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지방교회 찬송찬미 관제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바울의 부르짖음은 참으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가 말한것과 똑같다. 거기서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우리가 연구한 문제의 해답이다. 우리는 로마서 7장에 "나" 라는 단어가 매우 현저히 나타났고. 또 이" 나"는 결국 "답답한 부르짖음" 곧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로 끝맺는다는 것을 안다.
그 뒤에 우리는 그의 해방받은 환호의 외침을 들을 수 있다. 주예수께 감사라하리로다. 매우 분명한 것은. 바울이 우리가 사는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임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개선된 생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치 않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치하는 생명을 주신다. 하나님은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을 다른 생명. 곧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대치하신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다시 사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이점에 있어서 재생이(새생명으로삶), 중생 이상이라는 것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다. 중생은 우리가 회개할 때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은 것이다. 재생은 이와 달리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재생(새생명)되기 시작할 때까지 이 새 생명이 우리 안에 서 점점 자라고 그 생명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인들에게 바울이 말한바.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 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또 한가지 예화로 이점을 설명해 보겠다. 한번은 미국에서 주님을 믿는 부부의 가정에 갔었다. 그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내게 청해 왔다. 내가 그들에게 무슨 어려움이라도 있느냐고 물으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 니 형제님 최근 저희의 생활은 말이 아닙니다. 저희는 너무 쉽게 아이들 때문에 화가 납니다. 과거 몇주 동안 저희두사람은 거의 매일 수차례 화를 내어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했습니다. 저희에게 인내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말이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물었다. 나는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라고 답했다. 그들은 십분 놀란 표정으로 당신의 뜻은 저희가 너무 형편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내를 구하는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꺼려하신다는 말입니까 . 라고 말했다 . 아닙니다. 내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이렇게 기도해본적이 있습니까. 나는 당신들이 자주 이렇게 간구했으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까. 아닙니까. 당신들은 왜 응답이 없는지 아십니까. 이는 당신들에게 인내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 아내는 눈을 크게 뜨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 없다구요. 저희는 매일 화를 냅니다. 당신의 말은 무슨 뜻입니까. 라고 말했다. 나는 당신 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답했다.
하나님은 결코 겸손.인내.성결. 사랑의 은혜를 개별적으로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신다. 즉 인내가 없는 사람에게는 약간의 인내를.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약간의 사랑을. 혹은 교만한 사람에게는 겸손을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어느소량을 우리에게 자본으로 주지 않으시고 우리의 필요를 족히 채울수있는 은사를 주신다. 이 은사는 바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내가 그분의 생명을 내안에서 살아 나타내시도록 그분을 앙망할 때 그분은 나의 겸손과 인내와 사랑이 되신다. 또한 내게 필요한 다른 모든 것이 되신다. 요한일서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 증언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며.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고.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요일 5:11-12) 하나님의 생명은 여러가지 항목으로 우리에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 말한다.(롬 6;23) 우리와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는 바로 우리와 생명의 관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받은 은혜와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점. 즉 온유와 그리스도. 인내와 그리스도. 사랑과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일 인지 . 고린도 전서 1장 30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너희는 하나님께로 부터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었나니". 통상적으로 거룩함에 대한 사람의 관점은 생할의 모든 방면이 거룩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거룩함자체가 아닌 거룩함의 열매에 지나지 않는다. 거룩함은 그리스도 자신임을 기억하자.
의심할바 없이 나는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체험을 하리라고 믿는다. 즉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한 친구를 심방하러 가자고 할때 당신은 그 친구가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그를 돌보러 갈 것이다. 츨발하기 전 당신은 주님께 자신으로 말미암으면 실패뿐이고 아무 것도 할수 없으므로 주님이 당신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달라고 구할 것이다. 그런 다음 당신은 비록 그 친구가 조심성 없고 남과 융화되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당신이 그에 대해 조금도 화가 나지 않은 것에 놀랄 것이다.집에 돌아올 때 당신은 이 체험을 회상해 보면서 당신이 그렇게 잠잠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인해 놀란다. 당신은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었는지를 이상히 여기며 어떠한 해설을 찻으려고 한다. 이 해설은 바로 성령이 당신으로 통과하게 한것임을 기억하라.
불행히도 당신은 어쩌다 한 번 이런 체험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체험이어야한다. 성령이 모든 것을 손에 쥐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은 긴장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이를 악물고 자기를 잘 통제하면 영광스런 승리에 이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참된 승리는 육체의 힘을 쓰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에 의해 영광스럽게 어떤 것을 넘어가는 것이다.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는 목적은 항상 우리로 어떤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이다. 처음에 그는 우리를 범죄케 하지 않고 우리가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도록 격동시킨다. 일단 우리가 숨어 있는 곳에서 나와 나와 버릴 때 사탄은 이미 우리를 이긴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숨어 있고 육체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사탄은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하신 승리의 방법은 바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밖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활동할때 위험에 떨어지게 되고. 우리의 천연적인 경향은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도움을 청해야 하는가. 갈라디아서 5장 17절을 읽어보자. "육체는욕망을 일으켜 그영을 거스르고. 그 영은 육체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이둘은 서로 대적하여 여러분이 갈망하는 것들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육체는 우리를 거스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거스린다. 이는 이둘이 서로 대적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체를 짓밟고 처리하는 것은 그분이지 우리가 아니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니니라." 우리는 자주 이구절 하반절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보기로 하자.
천연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기을 원하는가. 우리는 우리 천성의 지시를 따르고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행동을 취하기를 좋아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아 일하기를 거절한다면. 성령은 자연히 우리 안의 육체를 처리하실 수 있게 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이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천연적인 경향에 따라 일하지 않는 것이다. 이럴때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가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계획을 완전히 만족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너희는 성령을 쫒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는 원칙이 있다. (갈 5:16)
만일 우리가 영 안에서 살며 부활한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여 행한다면. 우리는 한편에 서서 능히 성령으로 매일 우리의 육체를 이기시게 할수 있다. 성령은 이 일을 책임지도록 이미 우리에게 보내지셨다.
우리의 승리는 그리스도 안에 숨고 오로지 성령만을 의지하여 그분의 새 갈망을 따라 우리 육체의 정욕을 이기는데 달려 있다. 십자가는 이미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이루었고. 우리 안에서 성령은 구원을 나타내도록 주어지셨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또한 우리의 구원의 기초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시다.
이제 우리는 로마서 8장에 왔다. 먼저 두번째 단락의 중심인 5장 12절부터 8장 39 절까지의 중심을 두 마디로 간략히 설명하겠다. 이 두마디는 한 가지 대조를 포함하고 있고, 각각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한 방면을 지적해 준다.
이 두 마디는 다음과 같다.
아담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 5:12-6:23 --
육안에서와 영 안에서 -- 8:1-8:39 --
우리는 이 네가지 일의 관계들을 깨달아야 한다. 앞의 두 가지는 객관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위치를 말한다. 그중 첫번째 것은 원래 천연적인 것 안에 있는 우리의 위치이고, 두번째 것은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위치이다. 뒤에 나오는 두 가지는 주관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행함과 관계된다. 이것들은 실제적인 체험에 속한 것들이다. 성경은 앞의 두 가지는 전체의 일부만을 언급한 것이고 나중 두 가지가 있어야 온전하다는 것을 말한다. 원래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기만 하면 족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영 안에서 행해야 함을 알았다.(롬 8:9)
로마서 8장 앞 부분에서는 거듭 영에 대하여 말한다. 이것은 사도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이공과를 얼마나 중요시 하는가를 보여 준다.
육체와 영
육체는 아담과 연관되고 성령은 그리스도와 연관된다. 이제 우리가 아담안에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치고, 잠시 이문제를 한 쪽에 제쳐놓고 우리가 육체 안에 사는가를 물어보자. 우리안에 산다는 것은 아담 안에 있는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행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힘은 아담에게서 이어 받은 옛창조의 천연적인 생명에서 나왔기 때문에 체험에서 우리는 아담의 죄의 모든 자본을 누리고 소유하고 있다. 이것들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 매우 효과적인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이러하다.
만일 우리가 체험에 있어서 그분이 체험한 것을 누리려고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이 무었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 옛사람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혔다. 이것은 이미 역사적인 사실이 되었다. 또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못박혔다. 이것은 이미 역사적인 사실이 되었다. 또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복주심은 현재의 일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영안에 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실과 완전히 상반될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분 안에 있다는 이 사실이 우리 몸에서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시인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낡은 성질이 여전히 나타나는 사실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문제는 우라가 객관적으로 그 진리을 붙잡고 객관적인 진리을 주관적이 진리로 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안에 살 때에만 객관적인 진리가 주관적인 체험이 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도 내 안에 계신다. 사람의 몸이 물 속에서는 생활 하거나 일할 수 없고. 공기 중에서만 살수 있는 것처럼 영적인 면에서도 그리스도는 육체 안에 거하지 않으시고 영 안에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육신을 좇아 생활한다면.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본래 내게 속했던 모든 것이 내 안에서 허공에 뜬 것 같이. 죄가 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비록 사실에 따르자 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겠지만 만일 내가육체 안에 산다면, 곧 내 힘으로 내 주장대로 행한다면 체험에 있어서 나는 놀랍게도 아담에 속한 모든 것이 내 몸에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체험으로 알려 한다면 나는 반드시 영안에 살기를 배워야 한다.
영안에 산다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의지한다는 말이다. 이런 생활은 내 자신을 의지하여 살아내는 생활과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의 새로운 요구에 당면할 때 마다. 나는 그분께서 내게 요구하신 것을 내 안에서 친히 이루시도록 그분을 앙망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도해 보라고 하시지 않고 다만 믿고 의지하라고 하신다. 또 그분은 우리에게 분투하라고 하시지 않고 그분 안에 안식하라고 하신다. 만일 내 안에 난폭한 성품이나. 부정한 생각. 예리한 혀와 비평하는 영을 가졌다면. 자신을 고치려고 결심할 필요가 없다. 내가 할 일은 다만 이 모든 일을 향하여 이미 죽은 자로 여기고.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서 내게 필요한 순결함과 겸손과 온유를 산출해 내시도록 앙망하는것이다.
이것이 모세가 말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출 14:13)의 뜻이다.
이제 로마서로 돌아가자. 6장 끝에서 우리는 두가지 관련된 제목을 다루기 위해 잠시 멈춘 적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기와 목표인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다른 하나는 그 목적에 이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과 지혜를 공급하는 성령이다.
이제 우리는 로마서 7장을 보기로 하자. 많은 사람들은 7장을 불필요한 장으로 생각한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옛 창조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제해졌고 또 그분의 부활로 말미암아 완전히 새로운 창조가 도입되었다는 것을 보았다면 로마서 7장은 불필요한 것이 될수잇다. 만일 우리가 진정 이것을 알고 또 이일에 근거하여 이것을 여기며 이것에 기초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다면 우리에게는 로마서 7장이 필요치 않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7장의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그들은 7 장을 로마서 5장과 6장 사이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로마서 6장에 이를 때 모든 것이 완전하고 평탄케 되었는데 어찌 또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실패의 신음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어찌 용두사미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7장에서 말한 것은 거듭나기 전 바울의 체험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장에서 그가 묘사하는 것중 어떤 것은 비그리스도인의 체험임을 시인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체험을 하고 있다. 그러면 이 장이 주는 교훈은 무었인가.
우리는 로마서 6장이 다루는 문제가 죄를 향한 자유함인 반면에 7장은 율법을 향한 자유함을 다룬다는 것을 안다. 6장에서 바울은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는 가를 우리에게 말한다.
그는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필요임을 말함으로 결론 짓느다. 이제 7장은 다만 죄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부족하고 또한 어떻게 울법에서 벗어나는 가를 알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만일 우리가 아직 율법의 억압으로부터 온전히 해방 받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죄로부터 온전히 벗어날수 없다. 그러면 죄로부터의 해방과 울법으로부터의 해방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가 전자의 가치를 알면 되지 왜 후자를 알아야 하는가 .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필요성을 알려면 먼저 반드시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로마서 7장은 우리에게 새로운 공과를 가르쳐준다. 바울은 내가 육체에 속하고 (5절), 또 나는 육신에 속하였고 (14절). 내속 곧 내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18절) 라고 말한다. 이것은 죄의 문제를 훨씬 능가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처리하는 것은 각양의 죄가 아니라 육체에 속한 사람이다. 후자는 전자를 포함하나 전자보다 진보적이다.
이는 후자가 육신의 범위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무능한 사람인 것과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없느니라"(8절) 를 발견하는 데로 우리를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율법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제 잠시 뒤로 물러나서 많은 사람의 체험을 말해보기로 하자. 어떤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구원받았으나 여전히 죄에 매여 있다. 이것은 그가 항상 죄의 권세 아래 생활한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죄가 계속 그를 괴롭히고 그가 항상 그 죄들을 범한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죄가 계속 그를 괴롭히고 그가 항상 그 죄들을 범한다는 뜻이다. 어느날 그는 주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죄를 씻었을 뿐 아니라. 그분이 죽으실때 죄인인 우리까지도 그분의 죽음 안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그분의 죽음은 우리죄만 처리하지 않고 우리 자신도 처리하였다는 완전한 복음을 듣고서 눈이 열려 그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게 된다.
이 계시에 따라 두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자신을 주와 함께 죽고 부활한 자로 여기는 것이고. 둘째는 그에게 있는 주님의 주권을 인식함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산자같이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는 그가 더이상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찬미로 가득한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시작이다.
그리고나서 그는이런 생각을 갖기 시작한다. "내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였으며 내 자신을 영원히 그분께 드렸다. 그가 나를 위하여 이렇게 많은 일을 행하셨으므로 나도 그분을 위하여무언가를 해야겠다. 나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그분의 뜻을 행해야겠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헌신한 뒤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고 그분께 순복하려고 자신을 준비한다. 그러나 자신의 예상외로 그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본래 그는 하나님의뜻을 준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사랑할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는 자신이 자주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지 않은다는 것을 발견한다. 때때로 그는 심지어 하나님의 뜻인줄 알면서도 그것을 향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분의 뜻을 행하려고 시도해 볼때에도 그는자신이 할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의 체험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자문하게 된다." 내가 정말 알았는가. 그렇다! 내가 참으로 여겼는가 .그렇다! 내가 확실하게 내자신을 그분께 드렸는가. 그렇다!. 내가 내 헌신을 다시 회수하지는 않았는가 .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상태는 어떻게 된 것인가.
이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려고 할때마다 실패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그가 얻은 결론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준행할 갈망과 능력을 그분께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불순종을 시인하고 다음에는 불순종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기도를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기도전에 그는 또 이미 실패한 자가 된다. 그는 승리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실패하였다고 느낀다. 그리고나서 그는 자신에게."아마도 나의 최종 결정이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아. 이번에는 절대적이고 확고한 결정을 내리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의지의 힘을 다하여 행한다. 그러나 결국은 더 심한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다시 바울의 말을되풀이 하게 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롬7:18-19)
많은 그리스도인은 돌연히 로마서 7장의 체험에 들어서고는 그들에게 왜 그런 체험이 필요했는지를 모른다. 그들은 로마서 6장의 체험으로 이미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로마서 6장을 깨닫고서 이후로 다시는 실패의 문제에 당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로마서 7장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크게 놀란다. 이것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로마서 6장에서 말한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것이 모든 필요를 채울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6장의 오직 한가지 즉 그 죽음에 대한 설명과 그 죽음이 가져다준 모든 것에 대하여 온전히게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로마서 7장의 진리를 우리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로마서 7장은 로마서 6장 14절의 말씀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즉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 문제는 우리가 아직 율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심을 의미하는 반면에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과 공의를요구하신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다. 만일 율법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들을 이행하라고 하시는 것이라면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그분이 더이상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고 그분이 요구하신 것들을 친히 공급하신다는 것이다. 울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일들을 하라고 요구하신다는 말이고 율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시고 은혜안에서 그분이 하신다는 것이다.
나 (여기의 나는 7장 14절의 육신에 속한 사람이다.)는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율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로마서 7장의 문제는 바로 육신에 속함 사람이 하니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데 있다. 당신이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할때마다 당신은 자신을 율법 아래 두는 것이다. 그 결과로 당신은 로마서 7장의 체험을 갖기 시작한다.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나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먼저 로마서 7장의 체험을 갖게 한 장본인이 율법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바울은 "울법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7:12). 라고 말한다. 율법 자체는 틀린게 없다. 잘못은 우리에게 있다.
율법의 요구는 의로우나 율법의 요구를 받는 그 사람이 의롭지 못하다. 문제는 율법의 요구가 부당한 데 있지 않고 내가 그 요구들을 만족시키지못하는 데 있다. 이것은 마치 정부가 나에게 백 파운드의 세금을 납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나 내게 세금 낼 돈이 십 실랑밖에 없다면 잘못이 전부나에 게 있는 것과 같다. 나는 이미 죄에게 팔린 사람이다.(7:14). 죄가 내몸에서 주권을 갖고 있다. 당신이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때 나는 아주 선한 사람같다.
그러나 당신이 무엇인가를 요구할때 나의 죄는 드러나게 된다.
만일 손발이 둔한 어떤 종이 있다 하자. 그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에는 그의 손발이 둔한 것이 드러나지 않는다. 만일 그가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그는 당신에게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 되지만 적어도 어떤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 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에게 "일어나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일어나서 무언가를 하라." 고 말한다면. 즉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의자를 넘어뜨리고 몇걸음을 더 걸을 때 의자 다리에 걸려 넘어진다. 귀한 그릇과 접시들을 꺼낼 때 몇개를 깨뜨린다. 만일 당신이 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의 손발이 둔한 것이 사람에게 주목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이렇게 요구할때 그의 둔함이 즉시 사람에게 주목되지 안흔다. 그러나 당신이 이렇게 요구할때 그의 둔함이 즉시 사람에게 발견된다. 요구가 옳지만 문제는 그 사람에게 있다. 움직이지 않고 않아 있를 때에나 일을 할때에나 그는 똑같이 손발이 둔한 사람이다. 그가 움직이든 안움직이든 본질상 그는 언제나 손발이 둔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에게 무엇을 하도록 분부할때 비로서 그의 둔한 것이 드러난다.
우리는 태어날때 부터 죄인이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시면 모든 것이 다좋다. 그러나 일단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실때 우리는 대대적으로 우리 죄를 표현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의 약함을 드러낸다. 만일 당신이 내게 가만히 앉아 있고 움직이지 말라고 한다면, 난 아주 좋은것 같다. 그러나 당신이 나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하면 나는 받드시 그일을 망칠 것이다ㅣ. 만일 당신이 나에게 두번째 일을 맡기면 나는 또 일을 망치게 된다.
거룩한 율법을 죄인에게 적용할때 그의 죄는 충분히 표현 될 것이다.
간추린말씀 조회 10 댓글 1 스크랩 1 2010-02-25 21:4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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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내가 어떤 사람인 줄을 아신다. 그분은 머리부터 끝까지 내가 죄로 충만하다는 것을 아시고 내가 약함의 화신이고 아무 것도 할수 없다는 것을 아신다. 그러나 문제는 내 자신이 이점을 모르는 데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인 것을 시인한다. 그러므로 나도 죄인 이다. 그러나 나는 많은 사람들과 같이 구제 불능의 죄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극도로 약하고 아무 소망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는데 이로도록 우리를 이끄셔야만 한다.
비록 우리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우리들이 이것을 완전히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제불능임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무언가 하시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율법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약한가를 모른다. 바울은 실로 이런 경지에 이끌렸었다. 로마서 7장 7절에서 바울은 이점을 분명히 말해 준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는 율법의 다를 부분에 대한 체험이 어떠했든지 간에 열번째 계명은 바로 "..탐내지 말라".이다.
이것은 그의 죄를 드러내었다. 이점에서 그는 그의 모든 실패와 직면하게 되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려고 시도하면 할수록 우리의 약함이 더 드러나고 로마서 7장의 체험에 더 깊이 빠져 버린다. 이런 체험은 우리가 구제불능일 정도로 약하다는 것을 알때 까지 지속된다. 하나님은 벌써부터 이것을 아셨지만 우리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하도록 고통스런 체험을 주지 않으실 수없다.
우리의 약함은 우리가 더이상 다툴 것이 없을 정도로 확증될 필요가 있다. 이런 목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지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수 있다. 그분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바로 우리로 범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셨다. 우리가 이렇게 악하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에게서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니님을 기쁘시게 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신약에서도 믿는 이들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 곳은 한군데도 없다.
도리어 율법의용도가 법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율법이 가입한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니라 ". (롬 5:20).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율법을 위반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나는 아담안에 있는 죄인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니고 나는 죽었도다". (롬 7:7-9).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의 참된 성질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에게 이렇게 우리 자신을 강하다고 생각하는 자부심이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결국 하나님은 부득불 우리가 약하다는것을 증명해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시험을 주신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극히 타락한 죄인으로서 스스로 무엇을 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없다는 것을 보고 이 사실을 시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율법을 주심은 우리가 준수하기를 바래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율법이 주어질때 우리가 범할 것을 아셨다. 율법을 범할때 비로서 우리는 자신이 절대 적으로 약한 존재라는 것을 믿게 된다. 이때 율법의 목적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안에서 율법을 행하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몽학선생이다.
(갈:3;24)
간추린말씀 조회 9 댓글 1 스크랩 1 2010-02-27 21: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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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는가를 보고 로마서 7장에서는 그분이 어떻게 율법에서 우리는 해방하셨는가를 본다. 6장은 주인과 종의 그림으로 죄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7장은 두 남편과 한 아내의 그림으로 율법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죄와 죄인의 관계는 바로 주인과 종의 관계인 반면에 율법과 죄인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이다.
바울이 로마서 7장1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을 사용하여 율법에서 벗어나는그림을 제공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한 여인에게 두 남편이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그 여인은 그 중 한 사람의 아내밖에 될수 없기 때문에 장말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여자는 마음이 내키지 않은 사람에게 시집갔다. 그녀가 시집간 남편이 좋은 사람임을 기억하라. 문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완전히 맞지 않은 데 있다. 그는 극도로 엄격한 사람이고 호리라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녀는 정반대로 범사를 아무렇게나 처리하는 극단에 처해 있는 사람이다.
그는 범사에 매우 정확한 반면 그녀는 경솔하게 일한다. 그는 모든일을 다 단호하고 분명하게 하는 반면에 그녀는 대충해 버린다. 이런 가정이 어찌 즐거울수 있겠는가.
그 남편은 이렇게 성실하며 자기 아내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 어느 누구도 그의 흠을 말할수 없다. 또 그는 그 여자의 남편이기 때문에 그녀에게서 무었을 기대할 권한이 있다. 더우기 그의 모든 요구는 완전히 합법 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남자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그의 요구도 틀리지 않다. 문제는 그의 아내가 남편이 요구한 것을 이루지 못하는데 있다.
두사람은 전혀 함께 처할수 없다. 그들의 성품은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잘안다. 그러나 이런 남편과 함께 거할 때 그녀의 말하는 것이나 행하는 모든 일이 다 틀리게 된다. 그녀에게 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만일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다면 모든 면에서 좋을 것이다. 그 남자는 본래 그녀의 남편보다 엄격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그녀는 그 남자에게 시집가기를 원하나 단지 그의 남편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어떻게 도 할수 없는 것이다.
남편이 아직 살아 있을 때 그녀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된다. 남편이 죽지 않고서는 결코 합법 적으로 그남자에게 시집 갈수 없다, 이 그림은 내가 그린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린 것이다. 첫 남편은 율법이고 두번째 남편은 그리스도이시다. 또 당신은 바로 그 여인이다.
율법은 당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만. 그 요구를 이루는 데에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 주 에수님이 요구하시는 것도 많다. 심지어 율법이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마 5:21-48).
그러나 그분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을 우리안에서 친히 이루신다. 율법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요구만하고 이행할 능력을 주지 않는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여러가지를 요구하시지만 그분이 친히 우리안에서 그분이 요구하신 것을 이행하신다. 그러므로 그 여자가 첫 남편을 떠나 다른 남편에게 십가고 싶어하는 것을 조금도 이상한 일이아니다.
그녀가 해방받기 위해서 유일하게 바랄 수 있는 것은 바로 첫 남편이 죽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남편은 완고히 그 생명을 붙잡고 놓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여인은 그가 죽는 것에 대해 호리라도 소망을 가질수 없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율법은 영원까지 계속될 것이다. 만일 율법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다면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합할수 있겠는가. 만일 나의 첫 남편이 죽기를 거절한다면 내가 어떻게 두번때 남편에게 시집갈수 있느가. 오직 방법은 하나이다. 즉 그가 죽기를 원치 않는다면 내가 죽으면된다.
만일 내가 죽는다면 혼인의 관계는 끊어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율법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이다.
로마서 7장의 이단락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3절에서4절로 바뀌는 것이다. 1절부터3절까지는 마땅히 남편이 죽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4절은 사실상 죽은 쪽은 여인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율법이 죽지 않고 내가 죽은 것이다. 죽음으로 말미안아 나는 율법에거 벗어났다. 율법은 영원히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자.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는 영원 까지존재한다. 내가 아직 살아있는한 나는 반드시 그요구들에 응해야한다. 그러나 만일 내가 죽었다면 율법은 더이상 나에게 무엇을 요구할수 없다. 율법은 무덤을 넘어서 나를 따라올수 없다.
간추린말씀 조회 13 댓글 1 스크랩 1 2010-03-02 23: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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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나는 것은 원칙상 죄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다. 내가 죽었어도 나의 옛주인(죄)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러나 나를 노예삼는 그 권세는 무덤까지밖에 이르지 못한다.
더 이상은 미치지 못한다. 내가 아직 살아 있을 때에는 옛주인인 죄는 나에게 백가지 천가지를 요구할수 있지만 일단 내가 죽어버리면 그는 다시 나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이때 나는 영원히 그의 학대 에서 벗어나게 된다. 율법에 대하여도 마찬 가지이다. 그 여자가 아직 살아있을 때 그녀는 남편의 속박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일단 그녀가 죽어버리면 혼인 관계는 해제되고 그녀는 "남편의 법에서 벗어난 것이다." 율법의 요구가 여전하지만 율법은 더이상 나에게 권세를 행사할수 없다.
이제는 나는 어떻게 죽는가의 문제가 남았다. 우리주님의 역사의 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롬 7:4). 그리스도 께서 죽으실때 그분의 몸이 갈라졌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 안에 두셨기 때문에 나도 갈라진 것이다.(고전 1:30)
그분이 못 박혀 죽으셨을때 나도 그와 함께 못 박혔다. 구약에 이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한가지 예증이 있다. 즉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격리시키는 휘장 위에 그룹들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출 26:31.대하 3:14) 에스겔1장 10절과 10장 14절은 그룹들의 얼굴 중 하나가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람은 천연적인 옛 창조물(시 8:4-8) 전체의 머리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휘장 안에 거하셨고 사람은 휘장 밖에 거하엿다. 사람은 휘장 밖은 볼수 잇었지만 휘장안은 볼수 없었다. 그 휘장은 우리 주님의 육체를 상징한다.(히 10:20). 그러므로 복음서에서 사람들은 우리 주님의 밖의 모습만 볼수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 의 계시가 없이는 ( 16:16-17)그들은 주님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볼수 없다 그러나 주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사람들이 지성소 안에 들어올수 있도록 성전 안의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둘로 갈라지게 하셨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이 죽으신 후로 하나님은 더이상 자신를 감추지 않으시고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고자 하셨다.(고전 2:7-10).
이제 우리가 묻고 싶은 것은, 휘장이 갈라질 때 그룹이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휘장을 찢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룹들이 휘장 위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룹들은 휘장 위에 있었고 휘장과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휘장만 찢어지고 그룹이 온전할리가 없다. 휘장이 찢어질때 그룹들도 함께 찢어졌다. 하나님의 눈에 주 예수님이 죽으실때 모든 피조물들도 다 죽은 것이다.
"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그 여인의 남편이 아주 건장하고 강건할지 모르나 만일 그 여자가 죽었다면 그 남편이 자기의 원하는 대로 그녀에게 많은 것을 요구해도 그녀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읺는다. 죽음은 이미 그녀로 하여금 남편의 모든 요구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주 예수님이 죽으실때 우리는 그분 안에 있었기 때문에 만유를 포함안 그분의죽음이 율법에게 우리를 해방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무덤에 남아 계시지 않으셨다. 사흘되던날에 그분은 부활하셨다.
우리역시 그분안에 있었기 때문에 부활하엿다. 주 예수님의 몸은 그분의 죽음을 말해줄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의 부활을 말해준다.이는 그분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신 목적에는 소극적인 면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영광스런 방면이 있다. "다른이에게가서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열매를 맺히게 (롬 7:4)
죽음으로 옛혼인의 관계는 해제 되었다. 이전 남편은 쉬지않고 그녀에게 요구만 하며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돕지 않아 절망에 떨어졌던 그 여인이 이제는 자유하여져서 다른 남자에게시집갈수 있게 되었다. 비록 그분이 그녀에게 요구하시지만 그분 자신이 그 여인 안에 계셔서 그분의 모든요구를 이행하는 능력이 되신다.
이 새로운 연합의 결과는 무엇인가. 이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이다. 어리석고 죄 있는 여인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이미 죽었다. 그분의 죽음에 연합함으로 그녀는 그분의 부활과도 연합되었으며 부활 생명의 능력 안에서 그녀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다. 주님의 승천의 능력은 그녀 안에서 능력을 주어 그녀로 하여금 능히 하나님이 그녀에게 요구하신 거룩함에 응하게 했다. 하나님의 율법이 폐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완전히 온전케되었다. 이는 이제 부활의 주님께서 그녀 안에서 그분의 생명을 살아나타내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분의 생명은 영원히 아바지의 기뻐하심을 얻은 생명이다.
여인이 결혼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녀는 더이상 자기의 성을 갖지않고 남편의 성을 사용하게 된다. 그녀는 남편의 성에 참여할뿐아니라 또한 남편의 재산에도 참여하게 된다. 우리도 이렇게 그리스도께돌아왔다.
일단 우리가 그분에게 속한다면 그분의 모든 것이 또한 우리의 소유가 된다.
우리가 그분의 무한한 풍성을 취할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히 그분의 모든 요구에 응할수 있다.
간추린말씀 조회 8 댓글 1 스크랩 1 2010-03-06 21: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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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이 문제의 교리적인 면을 해결하였다. 이제 우리는 실제적인 방면을 보기로 하자. 적극적인 면은 다음 장에서 다시 말하기로 하고 먼저 소극적인 방면을 보기로 하자. 매일의 생활 안에서 율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이후로 다시는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지 않고 다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당신을 놀라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게 무슨 가르침 입니까. 얼마나 무서운 이단입니까. 율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결코 이런 뜻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안에서 내가 하나님을기쁘시게 하려고 할때 즉시 내자신을 율법 아래 두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나는 율법을 어기게 되고 율법은 내게 사형을 선포할 것이다. 이 사형은 이미 집행되어졌고 이제
육체에 속한 나는 죽음으로써 이미 율법의 모든 요구로 부터 벗어난 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여전히 존재하며 사실상 이제는 새로운 율법이 있게 된 것이다. 더우기 옛날 율법보다 더 엄격한 율법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미하자. 이제 그 요구들을 이행 하시고 내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들은 이미 만족되었다. 그분은 내가 온것은 율법을 완전케하려 함이니. (마 5:17)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초 위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할수 있었다.
"두럽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여러분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말은 법도 하늘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반대로 율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다시는 우리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준수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우리가 우리자신에 대해 완전히 절망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분의 부활 생명을 완전히 나타 내실 주님을 신뢰하게된다.
1923년 나는 캐나다의 유명한 한 전도자를 만났다. 그날 나는 설교를 마치고 그의 집에 들어갔을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로마서 7장을 말하는 것을 듣기가 어려운데 오늘 다시 한번 들어보니 참 좋군요. 제가 이미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보았던 날 저는 참으로 땅에 있으나 하늘에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구원받은 후 수년 동안 저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힘을 쓸수있도록 더욱 실패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주 가운데 가장 요구를 많이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가장 작은 요구도 나 스스로는 이행할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느날 제가 로마서 7장을 읽는데 갑자기 저에게 빛이임하였습니다. 주님이 저를 죄에서 해방하신 것같이 율법에서도 해방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놀라 뛰면서 "주여.당신은 참으로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지 않습니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저는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승리에 이르러보려고 몸부림치는 한 형제가 있었다. 그는 나에게 "제가 왜 이렇게 약한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했는데.나는 이렇게 답변하였다."당신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할 정도로 약하지만 모든일을 포기할 정도로 약하지는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아직 충분히 약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완전히 무력한데까지 낮아져서 당신이 아무 것도 할수 없다는 것을 믿을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하시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 주여 저는 당신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내안에서 모든 일을 행하실 것을 믿습니다. 라고 말할 정도로 약해져야 한다.
우리가 포기할때 비로서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그분은 항상 우리의 힘이 막바지에 이르러 다시는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을때 비로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옛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정죄하셨고 이것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기 때문에 육체는 무익하다. 만일 우리가 육체 안에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정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선포하셨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선포를 믿는 다면 우리는 마땅히 행동으로 하나님의 판결을 증명해 보여야한다.
그 행동은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우리가 힘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서 달리 취할것이 없다는 십자가의 선포를 부인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 노력하는 이유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오해하고 또 한편으로는 공급의 근원을 오해하였기 때문이다.
로마서 7장의 곤고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만족케 하려고 하였다. 그의 문제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이 장에서 거듭 사용된 "나" 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우리가 실패한 실마리를 보여준다 .
"내가 원하는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이사람 속에 한가지 기본적으로 잘못된 관념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비록 그가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려고 노력하지만 그의 행한 것들은 그가 아는 바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된 것이다.
간추린말씀 조회 7 댓글 2 스크랩 1 2010-03-08 20:5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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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은 죄의 몸 을 다루고 7장은 사망의 몸 을 다룬다. 6장에서 우리 앞에 놓여진 것은 죄의 문제이고. 7장의 문제는 사망이다. 그러면 죄의 몸과 사망의 몸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죄에 관하여:나에게는 죄의몸이있고 (적극적으로 죄를 범하는 몸).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나에게는 사망의 몸이 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다).
죄의 면의 활동은 나의 몸을 죄의 몸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실패하는 면에서는 나의 몸을 사망의 몸이 되게 한다. 사악한 것들에 관하여 나의 성품은 세상에 속하고 사탄에 속한다. 이면에서 나는 완전히 적극적이다. 그러나 성결과하늘에 속한 일에 대하여 나는 완전히 소극적이다.
당신은 당신의 생명 안에서 이 진리를 발견했다면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생명이 없는 몸에 끌려다닌다는 것을 발견하였는가.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해 말할 때 당신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말해야 할때 당신은 한마디도 말해내지 못할것이다. 기도하려고 할때 당신은 졸릴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려고 할때 당신은 몸이 좋지않다고 느낄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과 관계된 것 외의 것은 다 할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몸 안에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 되지 않은 것이 있다.
사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설명하는데 아주 적절한 고린도전서의 한 말씀이 있다. 곧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 (고전 11:30). 죽음은 극도로 약해지는 것이다. 약함에서 질병으로 마자막에는 사망으로 발전한다. 그러므로 사망은 극도의 약함이다. 즉 더이상 약할수 없을 정도로 약한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우리가 사망의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약하고 극도로 약하여 구제불능할정도로 약하다는 뜻이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외쳤다. 만일 누가 바울처럼 외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가장 듣기 좋은 소리이다. 이것은 사람의 외침 중 가장 신령히고 성경적인 소리이다. 사람이 자기가 아무 것도 할수 없다는 것을 알고 어떤 뜻을 세울 결심조차도 포기 할때 비로서 이런 외침을 갖는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매번 실패할 적마다. 그는 새로운 결심을 하고 배나 더 의지의 힘을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의 결심이 무익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절망 중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외치게 된다. 그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 자신이 불타고 있는 집안에 있는 것을 발견한 것처럼 구조를 요청하는 외침을 발하게 된다. 이는 그가 이미 절망의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에 대해 이미 절망하였는가. 혹 당신은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함으로써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성경 읽기와 기도를 소홀히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성경 읽기와 기도를 우리의승리의 비결로 삼는다면 그것은 잘못된것이다.우리의 도움은 그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분만이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목적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뢰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그 곤고 한 사람은 의의 곤경을 호소 했을 뿐 아니라 또한 좋은 질문을 발하였다. 즉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라 이다. "누가 " 전에 그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소망은 그를 건져낼 한 분에게 있다.
전에 그는 자기 안에서 문제의 해답을 찾았지만. 이제 그는 자신 밖에서 한분 구주를 찾았다. 그는 더이상 자기의 힘을 쓰지 않으며 이제 그의 모든 희망은 다 그분에게 있다.
간추린말씀 조회 7 댓글 2 스크랩 1 2010-03-09 18:3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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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죄사함을 받았는가. 성경읽기. 기도. 구제 등으로인가. 아니다. 십자가를 앙망하고 주 예수님이 이루신 것들을 믿음으로써이다.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받은 것도 이 원칙에 근거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자연히 이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십자가상의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죄사함을 얻게되고.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앙망할때 우리는 죄로 부터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수 있게 된다. 그분이 이루신 것들을 의지할때 우리는 첫번째 것을 얻게 되고. 이제 우리 안에서의 그분의 역사하심을 의지할때 두번째 것을 얻게 된다. 이 두 가지에 있어서 그분은 우리에게 만유가 되시기 때문에 그분만이 우리가 유일하게 의지할 분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 살인자는 매우 특별하고 무시무시한 방법 으로 형벌을 받았다. 그 방법은 바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죄수의 몸에 묶어 놓되. 손은 손과 발은 발과 묵꺼 놓는 것이었다.
이렇게 살인한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죽은 사람을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 묶어 놓는다. 죄수는 자기의 원대로 아무 데나 갈수 있었지만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는 죽임당한 사람의 시체를 끌고 다녀야 했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 어디 있겠는가. 바울은 바로 이런 형벌을 예증으로 삼았다. 그는 죽은 시체에 묶인 사람같이 자유함이 없었다. 그가 어디로 가든지 무서운 짐의 제재를 받았다. 결국에 그는 참지 못하여.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외쳤다.
그런다음 그는 갑자기 깨어나서 절망 가운데서의 부르 짖음이 찬송의 가사로 변해 버렸다. 그는 이미 문제의 해답을 찾았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 7:25)
우리는 우리가 의롭게 된것이 우리 힘으로 무엇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주 예수로 말미암은 것임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케 되는 데에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완전히 주님을 의지하여야만 사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죄로부터 해방되려면 우리 자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안하면 아무 성과가 없을까봐 두려워한다. 구원받은 후 우리는 무언가 하려는 낡은 습관이 우리 스스로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전의 노력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신선하게 말씀하신다.
십자가 상에서 그분은 이미 우리의 죄사함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또한 그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받도록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다. 그분은 이 두 가지 일에서 역사하시는 분이다.
" 너희 안에서 행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죄로부터 해방받는 사람의 첫 마디는 매우 귀하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했다.
만일 누가 당신에게 물 한 컵을 준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당신에게 물을 준 사람에게 감사할 것이다. 바울은 무었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말하였는가.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만일 바울스스로 해방받았다면 아마 바울에게 감사라리로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바울은 자신이 비참한사람으로서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필요를 만족케 하실 수 있음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영광을 얻으셔야하기 때문에 그분은 모들 역사를 이루셔야 한다. 만일 우리도 무언가를 했다면 약간의 영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영광이 다 그분에게 돌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시종 모든 것을 이루신다.
만일 이 점에 머문다면. 이 장에서 우리가 말한 것이 다 소극적이고 실제적이지 않을 것 같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앉아 있기만하고 일이 발생하기만을 기다리는 것같이 생각될지 모른다. 물론 사실은 전혀 이렇지 않다.
참으로 이말씀 안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적극 적이고 살아 있는 믿음임을 안다. 또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생명의 원칙 하에 사는데. 이원칙은 바로 생명의 영의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