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5년 얀후스가 이단이라는 죄명으로 천주교에 의해 화영된후 그의 추종자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다.그리고보헤미아는 200년동안 천주교 와 후스를 따르는 사람들의 대립으로 매우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1517년에 신성로마 제국황제와 교황이 연합하여 개신교를 공격하여 개신교인들은 폴란드 독일등으로 도망하였다.
1556년 신임 보헤미아 국왕의 통치 하에서 그들의 귀국이 허용되자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그들의 모임을 다시 시작 혀였다. 교회의 큰 부흥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와 폴란드 세곳으로 확산되었다.
연합형제단에 가입한 이들중에는 귀족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언제닥칠지 모르는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연합형제단의 신앙을 보헤미아 국교로 삼을 것을 구상하였다. 1609년에 귀족들의 무력적인 위협으로 보헤미아 국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의 헌장에 서명하고 정부가 종교 보호 위원회를 설립하고 개신교의 신앙을 보호해줄것을 서명했다.
1617년 에 천주교를 신봉하고 예수회의 교육을 받고 개혁운동을 반대한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이 되자 그는 천주교를 신봉하는 신하와 결탁하여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장을 폐지했다. 그러나 개신교 를 믿는 귀족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국왕을 선택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며 1616년에 두명의 천주교에 속한 정계인사를 창밖으로 내 단졌다. 그리고 군사를 소집하여 페르디난트 2세를 폐하고 칼빈주의을 신봉하는 팔라티나트 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국왕으로 선출하였으며 예수회 수사들을 모두 축출했다.
쌍방의 충돌은 갈수록 격렬해졌고 불행하게도 페르티난트 2세가 1619년에 신성로마제국황제가 됨으로 지역적인 전쟁이 전체 신성로마제국으로 확대되어 유럽 대분분지역에 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것이 30년전쟁의 막을 올린 것이다.
16세기의 유럽에서는 종교적인 영토지배를 위해 여러차례의 전쟁이 일었났다. 이것은 주로 천주교가 무력으로 개신교를 진압하여 그 교권을 견고하게 하려고 한데서 비롯되었다. 이일로 개혁자들은 반기를 들고 항의 하였다.당시의 가장 강했던 스페인과천주교 신앙을 가졌던 프랑스 천주교 신앙을 회복하려는 영국 등은 모든 지역에서 대규모로 개신교인 들을 박해 하였다.
예를 들면 스페인의 통치 아래있던 네델란드는 수만명이 종교 재판소에 의해 해를 입었다. 영국의 메리여왕도" 피의 메리" 라는 악명을 얻었다. 이것이 3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 전쟁은 최후에는 개신교가 승리를 거두었다.이 전쟁은 1618년부터 1648년 까지 30년동안이나 계속 되었다.
전쟁은 보헤미아 모라비아 (오늘날 체코 동부지방)에서 오스트리아 에 이르기까지 유럽 대부분의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피해가 극심하여 중부 유럽지역의 인구는 삼분의 이가 감소하였고 들판은 황무해졌으며 상공업은 거의다 파괴되어 1세기 동안 피폐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전쟁은 1648년 웨스트 팔렌 조약으로 종결되었는데 이 조약에서 개신교의 각 종파를 포함해서 "지배자의 신앙이 곧 지배지의 신앙" 이라는 원칙이 세워졌다.또한 제후들은 신앙을 바꾸어서는 안되고 천주교는 각 제후의 영지 내 종교의 일을 간섭할수 없게 되었다.그래서 개신교는 천주교와 대등하게 맞서게 되었다
이전쟁에서 네델란드의 승전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의 군사적인 지원을 받아 가능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 는 무적함대로 영국을 공격한후 다시 네델란드를 평정하려고 하였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프리머스에서 가까운 앞 바다 칼레에 도착하여 정박하였다.
영국해군은 해뜨기전 이른새벽에 프리머스를 떠나 대포를 장착한 배를 몰고 홀연히 나타났고. 폭풍에 힘입어 강력한 공격을 가하므로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대패시켰다. 주님의 역사는 이때부터 천주교의 교세가 유럽에서뿐아니라. 아시아에서도 확장되는 것을 막으셨다.
영국과 주변나라들의 지원으로 1609년 네델란드는 독립을 달성하게된다.그러나 스페인이 네델란드에 공식적으로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한 것은 유럽에서의 30년 전쟁이 끝난해인 1648년에 이르러서였다.
혁명기간에 무력으로 자기나라를 지킬것을 주장했던. 칼빈(칼뱅)파 교회는 점차적으로 네델란드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얻게 되었다.
독립과정에서 이웃나라들의 원조를 받았기 때문에 네델란드 개신교는 각종 다른 신앙에대해 매우 너그러웠다.
심지어 천주고 신자들이 자유롭게 거주하며 생활할수있고.재침례파 믿는이들이 공개적으로 집회를 가질수있고. 종교의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게했다.
보혜미아 형제회
교황청의 부패에 대한 후스의 비판은 천주교의 강한 적대감 일으켰으므로 천주교는 영국의 위클리프파를 진압한뒤 즉시 보헤미아로 방향을 돌려 후스파를 계속해서 진압하였다.
후스가 화영당하였다는 소식이 프라하로 전해지자 체코인 들의 감정이 격화되어 국가 전체가 폭동으로 휩싸였다. 체코는 100년동안 천주교 와 후스를 따르는 사람들의 대립으로 매우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부터 로마 천주교에 반대하는 불길이 시작되었고 끊임없이 불타올라서 유럽 전체를 불살랐다.
1419년 보혜미아에서 농민운동이 폭발하여 귀족과 평민은 손을 잡고 군대를 일으켰으며 보혜미아 왕은 그 충격으로 죽었다.봉기군의 지도자 지즈카는 "전차보루" 라는 전술을 사용하여 적군을 여러차례 격퇴시켰다.
지즈카는 종교개혁파인 후스파의 군대장군이었다. 그는 1420년 7월 14일 후스파 개혁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신성 로마제국 십자군을 비트코프 언덕에서 궤멸시켰다.지즈카가 죽은 뒤에도 봉기군은 계속해서 싸워 독일 국경까지 공격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승전가 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봉기군 내부는 세 파로 분열되었다. 한파는 타협을 주장한 귀족들 이었고. 다른 한파는 계속해서 전쟁을 하자는 타보를파 였다. 나머지 한파는 무력항쟁을 하지도 않고 천주교와도 타협하지 않고 왈도파를 본받아 신앙과 간증을 위해 기꺼이 고난 받고자하였다.
곧 온건파 와 강경파와 정치에 참여참여하는것을 반대하는파가 생겨났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은파가 보혜미아 형제회의 시작이다. 그들은 1457년에 체코의 동북지방에 쿤발트라는 외진 시골에서 교회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천주교를 떠나 스스로 독립적인 집회를 시작하였는데 이들을 보혜미아의 형제회라고 부른다.
약 150년이 지난뒤 1600년경에 이르러서 그들은 매우 강성해 졌다. 많은 귀족들이 그들의 길을 받아들이고.그들에게 가입하여 형제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16세기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자 천주교는 개신교에 대항하기 위해 1540년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를 중심으로한 시작된 예수회를 유럽각지에 조직하였고.체코에 예수회 본부를 만들었다.16세기 중엽에 그들은 체코(보헤미아)에 왔다. 이조직의 목적은 개신교를 타도하고 개신교인들을 핍박하기 위한것이었다. 예수회은 천주교를 지지하고 그들의 지도자인 이그나티우스 료욜라을 지지하였다.
그들은 천주교 귀족들을 도와서 개신교의 세력을 파괴하고 멸절했다.그래서 보헤미아 프라하가 그들의 본부가 되었다. 17세기 초에 이르러 그들은 승리했는데. 빌라호라 전투 이전에 그들은 그들의 세력을 잃어버린적이 있었다. 개신교인 이였던 체코왕자는 천주교 예수회 선교사들을 쫓아내고 예수회가 프라하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않았다.
"역사는 그때 그들이 한 무리를 이루어서 천천히 걸어갔고 검은 외투를입고 검은 모자를 쓰고 그리고 프라하를 서서히 떠났다고 말해준다.이것은 그들이 매우상심하며 떠난것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10년못되어 그들은 천주교의 세력과 군대를 이끌고 프라하에 돌아와서 개혁파에 속한 왕자와 신자들를 무참하게 살육하였다.이때부터 체코는 완전히 로마천주교의 통치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천주교에서 볼때 이 예수회는 매우큰 공적을 쌓았다고 말할수 있다.그리고 17세기 초에 이르러 그들은 승리했다.
천주교가 개신교를 패배시킨 이전투를 빌라호라 전투라고 한다.이 전쟁으로 개신교의 귀족은 철저하게 멸절되었고 후스를 뒤이어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는 노력도 철저하게 분쇄되었다. 천주교는 1621년 5월 21일 개신교의 귀족들 20여명을 프라하 광장에서 참수하고 개신교인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였다.
보헤미아 연합 형제회는 150년 동안 발전하였는데 처음에는 정치와 무관하게 시작하였다가 큰정치세력을 가지게 되었고 나중에 천주교에게 패배당하였다.그후 유럽에서는 30년 종교전쟁이 시작되었다.
표면적으로는 후스의 불길이 완전히 소멸된것같았고 후스를 추종하는 자들도 다 순교한것 같았으나 그러나 예상외로 100년이 지난후에 그들의 후예들이 독일의 모라비아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것이 모라비아 형제회이다
에베소서 3장3절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것을 너희가 알수있으리라.
1장10절 :때가 찰때의 경륜을 위한것입니다. 이경륜은 만물 곧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다 그리스도안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통일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10절에서 말하는 만물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안에 통일되는 것은 1장 3절부터 9절 까지에서 다루어진 모든 항목의 결과이다. 바울사도의 이서신은 주후64년에 감옥에서 썼다.이서신은 너무나 놀랍다.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사도가 깨달은것을 우리에게 제시하고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이고.때가 찰때의 경륜이다.
하나님은 이 경륜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선택 하셨고 우리를 미리 정하셨고 우리를 구속하셨으며 우리를 용서 하셨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
이러한 분배는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벨. 에노스.노아. 아브라함.이삭.야곱.그리고 주 예수님께도 분배하셨다. 이러한 분배는 신약의 서신서들에서 계속된다.
현재하나님의 분배는 사도바울 시대보다 더 많은 분배가 이루어 지고있다. 바울이 이땅에 있었을때 오늘날 여러분이 듣고 있는 이러한 말씀을 들을수 있는 특권을 가진 무리가 과연 있었겠는가.
더 나아가 에베소서 1장22절에서는 이렇게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통일되는 것이 교회와 관련된 것임을 더 계시한다.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아래 통일 하기 위해 하나님은 먼저 그분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두신다.그러므로 교회생활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아래 통일 되는 생활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행정과 경륜이다.
엡 1:3-9절
3: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리의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니다.그분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의 영역안에있는 모든 영적인 축복으로 우리를 축복하셨읍니다.
4: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사랑안에서 하나님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읍니다.
5: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뜻의 기쁨을 따라 우리를 미리 정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아들의 자격을 얻어 하나님자신께 이르도록 하셨읍니다.
6: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하시는 분안에서 우리에게 베프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찬송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7: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을 따라 사랑하시는 분안에서 그분의 피로 구속받고 범죄가 용서 되었읍니다.
8:하나님은 온갖 지혜와 현명으로 이 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주시어
9:그분의 기쁨을 따라 우리에게 그분의 뜻의 비밀을 알려 주셨읍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안에서 미리 목적하신 것이며
엡 4:15 오직 우리는 사랑안에서 참된것을 붙잡고 모든일 에서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라야합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모든일" 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것을 의미한다. 큰일에서든 작은 일에서든 영적인 일에서든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안에 자라시도록 허락해드려야한다.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자란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크고작은 모든일에서 그분을 주님이 되시게 해야한다.
이 공과는 쉽지않다. 외식하는 것이나 쇼핑하는 것에서 우리는 좀처럼 그분께서 주님이 되시도록 허락해 드리지 않는다. 매일의 생활에서 실행이 부족하기 때문에 집회에 올때 주님을 위하여 신언하기가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과 교회생활에서 머리의 권위를 인정해야하고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그분안으로 자랄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공통적인 문제는 주님께 지위를 조금 밖에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자라시고 증가하시는것이 불가능하다.그리스도께서 자라실수없을때 우리도 자랄수 없다.
에베소서 여섯장 모두에서 사람의 영을 언급하고있다,우리는 거듭나서 완결되신 영과 우리의 영이 연합되었다.
엡1:17절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게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하 해주시고
엡 2:22절 여러분도 또한 그분안에서 함께 건축되어 영 안에있는 하나님의 거처가 되고 있습니다.
엡 3:5절 다른 세대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비밀을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려주지 않으셨지만 지금은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신언자들에게 이처럼 분명하게 영안에 계시해 주셨읍니다.
엡 4장 23절 또한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어
엡 5장 18절 술취하지 마십시요 술취하는것은 사람을 방탕하게 합니다. 다만 영 안에서 충만해 지십시요.
엡 6:18절 항상 영안에서 기도 하십시요 이것을 위하여 힘을 다해 늘 깨어 있으며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 하십시요.
그영과 연합된 우리의 영은 에베소서에서 여섯번이나 언급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알고 하나님의 분배하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전달에 참여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우리의 영을 알고 사용하고 훈련해야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생각안에 있는 사람이 아닌 영안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5세기초에 얀 후스는 보헤미아(오늘날의 체코)에서 종교개혁운동을 전개했다.1347년 독일 황제가 된후 챨스(카롤)4세는 제국의 중심과 수도를 프라하시에 세웠다. 또한 프라하시를 주교의 직할지역으로 정했으며 동유럽의 첫번째 대학 찰스대학을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찰스 대학이 라고 불렀으며. 이때부터 프라하는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유럽의 학술사상의 발전에 크게 기여 하였다.
당시 체코인들은 문명화 되지 않았기 때문에 체코대학의 교수들은 대부분 독일에서 초청되어왔다.처음 개교한뒤 몇십년동안 교장과 주임은 모두 독일인이었다. 그러나 얀 후스때에 이르러 자신들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하여 점차 체코 교수들로 독일 교수들을 대체하였다.
1374년에 후스는 보헤미아 호치네스에서 태어났다.1394년 후스는 찰스대학에서 신학학사 학위를 받았고.2년뒤에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1401년에는 신부의 성직을 받음과 동시에 찰스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402년에는 대학교장이 되었다.
얀 후스는 위클리프의 제자였다.후스는 위클리프 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지만 후스는 그의 서적으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오늘날의 체코인 보혜미아에서 개혁운동을 전개한 개혁 지도자로서 1415년 독일 남부 콘스탄츠에서 천주교에 의해 화영당하여 순교하였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교훈을 받아들여 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는 개혁운동을 실행하였다.그는 성경을 체코어로 번역하였고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교회는 인위적인 조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신부이며.선택받은 모든 믿는 이들로 구성된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지 교황이 아니라며. 천주교의 낡은 풍속을 격렬하게 비판 하였다.그리고 신약은 교회의 헌법이라고 말하였다.
후스의 다른 개혁은 평신도들도 미사에서 거룩한 잔을 취할수 있도록 하였다. 천주교는 미사에서 신부만이 거룩한 잔을 받을수 있고 평신도는 떡만 먹을수있을 뿐 잔을 마실수 없게 규정 하였다. 이유는 우둔한 평신도들이 "그리스도의 피"를 소홀히하여 흘러 넘치게 할지 모른다고 염려했기 때문이었다.그러므로 평신도 들에게 잔을 주는 "잔의개혁"은 후스 운동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1409년 교황 요한 23세는 체코에 사람을 보내어 면죄부를 팔게 하였는데. 후스는 담대하게 대중앞에서 면죄부의 사기성을 폭로하였다.이것은 천주교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으며.1411년 교황청은 후스를 제명하였으나 후스는 글과언론을 통해 교황과 교황청의 부패 행위를 계속 공격하였고. 심지어 교황을 주님을 팔았던 "유다"라고 책망하였다.
1414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 문트는 아비뇽의 교황이가져온 분열을 해결하고. 교회개혁을 추진할뿐아니라 후스등의 이단을 처리 하기 위해 특별히 로마교황을 청하여 콘스탄츠 공의회를 열었다. 초대된 3명의 교황은 피사의 요한 23세. 로마의 그레고리 12세. 아비뇽에있는 베네딕트 13세 였다.당시 요한 23세만 참석하였고. 다른 두명의교황은 자신의 안전을 교려하여 대표만 파견하였다.
후스는 독일 황제 에게서 그의 안전을 보장하고 신변을 보호한다는 문서를 보내고 후스에게 회의에 참석하여 그의 주장을 발표하도록 하였지만.이것은 계락이었다. 1415년 후스와 그의 친구 제롬은 체코로부터 콘츠탄츠에 왔다. 처음에 콘스탄츠에 자유로운 신분으로 왔지만 그를 보호해주겠다는약속은 깨지고. 그 회의 에서 교황은 후스에게 발언 기회도 주지않고 그를 체포하여 6개월동안 지하동굴 감옥에 가두었으며. 그가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보헤미아에서는 크게 분노하여 체코 귀족들이 의회에 항의서를 제출하고 의회의 결정을 반대했다.교황과 주교단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황제를 설복시켜 황제가 준 보호령이라 할지라도 이단자들과 배교자들과의 약속이라면 사람들은 이러한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장기간의 강금으로 후스의 건강는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다.
후스가 감금되고 회의가 절반 정도 진행되었을때 회의 소집인인 요한 23세는 정세가 그에게 불리해지자. 오스트리아로 도망갔다. 의회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감독하에 콘스탄츠 조약을 통과시켰다.의회는 요한 23세가 성직을 매매하고 분열을 일으키고 음란한 생활을 했으므로 그를 면직시키기로 결정했다.
한편 그레고리12세는 추기경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완전히 물러났다. 그러나 베네닉트 13세가 퇴위를 거절하자 의회는 거짓선언과 이단. 하나를 깻다는 죄목으로 그를 파면했다. 결국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대표들은 추기경과 함께 마틴5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했으며 교황청의 분열된상황을 종식 시켰다.
얀 후스는 1415년 성스테반 성당에 유인되어 공개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내렸다. 얀 후스 "너는사탄의아들이며 너는 유다다.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를 사탄에게 넘겨주노라" 라고 판결했다.그리고 그의 사제의 외투를 하나씩 벗기고 사제의 모자를 벗겼는데 이것은 파면 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나서 높은모자를 씌우고 그위에는 이단자 아래에는 작은 마귀라고 쓰고 그를 불로 불사르라고 명했다. 그리고 성 밖으로 끌어내어져 한무더기의 돌이 쌓여져있는 곳에서 그를 화영시켰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얀 후스에게 사형을 판결하고 형장으로 보내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하고 말았다.그것은 하나님앞에 매우 치욕적이고 억울한 사건이었다.
판결 바로 전날 그는 그의 친구에게 나는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여 이편지를 쓰고있는데 내일 아마도 사형 판결이 날것같네. 장래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도움을 힘입어 내세의 안식 가운데 다시 말날수 있을 것이네.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얼나나 긍휼이 대하시는지 또한 나의 시련과시험가운데에서 그분의 큰 능력이 나를 얼마나 부축 하셨는지 반드시 알게 될것이네 라고 편지를 썼다.
마지막 심판에서 후스는 황제와 주교들과 군중들에게 법원의 판결을 받았고.주교들은 이단을 처리하는 방식대로 그를 다루었으며 공개적으로 치욕을 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후스는 모든 것을 견디었고 결국 이회의에서 화영을 당한다는 판결을 받았으며 기꺼이 신앙을 위해 순교하였다.
1415년 7월 6일 후스는 나무에 달렸고 그의 목에 까지 나무들이 쌓인 상황에서 불태워졌다.그러나 그는 죽기 까지 계속 찬송을 부르며 순교했다. 천주교는 그를 불태워 죽이면 모든것이 다 끝날 것이라고 생각 했다.그러나 이불은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100년전에 체코 전체를 를 불살랐고 백년후에도 이 불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으며 독일에서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부터 로마 천주교에 반대하는 불길이 시작되었고 끊임없이 불타올라서 유럽 전체를 불살랐다.후스는 강금된 기간동안 그리스도의 형상은 영원토록 말살 될수 없읍니다.장래에 저보다 더 능력있는 전도자가 나와서이 형상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길 것입니다.라고 만한적이 있었다.그의 말과 같이 하나님은 100년뒤에 마르틴 루터를 이르켰으며 그의 말은 실현되었다.
1415년 후스가 이단판결을 받고 죽은뒤 체코는 100년동안 천주교 와 후스를 따르는 사람들의 대립으로 매우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16세기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자 천주교는개신교에 대항하기위해 예수회를 만들어 개신교와 대항했고 예수회의 협조로 프라하는 로마천주교의 통치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은 참으로 복된사람들이다. 선진들이 피의 대가로 회복된 진리가 아무 손상없이 우리에게 도달되고 보존되고 실행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4세기 민족주의가 일어나자 영국.프랑스. 독일등 유럽 지역은 로마 교황청의 장기간 통제에 대해 불만이 늘어갔다.국왕과 교황의 권력다툼은 갈수록 증가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은 당시 천주교의 부패상황에 불만을 갖고 있던 개혁가들에게 좋은 정치적 보호를 제공하였다.
개혁가 중의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영국의 존 위클리프 였다. 위클리프는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한 뛰어난 개혁가로서 성경의 권위를 높인 인물이다. 그는 성경를 영어로 번역하여 영어를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수 있게 하였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아들 존은 위클리프의 좋은 친구 였다. 위클리프도 국왕과 교황의 권력다툼에서 영국왕을 지지 하였다. 위클리프는 교회가 재산를 모으는것과 교황이 정치에 관여 하는 것을 반대 하였다.
그는 참된교회는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으며 하나님께 선택받고 부름받은 사람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믿는이들과 하나님 사이에 대언자인 교황이 필요 없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부패한 성직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그의 관점은 평민과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교황청에게는 매우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1377년 교황은 위클리프를 잡아오라는 명령을 다섯번이나 내렸다.
이시대을 살고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참으로 복된사람들이다.선진들의 피의 대가로 회복된 진리를 아부 손상없이 우리에게 도달되고 보존되고 실행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자 존과 귀족들의 보호아래 위클리프는 안전을 보장 받았다. 위클리프의 말년에 귀족과 평민이 손을 잡고 교회를 공격 하는 농민운동이 (1377-1381) 일어났다. 교황청은 모든 파괴와 손실을 위클리프파에게 돌렸다.
그러나 정치 세력의 보호아래 위클리프는 살아있을때 어떠한 박해도 받지 않았지만. 그가 죽은뒤 천주교는 교회를 새롭게 정비한다는 명분으로 위클리프에게 이단이라는 죄명을 씌우고 그의 시신을 파내어 불살랐으며 그의 추종자들을 대대적으로 박해 하였다.
위클리프와 후스는 믿음과 성경의 권위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다.그들은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삼아야 하고 믿음을 구원의조건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두가지 관점은 후에 오직 성경을 의지하자 와 믿음을 의지하자는 논점으로 발전하여 16세기 종교개혁의 주된 내용이 되었고 주님께서 회복하신 진리의 한 항목이 되었다.
교회는 주교를 머리 로한 조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선택받은 모든 믿는 이들로 구성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지 교황이 아니라며. 천주교의 낡은 풍속을 격렬하게 비판 하였다.그리고 신약은 교회의 헌법이라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