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포함한 범위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보기로 하자.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따라 분석하는데 있어서 편의를 위해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네 방면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많은 일이 아닌 한가지 거룩한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천 년 전에 주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 한번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 제 그분을 하나님의 오른 손으로 ...높여 지셨다.(행2:33). 이 역사가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중복될 필요가 없고 무엇이 더 추가 될 수도 없다. 십자가의 네 방면 중에 세방면은 우리가 이미 앞에서 상당히 자세히 언급했었다. 우리는 이것들을 먼저 요약해 보겠다.
1). 그리스도의 피는 죄들 을 처리하였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의 본성과 육체와 천연적인 것을 처리하였다.
3). 그리스도의 생명은 사람 안에 거하여 사람으로 새 창조가 되게 하고 사람을 능력있게 하였다.
4). 죽음이 천연적인 사람 안에 역사하여 내주하는 생명이 점점 표현되게 한다.
앞의 두 방면은 보완적인 것이고 마귀의 일을 멸하여 사람의 죄를 제하기 위한 것이다. 뒤의 두 방면은 보완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처음 두 방면은 아담의 타락을 인하여 잃었던 것들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고. 나중 두 방면은 아담이 들어가지 못했던 것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아담이 얻지 못한 것을 우리 안으로 가져 온다. 이것은 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단지 사람을 구속하는 역사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또한 이 구속역사가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도록 했음을 보여준다.
앞장들에서 우리는 그분의 죽음의 두 방면 곧 죄의 행위를 처리한 피와 죄의 본성과 육체를 처리한 십자가를 자세히 본 바 있다. 하나님의 영원 한 목적을 논의할때에 우리는 한 알의 밀알이신 그리스도로 설명한 세번째 방면을 간략하게 본 바 있다. 지난 장에서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볼때 우리는 그 밀알의 실제적인 나타남을 보았다. 그러나 이 네번째방면 (나는 이것을 십자가를 짊 이라고 칭하겠다).을 언급하기 전에 세번째 방면. 곧 사람안에 거하고 사람에게 봉사의 능력을 주기 위하여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해방되는 것에 관해 조금 더 말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대하여 말한 바 있다. 그분의 이 목적 안에 포함된 것은 아담이 누렸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다. 그 분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영으로써 그분과 교통할수 있는 한 족속을 얻고자 하셨다. 이 족속은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있고 하나님과 동역하여 대적의 가능한 모든 궤계를 파하고 원수의 모든 악한 역사를 제하며 하나님의 원래 목적을 온전케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인 것이다. 이제 어떻게 이것을 실현해야 하는가. 우리는 여전히 주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이 문제의 해답을 찾아야 한다.
주 예수님의 죽음은 능력 있는 죽음이고. 적극적이며 목적이 있는 죽음으로써 잃었던 위치를 되찻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죽음은 죄와 옛 사람을 처리하고 그 결과들을 제거했을 뿐 아니라 또한 이것보다 얼마나 많은 풍성을 이끌어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렘 48:11. 모압은 예로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치 포도주가 그 찌끼 위에있고
이 그릇에서 저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 그 맛이 남아 있고 향기가 변하지 아니 하였도다.
창 19:36-37.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오늘
날 모압족속의 조상이요. 작은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
의 조상이었더라.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허무는 것이다. 예레미야서 48장 11절을 읽어보면 우리는 이것에 대해 분명해 질 것이다. 모압사람은 롯의 자손이며.아브라함과 관련된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육체에 속한 사람들이다. 모압은 예로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않았으며 시련과 타격을 받지도 않았고 어려움과 고통을 거치지 않았다.
인간적으로 볼때 이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도주가 그 찌끼위에 있고. 이그릇에서 저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다고 말씀하셨다. 포도주가 발효되면 윗부분은 투명한 액체가 되고. 찌끼는 밑으로 가라 앉는다. 고대에는 여과기가 없었기 때문에 찌끼를 제거하기위해서는 술을 이그릇에서 저그릇으로 옮겨야만했다. 이렇게 수차례반복하여 옮김으로 찌끼를 말끔히 제거 할수 있게 된다.
모압은 이 그릇에서 저그릇으로 한번도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찌끼는 아직 제거되지 않았다.
이러한 까닭으로 모압은 그 맛이 남아있고 향기가 변하지 않은 포도주와 같았다. 모압의 맛은 항상 모압 본래의 맛이었고. 모압의냄새는 항상 모압 본래의 냄새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는 여전히 원래상태로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래 냄새를 원하지 않으시고 그 냄새가 변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주님을 믿은지 십년이나 되었는데도. 구원받은 그날의 맛이 십년 후에도 똑같은 사람을 본적이 있다. 이런 사람은 모압과 같이 맛이 그대로 남아있고. 냄새가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원래 습관과 본성과 성격을 제하고자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천연적인 것들은 다 제하고자 하신다.
아마 우리의 인생은 모압처럼 순탄한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많은 환난을 격어야 할것이다.(행 14:22.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드러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하고 기도하며 너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비시다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그럴지라도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찌끼를 제하고 우리의 원래의 맛을 제하는 주님의일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주님은 우리가 더 이상 우리자신의 맛과 타고난 냄새를 풍기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낡은 것들은 반드시 허물어져야한다. 주님은 여려분을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시고 또다시 저 그릇에서 다른 그릇으로 옮기시며. 이 환경에서 저환경으로 옮기시며. 이체험에서 저 체험으로 옮기신다. 매번 주님께서 여려분을 헐기 위하여 환경을 안배하실때 자연히 여러분은 조금씩 원래의 맛을 잃으며 원래의 냄새를 잃게 된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방식이다. 주님은 오는 조금 허무시고 내일 조금허무시어 결국에는 모든 지끼가 제해지고 우리의 맛이 사라지며 우리의 냄새가 바뀌도록 하신다.
오늘날 하나님의 많은 자녀는 분명 많은 일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별유익을 얻지 못한다. 그들은 많은 징계를 체험했고 그들에게 수많은 통제와 안배가 있었지만 그들은 풍성한 결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온유하고 부드럽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도 못하고.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못한다. 그 결과 그들은 많은 다룸을 받지만 그들의 잘못된 태도 때문에 영안에서 얻는 것이 별로 없다.
창세기 27장에서 우리는 탈취자를 본다. 야곱은 많은 손을 갖고 있었고 모든것을 할수 있었으며.누구도 그를 패배 시킬수 없었다. 야곱과 접촉한사람들. 곧 그의 아버지 . 그의형. 그의 삼촌은 모두 그에게 탈취당했다. 반대로 야곱은 항상앞서 나아갔다. 그는 그의 형과 아버지와 삼촌에게서 이득을 취하였다. 그는 심지어 라헬과 레아와 그들의 두 하녀에게서도 이득을 취하였다.
그러나 라헬이 죽을때에 야곱은 잃는 고통을 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손실조차도 이득을 산출하였는데 그 이득은 베냐민이었다. 37장에서 야곱은 또 다른 손실을 겪는데 그것은 요셉을 잃는 것이었다.
이시점부터 계속 야곱은 하나씩 하나씩 잇달아 잃었다. 마침내 47장에서 야곱은 생명의 충만을 얻었다.
생명의 충만이 축복이며. 축복은 바로 생명의 넘쳐흐름이다. 여러분이 생명으로 충만하여 차고 넘칠때. 이생명은 다른사람들 안으로 넘쳐흘러갈 것이다. 이 넘쳐흐름이 축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27장에서 탈취자를 보고 37장에서 변화된 사람을 보며. 47장에서 성숙된 사람을본다. 야곱의 변화는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를 만지신 때에 시작되었으며 (32:25). 변화의 과정이 비교적 완성된때인 37장 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37장에서 야곱은 아직 생명의 충만인 성숙에 이르지 않았다. 생명의 충만을 얻기위해 야곱은 마지막단게의 처리들. 곧 헤브론에서의 처리들을 체험해야했다.
축복은 생명이 성숙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넘쳐흐르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라는 통로 없이는 그분 자신을 다른 사람들 안으로 흘러보내실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욱체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흐르실수 없엇을 것이데. 왜냐하면 통로가 없엇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흐름은 통로로서 인성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통로로 사용하실수있는 유일한 인성은 하나님으로 적셔지고. 하나님이 스며든 인성이다. 이러한 이유로 야곱은 성숙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축복하지 않았다. 심지어 라반과 함께 이십년을 지낸후 그의 형 에서를 만났을때에도 야곱은 에서를 축복하지 않았다. 그는 이집토로 내려갔을때에야 땅에서 가장 높은 통치자인 바로를 축복하였다.(창 47:7.10.) 그때 야곱은 하나님으로 충만하였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은 생명의 성숙에 달렸다.생명의 성숙은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는 문제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으로 충만할때 여러분에게서 하나님께서 넘쳐흐르실 것이고.여러분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축복할수 있다. 축복에 관한 이러한 이해는 책을읽어서 얻는 것이 아니다. 오직체험을 통해서 만 이러한 이해를 얻을수있다.
야곱의 탈취하는 손은 결국 축복하는 손이 되었다. 창세기 25장에서 우리는야곱이 심지어 그 어머니의 태속에 있을때부터 탈취하기 시작했음을 본다. 야곱는 탈취하는 것에 있어서얼마나 능숙했는지. 그러나 창세기 47-48장에서 우리는 이 탈취하는 두 손이 사람들을 하나님의임재안으로 인도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누릴수 있도록 하나님을 사람안으로 공급하는 축복하는 두 손이 된것을본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의 성장과 성숙을 본다.
탈취자요 발뒤꿈치를 잡는 이가 그 당시에 이 땅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바로 보다더 위대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바로는 축복할 수 있었다. 그는 생명의 길에 의해 그러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충만하게되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생명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주님은 야곱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창 32:27) 주님께서 이미 야곱의 이름을 알고 계셨는데 왜 이 질문을 하셨는가. 이러한 질문으로 인해 야곱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깨달았으며 자신이 야곱. 곧 빼앗는자 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브니엘에서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셨지만, 그곳에서 야곱은 이 새로운 이름을 많이 체험하지 못했다. 야곱이 실질적으로 새롭게 되고 새로운 사람. 변화된 사람이 된 것은 벧엘에서 였다.
창세기에 기록된 야곱의 일생에서 우리는 조성된다는 것의 의미를 볼수 있다.
야곱은 매우 낮은 수준에서 시작했다. 그는 모태에서 형과 다투었으며. 태어날때에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앞서려고 했다. 그는 교활하고 탐심이 있었으며 항상 사람들을 이용했다. 그는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삼촌을 속였다. 그러나 결국 그의 삼촌과아들들에게 속임당했다. 그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에 그는 자신이 기근에 처해있음을 발견했다.
야곱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거듭해서 그를 파쇄하고 계셨다. 그는 갑작스럽게 이런일 저런일을만났다. 매번 그가 만난 일들은 그에게 고통을 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야곱이 하나님의 손길아래서 이 많은 고난을 체험한 후에 결국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만진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야곱이 이집트에 갔을 때 그것을 볼수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맑고도 장엄한 한 사람을 볼수 있다. 그는 자기 아들에게 은혜와긍휼을 구할 정도로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아브라함이 말할수 없는 신언을 할 정도로 수정처럼 맑았으며. 이삭이 줄수 없는 축복을 줄수 있었다.
그는 또한 바로조차도 고개를 숙여 그의 축복을 받을 정도로 장엄하게 되었다. 이것은 본래 그렇게 비천했던 야곱이 하나님의 파쇄하시는 일을 통하여 이렇게 하나님께서 쓰실수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야곱은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이다.
창 47:7 요셉은 자기 아버지 야곱를 모시고 와서 바로를 만나게 하였다.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고 나니.
결국 우리는 야곱이 노년에 그러했던 것처럼 다만 우리의 손을 뻗어 다른 이들을 축복하는 것만을 알게 될 것이다.(창 47:7.10.48장. 49:1-28). 야곱의 노년에 그의 유일한 직업은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이 그의 직업이었다. 여러분이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여러분은 다스리는 권위를 갖게 될것이다.
야곱: 변화의 과정을 통해 생명이 성숙되고 생명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사람의 본
창세기 25장에서 우리는야곱이 어머니의 태속에 있을때부터 탈취하기 시작했고. 27장에서 탈취자를 보고 37장에서 변화된 사람을 보며. 47장에서 성숙된 사람을본다. 야곱의 변화는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를 만지신 때에 시작되었으며 (32:25). 변화의 과정이 비교적 완성된때인 37장 까지 계속되었다.
라헬이 죽을때에 야곱은 잃는 고통을 당하기 시작했다. 37장에서 야곱은 또 다른 손실을 겪는데 그것은 요셉을 잃는 것이었다. (창 37:32-35. 그채색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25장에서 야곱은 빼앗는 자였다. 그러나 37장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었을때. 야곱은 전혀 달랐다. 37장에서 야곱은 아무런 재능도 능력도 없는 것 같았다. 이것은 그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37장에서 야곱은 아직 생명의 충만인 성숙에 이르지 않았다. 생명의 충만을 얻기위해 야곱은 마지막단게의 처리들. 곧 헤브론에서의 처리들을 체험해야했다.
야곱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거듭해서 그를 파쇄하고 계셨다.
그는 자기 아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구할 정도로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었다.
주님은 야곱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창 32:27) 주님께서 이미 야곱의 이름을 알고 계셨는데 왜 이 질문을 하셨는가. 이러한 질문으로 인해 야곱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깨달았으며 자신이 야곱. 곧 빼앗는자 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브니엘에서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셨지만, 그곳에서 야곱은 이 새로운 이름을 많이 체험하지 못했다. 야곱이 실질적으로 새롭게 되고 새로운 사람. 변화된 사람이 된 것은 벧엘에서 였다.
이러한 바뀜은 오직 벧엘에서. 곧 합당한 교회생활에서만 체험될수 있다.
축복에 관한 이러한 이해는 책을 읽어서 얻는 것이 아니다.오직 체험을 통해서만 이러한 이해를 얻을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지식에 있지않고 사랑에 있다. 지식이 부족한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이 지식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알수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아는 것은 많으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모든 지식은 그가 하나님으 알도록 돕지 못한다.
우리는 믿는이들의 생명이 그 체험과 많은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사실을 주의깊게 보자. 이 체험들이 항상 일률적으로 고정된 순서대로 발생하지는 않지만 그 양상들에는 발생하는 절차 또는 특징들이 있는 것 같다. 이절차들은 대체무엇인가. 첫째는 계시이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계시는 언제나 믿음과 체험 이전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으로 알미암아 우리의 눈을 열으사 그의 아들에 관한 사실적인 진리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사실들을 받아들일 때 비로서 그 진리는 우리생활 속에서 실재적인 체험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순서를 나열할 수있다.
1.계시 (객관적인 것)
2.체험 (주관적인 것)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런 체험들이 항상 관문을 통과하는 것과 길을 걷은 것의 양면을 갖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이점에 관하여 만일 우리가 존 번연이 말한 좁은 문과 좁은 길을 비유한다면 더 분명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먼저 좁은문을 통과하고. 그다음 좁은 길을 간다고 말했다. 우리주님도 영생에 이르는 문과 길을 말씀하셨다. (마 7:14) 그리스도인의 체험도 이와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특징을 열거할수 있다.
1. 계시
2.체험 : 좁은문 (관문을 통과함)
좁은길 (길을 걸음)
이 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에 우리가 사용했던 제목들을 보기로 하자. 먼저 의롭다 함과 거듭남에 대해 보겠다. 이것은 우리가 계시를 얻어 십자가 상에서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속죄의 일을 완성하신 것을 봄으로 시작하여 회개와 믿음의 관문 을 통과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으로 계속된다. (엡 2:13)
이문은 또한 우리를 끊임없이 주님과 교통하는 길 (좁은길 )로 인도한다. 그러나 매일 주님을 가까이하는 근거는 여전히 보혈인 것이다 (히 10:19-22). 죄로부터의 해방을 말할때 여기에 세 단계가 있다. 성령의 계시는 우리로 알게 하고 (롬 6:6). 그 다음 믿음의 관문인 여김 (롬 6:11) 이 있으며. 또한 새생명 안에서 살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계속적인 헌신의 길이 있다. 또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이 점도 역시 주 예수님이 보혈로 높이 올려지신 것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서 시작된다. 결과적으로는 성령의 옮겨부음과 성령의내주하심의 이중 체험을 갖게 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께 열납되는 일에 있어서 다시 한번 우리는 육체-사람의 전체적인 자아생명에 대한 십자가의 평가를 보기 위해 성령의 빛 비춤이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믿음으로써 이 점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즉시 좁은문의 체험(롬 7:25) 에 들어서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는 우리자신의 노력을 멈추고 그리스도의 생명의 운행하는 능력을 믿음으로 받아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요구를 만족케 한다. 이것은 또한 우리를 좁은길로 인도하여 성령께 순복하는 생활을 하게 한다.
모든 예화의 실제적인 과정은 그렇게 완전히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 어떤 고정된 양상을 정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체험이라도 그 과정은 앞에서 말한 것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항상 먼저 우리눈이 열려 그리스도와 그분이 완성하신 역사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갖게 되고 그런 다음 믿음의 문에 들어서게 되며 새로운 길로 이끌려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여러단계. 곧 의롭다 함과 거듭남과 성령의 은사와 해방과 거룩케 됨 등으로 나누는 것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체험에 들어설 때 이 단계들을 순서대로 하나씩 취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실상 만일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가 시작부터 우리 앞에 늫여졌다면 그리스도인이 된 첫날부터. 그런 체험에 대한 이해는 장래에 갖게 될지라도. 많은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오. 각처에서 전파되는 복음이 다 이런 것이기를!
한가지 분명한 것은 계시가 항상 믿음 앞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완성하신 것들을 볼 때 우리는 자연 스럽게 주여 감사 합니다. 라는 반응을 갖게 되는데 이러므로 믿음은 자연히 이것을 뒤따른다. 계시는 항상 성령의 역사이다.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성경을 우리에게 열어주심으로 모든 진리 안으로 우리를 이끌기 위한 것이다. (요 16:13). 성령이 이것을 위해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응당 그분을 의지해야 한다. 당신은 빛과 믿음이 부족한 어려움에 처할때에 당신의 어려움을 주님께 직고하라. "주여. 내 눈을 열어주소서. 주여. 나로 이 새로운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하소서. 주여. 믿음 없는 나를 도우소서 " 그분은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