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를 대면할 때의 우리의 모습과 관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어떠하심과 같은 정도의 깨끗케함,순수함의 정도에 이르는 것은
주님의 어떠하심과 같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정도의 수준에 이를때야
주님의 참모습을 보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 세상의 명예와 자랑 성공은 다 눈에 보이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주목하며 알아주는 것입니다.
이름만 턱 대면 아하~하고 고개를 끄덕여 주는
그렇게 알아주는 맛이 없다면
이 세상의 모든 성공은 재미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 하나님의 자녀야~하고 자랑스럽게 내세우면
세상의 반응은
-.-..............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이 얼마나 큰 사랑을 받은 것인지
,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의 어떠하심 그대로를 볼 뿐 아니라
우리도 그와 같게 된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도 그때야
비로소
참되게 실감하게 되겠지요.
꿈보다 해몽이 좋다라는 말이 있는데...
단 한 절의 말씀 안에 축약되어있는 많고도 깊은 뜻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요한 일서 2장은 의로움을 행함에 대해 한 줄 말씀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또는 주님안에 거하는 자인지 알려면
그가 의를 행하는 것을 보고서 알게 되리라고...
여기서의 의는 하나님의 성품의 표현으로서의 의를 말한진대
딱딱한 법적인 의가 아닌
거룩한 성품이 나타나는 향기로운 의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의로워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길조차 그의 전능한 권력을 쓰시지 않고
대신 고통받고 피흘리고 죽임을 당하는 합법적인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 대해 사단도 송사하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 조차도 우릴 부인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언제든 뒤로 물러나고 거두어버릴 수 있지만
그가 이룬 의로움은 결코 우리를 거절하지 못하실 줄 알기에
우리에겐 더 확실한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사랑보다도 그분의 의로움을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의를 누리고 감상하고 맛볼 때마다 우리 또한 그분의 의로 점유되고
그분이 의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의롭게 되리란 것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친밀하게 잘 알려면 함께 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외적인 상황이라도
한동안 함께 거할 때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됩니다.
하물며
내적으로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한 인격안에 머무는 거함이라면
한동안의 사간이 지난후에는
두 인격이 마치 한 인격처럼 서로에게 동화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하고 기대하는바 언젠가 주님을 우리의 눈으로 보게되는
그런 날이 올것입니다.
자기의 속에서 친밀하게 아는 존재를 우리의 눈으로 또한 본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 될까요?
만약 주님이 낯선 존재라면 두렵고 떨리는 일일 것이요
만약 친밀하고 다정하고 익숙한 존재라면 그분의 외적 출현에 대해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주안에 거함이란 주제는 사실 참 알쏭달쏭한 주제입니다.
주안에 거한다는 것이 어떤 상황인지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이것에 대해 약간의 곡해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뤄진 영적인 사실로 볼 때 우리는 이미 주안에 포함되어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고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되었고
우리의 생명이 주안에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2장 끝에 사도는 '그의 안에 거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의 그의 안에 거하는 주체는 주님이 이뤄논 사실안에 있는 수동적 내가 아니라
의도적이며 능동적인 나입니다.
즉 이미 이뤄논 영적 사실을 체험화하고 실제화하는 건 우리의 몫이란 것이죠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
그럴 때 우린 보통 방법적인 것이나 실행적인 것을 생각하고 실천하려 합니다.
이를테면 교회안의 모든 집회와 훈련을 참석하는 것은 어떨까요?
하루종일 말씀테이프와 집회테이프를 듣고 시청하는 건 어떨까요?
주의 이름을 하루에 천번부르기를 실행하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직장을 갈 필요도 없고 돌봐야할 가족도 없고 자질구레한 일상에 치일 필요도 없고
체력적인 한계와 심지어 정서적 정신적 집중의 한계도 없다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주안에 거함은 주안에 존재하며 사는, 문자그대로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실행을 하던 안하던...
어떤 교파인지 분명히는 모르겠지만
나름 꽤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분이 간증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침 댓바람부터 저녁잠들기까지 어떻게 하나하나
생활의 모든 면에 인도함을 받았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누구를 만나고 어느방향으로 가고 등등에 대해 일일이 주님께 여쭙고
주님은 어떻게 하나하나 섬세하게 인도하셨는지에 대한 , 자랑비슷한....
듣기에 따라선 꽤 신선하기도하고 꽤 영적으로 여겨기도 합니다........만,
문득 왠지 좀 으스스한 느낌? 아니면 쪼르르 엄마한테 달려가서
일일이 물어보고 결정하는 유아틱한 장면이 ...........
왜냐하면 늘 이런 식이면 본인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기 때문이겠죠.
나이가 서른이 되어서도 엄마한테 쪼르르 달려가는 아이를 생각해 보면....좀 ...
흠..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맘상할까봐 미소를 지으며 아주 정치적으로? 고개만 끄덕거렸던 기억이.....
그런데
요한 일서 2장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가르친다는 말씀을 외적으로만? 적용하면
이런 식으로 연출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 생기는 모든 일은 우연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안에 거하며 주님의 기름바름을 받음은 외적인 인도를 목적으로 함이 아니라
그분의 성분을 우리안에 더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더욱 합당하다 여겨집니다.
그래서
주의 회복의 장점이 무엇일까를 새삼스럽게 알게 됩니다.
말씀을 임의로 해석하거나 적용하지 않고 주님의 경륜과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성경전체의 조망을 가지고 말씀을 해석하기에
우리의 영안에서 뿐만 아니라 명철한 생각의 영으로 합당하게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냥 알약을 먹기 싫어할 뿐아니라
몸에 좋다는 고가의 한약도 단지 쓰고 맛이 없다는 이유로
슬금슬금 버리다 나중에 한꺼번에 쓰레기통에 쓸어넣고는 마치 다 먹은 양 시치미를 뗀 적도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할 말이 없는 거겠죠....
.
그런 저라 할지라도 매일 한웅큼의 알약을 6개월간이나 꼬박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난 연초에 결핵에 걸렸다는 판정을 받은 후였죠....
그것도 2주간 계속 기침이 멎지않아 등떠밀려 마지못해간
동네 병원에서 다시 소견서를 가지고 대학병원가서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이미 한번(자기도 모르는 새에) 결핵을 앓은 뒤 다시 걸린 상황이란 진단을 받고
6개월간 약먹기에 꼼짝없이 돌입했습니다 ......
왜 걸렸을까에 대한 영적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이유를 생각해 보면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이사하기전
완벽한? 짐정리를 위해 너무 많이 힘을 써서 체력이 떨어진 이유가 아닐까...
.
아무튼
결론적으로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거의 부작용없이 (신기하게도) 무사히 약먹기는 마쳤습니다.
.
생각해보면 어떤 필요가 있다면 자기의 기호나 본능적인 것을 충분히 거슬를 수 있다는 것이 욧점입니다.
물질적인 생명의 필요가 있을때 원래의 기호를 거스를 수 있듯이
영적인 생명에 대한 절박한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면 그것을 위해
영적인 양식을 취하는 것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그것에 기호가 있던 기호가 없던..........
이번주의 오늘의 양식의주제가 '자람'인데 자람을 위해선 먹어야합니다.
입맛이 있던 없던 영적인 영양식과 영적인 치료약등을..............
하지만 주님의 긍휼이 더한다면 그것이 어느날 꿀맛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의 소원처럼...
.
많은 분들이 성경을 일년일독하겠다 , 아침부흥을 꼭 하겠다, 매일의 주어진 만나를 취하겠다 등등의
서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역시 매일 말씀안에 들어가는 것을 실천?하겠다 마음먹었습니다.
.
주의 회복의 소명인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선 우린 개인적으로 신장의 증가가 필요한 절실한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신장이 자라야 지체로서 서로 건축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자란 지체들이 서로 건축될 때야 비로소 단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장에 이르는
지점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아마도 우린 이제 조금씩 자라고 있거나 자람에 대한 절실한 필요를 느끼고 있거나 한 수준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연초에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 서원대로 꾸준히 하다보면 조금씩 조금씩 자라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결국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닌.................
진리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사도요한은 믿는 이들에게 너희는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 즉 진리를 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안다라는 건 정말 대단한 명제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앞의 구절 기름부음을 받고 라는 구절을 허투루 스쳐버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아는 조건은 기름부음을 받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의 어떤 선견자, 철학자, 권력자라 할지라도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선 장님처럼 눈멀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주님을 심문하던 중 불쑥 질문을 던집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이 질문은 평소에 그의 마음속에 있던 의문을 표명한 것이기도 하고
주님을 떠보기위한 조롱의 물음일 수도 있지만
그는 진리가 무엇인지 끝내 아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가 정말 그 앞에 서 있는 인자예수가 누군지 알았다면
즉 진리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알았다면
결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하여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아닌 자인 천하고 작은 자들이
긍휼하심을 얻어
마음이 열리고 귀가 열려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게 되고
그분의 말씀이 참되게 안에 거하게 되었다는 건
어느날
아버지여 옳소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고백한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아버지의 뜻이 그렇기 때문일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은
이 세대의 끝에 막강한 힘을 가지고서
예수를 믿는 자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핍박할 한 인물!
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 일서 2장을 보면 이미 1세기경에
교회가운데 있다가 나간 사람들을
적그리스도들로 칭하고 있음을 봅니다.
적그리스도의 정의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일에 반대하는 사람들임을 볼 때
그렇다면
적그리스도에 속하는 무리는 광범위하다고 볼 수 있겠죠......
주님이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라고 칭할 때 그가 늘 사탄이란 뜻이 아니고
어느 순간 사탄에 의해 점유되어 주님에게 반대를 했기에 사탄의 위치로 떨어진 것처럼
...........
어느 순간
그 어떤 믿는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위치에 설 때
적그리스도~!라고 칭함을 받음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 어느때이던지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적그리스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한다고 하지만
실은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 사랑하지 않는 것은 어떤 차이인가?
아버지의 사랑과 세상의 사랑은 병행할 수 없는 것인가?
요한일서에서
주님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의 사랑이
함께 하지않는다고 말씀합니다.
,
세상은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이 권력을 잡고 그의 조정과 다스림을 받는 영역이기에
하나님으로선
그분의 자녀들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볼거리 먹을거리 입을거리 거할거리들이 점점 더 고급화되고 세련되어가고 있는
그리하여
점점 더 치명적인?유혹의 장이 되고 있는 이 세상 가운데서.................
믿는 이들로서 어떻게 존재하고 행할 것인가라는 명제는
전보다 더욱 더 실재적인 문제가 되고 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마음에 정말 무엇이 있는가를 드러나게 하기도 합니다.
...............
만약 내가 율법아래 묶여 있다면 즉시 나는 많은 것들을 밖에서 제한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신성하고도 인간적인 생명의 율아래 있다면
세상을 어떻게 이길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연말이면 사람들은 사람이 되어오신 창조주를 기뻐하고 기념합니다.
불신자라 할지라도...
이 황량한 세상을 따뜻하게 품어줄 전지전능한 손길을 기대하며....
그렇게 한 해가 가고
또 그렇게 연말을 맞아 축하하고 기념하더라도..........
다만
누군가
어느 골방에서
어느 길목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용하지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거듭나게 하신 창조주를 알고
말씀이 안에 살아서 움직이고 거함에 따라
악한 자를 이기는 강한 청년이 되고
마침내
태초부터 계신 자를 알게 되는
성숙한 아비가 되는 과정이
계속계속 일어나고 있을 것이며
세상의 모든 시간은
그것을 위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새해의 4번째 날에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강자는 누구일까
그 답이 시기와 질투심이 강한 사람들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잘 살펴보면
아주 좋은 의미에서 건전한 경쟁?이란 타이틀을 걸고
누구보다도 뛰어나고자 하는 갈망이 강한 사람들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가진 사람들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건전한 경쟁심과 시기와 질투는 동전의 앞뒤 같습니다.
믿는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경계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능력과 분량을 넘어서 욕심을 낼 때
문득
사람의 속에서 미움의 싹이 트게 되죠.
이 세상에 미움처럼 음험한 것이 있을까요...
미움은 어둠을 가져오고
마음의 눈을 멀게 합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눈이 먼다는 것
즉 어둠속에 갇혀 있다는 건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가장 극심한 공포요 고통이라는 느낌.............
누군가 말했습니다.
웬지 꼭 옛날 시골예배당에서 학예발표회하는 거 같다고...
너무도 소박한 즐거움에 그렇게도 기뻐하는 소박한 무리..........
빵이냐 자유냐를 놓고 선택하라고 하면
자유보다 빵인 사람은 ..너희가 배고픈 서러움을 아느냐..등따숩고 배부르니 헛소릴 하는게라고 하기도하지만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유에의 강렬한 갈망을 가집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좌지우지 하기도 어렵거니와 하나님조차도 사람의 선택을 기다려야만 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창조주는 사람을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기기묘묘 너무나 잘 만들어서 창조주에 대해 이런저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는 이런 피조물를 만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사람이 하나님에대해 가지는 가장 일반적인 의문은 왜 사람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셨는가?
에덴동산에서의 생명나무인가 선악과인가의 선택에 있어
차라리 사람이 선택할 일 자체가 없게 했으면 오늘날 인류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어떤 사람의 의문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준 하나님의 결정에 대한 의문일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경우에 하나님은 사람의 개인의 내면에까지 간섭하고 택하는 일을 하시는데
어떤 사람은 완악하게 만들고 어떤 사람들은 긍휼을 입도록 특별한 성정을 갖게 하시거나
어떤 사람은 미워하거나 어떤 사람은 사랑하거나 하는 그의 주관적인 선택을 하는 일입니다.
이것에 대한 사람의 의문제기에 대해 하나님은 자신이 토기장이고 너흰 그저 진흙덩이에 불과함을 예로 들어 입을 막아버리십니다.
우리는 어떤 쪽이 더 좋겠다고 생각하는가요?
그저 빚어지는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과 어떤 순간 선택할 기회를 갖고 그런 때마다 달라지는 운명을 갖게 되는 것중...
.
확실히 이 세상에는 하나님에 선택받은 긍휼을 얻은 사람들이 있고
그런 긍휼을 얻지 못한 마치 강퍅하게 된 바로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강퍅하게 된 바로같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순간 다른 결정을 할 기회는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순순히 내어보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알아볼 기회를.,.........
마찬가지로 긍휼을 얻는 사람일지라도 최종적인 선택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무 의지도 없는 그저 열려진 뚜껑을 갖고 있는 그런 그릇이 우린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얻게 되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주님을 영접하는가
아니면 이런 저런 핑게를 대면서 뒤돌아 가버리는 가는
긍휼을 얻은 사람이던 강팍한 사람이던 그 사람에게 달려있기때문입니다.
.
사람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신 조물주는 통이 큰 지혜로운 창조주이십니다.
생각해보면 절대의 권력과 힘을 갖고 있는 창조주라 할지라도 사람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었는데도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권력을 최대한 휘둘러
사람을 압제하길 좋아하는 쩨쩨한 성품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그건 확실히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한 거 같네요.............
영양제라는 것을 최근에야 그것도 생각날 때마다 가끔씩 먹는 저로서는
그 효능과는 상관없이 맛없고 쓰다는 것만으로도
한약먹기는 하고싶지 않은 일 다섯손가락안에 드는 일일지 모릅니다.
(몸에 좋다면 양잿물도 마시는? 부류의 사람들로선 이해가 안가는 종족?일지..)
게다가 좋은 소릴 들어도 맘이 동하기 쉽지 않은데
반협박처럼 들리는 좋지 않은 얘기가 불쾌하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혹 한의사들은 오해하지 마시길..누구말대로 지낼만하니까 이런 소릴 하는 것인지도..)
그래도 저는 한의사에겐 정말 만만한 사람으로 보이나 봅니다.
다른 사람이랑 같이 묶여서 한약방에 가면 한의사들은 봉을 잡은 듯한 반색을 하고
아무 말도 않했는데 다자고짜 약을 먹어야겠느니 불쑥 말부터 끄내고
혹은
맥이 잘 안잡힌다고 겁을 주기도하고
무슨 관상도 보나
자주 우울할 거라는 둥 점쟁이나 할 법한 얘기도 들었죠.
아주 최근에
또 같이 묶여서 어떤 한의사를 보러가야할 일이 생겼는데
이 아짐씨 한의사가
절 보고는 또
우울해지지는 경향이 있다는 식의 말을 하는 걸 듣고나니
우연의 일치치고는 괘이하다 싶어............
거울을 들여다보게 되네요...
흠..내가 우울해 보이는 형상인가??..........
.
,
만약에 제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면 이 일을 다른 각도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실 믿는 이들의 삶이 한면으론 우울한 삶이라고 해도 말이 되지 않을까요...
지난 주 우리는 생명의 고차원적인 체험의 단계에서
우리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고
면도로 온 몸의 털을 밀둣이 우리의 영광 명성 자랑 등등을 다 털어내어 버려야하며
자기의 분량이상으로 자신을 과하게 여기지말고 지체의 제한을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를 추구하였는데..
사실 인간적으로 그리고 세상적이고 천연적인 관점으로 볼 때
정말 우울한 그림이지 않은가요?
정말 이 세상에서 무슨 재미로 살라는 건지.....말입니다.
.
그러고 보니 저는 정말 우울한 사람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울한 사람이 그리는 우울한 풍경과 슬픔이 가득한 인물화들과 그리고 사진을 찍어도 그런 사진만 찍으니...
하지만
위안이 되는 것은
우울한 것을 우울하다고 말할 최소한의 용기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저희 소지역에 최근 연결된 한 형제님의 돌직구 토로...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들을 애굽에서 갖고 나와
하나님을 섬기려 할 때
바로가 그들을 막으려 하고 뒤에 무언가를 남기도록 타협하도록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소유를 다 가지고 나와 하나님을 섬기게 하도록 역사하신 것처럼,
신약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원받은 뒤에 세상에서의 그들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는 게 마땅하지않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는 출애굽하지 즉 세상에서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
사실 이런 용감한? 교통의 제기는 집회가운데 나오기가 쉽지 않을 일이죠.
아무리 영적인 지식에 통달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영적인 수준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일차원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어떤 개념을 갖고 대하는가가
그가 어떤 그리스도인인가가 속임없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에서의 강한 성령의 역사로 인해 믿는 이들이 자신의 소유를 내어놓으며 함께 나누는 실제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성령이 역사하는 대로만 이루어졌으면 좋았을텐데
누군가는 남들에게 보이는 것에 신경쓰다보니
실은 내어놓기 아까운 재물을 일부 숨기고 마치 전부를 내어놓은 체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요?
부끄럽더라도
자기가 도달한 그대로 내보일 수 밖에 없음.이
답인 거 같습니다.
.
.
영적인 척
어떤 수준에 도달한 척 하다가
어떤 종류의 죽음이던
죽임을 당하는 것보단 나을테니까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티끌처럼 혹 배설물처럼 보이도록 하나님이 보이신 더 좋은 것 더 확실한 것 더 견고한 것 더 영원한 것에
완전히 사로잡힐 때까지..................
.
어젠 눈이 심하게 내렸죠...
카페에 앉아서 (위의 카페가 아닌) 눈이 내리는 걸 보다 탄성의 한숨을 쉬는 것도 잠시
미세먼지눈이라는 누구의 말때문에 분위기 썰렁해졌었네요.
그러고보니
서울은 집안팎의 먼지가 얼마나 심각한지
꽤 오래전에 먼지찾기가 쉽지 않던 청정지역에 살았더라면~ 이런 걱정도 없겠지라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지만
어떤 지역에 살던
어떤 부지런을 떨던
오염되어가는 땅에 사는 한
먼지는피할 수 없는 복병일 것입니다.
도대체 청소라는 것에 왜? 필요한 거지 란 생각을 했던 시절처럼
먼지에 모르쇠로 살면 모르거니와..........
.
빛이 가득비쳐 들어오는 방안에선 빨랫거리를 집어들어도 흐스스 날리는 먼지가 보이는 걸 보면
매일 청소를 해도 먼지가 항상 한움쿰씩 나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알게 됩니다.
실은 사람이 떨구는 각종 살먼지가 집안의 모든 먼지의 주범이란 것을 아시는지...
크게는 이 세상의 모든 공해의 주범도 사람들이고..........
비가 오던 며칠전 끼니를 때우기 위한 음식점을 찾다 찾다~ 다리도 아프고
미심쩍지만 혹? 이러면서 들어간 레스토랑창가(위의 사진) 자리에서
꽤 로맨틱한 분위기에 잠시 젖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쪽 저쪽 쓰잘데기 없는 소품들위엔 얼마나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을까 궂이 알 필요없기에...
책임이 없이 잠시 스쳐지나가는 입장이니깐.
이렇게 살면 참 속편할텐데...
.
하지만 집에 돌아와선
정말 오랜만 거실창과 바깥 베란다창을 뽀얗게 닦고서 맑게 비치는 밖의 풍경을 므흣하게 바라보는 느낌도
괜찮기도 하기에...
이런 저런 모든 것에 그저 주어진 데로 살면 될 거 같은 생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