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면죄부판매-마틴 루터의 신앙 양심을 근본적으로 흔들...


교회사 2009-02-02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k505/2155.html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중세교회의 강제적인 면죄부 판매는 루터의 신앙 양심을 근본적으로 흔들게 되었다.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순응할 수 없었고, 나아가 침묵할 수도 없었다.

루터는 자신이 가르치고 돌보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목회적 양심과 책임에 따라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기 시작하였고, 전혀 개선됨이 없자 드디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문 앞에 ‘95개 논제’를 내 걸음으로써 기존 교회와의 본격적인 논쟁에 들어가게 되며,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이 된다.

◀ 면죄부 판매 광경과 판매인 테첼. 그가 판매한 면죄부는 로마 성베드로 성당의 재건축과 마인쯔의 대주교 알베르트의 매직(買職) 비용의 충당기금에 사용될 것이었다.

1515년 루터는 10개의 어거스틴 수도원을 감독하면서 서신 교환과 방문 등을 통하여 새로 발견한 복음의 씨앗을 전파할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깨우침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알지 못한 채 계속 성경 연구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면죄부 논쟁을 계기로 그것이 공공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죄부는 카톨릭교회의 일곱 성사들 가운데 하나인 고해성사와 연관된 것이다. 사제는 통회하는 고해자의 죄고백을 듣고 죄사면을 한 뒤 죄책에 대한 보속으로 순교, 시편 낭송, 특별 기도 등의 행위를 하게 하였다. 한편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와 성인들에 의해 축적된 선행의 보고(寶庫)를 보유하고 있으므로, 죄를 지은 이는 보속의 의무를 대신할 수 있는 면죄부를 돈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제도화 하였다.

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죽어 연옥에 가 있는 이들에게도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금화가 헌금궤에 떨어지며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나 하늘나라를 향해 올라가리라”고 테첼은 신자들을 유인하였던 것이다. 그는 프레데릭 현자가 작센영내에서의 면죄부 판매를 거부하자 경계 근처에다 면죄부 판을 벌여 놓았다.


◀ 교황이나 대주교가 양피지에 쓰고 봉인이 첨부된 면죄부 판매 허용증.

테첼에 의해 사용된 브란데부르크의 면죄부. 구입자 이름과 날짜만 적도록 미리 인쇄되어 있었다. 죄사함을 이런 식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스크랩]95개 논제-마틴 루터가 비텐베르커성 교회의 문에 내걸었다.


교회사 2009-02-02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k505/2154.html

▶ 비텐베르크성 교회. 지역의 개 교회도 일년에 한번씩은 돈을 받고 성물들을 신자들에게 보여주고 일부 또는 전체 면죄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교황으로부터 받았다. 이 교회도 95개 논제를 내 건 다음 날, 제성기념일에 면죄부를 팔 수 있는 허가를 받아, 교회의 5000점 이상되는 성물들을 보기 위해 수 많은 이들이 교회를 찾았다. 그러나 이 교회는 더이상 ‘모든 성인들’에게 봉헌되어 있지않고 개신교 종교개혁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또한 여기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 이종배찬이 처음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구민들의 영혼을 염려하는 목회적 책임감에 움직여 루터는 이미 이전에 행한(1516년 10월 31일과 1517년 2월)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였었다. 그러나 고해 문제의 재고 요청들이 결국 실패하자 루터는 공개 논쟁을 요청하기로 결심하여 1517년 10월 31일, 제성기념일(모든 성인의 날 전날 밤) 전야에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성(城) 교회의 문에 내걸었다.

터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셨다”라고 논제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복음의 재발견을 면죄부 문제에 적용하여 “교회의 참 보고(寶庫)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거룩한 복음”(62조)이라고 역설하면서,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자비에 비할 바가 아님을 천명하였다(68조).

지막 논제에서 루터는 기독자는 면죄부와 같은 행위의 의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결론내린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 논제를 내건 비텐베르크성 교회의 문



전시간 훈련생에게 주는 말씀 (위트니스리 형제님의말씀)


위트니스리 2009-02-02 / 추천수 0 / 스크랩수 2 http://blog.chch.kr/k505/2153.html
다음은 윗트니스 리 형제님께서 전시간훈련 졸업생들에게 주신 송별의 말씀입니다. 결코 다음의 항목들을 잊지 마십시오.

1.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그리스도의 몸을 산출하고 건축하여 그분의 마음의 갈망과 궁극적인 목표인 새 예루살렘의 완결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2. 삼일 하나님은 여러분을 택하시고 예정하시고 구속하시고 거듭나게 하시어 하나님-사람이 되게 하시며 그분의 영원한 경륜을 이루게 하십니다.

3. 하나님-사람은 자신의 자아와 천연적인 사람과 옛사람을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에 의해 부인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수행을 위하여 만유를 포함한 그 영의 넘치는 공급에 의해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행하고 일해야 합니다.

4. 여러분은 교사가 되도록 훈련받거나 온전케 된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되어 죄와 세상과 환경적인 어려움들과 반대와 핍박과 변질된 기독교를 이기도록, 심지어는 여러분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고서라도 이기도록 훈련받고 온전케 되었습니다.

5. 주 예수님께서는 공기와 같은 영으로서 또 생명주는 영으로서 우리 영 안에 계십니다―딤후4:22, 롬8:10.

6.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자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내주하시는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롬8:11.

7. 만약 그 영에 의해 몸의 행실들을 죽음에 넘기우면, 여러분은 살 것입니다―롬8:13下.

8. 우리는 생명과 평안을 위하여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어야 합니다―롬8:6.

9.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영에 의해 육체를 그 정욕과 그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5:24.

10. 우리가 그 영을 따라 행한다면 결단코 육체의 정욕을 이루지 않을 것입니다―갈5:16.

11. 우리는 그 영에 의해 살아야 하고, 또한 그 영에 의해 행해야 합니다―갈5:25.

12. 우리는 율법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영(연합된 영) 안에서 영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롬8:4.

13.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에 의해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해야 합니다―빌1:19下-20上.

14. 우리는 영 안에서 무시로 기도해야 합니다―엡6:18.

15. 우리는 그 영에 의해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 ― 롬 15:16.

16.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그 영에 의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딛 3:5, 엡 4:23.

17. 우리는 주 영에 의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고후 3:18.

18. 삼일 하나님의 완결인 그 영과 변화된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인 신부는 결국 한 영적 부부(계 22:17),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되어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며, 이는 신성한 영광이 영화롭게 된 인성 안에서 나타남으로써 그분의 영원한 확장과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계 20:1).

19. 교회는 항상 우주적으로나 지방적으로 하나라는 것을 기억 하십시오. -교회와 하나 되고(요17:11, 21-23), 인도하는 분들께 복종하고(히13:17),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며(요13:34), 한 영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동역하고(빌1:27上), ‘그러나’라는 꼬리표를 달지 않으며, 형식적이지 않으며, 율법적이지 않으며, 영 안에서 불타며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불일 듯 하게 하며(롬12:11, 딤후1:6), 다만 "일"만을 수행하지 않고, 불협화음(cf. 빌4:2)과 분리(cf. 행15:37-39)와 분열(cf. 고전1:10)을 피하고, 성도들과 함께 한 혼으로 복음의 믿음 안에서 분투하고(빌1:27下), 다음과 같은 매일의 생활을 살아야 합니다.
첫째, 죄인들을 찾고 구원시키며(눅10:2, 6, 요15:16), 둘째, 새로운 믿는 이들을 소중히 품고 양육하며(살전2:7, 요21:15), 셋째 비형식적인 그룹집회에 의해 성도들을 가르치며 온전케 하여 몸을 건축하며(살전2:11, 엡4:12), 넷째, 교회 집회에서 신언함으로 주님을 위하여 말하고 주님을 말해내어 교회를 건축해야 합니다(고전14:3-5).

20. 여러분 자신은 훈련생이고 다른 이들은 훈련생이 아니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21. 각 지방 교회에서 장로직분 아래에서 주님을 섬기십시오.

22. 장로들의 인도 직분과 충돌되는 일들을 하지 마십시오.

23. 활력그룹들에 동참하십시오. 만약 그곳에 활력그룹이 없다면 장로들과의 교통을 통하여 활력그룹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24. 다른 이들을 평가하지 말고,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정죄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일을 더 잘한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항상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들에게 공급하십시오.

25. 어떤 대가를 들여서라도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지키십시오. 결코 어떠한 분열도 일으키지 마십시오. 분열의 요인이 될만한 일은 어떤 것도 하지 말며, 여러분에 의해 무의식적으로라도 심겨질 수 있는 분열의 씨가 될만한 일을 결코 하지 마십시오(요 17:21-23, 엡 4:1, 고전 1:13)


여러분의형제
윗트니스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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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만이 외손녀의간증


워치만니 2009-02-02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2144.html
우리가 이러한 형제자매님들의 어깨위에 있음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7:14)


1960년대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대륙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금용광로의 불이었다. 나의 외조모님인 니자매님은 젊었을 때 연경대학을 졸업하여 평생토록 니형제님의 현숙한 내조자가 되었다. 외조부님(니 형제님)께서 투옥된 후 외조모님도 투옥되어 심문을 받았었고 출옥한 후에도 여전히 감시를 받았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외조부님으로 인해 그녀는 '반혁명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았다. 외조모님의 몸은 매우 좋지 못했고 아주 심한 고혈압에다, 고혈압으로 인한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시종 그녀는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을 앙망하며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깍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1966년 여름 어느 날 그녀는 한 작은 방으로 끌려 들어가 한 무리의 홍의병들에 의해 밤낮으로 온갖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밖에 서 있던 우리들은 가죽띠로 몸을 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것은 마치 우리 마음을 치는 듯했다. 또 욕설을 퍼붓는 소리와 위협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우리는 외조모님이 입을 열어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을 듣지 못했다. 얼마 후 외조모님은 풀려났는데 그녀의 눈은 청색 빵과 같이 불어 터졌고 몸의 여러 곳에도 상처가 나 있었다.


그 기간 동안 그녀는 여러 개의 안경이 깨졌고,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인격마저도 무시당했다. 수차 그녀는 사람들에게 희롱 당하며 길가로 끌려 다녔다. 그녀는 다른 두 노자매와 함께 강제로 두 손을 높이 들어 손에 신을 들고 머리에는 종이로 만든 뾰족 모자를 쓰고 가슴에는 명패를 달고 사람들에게 욕설과 능욕을 들으며 장시간 가만히 서 있는 벌을 받았다. 그 목적은 그녀들로 하여금 신앙을 포기하고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몇 시간 동안 그 세 자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홍의병들은 하다 못해 그들 하나 하나에게 '너희들은 그래도 너희 예수를 믿겠느냐?'라고 물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믿는다'라고 했다. 홍의병들은 그들에게 화를 내면서 땅에 있는 구두 짝을 들어 그들의 몸과 머리에 던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 너희의 화강석 같은 머리로 너희 하나님을 만나 보라'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모든 환난 중에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고 견고히 설 수 있도록 그녀들에게 힘을 주셨다. 그 일 후에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핍박을 말할 때 기쁨이 충만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치욕을 당하기에 합당한 사람들이라'

홍의병들은 모든 성경과 찬송가를 집 구석구석에서 찾아내어 가져갔다. 그러나 외조모님은 온갖 방법으로 몇 권을 감추어 두었다. 한 번은 어린애들이 지붕 위에서 놀다가 지붕 밑에 감추어 둔 성경 두 권이 발견되어 심문을 받았었다. 주님을 믿은 후 나는 큰 부엌 뒤에서 작은 성경 한 권을 발견하여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도 외조모님이 숨겨 놓은 것이었다.

성경이 매우 귀했던 시대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이 작은 성경은 나에게 너무나도 진귀한 것이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외조모님은 하루에 두 번씩이나 뒷골목을 청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외조모님은 감옥에 갇히지 않았지만 그녀는 감옥에 있는 죄수보다 더 비참하였고 치욕과 잔해를 받았다. 길가에 다니는 사람들과 어린아이들까지도 제멋대로 그를 때리고 그녀에게 침을 뱉을 수 있었다. 이는 그녀가 모든 사람이 미워하는 '반혁명분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비판하는 대모임을 마친 뒤 외조모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4:9). 성경은 벌써부터 나의 운명을 결정지어 놓았다"고 하셨다. 모든 핍박 중 그녀는 인신공격을 받은 자리에서 항상 묵묵히 쉬지 않고 기도했다.

시종 그는 주님을 의지하여 굳게 섰고 주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날이 거듭되고 해가 거듭될수록 그녀를 본 사람들은 그녀에게 '흰머리 노파야!'라고 외쳤다.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은색머리의 노파가 자신과 남편의 신앙을 위해 감시를 당하고 중노동을 하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좋은 간증이 되었다.


1970년 내가 농촌으로 강제노동을 하러 갈 무렵에 (그 때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다 농촌으로 내려가 농민이 되어야 했다) 외조모님은 나를 위해 매일 기도했다. 1971년 봄 내가 상해를 떠나기 전 외조모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주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보배로운 구주이시다. 어찌하든지 너는 주님을 굳건히 따라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농촌에 있는 동안 나는 주님의 놀라운 인도와 크나큰 은혜를 받았는데 나는 이것이 외조모님의 중보기도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1952년 외조부님(워치만 니)이 감금되기 전 그는 교회 일로 홍콩에 가신 적이 있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은 외조부님에게 대륙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분명했고 대륙으로 가서 형제 자매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리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위해 정한 길 - 나의 앞길은 들림받는 것이 아니면 순교하는 길 - 에 대하여 매우 분명했다.

홍콩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그는 붙잡히고 상해의 제람교 감옥에 투옥되었다. 1967년 15년의 형기가 차자 정부는 그에게 신앙을 포기할 것을 공개적으로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부 사람들에게 워치만 니가 신앙을 포기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이 그에게 또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주님은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 보배로우시다.


주님에 대한 충성 때문에 그는 '인간의 자유'를 포기하였다. 감옥에서 15년형을 마치고서 그는 기꺼이 주님을 위하여 죄수가 되려고 했다. 그때의 공개적인 태도 표명의 불사는 더 큰 핍박을 가져왔다. 이러므로 외조부님은 두 불량배 형사범과 함께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들의 임무는 니 형제님으로 하여금 신앙을 포기하게 하는데 이었다.

니 형제님을 더 심하게 학대할수록 그들은 더 큰공을 세우게 되어 있었다. 옥중에 있는 어느 난우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외조부님의 솜으로 만든 조끼가 그들에게 의해 여러 조각으로 찢겨졌다고 한다. 외조부님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표명함으로서 더 많은 고통을 당했다. 외조부님의 형기가 차도 그들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들은 비밀리에 니형제님을 상해 근교에 있는 청포현 청동노계 농장으로 이감하였다.

이 기간 동안 외조모님은 외조부님을 한 번 볼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소식이 끊어져 수개월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 후에 알게된 것은 외조부님이 더 고통스러운 장소인 안훼이의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백모령 노계농장으로 이감되었다는 것이었다.

1971년 11월 외조모님은 중풍으로 돌아가셨는데 이 일 전에 외조모님은 외조부님과 편지하도록 약속했었다. 한동안은 편지 연락조차도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그 당시 외조부님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외조모님은 중풍에 걸릴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정확히 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것 또한 세상에 있을 때 그녀가 주님께 구한 바였다.

그녀는 매우 심각한 고혈압으로 인한 심장병을 앓았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중풍으로 죽을 것을 알았으므로 그녀는 중풍이 발생한지 얼마 안되어서 빨리 주님께 갈 수 있기를 바랬다. 이렇게 될 때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장시간의 고통도 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외조모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 갈망을 이루어 주신 것으로 인해 감사 드린다. 중풍으로 혼미케 될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시간은 정확히 삼일이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외조모님은 매우 평안했으며 아무 고통 없이 주님께 가셨다.

외조모님이 돌아가신 후 우리는 외조부님에게 즉시 그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이는 외조부님의 심장이 매우 쇠약하므로 그 소식으로 인한 타격을 감당치 못할까 보류했던 것이다. 일 개월이 지난 후에야 외조부님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러나 외조모님의 병환이 위독해질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외조부님은 예감이 있으셨는지 편지에서 항상 외조모님의 건강을 물어 왔었다.

편지에서 외조부님은 일찍 감옥에서 나와서 외조모님과 함께 있으면서 병중에 있는 그녀를 섬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큰 이모할머니(니 형제님 부인의 큰언니)와 손녀들이 함께 1972년 안훼이로 외조부님을 만나러 갈 때 그의 심장병이 극히 악화된 것을 알았는데 외조모님의 별세는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왜냐하면 그 때 외조부님과의 왕래가 유일하게 끊어지지 않은 사람은 바로 외조모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사후에 같은 방에 있던 한 난우의 말에 의하면 외조부님은 벌써부터 형기를 마치고 출감하여 외조모님과 함께 있을 갈망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외조모님의 건강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편지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 내 형기는 내 아내의 생명과 경기를 하는 듯하다. 만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출감할 수 있다면 내가 그를 잘 섬기겠노라. 이는 그가 나로 인하여 너무 많은 고통을 당했기 때문이다".


외조부님은 투옥되기 전 교회 봉사를 위하여 전국각지로 바삐 다녔었다. 투옥된 후 순식간에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 그 기간 동안 그들 부부가 함께 있었던 날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외조부님이 붙잡힌 후 그들은 사람들이 듣기를 좋아하는 많은 죄명들을 조작하여 그를 무고히 음해 하였다. 당시 많은 형제자매들이 그들에게 속았다. 그러나 외조모님은 그를 제일 잘 알았기 때문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에 관해 그들이 말한 일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주님을 위하여 그는 사람으로서는 받을 수 없는 치욕을 수없이 당했다. 제람교 감옥에 갇혔을 때 외조모님은 매월 한 번씩 소량의 음식과 일용품을 외조부님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청동 농장으로 이감된 후 외조모님이 그를 한 번 만나 보았지만 그 후로는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다.

외조모님의 별세로 인하여 외조부님은 매우 괴로워했다. 같은 감옥에 있던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는 수일 동안 애통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4월 20일 큰 이모할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외조부님은 "나의 기쁨을 여전히 지켰노라"고 말했다. 수년간의 압박과 핍박도 그를 낙심케 하지 못했다. 이는 그가 앙망하는 분은 영원히 그를 낙심케 하지 아니하시는 우리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1972년 6월 우리는 농장으로부터 외조부님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큰 이모할머니와 농장으로 달려갔을 때 외조부님은 이미 화장되었고 그의 유해밖에 볼 수 없었다.

그의 한 난우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 당시 그의 심장병은 매우 심하게 발작하여 위독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사십리 밖에 있는 농장병원으로 그를 경운기에 실어서 농군들이 쓰는 모자 하나를 씌우고 끌고 갔다. 그것은 건강한 사람조차도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진동을 가장 피해야 할 심장병환자를 그렇게 데려갔다. 바로 이렇게 외조부님은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별세하시게 되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의 베개 밑에는 아주 떨리는 손으로 쓴 몇 줄의 글을 담은 쪽지가 있었다. 그 말씀은 이러하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죽고 삼일만에 부활한 이것은 우주 가운데 최대의 사실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죽노라. 니토생』


농장 간부가 이 쪽지를 우리에게 보여줄 때 나는 주님이 이 말씀을 내 마음에 기억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노계 농장간부는 그가 많은 노트에다 소위 '반공일기'를 썼다고 했다. 이것은 옥중에서 진리에 대해 그가 새롭게 얻은 빛이었다. 하나님이 특별히 그것들을 보존하시지 않고는 그 중요한 원고들은 옥중에서 나올 길이 없을 것 같다.

옥중에서 한 난우는 그의 여러 가지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는데 할아버지가 아직 세상에 있을 때 끊임없이 그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였고, 할아버지가 별세한 지 얼마 안되어 그가 구원을 받고 주님께로 돌아왔다고 말해주었다.

외조부님은 돌아가셨다. 그러나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여 피에 젖은 면류관을 가지고 주님께로 갔다. 하나님은 그의 마지막 소원인 살아서 아내와 함께 있는 소원은 이루어 주시지 않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더 좋은 것 - 그들이 주님 앞에서 함께 만나는 것 -을 예비하셨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히11:13)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였느니라"(히11:16)

그들은 많은 순교자들과 같이 세상을 떠났으나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부르신 한 무리의 이기는 자들이요, 이 세상에 있기에 합당치 않은 사람들이다. 지금 그들은 안식에 들어갔으나 그들의 기도와 열매는 계속 끊임없이 하나님께 열납되고 있고 끝이 없는 효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발자취는 더욱 우리로 하여금 충성스럽게 주님을 향하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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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역사


교회사 2009-02-01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2133.html

Ⅱ 교회의 역사

 

1. 교회 안에 계급 제도를 가져옴

2세기 교회의 강한 지도자이자 옹호자인 이그나티우스는 감독 또는 주교가 장로보다 높다고 잘못 가르쳤다. 그러나 사도행전 20장은 장로를 감독으로 부른다(17, 28절). 장로라는 말은 성숙한 사람을 의미하는 반면, 감독은 장로의 책임과 기능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잘못된 가르침은 교회 통치(성직자들이 다스리는)의 주교 제도를 가져왔다. 이 잘못된 가르침은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교, 대주교, 추기경 및 교황이라는 계급 제도의 근원이 되었다.

 

2. 반작용과 분열

모든 세기에 걸쳐, 교회 안으로 들어온 불순과 소극적인 것들에 반작용하는 소위 말하는 청교도들이 있었다. 모든 청교도들은 교회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반작용에 뛰어들려는 그들의 의도에 있어서 좋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영원함 목표인 교회에 관해 그렇게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수를 범했다. 그들의 가장 큰 실수는 그들의 반작용 내지 대응은 더 많은 분열을 산출한 것이다. 거듭되는 반작용은 거듭되는 분열이 되었다. 결국 하나님의 목표는 손상되었다. 이것이 주님께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는 주된 이유이다. 그분이 돌아 오시기 위해서는 디딤둘이 필요하다. 이 디딤돌은 그분을 맞을 신부로서 예비된 합당한 교회생활이다.

 

3. 마르틴 루터의 이신칭의(以信稱義) 회복

종교개혁 당시 주님의 회복은 명확한 형태로 진입했다. 주님은 마르틴 루터를 사용하여 이신칭의에 관한 진리를 회복하고 성경이 일반 대중에게 열리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 관한 진리는 약했다. 루터의 독일 정부와의 결탁은 국교회들을 산출했다.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도 정교회 이외에 국교회들이 있다. 독일 국교회, 덴마크 국교회, 노르웨이 국교회, 스웨덴 국교회, 영국 국교회는 루터가 뿌린 씨앗이다. 최선을 다할지라도 어떤 실수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의 보호는 합당한 방식으로 교회를 아는 것임을 볼 수 있다.

 

4. 신비주의자들의 속생명의 회복

17세기 주님은 개신교회의 죽어 있음과 공허함에 대한 반작용으로 마담 귀용, 페넬롱 신부, 로렌스 형제와 같은 신비주의자들을 일으켜 속생명의 체험을 회복하셨다. 그들은 생명은 바로 그 영으로서 아들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임을 깨닫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영역 안에 있었다. 여전히 그들은 교회에 관한 이상이 분명치 않았다.

 

5. 일반 교회들과 자유 그룹들의 형성

교회 역사를 통해 청교도적인 수많은 무리들이 일으켜졌다. 어떤 이들은 침례에 관한 진리를 보고 침례교를 시작했다. 장로교, 감리교 등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소위 말하는 자유 그룹이 있다 이 자유 그룹들은 모든 성서 교회들(the Bible chu rches)을 포함한다. 이 성서 교회들 외에 교파를 떠나서 모임을 갖는 자유 그룹들이 많이 있다.

 

6. 진젠돌프와 모라비안 형제들에게서 성령의 연합에 의한 교회 생활의 초 기 단계가 회복됨

18세기에 주님은 교회 생활의 실행의 어떤 면을 회복하시려고 진젠돌프 백작이 이끄는 모라비안 형제들 가운데서 움직이셨다. 이 모라비안 형제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뿐 아니라 국교회들의 핍박을 받았다. 그들은 색소니 지방의 진젤돌프 영내로 피신했다. 이 때 여러 배경의 많은 추구자들은 교리적 차이로 인해 불화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진젠돌프는 한 집회를 소집하여 그들에게 자신들의 교리적 불일치를 내려놓으라고 설득했다. 그들은 그들끼리 연합을 지키고 교리와 종교적인 배경상의 차이들을 내려놓겠다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나중에 그들이 주의 만찬을 갖는 동안 성령의 쏟아 부어짐을 체험했다. 이들을 통해서 요한 웨슬레도 구원받았다. 우리가 알기로는 초대 사도들 시대 이후로, 모라비안 형제들이 어느 정도 합당한 방식으로 교회 생활을 실현한 최초의 그리스도인 그룹일 것이다.

 

7. 형제회의 교회 생활의 회복

19세기에 1825년부터 1828년까지 주님은 존 넬슨 다비의 인도 아래 소위 형제회를 일으키셨다. 팬톤은 형제회의 움직임과 그 의의는 종교 개혁을 훨씬 뛰어넘는다고 말했다. 종교 개혁은 인간 정부와 연계를 가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세상적이었지만 형제회의 움직임은 정말로 영적이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한 일에서 어떤 광고도 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다비의 사진을 찾기가 어렵다. 형제회 중 많은이들이 사진을 찍는 것은 세상적인 실행이라고 여겼다. 유감스럽게도 형제회의 황금시기는 다만 짧은 기간만 지속되었다. 결국 그들 가운데 많은 분열이 있었다. 최초의 분열이 다비와 뉴튼간에 일어났다. 그들의 논쟁은 믿는이들의 휴거에 관한 것이었다. 다비는 대환란 전 휴거를 주장했고 뉴튼은 대환란 후 휴거를 주장했다. 나중에 두 번째 분열은 다비와 죠지 뮬러와 사이에 교파와의 관계를 가진 자들을 받는 문제에 있어서 다른 인식으로 인한 소위 폐쇄 형제회와 공개 형제회가 있었다. 플리머스 형제회는 주로 개방 형제회를 지칭한다. 이후로 형제회는 교리들로 인한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여 왔다.

 

8. 주님이 처녀지(處女地)에서 새롭게 시작하심

형제회의 움직임이 시작된지 100년이 지나서 주님은 중국 대륙에서 새롭게 시작하셨다. 18세기에 모라비안 형제들이 유럽 대륙에 있었고, 19세기에 형제회가 영국에서 주님에 의해 일으켜졌다. 한 세기가 지나서 주님은 극동에서 움직이셨다. 니 형제님은 합당한 교회 생활에 관한 한 유럽은 그 밭, 곧 흙이 완전히 못쓰게 되었으므로 주님은 20세기 초에 중국으로 오시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했다. 그는 교회 생활을 위해서 중국은 그 당시 처녀지라고 했다. 물론 그것은 주님이 하신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과 불교의 종교로 가득찬 그러한 이교도의 나라에서 주님이 어떤 것을 일으키시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Ⅲ 지방 교회들의 역사

 

1. 니 형제님의 구원받음과 부르심 받음

니 형제님은 1920년에 여자도(영어명 Dora Yu)라는 설득력 있는 복음 전파자에 의해 구원받았다. 그녀는 영국으로 의학을 공부하러 가던 중 복음 전파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가 활동하였다. 니 형제님의 고향인 복주에서 초청되어 니 형제님의 부모임이 다니던 감리교 예배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니 형제님의 어머님을 구원하였다. 본래 니 형제님의 어머니는 마작을 좋아하고 수다스럽고 강한 여자이었지만, 이런 구원을 통하여 온 가족에게 죄의 철저한 자백을 하였고 매우 진지한 방식으로 자신의 모든 실패와 실수를 자백했다. 이것이 니 형제님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주었고 결국 니 형제님도 여자도 자매의 말을 들으러 갔고 거기서 주님께 붙잡혔다. 그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십자가의 주 예수님을 보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2. 화수은(M.E Barber) 자매를 통한 주님의 예비하심

화수은 자매는 30세 경에 감리교 선교사로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중, 다른 사람들의 질시로 영국으로 소환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십자가의 공과를 배우기를 훈련하고 아무런 변호없이 영국에서 지내던 중, 진실이 밝혀져 다시 중국으로 파송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팬톤과의 접촉을 통해 교파의 해악을 알고서 선교사의 지위를 사임하고 스스로 혼자 힘으로 주님을 위해 중국으로 돌아 갔고 니 형제님의 고향인 복주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화수은 자매의 나이가 약 60세 경에 니 형제님은 화수은 자매와 접촉하게 되었다. 그당시 그녀는 여행도 하지 않고 어떤 선전도 하지 않고 다만 밤낮으로 기도에 힘쓰고 있었다. 니 형제님은 회심 후 곧 그녀와 접촉하게 되었으며 그녀로부터 아주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녀는 깊고 매우 엄격했다. 그녀는 엄격했으므로 자신의 온전케 함 아래 있던 자들을 곧잘 책망하곤 했다. 결국 어느 기간이 지난 후 계속 화수은 자매를 만나러 가는 유일한 사람은 니 형제님 뿐이었다. 니 형제님은 그녀를 만나러 갈 때마다 책망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책망을 들을 때마다 자신을 그 책망에 내놓았다. 화수은 자매은 1929년에 주님 품으로 갔다. 그것은 니 형제님이 ‘영에 속한 사람’의 집필을 막 끝낼 때였다. 화수은 자매는 유언을 통해 그녀 자신이 친히 각주를 쓴 그녀의 모든 것을 니 형제님에게 남겼다. 니 형제님은 그녀에게서 주님의 임재를 직접 느꼈다고 간증했다. 그녀는 주님의 다시오심을 날마다 실제로 기다리며 사는 자매였다. 니 형제님은 형제회의 모든 풍성을 화수은 자매를 통해서 얻었다. 니 형제님이 1930년 이전에 기독교 서적들을 섭렵한 것은 3,000여권이나 되었다. 니 형제님은 그가 사역하면서 받은 공격과 핍박 등 여러 공과들과 이러한 서적들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많은 계시를 받았다. 또한 니 형제님의 이후에 이러한 계시는 더욱 전진하여 하나님은 많은 것을 주의 회복에 열어 주셨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 주님으로부터 받은 계시

1. 구원의 확신 2. 기독교의 치우침 3. 교회 4. 종파들 5. 성직자-평신도 제도 6. 보편적인 제사장 7. 장로 직분 8. 합당한 침례와 합당한 주님의 상 9. 머리를 덮는 것과 안수 10. 믿음에 의한 삶 11. 신유 12.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 다시오심 13. 성령의 내주하심 14. 성령의 쏟아 부어주심 15. 사람의 세부분 16. 믿음에 의한 성화 17. 속생명 18. 이기는 자들 19. 왕국 20. 휴거 21. 영적 전쟁 22. 그리스도의 중심성과 우주성 23. 지방 교회의 경계 24. 이기는 생명 25. 지방 교회의 입장 26. 교회 생활의 실행서 27. 그리스도의 몸 28. 교회의 권위 29. 동역 30. 교회에 의한 복음 전파 31. 이주 32. 교회는 지방적이며, 사역은 지역적임 33. 겉사람의 파쇄와 영의 해방 34. 사람의 영을 알고 사용함 35. 실제적인 건축 36. 그리스도, 생명 주는 영 37. 주님을 누림-주님을 먹고 마심 38. 기도로 읽기 39. 주님의 이름을 부름 40. 주님을 호흡함 41. 보편적인 신언의 실행 42. 칠배로 강화된 영 43. 그리스도 대 종교 44. 새사람으로서의 교회 45. 교회의 인격이신 그리스도 46. 규례의 폐지

 

3. 그리스도와 교회

지금까지 나열한 항목들의 총체가 그리스도와 교회 곧 큰 비밀이다. 그리스도는 내용이고 교회는 그 표현이다. 달리 말해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고 교회는 우리가 살아내는 생활이다. 교회는 우리의 매일의 생활이다.

 

4. 니 형제님의 사역에 관한 간략한 개관

1) 그의 급우들에게 복음을 전함 - 고등학교 전체 학생 150여명이 구원받음

2) 초창기 출판물 - 1923년 부흥보, 1925년 기독도보(월간지)

3) 상해 교회 생활의 개시와 니 형제님의 형제회 접촉 - 1926년부터 상해 교 회 시작, 1933년 영국 방문

4) 이기는 자 집회 - 1928, 1931, 1934년 그리스도의 중심성과 우주성

5) 1935년부터 1939년까지의 니형제님의 사역 -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발간, 1938, 39년 런던 및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방문

6) 니 형제님의 일생 중 가장 전략적인 사역 - 1939년 상해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메시지 해방, 이후 몸에 관한 교통을 가장 전략적으로 사역함

7) 니 형제님에 대한 배역 - 1942년 상해교회의 소요, 6년간 사역을 멈춤

1945년 ‘교회의 정통’ 해방

8) 니 형제님의 사역의 회복 - 1948년

9) 6개월 훈련 - 폭발적인 부흥을 가져옴(청도에서는 하루에 700명을 침례줌)

10) 공산당의 점령 전에 책들을 출판함 - 1951, 52년

11) 투옥 - 1952년 4년형, 1956년 15년형, 1972년 별세

 

5. 니 형제님이 고난을 통해 배운 영적 고난들

1) 궁핍을 통해 믿음의 삶을 살기를 배움

그는 선교회나 교파, 또는 사람에게 고용되어서는 안되며 생활 가운데서 순수하고 단일하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을 훈련했다. 니 형제님은 중국 전체에서 이런 길을 취한 선구자 였다.

2) 질병을 통하여 주님을 의지하고 부활 생명을 살기를 배움

1924년 결핵에 감염되고 1929년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으며 위장병과 심장병을 함께 앓았다. 그는 집회 전에도 말씀을 전할 때까지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으며 집회 후에서도 즉시 집에서 누웠다. 그러나 그는 나쁜 건강으로 인해 오히려 주님을 의지하는 법 곧 부활 생명을 사는 것을 배웠다.

3) 기독교의 핍박으로부터 배운 영적 공과들

① 멸시 당함으로써 주님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기를 배움

② 비평받음으로 육을 처리하기를 배움

③ 반대를 받음으로 동기에 있어서 순수하기를 배움

④ 대적자와 핍박자의 악한 보고를 통해 자신을 변호하지 않기를 배움

⑤ 주님의 변호하심

 

6. 니 형제님의 사역의 초첨 - 교회를 위한, 생명이신 그리스도

오늘날 많은 출판사들은 니 형제님의 책들 중에 그리스도가 생명이심에 관한 면만을 다루고 교회의 실행적인 면은 출판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이상은 다만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회를 위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라고 말했으며 이러한 그의 관점을 변경하지 않았다. 니 형제님의 사역의 초점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의 건축을 위한 생명이신 그리스도였으며, 우리도 이 초점에서 변하지 않았다.

 

7. 형제 자매들로부터 받은 고난

1) 부당하게 추방됨

2) 이견을 가진 자들로부터 온 고난

3) 사람들의 미성숙과 무능으로부터 온 고난

4) 사람들의 지위에 대한 야심으로 인한 고난

5) 형제 자매들의 배역으로부터 온 고난

6) 반대자들로부터 악한 이름과 불명예의 고난을 겪음

7) 그의 결혼에 관련된 고난

8) 성도들 안에서의 배역으로 인해 6년간 그의 사역이 멈춤

 

8. 니 형제님의 사역

1) 계시와 고난에 의해 산출된 사역

2) 은사와 사역의 차이

3) 니 형제님의 사역의 두 방면 - 그리스도와 교회

4) 니 형제님의 그리스도에 관한 사역은 수용되었으나 그의 교회의 실행성에 관한 사역은 거절되었음

 

9. 우리 가운데 있었던 네 차례의 부흥

1) 구원의 확신에 관한 부흥 - 1923년

2) 그리스도의 이기는 생명에 관한 부흥 - 1935년

3) 교회의 실행성에 관한 부흥 - 1942, 43년

4) 니 형제님의 사역의 회복을 통해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부흥이 우리 가운데서 일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