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할수없음과 무능함때문에 그 어느때 보다 맥빠지는 이즘입니다.
이렇게 무력할 뿐인 사람이
감히 전능자의 원수로 살 자격이나 능력이 있을까 ..흥...
서로 쨉조차 안되는 대결이지 않을까....
사실 원수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는 거창한 원한을 가질 만한 일이 있을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을 대적해서 무슨 큰 음모를 꾸미거나 행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원수는 자신의 배를 위해서 살며 땅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원수들이겠죠.
그들 각각 자기의 밥그릇과 자기의 형통과 발전과 지위와 권력과 부를 위해 싸우고 있는.....
그것을 위해 최소한의 인간적인 양심마저도 눈감아 버리는...
그렇다면 교회안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원수는 아니지만
(신분세탁을 했기에)
교회들 안에서
지방교회안에서
대지역에서
또는 그나마 소지역에서라도?
지위와 권력과 입지와 명성을 추구한다면....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는 것일 겁니다.
- 꿈의 소풍을 떠나 부디 행복하여라 -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야속한 시간만 흘러가고
그렁 - 한 눈망울만이 저 검은 바다를 응시할 뿐
제발 꿈이라면 좋겠어 숨죽인 기도의 노래도
부서지는 파도를 따라 아무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려
기적을 바랬지만 생명을 원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 없는 꽃이여
천국이- 있다면 천국이- 있다면
꿈의 소풍을 떠나 그곳에서 부디 행복하여라
미안해 꿈의 소풍을 떠나 부디 행복하여라
마지막까지 불렀을 이름 엄마... 엄마
다가온 절망의 그림자 끝내 오지 않는 삶의 끈이여
기적을 바랬지만 생명을 원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 없는 꽃이여
천국이- 있다면 천국이- 있다면
꿈의 소풍을 떠나 그곳에서 부디 행복하여라
미안해 꿈의 소풍을 떠나 부디 행복 하여라
우리가 오해하는 것중의 하나는
혼을 부인하는 것이 혼의 기능을 저하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혼 생명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의 유익과 명성과 왜곡된 관념에 집착하는 것에서
그리스도로 돌이킴을 의미하는 것임에도
왜 이런 오해가 생겼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건 아마도
생각 = 의견= 옳고 그름을 따짐임.....
이라는 공식으로 여기는 오해내지 착각때문일 것입니다.
이를테면
회복안에서 흔히 교통되는
그냥 양무리안에 속해서 함께 움직이면 돼라는 슬로건대로 행하면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믿는 이가 온전케 되려면
즉 충분히 성장하려면
어떤 것을 생각해야하는데
그 생각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을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생각을 품는 것에
촛점을 맞춘 생각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활발한 주도적인 움직임입니다.
그 움직임은 심지어 상당한 개별적인 차이를 가져옵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바울처럼 다른 성도들보다 상대적으로 온전게 된 사람이 있는가하면
나름대로의 각각의 성숙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친절하고도 자상한 주님은
각각의 상태에 따라 역사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촛점을 맞추도록
각각 계시하여 주신다고 합니다.
속절없이 꽃은 또 피고...
갈길은 하염없이 끝도 안보이고...
사도바울같은 형제님도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고 하시니
..................................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뜻으로 알아야하는건가...
아님
피차 멀기는 마찬가지니
때로는 넘어지고 실패하고 막막해도 포기하지말고 또 돌이켜 일어서란 뜻인지....
바울은 디립다 자신의 출신성분과 학력과 집안을 자랑하다가
(잘난척하는 너희들보다 내가 못하지 않거든?)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겐 배설물이다,
즉 똥이다라고
직설화법을 씀으로
극적효과를 보려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을 버렸나하는 것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 발견되는 것이
얼마나 더 가치있는 일인가를
보이기 위해서 ..................
사람이 사는 일이라 그리고 또 그 사람들이 모여 말하다보면
어느 학교를 나왔는가
어떤 직장에 다니는가 등등의 정보교환을 교회에서도 하게 됩니다.
혹 그런 정보들이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근사하게 보이게 하거나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하찮게 보이게 하거나
하지 않길 바랍니다.
어쩌면 바울보다 더 좋은 배경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혹은 바울보다 못한 배경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우린 진심으로
그 모든 것이 똥이다라고 말할 수 있길.....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들이
참 할례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 가치를 잘 알지 못한다면
참되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
이 참 할례는 밖으로 근사한 모양도 별로 내세워 보여줄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목소리 크게 나에게 참된 할례가 있다라고 증명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바울역시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바울은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참이 아닌 할례파들은
육체에 할례의 표식을 갖는 물질적인 할례를 내세울 뿐 아니라
가장 정통적인 유대교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가장 엄격한 유대교의 전통과 가르침을 이어받았으며
실제로 얼마나 율법준수를 철저히 지켰는가등등을
내세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이것이 회복의 어떠함과 근사한 외양을 갖고 있는 기독교의 차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저 야리한 깃발은 중국단체여행객의 깃발이고 ..아마도 가이드는 조선족? 과거 굶주리고 희망없어 보이는 조선을 떠나 남의 나라 땅에 정착한 이들은 떠나온 나라덕에 후손들이 득을 볼지 알았을까?
소식인 두 사람이 가볍게 먹기에 딱 좋은 양에...가격도 그만하면 착한....
이태리 피자를 먹었다면 후식은 우리나라 단팥죽 추천이요~! 가격이 싼 편은 아니지만 워낙 비싼 커피값보다는 질로나 양이나 훨씬 득이 되는..
주의 회복은 그동안 주님의 자녀들이 잃어버린 많은 실행들은 회복해 왔습니다.
이를테면 주님의 이름을 호홉하기, 말씀을 기도로 먹기 같은 것들이 있지만
그중 영의 느낌을 따라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신언하는 모임의 회복이야말로
회복의 실행중 백미중의 백미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온전치 못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여전히 우리는 온전히 그 영의 느낌을 따라 행하는 대신 일정한 형식적인 순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언제 떡을 떼고 언제 신언하는 시간을 갖는 등의 순서의 틀을 지키는 것과
신언집회의 시작시 이미 정해진 말씀을 여는 분이 있고 더하여
집회 종료할 무렴 말씀을 마무리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형식이
대부분의 회복의 모임형태일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집회에서 교통되는 말씀들이 삼천포로 빠지거나 결론이 없이 흐지브지 끝나는 것보다는
안전한 대비책을 마련하려는 인간적인 염려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임재와 그영의 운행과 움직임을 신뢰한다면
누가 더 영의 감동을 받아 먼저 교통을 시작할는지
혹은 성도들의 신언에 덧붙여 마무리할 교통할 부담을 갖게 될는지
우리는 아지 못한 채 모이는 것이 가장 합당한 모임의 형태일 것입니다.
.
한때 레슬링이 무지 인기인 적이 있었습니다.
코피가 터지고 눈가가 찢겨지고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는 것등이 보기가 무서워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도 여전히 티비앞에 앉아있었던 것은
착하고 어질고 핍박받음을 상징하는 쪽이 내내 얻어 터지기만 하다가
역전의 박치기를 해서 상대를 제압하고 두손을 번쩍드는 승리의 순간을 함께 맛보는
짜릿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그것이 모두 짜고 치는 고스톱같은 정해진 각본이란 것을 알고 김이 빠져버렸었지요....
사실 신언집회를 하다보면 문득 발견하게 되는 것이
교통하는 분만 계속 교통하고
남은 분들은 주로 듣기파트를 담당하게 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신언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신언하는 집회와 신언하지 않은 집회가
어떻게 남는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알게 됩니다.
집회의 주 멤버가 되어 신언을 할 뿐 아니라 모든 지체들의 교통에 진지하게 듣고 공감하는 열렬지체는
마치 월드컵 4강진출의 결정꼴을 꽂는 희열을 맛볼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다 집회의 방관자로 전락해 버리는 날에는 잔치에 갔다가 전 한쪽 집어먹지 못하고 돌아온 뒤의
허전한 느낌이 뭔지도 알 것이고.....
반면에
그냥 편하게 앉아서 듣는 쪽이 속편하다고 생각하는 지체는
일어나서 말해야한다면 가슴 떨리고 불안하고 게다가
혹 신언이 아니라 실언이 될까 차라리 중간이나 가야지 하면서
입다물고 있는 쪽이 있을 것이고....
...................
해서 모두가 신언하도록 하기위해
일정한 분들에게 미리 신언할 부담을 지워서 신언을 하게 정하자~하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실행이 야기하는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언하도록 정해져 있고
어떤 분들은 관객이 되어 팔장끼고 구경하는 역활이 되어 참가하는
...............
만약 우리의 모임이 이렇게 짜여진 각본대로 한다면
그 집회는 과연 참가한 모든 사람이 즐길만한 신나는 한판의 장마당이 될 수 있을지 ,
혹은 누구에게든 보이기 위한 혹은 스스로 만족하기위한 쇼우가 되고 말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 어찌하여야 하겠는지요?
예전에 이상수형제님의 집회중..
.형제님은 가능하면? 비행기를 타는 것을 꺼려하신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는 피식 웃으며 너무 지나치신 염려증?이 아닐까 했지만
살다보니 피할 수 없는 고의적인 사고유발과 함께
안전블감증과 부주의로 인한 크고 작은 사고들이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거기다 대책없는 공권력의 횡포와 무책임아래 놓여지면,
결국 내 몸은 내가 지킨다라고 꽁꽁 다짐할 수 밖에 .....
그래서인지 건물안에 들어가면 비상구가 어디인지 통로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부터 한다는
우스개소리지만 무시할 수 없는 습관세우기도 필요하겠죠.
최근에 더 심각해진 것인지 아니면 새삼 문제제기가 된건지 이즘 미세먼지문제가 심각한데요.....
사실 정부가 미세먼지농도가 얼마라고 발표만하지
거시적으로 대책이나 원인규명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이런 환경에서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각자 알아서 잘 대비를 할 수 밖에요.
다른 건 할 여력이 안되어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집은 내가 지킨다~!라는 사명감으로
밖의 공기가 유입되는 곳 창문들 창틀등.. 대청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때 꼭 환기를 시키면서 해야하는 이유는
음식조리시 미세먼지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주부들이 폐에 관련된 질병을 앓게 되는 이유중의 하나가.....
해서 가스대위 환풍기를 떼어서 필터를 교체하면서 찌든 기름때를 제거하는 작업을 하는데 하루...
작은 유리창과 블라인드떼어서 물청소 하루...
창틀먼지 닦기하루...
흠...정말 누런 먼지가 아닌 까만 먼지가 켜켜 쌓여있는 것이.....
덕분에 아주 미세먼지를 통째로 더 흡입하고 있습니다. ㅠㅠ...
..................
어떻게 선장이란 사람이 승객들을 내팽개치고, 그것도 어린 학생들을 고의적으로? 가둬놓고 자기만 살겠다고 줄행랑을 치는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분을 내는 사람들 중에 그런 위기상황에 영웅적이고 헌신적 희생을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의심스럽습니다.
자기의 직업에 대한 숭고한 뜻이 없다면 세상일도 주님의 일도 함부로 행할 수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개들과 행악하는 사람들과 몸에 할례를 하는 것으로 경건하다고 멋을 내는 사람이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개나 행악을 하는 사람, 진리와 참된 거룩과는 거리가 먼 탐욕과 더러운 이를 좇는 사람 그리고 종교적인 외양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교회에 해를 끼치고 난 뒤에는 이런 저런 말을 해봐야 이미 때는 늦게 됩니다.
혹 치유가 된다고 해도 회복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
세월호도 미리미리 안전점검을 하고
특히나 선장을 임명하는 일에 있어 합당하였다면
어린 생명들이 억울하게 단명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말조차도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것은
모든 일에는 사후조처보다는
예방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인재에 의하던
천재에 의하던
대형인명사고가 일어날 때
사람은 그에 대해 각각의 반응이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크게 동요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저 왜?라고 물을 수도 있고
그저 남의 일이려니 무심히 지나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꽤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아주 잠시동안 물살에 휩쓸려 물속에서 허우적대본 적이 있는데
그때의 숨막힘과 단절의 극심한 공포의 느낌이 ..............
.
예수님의 성육신시절에도 예루살렘에 대형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깔려 죽는 일이 발생한 것인데,
주님은 그 사건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선과 악 심판의 관념 에 대해
일침을 가하셨습니다.
이상하게도 심판의 관념은 늘 자신을 향하지 않고 타자를 향하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누구에게나 임하는 피할 수 없는 일임을 강조하셨지만
그 말씀의 뜻은
모든 것에서 돌이키라
용서와 죄사함 구원을 주실 창조주에게...........
덧붙여
모든 것을 아시는 신성의 영역안에서 영적 시력을 통해
주님은 마지막때에 온 인류에게 임할 큰 재앙의 날을 보셨을지도...........
.
그리고
세월호의 참사에서 희생당한 영혼들에 주님의 긍휼이 임하셨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이삭을 순순히 제단위에 올려놓는 아브라함은
너무나 극적이고 너무나 영웅적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너무도 쉽게
나도 그렇게 할 수 있길..하고 소망합니다.
하지만
생떼같은 자식을 바닷물에 수장시킨 부모의 절규앞에서
자식이 죽는 꼴을 눈앞에 보는 것은
결코 타고난 사람의 힘으론 감당할 수 없는 고통임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심적 동요없이 이삭을 결박하여 단위에 놓은 아브라함의 마음상태는
확신과 믿음과 신뢰로 가득찼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삭을 다시 돌려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임을 믿습니다.
언젠가 먼 훗날....
하지만 아브라함은 즉시 혹은 잠시후라도 아들을 돌려주실 거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신뢰했을 것입니다.
결코 미신적인 착란현상이 아니라, 명쾌하면서도 고요한 확신가운데.....
우리중에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 체험적으로 아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나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안다라고 함부로 확신하면 안될 것입니다.
많은 광적인 미신들의 행위가 그렇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브라함의 그런 성숙을 사모합니다.
먼 훗날이 아니라 오늘날이라고 부르는 이 날들동안 부활을 체험하고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모든 영적 체험가운데
가장 극적이고 가장 최고봉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도달하기위해 거쳐야하는 많은 영적 정거장을 건너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세월호 사고의 문제점들이 들어나면서 분노와 슬픔과 경악등등을 금할 수 없네요.
특히 사람에 대해서...
하필 며칠전 다른 자매와 주방에서 일하다가 쿠르즈여행이 괜찮을까 묻길래
관리가 잘 된 배라고 할지라도 수영도 못하고 힘도 딸리고 배라도 침몰되면 나로선 대책없기에 절대 NO~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었는데..........
상상만해도 그렇게 무서운 시퍼런 물살위에 배를 띄우고 가면서도
안전점검도 비상탈출 메뉴얼도 없이
그냥 운항을 하도록 하고
그냥 운항을 하는 배짱은 무엇일까?
소유주나 관리들은 나는 그런 배 절대 안탄다.
선원들은 비상시 그냥 나는 탈출한다
라는 계산이 아니었을까?
사람이 사람에 대해 실망하고 절망하는 것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것은
때로는 하나님조차도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하시고
사람의 패역함이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일갈하시기도 했으니.....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자신의 동역자인 디모데를 보내어 교회의 상황을 살펴보게 하고 싶었으나
빌립보성도들은 자신들에게서 바울에게로 간 에바브로디도형제를 속히 보길 바랬습니다.
이때 바울은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요?
차량?에 딱 하나 남은 자리를 과연 누구에게 주어야할 것인가?..............
자기를 대표하여 대신 파견할 동역자를 지체하게 할 것인가
교회를 섬기는 어쩌면 그저 작은 집사에 불과했을 그러나 그의 병남으로 인해 교회가 근심하고
또한 간절히 보길 원하는 형제를 잠시 보류해 둘 것인가
바울의 선택은 빌립보교회 즉 빌립보 성도들을 위로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잘 먹어야 면역력떨어지지않는다고...
마지막으로 폐결핵완쾌 판정받으러 간 날 ...좀 몸무게 줄일까요?했더니 의사왈....다이어트 하지 마세욧~
그렇다고 마구 살찔 수도 없는 일.
그만큼 운동도 해야 건강관리에 좋습니다.
갈수록 육신적인 몸 관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
사는 건 참 귀찮은 일이 많다는 이상수 형제님의 어느날의 멘트가 기억나면서......
도대체 왜 사람은 태어났을까.......
만약 조물주가 있다면 이 땅은 무슨 목적일까 .............
등등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원론적인 질문을 누구나 한번쯤은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들은 신에게서 그 답을 얻게 되죠.
그러나 누구나 다 그런 목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는 성령의 능력을 얻기 위해
누구는 들며나며 모든 일에 형통하다가
더하여 내세의 복락과 영생을 위해
각각 말씀을 적용해 취합니다만,
회복안에서 우리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사람과 이땅을 창조하신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모든 은혜를 받게 하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이것외에 사람이 이땅에서 이루고 지향하는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들이죠.
물질문명 지식과 철학과 도덕과 교육 선한 운동들 가치들
지금 덕을 보고 있는 인터넷공간조차도 ............
피조물인 사람은 그를 만든 조물주가 제공하는 모든 은혜를 맛보고 얻고 누리고 담기위해 존재합니다.
참 멋진 일입니다.
그리고 피조물의 위치지만 감히 동의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비밀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다보면
누구는 소돔과 고모라 가까이 이주를 하기도 하고
교회생활속에서 주님외의 다른 것들 , 많은 일들, 행사들 눈에 보이는 실적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영적으로 되고자 스스로 만든 율법의 실행과 성격개선등을 주님과 대치시키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원래의 위치에서 벗어나 엇나갈 수 있습니다.
그럴때
자신이 엇나가고 있다고 느낄 때
언제든 어떤 상황에서든
즉시
주님에게로 돌이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돌이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것에 있어선
사람과 사람사이
사람과 물건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에 대해선
사실 뻔뻔스럽거나 변명을 해서는 안되지만
책임도 지고 자숙도 해야하지만
돌이켜 주님을 은혜로 얻는 일에 있어서는
스스로 자책하거나 일정한 자숙의 시간을 갖는 등으로 해서
힘이나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피의 효능을 즉시 적용하는 것은
선택이나 권리일 뿐 아니라
오히려
의무임을
절대로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위해서
주님이 그렇게 힘들게 피를 흘리셨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도록 그 피는 우릴 대신해 변명합니다.
엇나간 모든 것에서 돌이켜 씻음을 얻고 주님의 은혜를 취할 수 있도록
언제든 어떤 경우에든
그 피의 효능과 가치를 깨닫고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은혜를 취하는 첫걸음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는
로마의 감옥에서 빌립보성도들에게 그를 대신해서 믿고 보낼 사람이
오로지 디모데라고 한 바울의 말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디모데는 어떤 의미일가?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추구하는 것과
다른 생각이나 목적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의 교회의 상태를 진실히 생각하는 것과
자신의 일을 구하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일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
바울과 동일한 마음과 목표를 갖고 있는 동역자.............
인간적으로는
믿음과 신뢰와 친밀함으로 연결된 마치 아버지와 아들같은 관계......
대전의 어떤 주택 담장에 라일락 향기가 진하게 날리던 날
사실 저희는 딸 내외를 집회에 연결시키기 위해 갔었습니다.
이 날을 위해..
여러 날동안 모색하고 많이 긴장하고 기대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긍휼로 모든 것이 잘 안착되었습니다.
감사드리며....
차라리 못먹고 못입고 할 때는
기쁨이란 현실적이고 가까이 잡힐 수 있는 목표처럼 보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전보다 먹구살만하고 삶의 기쁨을 즐길 여유가 어느 정도 있음에도
이즈음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들은 기쁨을 예전보다 더 잃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이 세대는 기쁨을 상실한 세대입니다.
여전히 기쁘지 않고 아니 기쁨이란 것이 더 멀리 달아난 것처럼
느껴지는 이 세대의 문제는 .........아마도
이땅에 속한 기쁨들은 참 기쁨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사람,
조만간 참수 당할 처지에 있는 한 사람,
그는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순교당할 기회가 주어진 것을
자신도 기뻐할 뿐 아니라
교회안의 모든 성도들도 그와 함께 또 기뻐하길 바랬습니다.
마치 축제처럼
아니 하늘에 속한 절기를 누리는 것처럼.............
하나님에게 기쁨을 드리는
즉 하나님에게 전제로서 드려지는
의미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비밀스런 어떤 순간에 바울은 그런 확증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남은 성도들도 기뻐하고 또 소망을 갖길 원했습니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바울은 목을 잘리는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교수형을 당하는 사람이 없지만 당시에는 일반적인 사형법이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던 바울은
자신이 언젠가 이런 식으로 죽을 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런 자신의 죽음이
장막에서 드리는 모든 제물위에 붓는 전제물이 될 것임을
....................
담담히
그리고
담대하게
예언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끔찍한 참수형이나....
주님에게는 그분의 기쁨을 위해 붓는 포도주가 될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