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와 사람의연약함


간추린말씀 2009-12-17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9963.html

로마서 7장은 우리에게 새로운 공과를 가르쳐준다. 바울은 내가 육체에 속하고 (5절), 또 나는 육신에 속하였고 (14절). 내속 곧 내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18절) 라고 말한다. 이것은 죄의 문제를 훨씬 능가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처리하는 것은 각양의 죄가 아니라 육체에 속한 사람이다. 후자는 전자를 포함하나 전자보다 진보적이다.

이는 후자가 육신의 범위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무능한 사람인 것과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없느니라"(8절) 를 발견하는 데로 우리를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율법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제 잠시 뒤로 물러나서 많은 사람의 체험을 말해보기로 하자. 어떤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구원받았으나 여전히 죄에 매여 있다. 이것은 그가 항상 죄의 권세 아래 생활한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죄가 계속 그를 괴롭히고 그가 항상 그 죄들을 범한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죄가 계속 그를 괴롭히고 그가 항상 그 죄들을 범한다는 뜻이다. 어느날 그는 주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죄를 씻었을 뿐 아니라. 그분이 죽으실때 죄인인 우리까지도 그분의 죽음 안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그분의 죽음은 우리죄만 처리하지 않고 우리 자신도 처리하였다는 완전한 복음을 듣고서 눈이 열려 그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게 된다.

 

이 계시에 따라 두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자신을 주와 함께 죽고 부활한 자로 여기는 것이고. 둘째는 그에게 있는 주님의 주권을 인식함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산자같이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는 그가  더이상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찬미로 가득한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시작이다.

 

그리고나서 그는이런 생각을 갖기 시작한다. "내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였으며 내 자신을 영원히 그분께 드렸다. 그가 나를 위하여 이렇게 많은 일을 행하셨으므로 나도 그분을 위하여무언가를 해야겠다. 나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그분의 뜻을 행해야겠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헌신한 뒤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고 그분께 순복하려고 자신을 준비한다. 그러나 자신의 예상외로 그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본래 그는 하나님의뜻을 준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사랑할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는 자신이 자주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지 않은다는 것을 발견한다. 때때로 그는 심지어 하나님의 뜻인줄 알면서도 그것을 향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분의 뜻을 행하려고 시도해 볼때에도 그는자신이 할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의 체험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자문하게 된다." 내가 정말 알았는가. 그렇다! 내가 참으로 여겼는가 .그렇다! 내가 확실하게 내자신을 그분께 드렸는가. 그렇다!. 내가 내 헌신을 다시 회수하지는 않았는가 .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상태는 어떻게 된 것인가.

 

이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려고 할때마다 실패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그가 얻은 결론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준행할 갈망과 능력을 그분께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불순종을 시인하고 다음에는 불순종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기도를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기도전에 그는 또 이미 실패한 자가 된다. 그는 승리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실패하였다고 느낀다. 그리고나서 그는 자신에게."아마도 나의 최종 결정이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아. 이번에는 절대적이고 확고한 결정을 내리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의지의 힘을 다하여 행한다. 그러나 결국은 더 심한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다시 바울의 말을되풀이 하게 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롬7:18-19)



로마서 7장의 의미와 가치


간추린말씀 2009-12-1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9932.html

이제 로마서로 돌아가자. 6장 끝에서 우리는 두가지 관련된 제목을 다루기 위해 잠시 멈춘 적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기와 목표인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다른 하나는 그 목적에 이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과 지혜를 공급하는 성령이다.

이제 우리는 로마서 7장을 보기로 하자. 많은 사람들은 7장을 불필요한 장으로 생각한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옛 창조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제해졌고 또 그분의 부활로 말미암아 완전히  새로운 창조가 도입되었다는 것을 보았다면 로마서 7장은 불필요한 것이 될수잇다. 만일 우리가 진정 이것을 알고 또 이일에 근거하여 이것을 여기며 이것에 기초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다면  우리에게는 로마서 7장이 필요치 않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7장의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그들은 7 장을 로마서 5장과 6장 사이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로마서 6장에 이를 때 모든 것이 완전하고 평탄케 되었는데 어찌 또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실패의 신음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어찌 용두사미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7장에서 말한 것은 거듭나기 전 바울의 체험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장에서 그가 묘사하는 것중 어떤 것은 비그리스도인의 체험임을 시인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체험을 하고 있다. 그러면 이 장이 주는 교훈은 무었인가.

우리는 로마서 6장이 다루는 문제가 죄를 향한 자유함인 반면에 7장은 율법을 향한 자유함을 다룬다는 것을 안다. 6장에서 바울은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는 가를 우리에게 말한다.

 

그는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필요임을 말함으로 결론 짓느다. 이제 7장은 다만 죄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부족하고 또한 어떻게 울법에서 벗어나는 가를  알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만일 우리가 아직 율법의 억압으로부터 온전히 해방 받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죄로부터 온전히 벗어날수 없다. 그러면 죄로부터의 해방과 울법으로부터의 해방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가 전자의 가치를 알면 되지 왜 후자를 알아야 하는가 .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필요성을 알려면 먼저 반드시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제8장 성 령 (2)


정상적인그리스도인의생활 2009-12-15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k505/9930.html

혹 당신은 "성령이 내 몸에 강림한것을 어떻게 알수 있느냐" 고 물을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알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그것을 안다. 성경은 오순절날 제자들 각 사람의 느낌과 정서가 어떠했는지를 우리에게 말하자 않았다. 우리는 당시 그들의 느낌을 확실히 알수는 없지만 느낌과 행동에서 그들이 다소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는 그들을 본 사람들이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 위에 강림하실때. 그들 몸에는 언제나 세상 사람들이 이해 하지 못하는 광경이 있는 법이다.

비록 그것이 저항할수 없는 하나님의 안배와 느낌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그 느낌에 따라 불가사의한 초월의 능력을 지니게 된다. 우리는 성령의 옮겨 부음에 어떤 특별한 밖의 표현이 있게 된다고 말할수 없고 규정할수도 없다.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령의 옮겨 부음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한 것을 안다는 것이다.

 

오순절날 당시 성령이 제자들 위에 임햇을때 그들의 행동은 매우 특별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를."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씁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 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의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했다.

그럼 그 날 베드로가 예언을 하였는가. 우리는 그날 베드로가 요엘이 말한 예언을 하였다고 단 정할수없다. 그 백 이십 명이 예언을 하거나 이상를 보았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몽을 꾸었는가 그들이 어떻게 꿈을 꿀 수 있는가. 그들은 생각이 매우 청명하지 않앗는가. 베드로가 사실에 부함되지 않는 말씁을 인용했단 말인가. 데체 무슨 뜻인가 베드로가 인용한 요옐의 말 은 예언을 말함과 환상을 보는 것과 꿈 꾸는 것이 성령의 옮겨 부어짐에 따라 오는 것임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중거들은 오순절날에 분명 보이지 않았었다.

 

다른 면에서 요일은 성령의 옮겨부음을 받을 때의 광경을 예언함에 있어서 "큰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니". 또는 "불 같은 혀가 나타나니"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모든 일들이 작은 다락방에서 발생했다. 당신은 그들이 방언을 말할것이라고 말한 요엘의 말을  찾아 낼수 있는가 . 그럼에도 오순절날 제자들은 방언을 말하였다.

그럼 베드로가 요엘의 말을 인용한 것은 무슨 뜻에서 였는가 생각해 보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오순절날의 체험이 바로 요엘이 말한 성령의 옮겨 부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요엘이 말한 그 증거들은 오순절날 한 가지도 출현하지 않았다. 요엘서에서 말한 것을 제자들은 소유하지 않았었다,. 제자들이 소유한 것은 요엘서에 언급되지 않았다. 베드로가 인용한 성경는 그의 논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반 박하는 것같다. 이비밀은 어떻게 설명되어야하는가.

 

그날 베드로가 성령의 통제 하에 말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도행전의 기록은 성령의 갑동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가 임으로 한 말씀이나 합당치 않은 것은 한 곳에도 없으며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있다. 우리는 베드로가 "너희가 보고 들은 바는 선지자 요엘의 말씀이 응한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주의하라. 그는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것이니 일렀으되." (행 2-16)라고 말했다.

 

이것은 어떤 것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일을 체험한 것일 뿐이다." 이는곧" 은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은 예언한 바와 동일한 일이라는 뜻이다". 만일 이것이 성취에 관한 일이라면 모든 체험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고. 예언도 환상도 꿈꾸는 것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는 곧" 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른 일을 중복하는 문제가 아니라 두가지 일이 동일한 부류에 속하는 문제이다.

이점에 있어서 성령는베드로를 통하여 체험상의 차이점을 강하게 설명하였다. 밖의 표현등은 다양하고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이표현들이 우리가 보지 못했던 바임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그럴지라도 성령은 오직 한분이고 그분은 주이시다.(고전 12:4-6)

 

R.A.토레이 가 여러해 동안 목회를 한 후 성령이 그의 몸에 강림하였는데. 그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그가 한 말로 설명해 보도록하자.

"나는 내가 무릎 끓고 기도한 그 장소를 정확히 기억한다. 주위는 매우 조용했다.  나는 그렇게 조용한 시간을 체험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에게 (들을수 있는 소리가 아니라 내 마음 속에 말씀하신 것임)  이것은 네 것이다. 이제가서 전파하라고 말씀하셧다. 요한 일서 5장 14절부터 15절에서 그분은 나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성경에 대하여 지금처럼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께서는 나의 무지함을 긍휼히 여기사 내 마음에 직접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가서 전파하였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새로운 사역자가 되었다. 이체험후 얼마 후 인지는 모르지만  어느날 내가 집안에 앉아 잇을때 ...갑자기...나는 내자신이 다음과 같이 큰소리를 지르는 것을 발견했다. 어려서 부터 나는 큰 소리로 외쳐본 적이 없다. 내성품상 큰 소리 지르는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나는 위슬레 교인들처럼 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세 . 영광을 하나님 께돌리세. 나는 멈출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때 내가 성령침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단순한 믿음으로 그분

을 영접할때 성령 침례을 받았기 때문이다. (토레이의성령은 누구시며. 그분은 무엇을 하시는가.)

 

토레이에게 성령이 옮겨부어졌을 때 밖에 나타난 것은 요엘 혹은 베드로가 말한 것과 동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비록 그것들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동일한 것이다.

 

성령이 무디에게 임할때 그는 어떻게 느꼈고 또 무엇을 했는가.

나는 자주 하나님께 그분의 성령으로 나를 충만케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어느날 뉴욕시에서- 아! 그것은 얼마나 기억할 만한 날이었던가! 나는 그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또 나는 그것에대해 언급한 적도 별로 없다. 이는 그분이 너무 거룩하기 때문이다. 바울에게는 십사년 후에야 말한 체험이 있었다. 내가 말할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자신을 나에게 계시하여 나로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손을 멈추시라고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 내가 성령침례를 받은것은 아니었다. 왜내하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단순한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할때 셩령침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토레이에게 성령이 옮겨 부어졌을때 밖에 나타난것은 요엘 혹은 베드로가 말한 것과 동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비록 그것들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동일한 것이다.

 

성령이 무디 에게 임할때 그는 어떻게 느꼈고 또 무엇을 했는가.

"나는 자주 하나님께 그분의 성령으로 나를 충만케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어느날 뉴욕시에서 -아.

그것은 일마나 기억할만한 날이었던가! 나는 그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또 나는 그것에 대해 언급한 적도 별로 없다. 이는 그분이 너무 거룩하기 때문이다. 바울에게는 십사년 후에야 말한 체험이 있었다.  내가 말할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나에게 계시 하여 나로 그분이 사랑은 체험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손을 멈추시라고 부탁하지 않을 수없었다.

그후로 나는 여전히 전도하러 다녔다. 내가 전파한 것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새로운 진리를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백명이 회개하고 주님을 믿었다. 당신이 온 세상을 내게 준다 해도 나는 복된체험이 있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이복된체험과 비교할때 온세상은 저울 위의 작은 먼지같을뿐이다."

무디가 체험할때 밖으로 나타난 것은 요엘이 말한 것이나. 베드로가 말한 것이나 토레이가 말한 것과 다 다르다. 그러나 누가 무디의 체험이 오순절난 제자들이 가진 체험임을 의심할수 있겠는가 비록 그들의 체험에서 밖으로 나타난 것은 다를 지라고 본질은 동일 하다.

 

성령의 능력이 찰스 휘니에게 임했을때 그의 체험은 어떠했는가.

"성령 능력의 침례를 받기 전에 나는 이 일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내 마음속에서도 내가 이런 일을 체험하리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또 나는 누구에게서 이일에 관해 들어본적도 없었다. 성령이  내몸에 임할때 그분은 영광으로 내몸을 투시하는 것 같았다. 내마음에 부어진 기묘한 사랑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나는 기쁨과 사랑으로 인하여 큰 소리로 웃었다. "

휘니의 체험은 오순절의 복사판이 아니요. 토레이가 체험한 것의 복사판도 아니다. 그리고 무디가  체험한 것의 복사 판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체험이 오순절날의 체험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령이 하나님으 자녀들에게 부어질깨 그들의 체험은 왕왕 크게 다르다. 어떤사람은 환상을 보고   어떤사람들은 남을  주께로 인도 할 때 새로운 해방을 얻고 어떤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큰 능력을 얻는다. 또 어떠이들은 하늘의 기쁨과 넘치는 찬미로 충만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광경이든 그들이 체험한 것들은 바로 오순절날의  체험인 것이다. 모든  새로운 체험이 다 그리스도의 높이 올리우심과 관련 있기 째문에 하나님 을 찬미하고 이것이 그것의 중거라고 말할수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다루시지않는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편견과 선입감으로 우리 자신 혹은 다른 사람위에 있는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물샐틈 없이 격리된 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이 원칙은  마당히 성령 강림의 증거로서 방언과 같은

특별한 표현이 필요하다는 사람과 어떠한 표현이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 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자유로이 행사 하시고 그분의 역사 안에서 그분의 기뻐하심을 따라 증거를 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양보해 드려야 한다. 그분은 주이시다 우리에게는 그분을 대신 하여 무엇을 결정할 권한이 없다. 예수께서 이미 보좌위에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며 또한 영광을 얻으셨기 대문에 성령이 이미 우리에게 부어졌음을 인해 그분을찬미하자. 우리가 단순한 마음으로 이거룩한 사실을 받아드릴때 우리는 우리의 체험 가운데서 [이는, 곧] 임을 확실히 알고 담대히 선포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있는 성령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아는가. 우리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볼수 있기를 . 내안에 거하시는 분은 다만 어떤 영향력이 아니라 위격이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곧 하나님 이시다. 무한 하신 하나님께서 내안에 거하시다니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기뻐서 큰 소리로 외칠 것만 같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인격적인 성령임을 발견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이것을 분명하게 표현할수 있는 사람의 말이 없다. 나는 다만 반복하여 그분은 인격이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인격이 있는 분이시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오 친구여.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인격이 있는 분임을 백 번이라도 반복하여 말하겠다. 나는 질그릇에 지나지 않지만 이 질그릇 안에  비할대 없는 보배인 영광의 하나님을 담았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들이 눈이 열려서 그들 안에 감추인 보배가 이렇게 놀랍다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근심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 안에 있는 풍성한 자원이 당신이 당한 어떤 환경의 필요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아는가. 당신에게 당신이 거주하는 도시를 이동시킬 만한 족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당신에게 이 우주를 흔들 만한 족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오. 내가 가장 경건한 말로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남을 얻은 당신 안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 안에 담은 보배의 위대함을 안다면. 그들은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당신의 호주머니 속에 십실링밖에 없다면 길거리를 다닐때 당신의 몸은 매우 가벼울 것이다. 당신은 가볍게 말하면서 당신의 지팡이를 휘두를 것이다. 당신이 부주의하여 돈을 잃었다 할지라도 당신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몸에 천 파운드를 가지고 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당신의 전체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기뻐도 길을 걸으때 함부로 걷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발걸음을 늦추고 손을 호주머니 속에 집어 넣고 손가락으로 당신의 보화를 만져 볼것이다. 그리고는 신사답고도 유쾌한 심정으로 길을 걸어갈 것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의 진영 안에는 수천개의 장막이 있었다. 그 중 다른 모든 장막과 다른 한 장막이 있었다. 보통 장막 안에서는  원하는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혹 음식를 먹거나 금식하거나. 일하거나 쉬거나 기뻐하거나 엄숙하거나. 소리지르거나 조용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장막에 대하여는 공경하고 경외해야만 했다. 보통 장막 안에서는 마음대로 출입하고 원하는 대로 말하며 큰 소리로 웃을수 있었다. 그러나 그특별한 장막에 대하여는 공경하고 경외해야만 했다. 보통 장막 안에서는 마음대로 출입하고 원하는 대로 말하며 큰 소리로 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특별한 장막에 가까이 할 때에는 조용히 걸어야 했다.

 

그 앞에 서 있을 때에는 장중해지고 엄숙히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만지고서도 형벌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만일 사람이나 생축이 그것을 만진다면 정녕 죽게 된다. 왜. 이 장막은 이렇게 특별한가.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었다.

장막지체는 특별한것이 없었다. 그장막에 사용된 자료도 보통 것과 같았다. 그러나 지극히 트신 하나님께서 그 장막을 그분의 거처로 택하셨다. 

 

당신은 주님을 믿을 때 당신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아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들어가서  그곳을 그분의 성전 삼으셨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돌로 만든 성전안에 거하셨다.

오늘 그분은 살아 있는 믿는 이들로 건축된 성전 안에 거하고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마음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다는 것을 참으로 보았다면 우리의 일생은 얼마나 경건하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전이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 때. 모든 경솔함과 얕음과 자만은 다 종식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성령님을 모시고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을 참으로 아는가. 당신은 성경이나 하나님께 속한 많은 선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더욱 하나님 자신을 모시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성령께서 그들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참으로 알아도 성령의 능력들 체험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경건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경건함이 부족한 이유는 그들이 인격을 가진 성령이 임재하는 사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성령은 그들 안에 계신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보지 못하였다. 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기는 생활을 하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실패의 생활을 하는가. 그들의 차이점은 성령의 임재 여부에 있지 않고 (이는 성령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어떤사람은 성령이 그들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고 어떤 사람은 모르는 데 있다.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이 사실에 대해 참된 계시를 얻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는 어떠한 변화가 있을지! 

이제 우리는 성령의 역사의 두번째 방면인 성령의 내주하심을 말하겠다.  로마서 8장의 주제가 성령의 내주하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8장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  ]      11절:[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실리신 이의 영이 너희안에 거하시면...]등이다.

 셩령의내주하심은 성령의 옮겨부음과 같이 만일 우리가 체험 가운데서 성령님이 우리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한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 되심  곧 그분이 하늘 보좌로 높이올리우심을 객관적으로 볼때.우리는 성령이 우리몸에 능력으로 임한 것를 체험할 것이다. 우리가 주관적으로 그리스도의 주 되심. 곧 우리의 생명 안에서 그분이 능력 있는 통치자가  되심 을 볼때 우리는 성령이 우리안에서 능력이 되심을 체험하게 될것이다.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이지 않음에 대하여 바울은 성령의 내주하심의 계시를 그들의 구원으로 삼았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 들은 이미 선입감을 품고 있었고, 성령이 옮겨 부어질때    

보이는 바 징조를 주의하고 방언과 기적을 높였지만 그들의 체험 속에는 모순이 가득하고 결국 주의 이름을 옥되게 하였다. 그들이 성령을 얻은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그들은 성숙하지 않은 갓난아기 같았다. 하나님의 고린도 교회에 대한 치료책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오늘날 교회대 대한 치료책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라고 말했다. 에베소 성도에 대하여 바울은 그들의 마음 눈을 밝히사 무언가를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하였다. [엡 1:18.] 거룩한 사실을 아는 것은  당시 그리스도인의 필요였을 뿐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필요이기도 하다. 성령으로 말미안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기 위해 우리마음 눈이 밝아질 필요가 있다. 하나님 께서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리스도도 성령 안에서 우리과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성령이 우리안에 거하신다면 아버지와 아들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이것은 단지 이론이나 교훈이 아니라 복된 실제인 것이다.  혹 우리는 성령이 우리안에 계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위격이 있는 성령임을 아는가 .  우리는 우리안에 계신 성령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아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그리 실제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성령을 어떤영향력 [의심할 바 없이 사람으로 선을 향하게 하는 영향력] 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생각으로 그들은 그들안에 있는 양심이 성령과 어는 정도  비슷하가고 생각한다. 그들이 악을 행할때 성령도 그들을 질책하고 어떻게 행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준다고 말한다.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그들에게 내주하는 성령이 결여 되었기 때분이아니라 그들이 그분의 임재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안에 계시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므로  바울은 편지로 그들에게 너희가 하난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영적이지 못함에 대한 치료책이었다. 즉 그들로 하여금  누가 그들안에 거하시는지를 알게 한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성령께서 그들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참으로 알아도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경건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경건함이 부족한 이유는 그들이 인격을 가진 성령이 임재하는 사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성령은 그들 안에 계신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보지 못하였다. 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기는 생활을 하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실패의 생활을 하는가. 그들의 차이점은 성령의 임재 여부에 있지 않고 (이는 성령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어떤사람은 성령이 그들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고 어떤 사람은 모르는 데 있다.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이 사실에 대해 참된 계시를 얻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는 어떠한 변화가 있을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것이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이제 이 두구절은 우리를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처라는 사실을 발견한 후

이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순복시키는 데 이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인 것을 볼때. 우리는 즉시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기 때문에 헌신이 계시에 뒤따라오는 것이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과 실패하는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은 성령이 있고 없는데 있지 않고 계시다는 것을 모르는데 있다. 결국 지식이 있는 사람은 그들의생명 안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되고 지식이 없는 사람은 그들자신을 그들의주로 삼는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것이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이제 이 두구절은 우리를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처라는 사실을 발견한 후

이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순복시키는 데 이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인 것을 볼때. 우리는 즉시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기 때문에 헌신이 계시에 뒤따라오는 것이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과 실패하는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은 성령이 있고 없는데 있지 않고 계시다는 것을 모르는데 있다. 결국 지식이 있는 사람은 그들의생명 안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되고 지식이 없는 사람은 그들자신을 그들의주로 삼는다.

 

계시는 거룩함에 이르는 첫 걸음이고 헌신은 두번째 걸음이다. 우리의 인생중에 우리가 우리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절대적인 주권을 예수 그리스도께 돌리는 날이 있어야 한다. 이런날은 우리가 구원받는 날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실제적인 문제를 일으켜서 우리의 헌신의 진실성을 시험하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안하시든 우리가 우리읜 모든 것을 아무 보류함없이 우리자신. 우리의 가정. 우리의 재산 ,사업. 우리의재산들을 다 주님께 맡기는날이 필요하다.

 

그날 이후로 우리의 모든 소유와 어떠함은 다 그분의 것이 되고 완전히 그분이 지배하시게 될 것이다. 그날부터 우리는 우리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다만 청지기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우리안에서 확실한 사실이 되지 않을 때 성령은 우리 안에서 효과적인 참된 역사를 하실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그분께 완전히 드려서 그분으로 하여금 다스리시게 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효과적으로 우리의 생활을 이끄실수 없게 된다. 우리가 그분으로 우리안에서 절대적인 주권을 갖게 하지 않아도 그분이 우리안에 거하실수는 있겟지만. 그분은 결코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실수 없게된다. 이는 성령의 능력이 제재를 받기 때문이다.

 

당신은 주님을 위하여 사는가 아니면 당신 자신을 위하여 사는가. 이질문은 너무 광범위할수도 있다.

그래서 한가지 더 실재적인 것을 묻겠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그것을 당신은 보류하지는 않는가 당신은 하나님과 다투는 점이 없는가. 만일 당신과 하나님 사이의 다툼을 해결하고 성령에게 충분한 주권을 드리지 않는다면 그분은 당신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더이상 주실수가 없다.

 

사함을 받은죄인과 그냥 죄인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와같이 자신을 주님께 드린 그리스도인과 일반 그리스도인과는 완전히 다르다. 주님께서 다루시는 문제에 있어서 그분이 우리를 확실한 위치로 이끌어 주시시를!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께 완전히 순복하기를 원하고 내주하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해달라고 그분께 구할때 우리는 특별한 느낌 혹은 초자연적인 표시를 바랄 필요없이 다만 단순히 그분을 앙망하고 찬미하면 일은 발생하게 된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분께 감사할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은 이미 그분의 전을 충만케 한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너희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바 너희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나에게는 폴 선생과 같이 주님과 다투었던 한 친구가 있었다. 주님을 믿기 전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구원받은 후 그는 즉시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주님 앞으로 이끌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적인 일에 대하여 그녀는 아무런 취미가 없었다. 주님은 그에게 그녀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그 여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회피하면서 계속 주님을 섬겼고 주님을 위해 영혼을 구원하러 다녔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는 성결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이느낌은 그로 흑암의 나날에 들어 서게 하였다. 그는 거룩한 생활을 할 능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성령의 충만을 구했지만 주님은 그의 간구를 계속 상관하지 않으시는 것같았다.

 

어느날 아침 그는 다른도시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가 전한 것은 시편 73편 25절 말씀이었다. "하늘에 주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도 주밖에 나의 사모할자 없나이다." 집에 돌아온후 그는 어는 기도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한자매가 똑같이 시편 73편 25절 말씀을 읽었다.

이자매는 그가 좀 전에 이 구절에 대해 설교한 것을 몰랐다. 성경을 다 읽고 나서 그녀는 이어서. 우리가 참으로 "땅에서는 주밖에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말할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이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찔렀다. 그는 마음속으로 하늘이나 땅 위에 주님 외에 달리 사모할자가 없다고 말할 수 없음을 스스로  시인했다. 이로써 그는 그의 모든 일이 그 사랑하는 여인을 포기 할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는 것을 발견 하였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런 일이 그리 심각하게 보이지 않겠지만 그에게는 너무 심각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핑계로 "주여 만일 내가 그여자와 결혼하도록 허락하신다면 티벳이라도 가서 주의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그러난 주님은그가 티벳으로 가는 것을 관심하시지 않고 오직 그와 그 여자와의 관계를 관심하시는 듯했다 그가 어떻게 핑계를 대어도 주님이 중요시하는 것을 조금도 바꾸시게 할수 없는 듯했다. 이런 다툼은 수개월 동안 지속 되었다.

그가 다시 성령읜 충만을 위해 주님께 간구했을 때 주님은 여전히 한가지일을 지적하셨다. 그러나 그날 주님은 승리하셨고 그 청년은 고개를 들어 주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여 이제 저는 마음 속으로 하늘에 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자 없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날 그는 새 생명의 시작을 갖게 되었다.

 

사함을 받은 죄인과 그냥 죄인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와 같이 자신을 주님께 드린 그리스도인과 일반 그리스도인과는 완전히 다르다.주님께서 다루시는 문제에 있어서 그분이 우리를 확실한 위치로 이끌어주시기를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께 완전히 순복하기를 원하고 내주하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해달라고 그분께 구할때 우리는 특별한 느낌 혹은 초자연적인 표시를 바랄 필요 없이 다만 단순히 그분을 앙망하고 찬미하면 일은 발생하게 된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분께 감사할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은 이미 그분의 전을 충만케 한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나에게는 폴 선생과 같이 주님과 다투었던 한 친구가 있었다. 주님을 믿기 전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구원받은 후 그는 즉시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주님 앞으로 이끌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적인 일에 대하여 그녀는 아무런 취미가 없었다. 주님은 그에게 그녀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그 여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회피하면서 계속 주님을 섬겼고 주님을 위해 영혼을 구원하러 다녔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는 성결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이느낌은 그로 흑암의 나날에 들어 서게 하였다. 그는 거룩한 생활을 할 능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성령의 충만을 구했지만 주님은 그의 간구를 계속 상관하지 않으시는 것같았다.

 

어느날 아침 그는 다른도시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가 전한 것은 시편 73편 25절 말씀이었다. "하늘에 주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도 주밖에 나의 사모할자 없나이다." 집에 돌아온후 그는 어는 기도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한자매가 똑같이 시편 73편 25절 말씀을 읽었다.

이자매는 그가 좀 전에 이 구절에 대해 설교한 것을 몰랐다. 성경을 다 읽고 나서 그녀는 이어서. 우리가 참으로 "땅에서는 주밖에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말할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이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찔렀다. 그는 마음속으로 하늘이나 땅 위에 주님 외에 달리 사모할자가 없다고 말할 수 없음을 스스로  시인했다. 이로써 그는 그의 모든 일이 그 사랑하는 여인을 포기 할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는 것을 발견 하였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런 일이 그리 심각하게 보이지 않겠지만 그에게는 너무 심각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핑계로 "주여 만일 내가 그여자와 결혼하도록 허락하신다면 티벳이라도 가서 주의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그러난 주님은그가 티벳으로 가는 것을 관심하시지 않고 오직 그와 그 여자와의 관계를 관심하시는 듯했다 그가 어떻게 핑계를 대어도 주님이 중요시하는 것을 조금도 바꾸시게 할수 없는 듯했다. 이런 다툼은 수개월 동안 지속 되었다.

그가 다시 성령읜 충만을 위해 주님께 간구했을 때 주님은 여전히 한가지일을 지적하셨다. 그러나 그날 주님은 승리하셨고 그 청년은 고개를 들어 주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여 이제 저는 마음 속으로 하늘에 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자 없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날 그는 새 생명의 시작을 갖게 되었다.

 

사함을 받은 죄인과 그냥 죄인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와 같이 자신을 주님께 드린 그리스도인과 일반 그리스도인과는 완전히 다르다.주님께서 다루시는 문제에 있어서 그분이 우리를 확실한 위치로 이끌어주시기를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께 완전히 순복하기를 원하고 내주하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해달라고 그분께 구할때 우리는 특별한 느낌 혹은 초자연적인 표시를 바랄 필요 없이 다만 단순히 그분을 앙망하고 찬미하면 일은 발생하게 된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분께 감사할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은 이미 그분의 전을 충만케 한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간증


간추린말씀 2009-12-05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k505/9681.html

나에게는 폴 선생과 같이 주님과 다투었던 한 친구가 있었다. 주님을 믿기 전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구원받은 후 그는 즉시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주님 앞으로 이끌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적인 일에 대하여 그녀는 아무런 취미가 없었다. 주님은 그에게 그녀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그 여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회피하면서 계속 주님을 섬겼고 주님을 위해 영혼을 구원하러 다녔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는 성결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이느낌은 그로 흑암의 나날에 들어 서게 하였다. 그는 거룩한 생활을 할 능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성령의 충만을 구했지만 주님은 그의 간구를 계속 상관하지 않으시는 것같았다.

 

어느날 아침 그는 다른도시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가 전한 것은 시편 73편 25절 말씀이었다. "하늘에 주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도 주밖에 나의 사모할자 없나이다." 집에 돌아온후 그는 어는 기도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한자매가 똑같이 시편 73편 25절 말씀을 읽었다.

이자매는 그가 좀 전에 이 구절에 대해 설교한 것을 몰랐다. 성경을 다 읽고 나서 그녀는 이어서. 우리가 참으로 "땅에서는 주밖에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말할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이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찔렀다. 그는 마음속으로 하늘이나 땅 위에 주님 외에 달리 사모할자가 없다고 말할 수 없음을 스스로  시인했다. 이로써 그는 그의 모든 일이 그 사랑하는 여인을 포기 할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는 것을 발견 하였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런 일이 그리 심각하게 보이지 않겠지만 그에게는 너무 심각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핑계로 "주여 만일 내가 그여자와 결혼하도록 허락하신다면 티벳이라도 가서 주의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그러난 주님은그가 티벳으로 가는 것을 관심하시지 않고 오직 그와 그 여자와의 관계를 관심하시는 듯했다 그가 어떻게 핑계를 대어도 주님이 중요시하는 것을 조금도 바꾸시게 할수 없는 듯했다. 이런 다툼은 수개월 동안 지속 되었다.

그가 다시 성령읜 충만을 위해 주님께 간구했을 때 주님은 여전히 한가지일을 지적하셨다. 그러나 그날 주님은 승리하셨고 그 청년은 고개를 들어 주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여 이제 저는 마음 속으로 하늘에 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자 없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날 그는 새 생명의 시작을 갖게 되었다.

 

사함을 받은 죄인과 그냥 죄인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와 같이 자신을 주님께 드린 그리스도인과 일반 그리스도인과는 완전히 다르다.주님께서 다루시는 문제에 있어서 그분이 우리를 확실한 위치로 이끌어주시기를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께 완전히 순복하기를 원하고 내주하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해달라고 그분께 구할때 우리는 특별한 느낌 혹은 초자연적인 표시를 바랄 필요 없이 다만 단순히 그분을 앙망하고 찬미하면 일은 발생하게 된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분께 감사할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은 이미 그분의 전을 충만케 한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진리의말씀 2009-11-29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k505/9526.html

에베소서 4장1-6절 까지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기위한 신성한 분배를 계시한다.

1.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는 성경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중심항목이다.

2.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가치 있게 보시는지는 우리에게 신성한 연합이 얼마나 있고 우리가 얼마나

   몸의 하나 안에 있는지에 달려 있다.

 

에베소서는 크게 두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1-3장 까지로 이루어진 첫째부분에서는 교회가 하늘들의 영역안에서 그리스도안에서 받은 축복과 위치를 계시한다.

4-6장까지로 이루어지는 둘째 부분에서는 교회가 이 땅에서 그 영 안에서 마땅히 가져야할 생활과 책임에 관하여 우리에게 명령한다. 이 기본적인 명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에 합당하게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4-6장까지에서는 교회가 가져야할 생활을 보고 다른 면으로는 교회가 감당해야 할 책임을 본다. 4장 1절에서 "그러므로 주님안에 갇힌 사람인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여러분은 부름을 받았으니 그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십시요. 모든일에 겸허하고 온유하면 또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안에서 서로를 짊어지고. 화평의 매는 띠로 그 영의 하나를 힘써 지키십시요."라고 말한다.

 

겸허한것은 낮은 위치에 머무는 것이고 온유한 것은 자신을 위하여 싸우지 않는 것이다. 오래 참음은 부당한 대우를 견디는 것이다. 이것은 다만 참는 것이 아니라  짊어지는 것이다. 즉 말썽 많은 사람들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그들을 짊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표현이다.

 

이러한 미덕들은 우리의타고난 인성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인성안에 있는 것이다.

4장 3절에서 그 영의 하나를 말하기 전에 여기에서 이 미덕들이 언급된 사실은 그영의하나를 지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이러한 미덕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 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인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엡 4:3-6 화평의 매는 띠로 그영이 하나되게 하신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몸이 하나요.성령도 한분이십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름을 받았을때 한 소망 안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주님도 한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침례도 하나입니다. 하나님도 한분이시며 모든 사람의 아바지 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위에 계시고  모든 사람을 통과하여 계시고 모든 사람안에 계십니다.

 

위 구절에서 하나의 근거를 이루는 일곱항목 과 이 일곱 하나는  세그룹으로 되어있는 것을 본다. 여기서는  삼일하나님의 순서가 바뀐것을 볼수있는데 먼저는 성령. 아들.아버지이다.

이것은 이장에서의 중점이 영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아버지와 아들 성령. 삼일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연합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지금 우리의 영안에 살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하고.반드시 영안에 살아야한다. 우리는 타고난 생명과 생각과 의지를 거절하고 부인해야 한다.

이럴때.우리가 하는일이 다만 우리자신에게서 나온 일이 아닐 것이다. 주님과 함께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영안의 생활이 참된하나 곧 몸의 하나이다.

 

엡1:3절은 평안에 매는 줄로 성령의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영안에서 하나를 지킬때 우리는 아론의 머리에서 보배론 기름이 흘러 수염과 옷깃에 흘러내리는 축복을 받게되고

헐몬의 이슬이 산들에 흘러내리는 축복을 받게된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영안에 사는가 영안에 살기 보다는 육안에 살고. 말씀을 추구하지만 교리적으로 아는 것이너무많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한지체라는 것을 본다면 반드시 다른지체의 제한을 받아야한다.

만약내가 빠르고 다른사람은 느리다면 나는 나의 속도를 고집하지 말고 반드시 느린 지체의 제한을 받아야한다. 만약 내가 신언자라면 복음을 전할때 복음전하는 이에게 양보해야한다.

나에게 신언자의 은사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복음전파의 일도해야한다고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 각자의 은사의 분량에 따라 몸의 생활을 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