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북한 평양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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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북한 평양의 거리

이 포스팅은 2010. 3. 23일자로 업로드한 것으로  최근 북한을 다녀온 닉네임 Kernbeisser이라는 사람이 찍은 생생한 사진으로 그의 블로그 에서 발췌하였다.
사진을 보면 모든 면에서 낙후되고 열악한 환경의 북한의 사실적인 일상을 볼 수 있으며 곳곳에서 사회주의의 선전문구가 나부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신격적인 존재인 김정일의 생일이 명절로서 거국적인 축하 슬로건이 장마당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질곡스런 얼굴에 대비되어 아이러니컬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사진은 2010. 3. 23일자로 업로드한 것으로 최근의 북한 평양의 모습 
 

 
추운 날씨에도 옥외에서 이발을 하고 있다.
 
 
대동강.  오래된 낡은 준설장비.

 
대동橋 부근의 여성 교통요원.

 
정오동.

 
정오동.


 
평양 정오동 거리.   노점상.

 
CNC 세계를 향하여...
!
 
평양 야간 상점.

 
대학가의 식당.

 
평양 문흥조선옷점.

 
2010.  3. 1.!


 
평양  보! 통門.  2010.  3.

 
평양 선교각.

 
신형 트롤리 버스.  2012년 까지 대체할 예정이라고 한다.

 
얼어붙은 대동강.

 
만수대 거리.   2010 새해맞이 꽃을 장식하고 있다.
!
 
주체사상탑 앞에서 결혼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
 
평양 비파거리.


순교의 역사와 함께 했던 로마의 콜로세움 내부


일반사진 2010-06-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16498.html

콜로세움은 '영원한도시'로마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콜로세움

로마의 원형극장(콜로세움)이 세계 7대 불가사의중  두번쩨로 들어 갑니다.
로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유적지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라고 합니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입니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에는 두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콜로사레에서,
또 하나는 경기장 옆에 네로 황제가 세운 높이 30m의 거대한
금도금 상 콜로소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인데
전자의 설이 유력합니다.

콜로세움은 기원후 72년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시대의
이완된 국가 질서를 회복한 후, 네로의 황금궁전의 일부인 인공호수을
만들었던 자리에 착공하여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때 완공하였습니다.
완성 축하를 위해 100일 동안 경기가 열렸으며, 그 때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었다고 합니다.
장대한 타원형 플랜이 있는 투기장은 아치와 볼트를 구사한 로마
건축기술의 결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조물로서 거대한 바위 축대위에
축조되었으며, 이 축대는 점토질의 인공호수위에 설치되어 지진이나
기타 천재로 인한 흔들림을 흡수 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약 5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제국 최대의
투기장이었습니다.
콜로세움은 최대 지름188 m, 최소 지름 156 m, 둘레 527 m,
높이 57 m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인데, 1층은 토스카나 식,
2층은 이오니아 식, 3층은 코린트 식의 둥근기둥으로
각각의 아치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내부는 칸칸마다 나누어진 맹수들의 우리 위에 나무로 바닥을 만들어
지상과 지하를 분리시켰는데 지하의 방에는 맹수뿐만 아니라 검투사,
사형수들이 갇혀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는 검투사의 경기, 맹수와의 싸움이 즐겨 행해졌으며,
심지어는 장내에 물을 채워 전투를 하는 모의 해전 등도 벌였습니다.

 

제정 초기 크리스트교 박해 시대에는 많은 신도가 이 콜롯세움에서
야수에 의해 순교의 피를 흘리기도 했습니다.
콜로세움은 완공된 이래 300여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사투가
계속 벌어지다가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에 따라
마침내 처참한 역사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그 후 콜로세움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입기도 하고, 중세 교회를 짓는데
재료로 쓰이기도 해 외벽의 절반이 없어지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18세기 경 교황의 명에 따라 기독교 수난의 현장으로
복구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세계7대불가사이 중의 하나로

로마의 상징이 되어 버린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유적지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이탈리아에서는 콜로세오(Colosseo)라고하며,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




 
 
 

로마의 콜로세움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네로의 거대한 동상(colossus)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하지만, 정식 명칭은 ‘폴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폴라비우스 황제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하였다. 중세에는 ‘거대한 건축물’의 상징이었다



 



 

 

공사가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콜로세움은 한쪽 외벽이 크게 무너져내린데다 곳곳이 상처투성이라서

그걸 메꾸고 보수하는 작업을 하고있는데,

뒤에 보이는 모습이 바로 그 현장.


 



 



 

 



 

 

 

콜로세움은 지진에 의해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고 중세에는 교회를 짓기위해

외벽의 절반을 가져가는 등의 수난을 겪었고.

18세기 무렵 교황은 기독교의 박해를 기억하는 의미로 콜로세움을

재건축없이 보존하라 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고 있습니다.


 

 

 

콜로세움은 로마가 4세기경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사용하지 않기 시작하면서
 

지진과 무관심 속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또 중세에는 큰 건물과 교회를 짓기 위한 채석장이 되면서 외벽이 많이 훼손되었다.



 

 



 

 

콜로세움의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아치형 구조로 되어있다.



 

 



 

 



 



 

 



 

 



 



 

 



 



 

 



 

 



 

 


콜로세움은 돌과 콘크리트로 세운 완전한 독립구조물로서
 가로, 세로가 각각 190m, 155m에 이르며 5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 경기장에서 수천 회에 걸친 검투사 시합과, 맹수들과 인간의 싸움,
모의 해전 같은 대규모 전투장면이 실연되었다.


중세 때에는 낙뢰와 지진으로 손상되었으며
대리석으로 만들었던 좌석과 장식물들은 남아 있지 않다.



 

 



 

 

콜로세움의 내부. 타원형 투기장 내부는 관람석과 아레나로 구성된다.

아레나의 마룻바닥은 없어지고 맹수들을 가둬두었던 우리만이 앙상한 몰골을 드러낸다.


 

 

 

콜로세움은 지하 2층까지 있어서 검투사 등의 대기장소로 쓰였는데,

마루가 붕괴되는 바람에 지하 구조가 앙상하게 드러나보이는 것이다.
 

 

 

 

콜로세움 내부의 관중석과 격투장.



 

 



 



 

 

 

원형투기장의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는 여느 문처럼 아치형이다.

일단 안으로 들어서면 육중한 벽 사이를 뚫고 좌우 양쪽으로 통로가 나타난다.

통로 역시 아치형 구조다. 옛날에는 이 통로를 따라 입장객이 자기 좌석을 찾아갔다.



 

 

 

지금 타원형의 아레나(라틴어로 ‘모래’란 뜻이나 여기선 ‘무대’)는

앙상한 몰골만 드러내놓고 있다.
원래 마루였던 바닥은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지고

그 아래 맹수들을 가두었던 우리만이 그대로다.
관람석 또한 허물어진 채 붉은 벽면을 노출하고 있어 거칠고 투박하다.
재미있는 것은 지난 2000년의 세월을 이기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들은

한결같이 콘크리트 구조물이란다.



 

 



 

 

 

글래디에이터 같은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한 검투영화를 보면

지하에서 선수가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는데 저 아랫공간이 바로 그 장소



 

 



 



 

 

 

아래로 벽 같은 것이 길게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저것이 콜로세움의 지하구조.



 

 

더위에 지쳐 그늘을 촬영과 명상에 젖어 있는 관광객



 

넓은 공간 아래로 벽 같은 것이 길게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저것이 콜로세움의 지하구조.

콜로세움은 지하 2층까지 있어서 검투사 등의 대기장소로 쓰였는데,

마루가 붕괴되는 바람에 지하 구조가 앙상하게 드러나 보인다.
 

 

 

가운데 사진 중간에 넓게 펼쳐진 공간이 보이고


저 멀리 있는 문으로부터 저 공간까지 오는 길이 나있는 것이 보인다.


넓은 구간은 바닥면의 3분의 1 정도를 덮고있는데,콜로세움에서 공연장



 

 

 

아취 사이로 포로 로마가



 

 



 

 



 

 

 

콜로세움 자체 박물관



 

 



 



 



 

 



 



 

 

 

- 에스퀼리노 언덕과 첼리오 언덕, 그리고 팔라티노 언덕 사이 사이에서

그 거대한 위용을 보여주고 있는 콜로세움을 야간에 ? 을것을 기약하며

 



                         파이디온님

 



상대방 핸드폰 꺼져 있으면 바로 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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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 핸드폰 꺼져 있으면 바로 끊으세요.


 

 

핸드폰을 꺼논 걸 모르고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런 멘트가 나옵니다.

"고객의 전원이 꺼져 있습니다. 음성사서함으로 연결시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사실 이 말이 나올 땐 요금이 안 올라가는 줄 알고 있었죠.


음성사서함을 이용할 때만 올라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공중전화로 상대방의 핸드폰이 꺼진 줄 모르고 걸었는데 황당했습니다.


"고객의 전원이 꺼져 있습니다. 음성..."


이러는 순간 돈은 이미 공중전화가 먹어 버렸습니다.

 

음성메세지를 사용한 것도 아니고 "고객의 전원이 꺼져있습니다"

 

이 말이 끝나면 바로 돈을 삼키는 공중전화.


'음성'에 '음'자만 나오면 바로 먹습니다.

 

왜 그런가 해서 공중전화 부스센터에 전화를 해 보니


모든 SK, KTF 등등 모든 핸드폰 업체들이


"고객의 전원이 꺼져 있습니다" 이 말까지만 무료서비스가 되게 하고,


그 다음 멘트부터는 무조건 요금이 부과되게 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음성사서함으로 연결시 통화료가 부과됩니다"는 '음' 자만 나와도

 
통화료가 부과된다는 얘기죠.

 

음성 사서함에 들어가 음성을 남겨야 통화료가 부과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모든 국민들이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을까요??


아마 모르는 분들이 태반일 것입니다.

 

이렇게 갈취한 돈만 해도 년간 수천억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고객의 전원이 꺼져 있어 연결이 안됩니다" 다음에


"이후로 요금이 무조건 부과됩니다"라는 멘트를 더 넣으면


고객이 잘 알고 전화를 끊을텐데......


'음성' 자만 나와도 먹어버리는 공중전화!

 



워치만니-역동적인 구원


워치만니 2010-06-02 / 추천수 0 / 스크랩수 2 http://blog.chch.kr/k505/16490.html

16세기 초에 유럽과 미국의 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갔습니다. 신실하게 수고한 시간들과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 Boxer Rebellion)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순교는 20세기 초 중국에서의 주님의 움직이심을 더욱 촉진하여 극적으로 전진하게 하였습니다. 주님이 그 ‘지역에서 자란’ 전파자들을 많이 세우셨고, 특별히 1920년대에 고등학생과 대학생이라는 중국의 새로운 세대를 많이 얻으셨습니다. 많은 똑똑한 학생 중에서 주님은 니쑤주(워치만 니)를 부르시고, 이 시간 동안 그분의 일을 하도록 장비시키셨습니다.

영어 이름이 헨리 니(Henry Nee)였던 니쑤주는 1903년 중국 푸저우(福州)에서 이 대(代)째 그리스도인인 부모로부터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푸저우 미(美) 조합교회 대학에서 공부를 했고, 푸지엔성(福建省) 북부의 조합주의자들 가운데서 첫 번째 중국인 목사가 되었습니다. 니쑤주는 태어나기 전부터 주님께 헌신되었습니다. 아들을 낳기 원했던 그의 어머니는 주님께, “만일 당신이 제게 아들을 주신다면 그를 당신께 드리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셨고 곧 니쑤주가 태어났습니다. 훗날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네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가 이미 너를 주님께 드렸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구원 받기 전에 니쑤주는 말썽꾸러기 학생이었지만 뛰어나게 명석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푸저우에 있는 성공회의 삼일대학(Anglican Trinity College)을 졸업할 때까지 항상 반에서 일등을 하였습니다. 그는 장래에 대한 커다란 꿈과 계획이 있었고 세상에서 크게 성공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복음을 알고 있던 니쑤주는 만약 그가 구원 받기 위하여 주님을 영접한다면 또한 그분을 섬겨야 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얼마간의 몸부림 후에 니쑤주는, 고등학생이었던 17세 때에 역동적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 받은 바로 그 때, 이전에 세웠던 그의 계획은 다 허무한 데로 돌아갔으며 장래의 성공도 완전히 포기되었습니다. 그가 간증하기를, “내가 구원 받은 저녁부터 나는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으로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주님의 위임을 수행하도록 그분에 의해 일으켜 세워진 후, 파수꾼을 뜻하는 워치만(Watchman)이라는 새로운 영어 이름과 파수꾼의 징소리라는 뜻의 토셍이라는 중국어 이름을 새로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어두운 밤에 경고의 징소리를 울리도록 일으켜 세워진 파수꾼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워치만니-장비와 훈련


워치만니 2010-06-02 / 추천수 0 / 스크랩수 2 http://blog.chch.kr/k505/16489.html

워치만 니는 신학교나 성경 학교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그리스도와 영의 일과 교회에 관한 그의 풍부한 지식은 성경을 연구하고 영적 서적을 읽어서 습득한 것입니다. 스무 가지 다른 방법으로 부지런히 연구하여 워치만 니는 성경에 아주 익숙하게 되었고 빛 비춤을 얻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초기에 사역할 때 수입의 삼분의 일은 자기 필요를 위해 사용했고, 삼분의 일은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사용했으며, 나머지 삼분의 일은 책을 사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는 일 세기부터의 거의 모든 탁월한 기독교 저서를 다 수집하여 최고의 그리스도인 서적을 삼천 권이 넘도록 수집하였습니다. 그는 적절한 자료를 택하고 이해하고 분별하고 기억하는데 뛰어난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 눈에 한 권의 책의 요점을 쉽게 붙잡았습니다. 워치만 니는 교회사(敎會史)를 통하여 유익한 영적 요점들과 영적 원칙들을 모두 수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그리스도인 생활과 교회 생활에 대한 그의 이상과 실행 안으로 종합해 내었습니다. 워치만 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 저자로부터 많은 빛 비춤과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저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체적인 빛 비춤
근원
1. 구원의 확신
형제회의 저자인 죠지 커팅(George Cutting)
2. 생명 죤 번연(John Bunyan)의〈천로역정〉
귀용여사의(Madan Guyon) 전기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의 전기
기타 신비주의의 저서
3. 그리스도
벨레트(J. G. Bellett)
트럼볼(Charles G. Trumbull)
심프슨(A. B. Simpson)
스팍스(T.Austin Sparks)
그 밖의 저자들
4. 그 영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의〈그리스도의 영〉
5. 사람의 세 부분(몸과 혼과 영)
제시 펜 루이스(Jessie Penn-Lewis)
메리 멕도나휴 (Mary C. McDonough)
6. 믿음
죠지 뮬러(George Muller)의 자서전
7. 그리스도안에 거함
앤드류 머레이
허드슨 테일러의 전기

8.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주관적인
    면과 영적 전쟁

제시 펜 루이스
9.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분의 몸
스팍스
그 밖의 저자들
10.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메리 멕도나휴
11. 교회
다비(John Nelson Darby)
기타 형제회 교사들
12. 예언
고벳(Govett)
팬톤(D. M. Panton)
펨버(G. H. Pember)
기타 형제회 교사들
13. 교회사
폭스(John Foxe)
브로드벤트(E. H. Broadbent)
그 밖의 저자들
14. 성경 해석과 다른 일반적인 진리
다비
형제회


 워치만 니는 전에 성공회 선교사였던 바버(M. E. Barber) 자매를 통하여 이러한 많은 서적을 알게 되었고 그녀를 통해서 그의 초기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많이 다듬어지고 온전케 되었습니다. 주로 바버 자매와의 교통을 통하여 워치만 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온전히 신성한 생명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양육을 통하여 일보다는 생명을 주의하는 것과 그의 생명인 그리스도에 의해 사는 것을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