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진리의말씀 2009-08-07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6878.html

:에바의 이상 (5:5-11) 내게 말하던 천사가 나아와서  내게이르되 너는 눈을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하기로 내가 묻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그가 가로되 나오는 것이 에바니라. 또 가로되 온땅에 가득한 모습이라 하였다".

 

세계인구의 높은 비율이 사업이나 상업에 종사한다.----온땅에서상업은 합당한 외관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우리가 보겠지만. 사실상 오늘날의 상업는 총체적으로 악하다.

"에바속에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천사는 나에게  그 여인이 죄악이라고 말해주고는.---그여인을 에바 속으로 밀어넣고. 에바 아가리 위에 납뚜껑을 눌러서 덮어 버렸다."

이것은 에바속에 앉아 있는 여인이 탐심과 거짓과 돈을 사랑함과 같이 상업속에 담겨 있는 악을 상징한다는 것을 계시한다. 상인은 돈을 사랑하여 구매자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얻고자 한다. 구매자 역시 돈을 사랑하여 원하는 것을 낮은 가격으로 구입해서 돈을 아끼려고 한다.

 

스가랴서 5장에 있는 이상은 요한계시록18장에 있는 큰바벨론의 이상과 일치한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상업속에 담긴 악은 일종의 우상숭배와음행이다.

상업은 돈을 벌기를 열망하는 음란한여자이다.

스가랴서 5장 7절과 8절에서 우리는 납덩이 곧 납뚜껑이 에바 아가리위에 던져져 에바를 덮는 것을본다.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상업속에 있는 사악함이 제한받는 것을 상징한다. 국제 교역속에 사악함이 감추어져 있고 숨겨져 있다.

만일 상업이 특히 국제교역이 규제를 받을수 있다면. 온땅이 거룩하게 될것이다.

 

"내가 또 고개를 들고 보니. 내앞에 두여인이 ---나타났다." 한여인이 두 여인이 된 것은 일단 상업에

규제가 없어질 경우. 상업의영향이 즉시 두배가 될것임을 상징한다.

두여인이 학과같은 날개를 가졌고. 바람이 그들의 날개아래 있었다. 그들은 천지 사이로 에바를 들어올렸다.(슥5:9하) 이것은 모두 사악한 상업이 신속히 확산되는 것을 상징한다,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저 여인들이 그 에바를 어디로 가져가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가 나에게 대답 하엿다. " 시날땅으로 간다. 거기에다가  그에바를 둘집을 지을 것이다. 집이 완성되면. 그에바를 제자리에 놓일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  되었을 때 바빌론 사람들에게서 배운 사업상의 사악함이 바빌론 (시날의땅)으로 되돌아 가게 될것임을 상징한다.

이 사악함을 바빌론으로 다시 돌아게게 하라. 하나님의 선민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은 생활에서 정직하고 단순해야한다.

"에바는 장사에서 매매를 위해 사용되는 측량하는 그릇이다. 이그릇은 한 에바를 담을수있는 용기로서. 상업에서 매매를 위해 사용된다."

 

살후 2:7-8.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억제하고 있는 이 가 물러날때까지만 활동할것입

        입니다. 그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

        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살후 2장 7절은 적그리스도 또한 비밀이라고 말한다. 바울의 관념에 의하면 이불법의비밀은 이미  활동하고있다. 그러나 그것을 억제하는 누군가가 있다. 누가 이불법을 억제하고 있는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을 억제하는 어떤세력. 곧 어떤힘이 있다.

 

다니엘서 8장 24절은 "그는 힘이 점점 세어질 터인데 그 힘은 제 힘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적그리스도의 능력은 사탄의 능력일 것이다.  용이 자기의 능력과 자기권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습니다."

계13:2) 어떤 의미에서 적 그리스도는 사탄의 화신일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또한 "강한자들과 거룩한 백성을 파멸시킬것이다.여기서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다.(단 8:24)

 

하나님의 목적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즉 신부가 아직 예비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은 불법에 대해 그분의 통제를 행사 하신다. 결국 마지막 삼년 반때에 이러한 통제는 제거 될것이다. 하나님 께서 마치 "세상을 내버려 두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때에  불법의 사람인 적그리스도가 완전히 나타날 것이므로 온땅은 불법으로 가득 찰것이다.

 

나는 특히 청년들이 이 모든 요점으로 빛 비춤을 받아 이렇게 말할수있기를 바란다.

"주님을 찬양합니다."저는 세상의 조류에 대히 분명해 졌습니다. 저는 앞으로 무슨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습니다.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진리의말씀 2009-07-11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6460.html

요 15:1-2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십니다. 내안에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마다 아버지께서 잘라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마다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깨끗이 손질하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가지들이다.

포도나무의 가지들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할필요가있다. 주예수님은

요 15:4-5 "내안에 거하십시요. 그러면 나도 여러분 안에 거하겠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맞을수 없는 것처럼 여러분도 내안에 거하지 않으면 열내를 맺을 수 없습니다.나는 포도나무요 여러분은 가지들입니다. 그가 내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사람은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떠나서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가지들이 포도나무 안에 거할 때에만 포도나무는 가지들에게 모든 것이 될수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주님은 포도나무이신 그분자신과 가지들인 우리에 대해서 "내안에 거하십시오. 그러면 나도 여러분안에 거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생명과 누림은 포도나무안에 거하는 것이다. 가지들인 우리의 운명은 포도나무안에 거하는 것이다. 

 

포도나무를 떠나서 가지들인 우리는 아무것도 할수없다.포도나무 가지는 스스로 살수 없다.

포도나무를 떠나면 가지는 말라 죽을 것이다. 가지들과 포도나무의 관계는 우리와 주 예수님의 관계를 묘사해 준다. 주님을 떠나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것도 할수 없다.

우리의 존재 우리가 가진 것 우리가 하는 것은 모두 반드시 주님 안에 있어야하며. 우리안에 계신 주님에 의한것이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안에 거하고  주님께서 우리안에 거하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포도나무 안에 거함으로써 모든 것을 해야한다.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매일의 누림을 위해 모든 것을 포함한 몫이 되신다. 우리는 주님께 가지들이고 주님은 우리에게 포도나무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그분안에 거해야 하고 그분께서 우리안에 거하시도록 해야 한다. 이럴때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누림을 위해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주님의 관계를 보여 주는 요한복금 15장의 첫째부분인 1절부터11절까지를 다루었다. 둘째 부분인 12절부터 17절까지는 우리들 서로의 관계를 보여 준다.

15장의 이부분에서 우리는가지들이 열매맺음으로 신성한 생명을 표현하기 위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본다. 이구절들은 열매 맺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생명안에서 즉 생명에 의한 사랑안에서 서로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안에서 우리의 관계를 유지해야하며 또 우리안에 있는 생명으로 서로를 사랑해야한다. 이 생명은 주님 자신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교회 생활.몸의생활이다. 몸의 생활은 사랑의생활이자 사랑안에서의생활이다.우리는 인간의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지 말아야하며.신성한 생명안에서 그리고 신성한 사랑으로  서로사랑해야한다.

 

주님은 17절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우리에 일러주셨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열매를 맺기가 매우어려울 것이다. 만일우리가 서로 사랑하지않는 다면  그것은 포도나무와 우리의 교통이끊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매 맺을 길이 없는 것이다.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하는 것에 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 만일 우리가 인간의 생명안에서 서로 사랑한다면 그것은 죽음을 초래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감정적인 방법으로나 우리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서를 사랑한다면 그것 역시 죽음을 초래한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생명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그리스도의 위임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타고난 생명안에서.우리의감정으로 우리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서로 사랑하지 말아야한다. 우리는 신성한 생명안에서 신성한 사랑으로 아버지가 영광스럽게 되시도로  많은 열매를 맺으려는 목적을 위해 서로 사랑해야한다.

 

가지로서 포도나무로 부터 버려지는 것은 이 신성한 목적으로 부터 끊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성한 목적에 참여하는데서 잘려졌다. 가지가 밖에 버려질때. 그 가지는 그리스도의 풍성에 대한 누림을 상실하고 동료 가지들  사이의 풍성한 교통들 놓치고 하나님의 표현으로부터 분리되며 하나님의 목적으로부터 끊어진다

이뜻은 그 사람이 잃어버려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불속으로 던져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 할것이다. 그것은 메마르게 된다는뜻이다. 많은 그리스도인 들이 메말라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이것은 동료가지들 사이에 있는 놀라운  교통에 참여하는 풍성한 교통을 놓치는데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의 교통과 그리스도와의 교제 그리스도께의 공동참여 그리스도에 대한 상호누림이다. 이 그리스도는 지금 부활이시며 그영이시다.

교회 생활이 이 교통에 있음을 보았다면 여러분은 집회소의 의자배열과같은 문제들에 관심을 두지않을 것이다. 더욱이 여러분은 교리나 실행에  의해서 그리스도로부터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신약에서 교통은 우리와 주님 사이의 흐름과 우리들 서로간의 흐름을 의미한다.

요한일서에서는  우리가 생명을 갖고 그런 다음 교통을 갖는다. 우리와 아버지 아들사이이는 수직적으로 흐름이 있고 우리와 다른 맏는 이들 사이에는 수평적인 흐름이 있다.

오는날 이땅에 교통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음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하자. 이교통은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의 교통이며 하나님 의 자녀들과 삼일 하나님 사이의 교통이다. 

너는 가지 나는 포도나무

 

내 안에 거할 때 난 그안에

 

그는 열매 풍성히 맺나니

 

나를 떠나 할 수 없다네

 

내 안에 거해 난 네 안에

 

가지가 포도나무 떠나면

 

스스로 열매 맺지 못하듯

 

그와 같이 너희도 열매 없으리



봉사에 있어서 신실함


진리의말씀 2009-06-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k505/5984.html

고후.1:17.  내가 이러한 결심을 할때에 경솔하게 하였겠습니까. 혹은 일을 계획할때 육체를따라 

                계획하여 "예. 예"라고 하였다가 "아니요.아니요"라고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을 향한 우리의 말도 "예"라고 하였다가 "아니요"

               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20:  왜냐하면 하나님의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아멘"이라고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1장 18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을 향한 우리의말도 "예"라고하였다가 "아니요"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는 대조를 나타낸다. 앞 절에서 사도는 자신이 "예"라고 하였다가 아니요" 라고 하는 사람이라고 비난받는 것을 언급했다. 이 절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기 때문에 사도들이 전파한 말도 "예"라고 하였다가 아니요" 라고 한것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예라고 하였다가 "아니요"라고 말하는 경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도들의 존재는 자신들이 전파한 것과 일치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전파한 것과 일치되는 생활을 했다. 18절에서 사도들이 전파한 말씀.곧 고린도 성도들에게한 그들의 말은 그리스도에 관한 그들의 메시지였다.(고후1:19)  

                

   고린도후서 1장 18절은 바울이 하나님과 하나였다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경솔하지 않았다.

그는 "예"라고 했다가 "아니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보다 그는 신실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똑같았다. 고린도 성도들 을 향한 그의말. 그의 사역의 말씀은 "예"하고서 "아니요"라고 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의 어조를 바꾸지 않았다.

 

계속해서 고린도후서1장 19절에서 바울은 왜냐하면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아 디모데를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는 "예"라고 하셨다가 "아니요"라고 하시는 분이 되지 않으셨고 우리의 말도 다만 그분안에서 "예"라고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은  이절이 앞절에서 언급된것들에 대한 설명아라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변하지않으신데. 특별히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에 있어서 이러하시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전파한 말도 마찬가지로 결코 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실한 말씀으로 약속하신 바로 그 그리스도. 또한 사도들이 복음으로 전파한

그 그리스도는 "예"라고 하셨다가"아니요"라고  하시는 분이 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안에는 다만"예"만 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전파한 그리스도는 "예"라고 하였다가 "아니요"라고 하시는 분이 되지않으셨기 때문에. 그분에 관하여 전한 말도"예"라고 하였다가 "아니요"라고 한일이 없었다. 사도들이 전파한 말뿐 아니라. 그들의생활도 그리스도의 존재에따른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전파했고  그리스도를 살았다.

사도들은 "예"라고 하였다가 나중에 "아니요"라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고전 4:2-5. 10-13.

 

여기에서 청지기들에게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은 신실한 사람으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판단을 받든지 사람의날에 판단을 받든지 나에게는 아주 작은 일입니다. 나도 나 자신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틀렸다고 느끼지 않지만. 이것으로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판단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루기 전. 곧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에 김추어진 것들을 밝혀내시고 마음의 의도들을 나타내실 것이니  그때에 각 사람은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현명하고. 우리는 약하지만 여러분은 강하고 여러분은 영광을 받지만 우리는 천대를 받습니다.

지금 이시간까지도 우리는 굶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얻어맞으며 정처 없이 다닙니다.

또우리는 직접 우리 손으로 일을 하며 수고합니다. 우리는 욕설을 들어도 축복하고, 박해를 받아도 견뎌 내고. 비방을 받아도 권유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의 쓰레기와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습니다.

 

나는 비방을 받을때마다 몹시 마음이 상하곤 했다. 그러나 많은 해 동안의 체험후 나는 어떤 비방에도 거의 마음 상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상 내가 비방받지 않는다면 나는 내가 주님의 위임에 대하여 신실하지 의심해 보아야한다. 살아있고 행동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비방받기 마련이다. 비방을 피하는 최선의 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를 돌보는데 있어서 활동적이라면 우리는 비방받기를 준비해야한다.

나는 교회들안에 있는 모든 장로들에게 비방을 견딜수 있도록 분량이 넓혀지기위해 주님의 긍휼을 구하기를 충고한다.  장로들은 주로 교회밖의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는 것이 아니라 먼저교회안의 형제자매들에게 비방을 받는다. 그러나 얼마 지나면 그 장로는 비방에 익숙하게 된다.

 

고린도 전서 1장2절부터 5절까지에 있는 바울의 말은 그가 신실한 창지기 였음을 가리킨다. 그는 다른사람들의 비방을 주의하지 않고 자기자신을 비평하지도 않았다.그는 모든 상황을 주님께 맡겼다.

이것은 그의 신실함을 가리킨다.

만일 우리가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비방에 주의하거나 우리 자신을 비평한다면 우리는 신실하지 않은 것이다. 신실한 대신에 우리는 더 정치적이 될수 있고 자신에 대해 좀더 좋게 느끼려고 비방을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할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서 돌이켜야하며 판단을 주님께 맡겨야한다

그럴때 우리는 신실할것이다.



우리의 생명되신 그리스도


진리의말씀 2009-06-06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k505/5737.html

골:3:2-3. 위에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이미죽었고 너희생명이 그리스도 

             와 함께 하나님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우리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우리의 체험과 말씀에 따르면 골로새서 3장 3절과 4절에서 생명은 우리의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만일 이 생명이 단지 그리스도의 생명이기만 하다면 "우리의 생명"이라고 부를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은 이것이 우리의 생명이 된 무언가를 언급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생명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타고난 생명이 아니다. 그런 생명는 결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안에 감추어질수 없다.

하나님은 아담에게서 물려 받은 타고난 생명이 자신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은 신성한 생명 곧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우리의 생명이 된것은 바로 이 생명이다

바울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우리와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자신이 한 생명을 가졌음을 가리킨다.하나님의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이요.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의 생명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천연적으로 이해하기가 매우 쉽다. 우리는 상냥하고 정숙하고 친절한 어떤자매를 보면 그녀가 그러한 특징을 가졌기 때문에 생명이 충만하다고 생각한다. 능력있고 탁월한 언변으로 말씀을 전하는 어느 형제를 볼때 우리는 그의 능력과 언변을 생명의 표시로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두경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생명.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안에 감추어져 있는 생명이 아니라 타고난 생명일지도 모른다.

 

골로새서 3장4절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십니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생명이시다.(요일5:12).생명이 하나님이고 하나님께서 생명이시다.

이러한 생명이 그리스도안에 있다.(요1:4)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그분께서 생명이시며(요14:6.11:25)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다.(요10:10).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십자가에 못박힌 생명이고 부활한 생명이며 하나님안에 감추어진 생명이다.

이세가지 특성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구별해준다.

 

어떤자매는 다정하고 상냥하고 친절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것이 십자가에 못 박힌 적이 없는 타고난 생명안에 있을수도 있다. 이것은 그녀가 모욕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때 울음을 터뜨리고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에 의해 입중된다. 그녀의 눈물은 그녀가 타고난 생명안에서 살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녀의생명는 십자가에 못박힌 생명이 아니다.

 

주예수님은 이땅에 계셨을 때 늘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을 사셧다. 비록 그분은 혹독하게 비난을 받고 모욕을 받으셨지만.자신을 위해 울지 않으셨다. 그대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수 있었다.

"아버지 이것이 당신의 뜻에 따른 것임을 인해 감사 합니다." 그분의 생명은 십자가에 못박힌 생명이었다. 만일 우리가 이생명을 참으로 안다면 우리는 모욕을 당할때 한탄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신에 우리는 주님께 감사드리고 심지어 그분을 진실로 찬양할것이다.

만일 다른 이들이 우리를 모욕할때 진실로 십자가에 못박힌 생명을 산다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않을 것이다.

십자가 위에 있는 이들은 "아멘도 할렐루야"도 말하지않을것이다. 그들은 전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생명은 바로 이러한 십자가에 못박한 생명이어야 한다.

 

이생명은 부활한 생명이다. 가령 어떤자매가 집회소의 방을 청소한 방식 때문에 꾸중을 듣고서 울기시작한다고 하자, 이것이 부활한 생명인가? 확실히 그렇지 않다.

부활생명안에는 우는것을 위한 여지가 없다. 만일 이 자매가 집회소를 청소하는 동안 부활한 생명을 산다면 비록 누가 그녀의 일을 비난한다 해도 괴롭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부활한생명과 타고난 생명의 또하나의 차이이다.

 

만일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처리되지 않는 다면  교회안에서의 우리의 봉사는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타고난 생명안에서 봉사한다면. 우리는 쉽게 마음이 상하게 될것이며 결국에는

봉사를 그만 두게 될 것이다. 만일 봉사하는 우리의 생명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한 생명이라면 그무엇도 이 생명을 패배 새킬수 없을 것이다.



사도바울의 본


진리의말씀 2009-05-21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k505/5237.html

성경: 고후 7:1-3. 시편68:25-27. 겔:40:4. 43:10-11 44:4.

 

오늘날 주님은 오직 교회만을 위하신다. 그분의갈앙은 그분을 표현하는 교회 곧 그분의 몸이 건축되기원하신다. 교회는 미래에 있는 어떤것이 아니며. 다만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땅에서 교회의 모든 문제들을 정복하고 교회생활이 무었인지 깨달아 주님의 마음의 갈망을 이루어야 한다.

바울은 주님의 마음의 갈망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대단히 소중한것이 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의 본이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 관하여 그의 등뒤에서  악하게 말하였다. 그들은 바울이 디도를 보내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연보를 받게 함으로 자신을 보호하면서 간교하게 이익을 취하였다고 말했다.(고후 12:16)

만일 여러분의 지방에있는 형제들이 여러분을 간교한 자라고 하며 자신들을 속임수로 사로 잡았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그 지방을 떠나고 싶을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떠난다면 이것은 여러분이 참되게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에 대하여 그렇게 악한 말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했다.

고린도후서 12장 15절에서 바울 은 여러분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은 나의 소유물은 더더욱 기쁘게 소비하고. 나자신 까지도 다 소비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더많이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아야 되겠습니까. 라고 말한다. 바울이 소비한다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것.곧 그가소유한것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 까지도 소비한다는 것은 그의 존재. 곧 그자신을 소비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내우 솔직하고 순수하고 신실했지만 그가 섬기는 교회는 그를 간교한 자라고 말했다. 바울은 이것으로 인하여 기쁘지는 않았지만 마음 상하지도 않았다. 그는 여전히 교회를 사랑했다.

 

참되고 합당한 어머니는 자녀들에대하여 즐겁지 않을수는 있어도.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이상하여 그들을 떠날수 없다. 만일 우리가 믿는 이들의 본인 바울을 따를는 이들이 되려면(딤전 1:6)

교회가 우리를 어떻게 대하든지 관계없이 교회를 사랑해야한다.

 

사도바울은 그가 가진 모든 것과 그의존재를 모두 소비하여도 크게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그 정도로 교회를 사랑했다. 만일 우리가 바울이 교회를 사랑했던 것처럼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실상 교회에 관하여 말할자격이 없다.

고린도 후서 11장28절에서 바울은 "이밖에 언급하지 않은 것들은 그만두더라도 날마다 나를 억누르는 많은 염려가 있는데. 곧 모든 교회들을 위한 염려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구절에서 "나를 억누르는 많은염려라는 말은" 직역하면 나를 내리누르는염려 뭉치를 의미한다.

바울은 다른 모든 도시에있는 모든교회들을 사랑했다.

그는 그 모든교회를 향한 참된 돌봄과 진지한 염려를 갖고 있었다. 고린도후서가 우리의 체험이 되려면 우리는 교회와 하나 되고 무조건적으로 교회를 사랑해야한다.

 

고린도후서 4장 12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생명은 여러분안에서 활동합니다"라고 말한다. 주님의회복안에서 우리는 생명이 다른 사람들안에서 작용할수있도록 죽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의죽음이 곧 우리의 일이다.

주님은 여러분이 그분을 위해 어떤일을 성취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주님께 필요한 것은

여러분이 죽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죽는다면 생명은 다른 이들안에 작용할것이다.

여러분은 죽음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공급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일은 곧 죽음에 넣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