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새 법 안에 산다면 우리는 옛 법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간추린말씀 2010-03-27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k505/13234.html

만일  우리가 새 법 안에 산다면 우리는 옛 법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옛 법이 여전히 존재 할지라도 그것이 더이상 우리를 다스릴 수 없고 우리도 더이상 그 통제하에 있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마태 복음 6장에서 주님은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홥화를...생각하라" 고 말씀하셨다. 만일 우리가 날으는 새들에게 만유인력을 무서워하느냐고 물어볼수 있다면, 그들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우리는 뉴톤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는 그 법칙을 조금도 모른다. 우리가 날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우리로 날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 나는 생명이 있을뿐 아니라, 또한 그 생명 안에는 항상 그들로 자연 스럽게 만유인력을 이기게 하는 하나의 법이 있다. 그러나 만유인력은 여전히 존재한다. 만일 당신이 날씨가 몹시 춥고 땅에 눈이 쌓인 어느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났을 때 한 마리 참새가 정원에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면 당신은 즉시 그 법의 항구성과 불변함을 상기할 것이다. 그러나 새가 날고 있을 때에는 그들이 만유인력을 정복하고 그들 안에 있는 생명이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하나님은 실로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다. 그분은 이미 이 영의 새법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 나는 것은 더이상우리의지의 문제가 아닌 그분의 생명의 문제이다. 당신은 인내할수 없는 그리스도인에게 인내하라는 것이 그에게 하나의 시험이라는 것을 주의한 적이 있는가. 그에게 인내를 요구하는 것은 족히 그를 억압하여 병들게 한다. 하나님은 염려로 우리 영적 신장을 더하게 하려는 노력과 같은 자연 스럽지 않은 일들을 결코 억지로 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염려는 사람의영적 키를 줄어들 게 만들 뿐 절대로 조금도 크게 하지 못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우리안에 있는 생명의 새법을 주의하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오 .우리안에 있는생명의 새 법을 주의하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오. 우리안에 있는 생명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이 있기를 !

 

이것은 얼마나 귀한 발견인지!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한다. 이는 이 법이 작은 일에서도 큰 일에서 처럼 운행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다른 사람의 방에서 주인의 허락 없이 임의로 책을 꺼내 본다면 이법은 허락을 얻기 전에는 꺼내볼 권리가 없다고 우리를 일깨우고 저지할 것이다.

성령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한번은 어느 그리스도인 친구와 대화를 가졌는데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아십니까. 만일 사람이 생명의 영의 법을 의지해산다면 참으로 고상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말이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물었다. 그의 답변은 이러 했다. "이는 그법이 사람을 완전한 신사로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멸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그들의 행동을 나무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는시골 사람 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참된 문제는 그들에게 주님의생명이 있는가의 여부에 달렸습니다. 내가 말하지만 그 생명은 그들에게 당신의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그렇게 웃는 것은 틀렸습니다. 혹은 당신이 이렇게 비평하는 그 동기가 잘못되었습니다. 라고 말해줄 것입니다. 성령은 범사에 그들이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상세히 알려 줄 것입니다. 이로써 진실된 고상함이 나오게 됩니다. 교육에는 이러 본질적인 능력이 없습니다. 내게 이런 말을 한 친구 자신이 교육자였다.

 

 

 

 



마음은 생명의 스위치다


진리의말씀 2010-03-2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13048.html

 마음은 생명의 입구와 출구 이므로 생명이 들어가고 나오는 것은 다 마음에 달려있다. 또한 마음은 생명의 스위치이다. 마음이 닫히면 생명은 들어오지 못하고 나갈수도 없다. 그러나 마음이 열릴때 생명은 그 안에 들어갈수 있으며 또한 자유롭게 나가도록 조절될수 있다. 마음의 어떤 부분이 닫히면 하나님의생명은 그부분을 조절할수 없고 마음의 어떤 부분이 열려있으면 하나님의 생명은 그 부분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은 실로 생명의 스위치이다. 생명은 큰 능력을 갖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의 통제를 받는다.

 

하나님과 영적인 일을 접촉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영을 훈련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무관심하다면 성령은 안에 갇히게 되어 그능력을 발휘할수 없게 된다. 이런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와 교통하시려고 해도 불가능하게 된다. 하나님과 영적인 일들을 접촉하려면 영을 사용해야하고 또 그것을 원하는 마음을 가져야한다. 생명의 영의 법은 오직 로마서 8장에 있는 모든 행함"을 이행하는 믿는이들만을 해방한다.   

 

1.첫째 요점은 우리가 영을 따라 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은 우리편의 일이다. 사실상 이것은 우리가 스위치를 켜는 것이다. 우리가 영을 따라 행할때 우리는 스위치를 켜고 법은 작용한다.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가 영을 따라 행하기 전에는 결코 작용하지 않는다.

 

2.둘째 요점은 우리가 영에 속한일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8장5 절에 있다.

3.셋째 행함은 우리 죽은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다.(13절)

4.네째 항목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8:14,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관념에 따라 항상 이것이 영적인 인도에 관한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실상 영적인 인도에 관한 구절이 아니라 우리가 인도를 받는 것에 관한 구절이다. 이구절은 그 영께서 인도하시는 것에 관해 많이 말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그영께서 인도하시는 것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도를 받는것에 대해 말한다. 여기에 큰차이가 있다. 그것은 그영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시는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그분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여러분이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을 따라 행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면. 그들은 성령의 영감으로 처신하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할것이다. 할렐루야! 나에게는 어떤 영감도 필요하지않다. 내안에 그분께서 내주하신다. 그분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내가 다만 영을 따라 행하기만 하면 내주하시는 그분께서 일하신다. 이영이 무엇이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연합된영이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여러분의영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하나님의영 과 연합되었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은 그 영이시며 이제 그 영은 우리영 안에 계신다. 우리에게 이러한 놀라운 영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영을 따라 행할수 있다.

우리가 영을 따라 행할때 분명히 우리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게 될것이다. 우리는 그분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것들에 대해 묵상하고 깊이 생각할것이다. 생각을 영에 두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바로 성경이다.  그리고 가장 좋은 수단은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이다.

여러분이 성경을 기도로 읽을 때마다. 여러분의 생각은 영에 두어지게 된다.

 

그런다음 여러분은 자연스럽게 몸의 모든 행실을 죽이는 것이다. 여러분이 영을 따라 행하고  생각을 영에 두며. 영적인 것들을 생각할때 여러분은 몸의 행실이 나타날 때마다 자연 스럽게 그것을 죽이게 된다.

여러분이 몸의행실을 죽일때 생명이 들어온다. 죽일때. 생명이  분배된다.

자동적으로 여러분은 그 영의 인도를 받게 된다. 여러분이 영을 따라 행하고 생각을 영에 두며 몸의행실을 죽일때 여러분은 인도을 받는다. 여러분은 그 영의 인도 아래 있다. 내주하시는 그영께서 일하신다.

 

5.다섯째 항목은 우리가 외쳐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여러분이 해야할일이다. 여러분은 외쳐야한다. 우리는아들의 자격의 영을 갖고 있고 이 영안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외칠때 마다. 그것은 스위치를 켜는 것이다. 여러분이 오. 아버지! 아바 아버지" 라고 외칠때마다.그것은 스위치를 켜는 것이다.

 

이 모든 항목을체험한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생명의영의 법은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다. 우리가 이모든 항목을 실행한다면  생명의 영의 법은 참으로 우리안에서 작용할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연약한 생활을 하는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활이 아니다.


간추린말씀 2010-03-2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13044.html

 우리가 이렇게 끊임없이 연약한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생활이 아니요. 이것은 우리에게 믿음과 의지함이 없기 때문이다.  로마서 6장 23절은 하나님의 은사는 "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 말한다. 로마서 8장 2절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고 말한다. 로마서 8장 2절은 새로운 은사를 말하지 않고 로마서 6장 23절에 언급된  생명을 말했을 따름이다. 바꾸어 말해서 이것은 우리가 이미 소유한 것에 대한 새로운 계시라는 뜻이다.  나는 이점에 대해서 지나치게 강조할 수 없다고 느낀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손에서 얻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을 새롭게 열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역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이는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는 말에 사용된 시제가 과거시제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참으로 이점을 보고 그분을 믿고 의지 한다면 로마서 7장은 우리 몸에서 절대로 재현 될 필요가 없게 된다. 그 체험들이나 행위들은 참으로 중복될 필요가 없다. 물론 그렇게 의지의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게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지 않고 그분을 믿고 의지한다면 우리는 땅에 떨어져 깨지지 않고 도리어 다른 법인 생명의 영의 법  아래 떨어지게 된다. 이는 하나님이 단지 우리에게 생명만 주지 않으시고 또한 생명의 법도 주셨기 때문이다. 만유인력이 사람이 입법한 결과가 아닌 자연계의 법칙이듯이 생명의 법도 자연의 법칙으로서 원칙상 우리 심장이 뛰는 것이나. 눈을 보호하기 위해 눈꺼플이 깜박이는 법과 동일하다. 우리가 우리 눈의 청결함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 눈에 대해 항상 생각하거나 의지로 결심하지 않아도 눈 거플은 자동적으로 감겼다가 열려 진다. 우리는 이렇게 해야 겠다고 마음 속으로 항상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도움이 되기는 커녕 도리어 해가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기만 하면 눈꺼플은 자연히 움직인다. 우리의 의지는 생명의 법을 저지할 뿐이다.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나는 이사실을 발견하였다.

전에 나는 불면증을 앓은 적이 있었다. 한번은 며칠 밤 온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를 위하여 나는여러모로 기도 하였다.

나는  온갖 방법을 써 보았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내 잘못을 지적해 달라고 간구하였다. 

 

나는 하나님께 "저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분의 답변은 자연 법칙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이었다. 수면은 굶주림과 같이 다 하나의 법이다. 이때 나는 깨달았다. 비록 내가 굶주리지는 않을까를 염려하지 않았으나 항상 수면에 대해 염려하였었다. 나는 자연 법칙을 도우려고 하였다.  이것이 많은 불면증환자의 주된문제이다. 이제 나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자연 법칙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잠을 잘 잘수있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하는가. 당연히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우리의 영적인 생명은 손실을 입게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억지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안에 성경을 사모하는 새로운 법이 있다. 우리가 이법을 따라 삼십 분간 읽는 것이 억지로 다섯 시간 동안 성경을  읽는 것보다 더욱 유익하다. 이와 같이 구제하고 전도하며 간증하는 일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냉정하게 자선사업을 하는것과 같이 억지로 전도할때 결국 찬 심장으로 뜨거운 복음을 전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생명의 법의 표현


간추린말씀 2010-03-2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13027.html

 이 점을 더 실제적으로 설명해 보겠다.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 바 있다.    심지어 오래된 그리스도인도 의지가 그들의 생활에서 얼마나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아직 모른다.

이것 또한 로마서 7장의 어려움 중 일부이다.   그의 원함은 선한 것이나 그의 모든 행함은 그의 원함과 상반된다.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얼마나 큰 결심을 하든  그의 원함은 그로 더 큰 어두움을 거치게 할 뿐이다. 그는 "원함은 내게 있으나,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아래 팔렸도다".라고 말한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기름이 없는 자가용같이 누가 밀어 주어야 간다. 언제든지 누가 밀지 않을 때에는. 즉시 멈추고 만다. 그들은 의지로 자신을 밀어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아주 고생스럽다고 생각하고, 항상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고 힘이 빠지게 한다. 어떤 사람들이 할렐루야를 외치기 때문에 자기도 억지로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들이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들은 자기 답지 않은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강요한다.  이것은 물이 산으로 올라가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다. 이는 의지가 이를 수있는 최고점이 원함까지 이기 때문이다.(마 26:41. 참조)

만일 우리가 많은 힘을 들여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해야 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하고 있는 생활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님을 말해줄 뿐이다. 우리는 자기의 고향 이야기는 억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 천성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의 의지력을 사용하게 된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뜻을 세울 수 있으나, 결국은 죄와 사망의 법에 의해 패배당할 것이다. 아마 우리는 "원함이 내게 있어서 내가 이 주 동안 선을 행했다". 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뜻을 세우는 것은 우리가 아직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미 그런 사람이라면 결코 그렇게 행하려고 갈망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당신은 왜 사람이 의지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거듭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취할 새 생명이 없거나 이미 거듭나서 생명을 소유하였으나 그 생명을 의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점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재삼재사  실패하고 범죄하며 자신들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없는 경지에 이르게 돤다.



사망의법과 죄의법


간추린말씀 2010-03-22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12797.html

지금 나는 런던에 있다. 여기서 내손수건을 던질때 손수건은 땅에 떨어지고 만다. 이것은 만유 인력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뉴욕이나  홀콩에서 내손수건을 던진다 해도 결과는 똑같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손수건을 던질때 마다 만유인력은 역사 한다. 따라서 동일한 결과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동일한 원칙에 있기만 하면 동일한 결과를 낳는것이 바로 법이다.

그러면 죄와 사망의 법은 무엇인가. 가령 누가 내게 대하여 좋지 않은 비평을 할때 내속에서는 즉시 뭔가 불쾌한 생각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법이 아닌 죄임을 알 것이다.

 

그러나 만일 또 다른 사람이 나에게 좋지 않은 비평을 할 때 여전히 내 안에서 동일 하게 불쾌한 생각이 일어난다면 나는 항상 변함없는 만유인력과 같은 한법 -죄의 법- 이 내안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죄의 법도 이와 같다. 우리는 사망이란 극점에 이른 약함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의 약함은 나의 할수 없음이다. 내가 어떤 일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다 보니 또 나의 할수 없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한   법이 내 속에서 역사하는 것을 본다. 내 속에 죄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죄의 법이 있다. 내 속에 사망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사망의 법이 있다.

 

이 법은 만유인력과 같이 불변하고 어떤 예외도 없다. 이것은 토론을 거쳐 제정한 법칙인 교통 규칙과 달리 사람은 제정할 수 없는 자연의 법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에 손수건은 내 도움 없이도 자연히 땅에 떨어질수 있다. 로마서 7장 23절에서 바울이 발견한 법도 이와 같다. 죄의법과 사망의 법은 선함에 반대되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의 의지를 좌절시킨다.  사람은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따라 자연히 죄를 범한다. 그가 다른 소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안에 있는 법은 잔인하며. 사람의 의지는 결코 이법에 대항 할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어떻게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는가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나는죄뿐 아니라 더욱 사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끊임없는 약함과 실패에서 해방받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만유인력의 법을 무효화 시킬수 있는가. 또다시 내 손수건을 예로 든다면.

만유인력의 법은 손수건에 역사하여 그것을 아래로  끌어내릴 것이다. 그러나 내 손을 손수건 밑에 둔다면

손수건은 땅으로 떨어지지 않게 된다. 왜 그런가. 법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나는 만유인력의 법을 제거 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 법을 제거 할수 없다. 그러면 왜  손수건은 땅에 떨어지지 않는가. 이는 손수건이 땅에 떨어지지 못하게 하는 다른 힘이 있기 때문이다. 법이 여전히 거기 있지만 그 법을 능가하는 생명의 법이라고 하는 다른 법이 운행하여 그 법을 정복한다. 만유인력이 할수 있는 대로 힘껏 역사할 수 있지만 손수건은 땅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다른법이 운행하여 만유인력을 대항하여 손수건을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도로 포장 석판 사이에 떨러진 씨가 나무로 자라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 씨가 점점 자랄 때 그 생명 안에 있는 능력이 아주 무거운  석판을 뚫고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말한 바 법이 법을 이기는 그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방법으로 다른 법을 이끌어 옴으로써 원래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 죄와 사망의 법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다른 법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으로 역사하게 하신다. 이 법의 강도는 족히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인것을 기억하라. 이 법은 부활한 생명으로서 이미 그분 안에서 각종 사망을 처리하였고 이미 사망을 이기었다. (엡 1:1.9.20.)   주 예수님은 성령으로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려서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 임의로 행하시게 한다면, 우리는 그분이 옛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이때 우리는 보호하심이 우리 힘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벧전 1:5)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