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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가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썼을 때 수신인은 감독 즉 장로와 집사들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장로와 집사를 포함한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그 편지를 읽고
사도의 부담을 직접적으로 받을 위치와 자격을 갖았음을 의미합니다.
주의 회복은 오늘날의 변질된 교파와 달리 성직자 평신도 계급이 없습니다.
장로와 집사의 직분은 있으나 평신도와 구별된 계급의 의미가 아니라
신성한 대표권위를 가지고 합당한 교회생활을 위한 행정적인 다스림을 위한 것입니다.
오히려 나타난 직분은 성도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지
성도들위에 높임을 받거나 지위를 얻는 것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들 실행들을 정할 때
계급제도를 가져올 그런 빌미가 될 수 있는 일들을 경계합니다.
어느 때인가
주일에 교통하는 메시지중 장로들을 위한 특별집회 메시지는 수준도 높고 딱딱한 말씀인데
궂이 그것을 꼭 교통해야겠는가라는 말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즉 장로들만 그 집회를 참석하고 부담을 받으면 되지 궂이 일반성도?가 그걸 같이 추구할 필요가 있는가
오히려 누리기 좋은 수준?의 말씀을 교통하는 것이 더 실재적이지 않은가 라는 제안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좋은 제안일 수도 있을 거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왜 궂이 회복안의 모든 교회의 성도들ㅡ 그중엔 구원받은지 얼마 안되는 어린 성도들까지도
같은 메시지를 추구하는가라는 점입니다.
거기엔 각 지방의 모든 교회들이 같은 메시지를 추구함으로 몸의하나의 간증을 유지하는데
보호가 되는 틀을 갖는 의미도 있겠지만
밀실에서 따로 추구하는 특별한 교통을 가짐으로 인해 혹 성직자적인 다른 계급이 있다는
인식과 관념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주의 회복은 한몸의 간증일 뿐 아나라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동일한 형제들임을 간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으뜸되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있겠는가....
사람들에게서 선물을 받거나 무엇을 얻거나 하는 것을 궂이 마다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혹 주님의 이름이 훼방을 받을까 저어하여 복음을 전한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않아서
복음전도 여행길에 하룻밤 묵을 거처를 마련할 여유가 없을 만큼 곤란한 경우에 처한 사람도 있고
그들을 접대한 사람도 있습니다.
복음전도자는 나그네라 불리웠고 접대한 사람의 이름은 가이오였습니다.
외부에서 온 복음전도자를 받지도 않고 비방하는 것도 모자라
그들을 받으려 하는 사람을 교회에서 내쫓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그런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아 그는 실제로 그 교회안의 인도자였고
으뜸되길 좋아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데오드레베였습니다.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도 참되다고 증거를 얻은 즉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 인정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데메드리오였습니다.
교회안에는 참 여러종류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저런 일들을 볼 때에 놀라거나 의문을 갖거나 또는 실족할 필요도 핑게를 댈 수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오신지 일세기밖에 되지 않았을 때 이미 교회안의 상황이 그렇다면
오늘날이라고 더 좋아져야한다고 우길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평강이 있길.............
가장 적극적인 노선안에서...........
믿는 이로서 우리가 갖는 관념중 하나는
사람에 대한 관용과 인내와 오래참음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용입니다.
그러다보니 너무나 오랜 동안 아무런 성과도 없이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있는 예를 보면 어떤 사람들이나 상황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보이도록 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이 어떤 이단적인 가르침을 가져오는 사람에 대해선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말라는
강경한 선을 긋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외에 회개하지 않는 성도에 대해 사도바울은 교회밖으로 그를 내치지 않은 것을 책망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 이단적 가르침이나 누룩등은 구별하기가 쉬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핸드폰에 욕설이 담긴 문자메시지를 남기고 불평을 해대는 통에
소그룹의 멤버들이 몇년간이나 정신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다가
마침내 느닷없이 거의 아버지뻘인 형제를 폭행하는 바람에
심각한 정서적인 문제가 드러난 소위 형제라하는 사람은 어떻게 대처했어야했는지.............
몇년간이나 이 형제의 상황을 그냥 참고 인내한 것이 그럴 만한 일이었을까하는.........
어떤 사람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지도 못하고 주변사람들의 권면도 듣지 않는 대책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 사람의 경우는 애저녁에 정신과 상담을 받거나 약물치료를 하거나 했어야했다는 것과
지금이라도 적극적인 치료를 받지 않으면 심각한 상황이 스스로에게든지 다른 사람에게든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얼핏보기엔 멀쩡해보이기도 하기에....
위험성은 그만큼 더 클 수도 있다는...
그런데....
마침내 수면위에 드러나 더 이상은 그냥 둘 수 없는 이런 상황에 대해
오랜시간 교통들을 하시는 거 같던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는지..
살면서 오해받는 일들은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같은 류이니 별반 어려울 것도 없을 거 같은데도
각각의 성정과 성겪과 이해의 폭이 다 다르고 자신의 입장과 처지에서만 상대를 바라보니
어쩌면 사람과 사람사이의 편견과 오해는 당연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피하고
이런 인간사에서 더이상 괴롭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땅의 정함없는 헛된 것에는 초연해질 필요가 있으나
영원히 함께 할 진리를 얻고 그 안에 함께 거하는 것만은 꽉 붙잡아야 합니다.
참된 것, 진리는 무엇인가?
저물어가는 세기말의 혼돈의 시대에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의 제한된 인지능력으로는
결코 상상하거나 가능할 수 없는 한 참된 실재입니다.
하나님이자 사람이며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을 갖고 있는 한 사람 그는
이땅에서 사람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표현하셨고
타락한 사람을 위해 사람의 육체안에서 신성한 능력으로
구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신성한 생명을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시어
그들을 하나님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실재입니다.
구약에서 우상은 신이라 불리우고 그 앞에 경배하기 위해 돌이나 나무 금속등으로 만들어논 형상을 말합니다.
신약에서 우상은 어떤 의미일까?
고린도서에서는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상자체는 그저 무생명의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 걸까?
골로새서에서 탐심은 우상이라고 말하고 있는바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탐심을 가질 때
그것이 우리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상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기에
요한일서 마지막 절에서 사도는 영적 자녀들에게
너희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참되게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최고의 가치로 둔다면
그는 보이는 어떤 물질적인 것들이나
보이지 않는 다른 가치들을
하나님을 제끼고 우선으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외에 여전히 최고의 가치를 두는 것이 따로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우상일 것입니다.
본디 별로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어서일까요
어쩌다 분위기를 타서 주저리 많이 얘기하고 나면 그 뒷맛은 후회막급..
무슨 큰 천기누설을 하거나 실언은 한 거 같지도 않은데 많이 말을 하고 나면 마음이 허허로운 때가 있습니다.
거기다 밀려오는 피로감................
그래서 많은 말을 삼가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도는 어떨까요.
너희는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해
그래 맞아..했지만
몇마디로 기도하는 것조차
심지어는
안에서 성령의 감동이나 기도하도록 요청하는 느낌조차
무신경하게 소멸시켜 버리는 일이 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혼자서
기도를 많이 하지 않은 사람의 설컹한 낯선 느낌?
그러다
어느날 주님이 아예 돌아보시지도 않고
기도하라는 느낌조차 없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지........
영적인 일에 있어 말씀을 추구하는 것보다
이런 저런 외적인 일들을 거드는 것보다
기도로 동역하고 기도로 영적 싸움을 싸우는 것만큼
실재적인 것은 없다고 하는데................
영적 체험이 너무도 피상적이어서 그런지 이 일에 대해 절박하고 실재적인 이해가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기도의 실행을 하려고 시간을 정해놓고 시도한 적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도중에 이런 저런 일이 생겨 빼먹다가 .....별반 느낌 없이 도중하차.....
그러니 기도하는 것을 체득하고 맛보고 깊이안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신세계인 거 같습니다.
영적 서계에의 진입,
거기엔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고 정말 고약스럽게도 사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영적 싸움으로 맞붙게 됩니다.
그래서
사단은 다른 것은 다 웬만큼 물러나도
기도하는 사람의 작정과 결심은 기를쓰고 훼방하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기도의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주님과 동역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그렇습니다라고 .............인정하게 됩니다.
주님, 기도하는 맛을 알게 해주시도록 기도하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할 거 같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얼마나 달콤한지를 불러서 영적 접촉의 신세계로 도입하는 것부터....
모든 게 일이나 행함이 아니라 누림과 실재가 되기까지............
( 산책로에서 찍은 야경)
지난해 초에 다시 컴백한 집은 단열이 잘 되어 있는데다 남향이고 중간층이고
평수도 작은 편이라 그냥도 따뜻한데 살짝 몇십분만 뎁히면 후끈후끈 ....
그러니 딴데가면 맨먼저 드는 생각은 왜 이렇게 춥지?
오늘도 주일집회를 중지역 연합으로 모이는 통에 큰 집회소에서 모였는데
앉아있는 동안 아무 생각도 안나고 아무 말도 안들리고 그저 아 춥구나....
(이래서 주님은 사람의 약함에 체휼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보다도 혼자 추워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번 겨울엔 가능하면 외출도 거기다 산책도 거의 하지 않게 되는 문제점이 생기더군요.
본인은 극심한 운동부족을 피하느라 요가겸체조를 실내에서 한다지만
남편은 이즘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앉아 있는 시간이 많으니 결국 계속된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럼 실내에서라도 운동을 하던지 할 것이지....이렇게 계속 면박?을 주다가
결국은 다시 같이 산책을 나가기로....
새로이 단장을 마친 산책로를 삽십여분 걸어 맘대로 정한 반환점을 찍고 돌아오는 길
잠시 쉬려고 멈춘 뷰포인트에서 발견한 야경.
.얕트막한 앞의 주택가의 가로등 고만한 빌딩들의 불빛 남산의 타워 등등이 어우러진 야경은 정말 정겨움 그자체............
그리고
군인들 초소에 장병들 몇몇이 군대식화법(티비프로에서 들은 그대로)으로 얘기하고 있었는데
손에는 음 피자한판, 고소한 치즈냄새를 풍기고.........
초저녁이라 아직은 스모그냄새가 가시지 않은 산책로였지만 오랜만의 뻐끈한 다리근육의 뿌듯한 피로감...
.
.
지나온 발자취를 문득 돌아볼 때
그땐 이해할 수 없고 까닭을 알 수 없던 일이
아하~ 그런 거였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인생사도 그러하거니와 영적이 노정도 그러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돌보시지 않는거 같고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거 같고
마치 막힌 담을 바라보는 것같은 부재의 느낌..........
심지어는 저주아래 있는 것이나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우고 돌보시지 않는 거 같은
그리고 무엇보다 긴 침묵앞에 놓여있는 느낌...............
그 느낌에 압도되어 일어날 힘도 다 빠져버린 듯한 그런 공백뒤에
살아갈 힘을 얻은 것은
하늘로 부터 내려오는 단비처럼 쏟아붓는 은혜로 촉촉히 그리고 충분히 적셔진 뒤였습니다.
그런 일들이 몇번이나 지나간 후에
깨닫게 되는 것은
그런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위해선
마치 개미가 겨울동안 일용한 양식을 부지런히 곳간에 모아두듯
은혜를 축적해 두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다보면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저런 삶의 시련들, 시험들, 사단의 까부름같은 공격들에 충격을 받게 되는데
축적된 은혜가 있다면
여전히 주님의 약속과 미쁘심을 의뢰하며 넘어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더하여...
여전히 주님의 말씀하심을 들을 여력이 있으며
은혜가운데 평강안에 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몇십년을 감옥안에 있던 니 형제님도 그런 축적된 은혜로 내적 평강을 유지하셨을 것이고
병가운데 고통과 불안과 두려움가운데 있던 이 형제님도
그렇게 여전히 주의 회복을 행해 공급할 말씀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끝부분에 보면
한 범주에 속하는 세가지가 열거되는데
악한자, 세상 , 우상입니다.
악한자와 세상과 우상은 한 범주입니다.
그리고
참된 자 예수그리스도가 한 범주입니다.
.
악한자는 세상을 소유하고 있으나
이 세상은 거짓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세상이 참이라고 속임당하고 그안의 각종 우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참된 자,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으며 그는 참 하나님입니다.
.
악한 자에 의해 점유당하면
필경은 멸망이나
참된 이 안에 속해 있으면
영생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타락한 사람의 약함과 무능함을 아시고
대신 피흘리심의 속죄를 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우리의 잘못에 언제까지나 그의 피를 적용하는 것만으로 족할까요?
그러나
주님의 보혈은
단지 죄씻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자녀들이 사단의 송사와 그로인한 뒤로 물러남 대신
담대하게
은혜를 더 풍성하게 얻기 위해
생명을 더 풍성히 얻기 위해
보좌앞에 나오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언젠가는
신성한 생명의 성숙으로 인해
하나님이 무흠한 것처럼
하나님께로 난 우리들도 죄를 범치 않는다라고
믿음으로뿐 아니라
실재적으로도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들의 생명을 주셨으니
우린 그분의 아들이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않을 자녀가 무엇이든 구하면 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거늘,
우리가 받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듯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 것이나 다 구한다고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구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의 문맥을 따르면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구하는 모든 것마다 우린 다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린 여전히 이땅에서 그분의 징계를 받을 수 있는데
육체의 죽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건 각각의 영적 상태에 따른 하나님의 통치적인 처리로 인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
주님의 만찬상에서 주님의 몸을 분변하지 못하고 함부로 행한 어떤 고린도 성도들.
광야에서 엎드러져 죽은 어떤 이스라엘 백성들,
좋은 땅을 앞에 두고 하나님을 의뢰한 여호수아와 갈렙외의 이스라엘 백성들.
심지어
미리암과 아론 그리고 모세라 할지라도.....................
이땅에서
그리고
온 우주에서
참으로 이렇게 든든하면서도 엄위한 부모라니~~~
과연
웃을 수만은 없을 거 같습니다.
요한일서 4장에서 꽤 길게 할애한 사랑타령을 읽다보면
오죽
사람들 사이에
심지어는 믿는 이들 사이에 사랑이 부족하면
노사도가 이렇게 사랑 사랑을 입에 다시는가...........
.
사실은
사랑처럼
간단하면서도
간단치 않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랑을 하는 것이 명령이라면
이보다 더 큰 고문이 없을 것은
사랑은 오직 자발적일 때만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사도가 서로 사랑하라
혹은 주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각자 규정한 정의대로 혹 마음에 꼴리는대로 사랑을 하라거나
싫던 좋던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
사도가 주신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은
하나님으로 부터 거듭남으로
신성한 출생을 함께 나눈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형제들이 된 것에서 출발한
신성하고도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각각 몇십년동안 옛사람안에서 그 성정대로 사랑하고 미워하던 사람들이
신성하고도 인간적인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들로 바뀔 수 있을까요...
.
어느날 갑자기....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무런 내적 변화도 없이
.
우리 존재는 육체라 불리우는 그릇안에 담겨있으며
우리 삶은 땅이라는 물질세계안에 제한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는 대부분의 대상은 물질계이니
마치 그것이 전부인양 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는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가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밖에도 믿거나 말거나 보이지 않지만 엄연한 영적 세계,
창조주인 하나님이 있고 그 대적인 사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사람이 낑겨있습니다.
그런데
물질계와 영적 세계중
어떤 것이 중할까요?
물질계는 그저 스쳐가는 정류장에 불과하지만
보이지 않는 생명과 영과 혼의 세계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분별하여 행하는가에 따라
내세와 영원세계에서의 처지가 판가름나기에,
답은 이미 나온 것이겠죠...
이 물질계에서 사단이 하는 일은
거짓선지자의 영을 통하여
하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사람들이 받지 못하게 미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할 때도
사람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나게 하려고
갖은 수를 썼듯이,
믿는 자들을 미혹하여
각종 철학과 그럴듯한 신학이론으로
하나님이 사람되신 분 ,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지요.
왜 일까요?
왜 적그리스도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려는 것일까요.
창세기 3장에
여자의 씨, 즉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란 말씀이
실재가 되는 것을
끝까지 막아보려는 헛된 몸부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체로 오신 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놋뱀으로서 죽으실 때
그 자신이 이미 멸해졌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뤄진 영적 판결이 집행되는 날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려는 헛된 노력인 것입니다.
그날에...
사단과 그에게 미혹된 거짓선지자들이
실재적으로 망하는 날이 오리란 걸 알기에..............
어떤 사람들이 표방하고 있는
영적 역량이
과연
실재인가
영적 역량이 드러나고 판정받는 척도는
무엇일까
.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추구하여 쌓은 영적 지식이나
유연하며 조리에 닿는 유창한 신언이나
심지어 말씀을 가르치는 능력에 달려있기 보다는...
재물을 어떻게 대하고
재물을 어떻게 쓰는가로
그의 영적 실재가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헌금을 얼마큼 하는가
얼마큼 성도들을 위해 쓰는가라는
양적인 정도를 말하기 보다는
물질자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주님께 어떻게 주권을 드리는가의
기본척도를 말하는 것이겠죠....
만약 가인과 아우의 관계가
문자그대로 형제를 사랑하는 그 사랑의 끈으로 보호되었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지금과는 사뭇 다르게 전개되었을까요...
그건 그렇게 좋게 지나갔더라도
티락한 사람안엔 사랑보다도 미움과 질투가 더 크게 자리한 까닭에
인류의 분쟁과 전쟁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엔
큰 변화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인에 대해서는
가능한한 화평을 추구하는 것으로 족하지만
주안의 형제에 대해서는
목숨을 내어주는 정도로
사랑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
이 사랑은
천연적인 기호가 있는 선별적 사랑이 아닌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신성하고도 인간적인 사랑으로...
인간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인격도 있고
이기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고
변화되지 않는 인성이 내뿜는 독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도 있고
이런 저런 괴상한 면이 있는 것이 여전히 보이는
소위 형제라는 사람들을
사랑할 만한 사람들과 차별없이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랑은 눈멀거나
눈을 감는 사랑이 아니라
모든 것을 분별하고
모든 것을 판단하나
주님의 넘치는 그영의 공급으로 인해
능히 모든 것을 덮을 수 있고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
.
그것이 가능한 것은
내가 어디에 있는가
내가 누구인가에 달려 있는 것.
가인이 그 아우를 미워하는 것처럼
세상은 믿는이, 참되게 믿는이를 미워합니다.
왜인가 ?
묻지도
물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미워하는 입장은 나름의 이유와 억울함이 있다하고
당하는 입장은 견뎌야하는 것외에 달리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가 끝나고
이 세상의 심판이 이뤄지는 날까지..........
분명한 것은
미워하는 쪽보다
미움을 당하는 처지가 복된 것입니다.
택하심을 받고
긍휼하심을 얻는 이의 복은
그만한 고난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구원받기전 가인과 같은 입장에 있으며
가인의 선택에 더 공감이 가는 편이었습니다.
낙원에서 쫓겨난 사람은
스스로 살 길을 모색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은가?
그런 딱한 처지를 고려할 때
하나님의 과연 가인을 박대하는 것이 옳은가?하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중심의 한계에서의 판단입니다.
.
요한일서 3장에 보면
가인이 아우를 죽인 것은
자신의 행위는 악하고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저지른 건
하나님앞에 저주받은 땅에서 얻는 소산물을 바치는 것은 자신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뻔뻔스러움이며
반면에 아우는
하나님앞에 구속하는 피외에는 감히 나아갈 수 없다는 자신의 타락을 인식함으로 비롯된 것이기에
가인은 악하며 아우는 의롭다는 판정은 합당한 것입니다.
이런 판정앞에 가인의 반응은
미움과 질투로 급기야 아우를 살해하는 발전된 악행이었습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할 때
가인은 과연 이해받거나 동정받거나 할 자격도 없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긍휼의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셨습니다만..)
.
의로움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땅에 속한 나름의 기준이지만
절대의는 오직 하나님임을 깨닫는 것과
그런 하나님에게 어떻게 향하는 것이
우리의 의롭다함에 대한 출발이며 종착점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또한 믿는 이로서
가장 최고의 미덕은 무엇일까?
의와 사랑
온 세상은 이것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이 지구상의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혹은
그분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어떤 것보다도
의와 사랑을
참되게 추구한다면
이 세상의 문제들이 많이 해결 되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주님이 다시오심이
이렇게까지 지연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법질서에 위반되는 일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신성의 높은 수준에 어긋나는 불법적인 모든 것들을 하지않음을
요구당하는 것은
죄짓는 본성에 갇혀 있는 한계내에선
너무한 일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아니 불가한 일이라고 정직하게 말해야할 것입니다.
단하나
가능성이 있다면
주님안에 오랜동안 함께 거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분의 높은 수준의 미덕안에 젖어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하나님이 정죄하시는 모든 것에 대해
안에서 부터 용납이 되지 않는 그런 수준에 까지
이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