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복음의 제사장


그리스도인의교회생활 2010-05-0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15011.html

지방교회에서는 관리나 치리가 첫째가아니고 목양이 첫째가 되어야한다. 가장 중요한 일은 목양이다.

행 20:28절 성령이 너희를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의자기피로사신양떼를 목양하게 하셨느니라. 여기의 양떼는 큰양떼가 아니고 작은양떼이다,

 

대집회는 약간의 도움을 줄수있지만 한사람이 한사람을 목양하는 것이 중요하다.

 

1.주중에 하루정도 시간을 내어 목양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중에 목양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증가가 없다.

   심방카드를 만들어서 성도들에게 주고 찻아가도록해야한다. 한마리의 양이라도 찿아내야하고 즐거이 기

   뿐 마음으로 데려와야한다. 심방명단이 있다면 누가 왔는지 안왔는지를 알수있고 이럴때 기도하고 움직

   일수있다. 현재 명단에 있는 약한 지체들은 찿는 것만으로도 10%의 증가를 가져올수있다.

 

2.목양이 교회생활의 80%를 차지해야한다. 목양하는 것에 주의해야하지 집회를 세우는 것에 주의하지 말라

   집회가 많으면 목양을 할수있는 시간을 뺏게 된다. 대집회는 1주일에 한번하고. 작은 단위의 집회를 해야

   한다.

 

3.신성한계시의 고봉의 3방면 첫째. 진리의 회복.둘째. 생활의 회복. 셋째. 목양의 회복이다.

 

집회를 간소화하고 목양과 심방을 더 많이 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침례 받은 후에 남아 있지 못하게 되는 주요한 원인은 우리가 그들을 돌볼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봉사의 대부분은 집회를 유지하는 것이고 집회사용하여 사람을 붙잡아 주고 목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봉사자들은 집회를 유지하기위해 있다. 결국집회 이외의 목양과 가르침과 심방과 위로하는 것과 같은 참된 봉사의 일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침례받은 후에 돌보고 양육하는 사람도 없이 살든지 죽든지 그냥 내버려두므로 사람들은 빼앗기거나 잃어 버리게 되는데 이것은 너우 애석한 일이다.

 

장로들은 마땅히 제도를 고쳐 목양의 일을 더 많이 하게 해야 하며 장로가 해야 할 뿐 아니라 소지역 책임자들이 책임지고 해야하고 모든 봉사하는 사람들이 해야 한다. 장로가 해야 할뿐 아니라 소지역 책임자들이 책임지고 해야하고. 모든 봉사하는 사람들이해야 한다. 특별히 항상 집회에 오는 성도들은 모두 목양의 일을 해야한다.  이러므로 정기적인 집회를 한번 줄이고  그 시간 만큼 심방하고 목양하고 목양하기 위해 가는 것이 가장 좋다. 이외에  장로와 소지역 책임자는 사무적인 일들을 줄여서 사무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사무적인 관리는 하나의기초를 세우기만 하면 족하다.

간단히 말해 교회 생활은 너무 인도를 의지할 필요가 없이  우리의 집회와 관리 방면의 사무를 간소화하여 봉사하는 사람들이 시간을 내어 새로 들어운 사람들을 더많이 심방하고 목양하고 돌보는 일을 할수 있게 해야한다

 

장로들의 장로 집회도 간단히 해야 하며 너무 길게 할필요가 없고 한 가지 일이 정해지면 다시 교통할 필요없이  바로 집행하면 된다 이렇게 하여 많은 시간을 절약하여 목양하고 돌보는 일을 할수 있다. 결론적으로 장로들은 목양과 심방의 일을 더 많이 해야하며 소지역 봉사자와 소그릅 봉사자들을 데리고 함께해야한다.

 

베드로에게 주님은 3번씩이나 나를 사랑하느냐라고물어보실때  주님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물어보았으나

베드로는 휄로우의 사랑으로 대답했다.그러므로 주님의 마지막질문은 휄로우의 사랑으로 질문을 하시면서

베드로를 목양하셨다.

요18장에서 베드로는 숫불를 쬐면서 주님을 3번부인하셨다. 그리고 요21장에서 주님은 숫불에 생선과 떡을 구워놓고 베드로를 목양하셨다.

 

 

[원본출처] 교회안에서 어떻게 봉사하는지에 대한 교통 - Lord,keep my heart. :: 교회들(http://blog.chch.kr/k505/18284)

 



주님


찬송가 2010-05-0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14997.html

 

주 님

 

 

                                                                                 A. B. Simpson

 

한 때는 축복만을 원했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원합니다.

한 때는 신앙이 막연한 감성이었습니다. 이제는 확실한 말씀입니다.

한 때는 주님의 선물만을 원했습니다. 이제는 생명이신 주님 자신을 원합니다.

한 때는 신유의 은총만을 구했습니다. 이제는 새 삶의 능력을 구합니다.

 

 

한 때는 고통의 수고로 느껴지던 것이 이제는 충만한 믿음 속의 감사입니다.

한 때는 구원의 확신이 없었으나 이제는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누립니다.

한 때는 초조하게 매달렸으나 이제는 주께서 나를 붙들어 주십니다.

한 때는 표류하는 인생이었으나 이제는 닻을 주님의 사랑에 내렸습니다.

 

 

한 때는 성급히 계획을 세웠으나 이제는 기도를 앞세우게 되었습니다.

한 때는 불안과 근심이 있었으나 이제는 주께서 근심 걱정을 맡으셨습니다.

한 때는 내가 원했던 것이 있었으나 이제는 주께서 나에게 원하십니다.

한 때는 끊임없이 요구했으나 이제는 끊이지 않은 찬양이 있습니다.

 

 

한 때는 모든 것이 나의 일이었으나 이제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일이 되었습니다.

한 때는 내가 주님을 사용했으나 이제는 주께서 나를 사용하십니다.

한 때는 내가 세상권력을 원했으나 이제는 전능하신 주님을 원합니다.

한 때는 나 자신만을 위해 일했으나 이제는 주님만을 위해 일합니다.

 

 

한 때는 내가 주님 안에 있기를 원했으나 이제는 내가 주님을 소유하고 삽니다.

한 때는 어린양들이 죽어가고 있었으나 이제는 생명으로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한 때는 죽음을 기다렸으나 이제는 주님 오심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내 영원한 소망이 주님 안에 튼튼하게 뿌리를 내렸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영원토록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모든 것은 주님 안에 있으며 모든 것 안에 주께서 계시나이다.




 



지방교회를 정통으로 인정한 풀러신학교는 어떤 곳인가요?


성경백과 2010-05-05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k505/14996.html

무엇이든지 사물을 파악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며 숲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숲 속에 내러가서 숲을 구성하는 나무 하나 풀 하나를 다 검토한 후 그 결과로 숲을 판단하는 식입니다.

풀러신학교가 어떤가 하는 질문에 대해 위 둘 다로 보더라도 한국교계 대다수는 풀러신학교를 꽤 괜찮은 학교 즉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복음을 전파하여 죄인을 구원받게 하는 일을 기준으로 볼 때 전혀 문제가 없는 학교라는 결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많은 목회자분들이 풀러에서 수학하고 돌아와서 거의 모든 신학 대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목회현장에서 수고할 수 있다는 것은 이것을 뒷 받침하는 좋은 증거입니다.

이제 숲으로 보고 또 나무로 보는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보겠습니다.

1. 숲으로 본 풀러신학교

풀러신학교는 소위 신복음주의 운동 계열이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출신인 헤롤드 오켄가가 1947년에 초대 교장으로 재직한 학교입니다. 그는 미국복음주의 협의회 초대회장이고  미국 전국를 카바하는 기독교 월간지인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의 이사장을 25년간 역임했습니다. 그는 빌리 그레함의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미국복음주의 협의회,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 빌리 그레함을 무난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풀러신학교를 그런 관점으로 무난하게 받아들입니다. 사실은 이들이 현재 미국 개신교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나무로 본 풀러신학교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 복잡합니다. 이렇게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한국의 한경직 목사님이 졸업하신 프린스턴 신학교는 미국 기독교의 근간을 이루는 중심 축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1920년대에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물결이 이 학교에 휘몰아쳤습니다. 그 결과 이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실증적 과학적 결과를 성경해석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근본주의 5대 강령 등을 내세우며 합리적 사고로 성경기록을 의심하는 풍조를 단호하게 배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1929년에 메이첸 등 보수적인 교수들이 자유주의의 영향아래 놓인 프린스턴 신학교를 떠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웁니다. 그런데 1937년에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도 못마땅하다며 더 성경적인 신학교를 세운다고 나간 사람들이 메켄타이어를 중심으로 Faith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졸업했으나 이런 교리싸움에 식상하고 단순히 복음을 전하여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에만 동의하면 어떤 교단 배경이든 포용하는 헤롤드 오켄가를 중심으로 풀러신학교가 세워졌습니다.

이것을 한국에 대입해 본다면... 프린스턴 신학대학교,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교(합동, 총신대 쯤?), Faith 신학교 (경기도 광주소재 개혁신학대학원 대학교?), 풀러 신학교...?

그러므로 가장 정통 장로교요 성경적인 장로교임을 자부하는 훼잇 신학교 또는 경기도 광주 개혁신학교 기준으로 본다면 통합교단 합동교단 등 대다수의 한국 장로교단 신학이 못 마땅할 것입니다. 이런 소수의 시각을 가진 대표적인 신학자가 바로 경기도 광주 소재 계약신학대학원 교수인 김효성 박사입니다. 그분 시각으로는 한국개신교의 주류인 통합교단, 기장도 자유주의 쪽 즉 거의 이단 수준이고 순복음교회 등 은사주의 계열 교단들도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풀러 신학교도 문제가 있다고 볼 것입니다. http://www.oldfaith.net/modernch/04modernch.htm

그러나 통합교단이나 합동교단등 대다수 한국 개신교의 시각으로 볼 때 풀러 신학교의 복음주의 노선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총신대 박용규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풀러 신학교같은 소위 복음주의 운동이 한국 교회를 깨우고 성장케 한 원동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복음주의 운동에서 온누리교회, 남서울교회, 지구촌교회, 사랑의 교회 등이 그 주역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박용규, 한국교회를 깨운 복음주의 운동, 두란노, 1998). 그러므로 한국에서 풀러신학교 복음주의 노선이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한국개신교 거의 전체가 문제가 있는 말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풀러 신학교를 대표하는 총장과 신학 대학장 등이 직접 나서서 지방교회 대표자들을 상대로 2년에 걸쳐 조사하고 연구한 후 내린 결론-워치만니와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는 이단이 아니다. 편하게 교제할 수 있는 성경적인 믿는 이들이다-이라면 한국 개신교 내에서도 동등하게 존중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이것을 미국에서의 문제라고 애써 외면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옹하는 것이 될뿐입니다. 그러나 참되게 진리를 아는 대부분의 성경신자들은 그렇게 편협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상식적이고 균형잡힌 사고를 할줄 압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주의적인 태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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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본성


진리의말씀 2010-05-0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14983.html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순수한몸을 가진 사람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사탄이 자신을 죄로 사람의 몸속에 주입하므로 우리의 몸은 부패하게되었고. 사람의 몸은 육체가 되었다. 육체안에서 우리는 사탄과하나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탄의 거처가되었기 때문이다.

 

사탄은 죄의근원이다. 죄는 사람속으로 주입된 사탄의 본성이다. 사탄은 죄로서 우리의 육체안에. 즉우리의 타락한 몸 안에 있다. 사탄과 죄와 육체는 함께한다.

죄의성품(죄의본성) 은 사탄에게 속한것임. 죄의 본성이 우리육신의몸(옛사람)을조정하여 죄를 짓게 하였다. 이제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었으므로 죄의성품은 우리를 조정할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을때 가능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을때 죄의 본성이 여전히 있으므로 우리는 죄를 짓게 된다.

 

요일 3:9 절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저도 범죄치 못함은 하나님께로 낳음이니라.

본래는 죄가 우리안에서 왕노릇하였으나 (롬 5:21)  다시는 저에게 종노릇하지 않게된다.(롬 6:7) 우리자신의기초위에 서 있다면 우리는 옛사람의 모든 것이 여전히 우리몸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것이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안에 서 있다면 우리는 모든것을 소유하게된다.

우리안에 죄의 본성과 죄의 권세로 부터 해방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이 간접적인 방법을 쓰고 계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분의 죄의 본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제하신다.  우리 옛사람이 주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밖혔기 때문에 전에 죄의 도구였던 욱신의 몸도 실직하게 되었다.(롬 6:6 원문참조)

 

비롯 옛주인인 죄의 성품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를 섬겼전 노예가 이미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그것은 더이상 우리몸을 지배할수 없다.

도박꾼의 손이 실직하고 맹세하는자의 혀가 실직하였기 때문에 이제 이 지체들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러야한다.(롬 6:13)

그러므로 우리가 죄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하는 것이 죄를 이김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욱 성경적이다. 롬 6:7 절과11절 이 말한 죄에서 벗어남과 죄에대하여 죽고 라는 말씀은 우리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권세가 아닌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실제하는 권세로 부터 해방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죄의본성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권세로 부터 해방되는 길은 알고 또한 해방의 정도가 날로 증가한다.

 

죄는 사탄의 또 다른이름이다.  죄와 죽음과 사탄은 우리의 육체안에있다.그러므로 우리의 육체는 사탄의집회장소라고 말할수있다. 여러분이 사탄을 보고 싶다면 여러분의 육체를 보라. 사탄은 거기에 있다.

우리의 육체는 죄와 죽음과 사탄으로 복합된 일종의 혼합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는 얼마나 악한지를 보아야한다, 롬8장7절에서 육체에 둔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한 복종할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할수없는 본성을 가지고있다. 이육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없다.

우리는 육체가 죄라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사탄의 또다른 이름은 악이다.죄가 우리안에서 활동할때 악이다. 주님은 요17장 에서 우리를 악한자에게서 지켜주시기를 기도하셨다. 그러므로 악은 사탄이며 악은 죄이고 죄는 사탄이다.결국 타락한사람은 마귀의 자녀다.. (요일 3:10) 타락한사람은 인격과 본성에서 사탄과하나 되었다. 사람과 사탄이 하나 되었으므로 사람의 자녀들은 사실상 마귀의 자녀들이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와 함께 죽으셨을때. 그곳에서 사탄과 함께 죽으셨다.

그분은 사람의 본성을 가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이와같이 그분은 마귀를 멸하셨다. 우리 모두는 그분의 주권적인 지혜때문에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

사탄은 사람의 육체 안에 들어옴으로 유익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사탄자신이 덫에 걸렸다는 것을 몰랐다.

어느날 하나님의아들께서 오셔서 그덫의 모양이 되셨고 이덫을 십자가로 가져가셨다.

그리스도는 육체안에서 육체를 처리하셨다. 그리스도는 육체안에서 죄를처리하셨다. 그리스도는 육체안에서 사탄을 처리하셨다.

 

우리가 아무리 선할지라도 우리의 육체는 사탄으로 인해 부패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타락한 모든 사람에게그분의 목적을 위해 사람의 영을 보존해 주신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마귀가 부패시키는 일을 못하도록 사람의영주위에 경게선을 그으시고 이영을 보호하신 것같다.

하나님은 사탄이 사람을 손상시키도록 허락하셨지만. 그 정도까지만 손상시키도록 허락하셨다. 사탄은 사람의 몸안으로 들어갔고. 사람의 혼을 손상시켰지만 하나님은 그분자신을 위하여 사람의영을 보존하셨다. 

 

고전6장17절은 주님과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영입니다. 라고 말한다. 주님과 우리가 한영인것 때문에 주님께 감사드린다. 이 영은 사람의영과 하나님의 영이 연합된 신성한 영이다.

롬8장 4.9.10절과  갈라디아서 5장 25절의 말씀에서 성경 번역자들은 이구절들에 언급된 영이 성령인지 아니면 사람의 영인지를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영을따라 행해야한다.

우리는 우리의영안에서 성령을 누리며 성령과 함께 우리의 영을 누린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처신해야하며 무엇을해야 하는지에 관한 많은 질문을 같고있다. 어떤형제들은 머리를 어느정도까지 기를 수 있는가를 생각할지 모른다. 고린도 전서 11장은 남자가 긴 머리를 하고 있으면 수치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얼마나 긴 것이 긴 머리인가. 아무도 이것을 결정할수 없다. 이러한 질문들을 가지고 나에게 오지 말라. 조언자 라 불리시는 한분이 우리 안에 사신다. 그분께 가서 그분과 논의하라. 그럴때 여러분은 해답을얻게 될것이다.

   

법리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통치 행정안에서 죄와 죽음과 사탄이 있는 육체는 완전히 멸해졌다. (롬 8:3.요 3:14.히 2:14)    육체가 이미 처리되고 멸해졌는데도 여전히 우리에게 육체가 남아 있다.

이것은 육체가 여전히 하나님을 위해 어떤 용도가 있기 때문이다. 법리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끝난것이지만. 실질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육체와같은 그러한 악한 것이 없다면. 우리는 그렇게 필사적으로 기도하지 않을지 모른다.

이 육체는 우리를 도와 주님을 부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우리는 소망없는 육체로 인해 우리의 영으로 돌이키지 않을수없다. 이육체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도록 도와 주는. 이골칫거리인 육체가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주님께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 악한 것이다. 그러나 육체가 우리를 주님께로 돌이킨다면. 이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교회안에서 어떻게 봉사하는지에 대한 교통


그리스도인의교회생활 2010-05-01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14838.html

딤전 5장17절 :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지방교회에서 장로들의 주된일은 목양하고 말씀과가르치는 것이다.여기서말씀은 교리를 일반적으로 강론하는 것을 가리키며. 가르친다는 것은 특정한일들에 관하여 특별히 지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교회의 증가를 더디게 하는 것에는 두가지 부족함이 있다."

첫째. 목양의 부족이다. 양떼에게는 영적인 공급이 부족하다. 둘째는 감독은 적고 관리가 지나치게 많은 것이다. 교회를 관리하는 것과 교회를 감독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관리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일을 하는 것. 즉 자신이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갖는 것이다. 감독하는 것은 다른이들이 그것을 하게하고 책임을 갖게 하면서 당신은 그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성도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면 우리가 그들을 지도해 줄수 있고 . 그들이 실수할때는 수정할수 있도록 그들을 도울수 있다.

 

장로는 두가지를 해야하는데 목양과 감독이다.  일을 맏긴뒤에는 이제 그들을 감독하기만하면 된다.

감독한다는 의미는 스스로 일하는 것을 피하고 대신에 성도들로 하여금 일을 하게 하며. 결정을 내리도록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실수한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이 이렇게 한다면 동역자들과 인도하는 형제들은 행복하며 자유로워 질 것이다. 왜냐하면 일들이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손에 있지 않고 모들 성도들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도 직분을 가져옴"

지방교회는 장로의 지휘 아래 있다. 장로들 은 가르치고 목양해야한다.  목양하는 것은 쉽지않다. 목양은 말씀을 사역하는 것과 성도들을 방문하고 접촉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로들 할수 있는 일은 너무나 많다.   불행하게도 어떤 장로들은 너무 바쁜 직업을 가지고 있다. 모든 집회를 참석하는 것만도 그들에게는 벅차다. 어던 장로는 이미 예순이고 일흔이다. 세상의 기준에 따르면 이미 은퇴했어야한다. 그들의 힘은 이미 예전 같지 않고 무언가 배우기도 늦었다. 여기 두개의 문제가 있다. 하나는 직장과 직업으로 너무 바쁜 장로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너무 나이든 장로들이다. 수를 채우기 위한 장로들이 아니라. 진실로 유용한 장로들이 되기 위해 전시간으로 섬기는 장로들이 필요하다.

 

예를들어 우리중 셋이 장로로 한 자방에서 섬긴다고 가정해 보자. 주님의 주권에 따라  우리들 중 누구도 커다란 문제를 만든 일이 없다.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흠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성향은 결코 다른 이들과 책임을 나누려 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온전하게 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우리 셋에 의해서만 이뤄진다. 자연적으로 우리가 일할수록 우리는 늙어가게 된다.

 

우리셋모두가 주님을 사랑하고 누구도 우리에게  장로가 되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장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동안 그 누구도 감히 장로가 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따라서 새로운 장로는 결코 세위지지 않는다. 우리 세명이 보좌에 너무 오랜 시간 앉아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다른 이들과 부담을 나누지 않고 다른 이들로 우리의 일을 하게 하도록 온전하게 하지 않은 오래된 습관은 우리의 일이 포화점에 이르게 한다.

이들 장로들은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거기에 아무런 증가가 없고 어떠한 자손들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관념을 바꿔야한다.

우리는 관념과 체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포화점에 도달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한 문제를 돌파하지 못한다면 포화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게게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장로들이 뒤로 물러나서 다른 이들을 장로가 되게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체계가 바뀌지 않는다면 심지어 다른 이들이 들어온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똑같은 것을 하리라는 것을 당신은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모든 것을 개혁하고 모든 사람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체계와 구조를 바꾸는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던것을 계속해야한다. 그러나 새로운 힘 신선한 힘을 더해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을 온전케해야하고 다른 이들을 일 안으로 이끌어야 한다.

 

우리가 만약에 새로운 봉사자들을 온전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다.당신이 만일 이사람이 쓸모없고 저 사람에겐 소망이 앖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틀린 것이다.  당신이 어디를 가던지 당신은 쓸모없는 자들을 유용한 자들로 만들어야 한다. 당신은 어떤 재료도 유용하게 사용해야 한다. 당신은 모든 이들을 온전케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우리는 심지어 동물들도 훈련받고 온전하게 될수 있다는 것을안다.  인간들은 당연히 변할수 있고 온전케  될수있다. 우리는 우리의 환경을 이용하고 사람들을 온전케 해야 한다.

 

어떤 지방에선 동역자들과 장로들은 매우 유능하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이들을 자신들 아래 압제시키고 다른 이들을 꾸짖는다. 그들은 모두를 멸시하며 이사람도 쓸모가 없고 저사람도 쓸모가 없다고 여긴다. 이것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이다.  다만 그들이 해보도록 하라. 결과는 오히려 장로들이 하는 것보다 더 좋을수 도 있다. 사람이 할 수있는 최악의일은 다른이들을 억제하는 것이다.

절대로 다른 이들을 억제해선 안된다. 대신 당신은 그들을 온전케 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할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일을 하기 위해 내가 몇명을 온전케 하였는가 이다. 우리의 관념과 체계를 바꿔야 한다.  

 

장로들은 통제를 실행하지 않기를 충고한다. 당신의 교회를 관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 모든 시간을 쏟지않기를 원한다.  동역자들에게 최고의 자유를 주어야한다.  당신은 당신의 손을 놓고 그들이 자유롭게  일할수 있게 해야한다. 우리는 오직 공급과 방향과 지원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필요없는 관리들을 제거해야한다. 너무 많은 관리와 통제가 있을 필요는 없다.

나는 어떤사람도 교회 안에서 쓸모 없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 자유롭게 살고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주인의식의 분위기가 필요하다. A 학점.     B 학점    C 학점.

C학점.나도안하고 다른이도 못하게하는것.B학점. 내가하는것. A학점. 다른이로하게하는것이다.

 

교회의 소위 관리하는 것이. 많은 성도들을 죽게하는 이유다.  많은때 우리가 더 관리하려 하면 더 많은 문제가 형제들과 자매들 가운데 있게 된다. 성도들로 섬게게 하라. 그들로 무언가 할수 있는 자유를 갖게하라. 교회가 그들의 것임을 느끼게 하고. 교회가 혼란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성도들이 실패하도록 하게 하고.  실수할수있는 기회를 주라. 그들이 봉사할수있도록 해줘야한다.

 

이형제님의 특징은 모든 형제 자매들을 봉사하도록 썻다는 것이다. 어느곳에가든지 그곳의 형제자매들을 썻다. 어떤 형제자매인가를 보지 않고 섰다. 모든 성도들은 온전케되어야하고  쓰임받아야한다.

 

지방교회에서는 관리나 치리가 첫째가아니고 목양이 첫째가 되어야한다. 가장 중요한 일은 목양이다.

행 20:28절 성령이 너희를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의자기피로사신양떼를 목양하게 하셨느니라. 여기의 양떼는 큰양떼가 아니고 작은양떼이다,

 

대집회는 약간의 도움을 줄수있지만 한사람이 한사람을 목양하는 것이 중요하다.

 

1.주중에 하루정도 시간을 내어 목양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중에 목양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증가가 없다.

   심방카드를 만들어서 성도들에게 주고 찻아가도록해야한다. 한마리의 양이라도 찿아내야하고 즐거이 기

   뿐 마음으로 데려와야한다. 심방명단이 있다면 누가 왔는지 안왔는지를 알수있고 이럴때 기도하고 움직

   일수있다. 현재 명단에 있는 약한 지체들은 찿는 것만으로도 10%의 증가를 가져올수있다.

 

2.목양이 교회생활의 80%를 차지해야한다. 목양하는 것에 주의해야하지 집회를 세우는 것에 주의하지 말라

   집회가 많으면 목양을 할수있는 시간을 뺏게 된다. 대집회는 1주일에 한번하고. 작은 단위의 집회를 해야

   한다.

 

3.신성한계시의 고봉의 3방면 첫째. 진리의 회복.둘째. 생활의 회복. 셋째. 목양의 회복이다.

 

집회를 간소화하고 목양과 심방을 더 많이 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침례 받은 후에 남아 있지 못하게 되는 주요한 원인은 우리가 그들을 돌볼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봉사의 대부분은 집회를 유지하는 것이고 집회사용하여 사람을 붙잡아 주고 목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봉사자들은 집회를 유지하기위해 있다. 결국집회 이외의 목양과 가르침과 심방과 위로하는 것과 같은 참된 봉사의 일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침례받은 후에 돌보고 양육하는 사람도 없이 살든지 죽든지 그냥 내버려두므로 사람들은 빼앗기거나 잃어 버리게 되는데 이것은 너우 애석한 일이다.

 

장로들은 마땅히 제도를 고쳐 목양의 일을 더 많이 하게 해야 하며 장로가 해야 할 뿐 아니라 소지역 책임자들이 책임지고 해야하고 모든 봉사하는 사람들이 해야 한다. 장로가 해야 할뿐 아니라 소지역 책임자들이 책임지고 해야하고. 모든 봉사하는 사람들이해야 한다. 특별히 항상 집회에 오는 성도들은 모두 목양의 일을 해야한다.  이러므로 정기적인 집회를 한번 줄이고  그 시간 만큼 심방하고 목양하고 목양하기 위해 가는 것이 가장 좋다. 이외에  장로와 소지역 책임자는 사무적인 일들을 줄여서 사무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사무적인 관리는 하나의기초를 세우기만 하면 족하다.

간단히 말해 교회 생활은 너무 인도를 의지할 필요가 없이  우리의 집회와 관리 방면의 사무를 간소화하여 봉사하는 사람들이 시간을 내어 새로 들어운 사람들을 더많이 심방하고 목양하고 돌보는 일을 할수 있게 해야한다

 

장로들의 장로 집회도 간단히 해야 하며 너무 길게 할필요가 없고 한 가지 일이 정해지면 다시 교통할 필요없이  바로 집행하면 된다 이렇게 하여 많은 시간을 절약하여 목양하고 돌보는 일을 할수 있다. 결론적으로 장로들은 목양과 심방의 일을 더 많이 해야하며 소지역 봉사자와 소그릅 봉사자들을 데리고 함께해야한다.

 

베드로에게 주님은 3번씩이나 나를 사랑하느냐라고물어보실때  주님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물어보았으나

베드로는 휄로우의 사랑으로 대답했다.그러므로 주님의 마지막질문은 휄로우의 사랑으로 질문을 하시면서

베드로를 목양하셨다.

요18장에서 베드로는 숫불를 쬐면서 주님을 3번부인하셨다. 그리고 요21장에서 주님은 숫불에 생선과 떡을 구워놓고 베드로를 목양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