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적인 죽음을 요단강으로 간주하고 가나안 땅을 하늘나라고 간주한다.
이러한 관념은 성경의 대한 합당한 이해와 완전히 다르다.
아브라함의 시대에 가나안 땅은 그가 살아갈 장소였다. 따라서 땅은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곳이자
살기 위한 필요한 장소였다.
더욱이 아브라함시대의 땅은 하나님의 모든 원수를 패배시킬수 있는 곳이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땅에서 왕국을 얻으시기 위해서 그땅의 원수들을 몰아내야 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통하여 가나안땅의 모든 족속들을 몰아냈고.
결국에는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졌고. 하나님의 성전이 건축되었으며.
하나님의 왕국이 나타났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의 축소판이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생존과 는 전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사실상 땅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성경의 예표에 따르면 땅은 하나님의 백성이 안식하는 곳이자
하나님께서 그분의 모든 원수를 멸하시고 또한 그분을 표현하고 대표할수 있도록 그분의 처소가 있는
그분의 왕국을 세울수 있는 장소이다.
땅에 관한 다음 항목들을 기억하기 바란다.
첫째 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안식할수 있는 장소이며.
둘째 땅은 하나님의 모든 원수를 멸할수 있는 장소이며.
셋째 땅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왕국을 세우고 그분의 처소를 건축하여 이반역적인 땅에서
그분을 표현하고 대표하게 하는 장소이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12절에서 할당된 몫이라고 된 헬라어 단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좋은땅 가나안을
그들의 유업으로 할당받은 것을 말한다.
바울은 구약에 있는 땅에 대한 기록을 배경으로 하여 이 단어를 사용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민인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들의 유업과 누림을 위해 좋은 땅을 주셨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좋은 땅에서 살면서 그 땅의 풍성한 산출물을 누렸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릴수 있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행동해야한다.
골로새서 2장 6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고 말하고.갈라디아서5장 16절은 그 영을 따라행하라고 말한다. 로마서8장4잘은 그영을 따라행하는 것을 언급한다.
이구절들은 우리를 위한 좋은 땅이 오늘날 우리 영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모든것을 포함하신 영이 되시어 우리의 영안에 거주하시면서 우리의 좋은 땅이 되신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처음 도착한 곳은 세겜이다. 거기서 그는 제단을 쌓았다.
아브라함이 도착한 두번쩨 장소는 벧엘인데 거기서도 제단을 쌓았다.
이후에 아브라함은 벧엘를 떠나 네게브사막을 지나 이집트로 갔다. 나중에 그는 이집트에서 남쪽으로
올라 왔고. 다시 벧엘로 돌아와 벧엘과 아이 사이에 머물렀다. 후에 그는 다시 헤브론 땅으로 내려가
거기서 제단을 쌓았다. 아브라힘은 이 세곳에서 제단을 쌓았다.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이세 장소 곧 세겜과 벧엘과 헤브론을 사용하셔서 가난안 땅을 예표하게
하셨음을 보여준다.
이 가나안땅은 모든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좋은 땅을 대표한다.
원문에서 세겜은 어깨또는 능력을 의미한다. 가나안땅의 첫번째 특징은 능력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가나안땅에 있다는 뜻이다.
창 12장 6절에서 아브라함은 그땅을 가로질러 세겜땅 모레의 상수리 나무가 있는 곳까지 갔다. 라고 말한다.
모레는 선생 또는 가르침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식과 관련된다.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세겜땅에 잇었다는 것은 지식의 능력이 나오고 지식은 능력의 결과 라는 뜻이다.
바꾸어 말해서 참된 영적인 지식은 그리스도의 능력에서 온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참된 영적인 지식을 갖지 못할 것이며. 사람들에게 영적인 어떤것을 줄수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세겜으로 인도 하셨을 뿐아니라 또한 벧엘로 인도 하셨다.
원문에서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다. 이것은 세겜(능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또한 벧엘이 있어야 한다. 능력있는 모든 사람이 유용하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집과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 하고
몸의 생명을 보아야 한다.
몸의 생명을 알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은 우리의 천막을 벧엘과 아이 사이에 치는 것이다.
몸의 생명을 아는 것은 벧엘의 문제만이 아니라 아이의 문제 이기도 하다.
아이는 원문에서 붕괴의 무더기 황폐한 무더기 이다. 이것은 옛 창조물을 가리킨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향하려면 반드시 황폐한 무더기를 등져야 한다. 바꾸어 말해서 육체의 생명이 처리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리스도의 몸을 알수없다.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하나님께 처리를 받은 후에만.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을 살아나타낼것이다.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이 될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이삭이 될수 없기 때문이다.
이삭의 체험이 없이는 아브라함의체험을 가질수 없다. 또한 아브라함의 체험이 없이는
이삭의 체험을 가질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버지 이시며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보아야 하고
또한 그분의 아들인 우리의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왔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물려받은 아들의 생명도 그분에게서 온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받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구원도 다만 받은 것이요. 승리. 의롭게 됨. 거룩하게 됨도 다만 받은 것이다.
죄들의 용서도 해방도 다 받는 것이다. 받는 원칙이 바로 이삭의 원칙이다.
우리는 할롈루야 할렐루야 라고 외쳐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 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할뿐아니라. 아들이신 그리스도도 알아야 한다.
아들이신 하나님은 어떤 의미를 갖고 계시는가.
그분은 모든 것을 받으셨고 어떤것도 시작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목적을 본다. 그리고 이삭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본다.
아브라함에게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을 보며
이삭에게서 우리는 하님의 백성의 그 수준에 도달하는 것을가능하게 해주는 생명을 본다.
많은 그리스도인 들의 한가지 근본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잇다.
즉 하나님의 목적은 보았으나 하나님의 공급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표준은 보았으나
하나님의 생명은 보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요구는 보았으나 그 요구를 이룰수 있는 능력은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을 보아야 할뿐아니라 또한 이삭을 보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