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계.기자간담회


진리변호 2010-06-12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k505/16969.html

지방 교회 지도자들, 한국 교계에 재평가 요청

CRI·풀러 등 “정통” 결론… 미국 내 긍정적 분위기 전달 [2010-06-11 06:20]

얼마 전 지방 교회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뒤집고 “우리가 틀렸었다”며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한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튜트(이하 CRI)의 대표인 행크 해네그래프가, 이번에는 한기총 이광선 대표회장 앞으로 서신을 보내, 지방 교회에 대해 재평가해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다.

지방 교회 지도자들 “성경적 지적 해준다면 겸손히 따르겠다”

▲미국 지방 교회의 지도자인 다니엘 토울 씨와 크리스 와일드 씨(왼쪽에서 두번째와 세번째)가 최근 방한, 10일 교계 언론들을 상대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지방 교회 지도자들은 6월 10일 앰배서더 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이같은 사실을 밝히는 한편, “한국교회에서 우리에게 개선해야 할 점들을 성경적으로 지적해주신다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기꺼이 따를 것”이라고 밝혔다. DCP Korea(한국에 있는 지방 교회들 진리의 변호와 확증 위원회)가 개최한 이날 기자간담회에는 미국 지방 교회측에서 다니엘 토울 씨와 크리스 와일드 씨 등이 참석했다.

최근 미국 기독교계 내에서는 그간 이단 논란을 겪어왔던 지방 교회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가 잇따르고 있다. CRI, AIA, 풀러신학대학 등이 그같은 평가에 동참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이들의 평가는 한국교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CRI “지방 교회들, 기독교 교리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
풀러 “그들(지방 교회 교인들)은 진정한 믿는 이들이다”

CRI는 월터 마틴이 창립한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연구소로서, 30여 년 전 지방 교회에 대해 가장 먼저 비판을 한 바 있으나, 최근 재연구 끝에 “우리가 틀렸었다(We Were Wrong)”는 결론을 내렸다. 지방 교회에 대한 비판 자료들이 대부분 CRI의 최초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했던 만큼, 이같은 결론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게다가 CRI 대표인 행크 해네그래프는 최근 한기총 이광선 대표회장 앞으로 보낸 서신에서 “비록 CRI가 수십 년 전에 지방 교회들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몇 개의 글들을 출판했었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러한 판단들을 지지하지 않으며, 그런 자료를 출판하지도 않는다”며 “6년에 걸친 기초 조사 과정 후, 저는 지방 교회들이 본질적인 기독교 교리를 위태롭게 하는 것과 관련하여 유죄가 아니라 무죄라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게 됐다”고 밝혔다.

세계적 권위의 신학 명문 풀러신학대학 역시 2006년 지방 교회에 대해 이단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풀러신학대학의 리처드 마우 총장, 하워드 로웬 신학부 학장, 베리마티 카케년 조직신학 교수 등의 석학들이 2년간 진행한 연구에서 내린 결론은 “우리는 그들을 진정한 믿는 이들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같은 지체들로 쉽고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모 이단감별사가 이 결과에 불만을 품고 풀러신학대학측에 방문해 강력히 항의했으나, 오히려 지방 교회가 정통 교회라는 풀러측의 확고한 입장만을 확인한 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챠니티투데이 역시 지방 교회의 지도자인 워치만 니를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 100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하기도 했고, 뉴저지의 하원의원인 스미스 의원은 미국 국회 제111차 회의 도중 워치만 니에 대해 “중국 기독교의 위대한 개척자”라고 평하며 중국에서 출간 금지된 그의 서적들이 자유롭게 출간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지방 교회 지도자들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세계적 선교대국인 한국에서도 지방 교회에 대한 객관적이고 건설적인 재평가가 이뤄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길 희망한다”며 “‘본질적인 것들은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들은 자유를! 다른 모든 것들은 자비를!’이라는 원칙하에 모든 일이 아름답게 마무리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지방교회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시작한 신앙운동
논란 시발점인 CRI의 재평가로 미국에서의 논의는 새 국면

▲지방 교회 지도자들은 미국 CRI와 풀러 등에서 지방 교회에 대한 건설적 재평가가 이뤄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한국에서도 이같은 결론이 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또 개선해야 할 점에 대해 성경적 지적을 해준다면 따르겠다는 뜻도 전했다.

지방 교회 운동은 중국에서 가장 크고 역동적인 운동 중 하나이며, 1960년대 초반부터 미국에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다. 중국인 워치만 니에 의해 시작되고 위트니스 리에 의해 계승·발전된 것으로, 목사기능을 가진 복수의 장로제도, 성직자와 평신도 구분의 폐지, 주님의 상을 중심으로 한 예배 등의 특징을 갖고 있다. 특히 양태론을 가르친다는 의혹을 CRI가 지적한 이래(1980년) 미국에서 이단 정죄를 받아왔었다.

한국에서도 CRI에서 출판한 “신흥이단들(The New Cult)”(1980)의 영향을 받아 예장 통합측이 제76차 총회(1991) 때 경북노회가 제출한 “지방 교회(회복 교회)의 정체에 대한 질의”가 있었고, 그 다음해인 제77차 총회(1992)에 “지방교회 추가 연구보고서”가 제출되어 이단으로 규정된 바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논란의 시발점이 됐던 CRI가 자신들의 과거 연구 내용을 뒤집고 반성하면서 미국에서 지방 교회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CRI는 금년 초에 자신들이 발행하는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 특집판에서 50여 페이지에 달하는 지면 전체를 할애해 지방 교회 이단논쟁에 있어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지방 교회들은 신약 기독교의 정통적인 교회”라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이 재연구에는 과거 지방 교회에 대해 “정도를 벗어난 그리스도인 단체”라고 지적했었던 연구원들도 직접 참여해 자신들의 과오를 시인했다.

CRI 대표인 행크 해네그래프는 특집호에서 “지방 교회 대표들은 영원히 구분되는 세 위격으로 계시되신 한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신앙, 사람은 본체론적으로 결코 하나님의 신격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 그들은 ‘단지 교회(only the church)’라고 말한 것을 ‘유일한 교회(the only church)’로 오해받아 반대 당했던 사실을 하나하나 증언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어떤 대가가 든다 할지라도 중국과 전세계에서 박해당한 교회가 겪은 것에 비하면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며 “우리에게 있어서 내가 틀렸었다라는 말보다 더 하기 힘든 말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지방교회에 대한 이단 논쟁이 시작되었던 미국에서 잇따라 이와 같은 재평가가 이뤄짐에 따라 한국에서도 이같은 흐름이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류재광 기자 jgryoo@ch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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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상식 2010-06-12 / 추천수 0 / 스크랩수 2 http://blog.chch.kr/k505/169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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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렡 에미 바버


워치만니 2010-06-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16823.html

 

    그녀는 중국에서 여행을 거의 하지 않고 사람들의 관심을 사지 않는 가운데

    후조우시 외곽에 살았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주님의 움직이심을 위해 기도했으며

    주님을 추구하기 위해 그녀의 조언을 구하는 이들을 도왔습니다.

    바버 자매님을 통해 워치만 니는 그의 영적인 삶의 기초를 얻었습니다.

    젊은 니 형제님이 유창함, 지식, 능력, 열심 혹은 천연적인 설득의 능력을 가진

    크리스챤 연사를 존경하고 있을 때 바버 자매님은 그러한 것들이

    그 영이나 생명에 속한 것들이 아님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사람들을 흥분시킬 수는 있지만 사람들에게 생명을 사역해 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녀는 일 보다는 생명에 더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녀는 또한 영적인 삶에 파선함을 몰고 오는 인기 있는 일을 하는 것에 있어서

    젊은 형제들을 경고했습니다.

    워치만 니 형제님은

    자신을 굳이 바버 자매님의 지시와 엄한 꾸중아래 둠으로써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An Irish blessing


찬송가 2010-06-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2 http://blog.chch.kr/k505/16819.html

 
     
    - An Irish Blessing - 
    amp; Roma Downey   
    
    
     
    May the blessing of Light be upon you,
    Light on the outside, Light on the inside.
    밖에 빛 그리고 안에 빛,
    빛의 은총이그대에게도 머무소서.
     
    With God's sunlight shining on you,
    may your heart glow with warmth likea
    turf fire that welcomes friends and strangers alike
    그대를 비추는 그분의 햇살처럼
    친구나 길손 가리지 않는다
    정함으로 그대 마음도 커나가게 하소서.
     
    May the Light of the Lord shine from your eyes
    like a candle in the window, welcoming the weary traveler
    지친 나그네 반기는 창가의 촛불처럼
    그분의 빛이 그대 두 눈에도 빛나게 하소서...
     
    May the blessing of God's soft rain be on you,
    falling gently on your head,
    refreshing your soul with the sweetness
    of little flowers newly blooming
    갓 피어난 작은 꽃 
    그 신선함으로 영혼 걸러내
    머리 적셔주시는 그분의 부드러운 빗물이 
    그대에게도 은총 날라다 주게 하소서...
     
    May the strength of the winds of Heaven bless you,
    carrying the rain to wash your spirit
    clean, sparkling after in the sunlight.
    햇살 뒤 섬광이 일며 영혼 맑게 씻으라 
    비를 불러주시는 천국 바람의 힘 
    그대에게도 강복케 하소서...
     
    May the blessing of God's Earth be on you. 
    And as you walk the roads,
    may you always have a kind word for those you meet.
    이 땅에 내리시는 그분의 은총이 그대에게도 내리고,
    길을 걸으며 그대가 만나는 이에게도
    늘 다정한 말 건네게 하소서...
     
    May you understand the strength and power of God,
    in a thunderstorm in winter.
    And the quiet beauty of creation
    in the calm of a Summer sunset.
    겨울날 몰아치는 뇌우 속에서도 
    그분의 능력을 알게 하시고,
    여름날 황혼의 평온 속에서 
    창조의 잔잔한 아름다움도 알게 하소서...
     
    And may you come to realize that,
    insignificant as you may seem
    in this great universe, you "are" part of God's plan.
    거대한 우주에서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지 않고
    그대가 그분 계획의 중요한한 부분임을 깨닫게 하소서...
     
    May He watch over you and keep you safe from harm.
    그 분이 그대를 돌보아 부디 환난으로부터 안전하게 하소서...
     
    
    
     




한국전쟁 60주년기획


일반상식 2010-06-09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16763.html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1) 한국전쟁 발발 막전막후

스탈린과 대좌한 김일성 “미국은 개입 않을것” 호언

다시 유월이다. 60년 전 한반도를 선혈로 물들였던 한국전쟁 발발의 막전막후에서 남북한, 미국과 옛 소련 그리고 공산화된 중국 간의 이합집산과 동상이몽이 클라이맥스에 올랐던 바로 그 여름이다. 일갑자의 세월이 흐른 지금, 천안함 사태를 둘러싸고 전쟁의 두 당사국과 주변 4강이 편을 갈라 맞서고 있는 풍경의 흑백판이다. 한국전쟁을 어떻게 봐야 하나. 전쟁을 일으킨 발발자와 원인 그리고 전쟁의 성격에 대한 의견이 여전히 분분하다. 한국전쟁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주변 4강의 지정학적 관계와 국제정세 속에서 발발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서울신문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러시아연방 대통령문서보관소에 깊숙이 감춰져 있던 한국전쟁 관련 문서발굴을 통해 전쟁의 실체에 한걸음 다가서려고 시도했다. 문서 속에는 한국전쟁의 총연출자인 스탈린과 동조자이자 막후 조종자였던 마오쩌둥, 각본을 썼지만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김일성이 노렸던 적화통일의 염원이 빛바랜 엽서처럼 남아 있다.

▲ 평양 시민들이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광복 이후 한국전쟁 이전까지 북한화가들은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화를 9만여점 가까이 제작했다.
1949년 3월5일은 김일성에게 역사적인 날이었다. 김일성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정부대표단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마주 앉았기 때문이다. 소련군 장교출신의 풋내기 김일성이 절대적 독재자에게 첫선을 보인 날이다. 김일성으로서는 우상 스탈린으로부터 전쟁 승인과 지원을 이끌어낼 절호의 기회였다.

이 시기 평양과 모스크바 사이를 부지런히 오간 비밀문서는 겉으로는 경제협력, 문화교류 확대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전쟁준비를 위한 소련의 군사 및 군비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2월4일 평양에서 외무성에 보낸 전문 중에는 ‘2월3일 남조선 경비대가 38선을 넘어와 북한 경비대와 교전 끝에 격퇴됐다. ’는 내용의 문서가 있다. 4월20일 소련 국방상이 스탈린에게 보낸 38선 상황에 대한 극비보고서에서도 ‘남한의 38선 침범행위는 도발적이며 체계적이다. 올 들어 지난 15일까지 모두 37건의 침범사례가 있었다. 발포는 남한이 시작했다. 남한군의 38선 집결이 계속되고 있다.’라고 보고했다.

▲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 스탈린과 회담을 가지기 전 모스크바역 앞에서 연설하고 있는 김일성.
회담을 전후해 한반도의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 1946년 대구폭동과 1948년 제주 무장봉기, 여수·순천반란사건 등으로부터 한숨을 돌린 이승만 대통령은 38선 부근에 국군을 집중적으로 배치했으며 시중에는 ‘8월 북벌론’이 팽배해 있었다.

첫 회담에서 스탈린은 남한에 미군이 얼마나 있으며, 남한군의 규모와 남한군을 두려워하는지 여부, 희망하는 차관액수 등등에 대해 김일성에게 질문을 던졌다. 김일성은 2만명의 미군이 있으며, 남한 군대는 6만명이고, 남한군보다 북한군이 강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스탈린은 빨치산의 남한 군부 침투를 주문했으며 동석한 박헌영은 ‘침투를 시켰지만 드러내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스탈린은 38선 충돌상황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스탈린은 또 ‘김일성, 박헌영 둘 다 전보다 살이 많이 쪄 알아보기가 어렵다.’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두 사람이 1946년 여름 모스크바를 방문한 사실을 염두에 둔 얘기다.

▲ 전쟁의 광풍이 휩쓸고 간 서울 광화문 중앙청이 처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급조한 진지 위에 포대와 포탄이 쌓여 있어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이 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 국제뉴스서비스(INS) 소속 종군기자로 3년간 활동했던 존 리치 전 NBC 아시아담당 선임기자가 찍었다. 당시로는 희귀한 컬러사진이다.
이후 스탈린은 ‘ 첫째, 북한군은 남한군대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지 못하며 수적으로도 뒤진다. 둘째, 남한에 있는 미군이 개입할 우려가 있다. 셋째, 38선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협정이 유효하다.’는 이른바 ‘3대 남침 불가론’을 내세워 김일성의 전쟁의지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데뷔는 성공작으로 평가된다. 스탈린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김일성은 항일 유격전에서 일본군이 가장 체포하고 싶어 하는 게릴라 지휘관 출신이었다. 1942년 소련군에 입대해 1945년 평양에 지도자로 나타났을 때 적군 군복에 소령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는 중국보다 소련을 후원자로 선택한 스탈린 추종자였다. 그는 ‘나는 스탈린 동지에게 충실한 공산주의자이며, 나에게 스탈린은 바로 법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퓰리처상 수상작가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를 파헤친 최신작 ‘콜디스트 윈터’에서 스탈린이 김일성을 좋아한 이유를 ‘김일성의 지도력이 소련군보다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적인 역량과 지도력이 뛰어났다면 마음대로 다루기 어려웠을 테니 당연했다. 다소 경력이 부족하더라도 미화시킨 다음 권좌에 앉히면 그만.’이라고 분석했다. 김일성은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마오쩌둥에게 빌붙기 전까지 스탈린의 입맛에 맞게 움직였다.

▲ 압록강까지 진군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38선을 넘어 후퇴하고 있는 연합군.
김일성은 평양주재 스티코프 소련대사를 구워삶는 데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스티코프는 남한의 북침 가능성이 크며, 북의 준비는 부족하다는 점을 강조한 전문을 스탈린에게 계속해서 보냈다. 스탈린은 이 같은 스티코프의 언동에 대해 경고장을 보냈을 정도다. 스탈린은 북한의 선제공격이 미국과의 전면전을 유발할지 모른다면서 몸을 사렸다. 스탈린은 스티코프에게 ‘전쟁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남한이 먼저 북한을 공격하는 경우밖에는 없다.’라며 남한이 공격해 올 때까지 자제토록 지시했다.

김일성의 다음 행로는 마오쩌둥 설득에 맞춰졌다.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주석에 취임한 다음 날 소련과, 나흘 뒤 북한과 각각 국교를 맺었다. 김일성은 1949년 4월 북한 인민군 총정치국장 김일을 보내 원조의사를 떠봤다. 베이징 지도자의 답은 ’선제공격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만 ‘필요하면 중국군 조선인 사단 2개를 지원해 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검은 머리이니까 중국 해방군인지 북한 인민군인지 분간을 못 할 것’이라는 희망어린 메시지를 전했다.

이때만 해도 김일성은 신생 중국을 얕봤다. 소련에 매달렸고, 중국의 도움은 불필요하다고 여겼다.

▲ 1945년 11월 중국에서 귀국한 김구 선생이 이승만 박사의 주선으로 미군정 사령관인 하지 중장을 만나고 있다. 왼쪽부터 이승만·김구·하지.
전쟁을 통해 입지를 다지려던 김일성은 끈질겼다. 1950년 4월 한 달 동안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스탈린과 세 차례 만났다. 마오쩌둥의 개입 의사를 전해 들은 스탈린의 마음도 움직였다. 김일성은 ‘전쟁이 나도 미국은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20만명의 공산당원들이 들고 일어나 북한을 지지할 것’이라고 허풍을 쳤다. 스탈린은 마침내 ‘북한군을 38선에 집결시키고서 남한에 대해 평화통일을 제의할 것, 남한이 거부하면 옹진반도를 점령하되 남한이 반격하면 전선의 폭을 넓혀 나간다.’는 이른바 ‘3단계 작전지침’을 제시했다.

러시아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AV토르쿠노프 총장은 저서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에서 “전면전 허용은 아니었다.”라고 분석했지만 김일성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뜸을 들일 의사가 없었다.

마오쩌둥도 합류했다. ‘미국이 개입한다면 중국도 북한에 군대를 보낸다.’는 것이 마오쩌둥의 기본 생각이었다. 마오쩌둥은 1949년 12월16일 모스크바를 방문해 석 달 가까이 체류하면서 스탈린과 만났다. 그 때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혁명에 성공한 영웅으로 초대받지 못했다. 숱한 공산주의 국가 대표 중의 한 사람으로 스탈린의 고희연에 참석, 장기집권을 축하하도록 초대받았을 뿐이었다. 두 공산주의 국가 거목 사이에는 불화가 싹트고 있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에 따르면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전혀 믿지 않았다. 스탈린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나뉘기보다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고마워하는 단일 공산국가로 통일되기를 바랐다. 또한 일본에 맞설 정도로 강해지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일본 동양학원대학 주지안롱 교수는 저서 ‘모택동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에서 중국의 참전이유를 ‘첫째, 미국 7함대의 타이완해협 파견을 대중국 선전포고로 간주했다. 둘째, 한반도 개입이 국내 정치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셋째, 미군이 한반도 북부에 진군하면 중국 동북지역이 위협에 노출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한국전쟁 전문가인 선즈화 화동사범대 교수는 ‘미국의 침공을 저지하고자 미·중대결의 전장으로 한반도를 선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본토 원자폭탄투하설을 입에 올린 맥아더 장군의 쇼맨십도 마오쩌둥의 참전의지에 불을 붙였다.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책은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치면서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간 일이었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원자폭탄을 종이호랑이로 깎아내렸다. 인도의 네루 수상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1000만~2000만명의 인명피해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라고 호언장담했다.

공개된 러시아 비밀문서를 유심히 살펴보면 공산진영 세 나라 지도자의 성격과 품계가 잘 나타난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직접 지시하기보다는 평양주재 대사 등을 통해 우회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썼다. ‘김일성에게 문서를 읽어주고 나서 베껴가는 것은 허용하지만 문서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마오쩌둥 역시 스탈린 앞에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갔다. 문서의 서두는 스탈린의 암호명인 ‘필리포프 동지’로 시작했고, ‘귀하의 검토와 의견을 바란다.’라고 마무리했다. 또 ‘볼셰비키적 경의를 표하며 모택동’이라고 썼다.

전쟁이 장기화하고 중국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마오쩌둥은 스탈린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휴전교섭 지침을 스탈린에게 의뢰한 1951년 6월30일자 전보에서 마오쩌둥은 ‘ 귀하에게 나의 의견을 전한다. 검토 후 김일성에게도 직접 지시하시기 바란다. 귀하가 김일성과 접촉하고 나서 나에게도 알려주기 바란다.’라고 썼다. 의례적인 칭송은 사용하지 않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우고 있다.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스탈린은 물론 김일성과 공산진영에서 ‘무시 못할 둘째 형’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이 줄기차게 주장한 ‘남침공격’을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결국 허락했지만 상호 담보를 원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베이징 지도자의 지원을 구하라고 지시했다. 1950년 5월13일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베이징 장도에 올랐다.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 등 공산진영 3자의 전쟁 합의는 이날 성사됐고, 한국전쟁은 그렇게 막이 올랐다.

노주석 논설위원·윤샘이나 기자 sam@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