들은 매우친절했고 예의가 올발랐다.

1200년대부터 합스부르크가문이 알프스지역에서 시작되어 1500년대에 이르러 오스트리아제국이되었다. 스페인펠리페가문과 정략결혼 하였고1700년대에 이르러 마리 테레지아여왕의 막내딸을 루이16세 프랑스왕과 정략결혼을하였다.

1893년에 프랑스대혁명으로 루이16세와마리앙뚜아넷트는 교수형으로 죽게되었다.오스트리아 마리 테레지아여왕의 아들 프란츠왕과결혼한 독일귀족의 딸 SiSi황후가 매우 유명하다.

2023년 11월11일 비엔나대학교안에 들어가서 대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았다.그리고 학생들을만나 대화하며 복음지를 주었다.

2023년 11월12일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다.아침8시30분에 공항으로 가서 핀에어를 타고.헬씽키를거쳐 인천공한으로 가게될것이다.



워치마니형제님에대한 위광희형제님의 편지


은혜로은글 2020-04-2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4196.html

워치만니에 대한 위광희 형제의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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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집회가 끝나던 마지막 날 저녁, 워치만니는 먼저 복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워치만니 형제는 가족 앞에서 나에게 한 마디 작별의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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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오직 한 분이시지만 오늘 사역하는 사람들이 보는 관점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지고 말았네. 만일 여기에서 우리에게 계시가 없다면 우리도 이와 똑같이 실패하고 말걸세. 오늘 허다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그리스도와 접촉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의 뒤를 만지고, 손을 붙잡고, 주님의 옷자락을 찢기도 하네. 그러나 생명에 있어서는 주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일세. 주님을 밀던 많은 사람 중에서 혈루병 든 여자만이 생명 안에서 치료를 받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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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실지로 벳세다의 그리스도를 알고, 참으로 경험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적( 異蹟 )을 보고, 심지어 기적을 행하기도 하며, 엠마오길에서 주님을 만난 두제자 처럼 감동력을 사용할수도 있다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다 중요한 것이 아닐세. 이 말은 내가 위 형제에게 하는 말일 뿐 아니라. 사역하는 모든 형제 자매에게 하는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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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형제, 자네가 만일 사람들에게 계시로 본 그리스도를 공급해 주지 못한다면,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의 사역은 실패한 것일세.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하네.자네가 사역에서 중시하고 있는 것은 성경 이해 ( 理解 )와 지식, 은사, 기적, 권능인가. 아니면 계시로 본, 한분의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공급해 주는 것인가?하는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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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 길을 가실 때.무리 에워싸 밀더니.병든그 여인 뒤에 와서.만지고 즉시 낫네 주님 만지기만 하면. 즉시 고침 받으리니.의심치 말고 와 만지라. 만질 때 고침 얻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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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초, 워치만 니 형제는 홍콩으로 왔고. 오래지 않아 위트니스 리(Witness Lee) 형제도 왔다. 하나님의 이 두 종이 동시에 (한지방)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한다는 것은 정말 자주 있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 집회에 축복이 있었다.원래는 300여 명이 모이던 집회가 단 시일 내에 삼천 명으로 증가되었다. 이것이 홍콩 교회의 첫 번째 대부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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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워치만니 형제는 귀국을 준비했다 그 때 시국( 時局 )은 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모두 그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 때 워치만니 형제의 돌아가려는 의지는 참으로 굳은 것이었다.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에 가기 전에 그곳에 묶임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지만.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갔던 것이다. 나는 워치만 니 형제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가를 느꼈다. 그의 마음은 무거웠으나 워치만니는 주님과 같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자기를 기다리는 것들을 두려워 하지 않고 그것들을 향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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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워치만니 형제는 진리로 인하여 공산당에게 구속되어 투옥되었고 15년을 언도를받았다. 그리고 감옥에서 20년 동안 우리는 워치만니의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다. 워치만니의 부인이 세상을 뜨기 전에는 2 , 3 주마다 한 번씩 워치만니에게 가서 몇 분간 만나고. 그의 일용품을 공급했다. 그러나 그 분( 부인 )도 1971년 11월, 워치만니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워치만니 형제의 심장은 보통 사람의 반 밖에 안 되어 장기간 심장병을 앓았으며 한 번 발작이 일어나면 심한 동통( 疼痛 )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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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환난 중에서도 그가 평생 사랑하고 섬겼던 주님은 한 번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1972년 여름에 소식을 들음으로써 6월 1일에 워치만니 형제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수고를 그치고 쉬었고, 사역의 효과는 그를 따랐다( 계 14 : 13 ). 비록 그의 몸은 갇혔었고, 비록 그의 몸은 땅에 묻혔지만. 주님이 워치만니에게 주신 말씀은 온 세계에 무한량하게 전파되었다. 그의 말씀으로 인해 많은 성도들이 공급을 받고, 계시를 보고, 교회가 건축되며, 허다한 성경 진리가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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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만니는 참으로 하나님이 중히 쓰신 그릇이었다. 그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었다( 행 13 : 36 ). 그는 실지로 우리에게 본이 되고 그 자취를 따라오게 했다( 벧전 2 : 21 ). 영광을 주님께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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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봄 홍콩에서 위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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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 형제 (워치만니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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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에 계속 자네에게 편지하고 싶은 느낌이 있었네. 그러나 나는 나의 생각이 성숙하지 않은 것일까 두려워 계속 지체해 왔었네. 내 생각에 이제는 때가 된 것 같네. 나는 자네가 이 편지를 하나님 앞에 놓고 기도하길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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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염려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모든 것을 주어야 하네. 자기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인도할 자격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는 훈련을 하고 자기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주는 사람에게 주님은 축복을 하신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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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하는 사람의 속에 있는 역량이 밖으로 나오는 사역이 되야 하네. 만일 억지로 과장할 때는 흘러나오는 것이 적게 되며 이러한 상태는 다 주님 앞에 바른 것이 아닐세. 속이 풍성할 때는 억지로 하지 않아도 무엇이든지 다 흘러나오게 된다네. 오직 자네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어야 하며, 영적인 사람인 것처럼 만들어서는 안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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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에 있어서 듣는 것을 배우게. 사도행전 15장의 가르침은 곧 듣는 것일세. 다른 형제의 뜻을 듣고 그 안에 있는 성령의 음성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네. 마음으로 두려워해야 하네. 형제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성령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일세. 모든 사역자들과 장로들은 형제 자매의 말을 잘 들어야 하네. 반드시 형제 자매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게. 부드럽게, 부서져서, 들어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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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의 문제가 부서지지 않은 데 있네. 부서진다는 말은 들었지만 무엇이 부서지는 것인지를 모르는 것이지. 부서지고 나면 어떤 일에 대해서 함부로 단정짓지 않고, 어떤 말씀에 대해서도 함부로 단정짓지 않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자기가 잘 안다고 하지 않고, 어떤 일에 대해서도 잘 할 수 있다고 하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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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권위를 쓰지 않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권위를 받아들이도록 요구하지도 않는다네. 또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모든 일에 신중하다네. 부서진 사람은 자기를 보호하지 않고 더 이상 자기 분석을 하지 않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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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 가운데에서나 교회생활 가운데에서 너무 긴장하지 말게. 교회 일에서 “자기 혼자” 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하네. 많은 일을 형제 자매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이 결정하도록 하게. 자네는 다만 일하기 전에 그들에게 분명한 원칙을 알려주고, 일한 후에 그들이 어떻게 일했는가를 살펴보게. “자기 혼자” 한 일은 대부분이 착오를 낳는다네. 형제에게 맡겨주고 나눠주는 것을 배우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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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은 교회 가운데에서 억지로 하시지 않는다네. 자네가 그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그는기름부음의 공급을 해주시지 않으므로 교회는 피로와 권태를 느끼게 돼. 자네의 영이 강할 때는 10분 내에 그것을 뚫고 청중을 제압할 수 있지만, 영이 약하면 “큰소리“로 “위협하는 말“을 하고 “많은 시간 동안” 얘기해도 그것으로 형제 자매를 도울 수 없고 오히려 해를 입히게 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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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너무 많이 말씀을 전하지 말게. 그렇지 않으면 신도들의 영이 피로함을 느끼게 돼. 말씀이 많으면 마음이 무거워지므로 기도 집회는 실패하게 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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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내가 고령(鼓嶺)에서 다스린 것은 특별히 예외적인 것이었네. 사역하는 사람은 자기를 다스리는 것부터 배워야 해. 배우는 것이 적고, 아는 것이 적고, 부서지는 것이 적으면 결정을 옳게 내를 수 없고 사람을 다스릴 수 없어. 너무 급히 확신을 갖고 일하지 말고 두려우며 떨며 일을 해야 하네. 절대로 영적인 것을 쉽게 보지 말게. 마음속에서부터 배워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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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판단을 믿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하네. 자기가 옳다 여기는 것이라고 다 옳은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르다 여기는 것이라고 다 그른 것이 아닐세. 겸손을 배우는 데는 적어도 몇 년이 걸린다네. 그러므로 지금은 그렇게 확신 있게, 완벽히 하려 하지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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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판단이 정확한 데 이르기 전에 사람들에게 듣도록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세. 주님이 자네의 몸에서 역사하여 생각이 처리되고, 자신이 부서질 때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권위를 가질 수 있네. 권위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 그 근거를 두는 것이므로, 주님의 뜻과 마음이 없을 때에는 권위도 없게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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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종은 마땅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도량(度量)이 넓혀져야 하네. 나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믿네. 자네 스스로 자신 속을 들여다 보지 말게. 들여다 볼수록 실망하게 된다네.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인도하는 책임을 지게 하실 걸세. 홍콩의 사역은 인도하심을 따라 사람을 보내게 될 걸세. 우리는 다만 안식해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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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긴 편지를 자네가 주님 앞에서 자세히 읽기 바라네. 나는 이러한 것들이 어려운 것임을 알지만 주님이 자네를 깨뜨려 그의 손 안에서 유용하게 되기를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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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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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 1일 니 토생(워치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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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진리의말씀 2020-04-2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4195.html
아가서의 내용

A.솔로몬왕이 쓴 아가서는 탁월한 결혼에 이르는 사랑의 시이며.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의 최고 수준의 로맨스이다. 솔로몬은 남성형으로 평화라는 뜻이며 술람미는 동일한 명사의 여성형이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수도의 왕궁에 있는 왕이고. 술람미는 시골 출신의 소녀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두사람은 어울리지 않았다. 결혼에 관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둘이 서로 어울려야 한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왕과 시골소녀는 격이 맞지 않았지만 사랑에 빠졌고 그 둘은 함께 연결되었다. 

B.성경전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한편의 로맨스 이다. 아가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믿는 이들 개개인과의 연결안에서 나누시는 사랑에 대한 묘사이다. 신약전체는 몸의 생활을 강조하고 개인적인 생활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가서는 단체적인 방식으로 몸을 강조하지 않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믿는 이를 강조한다. 몸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받드시 주님과 개인적인 접촉을 해야 한다. 주님과의 개인적인 교통을 기반으로 갖지 않는다면 합당한 몸의 생활은 실현될수없다.

C.시가서인 아가서에서 우리는 십자가, 부활. 승천 이라는 단어를 찾아볼수없다. 또한 새창조 혹은 휘장안에 라는 말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 책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여러단계를 밝혀 준다고 말할수 있는가.이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아가서에서 다양한 상징들을 통해 계시되었거나 밝혀진 것들을 볼필요가 있다.

십자가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십자가의 상징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부활과 승천이라는 말 대신에 부활과 승천에 관한 상징들이 있다. 그러므로 이책을 읽을 때 가장 어려운점은 이 상징들을  해석하는 것이다.

1.아가서는 많은 상징들로 구성되어있다. 아가서의 내용은 개인적인 믿는이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교통을 점진적으로 체험해 가는것을 말하고있다.

1장2절-2장7절. 네 이름이 쏟은향기름 같고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으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같구나. 네가 일광에 쬐어서 거므스름할지라도 훌겨볼지 말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 내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양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자 같이 되랴. 여인중에 어여뿐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곁에서 너의 염소새끼를 먹일지니라. 

첫째단계에서 그리스도의 연인은 완전한 만족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추구하도록 이끌린다. (1;2-2:7) 그리스도의 연인은 매혹되어 그리스도를 쫓아달려간다. (1:2-4)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입의 입맞춤으로 그녀에게 입맞춤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2절)  이것은 가장 친밀한 입맞춤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입맞춤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유쾌하게 하는사랑에 대한 반응인데 이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낫다. 또 이것은 그분의 매료하는 이름에 대한 반응인데 이 이름은 바르는 기름의 쏟은향 기름(관유)와 같다.

1.아가서에 있는 연인은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자신과 자신의 벗들이 그분을 좇아달려 가도록 그분께 자신을 이끌어 주시라고 요청한다.(1:4) 그리스도께 매혹된 모든 이들에게는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는 벗들이 있다. 내가 주님게 이끌린 이래로 많은 이들이 나와 함게 주님을 따랐다. 사랑하는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셧을 때. 베드로는 그분께 매료되어 그물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으며  베드로의 벗들인 수많은 이들이 함게 그리스도를 따랐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를 때 우리는 다른이들 또한 그분을 따르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

2.그리스도와 그분의 연인의 교통의 결과로 그녀는 교회생활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양떼는 교회를 상징하는 또 다른 표징으로 수많은 믿는이들의 집합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분은 그분의 연인을 지성소(내실)인 그녀의 영안으로 이끌어서 그녀와 친밀한 교통을 갖는다. 여기에는 영이라는 단어가 없지만 여기에서 언급하는 내실은 우리의 영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의 거처이고 그분의 지성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교통할떼 그분의 연인은 그녀의 벗들과 주님의 사랑을 찬양하면서 즐거워 하고 기뻐한다. 왜냐하면 그녀들이 정말로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3.연인은 그녀가 사랑하는 분과 교통할때 자신이 아담안에서는 죄인임을 본다. 그녀가 게달의 장막처럼 검다는 것이 이것을 가리킨다. 게달의 장막은 아담안에 있는 한 죄인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다. 그녀가 솔로몬의 휘장처럼 사랑스럽다는 것은 이것을 가리킨다. 장막은 햇빛아래 있지만 휘장은 내실 안에 있다.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계달의 장막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같구나 (1장5절)

그러한 교통은 그리스도의 연인이 교회생활안으로 들어가도록 그녀를 안내한다. 그리스도의 연인이 교회생활안으로 들어온후. 성령은 그들과 교회안에 있는 성도들을 함께 변화되게 하신다. 그녀는 종파의 형제들 (내 어머니의 아들들 )에게 박해 를 받는다. 그리고 주님의 믿는 이들(벗들)의 교회들 (양때)에서 돌아섰다. 종파의 형제들이 비록 은혜(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그녀를 박해했고 그녀가 교회들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오늘날의 상황도 이와 같다. 

사랑하는 분은 연인이 교회들 (양때)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며 또한 주님께서 목양하시는 그분의 교회. 곧 각 지방에있는 교회들 (목자들의 장막) 안에서 그녀의 영적인 자녀들 (어린 염소새끼들 )을 먹이게 하신다. (아 1:7-8)  이것은 교회들을 따르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들을 따를때 우리는 그분을 찾게 된다. 우리가 교회를 찾을 때 우리는 모든 어린 믿는이들(어린 염소새끼들)을 교회 안으로 이끌어 올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연인의 교통은 교회생활로 귀결된다. 아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 
(1장8절). 여인중에 어여쁜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9절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그분의 연인은 또한 공개적으로 구속의 샘인 엔게디(새끼염소의 샘) 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포도원)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부활(고벨화송이)을 누린다.

아가 1장9-17절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리라. 왕이 침상(내실)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품 가운데 몰약 향량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너의모습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서까래로구나.

그리스도의 연인은 강하고 천연적인 사람(바로의 병거를 끄는 준마처럼)에서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며(백합화 마6:28) 단일한 눈(비둘기. 마10:16)으로 그분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주님은 복종하는 그녀의 사랑스러움(땋은 머리가 드리워진 사랑스러운 두뺨)과 변화시키는 영과 그녀의 아름다움(보석 꿰미들로 꾸며진 목)을 감상하신다. 변화시키는 영과 그녀의 벗들(우리)은 그리스도의 구속의일(은장식)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그녀에게 조성시켜(금사슬)로 그녀을 단장해 준다.(11절)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연인과 앉아계실때 그리스도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나드) 향기를 뿜는다.(아 1:12) 우리의 소그룹에서 종종 주님은 보이지 않는 손님으로 우리와 함께 앉아계신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내밀힌 주님의 죽음(몰약)을 누린다. 그분의 연인은 또한 공개적으로 구속의 샘인 엔게디(새끼염소의 샘) 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포도원)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부활(고벨화송이)을 누린다.

주님의 연인이 그 영에 의해 단일한 눈(비둘기)으로 그분을 바라보는 것으로 인한 그녀의 아름다움을 감상하신다. 그분의 연인은 주님의 아름다움과 감미로움을 누리며. 또한 때 맞추어 자신을 공급하시는 풍성한 공급의 근원(사과나무)이신 그리스도를 감상한다. (2:3) 이것은 변화가 산출한 서로에 대한 감상이다. 

그분의 연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식과 누림으로 만족한다. 그녀는 주님께서 감싸 안으시는 가운데(2:6) 그녀의 밤의 휴식처(침상)인 주님의 공급하시는 생명(푸름)안에서 안식함으로 만족하고. 피난처(들보와서까레)인 주님의 죽음(편백)과 부활(백향목) 안에서 안식함으로 만족한다.

2장8-3장5절.  십자가와 하나됨을 통해 자아에서 구출되도록 부르심을 받음

난 샤론의 수선화요 여자들중 내 사랑은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남자들 중 내 사랑은 수플속 사과나무라.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참 심히 기뻐하였고.그 실과 단맛 보았네.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승리의 깃발이구나. 너희는 건포도로 나를 돕고 사과로 시원케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감당치 못할병이 났구나. 그의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게로 받쳐주시고. 그의 오른손은 그 품에 안아 주시니. 예루살렘 여자들아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내 사랑 원하기전에 흔들고 깨우지 마라. 

그녀는 더 나아가 누림직한 교회생활(연회장)안에서 그녀 위에 나부끼는주님의 승리의 사랑(사랑의 깃발)으로 만족하고 생명의 떡으로(건포도)이신 그리스도로 기운을 돋으며 생명의 열매(사과)이신 그분으로 신성하게 되는 교회 생활 안에서 그녀의 사랑의병을 치유받는다.

그리스도는 참견하기 좋아하는 믿는이들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그녀가 그분에 대한 다음단계의 체험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할때까지 (그녀가 원할때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그녀의 체험.즉  자아를 벗어나고 자시성찰로 인하여 은둔하는데에서 벗어나 그분과 비밀한 교통 안으로 들어가는 체험에서 그녀를 깨우지 말라고명령하신다.

2장8-9절. 나의 사랑하는자의 목소리 내게 들린다. 보라 그가 산을 넘어 신속히 달려 오누나. 9절.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 들사슴으로 우리의 벽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 보며 창살틈으로 였보는 구나.

주님의 연인은 아가서 2장9절에서 내적성찰을 하는 자아인 우리의 벽 안에 있었다. 이벽은 자아 밑바닥에 있다. 그녀의 내적성찰은 그녀를 주님과 분리시킨 벽을 만들었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십자가와 하나 됨으로 자아에서 구출되도록 그분께 부름 받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연인의 체험의 두번째 단계이다. 중요한 세단어가 이 부분을 해석하는 것을 도와 주는데 곧 십자가와 자아와 자기 성찰이다. 십자가는 바위틈과 낭떠러지 은밀한 곳으로 상징된다. 이것들은 안전한 장소 이기는하지만 울퉁불퉁하여 거의 누구도 그곳으로 가려 하지 않는다. 바위틈과 낭떠러지 은밀한 곳은 분명 타락한 사람에게 안전한 장소인 십자가를 의미한다.

비록 아가서에 자아에 대한 표시는 없지만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따르면.두번째 단계에서 그것이 나타난다. 자아는 매우 간교하다. 자아는 자기 성찰이라는 거짓된 가면을 쓰고 들어온다. 사실상 자아는 자기성찰로 이루어져 있다. 자기성찰이란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살피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성찰을 할때 자신이 어떤 일에서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죄를 자백할 것이다. 아마 우리는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반복해서 자백하면서 더 많이 자백할수록 더 많이 용서를 받는다고 생각 할 것이다. 사실상 이런 종류의 자백은 사탄적인 자아에서 나오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이러한 종류의 상태. 곧 자기 성찰로 인하여 산출된 침체된 상태에서 우리를 구출할수있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그분과의 교통으로말미암아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능력으로 십자가와 하나 됨으로 말미암아 자아에서 구출되도록 부름받는다. 

그녀가 사랑하는 분이 산을 넘고 언덕들을 넘어 오는 노루와 숫사슴처럼 뛰어오는것을 본다는 것은 그분의 부활능력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교통에서
어려움은 모두 우리편에서 오는 것이다. 어떠한 산들이나 언덕들도 그분을 방해 할수없다. 우리는 낭떠러지 은밀한 곳(십자가)에 있을때 유일한 길은 그분의뛰어오르심과 뛰어넘으심을 의지하는 것 뿐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분이 우리 벽 뒤에서 서성이는 것은 연인의 문제인 자기성찰이 그녀와 그분 사이를 나누었음을 상징한다. 그분이 창문들 틈으로 들여다 보고 창살틈으로 엿보고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연인과 교통하시고 교제하시기 위해 마련하신 창구를 상징한다. 아무리 우리가 자신을 은밀하게 감추려고 해도 그리스도께서 보실수있는 창이 있다.

(찬송가992장) 그 사랑 내 위에 기라.그 사랑 내 위에 기라.날 잔치 집으로 데려가니.그 사랑 내 위에 기로다. 그 사랑이.내 위에 깃발이라네.그 실과 내 입에 달아 그 실과 내 입에 달아 나 그 그늘 아래 기뻐하네 그 실과 내 입에 달았네. 달고 다네 그 실과 내 입에 다네 .나 그 그늘 아래 기뻐 하네 그 실과 내 입에 달았네

주님은 그분의 연인이 그분 안에서 안식하기를 원하신다.(아2:7) 그분은 참견하기 좋아하는믿는 이들(예루살렘의 딸들)에게 그분의 연인이 그분에 대한 두번째 단계의 추구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할 때까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체험하고 있는 그분의 연인을 깨우지 말라고 엄명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서 그녀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고 그분을 체험하며 교회생활 안에서 만족하는 목표에 이르렀다. 

2장10-17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 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아가 2장10-13절까지에서 그분의 연인은 그녀의 사랑하는 분께 반응하기를 간청 받으며 또한 겨울이 지나고 부활의 넘치는 풍성의 봄이 이미오고 있음으로 인하여 격려 받는다. 10절에서 "내 사랑하는 이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일어나서 함께가자"는 그리스도의 연인이 그분과 교통하면서 그분께 응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녀가 자신의 상태안에 침체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분의 사랑안에서 그녀를 일으키신다. 우리가 영적인 추구에서 어떤성취가 있을때마다. 낮은 상태로 떨어질수있다.이러한 상태는 우리의 자아로 인한 것이다. 11절의 겨울과 시련의 때가 지나가고 부활의 봄의 때가 오고 있음을 가리킨다.

14절에서 그리스도는 십자가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표정을 보고 싶어하시고 그녀의 달콤한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신다.그분의 부활능력 안에서 그분을 추구하는 이를 부르시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체험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15절에서 그리스도는 그분의 연인에게 그녀의 특이함과 습관과 자기성찰. 곧 작은여우을 주의 하라고 명령하신다.이러한 것들은 모두 그분을 위한 연인의 부활. 꽃이만발하는 포도원을 망친다. 포도원의 꽃을 망치는 작은 여우들은 우리의 특이함과 습관과 자기성찰을 상징하고 포도원들은 교회생활을 상징한다. 이러한 특이함은 교회에 어려움이 된다. 오직 십자가만 우리를 특이함에서 벗어나게 한다.

2장16절부터 3장1절까지에서 우리는 그분의 연인이 거절과 그녀의 실패하는 것을 본다. 17절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라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의 느낌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속하셨고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하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분은 그녀와 함께 계시지 않고 그녀에게서 떨어져 순수하고 신실하게 그분을 따르는 이들을 먹이고 계신다. 이 시점에서 그녀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아니다.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처럼 되어주세요."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녀는 그분을 거절한다. 그녀는 그분께 그녀의 침체된 상태가 끝날때까지 기다리셨다가 그들이 분리되어 있는 동안 베데르 산들에서 노루와 수사슴처럼 부활안에서 자신에게 돌아와 주시기를 요청했다. 이 분리는 그녀가 아닌 오직 그분에 의해서만 제거 될수있다. 베데르라는 말은 분리를 뜻한다. 

사랑하는 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같다."주님 저는 준비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오시지 마시고 내 상태가 끝날때까지 기다려 주시기 원합니다. 분리의 산에있는 노루처럼 되어 주세요" 그녀는 자기 성찰안에 자신의 낮은 상태안에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분을 찾으려해도 그분를 찾는데 실패한다.(3:1)

아가 3장1-4절.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아가서3장 2절과 4절에서 그분의 연인은 깨어나고 침체되었던 그녀의 상태에서 회복된다. 그녀는 자신 안에서 나와서 다시는 자기성찰로 돌아가지않는다. 이전에 그리스도의 연인은 자기성찰이라는 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어느날 그녀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나는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의 방식과 방법으로 그녀가 사랑하는 분을 찾으려고 한다.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에 이르는 노정에서 그녀는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는 이들을 만나게 되고 그녀는 그들에게 "내 혼이 사랑하는 그이를 보셨나요"(3:3) 라고 묻는다. 그녀는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그녀가 사랑하는 분를 찾았고 비밀한 교통을 갖기 위해 자신을 거듭나게 한 "은혜의 영안으로" 그분을 모셔들이기 까지 그분을 붙잡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 

아가3장4절에서 그분의 연인은 "나 그들이 지나치나마자 내혼이 사랑하는 그이를 찾고는 그이를 붙잡고 놓으려 하지 않았에 내 어머니의 집으로 나를 잉태하신 이의 방으로 그이를 이끌어 들이기까지"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집은 그녀가 태어난 곳이며 어머니의 방은 그녀가 잉태된 곳이다.

그분의연인이 깨어났을때 소생되었고 그녀가 사랑하는 분을 찾고서는 붙잡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마도 이전에 그녀가 놓친 이유는 꼭 붙잡지 않아서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분을 꼭 붙잡은 것이다. 그녀는 비록 마땅히 자신에게서 나와서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전히 느낌에서의 그분의 임재를 추구하고 사모하고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가 아직 배우지 못한 공과가 많고 아직 모르는 일이 많지만 주님은 기꺼이 그녀를 만나주시고 그녀에게 붙잡혀 끌려가신다. 그녀는 아직 영과 혼을 분리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은 여기서 그녀을 탓하지 않으신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그녀의 어머니의집.곧 그녀가 은혜로 태어난 곳으로 이끌어들였으며 그녀가 사랑으로 잉태된 곳으로 이끌어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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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정하신 길 - 제 29 과 - 전시간 봉사자들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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