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만니의 간증


워치만니 2010-06-0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16626.html

1936년 10월18일  1차 간증

성경: 사도행전 26장 29절. 갈라디아서 1장 15절.

 

출생 전에 이미 바친 바 되었다

나의 출생은 어떤 면으로는 기도의 응답을 받은 하나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 민간에는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를 경시하는 풍속이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는 이미 두 딸을 낳고, 계속해서 여섯 딸을 낳은 나의 고모와 같이 될까 매우 두려워 했다. 그 분은 그 때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몰랐지만 주님께 간단한 몇 마디로 『만일 당신이 내게 아들을 주신다면 나는 이 아들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주님은 그 기도를 응답하시어 얼마 안가서 나를 낳게 하셨다. 후에 내 아버지께서 이 일을 내게 알려주심으로써 나는 출생전에 이미 바친 바 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원을 받은 것은 양면적이었다

1920년, 내가 17세였을 때 나는 구원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주님을 믿는 것은 구원을 받아 죄를 벗어나는 데까지를 말한다. 그러나 내 경우에 있어서는 그의 종이 되어 그를 섬기라시는 주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나는 이것에 대한 대가가 너무도 큰 것임을 잘 알았음으로 속에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그냥 지나치시지 않았고 갈등은 계속 되었다. 나는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이 양면적(兩面的)이라는 것- 한 면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요 또 한 면은 그를 내 주인으로 영접하여 섬기게 되는 것임을 알았다.

 

그 해 4월 20일 밤, 나 혼자 방 안에 있었을 때 나는 주님을 영접해야 하느냐 영접하지 말아야 하느냐의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처음에 나는 달게 받아 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기도할 때 너무도 큰 나의 죄를 발견하게 되었고 오직 주 예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때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못 막힌 두 손을 내밀어 날 맞으며 『나는 여기에서 네가 날 영접하길 기다리고 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이 사랑이 마침내 나를 정복했다. 이전에 나는 다른 사람이 예수 믿는 것을 비웃었으나 그 날 저녁 나는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눈물로 죄를 자복하며 주께 사해주시기를 구하며 주님을 영접했다. 또한 이 큰 사랑으로 인하여 나는 내 일생 동안 그를 섬기기를 원하게 되었다. 기도한 후, 나는 전에는 맛보지 못한 기쁨과 평강을 맛보게 되었다. 그 때 방안에는 빛이 충만한 것 같았다. 나는 주님께 말했다.『아, 주여, 당신은 나를 은혜로 대하였습니다!』


커다란 변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세 사람은 나의 동창생이다. 특별히 위 광희(魏 光禧)형제는 항상 학교의 규칙을 범하던 나의 이전 나쁜 행실을 간증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주신 나의 작은 총명으로 매 시험마다 나는 쉽게 수위(首位)를 차지 할수 있었다. 나의 문장은 항상 모범으로 뽑혀서 게시판에 붙여져 있었다. 이러므로 나는 교만하고 자고(自高)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나의 판단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었고 청년들이 품는 야망을 갖고 있었고, 장래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노력하기만 하면 내가 원하는 목적을 무엇이든지 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날 밤부터 모든 것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십여년 간의 계획이 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모든 영웅심과 큰 뜻이 점점 사라져 결국은 깨끗이 없어졌다. 반대로 하나님의 나에 대한 부르심은 갈수록 분명해졌다. 나는 나의 일생이 장래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주님이 나를 이끄시어 구원을 받게 할 뿐 아니라 한층 더 나아가 그의 영광을 위하여 그에게 다다르게 하셨음을 알았다. 하나님은 나를 부르시어 내가 그의 종이 되어 그를 섬기고 그와 동역하도록 하신 것이다. 전에 나는 전도하는 일을 업신여겼다. 특별히 전도인들에 대해서는 많은 전도인들 보기를 외국사람이나 따라 다니는 일종의 직업인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그들을 저질(低質)로 느끼고 있었다. 과거에 나는 내가 그렇게 멸시하던 전도인이 되리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가 가장 하류(下類)의 것으로 여기던 그 일을 전적으로 하게 된 것이다.


생활에는 실제가 없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나는 학교를 떠나 상해에 가서 여자도(余慈度)자매가 경영하는 성경 학원에 들어갔다. 얼마 후 그 분은 내게 그 학원을 떠나 달라고 말했다. 나는 군것질을 잘하고, 아름다운 옷을 즐기고, 아침에는 항상 늦게 일어났었으므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이다. 이 일은 주님을 섬기려는 내 마음에 엄중한 타격이 되었다. 나는 내 생명은 큰 변화를 받았으나 내 생활에는 실제가 없으며 고쳐야 할 점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려면 먼저 충분한 준비가 필요함을 알았다. 나는 학교로 다시 돌아가서 계속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사역에 능력이 없었다

학교에서 동급생들이 소설을 읽을 때 나는 한쪽에서 성경을 읽었다 (편자 주:그러나 그는 시험 볼때마다 1등이었다). 나의 동급생들은 내게 많은 변화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나의 옛 성질은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나의 간증은 그리 강할 수 없었다. 내가 기억하기에 그 때 내가 위(魏) 형제에게도 간증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주님께 돌이키려는 마음으로 동급생들에게 간증했으나 일 년이 지난 뒤에도 아무 효과가 없었다. 나는 이론(理論)을 잘 얘기하고 충분한 논리를 제시하면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찌된 까닭인지 나의 일은 다른 사람에게서 아무런 능력을 갖지 못했다.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서양인 선교사인 그로스 양(miss Grose)을 만나게 되었다. 그로스 양은 나에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물은 후, 일 년 동안 내가 주님 앞으로 인도한 사람이 전부 몇 명이나 되는냐고 물었다. 이 질문에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동급생들에게 내가 복음을 전했지만 한 사람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내게 말하기를 나의 문제는 나와 주님 사이에 간격이 있는 것이며 그렇게 때문에 복음을 전해도 효과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 [간격]은 숨겨 있는 죄일 수도 있고, 양심의 거리낌일 수도 있고, 기타 주님께 득죄한 일일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솔직하게 이런 것이 있음을 시인했다. 그녀는 내게 이런 것들을 깨끗이 버리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원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다시 내게 묻기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했느냐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나는 사람을 만나서 그가 흥미있게 듣든지 안듣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들에게 주님에 대해 말했음을 얘기했다. 그녀는 내게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얘기했다. 그녀는 내 친구들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서 항상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 후에 하나님이 말할 기회를 주시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나는 돌아온 후 곧 죄를 해결하고 주님이 내몸에서 역사하시는 데에 지장이 있는 일을 해결했다. 또 10명의 동창생 이름을 한 수첩에 적은 후 매일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때로는 수업중에도 그들을 위해 기도했고 기회만 있으면 그들에게 주 예수를 전했다. 이 일이 효과를 보기 시작할 때 처음에 나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내가 그들 앞을 지나가려 할 때 앞에서 희롱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야! 전도사 온다. 우리 그 설교좀 들어보자!』 사실 그들 속에는 듣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나는 이 실패를 그로스 자매에게 얘기했다. 그녀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그들이 구원 받을 때까지 계속 기도하라고 했다. 주님 은혜로 나는 주님을 의지하고 힘을 얻어서 매일 명단에 기록한 사람 하나하나를 위해 계속 기도했다. 이렇게 하여 몇 달이 지난 후 명단에 기록된 70명 중 1명을 제외한 69명이 다 구원을 받았다. 여기에 앉아 있는 위 광희 형제도 그 69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성령의 능력을 얻어야 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으나 나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학교와 도시에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도 복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 위에서 내려오는 능력을얻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나는 한 영국 선교사인 화수은 ( 和受恩 ) 자매 ( M.E.Barber) 에게로 갔다. 나는 그분에게 물었다. 『영적 능력을 얻으려면 성령릐 충만을 받아야지요?』 그분은 말했다. 『그렇다. 너는 반드시 네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이 그의 영을 네게 충만케 하시도록 해야 한다.』 나는 내가 분명한 구원과 부르심을 받고 이미 내 생명을 하나님께 바쳤지만 여전히 영적 능력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게 프리진 형제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프리진 ( Prigin ) 형제는 미국 사람으로서 중국에 온 일이 있었다. 그가 철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을 때 그는 자기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그에게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이 있고, 이길 수 없는 죄가 있고, 주님의 일에 대해서는 능력이 조금도 없음을 고(告)했다. 그는 하나님께 성령을 충만케 해 주시고, 승리의 생활을 할 수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는 이러한 기도를 두 주(週) 동안 계속했다. 이상한 것은, 하나님은 그에게 아무 것도 주시지 않고 도리어 그에게 몇 가지 요구를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정말 승리의 생활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너는 두 달 후에 볼 박사 시험을 포기해라. 나를 섬기는 데는 「철학 박사」가 필요 없다.』그는 너무도 난감 ( 難堪 )했다. 그에게 있어서 박사 학위를 얻는 일은 자신만만한 일이었다. 그런대 어떻게 이것을 버린단 말인가? 그가 30 년간 소망을 걸어왔던 것이 바로 이 「박사」학위를 얻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버리라고 하시니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시지 않은가? 이러한 전쟁이 그의 안에서 두 달 동안 계속되었고, 결국에는 주님이 승리하셨다. 그는 한 통의 편지를 대학 당국에 보내어 그가 다음 주에 있는 학위 시험에 불참 ( 不參 ) 할 것임을 통지했다. 그 일은 이렇게 결정된 것이다. 그 날 저녁 그는 몹시 피로했고, 그 이튿날의 집회에서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튿날 그는 회중( 會衆 )에게 말했다. 『오늘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다만 한 사람이 주님께 복종한 일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그 날 회중의 사분( 四分 )의 삼(三)이 새롭게 일어났고 그 자신도 이로 인해 성령의 능력을 얻게 되었다. 그는 후에 말했다. 『내가 만일 결과가 이런 것임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나는 좀 더 일찍 하나님께 복종했을 것이다.』그는 그 후 주님께서 중히 쓰시는 사람이 되었다. 프라진 형제의 이야기는 나를 감격케 했다. 나는 주님께 말했다.『주여, 나와 당신 사이의 간격을 제거하겠사오니 나로 성령의 충만을 받게 하소서.』이리하여 1920년보터 1922년까지 나는300여 명에게 사과하고 그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내 느낌에서는 여전히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간격이 남아 있었다. 나는 다시 일하려 노력했으나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은 없었고, 사역의 효과도 별로 없었다.

 


나는 마음을 다하여 그를 사랑해야 한다

어느 날 나는 설교 제목을 찾기 위해 성경을 보고 있었다. 그 때 읽은 것은『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시 73 : 25 ) 였다. 나는 내 자신에게 말했다. 『시편 기자 ( 記者 )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지만, 나는 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없는 원인은 바로 그 때 내가 지금 내 아내 된 여자를 사랑하는 데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주님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그녀가 내게 회답한 것은 웃음 뿐이었다. 이것은 10 년 전의 일이었다. 그 당시 그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오늘 많은 청년들이 그러하듯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다. 내 느낌에는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 너무 열렬하기 때문에 나와 주님 사이에 다툼이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녀를 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내 마음 가운데에서 너무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 이 일에 대해서만은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심지어 나는 황무한 땅 티뱃 ( Tibet ) 까지라도 가서 전도하겠고, 하나님을 위한 많은 사업을 하겠으니 나의 애정만 간섭하지 말고 나의 사랑하는 사람만 버리지 말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제의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단 이 일을 제기하신 후에는 돌이키지 않으셨다. 주님은 나에거 그 사랑을 버리고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공부에도 흥미가 없었고, 기도도 잘 할 수 없었다. 나는 계속 성령의 충만을 받기 원했지만 시편의 그 말은 감히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나는 마침내 하나님께 말했다. 『주여, 나눈 그녀와의 관계를 포기하겠읍니다.』이 때 나는 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큰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그원받았을 때, 나는 죄 짐을 벗어났다. 이번에 나는 나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장애물을 해결하고 완전히 소제 ( 消除 ) 하여 내 무거운 짐을 벅어버리고 평범한 옷으로 갈아 입은 후, 부엌에 들어가 풀을 쑤어서 전도지와 함께 가지고 나가 한 장 한 장 붙이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과거에는 복주( 福州 )에서 이런 일을 한 사람이 없었다.

 

1922년 2학기 때 나는 매일 수첩에 적힌 동창생들을 위해 기도했고, 그 중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구원 받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졌기 때문에 다음 해부터 우리는 그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여 집회하기 위해 좀 더 큰 장소를 빌어야겠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 때 수첩에 기록된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구원을 받았다.

 

 

가장 귀한 공과를 배우다

그 때 우리에게는 일곱 동역자가 있어 매주 금요일에 같이 모였다. 그러나 그 시간의 대부분을 나와 인도하는 한 형제와의 변론으로 다 소비했다. 이 형제는 나보다 다섯 살 위였다. 청년이었던 우리들은 모두 각자의 의견을 내세우며 상대방의 생각을 비판했다. 때로 나는 혈기도 냈다. 그러나 내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 때 나는 토요일마다 화 수은 자매에게 가서 그분에게 그 형제의 태도에 대해 호소하고 우리 가운데 있는 분쟁을 화해시켜주며 그 형제의 잘못을 고쳐달라고 했다. 그 자매는 나를 꾸짖으며 성경에서 젊은이는 나이 많은 자에게 순종하라 했으니 너는 그에게 순종해야 마땅하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에 복종하지 않고 나 자신을 변명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사리(事理)는 있는 게 아닙니까?』그분은 『이유 불문하고, 성경에서 어떻게 말했는가를 봐라. 성경에서 젊은이는 마땅히 나이 많은 자에게 순종해야 된다고 했다!』고 말했다. 금요일 오후에 논쟁을 벌이고 나서 밤에 나는 잠을 잘 수 없었고 때로는 울기까지 했다. 토요일에는 화 수은 자매에게 가서 호소하며 그분에게 내 신원을 구했다. 그러나 그분의 답변을 듣고 집에 돌아오면서 나는 또다시 울었다. 나는 내가 그 형제보다 일찍 태어났더라면 순종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그 형제였을 것을......하면서 내가 그 형제보다 일찍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恨)하였다.

 

언젠가 나는 그 변론중에서 나의 의견이 너무도 옳은 것임을 느끼고 그분에게 내가 어떻게 옳고 그 형제가 어떻게 틀렸는가를 설명했다. 나는 이번에는 틀림없이 내가 이긴 것으로 인정받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그 형제의 옳고 그른 것이 문제가 아니다. 지금 내 앞에서 형제를 송사(訟事)하는 네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냐? 네가 어린 양과 같은 사람이냐? 네가 한 번 말해 봐라. 그녀의 이 몇 마디에 나는 참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그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때 내 말과 태도는 정말 십자가를 메는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고 어린 양과 같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그 일년 반동안에 내 일생 중에서 가장 귀한 공과(工課)를 배운 것이다. 나는 원래 머릿속에 영적 구상(構想)이 가득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 가지 환경으로 말미암아 나를 영적 실제에 들어가게 했고 십자가의 의의(意義)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셨다. 오늘, 1936년, 내게는 50여 동역자가 있다. 그때에 순종하는 공과를 배우지 못했다면 나는 오늘 그 어떤 사람과도 함께 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 찬미를 드린다. 그는 나로 성령의 제한을 받게 하기 위하여 나를 그러한 환경 가운데 넣으셨다. 그 18개월 동안 나는 내 의견을 제시할 기회를 갖지 못했고 다만 울며 고통을 참아야 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나』라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내 성격의 모난것을 깍아내시어 이제 나로 하여금 젊은 동역자들에게, 온유하고 겸손하고 화평한 영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게 하셨다. 십자가를 메지 않으면 그들이 한 일, 열성, 목적과 능력이 모두 별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 길을 걸어 오면서 나는 나의 단점과 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옳고 그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네가 십자가를 메는 사람이냐 아니냐에 있다. 교회안에서는 옳은 것도 그른 것도 다 가치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를 메는 것이요, 부서짐을 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낼 수 있고 그의 뜻을 이룰 수 있다.

 




그때 그 시절은 이랬습니다.-여러분들의 추억^^


일반사진 2010-06-0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16625.html

그때 그 시절에는..

 

 
흙내음 나는 고향 초가집.. 

 

 
 
큰 가마솥에서 나무를 때어 밥을 하였는데
밥맛과 누룽지 맛은 최고였습니다.
 

곡마단 선전만 하면 따라 다니기도 했지요

 

시험을 볼때면 책가방을 사이에 두고
    시험을 보았습니다

이때는 눈이 수도없이 많이도 내렸습니다

나잡아 봐라 메~롱 지금 그때에 친구들이 그리워집니다

뻥튀기 간식도 없는집 아이에게는 그림에 떡이였습니다

말뚝박기 가위 바위 보
 
콩자반에 멸치볶음은 반찬중에 으뜸

시간이 있으때는 항상 동생을 돌봐주는건 일상의 기본 이였던 시절

여학생들만 지나가면 괜스레 폼나게 걷던 남학생들

많은 짐을 실어날으는 마부가 있던 그때 그시절
짐수래가 힘들게 고개를 넘으려면 먼저랄것도 없이
손수래를 밀어주는것 또한 기본적인 친절이였습니다
 
 이상하리 만큼 시험 기간만 되면
왜이리도 잠이 많았던지

참고서및 수련장 산다고 속이고 돈들고
만화가게로 직행하던 그때 그시절

학교와 선생님 몰래보던 영화가 더욱 더 재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려운 그때 시절이였지만 어머니들은
장남이라고 때로는 장조림도 싸주셨다

신문지나 빈병을 가져가면 번데기 아저씨는
빙 돌아가는 뽑기 판을 한번 찍게 해주셨다
 
인성 교육이 위분 잘모시는 예의가
습관화 되어있는 착한 학생들이 많던 그시절
 
교실 마룻바닥에 염색을하고 양초와 색필가루로
마루바닥을 광내고 미끄럼 타기도 했던시절

왼쪽으로 (좌측)으로 통행하면 공산당이라고
생각했던 시절

말썽 꾸러기 어린들은 가끔씩 친구와 싸우기도 하였다
 
 
 
용돈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그시절
버스 회수권으로떡복기를 사먹기도 하였다.
 

성냥통



도시락


물려받은 양은 도시락..

 



그시절은..국민학교 산수, 사생,국어 노트등..


물놀이


영철아..그쪽에 잘좀 잡아봐라~


수박서리

 ㅋㅋ몰래 먹으니 더 맛있다..

 

 

말타기놀이

교실난로

 

 

우리 어릴적엔

아저씨! 우리 폼나게 찍어줘요ㅋㅋ..


집으로 이랴..
 
 
 



함께감상해요. 곡성


일반사진 2010-06-0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16592.html

곡성교회 카페 갔다가 넘 이뻐서 모셔 왔습니다 ...함께 감상해요... | 자유 게시판

이전 페이지로

작은감자 작성자의 블로그로... 2010-05-20 17:20:07 | 조회 56 | 댓글 2

http://cafe.chch.kr/gwangju/1274343393










    

수련밭에 봄이 무르익었습니다


     빨강, 노랑, 하양, 분홍꽃들을 바라보며 감탄사가 절로~~^^


     수련에 반해 수련그림만 3백여점 남겼다는 모네의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그림은 못 그리고 대신 사진만 몇 장 찍었지요.


     다른 사람들은 시방 고추 심고, 깨심고 난리들인데


     저희는 멀쩡한 논 한 다랑이에 물잡아 수련심어놓고


     사진찍고 감상하는 여유를 부립니다.


     이쪽 말로 뻘짓꺼리지요.


     하긴 뭐 우린 이게 농사랍니다.


     아깝긴 하지만 녀석들이 많이 많이 팔려나가야 되는데...


     며칠전부터 현수막을 내걸자고 둘이서 상의하는 중입니다.



곡성교회카페  http://cafe.chch.kr/gs2008/1274340810&page=1

 



사도신경이란...


진리변호 2010-06-0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16590.html

 

사도신경이란?


사도신경이 아닌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어야...


언제부터인가 한국 개신교 안에는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나 교회들을 이단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것은 사도신경과 기독교 신앙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와 같은 시도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536>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장로교 창시자인 존 칼빈이 쓴 <기독교 강요>는 사도신경을 토대로 했으며, 이 책의 주된 목적은 개신교도는 사도신경에 충실하기 때문에 이단으로 간주될 수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A.M. 렌위크, A.M. 하만, 오창윤 역, <간추린 교회사>,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0, p.118.] 따라서 <기독교 강요>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사도신경을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으로 믿게 되는 것이다. 전 <현대 종교> 대표인 고 탁명환 씨도 존 칼빈의 영향을 받아 그의 저서 <기독교 이단 연구, 1987>에서 이단에 대해 정의하기를, "첫째, 사도신경의 신앙 고백 여부를 가지고 이단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p.75).


그러나 사도신경같이 인간이 만든 교리를 가지고 이것대로 하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명백히 비성경적인 것이다. 전 세계의 어떤 침례교회에서도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다.(한국의 교단 침례교회는 제외) 따라서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 교회들을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전 세계에 있는 침례교회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과 같다.


얼마 전, 필자는 한 교회의 청년부 예배순서를 보았다. 거기에는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신앙 고백"이라고 적혀 있었다. 실제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사도들의 신앙 고백이며, 우리의 신앙 고백"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성경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살펴보아도 사도신경을 사도들이 직접 썼다거나 가르쳤다는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역사적으로 신조들은 사도신경 이외에도 니케아 신조(A.D. 325), 루피누스 신조(A.D. 390), 칼세돈 신조(A.D. 451) 등 여섯 종류가 넘는다. "사도신경"이란 이름은 라틴어(Symbolum Apostolicum)에서 유래하였는데, 이것을 영어로 번역하면 "The Apostles' Creed"이다. 신경이란 "우리가 믿어야 하는 신조"란 뜻이다.]


사도신경의 유래


"사도신경"이란 이름이 처음 사용된 것은 A.D. 390년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글에서였다. 그리고 이 사도신경을 범국가적으로 사용하게 한 것은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A.D. 742-814) 때였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서방교회 혹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 전수되었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사용되었다. [이형기, <세계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 서울, 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1991, p.15 ] 반면 동방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사도신경을 결코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채택한 바가 없었고, 그 대신 니케아 신조(A.D. 325)를 택하여 사용했다. [옥스포드 기독교회 사전, p.395.] 동방교회가 사도신경을 쓰지 않는 이유는 바로 로마 카톨릭의 권위주의적인 독선이 사도신경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신경을 배척하고 내용이 거의 비슷한 니케아 신조를 택하게 된 것이다.


사도신경의 내용(원문과 대조)


그러면 사도신경의 내용을 보면서 하나씩 짚어 보도록 하자.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I beliven in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quck judge the live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Ghos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첫째,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대목이 있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이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케 한 폰티오 빌라도에 대하여 분한 감정을 품고 있다. 물론 주님은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셨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빌라도에게만 고난 받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주님이 더 고난 받으신 것은 그분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서였다. 주님은 그들의 왕으로서 그들에게 왔으나 그들은 자기들의 왕을 거절했다(요 1:11). 주님은 가족들에게 배척받으셨고, 유대인들에게 공생애 기간 중 지속적으로 배척받으셨으며, 마침내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치는 자기 백성의 음성을 들으신 것이다. 그렇다고 주님의 십자가 처형의 책임을 전적으로 유대인들에게만 돌린다는 것은 아니다. 그 책임은 분명히 우리에게도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의 죄들을 용서하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5:3, 요 1:29). 그러므로 그분께 고난을 당하도록 한 것은 빌라도의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죄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사도신경을 고백하다보면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빌라도에 대한 적대감만 솟구칠 뿐, 내 죄에 대한 애통함은 전혀 없게 되는 것이다. 신앙 고백을 하고 싶으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내 죄 때문에 죽으시어"라고 고백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아마 사도들이 신앙고백을 했다면 당연히 그렇게 고백했으리라.


한 가지 우스운 것은 그리스 정교회나 시리아 교회가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도 이 문제 때문이라는데, 이유인 즉, 그 교회들은 빌라도의 아내인 클라우디오 프로클라(Claudiz Procla)를 마태복음 27:19에 근거하여 성녀의 반열에 모시고 있기 때문에 빌라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수영, <새교회사1>, 서울: 규장문화사, 1994, p.74. ]


둘째, 그래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표현에 대해 영문 사도신경에는 "지옥에 내려가셨다가"(he descended into hell)라는 표현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사도신경에는 그 문구가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삭제되어 있다. 물론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영문 사도신경에 따라서가 아니라 성경에 근거해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을 믿는다(엡 4:9, 벧전 3:18; 4:6). 터툴리안(Tertullian)이나 폴리캅(Polycarp) 등 여러 다른 교부들도 예수님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것을 언급했다. 이들은 사도신경을 고백한다 하면서도 왜 이 부분을 삭제했는가? 그도 그럴 것이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개역한글판성경>과 변개된 영어 성서들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지옥 자체가 삭제되어 있다(막 9:44,46).


셋째, "거룩한 공회와"라고 되어 있는 문구에 대한 영어 표현은 "거룩한 카톨릭 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이다. 그러니까 사도신경을 외우는 사람들은 매주 로마 카톨릭 교회를 믿고 있는 것이다. 알다시피 "카톨릭"이라는 말은 성경적인 용어가 아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러한 말은 없다. 더욱이 교회사적으로 살펴보면 카톨릭 교회를 거룩한 교회라고 도저히 부를 수 없다. 암혹 시대에, 특히 12-13세기 두 세기 동안만 하더라도 그 교회는 5,000만 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을 죽였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모두 카톨릭 교회가 거짓된 교회라고 말한다. 존 칼빈이나 마틴 루터나 존 웨슬리까지도 모두 하나같이 카톨릭 교회는 거룩한 교회가 아니며, 적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말하였다. 그런데도 그들의 후예라고 일컫는 개신교회들은 하나같이 카톨릭 교회를 "거룩한 교회"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신경을 만든 카톨릭 교회가 자기들만이 지상에서 유일한 교회이므로 자기들 교회의 결정대로 믿고 따르라는 내용을 포함시킨 것인데, 여기에 개신교회들이 기만당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개신교인들은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거룩한 공회"라는 말로 바꾸어 쓰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공회"라는 말도 성경에서는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 말이다. 예수님도 공회에 끌려가셨다(마 26:59, 막 15:1). 제자들과 스테판, 바울 등도 공회에 끌려갔었다(행 5:27; 22:30). 공회야말로 마귀가 맡긴 일을 수행하는 곳, 즉 성경의 진리가 전파되는 것을 반대하는 곳이며, 결코 거룩하지 못한 곳이다. 그런데도 개신교회에서는 예배 때마다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the Communion of Saints)라는 대목에서 주의할 점은 여기서 교통이란 주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교제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도신경에서의 "성도들과의 교통"은 죽은 성인들과의 교통을 말한다. 이 말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를 정확히 드러내는 말이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교제"라는 것을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죽은 성도들에게까지 확대한다. 따라서 그들은 사도신경을 성자숭배와 죽은 사람에게 기도하는 그들의 교리적 근거로 오용하고 있는 것이다. [Stephen Benko, The Meaning of Sanctorum Communio, Napervill: Alec R. Allensoninc, 1964, p.118.]


성경적인 의미에서 "saints"는 "성도"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전 1:2). 하지만 카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saints"는 "성자", 즉 죽은 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뒤에야 특별 심의를 거쳐 서품되는 특별한 사람을 가리키는 비성경적인 개념이다. [이기정 편저, <교리, 전례, 용어 해설>, 서울, 카톨릭 출판사, 1987, pp.129-130.] 성경은 죽은 자와 교통하는 것은 마귀적인 것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레 19:31; 20:27, 신 18:11-12).


결론적으로, 오늘날 개신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변개된 신경이며, 전혀 사도들에 의해 전수된 것이 아니다. 또한 사도신경은 기도의 특징을 하나도 못 갖추고 있기 때문에 예배 시간에 눈감고 외울만한 성질이 전혀 못된다. 단지 불신자에게 "믿노라."고 하는 고백일 뿐이다. 사도신경을 아무리 많이 암송해도 거듭나지 않는다면 구원받지 못한다. 교회사적으로 살펴보아도, 사도신경 때문에 순교 당했다는 사람도 없고 신앙이 성장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전혀 불필요한 것이며, 예수님께서 금지하신 헛된 반복에 불과하다(마 6:7). 우리에게 신조라는 것이 있다면 오직 성경뿐이다(딤후 3:15-16). 그것만이 우리의 정통 신조이다. 따라서 아직도 사도신경을 가지고 이단 시비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다(막 7:13). 변개된 성경에 잘못된 신경, 그러니 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정상적일 수 있겠는가? 


출처 : Tong - 형제사랑님의 ㅣ신학과 신학자통

            http://blog.localchurches.kr/tb/shepherd/11415   에서 펌


한국전 필름


동영상 2010-06-04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k505/1658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