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칼빈과 스위스 불어권의 종교개혁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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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빈 (장 칼뱅)
칼빈은 1509년 프랑스의 노용에서 출생 하였고 파리 대학 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1530 년 칼빈은 대학에서 히브리어와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1536년 26세에 개혁운동의 가장 완전한 교리서라고 할수있는 기독교 강요를 출간하였고 이책이 출간된지 얼마안되어 파렐의 요청으로  칼빈은 제네바로 오게 되었다.
칼빈은 원래 로마 천주교를 떠날 의도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뜻하지 않게 그의 친구인 니콜라스 콥의 종교개혁운동에 연루되어 지명 수배를 당하게 되었다. 이후로 칼빈는 로마 천주교와 결별하고 개혁 운동가들과 같은 전선에 서야 될 필요를 갖게 되었다.

스위스는 종교개혁이후에 기독교 도시로 변했다. 그것은 시 정부 전체가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 정부의 의원들은 말씀을 전할줄 몰라서 칼빈을 찾았다. 칼빈이  처음 왔을때 그의 개혁은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에 시 정부의 사람들은 천주교의 영향을 받고 그를 쫓아 냈으며. 칼빈는 스트라스브르크로 갔다.

1540년의 선거에서 칼빈을 반대하던 당파가 정권을 잃게 되자. 제네바의 시 정부는 그들을 인도해 줄 영적인 인물을 찾고있었다.그러나 여전히 길이 없었으므로 칼빈을 다시 초빙하였다. 이때 칼빈은 허락하는 조건으로 자기의 개혁에 완전히 협력 해햐 한다고 말하였다. 이에 정부는 허락 하였고. 칼빈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와 교회 법규를 제정하였고. 열두명의 덕망있는 있는 장로로 구성된 교회 법정을 설립하여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한 모범적인 사회를 창조하려고 하였다.

장로들의 말은 매우 권위와 힘이 있었으므로 만약 그들이 어떤 사람에게  죄가 있다거나 풍기가 물란 하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정부로 넘겨졌고 정부는 그 사람을 감옥에 가둘 수 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이러한 실행은 정부를 배후로 한 실행 이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어떠한 정권과 비교 하더라도 이러한 정권과 이러한 실행을 찾아볼수가 없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20년이 넘도록 거하면서 주로 제네바 대성당에서 말씀을 전하였다. 그가 매주 전한 말씀은매우 능력이 있어을 뿐만아니라.동시에 매우 큰  권위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시 정부가 그에게 있었고.그의 뒤를 받치고 있었기에  20여년의 시간을 들여 제네바 전체를 마치 신성한 통치가 있는 도시처럼 변화를 시켰다.

영국에서 메리1세가 집권하고 있을때 스코틀랜드에서 피난온  수많은 난민들은 불어를 알아들을 수 가 없었기 때문에 칼빈은 그들에게 영어를 사용하는 조그만한 예배당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존 녹스로 하여금 영국의 난민들을 돌보도록 하였다. 제네바에는 칼빈을 지지하는 많은사람들과 칼빈을 반대하는 많은사람들이 살고있었다. 그리고 16세기 초의 제네바는 종교 핍박을 피해 피난온 난민들이 밀집한 지방이 되었다.

개신교 중 특별히 개혁 종파는 제네바의 실행이 가장 성공 했다고 여겼으므로 어떤사람은 제네바가 마치 당시 인간의 천당이며. 종교가 가장 자유로운 지방이고. 성경적인 실행을 하는 곳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칼빈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칼빈이 이곳에서 그의 이상을 실행할수 있었던것은 정치 권력이 그를 부축하고 지지 했기 때문이라고 말 하였다. 게다가, 칼빈 본인도 매우 엄격하고 고압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그는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사람 들을 리버틴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바로 자유주의 자라는 뜻이다.그는 왜 그들을 자유주의 자 라고 칭했을 까. 이는 칼빈이 매우 엄격하여 술집을 열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춤출수도 없었고 술도 마실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유를 갖기 희망하는 것은 칼빈을 반대 한다는 의미였다. 어떤이들은 칼빈의 독재 정책을 반대 하였다. 그는 너무나 독재적 이었다.

예를 들면 칼빈은 삼위일체에 관한 인식에 있어서 그다지 정확하게 전하지는 못했다.스페인에서 온 급진종교 개혁자인 미첼 세루 베투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외과 의사로서 인체의 혈핵순환을 발견한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다.그는 신학의 글들을 썼지만 칼빈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의 오류를 논한다 라는 글을 발표하였고 기독교 강요를 재고함이라는 책를 발간하여 칼빈을 크게 비판하였다. 때문에 칼빈은 그를 철천지 원수로 여겼다.

한번은 그가 제네바를 거쳐 갈때, 칼빈에게 발각되었다.그날은 주일날 이었는데  칼빈은 시 정부 사람들을 동원하여 그를 체포 하였다. 제네바 의회는 그를 이단으로 결정하여.화형을 언도하고 제네바에서 1553년 기둥에 묶여 화영에 처하였다.
이것은 칼빈이 배후에서 조정한 것이었다.그러므로 그가 여기에서 실행한 교회생활 기독교의 신앙의 생활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갖고있다.

긍정적인 면을 천주교를 뒤엎고 성경의 방식에 비교적 접근한 교회생활을 실행 했다는것이고. 부정적인 면은 그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반대하는 어떠한 상황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상대방을 죽일 정도로 미워 했다는 것이다.세루베투스를  화영에 처한것은 가장 분명한 독재였다고 볼 수 있다.이 사건으로 반대자들에게 공격의 명분을 주었으며 칼빈의 일생에 오점을 남겼다.

1550년 부터 1564년까지 칼뱅은 성경 해석에 관한 저술에 전념하였는데 성경에 대한 그의 인식과 성경의 영적인 의미에 대한 통찰력으로 그의 성경 해석 저술들은 매우 큰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1549년 쯔빙글리파는 불링거 의 인도로 칼빈파와 연합하였다.

스위스의 개혁은 쯔빙글리와 칼빈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들의 개혁의 기본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비록 그과정에서 교회조직의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으나 이것은 결코 그들이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사도시대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깨끗한 교회를 세움으로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 
 


16세기 삼대 주류개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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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삼대 주류개혁
16세 초에 있었던 종교 개혁은 세가지의 주된 흐름이 있는데 이것을  개신교의 삼대주류 개혁이라고 볼 수 있다. 개신교의 삼대주류는  첫째는루터를 통한 개혁 운동인 루터파이고  둘째는 스위스의 개혁으로 스위스의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계  쯔빙글리파 와 셋째 불어를 사용하는 프랑스계 칼빈파 로 나눈다.  불어를 사용하는 이들을 개혁 종파라고 부르는데. 개혁 종파는 개신교 운동안에 있던 한 부류로 이개혁 종파는 칼빈과 제네바에 그 근원을 두고있다.
제네바는 스위스 서남부에 있으며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와 인접한 곳이다. 1533년 사보이 왕조의 통치에서 벗어나 연방국가로 독립하였다. 제네바는 정치적인 고려에 기초하여  1536년에 종교 개혁 대열에 가입한다고 선포하였다.같은해 존 칼빈은 윌리엄 파렐의 초청으로 제네바에 와서 복음파의 개혁에 참여 하였다.

개혁종파에는 중요한 4인물이 있다.윌리엄파렐이다.윌리엄파렐은 칼빈보다 일찍 스위스의 불어를 사용하는지방에종교개혁을 시작하였다.그는 매우 극단적이고 저돌적인 사람이었다.군중들을 선동하여 천주교 안으로 들어가 우상들을 쓰러뜨렸다.그의 이러한 방법은 스위스의 많은 지방에 개혁을 가져왔다. 윌리엄파렐은 칼빈보다 일찍 제네바에 왔다.그리고 제네바를 기독교화 시켰다.

그러나 그 자신은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다. 칼빈이 어느날 프랑스로부터 이곳을 지나면서 하루밤만 묵고  스트라스부르크로 갈 예정이었지만 파렐은 그을 붙들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셔서 당신이 반드시 제네바에 머물며 나를도와 이 종교개혁을 완성해야하고 만약 당신이 떠난다면 하나님이 당신을 벼락으로 징벌하실것이라 말했다. 칼빈은 이말을 듣고 크게 놀랐는지 아니면 성령이 그를 크게 감동시켰는지는 모르지만 그는그곳에 머물렀다. 한번 머문것이 몇 십년동안 머물게 되었으며. 여생을 제네바에 살며 개혁의 일을 하였다.

그러므로 첫번째인 파렐은 스위스에 불씨를 놓은 선구자였다. 두번째인 칼빈은 개혁의 주된 인물이었다. 변호사인 그가 기독교 강요라는 신학의 가장 주된 저서를 썼고. 이것이 개혁종파의 가장 중요한 신학 교재가 되었다.세번째는 칼빈의 계승자인 데오토르 배자이고 네번째는 존녹스이다 존녹스는 영국의 메리1세 여왕의 박해를 피해 스코트랜드에서 이곳에와서 장로회를 받아들였다.

칼빈은 교회가 국가에 속하지 않고 국가의 우두머리가 다스리는것이아니라.장로제도가 다스린다는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우리가 말하고있는 개신교의 목사제도는 사실 칼빈시대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수 있으며 그때부터 그때부터 목사라는 것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외에도 교회에는 행정이 있는데 행정방면는 한무리의 장로들이 다스리는것으로서 이것은 매우 좋은것이고 성경에도 부합되는것이다.그러나 칼빈이 이것을 실행했을때 그는 이것과 정치를 나누지 않았기에 이러한 장로무리들은 제네바에서제네바의 시 정부와 함께 연합되었다. 그러므로 제네바의 교회에서 그는 신성한 통치를 시행 하려고 했던것이다. 그의 수완으로 장로 제도을  몇 십년 안에 세우게 되었다.

녹스는 장로제도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으로서 이것을 스코틀랜드로 가지고 들어갔다 녹스는 제네바에 있을때 성경를 번역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성경은 제네바 성경이라고 불리는 매우 유명한 성경으로 영어의 흠정역 성경보다 빨리나온  가장 오래된 성경이다. 이 제네바 성경은 영국에서 인쇄되지 않았다. 제네바에서 인쇄되었다. 이 성경은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도피한 첫번째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서 이 성경에는 회복역 처럼 매우 많은 각주가 달려 있다.또한 그 각주에는 교황을 적 그리스도라고 비난 하고있다.

어떤 각주들은 영국국왕이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각주가 없는 성경을 별도로 제작해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영어 흠정본이다. 이것은 17세기 초반에 일어난일이다.그러므로 존녹스는 스코트랜드 개혁종파의 아버지.시조라고 칭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4 인물은 네가지 일을 대표한다.첫번째는 개혁 종파의 선구자인 파렐 두번째는 가장 중심인물인 칼빈이고 세번째는 후계자 테오도르 배자이고 네번째는 개혁 종파를 영국으로 가지고가간 존녹스이다.


울리히 쯔빙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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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쯔빙글리 (1484-1531)
스위스는 13개의 자치 행정구역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이다.각각의 행정구역은 독립된 소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그러므로 이러한 강한 구속력이 없는 정치 구조하에서 군주든 주교든 중앙세력은 매우 약할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자유 민주주의적인 환경은 유럽에 종교개혁의 사상을 전파하는데 매우 좋은 밑바탕이 되었다.


스위스의 북부에 있는 취리히는 취리히 호수의 북단에 있는 가장큰 도시이다. 마르틴루터가 독일에서 개혁을 시작하였을 때 또 다른 종교개혁이 동일한 시기에 스위스에서 일어났다.울리히 쯔빙글리는 스위스의 빌트하우스에서 태어났고. 어렸을때 베른시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후 쯔빙글리는 빈과 바젤대학에서 공부 하였다.스승인 비텐바흐의 영향으로 쯔빙글리는 면죄부의 오류를 인식하게 되었고 믿음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1517년 루터가 95개 조항의 선언문을 내걸던 해에 쯔빙글리는 아인지델른의 신부로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천주교의 미신적인 것들을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1519년에 쯔빙글리가 취리히에 왔을때 그는 매우 심각한 흑사병에 걸렸는데 그는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려 주시면 일생토록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서원하였다.


1520년 쯔빙글리는 사상의 자유를 얻기위하여 교황청의 수당을 포기하고 신부가 직접 성경에 의거하여 말씀을 전할 수있는 자유를 줄것을 정부에 촉구 하였다.동시에 그는 성경의 각 권의 모든 단어를 조금씩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1525년에 신약 전체를 완전히 강해 하였다.어느날 쯔빙글리는 말씀은 전하면서 천주교의 사순절 절기 중 금식하는 규정을 신랄하게 비판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콘스탄츠 주교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1523년 시 정부 청사에서 쯔빙글리 와 천주교의 주교는 1차 변론을 가졌다.변론을 시작하자 마자 쯔빙글리는 모든 논점은 성경을 근거로 한 것이어야 하지 전통이나 관습을 근거로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이회의가 끝났을 때 의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쯔빙글리는 천주교에게 큰 승리을 거두었다.1525년 몇차례 더 변론을 시작하였고.이러한 토론과 변론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 전체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 변론회에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 있었는데.천주교회는 성경과 전통을 변론의 근거로 내세웠으나 쯔빙글리는 변론의 근거는 오직 성경을 근거로 삼아야지 전통에 근거할수 없다고 말하였는데.이 기초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이 기초가 세워지자 천주교의 변론은 승리를 할 수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고는 전통과 교구의 말과 교회가 지정한 것과 천년동안 내려온 관습에 근거를 둔 것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변론의 기초가 성경이라면 그러한 것들은 모두 근거가 될수 없다. 유일한 근거는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있느냐 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그들은 변론을 시작하자 마자 승리를 거두었다.연방의회의 지지로 전면적인 개혁을 시작 하였다.쯔빙글리는 그의 동역자들을 기타 스위스의  독일어 권으로 보내어 종교개혁 운동을 확산시켰다.

1529년 스위스 산골짜기에 있는 자치 정부들은 거의 쯔빙글리의 종교 개혁 진영에 합류 하였다.그러나 쯔빙글리의 종교개혁 운동으로 전통 천주교를 신봉하는 지역과 종교개혁 지역사이에 는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결국 1531년 전쟁이 일어났고 쯔빙글리도 군대를 따라 출정 하였는데 카펠성에서 전사 하였다.스위스 종교개혁은 잠시 일단락 되었고 그 뒤에 일어난 칼뱅 운동으로 인하여 쯔빙글리의 운동도 더 방대한 영향력있는 개혁운동에 편입되었다.

1523년 10월 제2차 공개 변론에서 쯔빙글리는 천주교의 미사의식을 공격했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모든믿는이들의 속죄제물이 되셨다.그러므로 미사는 제물을 드리는 의식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고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속을 예표한다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1524년 제 3차 변론에서는 모든 교회는 반드시 쯔빙글리의 결정을 준수 해야하고 그렇치 않으면  외국으로 축출 하겠다고 결정하였다.

1525년에 교회는그림과 조각상 성자들의 유물과  우상들을 모두 가져다가 광장에서 불살라 버렸고 교회에 진열 되어있는 것과 장식 되어있는 것을 남김없이 제거하였다. 같은해 12월에 수도원을 폐쇠했고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 했으며  미사예식을 금지하고 주교제도를 폐지하고 예배 때에는 독일어를 사용하고 말씀 전하는 것을 경배의 중심으로 삼았다.

1522년에 쯔빙글리는 과부 안나 라인하르트와 비밀리에 동거하고 있었는데.이것은 취리히 시민의 큰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1523년에 성직자들의 혼인 문제를 정식으로 다루었으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금지하지 않은일은 모두 정당하다.그러므로 혼인은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하였다.1524년에 쯔빙글리는 안나와 공개적으로 결혼하였고 4명의 자녀를 두었다.

쯔빙글리와마르틴 루터
쯔빙글리는 마르틴 루터의 저서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그의 초기 저술들 곳곳에서 루터의 흔적을 찻아볼수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상이 루터의 교리의 산물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비록 두사람이 성경의 권위와 이신칭의 방면에서는 어느 정도 유사한 점이 있었지만 성찬의 교리 에서는 견해가 같지 않았다. 이로인해 필립공은 특별히 두사람이 마르부르크에서 공개 적인 변론을 갖도록 하였다.

쯔빙글리는 성찬은 단지 주님을 기념하는 의식이며 떡과 잔은 하나의 상징일뿐 결코 실질적으로 주님의 몸과 피가 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마르틴루터는 공재설을 발표하고 성찬시 주님의 몸과 주님의 피는 확실히 떡과 잔에 임재 한다고 여겼다.




루터와 개혁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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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운동
1524-1525년 뮐하우젠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것은 중세천주교와 귀족들의 착취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것이다. 당시 루터는 믿음과 자유를 강조했기 때문에 농민들도 자유를 쟁취하려는 생각이 일어났고. 농민들은 루터의 신학을 사회운동의 기초로 삼았다.한편 토마스 뮨처(Muenzer)는 루터와 같은시대에 살면서 루터의 영향을 크게받았지만 루터와 전혀 다른 길을 걸은 인물이다. 뮨처는프랑크프르트 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회운동에 심취되었다. 

급진적 개혁자 뮨처는뮐하우젠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압자들을 살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초기에 루터는 귀족과 교회가 농민을 장기적으로 착취하는 것에 대하여 농민을 동정 했으나. 그때 농민들의 극렬한 폭동으로 루터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루터는 강도이며 살인마인 농민도당을 반박하는 글을 써서 복음을 구실로 노략하고 살인하는 농민은 사형에 처해야 하며 귀족들은 모든 방법으로 폭동을 제지 해야한다고 했다. 그래서 루터파와 천주교와 귀족들이 연합 했으며 10만명의 농민들이 살해 되었다. 루터는 귀족들의 흉악함과 잔인함에 상심했지만 여전히 정부의 권위를 지지 했다.그때 이후로 루터와 농민은 서로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로인해 그의 개혁신학도 영향을 받았다.


이외에 루터는 주님의 만찬에 대해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 쯔빙글리와 논쟁이 있었다. 쯔빙글리는 루터의 개혁을 잘알고 있었고 그의 초기 의 많은 글들은 루터의 영향을 받았다. 성경의 권위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에 대해 서로 일치 되었지만 그러나 주님의 만찬에 대한 교리에 있어서는 인식을 같이 하지 못했다.결국 두사람은 화해 할수없는 지점에 까지 이르렀다.

이로인해 헤센왕 필립은 1529년에 두사람이 마르 부르크에서 공개적인 논쟁을 하게 하였다. 그들은 15가지의 신앙항목에 대해 서로 동의 하였으나 15번째 항목인 주님의 만찬에 대해서는 이떡이 주님의 몸을 말하는 것인지는 서로 다른 견해를 가졌다.

쯔빙글리는 주님의 만찬은 다만 주님을 기념하는 의식으로서 떡과 포도주는 일종의 상징물이지 실제적인 주님의 몸과 피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루터는 떡과 잔은 주님의 실질적인 몸과 피가 된다고 말하였다.
쌍방이 서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다.결국 루터는 화를 내며 회의 책상에 "이것은 내몸이니" 라는 성경구절을 남기고 나가 버렸다.


루터는 주님께 쓰임받아 천년의 암흑시대를 종결하였지만 그의 사람됨은 개혁운동과 같이 많은 결점과 논쟁을 남겼다. 루터는 자신을 거칠고 광폭하며 격렬하고 호전적이라고 표현했다.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성격이 불 같고 양보하지 않으며 맥주를 즐겼다고 한다. 노년에 그는 품성이 온당하지 못하여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를 좋아하고 사소한 일에 집착하며 겸손과 용맹사이를 방황했다고한다.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과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두기둥을 제창헸지만 성모마리아를 칭송하는 노래에 주를 달고 성모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또한 성모 마리아와 성자의 중보기도 효능이 있다고 했다.

1540년 루터를 계속 지지해 왔고 쯔빙글리와 성찬논쟁에서 그에게 협조 했던 헤센왕 필립이 왕비를 두명두게 된것은 독일의 종교개혁에 풍파를 일으켰으나 루터는 필립과의 사적인 친분때문에 그의 중혼을 찬성하였다.이것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받은 주님의 종에게도 연약함이 있다는 것을 알수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약함을 초월하여 사람을 사용하시지만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약점은 결국 일에 어려움이 되고 하나님께서 계속 적으로 전진하시는데 제한이 된다.



간략한 마르틴 루터의 생애와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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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루터 (1483-1546)
교회사에 있어서 16세기의 종교개혁보다 더 큰 일은 없다. 종교개혁 운동은 정치적 으로는 민족주의 라는 국가기능이 출현하고. 문화적 으로는 르네상스 이후 인문주의가 유행하며. 신학적으로는 성경의 권위가 갈수록 높아져 초기 교회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갈망을 더욱 자극하여 유럽곳곳에서 종교개혁 운동이 구름처럼 일어 났다.

마르틴 루터는 1483년 독일의 작센 주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광부였고. 사람들이 존경할만한 인품을 가진 그는 1491년 시의회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어머니는 전통적이며 선량한 여인 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어렸을 때부터 루터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십계명과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우게 했다.

루터는 14세때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공동생활 형제회에서 1년동안 공부하였다. 당시 시골 사람들의 미신은 어린 루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1498년 루터는 수도생활을 통해 수도생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라틴어를 배워 대학에 들어가는 기초를 닦았다.


19세때 1502년 루터는 에르프르트 대학을 졸업하고 1505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그리고 부친의 뜻을 따라 계속 법률을 공부할 계획이었으나. 1505년 스토테론하임으로 가는 중에 폭풍우 속에서 벼락에  맞을 뻔 했다. 그는 위급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수호자 "성 안나"에게 당신이 저를 도와 주십시요. 당신이 저를 도와주시면 수도자가 되겠습니다 라고. 서원했다.

2주 후 에 아버지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가장 엄격하고 청빈한 어거스틴 수도회에 가입하였다.그러나 어린시절 미신과 연옥 에 대한 공포로 루터의 수도생활은 고행과 속죄 사이에서 계속 몸부림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게 하였다. 이곳에서1505년부터1511년까지 수도사 생활을 하였다.


어거스틴 수도원은 중세때 베네닉트 수도원의 형태에 불만을 품고 한무리의 사람들이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조직한 것이었다.어거스틴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크회와 테레사가르메 수녀회는 중세때 유명한 수도회였다.

수도원안에서 루터는 엄격한 생활를 하며 심지어 채찍으로 자신을 때리기 까지 하면서 죄에서벗어나고 거룩한생활을 살며 새사람이 되기를  힘써 수도 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마음에 평안을 얻지못했다.평소에 추구했던 하나님의 은혜도 얻지 못했다. 죄악에 대한 느낌은 그를 무거운 돌로 누르는것 같았으며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내적인 몸부림 가운데 로마서와 시편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두 권의 책이 그의 사상을 변화 시키기 시작하였다. 루터는 로마서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말씀을 읽었다.그리고 시편22편에서 "나의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른 말씀을 읽고서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하나님의 아들이 아닌가. 성결한 어린양이 아닌가. 왜 하나님이 그분을 버리셨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때 성령의 빛비춤을 통해서 "나의 모든 죄가 모두 그분께 돌려졌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사람의 죄가 용서 받는것은 외적인 의식과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이루어 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사상이 바뀌자 천주교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얼마 지나지않아 루터가 괴로워 하는것를보고 루터를인도한 수도사가 루터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루터를 로마로 파견 시켰다.1510년부터 1511년 까지 루터는 종교의 중심지인 로마를 방문하여 참된 평강과 평안을 얻고자 하였으나 로마에서 교황의 사치스런 생활과 부패를 보고 더욱 실망을 하였다.
그리고 루터는 "내가 로마 교황청을 보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증오 하는 것을 결코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512년 루터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수도원을 떠나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교수가되었다.그곳에서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공부를 계속하였다.그때부터 루터는 성경의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기위해 힘을다해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517 년에 테첼이(교황의면죄부판매설교사) 비텐베르크에서 수치심도 없이 면죄부를 팔며 재물을 축적하자. 이를 반대하기 위하여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당 대문에 부쳤다. 그 내용은 천주교를 반대하거나 교황를 공격하는 것이없었고. 중요한 내용은 면죄부를 반대하는 내용이었다.면죄부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여 연옥에서 벗어나게 하는 권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면죄부를 팔아서는 안된다고 섰다.

이것은 당시 인쇄술의 발달로 인하여 유럽전체를 뒤흔들었고 교황의 권위와 교회의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1518년 루터는 추기경 카예탄과 회담을 가졌으며. 그 다음해에는 요한에크(신학교수.종교개혁의 반대론자)와 변론했다. 루터는 양보하는 것을 거절하였고 오직 성경의 권위를 내세웠다.


1520년 루터는 문서의일에 적극적으로 시작하여"교황과성직자의 부패와타락"을 고발했다.."독일의 귀족에게 보내는 공개서신.바벨론으로 포로된 교회. 그리스도인의 자유" 등 수백권의 독일어 소책자를 출판하였다. 이러한 소책자는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환영을 받았지만 교황의 분노를 야기 하였다. 교황은 루터에게 60일 이내에 회개하라는 조서를 내렸으나. 루터는 오히려 이 조서(파문장)를 공개적으로 불살랐다. 다음해 1월에 교황은 루터의 교적을 파면하였다.이로인해 루터와 천주교는 정식으로 결별하였다.


1521년 교황의 재촉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5세(독일황제)는 보름스에서 회의를 개최했으며. 루터에게 출석하여 해명할것을 요구하였다.그의 친구들은 후스와 같이될까봐 그곳에 가지말라고 하였으나. "내가 가서 모든것을 해결하겠다고" 말했다.그리고 루터는 보름스로 갔다. 회의 첫날 책상위에 가득놓인 책 앞에서 찰스황제는 이책들이 그의 작품인지 그것들을 철회하거나 폐지 할것인지를 심문하였다. 루터는 그것들이 자기의 저서인것은 인정했지만 그 주장과 내용을 폐기 할것은 신중하게 고려 하여야 했기 때문에 결정할수없었다. 찰스 황제는 그에게 대답할시간을 하루동안 주었다.

다음날 루터는 회의에서 저는 어떤신념도 바꿀수없으며 바꾸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교회나 성직자를 통해서되는 것이 아닙니다.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성경를 통해서이며.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성경입니다".이것이 저의 입장입니다.저는 성경의 진리에만 굴복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포로가 되었읍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읍니다 저를 도우소서"라고 말하였다. 루터는 집에 돌아가는 중에 친구들에게 납치되어 바르트 부르크성에 숨겨졌다.

한달뒤 찰스5세황제는 루터를 우둔하고 완고하고 융통성이 전혀 없는 이단자라고 선포하였고 그를 체포하고 그의 간행물의 발간을 금지하라고 명령하였다.

루터는 찰스5세의 경쟁자인 작센지방의 바르트 부르크성  선제후 프레드리히의 보호를 받아 그곳에 거주하며 10개월동안  작은 방에 갇혀 외롭게지냈다. 그러나 루터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그는 열두권의 책을 썼고. 라틴어로 쓰인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제것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이 라틴어를 모르는 평민들도 읽히게 되었다.그가 번역한 번역본은 지금까지 독일인 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번역본중의 하나이다.
루터는 바르트 부르크성에서 까마귀와 박쥐의친구가 되었다.그는 외롭고 몸은 쇠약해 졌지만 주님에 대한 믿음은 날고 견고해 져갔다.

 바르트 부르크성은 작은산위에 있어서 주위의 모든것을 볼수있다.그는 이 성에서 밖을 내다 보며 영감을얻어 "'내주는 강한성이요" 라는 찬송를 섰다. 이찬송시는 시편 45편을 근거로 하여쓴것이다.이 가사에서 진리를 위해 싸운 강한 영을 볼수있다.
이 작은 방에서 루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는 길을 생각하였고. 어느날 자신이 옳은지 천주교가 옳은지 몰라서 믿음안에서 싸우고 있었다. 천주교의 1500년역사가 잘못되고 나만 옳단말인가. 루터는 마귀와 계속해서 싸우고 있었다. 
루터는자신이 옳은지 천주교가 옳은지 고통스러워하며. 창문을 열고 벌판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멀리있는구름이 점점 사라지는것을 보았다. 그때 먹구름이 사라졌는데 그의 속에 있던 의심. 믿지 않는 악한마음이 완전히사라지는것을체험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만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다는것을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자신이 전통에 서있지 말아야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서야한다는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테첼은 라이프치히 출신의 도미니크회 소속 수도사이다. 그는 당시 일정한 금액을 주고 면죄부를 구입하면 지금까지 지은 죄와 함께 미래의 죄도 사함받을수있다과 선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