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목적는 생명이다. 수세기 동안 간교한 뱀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을 하나님을 누리는데서 멀어지게 하려고 여러가르침들을 사용해왔다. 교회의 타락안에서 종교가 지식과함께 몰래들어와.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는 이들을 생명나무이신 그분을 먹는데서 벗어나게 했다.
이러한 가르침들의 결과는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생명에 주의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지식을 거절해야한다. 지식은 우리에게 생명대신 죽음을 가져다 줄것이다.
더욱이 지식은 죽음뿐 아니라 분열까지 야기할것이다. 만일 우리가운데 지식이 주된 강조점이라면, 나는 잠시후에 우리가 여러종파로 분열될까 두렵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좋은 교리. 좋은신학. 휼륭한 셩경해석이 아니다. 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 곧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이다. 교리와 사상과 신학과 성경해석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대치 할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 생명에서 나온것만이 음부의 문들을 이길수 있다. 그밖의 모든것은 다만 죽음이 가면을 쓴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탄의 공격에 저항할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가 죽음을 만지지 않고. 또한 죽음을 교회 안에 가져오지 않도록 하시기를 구한다.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교회를 충만하게 하셔서 사탄이 교회를 공격할 여지를 얻지 못하도록 하시기를 구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대적이므로 하나님께서 행하시고자 하는 모든 것을 공격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목적은 교회 이므로. 사탄은 전문적으로 교회를 공격한다. 사탄이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를 공격할때. 반드시 죄와 세상으로 미혹시켜 넘어지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것을 쉽게 분별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수 있지만... 다만 죄와 세상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는 사탄의 공격을 막을수 없다. 사탄의 최종적인 공격무기는 바로 죽음이며. 사탄은 죽음으로 교회를 공격한다. 죽음은 그리 쉽게 발견되지않고 은밀히 교회안에 들어올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탄이 세상이나 죄악을 통해 교회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교회를 공격할때 사탄은 더럽고 흉악한 죄를 사용할 뿐만아니라. 도덕적이고 세련된방법도 사용한다는 것이다.
세련되고 도덕적인 많은일이 죽음으로 가득하며. 사탄은 이러한 죽음의일들을 통하여 손쉽게 교회를 공격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바울의 부르짖음은 참으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가 말한것과 똑같다. 거기서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우리가 연구한 문제의 해답이다. 우리는 로마서 7장에 "나" 라는 단어가 매우 현저히 나타났고. 또 이" 나"는 결국 "답답한 부르짖음" 곧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로 끝맺는다는 것을 안다.
그 뒤에 우리는 그의 해방받은 환호의 외침을 들을 수 있다. 주예수께 감사라하리로다. 매우 분명한 것은. 바울이 우리가 사는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임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주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바울형제님은 이런 비참함에서 건져낼수있는 분는그리스도의 생명임을 보았다.
주의 죽음 부활안에 더 깊이 들어가리
나를 산에 있게 하리 내 자아 다 버리고
주예수와 하나되어 그의 죽음 함께 누리리
변화되지 않은 그늘 나를 어둡게 할 때
다시 산에 올라가리 주의 죽음 누리려
나를 산에 있게 하리 내 자아 다 버리고
주 예수와 하나되어 그의 죽음 함께 누리리
새벽까지 산 위에서 주와 함께 보내리
주의 영 날 흠뻑 적셔 다 변케 할 때까지
나를 산에 있게 하리 내 자아 다 버리고
주예수와 하나되어 그의 죽음 함께 누리리
주와 하나되는 그때 해는 밝게 빛나리
죽음 깊이 누리면서 주와 난 하나되리
나를 산에 있게 하리 내 자아 다 버리고
주 예수와 하나되어 그의 죽음 함께 누리리
마 28:18-29. 막 16:15. 롬 1:14-15. 고전 9:16-23. 딤후 4:2. 마 25:24-30. 행 8:1.4.
찬송가 668 장
1.빈손들고 주님 얼굴 어찌 대할 수 있나. 어찌 주께 드릴 열매 하나 없을 수 있나.
2.오늘 그냥 지나가면 어떤 수치 당할지. 나의 빈손 생각할때 근심 구름 날 덮네.
3.낭비한 세월 이제라고 되찾을수 있다면. 아낌 없이 주께드려 주의 뜻을 좇겠네 .
4.성도들아 낮을 틈타 속히 복음 전하라. 죽음의 밤 오기 전에 힘써 영혼 구하라 .
후렴: 두손 비어 빈 손으로 주를 만날 수 있나. 그리스도께 한사람도 인도하지 못한나.
이찬송가는 아주 오래 전에 미국의 어떤 자매가 쓴 것으로 일찍이 중국어로 번역되어 널리불려진 찬송이다.
작자는 일생 너무나 평범하게 살다가 임종이 가까웠을때. 갑자기 자신이 태어나서 그때까지 한 사람도 주님께 드린 사람이 없는 것을 느끼고. 너무나 빚진 것 같아 주님의얼굴을 뵐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극히 슬퍼한다. 한 목사가 그녀의 이러한 심정을 어떻게 위로할 줄 몰라 그 뜻을 따라 시를 썼다. 내가 어릴 때 부흥 전도 집회를 참석할때마다 이 찬송가를 불렀다. 이찬송가의 곡조는 매우 사람의 영을 불러 일으킨다. 원래 중국어로 번역된 어구는매우토속적이었다. 그렇지만 이찬송가를 부르고나면 항상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흐리고 강대상 앞으로 나아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헌신하였다.
후에 내가 찬송가를 편집할때 많은 시간을 들여 이찬송가가 도대체 수록될 가치가 있는지 고려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영. 생명. 그리스도. 교회 등 이러한 높은 말씀을 전하는데 이찬송가의 내용과 사상이 너무 평범하여 수록할수가 없다는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 찬송가에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고. 아주 좋아했으며 잊을 수가 없었고 .특별히 곡조는 사람들의 복음의 영을 불러일으킬 수있어서 할수 있는 한 가사를 조금 바꾸어서 편집해 넣기로 하였다.
이찬송가는 믿는이가 죽은 후에 주님을 만나는데 빈손으로갈 수없으며. 그분께 약탈물을 드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죽는 것이 두려워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빈 손으로 주님을 만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는 문제가 없지만 우리는 반드시 이기는 생활을하여. 약탈물을 얻어 주님깨드려야 한다. 바울은 주님 앞에서 그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그가 구원받도록 이끌어 주님앞에 선 믿는이라고 말한다. (살전 2:19-20) 만약 당신이 주님을 만날 때. 다른 사람은 다 한무리의 어린양을데리고 왔는데 오직 당신의 손만 비어 있다면 당신은 너무나 난처하고 수치스럽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 또한 두손 가득 어린양을 데리고 주님을 만난다면 그 맛과즐거움은 말로 표현할수 없을 것이다.
이 찬송가에 따르면 믿는이가 살아 있을 때는 낮이고 죽은후 에는 밤이라고 말한다. 낮은 일해야 할 때이나 밤이 오면 곧 아무도 일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밤이 아직 오지않은 낮일때. 적극적으로 일하여 많은 영혼을 구하여 주님께 드려야 한다. 이찬송가는 영적인 의미는 비록 깊지 않지만. 실행 에서는 오히려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