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 설령 인류의 역사의 의미를 알고 있다고 해도 세상의 정세와 하나님의 움직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사실상 세계정세는 바로 하나님의 안배하에 있다. 이것은 성경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에 있으며 주전 753년에 티베르강에 인접한 일곱개의 언덕위에 세워졌다.로마 황제들이 살던 왕궁이 위치한 팔라티노 언덕과 유티테르 신전이 있는 캄피돌리오 언덕 로마광장을 중심으로 첼리오 언덕 에스퀼리노언덕 비미나레언덕 퀴리날레 언덕이다.
오늘날의 팰리스는 로마 황제들이 살던 언덕 팔라티노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팔라티노언덕아래에는 영화 벤허에서 볼수있는 전차 경기장이 있다.
교회사에서 로마는 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다. 믿는이들 수 많은 순교자들이 복음과 진리의 전파를 위해 흘린 피와 땀으로 얼룩진 도시이다.
전설에 의하면 로마인의 시조는 늑대젖을 먹고 자란 두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의해서 세워졌다고한다. 로마도 로물루스라는 이름에서 유래 되었다고한다.
(행28:11절 우리는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났는데 그 배에는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의 모양이 새겨져있었다.)
주전 509년부터 60년 삼두정치(카이사르.폼페이우스.크라수스)가 시작되기 전까지 로마는 공화정을 시행하였다.주전 54년에 줄리어스 시저는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평정하고 전제정치의 기초를 닦았다.
줄리어스 시저가 암살 당하고 조카이자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일어나 레피두스. 안토니우스 와의 2차 삼두정치를 마감하였다.
예수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 나시기 27년전에 원로원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아우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아 정식으로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로마 대 제국을 건설할수있었던 원동력을 보자. 영토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위해 점령한 땅을 식민지화 하지않고 속국화 하여 지배하였다. 수탈하거나 착취하거나 학대 하지않고 집정관을 두어 로마의 문화와 정치 경제를 받아 들이도록하고 지배한 지역에는 도로와 상수도를 설치하고 원하는 사람에게는 로마의 시민권을 부여하여 로마시민과 똑같은 지위와 특권을 가지도록 하였고 세금을 걷어 들이도록했다.
그리고 모든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유피테르 신전에서부터 시작하여 아피아 가도를 통하여 지중해 연안과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 까지와 북 동쪽으로 에스파냐(스페인) 갈리아 (프랑스)와 브리타니아(영국) 메소포타미아 까지 영토를 넓혔다.
(행28:15절 그곳 형제들이 우리에 관한 소식을 듣고 아피온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라는 곳까지 우리를 맞으로러 나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용기를 얻었다.)
고대 로마는 시멘트를 발견하여 석회암 대리석을 사용하여 웅장한 건축을 할 수 있었다. 로마시대의 수로 건설은 놀랍다. 높은산에서부터 수로를 통하여 시민들이 물을 사용 할수있도록하고. 수천명이 동시에 목욕할수있는 목욕탕도 건설하였다.
도시의중앙에는 급수탱크시설이 되어있고. 그곳에서부터 물은세갈래로 나뉘어 귀족들과 공중목욕탕과 일반시민들의 가정으로 물을 공급하였는데 가뭄이들어 식수가 부족해지면 가장먼저 귀족집으로 가는물을 끊고.다음으로 공중목욕탕. 마지막으로 시민들의 물을 끊었다고한다.
주 예수님은 아우쿠스투스황제 통치기에 태어나셨다. 아우쿠스투스 왕정이후 로마는 안정된시기였다. 그러므로 이때를 팍스 로마나 곧 로마의 평화시대라고 부른다. 시대에는 언어가 통일되고 정치가 통일되었으며.상업이 발달하고 통상범위도 확대되었으며 치안도 안정되었다.
이렇게 세상이 통일된상황은 복음이 확산되는 편리성을 제공하였다.
우리는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경륜과 깊은관련이 있음을 보아야한다.만약 하나님께서 로마제국을 일으키지 않으셨다면 알렉산더가 남긴 지중해 연안의 수많은 나라들이 분열되어 요동과 불안으로 통일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랬다면 성경의 예언대로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에 호적신고를 명한것이나.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리라는 예언도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언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로마제국은 주님께서 오시기 72년전에 스파르타쿠스난을 통해 붙잡힌 포로들을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에 매달아 처참하게 죽였고 그 십자가의 행렬은 수십리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로마제국으로 인해 통일된 언어와 온땅으로 통하는 도로와 안정된 치안을 가졌기 때문에 국경을 넘는것이 성의 경계를 넘으면 되는 것처럼 쉽게되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볼때 로마제국의 패권을 위한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복음의 개척을 위해 사용하신 것이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볼때 일반인들처럼 수 많은 자료를 갖고 결과을 알수없는 원칙과 노선으로 임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하나님의 경륜의 노선에 따라 역사를 연구해야한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것은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완성된사역을 확산하기 위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한것임을 보아야한다.
A.하나님의 자녀들은 대체로 영을 사용하는 데 게으름
1.우리는 영을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게으르고 나태했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을 사용하는데 게으른 상황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하루종일 밖에서 뛰어놀며 공놀이 하는 것은 피곤하다고 느끼지 않는데 조용히 공부를 하라고 하면 원하지 않는 것과 같다.
2.우리는 영을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시간을 들여 신문을 보거나 한담을 하거나 다른 일을 하지만 기도는 기꺼이 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도는 영을 사용해야 하는데 우리의 영은 항상 게으르고 움직이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3.많은 이들의 영은 아주 게을러서 그들이 일할 때는 참으로 부지런하며 힘이 있지만 일단기도하게 되면 아주 게을러져서 영의 감동이 극히 적다.이것은 바로 그들이 원래 영을 사용하는데 게으르고. 기꺼이 영을 사용하여 더 많이 기도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B.영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주님께 결례를 범하는 것임
1. 만일 우리가 영안에서 게을러서 영을 잘용하지않는다면 주님께 엄청난 결례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그분은 영 안에서 경배하는 사람들을 찻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영 안에서 그분과 서로 교통하기를 갈망하신다.
2.우리가 봉사하는 데 열심이고 지체들을 심방하는 것도 열심이며. 많은 일에 있어서 열심이 있지만 영에 있어서만은 열심이 없고. 주님을 흡수하고 누리는 것이 부족하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진 목적에 도달할수 가 없다.
3.심방하는 일에 있어서 집회에서도 우리는 영을 사용하지 않고 많은 활동들이 영의 느낌도 영의 운행도 그다지 많지 않아서 사람들이 만지는 것이 의문과 형식에 불과하다. 이러한 결례는 다 우리가 영을 사용하지 않거나 기도가 부족하거나 기꺼이 우리 자신을 열어서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C.능동적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들임
1.우리는 잘못된 관념을 바꾸어야 한다.우리는 주님을 경배하고 누리는 것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말로 그러한 결례를 성령께 책임을 돌리며 성령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영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상당히 잘못된것이다.
2.성령의 감동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관념은 성령께서 능동적인 위치에 처하고. 우리는 수동적인 위치에 처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이해 하려면 반드시 몇가지 일들 즉 하나님이 우주 가운데서 이미 이루신 일들을 알아야한다.
a.성령은 이미 흘러나왔다. 반석은 이미 갈라졌고 성령께서 이미 생수처럼 흘러 나오셨기 때문이다.
b.성령께서는 이미 내려 오셨다. 성령은 오순절날에 강한 바람과 불꽃같이 내려오셨다.
c.성령은 이미 우리의 영안에 계신다.
3.이상의 세 가지 엄청난 일의 성취로 인해 주님은 우리를 위해 이루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주님께서 일하시기를 기댜려야 하는가. 여전히 성령께서 우리를 감동 시키셔야 하는가. 절대로 그럴필요가 없다.
4.오늘날 우리가 성령의 불어오심을 얻으려면 수동적으로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능동적으로 자신을 열어야한다. 일단 열기만하면 그분은 반드시 들어 오실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기다리지만 성령은 오히려 우리가 열기를 기다리신다. 오늘날의 문제는 성령께서 감동시키시는지에 달린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꺼이 여는지에 달려있다.
5.하나님의 크신 은혜는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를 돌본다. 그분은 성령으로 실제화 되시어 우리안에 거하시면서 우리의 제한을 달게 받으셨다. 일단 우리가 움직이면 성령도 감동하신다. 만일 우리가 움직이지 안는다면. 성령도 감동하실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지금의 문제는 그분이 주시느냐. 주시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분께 어느정도 까지 일하시게 하느냐의 문제이다.
6.우리가 부지런히 능동적으로 일어나서 우리의 영을 훈련하고 우리의 영을 사용해야만. 우리의 영 안에 사시는 셩령께서 반드시 우리를 따라서 그분의 무한하신 풍성과 무궁한 능력을 표현해 내실 것이다.
갈대아우르는 우상이 가득한 곳이고 이집트는 세상적인 부와 쾌락이 가득한 곳이며
소돔은 죄가 가득한 성이다. 롯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갈대아 우르에서 나온 다음
하나님의 한 사람으로서 아브라함과 함께 가나안땅에 거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하게 된이유는
하나님의 증언과 증거를 지닌 아브라함과 헤어졌기 때문이다.
창세기 13장에 나온 아브라함과 롯의 다툼에서 아브라함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롯의 마음속 깊은 곳이 상했으리라 믿는다. 여기에서 나는 인도하는 형제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형제들을 다루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아브라함은 롯을 다룰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앗지만 다만 그가 다루었다는 이유 만으로 롯은 결코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결코 롯을 잊을 수 없었다. 롯이 그돌라오멜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듣고 아브라함은 왕들과 싸워서 롯을 구출했다.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하시려는 것을 알고 아브라함은 롯을 위해 중보기도했다.
창세기 19장27절과 28절에서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소돔과 고모라를 보았다. 이것은 그가 롯을
매우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롯은 상한 감정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다.
소돔성에서 구출 받았을때 롯은 아브라함에게 돌아갈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만일 롯이 돌아왔다면
그의 삶은 그렇게 비참하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청년 형제자매들이 주님안에 연장한 세대와 의견을 달리하여 그들을 떠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말씀에는 롯이 포로된상태에서 구출된 것으로 인해 아브라함에게 감사했다는 암시가 없다.
이것은 롯이 마음상한 것을 버리지 않고 겸손하지도 않았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그러한 인간적인 감정을 계속 붙잡고 있어서는 안된다.롯과 달리 우리는 겸손해야 하고 체면을 주의 하지 말아야하며 아브라함에게 돌아와서 함께있어야 한다.
더 빨리 더 많이 이렇게 할수록 좋다.
롯은 하나님앞에서 사악하고 죄 많은 상태로 떠내려 갔다.일단 영적인 영향력의 근원에서 떠날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하락하게 된다.
소돔에 대한 하나님의심판을 집행하기 위해 두천사가 왔을때 롯은 천막 문에 앉아 있었던 아브라함과는
달리 성문에 앉아있었다. 구약의 관습에 의하면 오직 지도자들에세만 거기에 앉을 특권이 있었으므로
성문에 앉은 사람은 누구든지 지도자 들중 하나였다. 롯은 소돔의 지도자 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