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성령의 역사의 두번째 방면인 성령의 내주하심을 말하겠다. 로마서 8장의 주제가 성령의 내주하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8장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 ] 11절:[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실리신 이의 영이 너희안에 거하시면...]등이다.
셩령의내주하심은 성령의 옮겨부음과 같이 만일 우리가 체험 가운데서 성령님이 우리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한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 되심 곧 그분이 하늘 보좌로 높이올리우심을 객관적으로 볼때.우리는 성령이 우리몸에 능력으로 임한 것를 체험할 것이다. 우리가 주관적으로 그리스도의 주 되심. 곧 우리의 생명 안에서 그분이 능력 있는 통치자가 되심 을 볼때 우리는 성령이 우리안에서 능력이 되심을 체험하게 될것이다.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이지 않음에 대하여 바울은 성령의 내주하심의 계시를 그들의 구원으로 삼았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 들은 이미 선입감을 품고 있었고, 성령이 옮겨 부어질때
보이는 바 징조를 주의하고 방언과 기적을 높였지만 그들의 체험 속에는 모순이 가득하고 결국 주의 이름을 옥되게 하였다. 그들이 성령을 얻은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그들은 성숙하지 않은 갓난아기 같았다. 하나님의 고린도 교회에 대한 치료책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오늘날 교회대 대한 치료책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라고 말했다. 에베소 성도에 대하여 바울은 그들의 마음 눈을 밝히사 무언가를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하였다. [엡 1:18.] 거룩한 사실을 아는 것은 당시 그리스도인의 필요였을 뿐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필요이기도 하다. 성령으로 말미안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기 위해 우리마음 눈이 밝아질 필요가 있다. 하나님 께서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리스도도 성령 안에서 우리과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성령이 우리안에 거하신다면 아버지와 아들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이것은 단지 이론이나 교훈이 아니라 복된 실제인 것이다. 혹 우리는 성령이 우리안에 계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위격이 있는 성령임을 아는가 . 우리는 우리안에 계신 성령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아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그리 실제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성령을 어떤영향력 [의심할 바 없이 사람으로 선을 향하게 하는 영향력] 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생각으로 그들은 그들안에 있는 양심이 성령과 어는 정도 비슷하가고 생각한다. 그들이 악을 행할때 성령도 그들을 질책하고 어떻게 행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준다고 말한다.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그들에게 내주하는 성령이 결여 되었기 때분이아니라 그들이 그분의 임재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안에 계시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므로 바울은 편지로 그들에게 너희가 하난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영적이지 못함에 대한 치료책이었다. 즉 그들로 하여금 누가 그들안에 거하시는지를 알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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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2장 11절부터 15절까지 에서 가리키듯이부정적인 측면에서 우리에게는 육체, 규례들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이 있다. 청년이든. 노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문화인 이든. 미개인이든. 우리모두는 이 세 부류의 부정적인 것들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다. 우리는 모두 육체가 있고. 몇가지 형태들의 규례들이 있으며. 공중에 있는 악한 권세자들에게 복종한다. 죄와 세상적인 것과 허물들은 그 근원이 이 부정적인 것들 안에 있다. 주님을 찬양하자 토양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육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할례의 요소를 갖는다. 토양이신 그리스도 안에는 죽이는 능력이 있다. 이 죽이는 요소는 소금에 비유할수있다. 소금은 토양에 더해질 때 부패를 막는다. 우리가 뿌리를 내린 좋은 땅의 토양 안에는 할례라는 소금이 있다. 이 요소는 무언가를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병균을 죽이는 데 효과적이다. 그것은 욱체를 잘라 내고 죽인다.
죽은후 우리는 장사된다. 토양이신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를 장사 지내는 요소가 있다. 더 나아가 거기에는 우리를 일으키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이처럼 먼저 토양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요소들은 우리를 장사 지내고 그다음에 우리을 일으킨다. 토양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죽고 장사되고 이르켜지며 생명을 받는다. 죽이고 장사 지내는 것은 우리에게서 부정적인 것들을 제거하며 반면에 일으키는 것은 부정적인 것들에서 우리를 이끌어 낸다. 그런 다음 토양 안에 있는 생명을 주는 요소가 우리를 살린다. 그러므로 토양이신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를 죽이고 장사 지내고 일으키고 살리는 요소들이 있다.
골로새서 2장 14절에 따르면 우리를 대적하고 반대하는 규레들이 적혀 있는 증서가 도말되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 토양 안에는 또한 규례들을 없애 버리는 요소도 있다. 우리모두는 일상생활에 관한 어떤 종류의 규례들을 갖고 있다. 이규례들은 글로 쓴 것이 아닐지 모를지만 우리 생각안에 새겨져 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겠지만 그 규례들은 여러분의 생명의 성장을 방해한다. 여러분이 합당하게 자라기 위해서 그것들을 없애야 하며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내가 증언할수 있는 것은 토양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영양분을 흡수 할때 나의 규례들이 지원진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규례들이 필요없다. 우리는 자라고 건축될수 있도록 단순히 토양으로부터 풍성을 동화시켜야 한다.
토양안에는 또한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을 벗어 버리고 그들을 이기는 요소도 있다. (골 2:15)
이요소는 공중의 악한 영들을 이긴다. 믿는 이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 모두 악한 무언가가 그들을 에워 싸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사람들은 선해지려고 노력하나 무언가가 그들이 악을 행하도록 한다. 그들은 악한 대기에 둘러싸여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공중에 있는 어듬의 권세자들과 싸우려고 시도한다면 우리는 패배당할 것이다. 그러나 토양이신 그리스도 안에는 악한 영들을 격퇴시키는 요소가 있다. 우리가 토양 안에 뿌리를 내린 채로 있으면서 토양의 풍성한 요소를 흡수 할때 우리는 하늘들에 있는 통치 자들과 권세자들을 벗어 버릴 것이다. 토양 안에는 어둠의 권능을 벗어 버리는 요소가 있다. 우리는 이토양 안으로 심겨졌으므로 반드시 그 모든 풍성을 누려야 한 다.
골로새서 2장 10절부터 15절까지에서 바울은 성취된 여러 가지 사실을 지적해 내려고 과거 시제나 완료 시제의 여러가지 동사들을 사용한다. 이 사실들 역시 우리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에따르면 2장 10절부터 15절까지에서 바울은 성취된 여러가지 사실들 역시 우리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에따르면 2장 10절부터 15절까지에 있는 항목들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 안에 계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이신 주님을 접촉할때. 이 사실들이 우리의 체험이 된다. 우리는 단지 이 사실들을 믿는 것으로만 그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이 사실들이 우리의 체험이 될수 있도록 시간을 들여 모든 것을 포함한 땅이신 주님을 누려야 한다.
성령이 무디 에게 임할때 그는 어떻게 느꼈고 또 무엇을 했는가.
"나는 자주 하나님께 그분의 성령으로 나를 충만케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어느날 뉴욕시에서 -아.
그것은 일마나 기억할만한 날이었던가! 나는 그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또 나는 그것에 대해 언급한 적도 별로 없다. 이는 그분이 너무 거룩하기 때문이다. 바울에게는 십사년 후에야 말한 체험이 있었다. 내가 말할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나에게 계시 하여 나로 그분이 사랑은 체험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손을 멈추시라고 부탁하지 않을 수없었다.
그후로 나는 여전히 전도하러 다녔다. 내가 전파한 것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새로운 진리를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백명이 회개하고 주님을 믿었다. 당신이 온 세상을 내게 준다 해도 나는 복된체험이 있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이복된체험과 비교할때 온세상은 저울 위의 작은 먼지같을뿐이다."
무디가 체험할때 밖으로 나타난 것은 요엘이 말한 것이나. 베드로가 말한 것이나 토레이가 말한 것과 다 다르다. 그러나 누가 무디의 체험이 오순절난 제자들이 가진 체험임을 의심할수 있겠는가 비록 그들의 체험에서 밖으로 나타난 것은 다를 지라고 본질은 동일 하다.
성령의 능력이 찰스 휘니에게 임했을때 그의 체험은 어떠했는가.
"성령 능력의 침례를 받기 전에 나는 이 일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내 마음속에서도 내가 이런 일을 체험하리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또 나는 누구에게서 이일에 관해 들어본적도 없었다. 성령이 내몸에 임할때 그분은 영광으로 내몸을 투시하는 것 같았다. 내마음에 부어진 기묘한 사랑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나는 기쁨과 사랑으로 인하여 큰 소리로 웃었다. "
휘니의 체험은 오순절의 복사판이 아니요. 토레이가 체험한 것의 복사판도 아니다. 그리고 무디가 체험한 것의 복사 판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체험이 오순절날의 체험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령이 하나님으 자녀들에게 부어질깨 그들의 체험은 왕왕 크게 다르다. 어떤사람은 환상을 보고 어떤사람들은 남을 주께로 인도 할 때 새로운 해방을 얻고 어떤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큰 능력을 얻는다. 또 어떠이들은 하늘의 기쁨과 넘치는 찬미로 충만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광경이든 그들이 체험한 것들은 바로 오순절날의 체험인 것이다. 모든 새로운 체험이 다 그리스도의 높이 올리우심과 관련 있기 째문에 하나님 을 찬미하고 이것이 그것의 중거라고 말할수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다루시지않는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편견과 선입감으로 우리 자신 혹은 다른 사람위에 있는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물샐틈 없이 격리된 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이 원칙은 마당히 성령 강림의 증거로서 방언과 같은
특별한 표현이 필요하다는 사람과 어떠한 표현이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 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자유로이 행사 하시고 그분의 역사 안에서 그분의 기뻐하심을 따라 증거를 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양보해 드려야 한다. 그분은 주이시다 우리에게는 그분을 대신 하여 무엇을 결정할 권한이 없다. 예수께서 이미 보좌위에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며 또한 영광을 얻으셨기 대문에 성령이 이미 우리에게 부어졌음을 인해 그분을찬미하자. 우리가 단순한 마음으로 이거룩한 사실을 받아드릴때 우리는 우리의 체험 가운데서 [이는, 곧] 임을 확실히 알고 담대히 선포하게 될 것이다.
R.A.토레이 가 여러해 동안 목회를 한 후 성령이 그의 몸에 강림하였는데. 그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그가 한 말로 설명해 보도록하자.
"나는 내가 무릎 끓고 기도한 그 장소를 정확히 기억한다. 주위는 매우 조용했다. 나는 그렇게 조용한 시간을 체험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에게 (들을수 있는 소리가 아니라 내 마음 속에 말씀하신 것임) 이것은 네 것이다. 이제가서 전파하라고 말씀하셧다. 요한 일서 5장 14절부터 15절에서 그분은 나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성경에 대하여 지금처럼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께서는 나의 무지함을 긍휼히 여기사 내 마음에 직접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가서 전파하였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새로운 사역자가 되었다. 이체험후 얼마 후 인지는 모르지만 어느날 내가 집안에 앉아 잇을때 ...갑자기...나는 내자신이 다음과 같이 큰소리를 지르는 것을 발견했다. 어려서 부터 나는 큰 소리로 외쳐본 적이 없다. 내성품상 큰 소리 지르는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나는 위슬레 교인들처럼 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세 . 영광을 하나님 께돌리세. 나는 멈출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때 내가 성령침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단순한 믿음으로 그분
을 영접할때 성령 침례을 받았기 때문이다. (토레이의성령은 누구시며. 그분은 무엇을 하시는가.)
토레이에게 성령이 옮겨부어졌을 때 밖에 나타난 것은 요엘 혹은 베드로가 말한 것과 동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비록 그것들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동일한 것이다.
성령이 무디에게 임할때 그는 어떻게 느꼈고 또 무엇을 했는가.
나는 자주 하나님께 그분의 성령으로 나를 충만케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어느날 뉴욕시에서- 아! 그것은 얼마나 기억할 만한 날이었던가! 나는 그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또 나는 그것에대해 언급한 적도 별로 없다. 이는 그분이 너무 거룩하기 때문이다. 바울에게는 십사년 후에야 말한 체험이 있었다. 내가 말할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자신을 나에게 계시하여 나로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손을 멈추시라고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 내가 성령침례를 받은것은 아니었다. 왜내하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단순한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할때 셩령침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토레이에게 성령이 옮겨 부어졌을때 밖에 나타난것은 요엘 혹은 베드로가 말한 것과 동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비록 그것들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동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