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실제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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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교회 박종운님
고린도전서 1:9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통 안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고린도 전서 1장9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아들의 교통 안으로 부르셨다고 말한다.
교통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코이노니아" 공동소유. 공동참여.공동 누림.이라는 뜻을가진다.
신약은 이 교통을 잔치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사복음서에서 주 예수님은 잔치가 준비되고 사람들이 거기에 초대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마 22:1-3.)
어떤사람은 하나님이고.잔치는 그리스도이며. 노예는 첫번째 사도들이다.
우리는 모두 놀라운 잔치에 초대 받았다. 이잔치는 모든것을포함하신 분이신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잔치이시다. 이 잔치가 곧 교통이다.
고전 1장 9절에서의 교통은 하나님의 아들의 교통이지만.10장 16절에서 이 교통은 주님의 몸과 피의 교통이다. 16절: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피의 교통이 아니 겠습니까.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 도의 몸의 교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상에서 주님의 피.곧 언약의피를 기념하고.주님의 몸을누린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할수 있게됨을말한다
아들의교통안에 부르셨다는것은 우리를 잔치에 초대하셨을 뿐아니라. 주님의상에초대하셨다는 뜻이다.
구약에는 교통이란 단어가 없다. 시편133편에서 형제들의 연합이 있다. "형제들이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답고 즐거운가!"라고 말한다. 연합는 외적인것이고. 교통은 내적인 것이다. 생명이 없어도 연합은 가능하다. 교통은 생명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교통은 생명의 상호교류이다.
신약에서 교통이란단어가 처음으로사용된곳은 사도행전 2장 42절이다. 오순절날 구원받은 사람들은 사도들의 교통안에 견고히 머물렀다.고 말했다.
요한일서 1장3절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는 것은 여러분도 우리와 함께 교통을 갖도록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통은 아버지와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교통은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의 교통과 하나님의 자녀들과 삼일하나님 사이의 교통을 말한다.
우리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수직적으로 우리와 다른 믿는 이들 사이에는 수평적인 교통이있다.
이교통은 상호교류일뿐아니라. 상호누림 이다.
교통에대한 가장 좋은 일례는 신체 안의 혈액순환이다. 피는 바로 지금 여러분의 몸을 통과하여 순환하고있다. 신체에 혈액 순환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 안에는 교통이라고 불리는 영적순환이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이순환이 무시되거나 전적을로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슬픈일이다.
이교통안으로 부름을 받은 이들로서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그분을 누리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의 교통 안에서 우리는 누림을 갖는다. 우리가 이 잔치를 함께 누릴 때 우리는 교통. 곧 공동 소유를 갖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들의 교통안으로 부르셨다. 이교통은 삼일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 그영을 포함한다. 그것은 육체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교통이다.
2.십자가의체험은 수직적인 교통과 수평적인 교통 모두를 깊게 하여. 우리가 몸의 생명을 알고 몸의 교통 안에 살수 있도록 한다.
"눅 14:16-17 : 어떤사람이 큰 잔치를 베플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습니다.잔치 시간이 되자. 그가 자기 노예를 초대 받은 사람들에게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십시오 라고 전하였으나. 그들의 모두 하나같이 사양하얐습니다. 첫째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 보아야 하니. 부디 양해해 주시오라고 하였고.
다른사람은 내가황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러가는 길이니.부디양해해 주시오.라고 하였으며.
또다른사람은 내가 방금 장가들어 아내를 맞이하였으므로 갈수가 없소. 라고 하였습니다.
그노예가 돌아와서 주인에게 이 일를 그대로 보고하자. 집주인이 화가나서 자기 노예에게 빨리 도시의 큰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팔다리 못 쓰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하고 하였습니다.
이 글을 접하면서 우리 인간의 존재는 얼마만큼 작고 어리석은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얼마나 많은 욕심을 가지고 있는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오 주 예수님!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시고 광대하신 주님을 누리는 기회를 갖게 된 우리들을 온전케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衛星이 잡은 멋진 宇宙 그래픽 ★ ★ 별의 세계★
창 2:21-23.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 에게 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라라하니라 .
엡 5:25-27.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5장은 성경에서 유일하게 창세기 2장의 말씀을 설명한 곳이다. 만일 우리가 이장을 자세히 상고 한다면 이 장이 우리가 주의할만한 장임을 느낄 것이다.
"그리스도 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라는 말씀 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얼마나 보배로운지!
우리는 자신을 구속이 필요한 죄인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수년 동안 이 가르침은 우리 안에 주입되어 왔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여기서 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주님을 찬미하자.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 아님을 기억하라. 에베소서 5장는 "하나님이 영광 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말한다. 종종 우리는 교회를 구원받은 많은 죄인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한면으로 이것은 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두가지를 비슷한 것으로 보고 교회가 은혜받은 죄인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구원받은 죄인을 언급할때 우리는 즉시 죄와 타락의 전체적인 배경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교회는 그의 아들 안에 있는 신성한 창조인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일의 기초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었다.(엡 1:10-11) 그러므로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본 주 예수의 죽으심의 다른 방면을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분명히 볼수 없다.
로마서의 관점은 사람의 타락으로 부터 시작하고 그리스도 께서 죄인이며 원수이며 경건치 않은 사람들을 위하여 죽은 것으로 부터 시작한다.(롬 5장) 즉 로마서는 죄인들로 시작하는 반면에 에베소서는창세로부터
(엡 1:4) 출발점이 땅이아니라 하늘들에 속한 영역이며.시간이 아니라 영원이다.
중심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인 것이다.(엡 5:25)
그러므로 로마서는 우리가 죄를 범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그 메세지들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사랑이며(롬 5:8) 에베소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말한 사랑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인 것이다. 이런 사랑은 근본적으로 죄와 무관한 것이다. 이구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속죄가 아니라 교회를 창조하심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이 목적을 위하여 자신을 주셨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한 방면은 완전히 적극적인 것으로서 . 이는 특별히 교회에 대한 그분의 사랑인 것이다. 이점에서 그분의 죽으심은 죄와 죄인의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이사실을 사람 속에 깊이 새겨주기 위하여 바울은 창세기 2장의 일로 설명하고 있다.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많은 비밀들 중의 한 가지 이므로. 우리눈이 열릴때 우리는 그분을 경배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창세기 3장 이후에는 가죽옷을 만든 것으로 부터 아벨이 제사를 드리는 것에 이르기 까지 구약 전체 안에 주 예수님이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말한 예표들이 많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 예표를 인용하였다. 우리는 이 점을 주의해야 하며 창세기 3장에와서야 죄가 들어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약에 죄와 무관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뜻하는 예표가 있다. 그 이유는 그분의 죽음이 타락 이후에 있지 않고 타락이전에 있기 때문이다. 이예표는 창세기 2장에 있다. 우리는 이 예표를 조금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