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된 것들을 우리는 마귀의 거짓말로 여겨야 한다. 그일 들 자체는 우리의 느낌에 상당히 실재일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더 큰 사실을 선포하셨기 때문에 이 선포 이전의 모든 것들은 다 굴복되어야 한다. 내게 어떤 체험 이 있는데.그체험으로 이원칙을 설명할수있다.
(세밀한 원칙에서 완전히 이 일에 적용될수는 없지만)
수년전 나는 병을 앓았는데 엿새 밤이나 열이 높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하나님은 성경으로
부터 나를 치료하시는 한 마디를 주셨다. 이로 인해 나는 여전히 한순간도 잠을 이루지 못햇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을 뿐더러 전보다 더욱 불안해졌다. 체온이 높아졌고 맥박도 빨리 뛰고 머리도 전보다 더 심하게 아팠다. 마귀는 나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어디 잇느냐,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네가올린 기도는 어떻게 되엇느냐.고 물어왔다. 이 때문에 나는 미혹되어 다시 기도하면서 이 일을 해결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책망을 받았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 17:17)
이 성경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들어왔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면 이 증상은 다 무엇인가.
이 중상들은 다 거짓말일 것이다. 두통도 거짓이며 고열도 거짓이다.
이 빠른 맥박도 거짓이다, 하나님이 내게 하신 말씀으로 보아 이모든 증세는 너의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에게 진리이다. 오분 내에 나는 잠이 들었고 이튿날 아침 깨어날 때에는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위에서 말한 것같은 특이한 개인의 일은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쎴지만 사탄은 이런일이 통해 하나님는 나에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속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실에 있어서는 결코 이런 문제가 있을 수없다. 사탄의 변론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든간에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노련한 거짓말쟁이는 말로만 아니라 또한 태도와 행동으로도 속인다. 그는 위조지폐를 내놓고 사용하듯이 거짓말을 한다. 마귀는 노련한 것짓말쟁이이기 때문에 결코 그자가 말로만 거짓말한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그는 어떤 표시나 느낌 .혹은 체험을 사용하여 하나님의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요동시키려고 한다.내말을 정확히 기억하기 바란다. 나는 육체의실재를 부인하지 않는다.
앞으로 우리는 육체에 대해 더 많이 말하게 될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한 것은 사탄의 거짓말이 .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떠나게 할수 있다는 것이다.일단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받아들일 때. 사탄은 최선을 다하여 매일 우리 체험을 증거로 하여 우리가 근본적으로 죽지 않았고 도리어 매우 활동적임을 믿게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사탄의 거짓을 믿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를 믿는지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밖으로 나타난 상태의 지배를 받을 것인가.아니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의 지배를 받을 것인가.
그러므로 내가 느끼든 느끼지 않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어떻게 이것에 대해 확신을 가질수 있는가.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으셨고 하나님의말씀이
"한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죽은 것이라. (고후 5:14)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나의 체험이 이 사실을 확증하든 안 하든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사실위에 서 있을 때 사탄은 우리를 이기지 못하게 된다. 마귀는 항상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것을 공격한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우리가 하나님의말씀을 의심하게 될때, 그의 목적은 달성되고 우리를 그의능력 아래 둘수 있게 된다. 반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사실에 대해 의심치 않고 확신 한다면. 하나님이 그분의역사 혹은 그분의 말씀에 대해 불의하실 수 없다는 것을 확산한다면, 사탄이 어떤 궤계를 사용하든 우리는 여전히 마귀를 비웃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누가 나에 대하여 내성이 "니"가 아니라고 설득시키려고 할때 내가 흔들리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 6:7)
여러분은 아마도 사실에 관한 이런 비유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사실과 믿음과 체험)은 담 꼭대기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세 사람과 같다. 사실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곧게 전진하며 또한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믿음)은 사실을 따라간다. 오직 (믿음)의 눈은 초점을 (사실)에 둘 때만이 만사가 순조롭다. 그가 체험을 관심하여 돌이켜 자신이 어떻게 전진하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그는 즉시 담에서 떨어진다. 거기에 따라 가련한 (체험)도 이어서 떨어지게된다.
모든 시험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시험은 우리의눈을주님 자신으로 부터 보이는 것들로 돌아게게 한다. 믿음은 종종 산봉우리의 장애물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된 상태를 만나며 접촉하는 물질적인 세계와의 뚜렷한 모순에 부딪친다. 그러나 실패한 사실이든 느낌이든 혹은 암시적인 실채이든 이것들은 모두 믿음을 저지하는 산봉우리들이다.
믿음과 산봉우리는 공존할수 없고 그 중 한가지가 제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많은 때에 산봉우리만 남기고 맏음을 잃어버리는 데있다. 우리는 정말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느낌을 좇아 진리를 발견하려고 한다면 사탄의거짓말이 우리의체험과 일치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상반된 것들을 거절하고 단순히 그분을 믿는 태도를 갖는 다면 .우리는 사탄의 기만이 허물어지고 우리의체험이 한 걸음씩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야만 이런 결과를 낳을수있다..
이것은 구체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분이우리에게 단계적으로 참되게 되시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그분이 참 공의인 것과 참 거룩인것과 참부활 생명 이심을 보게 될것이다. 본래 우리가 보았던, 그분 안에 있는 객관적인 사실들이 이제 우리 안에서 주관적으로 참되게 역사하는 상태에 이를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그분 자신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숙이 표시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 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19) 가 바로 이런 뜻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실을 참되게 만든다.
믿음은 항상 영원한 사실 , 영원한 참된사실 을 참되게 만든다.
" 그분안에 거함"
비록 우리가 이문제에 대해 적지않은 시간을 사용했지만 여러분의이해를 위해 한가지를 더말하겠다.
성경은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수차 언급했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죽었다고 말한 적은
한번도 없다.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가 죽은 사실을 발견 하려고 할때 모든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갈 것이다. 이는 우리 속은 우리가 죽은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우리 자신안에서 죽은 것이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우리가 그분안에 있기 때문이다.
주예수님은 "내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요 15:4 )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 매우 익숙하다. 이제 이말씀을 한번 상고해보자. 먼저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감에 있어서 우리의몸부림과 노력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주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내안에 거하라. 이는 우기가 이미 그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셨다. 이는 곧 우리가 배치된 곳에 머물러
있으라는 뜻이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역사이다.
우리 편에서 해야 할 일은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다.그리스도의 이런 역사는 장차 그리스도인의 체험이되는 것이다. 그분밖에서는 우리의 영적 체험이 없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떠나서 자신 안에서 단독적으로 영적인 생명을 체험하려 한다면 우리는 완전히 끝난 것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찾아볼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영적 체험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체험하셨다. 소위 우리의체험은 우리가 그분의 역사와 체험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기본 원칙은 우리에게 어떤 것들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로 어떤 일들을 거치게 함으로써 결국 그것들을 우리 안에 두어 우리의 체험이 되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어떤 일을 완성하사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지 않으신다,.
즉 "저는 삼월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혹은 "지난 수요일에 제가 구하는 어떤 확실한 체험을 얻었습니다." 일은 그렇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은혜시대에 우리는 더이상 체험 자체를 우리가 추구할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으로 우리의사상을 통제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전기는 어떻게 된 것이냐고 말할 것이다. 적지않은 사람들이 그들의 일생에서 참된 전기를 체험한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뮬러 형제가 어느 날 땅에 엎드려져
"뮬러는 죽었다." 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내말을 기억해두라 . 나는 우리가 거친 영적 체험 중에서의 실제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그분과 동행할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전기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그 반대로 나는 우리의 생활에서 확실한 전기가 필요하다고 강하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중요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느 개인에게도 개인적인 체험을 주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모든 개인의체험은 하나님이 이미 완성하신 사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바로 시간 안에서 영원한 사실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사가 우리의체험과 영적인 역사가 되었다. 우리는 그분을 떠나서 단독적인 역사를 가질수 없다. 우리에 대한 모든 역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 안에서 역사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완성하신 그분의역사 외에 따로 어느 개인에게 역사 하지 않으신다.
심지어 영원한생명도 단독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은 이미 그분의 아들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고 또한 우리를 그분의 아들 안에 포함시켰기 때문에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그리스도의 일부가 되었다.
이상 말한 것들의 요점은 굳건한 믿음 안에서 이렇게 말하는 데 있다.
"하나님이 이미 나를 그리스도 안에 두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참된 것이라면 나에게도 참된 것입니다. 나는 그분 안에 거해야겠습니다" 이런 믿음은 매우 실제적인 가치가 있다. 사탄은 자주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끌어내어 그리스도 밖에 있다고 여기도록 우리를 권하고 설득한다,
또한 유혹과 실패와 고통 그리고 시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고 확실히 느끼게 한다. 이때 우리는 종종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런 상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의 느낌으로 판단한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여 저를 그리스도 안에 넣어주소서 라고 기도 하기 시작한 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고 명하셨다. 이것이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다.어떻게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가.
이렇게 할때, 하나님은 우리 몸에서 무언가를 역사하실 기회를 얻으실 수 있다. 이럴때 그분은 뛰어난 능력 .부활의 능력 ( 롬 6:4.9.10 ) 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사실을 점차적드로 매일 우리가 체험하는 사실들이 되게할 기회를 얻게 되신다.
본래는 "죄가 왕 노릇 하였으나" (롬 5:21). 이제는 기쁨 안에서 우리는 진실로 다시는 저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게 된다.( 롬 6:7.)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만유라는 기초 위에 굳건하게 서 있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이 점차적으로 우리 안에서도 그러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기초 위에서 있다면 우리는 옛사람의 모든 것이 여전히 우리 몸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서 있는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자신안에 들어간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 밖에서 자아가 죽는 것을 찾으려고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장소를 잘못찾은 것이다. 이는 죽음이 그리스도안에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계속 우리 속을 들여다 본다면 죄를
향하여 우리는 십분 살아 있을 것이다.
그반면에 만일 우리가 주님을 앙망하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죽음을 여기에 역사하시도록 한다면 결국 새 생명은 우리의 것이 된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가 될것이다. (롬 6:4.11)
"내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 .이것이 이중적인 내용의 말씀이다. 한 부분은 명령이고 다른 부분은 약속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객관적인 면이 있는 반면에 주관적인 면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주관적인 면은 객관적인 면에 근거한다.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는 우리가 그분의안에 거한 것의 결과이다. 우리는 일의 주관적인 면을 지나치게 관심함으로 객관 적인 사실을 소홀히하고 자신을 향하는 결과를 낳지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객관적인면 (내안 에 거하라) 만 붙잡고 주관적인 면은 하나님게 맡기라.
주관적인 면은 하나님께서 감당하시고 행하신다.
우리는 전등으로 이 일을 설명한 적이 있다. 만인 당신이 집안에 있고 날이 점점 어두워졋다면 책을 읽기 위해 당신은 등을 켜야 할 것이다. 당신 옆의 탁자위에 등이 하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그 등에 기대를 걸고 그 등이 빛을 발하지 않을까 하고 지켜보겠는가.
아니면 헝겊으로 전구를 닦겠는가. 당연히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다른쪽으로 가서 벽에 부착된 스위치를 켤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전기의 근원을 주의하고 거기에 요구되는 행동을 취한다면
등은 즉시 켜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때 우리는 초점을 그리스도 한 분에 고정시켜야 한다. "내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순서이다.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믿음은 그 사실들을 주관적인 진실로 만든다. 이것은 마치 바울이 말한 것과
같다. " 우리가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하나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
같은 원칙으로 이것을 생명의열매 맺음에 적용할수 있다.
"저가 내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요 15:5)
우리는 스스로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 할필요가 없다. 혹은 맺은 열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조차 도 없다. 우리의 본분은 그분을 앙망한는 것이다. 이렇게 할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이행하신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분 안에 거하는가, "너희는 하나님께부터 나서 그리스도안에 있고".
당신을 그리스도 안에 두신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또한 이미 그분은 그것을 이루셨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당신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지 말라.
자신 안에 있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
다만 그리스도를 주시하고 그분 안에서 당신를 보라. 그분안에 거하라. 하나님이 당신을 그분의 아들
안에 두셨다는 사실에 안식하라. 또한 그분이 당신 안에서 그분의 일을 완성하실것을 믿으라.
그분은 영광스런 그분의 약속을 실현하신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롬 6:14)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질화요,보이지 않는 것들의 확증입니다. (히 11:1 ). 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 나는 여러분들이 히브리서 11장이 신구약 성경전체의 믿음에 대한 유일한 정의임을 알 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이 정의를 확실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어떤 상태만을 뜻아지 않고 일종의 행동을 뜻한다. 수년 동안 나는 이단어에 합당한 용어를 생각했었다. 영어 성경 중 다비의번역판은 이 단어를 매우 훌륭하게 번역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실제화요.(substantiate). 이단어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휠씬 낫다. 이는 실제화는 바라는 것들을 체험으로 화하는 행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사물을 실제화 하는가 .사실상 우리는 매일 이런 일을 하고 있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살수 없게 된다. 당신은 실상과 실제화 사이의 차이를 구별할줄 아는가. 실상은 내앞에 있는 어떤 물체의 현상을 말하고 실제화는 그물체를 우리에게 참이 되게하는 어떤 힘 혹은 기능을 가리킨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의오관을 통하여 우리는 자연계 안의 것들을 우리의 의식 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그것들을 감상할수 있다. 예컨대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세상에 있는 빛과 소리를 실제화 시키는 두 가지 기능이다. 또 세상에 있는 홍색.황색. 녹색. 자색 등 각종 색상들은 모두 참되다. 그러나 눈을 감아 버릴 때 그 색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같이 색상의 실재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시력이 있을 때 나에게는 색상을 실제화할 능력이 있게 된다. 시력을 통하여 황색은 내게 황색이 된다. 그러므로 황색의 존재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황색을 실제화할 능력이 나에게있다. 나는 어떤 물 체를 내게 참된 것이되게하고 내 의식 속에 실제가 되게 할 능력을갖고 있다. 이것이 실제화의 의미이다. 바라는 것들 과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실들을 실제화 하는 능력은 오직 믿음이다. 믿음은 사실을 우리의 체험에서 진실한 것이 되게 한다. 믿음은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을 실제화시킨다. 천천만만의 사람들이 로마서 6장 6절의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씀을 읽어보았다. 믿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참되고.의심하거나 머리로만 동의하고 영적인 빛이 결여된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참되지 않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믿든 믿지않든 여전히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의 사실을 믿지 않는다 해도 이것은 여전히 참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사실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사실 자체는 결코 믿음에 의해 그진실성이 더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으로만이 그것들을 만질수 있고 그것들을 우리 체험에서 참된 것이 되게 할수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