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배추 당근 브로콜리 토마토는 끓는 물에 살짝 삶고 삶은 물과 바나나와 사과의 기본재료에
약간의 감칠맛을 위해 블루베리몇알(다른 과일 설탕 혹은 소금약간) 넣고 믹서기에 갈아 마시는........
이미 작년에 유행했다고 하는 해독쥬스!
새삼 홍보?하는 것이 멋쩍지만 천기누설?하는 맘으로 권하고 싶은 해독쥬스!
사실 맛이 그다지 땡기는 건 아니었기에(너무 순하고 밍밍해서) 만들어봤자~
팔릴 거 같지 않아 유보해 두었던 해독쥬스!
하지만 다른 것도 문제지만 위장장애가 장기화되자 어린이 입맛?인 남편도
출근시 싸주는 해독쥬스를 군말없이 해치우고 오고
덩달아 저도 남은 쥬스의 처리?를 위해 한모금 맛본 느낌은
아 위가 참 반가워하네~란 느낌이네요.
편안하고 든든한 느낌~이랄까...
이 세상에 많은 아픔과 병이 있지만 제일 고통스럽고 제일 먼저 건사해야할 것은
위장장애가 아닌가 싶습니다.
발목이 부러지고 발가락 뼈가 금이 가도 잘먹고 잘 소화시키면 즉 위가 편하면
낫는 건 시간문제~
하지만 소화가 안되면 , 문제가 커집니다.
여기서 새삼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은 너무나 흔한 재료로도 충분하도록 공급하신다는 것이며
몸에 좋은 것을 공급하기 전에 몸의 독소를 빼어 내어야하는 것이 먼저이며
그리고
사람은 절박할 때야 비로소 낮아지고 가난해지고 열려진다는 것~!
영적인 것도
왜 환경이 있는가?
왜 공급이전에 제해버림이 있어야하는가?
부활전에 십자가를 거쳐야하는가?
는.................
이론적으로 주님을 불러 영적 호흡을 해야하고
말씀을 먹고 주님을 누림은 알고는 있지만,
절박해질 때까지는
행하지 않는다는 것.................
어떤 어린아이가 "할아버지 코는 왜 그렇게 못생겼어?"라고 해도
아이의 단순하고 꾸밈없는 마음을 헤아리기에 마음 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른이 같은 연배의 사람에게 위와 같이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단순하고 꾸밈없는 사람이야라고 하기는 커녕
누구누구는 무례하고 함부로 말을 내뱉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른이 되면서 안과 밖이 다르고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지양해야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배려하는 것이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배려하면서도
순전하기, 즉 단순하며 정치적이지 않고 꾸밈없이 순결하고
뭔가 계산하여 혼잡한 상황이 되지 않기가 쉽진 않지만
어그러지고 비뚤어진 세대가운데서 흠없는 자녀들이 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좀 덜 나이가 들었을때 상대적으로 나이가 든 분들,
연세드신 분들의 마음안에 있는 원망과 시비
한국적 표현으로 빌자면
분노와 원망과 한이 가득 배인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살다보면 좀이라도 있었을법한
좋은 일 , 감사한 일들은 다 공중에 날려버리고
섭섭한 일 원망스런 일들은 꽂감 꿰어놓듯 줄줄이 엮어놓고
한알씩 한알씩 빼어 곱씹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소망이 없다면
그렇게 될 수 밖에
그런 것 밖에 남지 않는 곳이란 걸 알게 됩니다.......소망이 없다면
반대로
참된 소망이 있다면
원망과 시비는 다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꼭 우리 소지역만한 숫자가 모이는 공주교회..........역사깊고 고즈녁한 분위기의 공주.............
시간이 많았다면 아이들과 자주 찾았던 명승고적지를 둘러볼 기회도 있었다면 금상첨화겠으나
그저 집회만 참석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너무나 충분히 의미가 깊었습니다.
공주교회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신언집회먼저 그리고 떡을 떼고 바로 이어 말씀읽기와 묻고 답하면서
추구하는 모임을 잠깐 갖는 것이었습니다.
참 즐거워 보이죠?
말씀을 함께 나누는 것에서 기쁨을 얻기....
이런 저런 상황으로 다치는데 일가견이 있는..........
모니터화면대로 열심히 집중해서 운동했거나 혹은 산만하게 따라했거나 둘중의 하나.........
아무튼 다리를 휘두르다 발가락을 탁자 모서리에 부딪혔는데
첨에 그냥 아 아프다 정도였는데 시간이 쫌 지나니
퍼렇게 부어오르고 바닥을 딛으면 통증이 ..ㅠ
문득
철판대고 못질하고 기브스에 휠체어에 목발에 6개월이상 걸렸던 발목골절의 악몽이...흑
글고
병원에 가면 거의 대부분 반깁스에 목발에 처치를 당할 생각을 하니.. 끔..찍...
그래서
별거 아닌척하고?? 한달이상 (뭐 약간 금가면 한달이나 한달 반정도 걸린다고들 하니깐) 붕대로 쳐매고
살게 되었는데요,
그저 발가락 하나 쫌 부어올랐을뿐이고 걷는게 좀 불편할 뿐인데
손해막심한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제 담주에는 오래걷는 산책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지만...
조그만 발가락이 문제가 생기면 몸 전체를 지탱하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새삼 발견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발가락같은 지체의 기능이 얼마나 중요한지
어쩌면 대부분 실감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눈에 띄고 기능이 큰 기능을 주목하기 쉽지만 몸을 지탱하고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발가락같은 지체의 기능을...
다른 지체도 중히 여기지 않고 자신도 비하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마치 부상당하고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서 몸 전체의 건강이나 기능에 문제가 생기게 하는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곷과 화염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거창한 임재로 인해
두려워하며 벌벌 떨었습니다.
피조물이란 존재는 참 ..누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나마
지킬 것도 많고 밖의 성전에 드려야할 것도 많은 율법시대에
태어나지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할까요.
그 시대에 운좋게 택함을 받은 백성들 사이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많은 규례와 제한과 번잡스런 모든 일들 앞에 손을 들고 포기할 수 밖에 없으며
결국 구원과는 담을 쌓아야할지도 모를일입니다.
하지만
먹고 마시고 누리는 것외에 어떤 요구도 없다고 하는 신약시대에도
교회생활을 하는 것은 그다지 녹녹치 않은 번잡스런 일들이 많음도 사실입니다.
물질적으로나 육신적,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게다가
교회생활하다보면 즉 수동적으로 집회에 같이 흘러가다보면 어느날 구원을 절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공과를 통과해야한다고 합니다.
곰곰 생각해보면 구약시대보다도 더 까다롭고 더 통과하기 힘든 애매하고 미묘한 상황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시대가 아닌 신약시대에 있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전체적인 조망이 열려있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피조물의 위치가 아니라 동역자의 위치로서 능동적인 분깃이 있기 때문이지요...
2014 눈오던 날 (페인터 13으로 작업)
이 세상에서 소위 갑이 아닌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손해을 보고 무시당하는 자신의 억울함을 누군가 알아주기라도 바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자신의 일이 가치가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면
궂은 일을 하더라도 살아갈 힘을 얻을 것입니다.
현실은 어떻습니까?
소위 잘나가는 갑들이 세상에서도 권세를 부릴 뿐 아니라
많은 예배당에서 높힘받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주의 회복안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지위와 부귀의 위치나 자신을 내세우는 목소리 큰 사람보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장점을 감상하고
다른 지체가 이룬 영적인 진보에 기뻐하며
낮아진 주님의 본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들의 세상적 지위와는 상관없이 귀히 여김을 받고
남은 사람들의 본으로서 나타나길 기대할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낮아지고 무시당하는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의 삶안으로 들어왔었고
몸소 그렇게 겸손하게 사셨기에 게다가 십자가에 죽는 것을 저항하지 않으시고 복종하셨기에
................
결국 높히시고 영광스럽게 하실 전능자의 보답을 기대할 수 있기에 말입니다.
가장 정상적이고 유쾌하고 적극적인 교회안의 상황은
사랑의 위로가 있으며
그영의 교통이 활발하며
서로 긍휼히 여김과 자비가 있으며
그리고 권면이 충만한 교회생활입니다.
사실
사랑의 위로와 그영의 교통과 긍휼히 여김과 자비가 있을 때
감히 권면을 할 수 있고 또 그 권면은 흔쾌히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만약
사랑과 교통과 긍휼히 여김과 자비가 부족하다면
권면을 해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냥 외적인 요구와 압뱍감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항목들은 건강하고 유기적인 교회생활을 위해 '
절대적으로 필요한 항목들입니다.
사도바울은 위의 모든 것, 사랑 위로 그영의 교통 긍휼 자비 권면등등이
빌립보교회에 있다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이 모든 기릴만한 것들을 퇴색하게 하는 결정적인 부족함이 있었으니...
아마도 누가 더 큰가? 혹은 누가 더 영적 권위가 있는가? 등등으로 인한
영적 허영이나 교만이나 다툼의 문제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상태가 좋아보이는 교회라 할지라도
이런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치유되기 어려운 사람의 가장 오래된 문제일지 모릅니다.
생활반경이 좁은 저같은 사람은 한꺼번에 십여명이상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가는 거 자체가
큰 이벤트이며, 일종의 파티?인 셈입니다. 사람에 대해 가깝게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냥 전철이나 카페의 옆자리나 슈퍼에서 밀려다니는 군중의 엇갈림은
가능한 한 못 들은 척 못 본척 하는 것이 피차 예의이지만,
교회의 소그룹 집회에 가서는 무슨 말을 하던 적극적으로 듣고 말하고 반응을 해야하는 의무와 권리가
동시에 주어지는 특별함이 있고 또 그렇게 해도 실례가 되지 않는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갖가지 배경과 환경과 상황에 놓은 열댓명의 사람들의 조합.
그냥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진리를 추구하는 이런 저런 집회보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의 삶에 말씀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고 듣고 나눌 수 있기에
그래서 소그룹은 교회생활의 가장 실재적인 부분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번 집회때 머니 , 즉 , 돈을 버는 것에 대한 니 형제님의 멧시지의 추구는
아주 활기차고 왁자지껄한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는 결과를 가져왔죠.
한마디 끼어서 말을 할 수가 없을만큼...........헌데
그것이 얼마큼 영적인 진지함이 있던 없던 아주 즐거운 추억이 될 거 같습니다.
어쩌면 돈의 처리나 버는 문제에 대해 무겁게 반응하는 것보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소그룹은 서로에 대해 영적인 체하는 것보다는 가식없이 열려있다는 반증이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소그룹 집회를 하면서
성경의 말씀이나 사역의 메시지를 대할 때 우리의 대부분의 한계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말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아멘이 되던 안되던 혹은 순종하던 불순종하던 의의를 제기하던 ,
먼저는 말씀자체의 의미와 목표와 뜻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파악을 하지 않으면
흔히 말하는 동상이몽의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사실 사람과 사람사이의 불협화음과 불통은 상대가 내 말을 찬성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말하고자하는 것을 제대로 상대방이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근본적인 벽이
가로막힌 것을 느낄 때이듯이.....
그래서 주님도 때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렇게 오랫동안 나와 함께 있었건만...하고
한탄하셨는지 모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에 전념하기 보다는
각각 자기의 처지와 목표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시고자 하는지 전혀 알고자 하는 마음이 닫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영적인 생활에 그리고
교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요구되는 덕목은 .............
사역의 모든 메시지를 대할 때나
성경의 말씀을 대할 때
나의 관념이나 의견이나 혹은 안다하는 높아짐을 내려놓고
진지하고 신선하게 성경 말씀을 대하는 것과
메시지를 대할 때 전하는 분의 부담과 목표와 뜻안에
제대로 들어가는 것이 첫번째 일지 모릅니다.
제대로 들어야 제대로 된 주입이 있고 그때 참된 반응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숫자상으로 회복안의 성도의 수는 얼마일까요?
흠 뭐 그다지 많은 숫자가 아닐 거 같긴한데..요.
.
주님의 성육신당시 광야까지 말씀을 좇아 온 거대한 무리가 남자만 약 오천명쯤 되었으니
그 당시의 인구비례로 보았을 때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큰 무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가 침을 당하자 양들은 다 흩어지고 제자들까지도 각각 제 갈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주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것을 보고 난 뒤에
어찌어찌 요한의 다락방에서 다시 모인 숫자는 고작 120명이었습니다.
적어도 일이천명은 다시 응집되지 않을까 싶은데 말입니다........
.
무슨무슨 부흥이니 무슨무슨 운동이니 해서 구름같이 모여들고 불같이 일어난 뜨거움이 식어지고 난 뒤에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들
수확의 때에 거둘 수 있는 열매들은
누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는가를 증명해 줍니다.
'복음' 이러면 떠오르는 첫번째 단어는 아마도 '복음을 전함'이라는 행위의 개념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복음에 대해) 권면한 것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었습니다.
문맥상으로 볼 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대외적으로는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에 기뻐하는 것이며
내면적으로는
각각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확대되는 것이며
모든 상황에 그리스도가 사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2012 몽골의 추억 --디지털 inspiration으로 그림
초기 사도들의 시대에 믿음의 간증을 지키는 것은 목숨을 건 것이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만약 같은 위협이 존재한다면
즉 육신의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면 얼마의 수가 교회에 있게 될까요?
그리고
목숨을 잃거나 감옥에 갇힐 수도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구원의 증거가 된다면
이 관문을 통과할 믿는 이가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적극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부활과 부활의 권능을 알고 믿은 사람은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이 구원의 증거일 것입니다.
만약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그것 자체가 그가 멸망한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2012 디지털)
자신의 영적 생명이 자라고 성숙하기 위해서
고난과 환경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에서 대해선
우리는 어느정도 동의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교회 즉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자신의 육신의 고통과 혼적인 부대낌과 기타등등 고난을 받는 것,
특히나 아무런 영광도 없이
그꺼이 고난을 감수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에 대해선
누구에게나 기대할 수 있는 분량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사도였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의 이땅의 삶에 대한 열망은 본능을 넘어선
살아가면서 취득된 체험의 결과일지 모릅니다.
이를테면
포만감의 둔한 느낌보다는
공복의 쨍한 예민한 선명함을 선호하던 사람도
어느틈엔가
배불리 먹은 뒤의 느긋한 느낌이 주는 편안함을 즐길줄도 알게 되고
현란한 꽃무리의 강렬함이 주는 엄청난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어느 틈엔가
샛분홍의 진달래군 무리안에 잠겨 감당할 여력도 생기고...
이렇게 살아갈 수록
삶이란 살아봐야 알게 되는
새로운 발견들이 있기에
삶은 그렇게 간단하게 벗어버릴 수 있는
짜증나기만한 영역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한 사람, 단지 삶이 비참하기 때문에 그저 아무런 소망이 없기 때문에
그만 이세상을 하직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주 예수와
좀더 친밀하게
얼굴과 얼굴로 대하고
함께 하고 싶은 열망으로
이땅을 떠나고 싶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며칠전 그림에 관한 잡지를 넘기다가 전뭐시기 미납추징금환수를 위한 미술품경매에서
이뭐시기 화가의 그림이 6억 몇천에 팔렸다는 기사를 보고
운전하고 가는 남편코 앞에 잡지를 펄럭이며(흠 사고날라~) 이 그림이 그럴만한?작품이라고 생각해?-,-
..................
그림을 결코 20만원이상 가격에 팔아본 적도, 개인전은 커녕 (최근엔 ) 그룹전한번 참여한 적 없지만
어쨌든 나름 그림쟁이로서는 남의 그림가격에 몰멘 콧방귀가 나올 수 밖에 없는지요
......................ㅋㅋ...헛
그런데
어떤 날 파스텔과 아크릴 물감의 부조화로 다시 지우기가 안되는 그림을 가지고 버벅거리고 있다가
디지털 회화라면 되돌아가기만 클릭하면 되었을텐데........란 생각이.
한때 외국사이트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그림판에 마우스로 끄적거리기(위의 그림)를 해보는 걸 넘어서
페인터란 프로그램의 체험판으로 그려보고 있는데요...
오! 단지 컴 밖에 그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효과 제대로이지 냄새도 안나지 공간도 차지하지 않지 ...
달랑 이젤하나밖에 놀 공간밖에 허용이 안되는 작은 집으로 이사오면서
큰집 옥탑방에 붙여놓았던 스케치들 파스텔화들 눈 질끔감고 다 폐기처분한 씁쓸함이 기억나면서...
인터넷이란 공간에 신언이라면 신언이랄까 영적인 교통도 공유하는게 당연한 것처럼
그림이 꼭 액자에 넣어져서 벽에 걸려야만 한다는 법도 없는 법.
글쎄요, 아마도 몇년지나지 않아선 모니터 하나 벽에 달랑 걸려있고 자신이 인터넷상에서 클릭해서
구입한 그림이 차례로 바뀌는 그런 때가 올지도 모르겠네요...
언젠가는 회복안의 믿는 이들이 언어의 장벽(자동번역?)과 공간의 장벽을 넘어서 서로 교통하는 날이 가능할지도 모르겠구요...
동역자중 많은 이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고 심지어는 복음전파로 그와 경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과의 경쟁이란 것이 애초에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당시 믿는 이들에게 미치는 그의 영향력이 컸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인지요...
하지만
바울이 자신에 대해 원하고 바라는 것은
밖의 상황이나 자신의 상황에 대해 염려하고 대책을 논의하고 싸우는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는 그가 당한 모든 일을 통해 구원에 이르길 구했습니다.
즉 바울자신안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 그리스도가 무한히 위대하시고 높아지시고 찬양받는 것을 원했습니다.
사실 감옥은 그로하여금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최고도로 체험하고 누리고 확대할 기회를 갖게 한 환경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힘으로 많은 믿는 이들이 그를 위해 기도하고 돌봄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내적으로 연결되었고
그영의 넘치는 공급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엄친아'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뜻은 완벽한 조건, 즉 영어실력, 해외어학연수 경력, 명문대 학벌, 예의, 뛰어난 외모, 큰 키 등등을 갖춘
힘잡을 데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덧붙여 자라온 과정이 순탄하여 역경이나 상처를 입은 적이 없는 밝고 화창한 성겪까지도 보이는 듯합니다.
이 모든 것은 이 세대에서 잘나가는 사람의 규격일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을 엄친아라고 말한다면 거기엔 상대적 위축감이나 선망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겠죠.
그런데 정말 그런 엄친아의 스펙이 사랑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하나가 있는데
이 시에 나오는 이 사람은 마치 주님을 연상시켜서입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정호승--
그런데 정말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구약의 선지자들 주님의 제자들 사도들은 어떤 모습이었고 어떤 생을 살았을까요?
신약시대 초기에
대제사장 율법학자들 서기관 장로들 그들의 권세만큼이나 폼나는 복장에다 위엄섞인 외관이었겠죠
거기다 점령군인 황금색 투구와 붉은 망토를 걸친 당당한 체구의 로마군인들
로마식 흰 토가를 멋지게차려입고 가는 로마인 관리들과 비교할 때
감히 비교자체가 금물인
외모도 출신도 하찮은 나사렛사람 예수 그리고 그의 별볼일 없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
비교적 학벌좋고 배경좋은 엄친아에 가까웠던 사도바울도
마치 중범죄인처럼 감옥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감옥에서 그러나 바울은 의기소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밖의 제자들과 교회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그가 로마의 감옥에서 빌립보교회에 쓴 서신에는
그의 매임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겁없이 오히려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미숙한 사랑은 자기중심적이고 감성적이기 쉽습니다.
상대에 대해 눈멀면 멀수록 열정적이기 까지 합니다.
주님에 대한 첫사랑도 그러했는지 모릅니다.
이미 이 세상사람이 아닌 듯도 싶고
이미 삼층천에 도달한 듯하기도 하니
자신이 이 세상에 남아있을 필요도 없을 듯 여겨집니다.
교회안의 성도들도 천사와 같이 보여지니 어떤 결점이나 문제가 보이지 않고
변화되지 않거나 여전히 인격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미숙한 사랑이라면
시간이 가면서 영적 교리와 문자적인 지식은 율법적인 잣대와 판단이 되기 쉽습니다.
반면에
성숙한 사랑은 온전한 지식과 함께 모든 것을 분별하여
무엇이 가치가 있는 것인지 확증할 수 있음으로 인해
더욱 확고하게
더욱 풍성하게
참다운 사랑이 더 증가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순수하기 까지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성도들에게 요구한 것은 사랑과 분별과 지식과 순수함까지 포함한 높은 영적수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