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수록된 메시지들은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영국 런던 및 유럽 대륙에서 전하신 주님의 종 워치만니 형제님의 설교 기록이다. 나중에 영국의 앵구스 키니어 형제(Angus I. Kinnear)가 정리하여 책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원본이 영어이다.
출판된 지 몇 년이 채 안 되어서 세계 각지에서 판매량이 오륙만 부에 달하였고 또한 이십여 가지에 달하는 언어로 이미 번역되었다. 이 메시지들 속의 생명의 방면은 그리스도인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도움을 준다. 특히 미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메시지들로 인해 생명의 전기를 갖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그리스도인 단체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단체 전체가 생명의 전환을 갖게 되었다.
오늘 형제들이 중국어로 번역하여 대만복음서원을 통해 출판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중국어를 아는 형제 자매에게 주는 도움이 영어판보다 적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주님께서 배나 축복하사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실제적인 인식과 더 진보된 체험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이 각지에서 더 자라고 확장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1963년 3월 25일뉴욕에서 위트니스 리
시작에서 우리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철저히 고려해 보기로 하자, 먼저 우리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겠다. 우리는 주님의 산상수훈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아들 외에 이런 생활을 실지로 살아 내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질문이 일어날 것이다. 이런 질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외에」라는 말이 바로 이 질문의 정답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는 특별한 일이나 기이한 일을 높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표준으로 삼지 않았다.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도인에 대해 하나님이 정하신 정상적인 생활의 원칙을 말하였다고 믿는다. 간략하게 말하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생명을 살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분은, 인간의 모든 필요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바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준다. 우리 몸에서 그분이 하신 모든 역사는 바로 우리를 제하고 우리를 그리스도로 대치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사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 사신다. 그러므로 여기에 두 가지의 대치가 있는 것을 본다. 하나는 우리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대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승리를 위해 우리 안에서 이루신 대치이다.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오직 하나, 즉 우리에게 그의 아들을 더욱 계시해 주시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크나큰 도움을 받을 것이고 많은 혼란을 피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로마서 8장을 이 문제를 연구하는 기점으로 삼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설명하고 또한 실제적이고 실험적인 각도에서 우리의 문제를 연구할 것이다. 먼저 우리는, 로마서의 앞의 여덟 장이 자연스럽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고 또 이 두 부분의 뜻이 현저히 구분된다는 것을 지적하겠다. 이런 지적만도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로마서의 앞의 여덟 장은 독립된 하나의 단락이다. 1장 1절부터 5장 11절까지는 이 단락의 전반부이고 5장 12절부터 8장 39절까지의 세 장 반은 이 단락의 후반부이다. 이 여덟 장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전·후반부의 주지(主旨)가 다름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전반부의 논의 중에서 우리는 복수의 죄(sins)가 특별히 현저한 것을 발견한다. 그런 반면에 후반부에서는 복수의 죄가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단수의 죄(sin)가 재삼 사용되며 다뤄지는 주제로 되어 있다. 왜 이런 변화가 있는가?
이것은 전반부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범한 죄들이기 때문이다. 이 죄들은 많을 뿐 아니라 일일히 열거할 수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다루는 주제는 죄의 본성이다. 이 죄의 본성은 우리 안에서 운행하는 일종의 본질과도 같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하든, 그것들은 다 이 죄의 본질이 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여러 죄들에 있어서 사함이 필요한 동시에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받아야 한다. 전자는 우리의 양심을 만지고 후자는 우리의 생명을 만진다. 만일 우리의 죄의 본성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설령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 할지라도 우리 마음 속에 항구적인 평강이 없다.
하나님의 빛이 처음으로 내 마음을 비출 때, 그분 앞에서 나는 내 범죄로 인하여 용서해달라고 그분께 부르짖었다. 죄사함을 얻은 후, 나는 새로운 것, 즉 나의 죄의 본성을 발견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를 범했을 뿐 아니라 또한 내 안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나는 나에게 범죄하는 천성이 있고 내 속에 범죄하려는 경향과 나를 유혹해 범죄케 하는 어떤 힘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 힘이 내 속에서 발동할 때 나는 곧 죄를 범하게 된다. 내가 이것을 위해 용서를 구하고 사하심도 얻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범죄한다. 그러므로 나는 죄 짓고 용서받고 또 죄짓는 악순환 속에서 살게 된다. 하나님의 사하심에 대해 내 마음에는 감사가 넘친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용서함만이 아니라 또한 구원하심이다. 나의 모든 행함을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고, 나의 본성을 위해서는 죄의 본성에서 구출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로마서의 앞의 여덟 장에서 우리는 구속의 두 방면을 본다. 첫째는 우리 죄들이 사함받는 것이요, 둘째는 우리가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받는 것이다. 이 두 방면을 위해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들의 차이점에 주의해야 한다.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의 독립된 단락의 전반부에서 우리는 주 예수의 피에 대해 두 차례 언급된 것을 본다. 즉 3장 25절과 5장 9절이다. 후반부의 6장 6절부터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말하는 새로운 사상이 도입된다.
전반부의 논의의 범위는 주 예수의 역사, 즉 예수의 피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의 범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그 반면에 후반부의 논의 중에서는 피를 계속하여 언급하지 않고 십자가로 대표되는 주님의 다른 면의 역사에 중점을 둔다. 이는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 안에서 그분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구분은 매우 가치가 있다. 우리는 피가 우리의 행위를 처리하는 반면에 십자가가 우리의 어떠함을 처리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피는 우리의 죄들을 제거했고 십자가는 범죄하는 우리의 근본을 강타한 것이다.
뒤에 나오는 장들에서 우리는 두번째 방면의 주님의 역사를 볼 것이다.
먼저 우리의 죄들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가치와 이 피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는 것으로부터 말하기 시작하겠다. 다음 구절들은 이것을 우리에게 설명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 3:23).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8-9).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4-26).
이 문제를 연구하는 후반부에서 우리는 타락의 실상과 회복의 길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이 때 먼저 나는 죄가 하나님께 불순종한 행위로 말미암아 들어왔다는 것을 언급하겠다(롬 5:19). 우리는 불순종이 발생할 때마다 뒤따라오는 것이 범죄임을 기억해야 한다.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들어온 첫번째 결과는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분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낯으로부터 쫓겨나게 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장애가 생겼기 때문에 그분은 더이상 사람과 교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성경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런 장애를 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첫 단계로 하나님은 그들(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이 다 죄 아래 있다고 말씀하신다. 둘째 단계로 사람 속에서 죄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교통에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범죄한 느낌-하나님과 격리된 느낌-을 갖게 되었다. 이 때문에 깨어난 양심의 도움으로 사람들은 『내가... 죄를 얻었사오니』(눅 15:18)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죄가 사탄에게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는 근거를 주는 동시에 우리 속의 범죄의 느낌은 우리 마음 속에서 사탄에게 우리를 참소할 기회를 준다. 그러므로 세번째 단계로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계 12:10)가 『너는 죄를 범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속하고 하나님의 뜻 안으로 이끌기 위하여 주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죄 있는 양심에 대하여, 사탄의 참소에 대하여 무언가를 하셔야 한다. 먼저 우리의 범죄가 처리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해결되었다. 그 다음은 죄 있는 느낌이 처리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피의 가치를 우리에게 나타내심으로써 정죄받는 양심으로 평강을 갖게 한다. 마지막으로, 마귀의 공격과 참소에 대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처리하고 해결해 주셔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을 향하여, 사람을 향하여, 사탄을 향하여 모든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계속 전진하려면 절대적으로 주님의 피의 가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선적인 것이다. 십자가에서 주 예수님이 우리의 대치물이 되신 것에 대해 우리는 기본적인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의 범죄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의 피의 기능에 대해 우리는 분명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아직 올바른 길에 접어 들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이 세 가지에 대해 더 자세히 보기로 하자.
속죄를 위한 피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다룬다. 우리의 범한 죄를 위하여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하심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심판에 떨어지게 된다. 또 죄 사함은 하나님이 우리의 행함을 소홀히하시거나 감찰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피를 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는 주로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피의 가치를 깨달으려 한다면 반드시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만일 피에 대해 하나님이 정하신 가치를 조금도 모른다면 나는 영영 나에 대한 피의 가치를 알 수 없다. 오직 성령의 계시로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깨달을 때 비로소 피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고, 우리에게 피가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피의 첫번째 방면은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피라는 단어는 항상 속죄의 사상과 연관되어 있다. 나는 피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백 번 이상 언급되었다고 생각한다. 언급되는 곳마다 피가 하나님을 위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구약 달력에는 우리의 죄와 매우 큰 관계가 있는 하루가 있는데 그 날은 곧 속죄일이다. 죄 문제에 대하여 속죄일보다 더 분명하게 묘사하고 설명한 것은 없다. 레위기 16장은 속죄일에 속죄 희생의 피를 지성소로 가져가 하나님 앞에 일곱 번 뿌렸다고 말한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는 분명해야 한다. 속죄의 날에 속죄 제물은 회막의 바깥 뜰에서 회중 앞에서 드려졌다. 거기서의 모든 것은 완전히 노출되어 누구나 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제사장 외에 누구도 장막 안에 들어올 수 없도록 명하셨다. 오직 피를 가진 대제사장만이 피를 거기에 뿌려 하나님 앞에서 속죄하도록 하셨다. 왜 그렇게 했는가?
이는 구속 사업에서 대제사장은 주 예수를 대표하기 때문이다(히 9:11-12). 그러므로 예표에 있어서 대제사장은 구속 사업을 하는 일꾼이다. 대제사장을 제외하고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가거나 접촉할 수 없었다. 이뿐 아니라 대제사장이 들어갔을 때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피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그 피는 하나님이 이미 받으시고 그 안에서 만족을 얻으신 그것이다. 그것은 대제사장이 지성소 안에서 하나님과 갖는 교역(交易)이다. 이 교역의 유익을 얻은 사람들은 그 교역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도록 정하셨다. 그러므로 피는 먼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이것보다 더 초기의 예표는 출애굽기 12장과 13장에서 말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 피 흘린 유월절 어린 양이다. 나는 이것이 구속에 관한 구약의 또 하나의 좋은 예표라고 생각한다. 피는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발라졌고 이스라엘 백성은 피가 발라진 집 안에서 어린 양의 고기를 먹었다. 하나님은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피가 사람에게 드려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또 다른 예증을 얻는다. 그 이유는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발라진 피를 집 안에서 양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결과 공의는 우리 인류를 위해 드려질 수 있는 무죄한 한 생명을 요구하신다. 피에는 생명이 있는데 이 피는 나와 나의 죄를 위하여 반드시 부어져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하심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공의를 만족시킬 피를 그분께 드릴 것을 요구하신다. 그분은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니』라고 하셨다. 오, 그리스도의 피는 완전히 하나님을 만족케 하였다!
여기서 나는 새로 믿은 형제들에게 몇 마디 하겠다. 이는 우리가 이 점에서 자주 곤경에 빠지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양심의 괴로움을 받아 보지 못했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우실 때 비로소 양심이 살아난다. 본래 우리의 양심은 죽었다. 양심이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께 아무 쓸모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얼마 후, 우리가 주님을 믿었을 때 깨어난 우리의 양심은 아주 예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참된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다. 죄악의 느낌은 우리에게 크고 두려운 것이 되어 심지어 우리로 피의 참된 효능을 보지 못하게까지 한다. 결국은 우리로 길을 갈 힘을 잃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참되다고 느낀다. 어떤 특별한 죄들이 여러 차례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죄들을 그리스도의 피보다 더 크게 느끼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이때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피의 가치를 느껴 보려는 데서, 주관적으로 우리에 대한 피의 의미를 평가해 보려는 데서 온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피의 가치는 우리가 감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먼저 피는 하나님에게 보여지기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평가를 발견하게 된다.
그 반대로 만일 우리가 우리의 느낌으로 평가해 보려고 할 때 아무런 수확이 없고 어둠 속에 남아 있게 된다. 이것은 완전히 말씀에 대한 우리의 신뢰에 달려 있다. 우리는 피가 하나님께 귀하다고 그분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믿어야 한다(벧전 1:18-19).
만일 하나님께서 죄들을 갚은 것으로서 피를 받으실 수 있고, 속죄의 대가로 피를 받으실 수 있다면, 우리는 안심하고 우리의 죄 빛을 갚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만일 하나님이 이미 이 피로 만족하셨다면, 이 피는 받으실 만한 것이다. 이 피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그분의 평가를 따라야 한다. 더하거나 덜하지 말아야 한다. 이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이상이 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결코 그분의 평가 이하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분이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임을 기억하라.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분 보시기에 이 피가 받을만한 것이라고 그분을 온전히 만족케 했다고 능히 말씀하실 수 있다.
이 피가 하나님을 만족케 한 고로 또한 우리를 만족케 한다. 그러므로 피의 두번째 방면의 가치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는 곧 그분이 우리 양심을 깨끗케 한 것이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읽을 때 이 방면에서의 피의 효능을 본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히 10:22).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이다. 이 말씀들을 우리는 자세하게 읽어야 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에게, 주 예수의 피가 우리의 마음을 씻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마음을 피와 연결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피가 역사하는 범위에 대해 우리가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주여, 당신의 피로 내 마음을 죄에서 씻어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렘 17:9)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씻음보다 더 기본적인 일을 하셔야 하는데, 이는 곧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곧 버릴 옷을 빨거나 다리미질하지 않는다. 이와같이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씻을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것을 보아야 한다. 육체는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성경은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겔 36:26)라고 말한다.
나는 성경에서 주님의 피가 우리의 마음을 씻었다는 말씀을 보지 못했다. 피의 역사는 이렇게 주관적이지 않고 온전히 객관적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이다. 히브리서 10장에서 피의 씻음을 말할 때 마음을 언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서는 피와 양심과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우리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간격이 있기 때문에 거리낌 있는 양심을 갖게 되고 언제든지 그분을 가까이하려고 할 때 잘못을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거리낌 있는 이 양심은 나와 하나님 사이에 장애가 있다는 것을 느끼도록 끊임없이 나를 일깨워 준다. 이제 보혈의 역사로 하나님 앞에서 가로놓인 장애물이 제해지는 새로운 결과가 산출되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 이 사실을 나에게 설명하셨다. 내가 이 사실을 신뢰하고 받아들일 때, 내 양심은 즉시 깨끗케 되고 죄책감도 제거되며, 하나님에 대해서 나의 양심은 더이상 거리낌을 갖지 않게 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할 때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알고 있다. 믿는 마음과 아무 참소가 없는 마음은 우리에게 똑같이 중요하다. 이는 서로가 상호보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양심에 불안을 느낄 때마다 우리의 믿음은 새어나가고 즉시로 우리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통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때에 따른 피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매일, 매시간, 매분, 단기적인 것을 장부에 기록하시기 때문에 오직 피로 말미암아야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피를 의지하고 피를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근거로 삼는다면, 영원히 이 피의 효능은 상실되지 않는다. 보혈 외에 우리가 무엇으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참으로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가, 아니면 다른 것으로 나아가는가를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한다. 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간단히 말해서 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내가 내 죄를 시인하고 정결함과 속죄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인하기 때문에 주 예수님이 이루신 역사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뜻이다. 나는 결코 나 자신의 업적이 아닌 그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오늘 아침 특별히 인자했다거나 참을성 있었다거나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근거로 삼지 않는다.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마다 나는 피로 말미암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할 때에 누구나 다음과 같은 유혹을 만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다루어오고 계시기 때문에-우리를 그분 앞으로 더 이끌기 위하여 그분은 십자가의 더 깊은 공과를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이미 여러 과정을 채택하셨음-우리 앞에 새로운 표준을 세우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 표준들에 이르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청결한 양심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양심의 청결함은 결코 우리의 업적에서가 아닌 오직 주 예수의 피 흘린 역사를 의지하는 데서 온다.
내가 잘못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내 속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무거운 느낌이 있다. 즉 『오늘 내가 조금 조심하여 선하게 살았고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었기 때문에 기도를 잘 할 수 있었다!』 혹은 정반대로 이렇게 생각한다. 『오늘 나는 식구들과 약간의 문제가 있었고, 아침부터 아주 답답하고 걱정스러웠다. 지금도 명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게 분명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겠다.』
대체 당신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당신은 믿을 수 없는 당신의 느낌이나 오늘 당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다는 느낌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가? 아니면 비교적 멀리 있는 견고한 것 곧 하나님이 바라보시고 만족하신 그분의 흘린 피를 의지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가?
만일 피가 변할 수 있다면 이것을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근거로 삼는 것도 무가치할 것이다. 그러나 피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고 또한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은 항상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는데, 이 두려움 없는 담대함은 당신 개인의 업적이 아닌 보혈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어제든, 당신이 어떤 업적을 쌓았다 할지라도 일단 지성소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있을 때 당신은 유일하게 믿을 만한 흘려진 피를 당신이 설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오늘 당신이 얼마나 선하게 살았든 악하게 살았든 혹은 범죄했든간에 당신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근거는 영원히 오직 하나 즉 그리스도의 피이어야 한다. 이것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근거이다. 이것 외에 다른 근거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다른 많은 체험과 같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에도 시작(초기)과 지속(진보)의 양면이 있다. 전자는 에베소서 2장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후자는 히브리서 10장이 우리에게 말해준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의 시작은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서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기』(엡 2:13) 때문이다. 이 후로 우리가 계속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도 여전히 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도는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 22)고 말했다.
시작할 때 나는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가까이 하였고, 이후로 이 새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도 나는 여전히 그분의 피를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서 다른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혹 당신은 『이것은 간단한 것이고 복음의 초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어려움은 곧 복음의 초보를 떠난 데서 비롯된다. 우리는 우리가 진보하였기 때문에 이 초보를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복음의 초보를 떠날 수 없다. 우리가 시작할 때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가까이한 것같이 이후에 하나님을 가까이할 때에도 언제나 우리는 동일하게 피로 말미암아야 한다. 종착지에 이르러서도 우리의 근거는 오직 한 가지, 즉 이 피를 의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제멋대로 방임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뒤에서 보겠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의 다른 방면은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할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피로 만족하고, 피가 있는 것으로 만족하자.
우리가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주의한다고 해서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우리가 근심과 걱정을 느낀다 할지라도 이것들은 우리의 성결함을 조금도 돕지 못한다. 이것들이 우리를 조금도 돕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피로 말미암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자.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자. 『주여! 제가 이 피의 가치를 아직 충분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 피가 이미 당신을 만족케 한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이 피만 있으면 저는 족합니다. 이 피가 저의 유일한 의지입니다. 지금 저의 성장의 여부나 업적이 있는가의 여부가 나의 근거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언제든지 당신 앞에 나올 때 저는 당신의 보혈만을 의지하겠습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양심은 참으로 깨끗케 된다. 이 피를 떠나서는 양심은 영영 깨끗케 될 수 없다. 오직 이 피만이 우리를 두려움 없고 담대하게 한다.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이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2절에 있는 놀랄 만한 말씀이다.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씻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 4:8)라는 바울의 말에 반향할 수 있다.
우리가 말한 바에 비추어, 이제 우리는 방향을 돌려 대적에게 얼굴을 돌릴 수 있다. 왜냐하면 피에는 사탄을 향한 방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 안에서 사탄의 가장 맹렬한 활동은 바로 형제들을 참소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계 12:10). 그러나 우리 주님은 대제사장의 특별한 직분 안에서 그분의 피(히 9:12)로 말미암아 사탄을 대적하신다.
이 피는 어떻게 사탄을 처리했는가? 이 피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능히 사람 편에 서시게 함으로써 사탄을 처리한다. 타락은 사람 속에 무언가를 가져와 사탄으로 하여금 사람 속에서 설 발판을 갖게 하였다. 결국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손을 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사람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롬 3:23) 동산 밖에 있다. 인간이 저지른 일로 인하여 사람 속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이것이 제거되기 전에는 하나님은(이치상으로) 그를 보호하실 수 없다. 주님께 감사드리자. 피가 이 장애물을 제거하고 사람과 하나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했다. 지금 하나님이 사람 편에 계시기 때문에 사람은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 지금 사람은 아무 두려움 없이 사탄을 대할 수 있다.
여러분은 요한 일서 1장 7절의 말씀을 기억하는가? 나는 다비의 번역을 가장 좋아한다. 그는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종류의 죄(every sin)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한다. 요한은 총괄적으로 「모든 죄」라고 하지 않고 모든 종류의 죄, 모든 항목의 죄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하나님은 빛이시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모든 것이 빛 아래 드러나게 되어 하나님께서 일목연하게 모든 것을 보실 수 있지만 그분의 피는 우리의 모든 종류의 죄를 능히 깨끗케 할 수 있으시다. 아, 어떠한 씻음인지! 이것은 내가 내 자신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거나 하나님이 나를 온전히 알지 못하시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내가 어떤 것들을 숨기거나 하나님이 어떤 것들을 소홀히 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시고 나도 빛 가운데 있을 때 보혈이 나의 모든 종류의 죄를 씻는다는 것이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피로 족하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에 억눌리거나 심지어 때로 시험을 받음으로 어떤 죄는 결코 사함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 말씀을 기억하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종류의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큰 죄, 작은 죄, 아주 검은 죄, 그렇게 검게 보이지 않는 죄, 우리 생각에 용서받을 수 있는 죄 또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의식하는 죄, 의식하지 못하는 죄, 기억하는 죄, 이미 잊어버린 죄 모두가 「모든 종류의 죄」라는 단어 안에 포함된다. 할렐루야!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종류의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피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이미 하나님을 만족케 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빛 가운데서 우리의 모든 죄를 보셨고 그분께서 피로 말미암아 우리 죄들을 용서하셨는데 사탄이 무엇을 근거로 우리를 참소할 수 있겠는가?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할지라도,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피를 사탄에게 보여준 이것이 가장 유력한 답변이기 때문에 사탄은 더이상 소송을 걸 수 없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그러므로 이 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혈의 절대적 부요(富饒)이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 9:11-12).
그분은 오직 한 번 속죄자가 되셨지만, 그분이 대제사장과 중보가 되신 것은 거의 이천 년이 되었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 서신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요일 2:2)이시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 『하물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못하겠느뇨』라는 말씀을 주의하라. 이 말씀은 그분의 사역의 부요함을 말해준다. 하나님에 대해 그리스도의 피는 충분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태도로 사탄을 대해야 하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할 뿐 아니라 또한 양심 안에서 우리를 참소하기 때문이다. 사탄이 우리와 다투는 것은 이것이다. 즉 『너는 이미 범죄하였고 계속 죄를 범할 것이다. 너는 연약한 자이며 하나님은 더이상 너에게 어떠한 것도 하실 수 없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 속을 살피게 되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 안에서나 느낌 안에서 혹은 자신의 행위에서 사탄이 틀렸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찾으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유혹되어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다른 극단에 빠져 침체와 절망에 굴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참소는 사탄의 가장 흉악하고 효력 있는 무기이다. 사탄은 우리 죄를 지적해 냄으로써 이 죄들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참소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즉시 넘어진다.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사탄의 참소를 받아들이는가? 이는 우리가 여전히 우리 자신의 의(義)를 갖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런 바램은 근거가 잘못된 것이다. 이 방면에서 사탄은 항상 성공적으로 우리를 틀린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이로써 사탄은 승리하여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만일 우리가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을 배웠다면, 육체의 본성은 범죄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범하여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내 말의 뜻을 이해하는가? 우리가 우리의 참 근성을 모르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 대해 한 가닥 기대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이 우리를 참소할 때 우리는 넘어지고 만다.
하나님께서 능히 우리 죄를 처리하여 주실 수 있지만 그분은 결코 참소 아래 있는 사람을 처리하실 수 없다. 그것은 이런 사람이 피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피가 그를 위하여 유리한 말을 할지라도 그는 돌이켜 사탄의 말을 듣는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변호자이시지만, 참소를 받는 우리들은 참소하는 자 편에 서 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죽음 외에 달리 가치가 없는 자임을 모른다. 뒤에서 우리는 우리가 오직 십자가에서 죽기에만 합당하다는 것을 볼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참소자를 응수(應酬)하실 수 있고 또한 그분이 이미 그를 응수하신 것을 아직 모른다.
우리의 구원은 온전히 주 예수를 바라보고 어린양의 피가 각종 죄들로 조성된 상황에 응수하시고 또한 그분이 이미 그 죄들에 응수하셨다는 데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서야 할 믿을 만한 기초이다. 절대로 우리의 선한 행실로 사탄에게 응수하지 말고 항상 보혈로 그에게 응수하라. 그렇다. 우리는 죄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자! 이 피가 우리의 모든 종류의 죄를 깨끗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 피를 보셨고 그의 아들은 이 피로 말미암아 사탄의 참소에 응수하셨기 때문에 사탄에게는 더이상 우리를 공격할 근거가 없다. 오직 이 피를 신뢰하고 얻은바 위치를 떠나지 않은 사람만이 사탄의 참소를 그치게 하고 그를 달아나게 한다(롬 8:33, 34). 이 체험은 끝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계 12:11).
아!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보혈의 가치를 조금 더 본다면 우리는 어떠한 해방을 받게 될지!
워치만 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리스도의 피", 한국복음서원]
전후반부 가운데 로마서 4장과 6장에서 부활의 두 방면이 언급되었다. 4장 25절은 주 예수의 부활을 우리의 의롭다 하심과 연관시켰다. 사도는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지위가 언급되었다. 그 반면에 6장 4절은 부활하심으로 새 생명을 우리에게 분배하여 우리로 거룩한 생활을 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그는 행위에 대해 말한 것이다.
또 이 부문에서 화평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었다. 5장에서 말한 하나님과 화목됨은 그분의 피를 인해 의롭다 함을 얻은 결과이다. 사도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5:1)라고 말한다. 이 말은 내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전에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되었다(5:10).
그러나 나는 곧 나 자신이 문제의 일대 원인인 것을 발견한다. 내 속에 여전히 불안함이 있는 것은 내 속에 나를 이끌어 범죄케 하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과는 화목되었지만 내 자신과는 화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 마음 속에서는 사실상 여전히 내전(內戰)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광경을 로마서 7장에서 분명히 우리에게 말해준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 안에 육과 영의 치명적인 충돌이 있다는 것을 본다. 그러나 이로부터 8장에서 말한바 영 안에서 행함으로써 갖게 되는 깊은 평강의 생활로 인도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다』(롬 8:6-7).
더 상세히 고찰하면, 우리는 전반부의 첫부문은 칭의의 문제를 다루고(3:4-6, 4:5, 25), 둘째 부문은 칭의에 이어지는 성화의 문제(6:19, 22)를 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 귀한 진리를 아는 것은 전체 이야기의 절반밖에 모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위치를 해결해줄 뿐이다. 우리가 앞으로 계속 전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행위 문제를 해결하는 등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심을 볼 것이다. 이 장들 안의 사상의 발전은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일에서 두번째 걸음은 항상 첫 걸음에 뒤따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첫걸음만 안다면 우리는 정상 이하의 그리스도인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 생활에 들어갈 수 있는가? 물론 이런 생활에 들어서는 필수 조건은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워진 기초가 있을지라도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전진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 우리는 피가 우리의 범죄를 다룬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주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의 대치물로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 사함과 칭의와 화목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가서,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그분이 어떻게 우리 안의 죄의 본성을 처리하시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피는 능히 우리 죄들을 깨끗이 씻을 수 있지만 우리 「옛사람」을 씻을 수는 없다. 나의 이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한다. 피는 범죄를 처리하는 반면에 십자가는 죄인 자체를 처리한다.
로마서 1장부터 4장까지에서는 「죄인」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이 장들의 주제가 죄인이 아닌 사람이 범한 죄들이기 때문이다. 「죄인」이라는 단어는 5장에 가서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거기서 죄인을 어떻게 말했는지를 주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5장에서 죄인이 죄인으로 불리운 것은 그가 범한 죄 때문이 아니라 그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흔히 로마서 3장 23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는 말씀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그가 죄인임을 알려주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이 구절을 인용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증명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이 구절을 인용할 때 순서가 바뀌는 위험이 따른다.
로마서의 가르침은 우리가 범죄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범죄로 인함보다 출생으로 인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5장 19절에서 말한 바와 같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구성)된 것같이』.
우리는 어떻게 죄인이 되었는가? 아담의 불순종 때문이다. 우리가 죄인 된 것은 우리의 행한 것 때문이 아니라 아담이 행하고 이룬 것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지금 내가 영어를 한다고 해서 영국인 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사실 나는 중국인이다. 그러므로 3장은 우리의 행한 것-『다 죄를 범하였으매』를 주의하는 데로 인도한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 된 것은 우리의 행한 것 때문이 아니다.
한번은 내가 어린아이들에게 『어떤 사람이 죄인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즉시 『범죄한 사람이 죄인이지요.』라고 답했다. 그렇다. 범죄한 사람이 죄인이다. 그러나 범죄는 그가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죄인 된 이유가 아니다. 범죄한 사람이 죄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범죄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그가 아담의 족속이라면 역시 죄인으로서 구속이 필요하다. 여러분은 내 말을 이해 하는가?
어떤 사람은 악한 죄인이고 어떤 사람은 선한 죄인이다. 어떤 사람은 도덕적인 죄인이고 어떤 사람은 패괴한 죄인이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 죄인인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점은 우리의 행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어떠함에 있다. 한 중국인이 미국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중국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중국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중국인인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으면 곧 그런 사람이다. 내가 죄인인 이유는 아담으로부터 출생했기 때문이다. 내가 죄인이 된 것은 나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혈통과 유전 때문이다. 내가 죄를 범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죄악의 종족에서 나왔기 때문에 범죄하는 것이다. 내가 범죄하는 이유는 내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것이 아주 악해도 우리 자신은 그렇게 악하지 않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사악하고 우리의 근원이 사악하다는 것을 재삼 보여주고자 하신다. 우리의 모든 문제의 근본은 우리가 죄인인 데 있다. 그리고 이 죄인은 반드시 처리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범죄를 처리해주는 것은 주님의 피이고 우리 자신을 처리해주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이다. 피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행함에서 사함을 얻게 하고,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어떠함에서 해방을 얻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서 5장 12절부터 21절까지를 보자.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은혜와 죄의 대비와 그리스도의 순종과 아담의 불순종이 서로 상반됨을 볼 수 있다. 로마서의 후반부(5:12-8:39)의 시작은 바로 이점을 말한다.
이제 이 구절들을 자세히 보기로 하자. 거기서의 논의는 한 결론으로 안내하는데, 그 결론이 우리의 한 걸음 전진된 묵상을 위한 기초가 된다. 그 결론은 무엇인가? 5장 19절 :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우선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시고 그런 다음 우리가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처음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의 행위만을 관심하고 우리의 존재를 별로 주의하지 않는다. 우리의 근심거리는 우리가 행한 것이지 우리의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어떤 면이 고쳐지기만 하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을 고치는 데 착수한다. 그러나 결과는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는 실망하여 우리의 문제가 밖의 행위에만 있지 않고, 우리의 내적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것을 점차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우리 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가 겸손해보려고 하지만 우리 속에 겸손하기를 거부하는 어떤 것이 있다. 우리가 사랑해 보려고 하지만 우리 속에 남을 싫어하는 느낌이 있다. 우리가 겉으로 웃으면서 온유를 나타내려고 하지만 우리 속의 강팍함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우리가 겉에서 상황을 고쳐보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속 깊숙히 그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때 우리는 주님 앞으로 나아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여, 이제 깨달았습니다! 나의 행한 것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나 자체까지도 잘못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19절의 결론이 이제 우리에게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성질상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족속에 속한 죄인이다. 타락은 아담으로 하여금 성질상 기본적인 변화를 갖게 했다. 이로써 아담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죄인이 되었다. 우리가 외관상 이 족속의 공통점을 구비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내적 성품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는가? 바울은 『한 사람의 불순종함으로』라고 말했다. 이 점을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나의 성(姓)은 니( )이다. 이것은 중국의 아주 보편적인 성이다. 나는 어떻게 이 성을 갖게 되었는가? 이것은 내가 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중국의 성씨표를 찾아서 이 성을 택한 것이 아니다. 사실 내 성이 니씨인 것은 내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방법으로도 내 성을 바꿀 수 없다. 내가 니씨인 것은 내 부친이 니씨이기 때문이다. 내 부친이 니씨인 것은 내 조부께서 니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행동이 니씨 집안 사람 같아도 니씨이고 니씨 같지 않아도 여전히 내 성은 니이다. 내가 중화민국의 대통령같이 존귀하든 길거리의 거지같이 비천하든 내 성은 여전히 니이다. 내가 무엇을 하든 안 하든 내 성이 니라는 사실은 바꾸어 놓을 수 없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아담 때문이다. 나 개인이 범죄함으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아담이 범죄할 때 내가 이미 그의 안에 있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다. 나는 아담에게서 출생한 자이기 때문에 그의 일부분이다. 나는 이 사실을 바꿀 수 없고, 나의 행위를 개선함으로써 아담 밖에 있거나 다시 죄인이 되지 않게 할 수 없다.
중국에 있을 때 나는 아담 안에서 우리가 이미 범죄하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해서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모든 중국 사람은 황띠(중국어 발음을 딴 것임)가 그들의 조상인 것을 시인한다. 사천 년 전 그가 시유와 싸울 때 비록 적이 흉악했어도 황띠는 그와 싸워 이기고 그를 죽였다. 나중에 황띠는 중화민국을 세웠다. 그러므로 중국 민족은 사천 년 전 황띠에 의해 세워졌다. 만일 황띠가 적을 죽이지 못하고 반대로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면 오늘의 상황은 어찌 되었겠는가?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겠는가?』
그는 『나라는 사람은 있지도 않지요.』라고 말했다. 내가 말하기를, 『오, 아닙니다! 황띠는 그 사람대로 죽을 수 있고 당신은 당신대로 살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불가능합니다. 만일 황띠가 시유에게 살해되었다면 결코 나라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당신은 인간 생명의 일관성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생명은 아담으로부터 온 것이다. 만일 당신의 증조부가 세 살 때 죽었다면 당신은 어디에 있겠는가? 당신도 그의 안에서 죽은 것은 자명하다! 당신의 체험은 증조부의 체험에 달려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든 사람의 체험은 아담의 체험과 분리될 수 없다. 아무도 나는 에덴 동산에 있어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잠재적인 사실로 말한다면,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을 때 우리도 거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아담의 죄와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아담 안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그로부터 범죄로 인한 열매인 아담의 성품을 받았다. 바꾸어 말해서 죄인의 성품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아담으로 인해 존재하고 또 그의 생명과 성품에 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로부터 얻은 성품에도 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했듯이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행위에 있지 않고 우리의 유전에 있다. 우리의 혈통을 바꾼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길이 없다.
우리가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방향에 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이런 사태를 처리하신다.
로마서 5장 12절부터 21절은 우리에게 아담에 관해 말해줄 뿐 아니라 주 예수에 관하여도 말한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19절). 아담 안에서 우리가 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을 받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것을 받았다. 아담 안에와 그리스도 안에라는 두 마디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반복하여 말하는 것을 번거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의 예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전과 종족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겠다.
이 예증은 히브리서에 있다. 여러분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이 서신의 앞 부분에서 멜기세덱이 레위보다 크다고 증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레위의 제사장 직분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는 먼저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이 레위의 제사장 직분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이유는 매우 단순한데, 이는 곧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히 7:14-17). 또 아론의 제사 직분은 자연히 레위의 반차를 따른 것이다. 만일 그가 멜기세덱이 레위보다 크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면 그는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런 뛰어난 방법으로 이 점을 증명하였다.
히브리서 7장에서 그는, 아브라함이 여러 왕들을 패배시키고 돌아올 때(창 14장) 노략물 중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고 또 그로부터 축복을 받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였으므로 레위는 멜기세덱보다 크지 못하다. 왜 그런가? 이는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칠 때 아브라함 안에 있는 이삭도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이고, 이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 안에 있는 야곱도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렸으며 따라서 아브라함 안에 있는 레위도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이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히 7:7). 그러므로 레위의 위치는 멜기세덱보다 낮고 아론의 제사 직분도 주 예수님의 제사 직분보다 낮다. 여러 왕들이 싸우고 있을 때 레위는 아직 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조상 아브라함 안에 있었고 또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이다(히 7:9-10).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의 의미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가정의 아비로서 온 집이 그의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가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릴 때 온 집도 그의 안에서 십분의 일을 드렸다. 그들이 개별적으로 드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아브라함 안에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드릴 때 그의 드림 안에 그의 후손들도 모두 포함된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우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 죄가 그로 말미암아 인류 안으로 들어왔고 또 사망이 죄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그날부터 죄가 왕 노릇 하여 사람을 죽여왔다. 그러나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있는데, 또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가 되게 하신 것이다. 죄가 많이 나타난 곳에 은혜를 넘치게 하셨다. 죄가 왕 노릇 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같이 은혜도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롬 5:19-21). 아담 안에서 우리는 절망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죄로부터의 해방을 실제적으로 체험하는 데 이끄신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6장의 시작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이 질문에 바울은 스스로 놀라면서 큰 소리로 『그럴 수 없느니라!』고 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그분의 자녀들이 거룩하지 않고 그들의 죄에 묶이는 것을 좋아하시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또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의 억압을 받지 않도록 우리를 위해 적절한 준비를 해주심을 인해 그분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여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우리가 죄인으로 출생하였는데 어떻게 죄의 유전을 끊을 수 있는가? 우리는 아담 안에서 출생했는데 어찌 아담에게서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주님의 보혈이 우리를 아담에게서 옮길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겠다. 방법은 오직 하나이다. 우리가 출생으로 아담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오직 죽음으로써 거기서 나올 수 있다. 우리의 죄의 본성을 제하려면 우리의 생명을 제해야만 한다. 죄의 묶임이 출생으로 시작되었으므로 죄의 해방은 오직 죽음으로써만 가져올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바 죄에서 구원받는 길이다. 해방의 비결은 바로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롬 6:2)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죄스런 그들의 생명을 벗으려고 힘쓰고 노력하다가 죄의 생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럼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구원의 길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죽이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를 처리하셨다는 것을 시인해야 하는 데 있다. 사도 바울의 이어진 말은 이 뜻을 설명해준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만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우리를 처리하셨다면 그분 안에 있을 때 구원의 방법이 효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큰 문제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야만 가능하다. 사실상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길이 없다. 또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미 그분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힘으로 안 되는 일을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어 주셨다. 그분은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셨다.
고런도 전서 1장 30절의 말씀은 정말 좋다. 나는 이 구절이 신약에서 가장 좋은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사도는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고 말한다. 어떻게 그 안에 있게 되었는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일을 우리가 궁리하고 노력하도록 남겨두지 않은 것을 인해 하나님을 찬미하자. 하나님이 이미 계획하시고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가 들어가려고 계획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미 완성하신 역사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많은 것들이 뒤따르게 된다. 우리가 인용한 히브리서 7장의 예증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아직 출생하지 않은 레위를 포함하여-다 아브라함 안에서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이다. 그들이 개별적으로 드린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드릴 때 그들이 아브라함 안에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드림 안에 그의 모든 자손이 포함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의 예표이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 모두가 죽었다. 그때 우리가 아직 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죽음은 개별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있기 때문에 또한 그분 안에서 죽은 것이다. 사도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고 말한다. 그분이 십자가 상에 못박혀 죽으실 때 우리도 못 박혀 죽은 것이다.
중국 향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흔히 간단한 비유로 심오한 진리를 설명한다. 한번은 한 작은 책을 들고서 종이 한 장을 그 책 속에 끼워 넣었다. 그러면서 향촌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 주목하십시오.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종이는 이 책과 완전히 다른 나름대로의 모양을 가졌습니다. 이제 이 종이가 내게 특별한 쓸모가 없어서 이 책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서 이제 이 책을 상해로 보낸다면 이 종이는 결국 어디에 있겠습니까? 책이 상해에 도착할 때 이 종이가 여전히 이 곳에 남아 있겠습니까? 이 종이와 이 책의 운명이 다르겠습니까? 그렇지 않은 것은 자명합니다! 비록 나는 이 책만 보냈지만 종이가 책 속에 넣어져 있기 때문에 책이 간 곳에 종이도 가게 됩니다. 가령 내가 이 책을 강에다 버린다면 종이도 강에 버려지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이 책을 물에서 건져낸다면 이 종이도 건져지는 것입니다. 이 종이가 책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책의 모든 체험을 이 종이는 동일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미 그리스도 안에 두셨기 때문에 그분이 그리스도에게 행하신 모든 일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행해진 것이다. 우리는 그분과 같은 운명이다. 무릇 그분의 체험한 바를 우리도 체험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참예한다. 십자가 상에서 그분이 이미 못 박혔을진대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실 필요가 있는가? 결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힐 때 우리도 못 박힌 것이다. 그분의 못 박히심이 과거의 사실이라면 우리의 못 박힘은 결코 장래의 일이 될 수 없다.
내가 여러분에게 도전하겠다. 여러분은 우리의 십자가에 못 박힘이 장래의 일이라고 말한 구절을 신약에서 하나도 찾을 수 없다. 헬라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말할 때 사용된 단어는 시간상 부정과거시제로 되어 있다(롬 6:6, 갈 2:20, 5:24, 6:14). 육신적으로 이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우리도 못 박혔다. 이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그분 안에 두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영원한 사실이다.
십자가 상에서 주 예수님이 죽고 그분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무죄한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를 속죄하시고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만족케 하셨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이런 특권이 있다. 그분 외에는 구속 사업을 분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피를 흘렸다는 말씀이 없다. 이는 그분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구속 사업을 이루실 수 있고 어느 누구도 이것에 참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죽으심은 단지 피를 흘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또한 우리의 함께 죽음을 위한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고 그분의 죽음 안에 당신과 내가 포함되었다.
그는 자주 대신하여 죽었다는 말과 함께 죽었다는 말로 주님의 죽으심의 두 방면을 언급한다. 함께 죽었다는 것은 아주 좋은 말이다. 그러나 함께 죽었다는 말은 사람들에게 함께 죽은 사실이 우리 편에서 시작된 것으로 오해되기가 쉽다. 그래서 자신이 주님과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이 용어가 옳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응용에 있어서 너무 일러서는 안 된다. 먼저 주님이 나를 그의 죽음 안에 포함시킨 사실에서 시작하는 것이 낫다. 주님의 만유를 포함한 죽음이 나를 그분과 함께 죽은 위치에 두셨다. 이 말은 당신더러 그분과 함께 죽으러 감으로써 그의 죽음 안에 포함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포함시킨 것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신약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이 말씀은 참으로 귀하다고 느낀다.
주 예수님의 죽으심은 만유를 포함한다. 주 예수님의 부활도 만유를 포함한다. 고린도 전서 1장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보았다. 같은 서신 끝부분에서 우리는 이 사실에 관한 더 풍성한 의미를 볼 수 있다. 고린도 전서 15장 45절과 47절에는 주 예수님을 말하는 두 가지 현저한 명칭 혹은 칭호가 있다. 거기서 주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과 둘째 사람으로 불리웠다. 성경은 그분을 두번째 아담이라고 부르지 않고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른다. 또한 그분을 마지막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둘째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안에 극히 중요한 진리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구분을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리스도는 인류의 총체이시고 둘째 사람으로서 그분은 새 족속의 머리이시다. 그러므로 여기에 두 연합이 있다. 하나는 그분의 죽음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부활에 관한 것이다. 첫째로 그분은 인류와 연합하여 마지막 아담이 되셨고, 역사적으로는 베들레램에서 시작되어 십자가와 무덤에서 종결되었다. 그분은 아담 안의 모든 것을 그분 자신 안에서 종결시키고 그런 다음 그것들을 심판과 사망으로 이끄셨다. 둘째로 그분은 둘째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분과 연합되었다. 이것은 부활로 시작되고 영원-끝없는 것을 말함-으로 종결된다. 그분의 죽음은 첫 사람을 제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이 첫 사람에게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분은 죽음에서 부활하여 새 족속의 머리가 되셨다. 이 새 족속에게서 하나님의 목적이 온전히 실현될 것이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분은 마지막 아담의 신분으로 못박히셨다. 첫 사람 아담 안에 모든 것이 그분 위에 집합되어 제해졌다. 우리는 다 그 안에 포함되었다. 그분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옛 족속을 제하시고 둘째 사람으로서 새 족속을 이끌어오셨다. 그분은 그의 부활 안에서 둘째 사람이 되셨고 이 안에 우리도 포함되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고 말한다. 마지막 아담 안에서 우리는 죽었고 둘째 사람 안에서 우리는 살아났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를 아담에게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는 하나님의 권능이다.
워치만 니[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리스도의 십자가", 한국복음서원]
워치만 니 형제님의 개인 간증
오늘 내 아내가 이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녀와 결혼하기 전의 이야기를 언급할 수 있을 것 같다. 십여 년 전 내가 그녀에 대해 사랑을 느끼고 있을 때 그녀는 아직 구원받지 않았었다. 내가 그녀에게 주 예수님에 대해 말하면서 그녀에게 믿으라고 권했을 때, 그녀는 나의 말을 웃음거리로 받아들였다. 내가 그녀를 사랑했던 것은 인정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녀가 내가 믿는 주님을 비웃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나는 또한 그때 주님과 그녀 중 누가 내 마음에서 첫번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젊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려놓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을 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기꺼이 그녀를 내려 놓겠다고 표명했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직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시편 73편을 다시 읽으면서 하나님께 이 땅에 제가 사랑하는 이가 있기 때문에 저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때 성령은 이것이 나의 장애물임을 내게 지적해 주셨다.
그 주일에도 여전히 설교했지만, 내가 무엇을 전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하나님께 설교했고 하나님께 참아 달라고 요구했으며, 하나님이 먼저 내게 능력을 주신 후에야 그녀를 내려놓을 수 있다고 기도하였다. 나는 하나님께 이 일을 처리하는 것을 연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사람들과 이유를 말하지 않으신다. 그때 나는 황무지인 티벳에 가서 전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 많은 계획들을 제안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사랑하는 사람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시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이 일단 어떤 것을 지적하시면 결코 그 손을 거두시지 않는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통과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학교에서 공부할 마음도 없었고, 성령의 능력을 추구하였으나 그것도 얻지 못했다. 나의 마음은 괴로왔고, 나는 하나님의 마음이 나의 슬픈 애걸로 인해 바뀌기를 바라면서 끊임없이 기도했다. 나로 하여금 항상 자신을 거절하고 천연적인 사랑을 내려놓기를 배우게 하시고 전심으로 그분만을 사랑하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마 오늘 하나님 손에서 나는 무용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분은 나로 하여금 전에 배운 적이 없던 공과를 배우도록 나의 천연적인 생명을 예리한 칼로 잘라내 버리셨다.
어느 날 오전 설교를 마치고서 내 방으로 돌아왔을 때 몹시 마음이 무거웠다. 다음 주 월요일에는 학교로 돌아가고 동시에 성령의 충만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충만을 추구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 주가 경과하였어도 나는 여전히 시편 73편 25절의 말씀을 선포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얼마 안 되어 나는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되었으며, 결국 그녀를 기꺼이 포기하고 큰 소리로, 『나는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영원히 나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선포하였다.
이러한 선포 후에 나는 마침내 시편 73편 25절의 말씀을 말할 수 있었다. 그날 나는 비록 삼층천에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층천에는 올라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내게는 세상이 아주 작게 보였고 오직 나 한 사람만이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내가 구원받던 날 밤 내 모든 죄의 짐에서 해방되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려놓던 그 날(이것은 1922년 2월 13일의 일임) 내 마음에는 조금도 나를 점유한 일들이 없었다.
다음 찬송은 그 때 니 형제님이 쓰신 것이다.
1. 길고 넓고 높고 깊은 사랑 인해 |
[출처] 워치만 니 형제님의 개인간증|작성자 민하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신지라 "(막 16:7)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주님의 부활후에 천사가 몇 명의 부녀로 하여금 가서 주님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게 했다. 아 "베드로에게"!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한다. 왜 그의 제자와 요한에게 이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요한은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였다.) 왜 그의 제자와 도마에게 이르라고 하지 않았는가?(도마는 주님의 부활을 의심했다)
천사는 왜 특별히 가장 좋은 제자나 가장 필요한 제자들을 언급하지 않고 특별히 베드로를 언급했는가? 베드로에게는 다른 사람과 어떤 다른 점이 있었는가?
베드로는 사흘 전에 큰 죄를 범했다. 그것은 주님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사자앞에서 베드로를 시인하게 할 수 없는 큰 죄였다.베드로는 사람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했던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이 천대하는 하녀 앞에서 주님을 부인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에게, 그의 부활을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라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에게" 이 한 마디가 포함한 것이 얼마나 깊은 뜻인지!
만약 어떤 형제 자매가 베드로같은 체험을 했다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 베드로는 이미 넘어졌다. 내가 범한 것은 작은 것이 아니다. 아마 나는 다시는 주님과 가까이 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은 이미 나를 버리셨을 것이다. 이후로는 중대한 일이 있을 때 주님이 나와 함께 가실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다시는 주님과 함께 변화산에서 그러한 특별한 체험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다시는 겟세마네에서 주님의 동반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를 원한다고 했을 때 주님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지 그 때 나는 주님이 나를 오해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어. 그가 사람에게 붙잡힐 때 나는 칼을 사용하여 어떤 사람의 귀를 베어버렸고 아직도 나는 용감히 주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국 내가 넘어진 것을 알았다.
나는 권위있는 대 제사장이나 세력있는 빌라도 앞에서 넘어진 것이 아니라 일개 하녀의 한 마디로 인해 넘어진 것이다. 한 번 부인했고 두 번 부인했고, 심지어는 맹세하며 주를 부인했다. 나는 일찍이 그분에게,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말했지만 주님이 곧 십자가에 못 박히려 하는 것을 보고는 넘어진 것이다. 나는 주님을 부인한 가장 큰 죄를 범했다.내가 울기도 했고 후회도 했지만, 주님이 나를 어떻게 대하실지 모르겠다. 그날 내가 그를 부인한 것을 그분이 모른다면 괜찮겠지만, 내가 그를 부인할 때 그분이 몸을 돌려서 내 눈을 보셨다. 이것을 그분이 이미 알았음을 말하고 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옳을까? 나는 그분을 감히 가까이 할 없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만 한 가지 죄가 나와 그분 사이를 나눠 놓았기 때문에 감히 그분을 가까이 하지 못하겠다. 어쩌면 다시 이제부터 다시는 그분을 가까이 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했다. 몇 명의 부녀가 와서 말을 전했다. 분명히, 특별히 나에게 이르라고 말씀을 하셨다지 않은가! 아! 나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지만,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그분은 나를 결코 원망하지도, 나에게 화를 내지도 않는구나 그분의 마음은 나를 그리워하신 것이다.
그분은 특별히 다른 사람을 언급하지 않았고 특별히 나를 언급하셨다. 마치 그분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나 한 사람인 것처럼. '베드로에게! 베드로에게!' 이것은 정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다. 가장 기묘하고도 기쁜 소식이다. 주님이 만약 그녀들에게, 제자들에게 이르라고만 하셨다면, 나 같은 사람은 제자 될 자격이 없고제자가 아니므로 감히 그분을 보러 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베드로에게'하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이 아직도 나를 필요로 하심을 나로 하여금 알게 하신 것이다.
나에게는 보러 갈 힘이 없지만, '베드로에게' 라는 말이 다시 보러 가도록 나를 격려하는구나 부녀가 전한 말은 정말이다. 주님은 천사에게 특별히 내 이름을 말하라고 했다. 주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나는 아직 그분을 가까이 할 수 있다. 일어나서 그분을 보러가자"
아 넘어진 베드로를, 죄를 범한 베드로를,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주님은 아직도 특별히 언급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주님이 당신을 한 번 구원하 것은 영원히 구원한 것이다. 당신은 낙심하지만 주님은 영원히 낙심하지 않으신다. 죄를 범한 당신은 그분에게 돌아가는 것이 약간 곤란하다고 느끼지만, 주님은 결코 당신이 범죄한 것을 그분에게 돌아갈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여기지 않으신다.
그분은 개의치 않으시는데 도리어 당신이 당신의 실패를 잊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오늘 주님이 만약 여러분의 얼굴에 있는 수건을 벗긴다면 여러분은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가까이하지 않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베드로는 아직도 그가 일찍이 주님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그는 또한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주의 영광을 보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그러나 그는 오늘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고서 감히 주님을 보러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주님의 요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있을 수 없더냐?"(마 26:41) 그러나 그의 상황과 주님의 요구는 거리가 너무 멀어진 것이다. 어떻게 감히 주님을 보겠는가? 그러나 그는 결국 주님을 보러 갔다. 단지 '베드로에게'라는 이 한 마디로 인하여 감히 주님을 보러 갔다.
형제 자매여 , 당신이 '베드로에게'라는 말 속에 포함된 뜻을 알았다면, 그분을 떠나서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여러분이 '베드로에게'라는 말의 깊은 뜻을 안다면, 주님을 가까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복음서 중에서 어느 복음서에 이것이 기록되어 있는가? 마가 복음뿐이다. 마가는 베드로를 따라 배운 소년이었다. 마가복음은 베드로가 구술한 것을 마가가 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 이 말은 베드로에게 특별히 기억된 것이다. 이 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베드로의마음에는 매우 중요했다.
성령이 성경을 쓸 때에도 특별히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마태나 누가나 요한은 중요한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겼지만, 마가복음을 서술하는 베드로가 볼 때에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베드로에게"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돌이켜 볼 때마다 달콤한 것이다. 은혜받은 자에게 있어서 은혜의 말은 특별히 기념할 만한 것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주님을 기념하는 만찬 때에 여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있는가? 혹은 당신과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로막는 어떤 죄가 있지나 않은가? 우리는 이미 통곡했고 후회했고 자신이 한 것이 너무나 주님께 죄송함을 자백했다. 오늘 우리는 거리낌 없이 주님께 " 주여 내가 당신에게 가까이 갑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보라. 그분이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당신을 위하여 십자가에 가기를 원하셨는데,
지금 당신이 실패하고 넘어지고 타락했다해서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시겠는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사랑했던 그 사랑이 감소되었겠는가? 오늘 당신이 그분을 사랑하지 않고 가까이 하지 않고 그분에게 돌아가지 않기는 쉽지만,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고 여러분을 잊고 여러분을 버리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이 죽은 후 삼일 동안 베드로는 주님을 버리고 말없이 슬퍼했겠지만, 주님은 그를 잊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당시도 주님앞에 나아갈 힘이 없다면 그분의 말을 믿기만 하라. 그분이 그분에게 갈 수 있는 힘을 당신에게 주실 것이다. 당신이 넘어질 때 그분은 당신을 일어나게 하실 것이다.
당신은 그분을 더 이상 가까이 할 수 없을 거 같지만, 당신이 만약 믿음 안에서 "베드로에게" 라는 말을 기억한다면 그분을 가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가까이하려고 해도 거리가 너무 멀어서 가까이 할 수 없을 거 같을 때, "베드로에게"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넘어진 베드로이므로 주님이 더욱 더 기억하실 것이다. 베드로는 감히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없었지만 주님의 마음이 그를 당겨서 주님에게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마음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베드로에게"라는 음성을 들었다면 주님이 결코 당신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님은 결코 베드로를 버리지 않는 것처럼 당신도 버리지 않으신다
"베드로에게"라는 뜻은, 바로 베드로처럼 실패한 "당신에게"인 것이다. 주께서 우리에 대한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 주시기를 원한다. 당신이 만약 주님의 마음을 보게 된다면 그분을 향하여 달려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워치만 니 전집 제 18권 중에서)
북한 전 지역 관광 | 자연&일반 다큐
보은교회 박운종 2010-05-22 20:18:08 | 조회 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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