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죄사함을 받았는가. 성경읽기. 기도. 구제 등으로인가. 아니다. 십자가를 앙망하고 주 예수님이 이루신 것들을 믿음으로써이다.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받은 것도 이 원칙에 근거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자연히 이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십자가상의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죄사함을 얻게되고.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앙망할때 우리는 죄로 부터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수 있게 된다. 그분이 이루신 것들을 의지할때 우리는 첫번째 것을 얻게 되고. 이제 우리 안에서의 그분의 역사하심을 의지할때 두번째 것을 얻게 된다. 이 두 가지에 있어서 그분은 우리에게 만유가 되시기 때문에 그분만이 우리가 유일하게 의지할 분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 살인자는 매우 특별하고 무시무시한 방법 으로 형벌을 받았다. 그 방법은 바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죄수의 몸에 묶어 놓되. 손은 손과 발은 발과 묵꺼 놓는 것이었다.
이렇게 살인한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죽은 사람을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 묶어 놓는다. 죄수는 자기의 원대로 아무 데나 갈수 있었지만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는 죽임당한 사람의 시체를 끌고 다녀야 했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 어디 있겠는가. 바울은 바로 이런 형벌을 예증으로 삼았다. 그는 죽은 시체에 묶인 사람같이 자유함이 없었다. 그가 어디로 가든지 무서운 짐의 제재를 받았다. 결국에 그는 참지 못하여.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외쳤다.
그런다음 그는 갑자기 깨어나서 절망 가운데서의 부르 짖음이 찬송의 가사로 변해 버렸다. 그는 이미 문제의 해답을 찾았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 7:25)
우리는 우리가 의롭게 된것이 우리 힘으로 무엇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주 예수로 말미암은 것임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케 되는 데에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완전히 주님을 의지하여야만 사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죄로부터 해방되려면 우리 자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안하면 아무 성과가 없을까봐 두려워한다. 구원받은 후 우리는 무언가 하려는 낡은 습관이 우리 스스로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전의 노력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신선하게 말씀하신다.
십자가 상에서 그분은 이미 우리의 죄사함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또한 그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받도록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다. 그분은 이 두 가지 일에서 역사하시는 분이다.
" 너희 안에서 행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죄로부터 해방받는 사람의 첫 마디는 매우 귀하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했다.
만일 누가 당신에게 물 한 컵을 준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당신에게 물을 준 사람에게 감사할 것이다. 바울은 무었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말하였는가.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만일 바울스스로 해방받았다면 아마 바울에게 감사라리로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바울은 자신이 비참한사람으로서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필요를 만족케 하실 수 있음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영광을 얻으셔야하기 때문에 그분은 모들 역사를 이루셔야 한다. 만일 우리도 무언가를 했다면 약간의 영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영광이 다 그분에게 돌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시종 모든 것을 이루신다.
만일 이 점에 머문다면. 이 장에서 우리가 말한 것이 다 소극적이고 실제적이지 않을 것 같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앉아 있기만하고 일이 발생하기만을 기다리는 것같이 생각될지 모른다. 물론 사실은 전혀 이렇지 않다.
참으로 이말씀 안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적극 적이고 살아 있는 믿음임을 안다. 또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생명의 원칙 하에 사는데. 이원칙은 바로 생명의 영의 법이다.
로마서 6장은 죄의 몸 을 다루고 7장은 사망의 몸 을 다룬다. 6장에서 우리 앞에 놓여진 것은 죄의 문제이고. 7장의 문제는 사망이다. 그러면 죄의 몸과 사망의 몸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죄에 관하여:나에게는 죄의몸이있고 (적극적으로 죄를 범하는 몸).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나에게는 사망의 몸이 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다).
죄의 면의 활동은 나의 몸을 죄의 몸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실패하는 면에서는 나의 몸을 사망의 몸이 되게 한다. 사악한 것들에 관하여 나의 성품은 세상에 속하고 사탄에 속한다. 이면에서 나는 완전히 적극적이다. 그러나 성결과하늘에 속한 일에 대하여 나는 완전히 소극적이다.
당신은 당신의 생명 안에서 이 진리를 발견했다면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생명이 없는 몸에 끌려다닌다는 것을 발견하였는가.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해 말할 때 당신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말해야 할때 당신은 한마디도 말해내지 못할것이다. 기도하려고 할때 당신은 졸릴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려고 할때 당신은 몸이 좋지않다고 느낄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과 관계된 것 외의 것은 다 할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몸 안에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 되지 않은 것이 있다.
사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설명하는데 아주 적절한 고린도전서의 한 말씀이 있다. 곧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 (고전 11:30). 죽음은 극도로 약해지는 것이다. 약함에서 질병으로 마자막에는 사망으로 발전한다. 그러므로 사망은 극도의 약함이다. 즉 더이상 약할수 없을 정도로 약한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우리가 사망의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약하고 극도로 약하여 구제불능할정도로 약하다는 뜻이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외쳤다. 만일 누가 바울처럼 외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가장 듣기 좋은 소리이다. 이것은 사람의 외침 중 가장 신령히고 성경적인 소리이다. 사람이 자기가 아무 것도 할수 없다는 것을 알고 어떤 뜻을 세울 결심조차도 포기 할때 비로서 이런 외침을 갖는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매번 실패할 적마다. 그는 새로운 결심을 하고 배나 더 의지의 힘을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의 결심이 무익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절망 중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외치게 된다. 그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 자신이 불타고 있는 집안에 있는 것을 발견한 것처럼 구조를 요청하는 외침을 발하게 된다. 이는 그가 이미 절망의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에 대해 이미 절망하였는가. 혹 당신은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함으로써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성경 읽기와 기도를 소홀히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성경 읽기와 기도를 우리의승리의 비결로 삼는다면 그것은 잘못된것이다.우리의 도움은 그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분만이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목적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뢰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그 곤고 한 사람은 의의 곤경을 호소 했을 뿐 아니라 또한 좋은 질문을 발하였다. 즉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라 이다. "누가 " 전에 그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소망은 그를 건져낼 한 분에게 있다.
전에 그는 자기 안에서 문제의 해답을 찾았지만. 이제 그는 자신 밖에서 한분 구주를 찾았다. 그는 더이상 자기의 힘을 쓰지 않으며 이제 그의 모든 희망은 다 그분에게 있다.
우리는 다음날 보디올에 이르러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간청으로 그들과 함께 칠일동안 머물다가 로마로 갔다. 그곳 형제들이 우리에 관한 소식을 듣고 아피온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 라는 곳 까지 우리를 맞으러 나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용기를 얻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갔을때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군인 한사람과 함께 따로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삼일후에 바울이 유대인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이 모였을때 바울이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백성이나 조상의 관습을 거스른 적이 없는데도 죄수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 졌습니다. 로마사람들은 나를 심문하였지만 나에게 죽일 만한 죄목이 하나도 없으므로 .나를 석방해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들이 반대하였기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이며 내 민족을 고발할 것이 있어서 그렇게 한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유로 내가 여러분을 만나 보고 말씀드리려고 여러분을 불렀던 것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에 이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바울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유대에서 부친 그대에 관한 편지를 받은 적도 없고. 형제들 가운데 누가 와서 그대에 관하여 나쁘다고하거나 말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대가 생각하는 것을 직접 들어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종파에 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어대서나 반대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과 날짜를 정해 두었는데 그날이 되자 다욱 많은 사람이 그의 숙소를 찾아왔다.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해하여 하나님의 왕국에 관하여 엄숙히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서와 신언자들의 글을 들어 예수님에 관하여 그들을 설득하였다. 어떤사람들은 바울의 말에 설득되었으나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그들이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떠나려하자 바울이 그들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성령께서 신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잘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여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고 보기는 보아도 결코 알지 못할것이다. 이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지고 귀는 듣는데 둔하여지고 눈은 감기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키는 일이 없도록하여 나에게서 병을 고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보내어진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 문제의 교리적인 면을 해결하였다. 이제 우리는 실제적인 방면을 보기로 하자. 적극적인 면은 다음 장에서 다시 말하기로 하고 먼저 소극적인 방면을 보기로 하자. 매일의 생활 안에서 율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이후로 다시는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지 않고 다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당신을 놀라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게 무슨 가르침 입니까. 얼마나 무서운 이단입니까. 율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결코 이런 뜻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안에서 내가 하나님을기쁘시게 하려고 할때 즉시 내자신을 율법 아래 두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나는 율법을 어기게 되고 율법은 내게 사형을 선포할 것이다. 이 사형은 이미 집행되어졌고 이제
육체에 속한 나는 죽음으로써 이미 율법의 모든 요구로 부터 벗어난 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여전히 존재하며 사실상 이제는 새로운 율법이 있게 된 것이다. 더우기 옛날 율법보다 더 엄격한 율법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미하자. 이제 그 요구들을 이행 하시고 내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들은 이미 만족되었다. 그분은 내가 온것은 율법을 완전케하려 함이니. (마 5:17)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초 위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할수 있었다.
"두럽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여러분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말은 법도 하늘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반대로 율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다시는 우리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준수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우리가 우리자신에 대해 완전히 절망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분의 부활 생명을 완전히 나타 내실 주님을 신뢰하게된다.
1923년 나는 캐나다의 유명한 한 전도자를 만났다. 그날 나는 설교를 마치고 그의 집에 들어갔을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로마서 7장을 말하는 것을 듣기가 어려운데 오늘 다시 한번 들어보니 참 좋군요. 제가 이미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보았던 날 저는 참으로 땅에 있으나 하늘에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구원받은 후 수년 동안 저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힘을 쓸수있도록 더욱 실패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주 가운데 가장 요구를 많이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가장 작은 요구도 나 스스로는 이행할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느날 제가 로마서 7장을 읽는데 갑자기 저에게 빛이임하였습니다. 주님이 저를 죄에서 해방하신 것같이 율법에서도 해방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놀라 뛰면서 "주여.당신은 참으로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지 않습니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저는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승리에 이르러보려고 몸부림치는 한 형제가 있었다. 그는 나에게 "제가 왜 이렇게 약한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했는데.나는 이렇게 답변하였다."당신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할 정도로 약하지만 모든일을 포기할 정도로 약하지는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아직 충분히 약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완전히 무력한데까지 낮아져서 당신이 아무 것도 할수 없다는 것을 믿을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하시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 주여 저는 당신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내안에서 모든 일을 행하실 것을 믿습니다. 라고 말할 정도로 약해져야 한다.
우리가 포기할때 비로서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그분은 항상 우리의 힘이 막바지에 이르러 다시는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을때 비로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옛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정죄하셨고 이것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기 때문에 육체는 무익하다. 만일 우리가 육체 안에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정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선포하셨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선포를 믿는 다면 우리는 마땅히 행동으로 하나님의 판결을 증명해 보여야한다.
그 행동은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우리가 힘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서 달리 취할것이 없다는 십자가의 선포를 부인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 노력하는 이유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오해하고 또 한편으로는 공급의 근원을 오해하였기 때문이다.
로마서 7장의 곤고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만족케 하려고 하였다. 그의 문제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이 장에서 거듭 사용된 "나" 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우리가 실패한 실마리를 보여준다 .
"내가 원하는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이사람 속에 한가지 기본적으로 잘못된 관념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비록 그가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려고 노력하지만 그의 행한 것들은 그가 아는 바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