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질병, 교파, 지방 교회들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반대, 감금.
워치만 니가 사역할 초기에 중국의 경제적 상황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가 말씀 안에서 본 것은 그가 그의 삶뿐만 아니라 주님의 일의 모든 방면을 위하여도 하나님 안에서 순수하고 단일하게 믿음으로 살도록 훈련받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개인이나 단체에 의해 고용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상하이에서의 그의 사역 초기에, 때로는 만두 외에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워치만 니는 또한 자주 병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1922년 초부터 그의 사역의 첫 십일 년 동안 그는 그를 도울 수 있는 아내가 없이 홀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폐병을 앓게 되었는데, 그는 이 병으로 인해 수년 동안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삼십 세였던 1934년에 그의 참된 ‘돕는 배필’인 장 핀훼이(張品蕙)와 결혼했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아이는 주지 않으셨습니다. 후에 그는 위(胃)에도 문제가 있었고 심장병의 일종인 협심증도 생겼습니다. 그의 심장병은 끝까지 치료되지 않았고 이 심장병으로 언제 죽을지 몰랐었습니다. 사실, 많은 때에 그는 신체적인 힘으로 사역하지 않고 부활 생명으로 사역했습니다.
성경을 기준하여 교파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분열하므로, 잘못되었다는 그의 믿음도 그로 고통 받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에 대한 그의 견고한 입장은 교파들에 대하여 반간증이 되었으므로, 이것은 그에게 많은 고난을 야기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멸시하고 비평하고 반대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그에 대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도 하고 잘못 알리기도 하였는데 심지어는 워치만 니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묘사한 워치만 니는 나 자신도 정죄한다.”
워치만 니가 받은 고난의 또 다른 근원은 지방 교회들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이었습니다. 이 고난은 훨씬 심각했습니다. 그들의 이의와 성숙하지 못함과 무능함과 완악함과 야심과 불순종으로 커다란 문제들을 야기하였습니다. 1922년 워치만 니는 자기 고향에서 교회 생활을 실행하기 시작한지 이 년 후에 그의 동역자에 의해 잠시 동안 추방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성경의 진리를 위해 서서, 인도하는 한 동역자가 교파 선교 단체의 안수를 받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모임을 갖고 있던 대다수의 성도들은 모두 니 형제님 편에 서있었지만 주님은 그가 자기를 위해 변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천연적인 사람에게는 정말 고통이었습니다.
고통의 마지막 근원은 무고(誣告)와 감금이었습니다. 워치만 니는 1952년 3월 공산당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때에 체포되어 심문 받고 무고당하여 1956년에 십오 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워치만 니는 슬픔과 고난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린양을 따르는 길에서 그는 모든 고난을 견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고난들을 통하여 많은 공과들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고난들은 단지 그가 주님을 의지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육체와 자아와 혼과 천연적인 생명을 다루는 데에도 유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러한 다루심에 순종했기 때문에 그는 단순한 가르침들이나 교리를 전하지 않았고 그의 말씀에는 그가 고난을 통하여 얻은 실재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얻은 체험은 그의 사역 아래 있던 사람들에게 측량할 수 없는 도움을 주었고 모든 지방 교회들 안에서 풍성한 유산, 그가 최고의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유산이 되었습니다.
그가 받은 고난들은 또한 그가 주님으로부터 한 단계 더 전진된 계시들을 받도록 도왔습니다. 어떠한 고난은 종종 그에 상응하는 계시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고난은 그에게 주님의 계시가 되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정결케 되고 다루심 받고 부서지고 신성한 생명으로 성령에 의해 조성되었습니다. 고난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러한 체험들을 통하여 바울과 같이 그도 주님의 계시를 받도록 준비되고 적절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워치만 니의 가장 가까운 동역자는 위트니스 리였습니다.
남침례교인으로 자라왔던 위트니스 리는 19세였던 1925년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해 위트니스 리는 성경을 철저히 알기 위해 추구하고 있었고 워치만 니의 글과 출판물이 성경 진리에 관하여 가장 뛰어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워치만 니와 서신으로 교제하기 시작하였고 그보다 두 살 밖에 많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는데 놀랐습니다.
그들은 1932년 위트니스 리가 워치만 니를 치푸로 초대했을 때 처음 만났습니다.
그 때 워치만 니는 지식보다는 신성한 생명을 더 강조했는데 그로 인해 위트니스 리는 주님과 더 깊은 교통을 가지고 더 친밀해졌습니다.
그 같은 해에 믿는 이들이 위트니스 리의 집에서 모이기 시작했고 그 다음 해까지 이 집회는 번성했습니다.
교회의 필요로 인해 두 사람 다 주님께서 위트니스 리가 전 시간으로 봉사하기를 갈망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그 시간 동안 워치만 니는 계속해서 위트니스 리를 온전케 하고 시험하여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중국에서의 주님의 일은 반드시 하나여야 하고 주님은 워치만 니를 통하여 상하이에서 그 일을 시작하셨음을 깨닫고, 1934년 상하이로 이주하여 워치만 니와 더욱 가깝게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수고하고 고난 받고 사역을 확장시키고 계시를 받고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이 형제는 워치만 니의 출판물인 《기독도보(基督徒報)》를 1934년부터 1940년까지 편집했고 워치만 니의 결혼식 때 신랑 들러리를 섰습니다.
공산주의의 침범으로 전멸될 위험이 있자 워치만 니는 위트니스 리와 다른 몇몇을 1949년 대만으로 보내어 그 곳에서 사역을 계속하게 했습니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1950년 3월 홍콩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는데 이는 위트니스 리가 워치만 니를 처음 알게 된지 이십오 년 후였습니다.
그 때 두 사람은 워치만 니가 대륙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하여 긴 교통을 가졌습니다.
그가 위트니스 리에게 “대륙에 그렇게 많은 교회들이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는 그들을 돌보기 위해 반드시 돌아가야 하고 주님의 간증을 위해 그들과 함께 서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출처] 워치만니 - 위트니스리와의 관계|작성자 크리스챤
워치만 니는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이 붙들고 있는 성경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고, 성경의 용어가 영감으로 되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삼일,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서 구별이 있으나 완전히 하나이시고,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동시에 존재하시며 상호 내주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자신으로서, 사람의 생명과 신성한 생명을 둘 다 가진 사람으로 성육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속을 완성하시고, 제 삼일에 몸을 지니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셨으며, 보좌에 올라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시고 만유의 주로 세워지신 바 되셨으며, 다시 오셔서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들어올리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며, 땅에 천년 왕국을 세우실 분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분의 구속하는 피에 의해 씻은 바 되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성령으로 거듭나며,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는 이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또한 그는 모든 믿는 이의 운명이 그리스도의 몸이자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출처] 워치만니 - 말씀의 사역 - 그리스도인의 믿음|작성자 크리스챤
주님은 워치만 니가 공산당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중국 대륙에 남아 있고 그곳에서의 주님의 사역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사도행전 20장 24절의 사도 바울과 같았습니다.
니 형제님이 홍콩을 떠나기 전, 이 형제님은 여러 차례 그에게 대륙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니 형제님은, “한 어머니가 집에 불이 난 것을 알면서도 그녀 자신은 집 밖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면, 그녀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분명 위험한 줄을 알면서도 그 집 안으로 뛰어 들지 않겠습니까? 비록 내가 돌아가면 위험이 따르고 해(害)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곳에 아직도 많은 형제자매들이 있는데 내가 어찌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형제님은 그를 세 번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그가 머물던 쫜스산(鑽石山)의 숙소까지 동행하였습니다.
워치만 니는 1952년 삼월에 지방 교회들 가운데 있는 그의 인도 직분과 함께 그리스도안의 믿음을 시인했기 때문에 공산당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심문 받고 무고당하여 1956년에 십오 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오직 그의 아내만이 그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나긴 감금 기간에 그가 무엇을 체험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지만 그의 마지막 여덟 통의 편지는 그가 감금 말기에 친필로 쓴 것으로서, 단지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약간이나마 그가 감금 기간에 받은 고통과 느낌과 소망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감옥의 검열로 인하여 그는 편지에 주님의 이름을 언급할 수 없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썼던 마지막 편지에는 주님 안에서의 그의 기쁨을 언급했습니다.
“저는 병중에서도 여전히 기쁨을 간직하고 있으니 …” 워치만 니는 빌립보서 4장 4절의 바울의 말을 실행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1972년 5월 30일, 그는 감금 중에 죽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는 비참하고 구차하게 죽었습니다. 그의 임종시에 그 신변에는 친척이나 주 안에서의 형제나 자매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의 죽음과 장례에 대한 정식 통보도 없었고
1972년 6월 1일에 그는 화장되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 보다 6개월 더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녀의 큰언니가 그의 죽음과 화장 소식을 통보 받았습니다. 그녀가 그의 유골을 받아서 그의 고향인 저장성(浙江省) 하이닝셴(海寧縣) 관후(觀湖)라는 곳에 그의 아내의 유골과 함께 안치했습니다. 1989년 니 형제님과 자매님의 유골은 장시성(江西省) 쑤저우스(蘇州市) 샹산(香山) 공동묘지로 옮겨져 ‘그리스도인 묘지’에 안치되었습니다.
다음은 니 형제님의 조카손녀가 기술한 것으로 니 형제님의 유골을 거둘 때, 바로 그녀가 니 자매님의 큰언니 곁에 함께 있었습니다.
1972년 6월, 우리는 농장으로부터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나는 큰 이모할머니와 함께 농장으로 급히 갔는데, 그곳에 도착해서야 우리는 비로소 그들이 할아버지를 화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없이 그분의 유골 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분은 베개 밑에 종이 한 장을 남겨 놓으셨는데, 그 위에는 매우 떨리는 손으로 적은 몇 줄의 글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분의 일생으로, 그분이 죽기까지 붙잡았던 진리를 증명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사람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것은 우주 가운데 가장 놀라운 사실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죽노라. 워치만 니.” 농장 간부가 이 종이를 우리에게 보여줄 때, 나는 이 글을 신속히 마음에 기억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할아버님은 돌아가셨지만, 그분은 죽기까지 충성하시고 피로 물든 면류관을 가지고 주님께로 가셨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분이 살아서 그의 아내와 함께 있기를 바랐던 마지막 소원은 이루어주시지 않았지만, 주님은 그분들이 주님 앞에서 재회하는 더 나은 것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워치만 니가 감금되어 있던 기간에도 그의 사역은 매이지 않았습니다(딤후 2:9). 주님의 주권아래서 그의 사역은 추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풍성한 생명공급으로서 전세계로 확산되어 왔습니다.
그의 궁극적인 부담은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장막인 교회들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땅에 속한 장막(물질적인 몸)은 무너졌지만 그의 마음속에 가득한 교회들은 단지 잔존할 뿐만 아니라 강건하게 자라 온 땅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워치만 니가 체포되던 1952년까지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해 중국에 400여개의 지방 교회가 세워졌었습니다. 게다가 필리핀과 싱가폴과 말레이지아와 태국에도 30개가 넘는 지방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오늘날 주님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풍성하고 신실한 사역으로 전세계에 2300개가 넘는 지방 교회들을 증가시키셨습니다
워치만니 조회 1 댓글 0 스크랩 0 2010-05-31 21: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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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집회가 끝나던 마지막 날 저녁, 나는 먼저 복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니 형제는 가족 앞에서 나에게 한 마디 작별의 말을 했다. 『그리스도는 오직 한 분이시지만 오늘 사역하는 사람들이 보는 관점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지고 말았네. 만일 여기에서 우리에게 계시가 없다면 우리도 이와 똑같이 실패하고 말걸세. 오늘 허다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그리스도와 접촉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의 뒤를 만지고, 손을 붙잡고, 주님의 옷자락을 찢기도 하네. 그러나 생명에 있어서는 주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일세. 주님을 밀던 많은 사람 중에서 혈루병 든 여자만이 생명 안에서 치료를 받았다네.
오늘 실지로 벧세다의 그리스도를 알고, 참으로 경험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적( 異蹟 )을 보고, 심지어 기적을 행하기도 하며, 엠마오에서와 같은 감동력을 사용할 수 있고, 그러나 이런 것은 다 중요한 것이 아닐세. 이 말은 내가 위 형제에게 하는 말일 뿐 아니라. 사역하는 모든 형제 자매에게 하는 말일세. 위 형제, 자네가 만일 사람들에게 계시로 본 그리스도를 공급해 주지 못한다면,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의 사역은 실패한 것일세.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하네.「내가 사역에서 중시하고 있는 것은 성경 이해 ( 理解 ). 지식, 은사, 기적, 권능인가. 아니면 계시로 본, 한분의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공급해 주는 것인가?」하는 걸세.
얼마 후, 니 형제는 복건성 고령산( 鼓嶺山 )에서 4 개월에 걸친 사역자 훈련을 시작했다. 매일 예닐곱 시간에 걸쳐 그로부터 말씀의 공급을 받았다. 이 집회는 내 영적 인식( 認識 )에 있어서나, 역사( 役事 )의 원칙에 있어서나, 생명의 성숙에 있어서나 또 한 번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왔다.
그 곳에서 그가 전한 말씀의 중점은 여러 방면이었다 :
(1)우리 영의 사용 (2)하나님의 말씀의 사역 (3)성경 읽기 (4)복음 전파 (5)초신자 인도 (6)교회의 사무 처리. 또 간증집회에서는 참석한 모든 사람이 간단한 간증을 했다. 간증후에 니 형제는 이 간증을 근거로 하여. 영적 진단을 하고 각 사람의 영적 문제를 드러내어 해결하는 길을 알려 주었다. 니 형제의 느낌은 예리했고, 진단은 정확했으며, 드러낸 것은 다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이 훈련 집회가 끝난 후 사역자들이 각지 교회로 갔을 때, 주님의 축복으로 중국의 각 지방 교회에 한 차례 큰 부흥이 일어났다.
1950년 초, 니 형제는 홍콩으로 왔고. 오래지 않아 이 상수(Witness Lee) 형제도 왔다. 하나님의 이 두 종이 동시에 한 지방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한다는 것은 정말 자주 있기 어려운 일이었다. 축복이 있어, 원래는 300여 명이 모이던 집회가 단 시일 내에 삼천 명으로 증가되었다. 이것이 홍콩 교회의 첫 번째 대부흥이었다.
얼마 후 니 형제는 귀국을 준비했다 그 때 시국( 時局 )은 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모두 그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 때 니 형제의 돌아가려는 의지는 참으로 굳은 것이었다.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에 가기 전에 그곳에 묶임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지만.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갔던 것이다. 나는 우리의 형제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가를 느꼈다. 그의 마음은 무거웠으나 그는 주님과 같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자기를 기다리는 것들을 두려워 하지 않고 그것들을 향해 갔던 것이다.
1952년, 니 형제는 진리로 인하여 공산당에게 구속되어 투옥되었고 20 년을 언도받았다. 이 20 년 동안 우리는 그의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다. 그의 부인이 세상을 뜨기 전에는 2 , 3 주마다 한 번씩 그에게 가서 몇 분간 만나고. 그의 일용품을 공급했다. 그러나 그 분( 부인 )은 1971년 11월,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니 형제의 심장은 보통 사람의 반 밖에 안 되어 장기간 심장병을 앓았으며 한 번 발작이 일어나면 심한 동통( 疼痛 )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환난 중에서도 그가 평생 사랑하고 섬겼던 주님은 한 번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1972년 여름에 소식을 들음으로써 6월 1일에 우리의 형제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수고를 그치고 쉬었고, 사역의 효과는 그를 따랐다( 계 14 : 13 ). 비록 그의 몸은 갇혔었고, 비록 그의 몸은 땅에 묻혔지만. 주님이 그에게 주신 말씀은 온 세계에 무한량하게 전파되었다. 그의 말씀으로 인해 많은 성도들이 공급을 받고, 계시를 보고, 교회가 건축되며, 허다한 성경 진리가 회복되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이 중히 쓰신 그릇이었다. 그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었다( 행 13 : 36 ). 그는 실지로 우리에게 본이 되고 그 자취를 따라오게 했다( 벧전 2 : 21 ). 영광을 주님께 돌린다.
1974년 봄 홍콩에서 편자(위광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