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는 왜 우상을 이용하는가


일상누림 2014-12-11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639.html

며칠전..........
지인중에 천주교신자인 분들이 있었는데 
자기들 맘대로? 천주교유물 전시회?표를 사서 가자하는 바람에
그냥 하릴없이 따라갔었습니다.

한바퀴 휙 둘러보면서 새삼 생각한 것은
천주교 유물들이 가진 한계는
예술적인 가치의 문제를 따질 것도 없이
그냥 공허....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물질적인 한계안에 하늘을 묶어 놓겠다는 발상자체가 무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육체는 악한 것이다라는 규정으로 인해
그들의 우상엔 인간적인 따스함조차 부재할 수 밖에 없기에
어떤 것은 으스스하기 조차 합니다.

그런데도 천주교 신자들은 그런 것에 대한 아무런 느낌조차 없는 걸까요?

새삼 묻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좋아 육신의 한계에 제한되시고 
사람의 고통 아픔 슬픔 질병 배고픔등을  몸소 체험하시기도 하고
그래서 사람의 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는데
이젠
보좌 우편엔 사람하나님이 앉아계시고
다시 오실 때도 하나님사람으로
땅으로 오실 것이라 했는데도............

사람들은 인성을 배제하고 신성하게 되려는 넌센스입니다.

과연 그 오래된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는 학자들은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요?
천주교는 왜 우상을 이용하는가?

그 옛날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가 하나님 면전에 있을 때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앞에 경배하게 하고 즐거워하게 함으로
많은 불만을 잠재웠습니다.

어리섞고 무식한 신자들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다. 맛도 없고 냄새도 없고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으니 라고 한다면 어찌 이해하겠는가?
그래서 우상이 필요한 것이다라는 논리입니다.

심지어는 어느 천주교 예배당앞에는 불상이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위의 사진은 이탈리아 북쪽 도시 (피렌체?)의 어느 성당에 있는 금으로 만든 천국의 문이란 것인데
흠..금.......변하지 않는 금............성경엔 금이 많이 등장하죠..............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 직면했을 때


회복자취 2014-12-0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617.html



주님이 호숫가로 가시던 산위로 올라가시던
각색 병든 자들 불구자들 혹은 주님을 보고자 하는 무리들은 계속해서 주님께 나아와
다 고침을 받고 또 배불리 먹고 돌아가니 자연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당시 종교지도자들조차 주님께 표적을 구합니다.
이이가 정말 하나님께로서 온 자이면 뭔가 증표가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었죠
그러나 그것은 순수한 앎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자신의 정권유지였으니
그들의 기득권이 도전을 받는다면 어떻게 해서든 약점을 잡아야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마침내 그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아셨고
그리고 그때부터 주님은 그분의 오신 목적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셨죠.
죽고 삼일만에 부활하여 그들에게 경고를 할 참된 요나가 바로 나이다.

그후의 행적을 보면 유대지도자들은 
이 위험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능력자 예수가 야기하는 도전을 막아내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해서는 모른척하기로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마치 전쟁을 시작할 무렵에 뒤로 물러가 마치 싸움에 진 자처럼
죽음을 택하겠다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바라고 따라온 각자의 목적에 위배되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람들에게 각자의 필요와 욕구와 목적에 따라 색깔을 달리 하는지 모릅니다.

오늘날에도 주의 회복에 있으면서도 각자의 숨긴 의도와 목적에 따라
믿음은 엉뚱한 방향을 향하고 있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계시록에서 주님은 교회들에게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시는지 모릅니다.

우린 참 말을 잘 듣기 힘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귀에 듣기 좋은 말에만 귀기울이기 때문이죠............





산수화 연습


일상누림 2014-12-0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595.html


살면서 알게 되는 것 중의 하나
뭐든 단순하고 간단한게 좋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림의 가장 큰 약점은 물질적 부피감을 감당해야한다는 것이죠.
그림그리는 도구들을 늘어놓고 있어야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꿈꾸는 것은
전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그리고 크면 클 수록 좋은 작업공간.

그런 의미에서 현존의 가장 간단한 그림도구는
인터넷 그림도구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단순한 그림도구는 동양화도구 입니다.

동양화도구는 그저 둘둘말은 종이하나 붓하나 먹물담은 플라스틱 통?
그저 한묶음의 부피에 종이무게같은 가벼움이 장점입니다.

.

언제부터인지 동양화재료로 그려보고 싶었는데
인사동에 갈 일이 있을 때 커다란 화지 한묶음 사갖고 와서
가지고 있던 묵과 먹 별로 질이 좋진 않지만 동양화붓을 꺼내놓고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사군자 산수화등 기존의 화면에서
먹물과 종이와 붓이 어떻게 서로 협력하는가를 탐색해서
한 몇백장쯤 그려보면 나중엔 자유롭게 먹을 갖고 놀 수 있을 정도가 
되지 않을까?라는 
소박하지만
나름 야무진 계획??






주님은 언제부터 이방인들에게로 향하셨는가


주님누림 2014-12-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584.html


순식간에 퍼진 주님의 병고침에 대한 소문으로 인해
주님이 어디로 피해가시던지 
사람들은 구름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그로 인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즉 그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은
주님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지위와 명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이 내세운건 유대교의 전통이었습니다.
정말 소가 하품하고 웃을 일입니다.
번데기 앞에서 감히 주름을 논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섬긴다고 하는 유대인지도자들에게 당할 딴지검에 대해선
예상하지 못하셨던 걸까요?
그들의 패역함을 그정도까지는 모르셨던 것일까요?

유대종교자들과 그들에 맹신하는 어리섞은 백성들로 인해
주님은 두로와 시돈 즉 이스라엘 변방으로 물러나가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주님의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들은 가나안여인이 병고침에 대해 구하였는데
거기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시큰둥이었습니다.
여전히 주님의 마음은 자기가 택한 백성 유대인에 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의 주님에 대한 배척은 계속되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백성과 자신의 택한 땅에서 스스로 물러나신 것이 아니라
배척당하고 쫓겨나신 것이란 것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유대인들이 당할 끝없는 고난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재림때 그들은 원통함과 통렬함으로 회개하게 됨으로 끝이 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유대땅에서 일어난 일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계속해서 주님을 배척하고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가 그러했고 그들을 따르는 신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회복이라고 안전할까요?
회복은 안전하다라는 공식에 안주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통과 습관에 젖어들어 그것을 내세우는 일이 없으리라고
감히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요?

윗트니스 리형제님이 언젠가 우리에게 경고한 말씀을 다시 되새겨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회복이라고 말하지 마라
주님은 언제든지 새로운 사람들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주님이 제자들을 다루시는 예


주님누림 2014-12-01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558.html
때로는 아주 사소히게 보이는 것들을 
꼭 필요한 것만 기록하는 성경에 남긴 것은 다 뜻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의 기록을 보면............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적지 않은 숫자이기도 했고
상황도 각기 달랐을 것입니다.

들판으로 떼를 지어 몰려온 이들은
단지 병고침이나 이적을 보기 위해 주님을 따라온 것에 불과하였으나
긍휼히 여기셨기에
병도 고쳐주시고 기적으로 먹을 것도 공급해주셨지만

한면으론
그들에게서 어떤 것도 바랄 것도 
주님의 성육신의 목적을 위해 도움이 될 것도 없는 것은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제자들을 분리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게 하고
그밖의 무리들은 자기들의 고향으로 보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에 에워싸여 휴식도 없고 시끄럽고 번잡한 시간후에
주님은 혼자서 기도하는 시간
아버지의 특별한 임재와 교통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파도가 높게 일어 노를 젓는라 애를 먹는 제자들에게 
새벽무렵 바다위를 걸어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화들짝 놀라서 유령이라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들은 여러 이적들을 보고 체험하고 나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주님께 고백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런 사실을 보고 
주님을 보고 주님을 향해서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문제들 어려움들 두려움들 위에 서서
주님을 바라보기만 해야한다는 사실....
그것이 참된 믿음에 서 있는 것이란 사실............




오병이어기적의 이면에서 볼 수 있는 주님의 성정


주님누림 2014-11-29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554.html

주님은 자기고향에서 인정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헤롯왕이 침례요한이 다시 살아온 것이라고 말하자
멀리 빈들로 피신하여 가셨습니다.
즉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기에 사람들이 쫓아오기 힘든 황무지로 피한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두려워하셨을까요?
인간적으로는 두려운 것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직은 십자가를 위해 붙잡히실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을 따라 여러 마을에서 오랜 길을 걸어온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5000명이라면
칠또는 팔천명쯤 되었을지 모릅니다.
고대에 그런 숫자의 이동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절박한 여려 사정들이 있었을 테죠.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혹은 병고침을 얻고자
혹은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자 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주님이 누구인지 그분을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 관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을 거절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쳐주시고 더하여 오병이어로 그들을 배불리 먹였습니다.

작은 소년이 가져온 물고기 2마리와 떡 5덩이의 헌신으로
수천명이 먹고도 열두광주리나 남긴 이 이적자체도 너무나 놀라운 것이지만
자기에게 오는 어리섞은 무리들을 거절하지 않으시는
절대자의 긍휼에 넘치는 성정을 더하여 감상해 봅니다.

자기를 무시하거나 오해하거나 엉뚱한 것을 추구할 뿐 아니라
폭정을 일삼는 이땅의 지도자에 빌붙어 사는 어리섞은 피조물에 대한.............







주님은 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을까


주님누림 2014-11-2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54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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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전하시는 놀라운 비밀의 말씀들

갖가지 이적등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2000년전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배척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살았던 동네에서는 평범한 배경으로 인해서였고

다른 곳에서는 그분의 비범함과 뛰어난 도덕이  감당이 안되서였습니다. 


오늘날에 주님이 오셨다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문자나 말씀으로 기록된 때에는 자기 멋대로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주님을 면전에서 대할 때는 사람의 관념과 해석과 옳다하는 잣대대로 할 수 없습니다.

아마 그 앞에서 함부로 말할 때는 여지없이 직격탄을 맞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세상 끝은..............어떨까


주님누림 2014-11-27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543.html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기막힌 일이 많이 있지만
한가지 변치않는 사실이 있다면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소극적이 되고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경계선이 모호해지며 
악한 일들은 점점 더 기승하게 되고 
사람들은 가진바 인간성 마저도 점점 더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오히려 세상의 마지막이 오길 손꼽아 기다릴 것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는
더이상 모호하거나 가려진 것이 없이 모든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끝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구별이 되어 
알곡은 추수되고 가라지는  뽑혀져 불태워지게 될 것입니다.

흙속에 파묻혀 있던 보화와 진주는
마침내 그 귀함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그 정체가 폭로되어 더 이상 사람들을 속이거나 괴롭히지 못하게 될 것이고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는 믿지 않는 이들도 생명나무의 잎으로 치유를 받아 장수하게 될 것입니다.

동물들도 더 이상 서로를 죽이거나 먹지 않고 평화롭게 함께 풀을 뜯어 먹고  어울릴 것이며
맹수도 사람에게 애완동물처럼 순하게 될 것입니다.

이외에 뭐가 더 있을까요?

이즘처럼 세상살이가 팍팍하게 느껴지는 때 
사람이 참 천박하다싶어지는 때 
이런 소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을지요...............





가라지-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


주님누림 2014-11-27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537.html

마태복음 라이프 스타디에서 보면

영적 의미에서 교회안에는 가라지가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교회는 전적으로 주님자신에게 속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회복은 어떨까요?

교회라는 영역에 회복이 속해 있는 공식안에서는 교회안에 가라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회복이라는 큰 범주안에 영적인 영역인 교회가 있다라는 공식안에서는 

회복안에는 가라지는 없다라는 가정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거짓믿는 이도 라이프스타디를 잘 요리해서 말발좋은 신언이나

심지어는 맛깔나는 메시지를 설파할 수 있습니다.

또한 좋지 않은 의도로 회복안의 교회에서 생활하다가

때가 되면 숨은 의도를 표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복이야 또는 회복안에 속해 있어라는 안이한 관념에 안주하지말고

교회안에서 깨어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가라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가라지랑 별로 구별이 되지 못하는

미숙하고 어린 상황에 처해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가라지는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규정되어 있네요.

어찌보면 좀 애매한 말씀입니다.

넘어지게 하는 것은 어쩌면 주님에게 실족하거나 교회에 대한 이상에서 실족하여

주님자신을 오해하거나 교회의 이상에서 흐려져 잘못된 관념에 처해지는  것도 넘어지는 것이겠죠...

그리고

생명에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은 결국 불법이며 거짓된  것일 것입니다..............

결국 생명이 없으면서도 있는 것처럼 행하는 사람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일 것입니다...........








여전한 소망의 이유


주님누림 2014-11-2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5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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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인 사람에  주님자신이 씨로 뿌려진 다음에는

신경쓸 건 오로지 그 씨가 잘 자라게 하는 일밖에 없다면

 참 좋겠지만,

가라지가 섞여 있을 수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가라지는 악한 아들들의 발현을 가져옵니다.

즉 거짓믿는 이들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안의 어떤 거짓 믿는 이들을 보십시오

어떻게 사람이 그것도 믿는 사람이 저럴 수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지만

그들은 차라리 믿음이 없는 이들 세상사람들보다 더 못한 인격의 소유자들입니다.


어쩌면 마지막 때가 가까워지는 지금

그런 가라지들의 악한 행태가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건

추수할 때가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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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이 오고 있다는 건 한면 슬픈 일이지만

우리가 만약 참된 곡물들이라면 그 추수는 기쁜 날들일 것입니다.




비유의 말씀에서 중점을 잘 잡아야하는 예


회복자취 2014-11-2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520.html



교회집회가운데 엑기스같은 개요만을 선포하면 그저 딱딱하기 때문에

신언을 할 때 예를 들기도 하고 비유를 들기도 합니다.


주님 자신의 말씀도 주로 비유를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유는 그 시대의 문화와 생활상의 영향을 받습니다.


윗트니스 리 형제님도 많은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이 청중을 휘어잡은 뛰어난 전파자였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회복의 여름겨울의 훈련메시지에서 지금까지도 뇌리에 남아있는 것은

주로 비유로 말씀하신 것들 혹은 이형제님의 생활중에 일어난 일들을 예로 들어 말씀하신 것등 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중

주님이 말씀하신 많은 비유들 중에 가장 뛰어난 것중의 하나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비유는 그 시대의 문화와 생활상의 영향을 받기에

즉 주님시대는 농사가 그 시대의 주 산업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드셨을 것입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건 무엇일까요?


아래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씨뿌리는 자라는 그림입니다.

아마도 그 모티브는 성경에 나오는 주님의 비유의 말씀이지만

모델은 아마도 19세기말  당시의 농부들이 들판에서 씨를 뿌리는 모습으로 표현되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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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도 화가의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씨를 뿌리는 농부가 석양을 배경으로 열심히

뿌리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말씀안의 뜻을 제대로 파악을 하였다면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씨와 그 씨를  뿌리는 자가 아닌

그씨가 심기워지는 땅의 각각의 상태입니다.


땅의 상태에 따라 뿌려진 씨의 수확때의 결과가 각각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로 볼 때는

말씀을 잘 깨달을 것과

환란이나 박해에도 넘어지지 않고

세상의 염려나 재물의 유혹으로 인해 말씀이  막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은 땅같은 마음의 상태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념의 변화는 혼의 변화중의 하나


주님누림 2014-11-21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509.html

내 세대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 학교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반공포스터를 그렸습니다.

그릴 때마다 북한 사람들은 빨갛고 징그럽고 뿔달린 동물로 표현되곤 했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총칼을 들이댄 공비에게 극한 두려움가운데서도 토로한 한 어린이의 비참한 죽음은

한때 꽤 오랫동안 국민의 영웅으로 추앙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 어린아이가 뭘 알았을까요.

그게 조작된 이야기란 말이 있었지만

정말 사실이었다하더라도  단지 어린이다운 순진함과 단순함으로

주입된 혐오감을 당차게 들이댄 것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이란 극심한 공포가운데 던져져 죽음이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상황에 있던

윗세대는 북한이란 존재자체가 혐오과 증오의 대상일지 모릅니다.

북한이란 카테고리가 쫌 애매하긴 하지만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 땅에 사는 사람들까지를 포함하여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사실일테죠


하지만

사람을 압제하고 착취하는 북한의 정권은 분명 증오스럽고 혐오할만한 체제이나

그 안에서 살고 그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야하는 사람들까지 몽땅 포함시켜야할까요?

심지어는 그 안에서 철저히 쇄뇌되어 남한을 철저히 적대시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실 시대적인 상황이 북한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꿔야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종교적인 관념은 어떨까요

 말을 하다보면 교회안에서도 이런 관념을 가진 성도를 보게 됩니다.


회복안에 있지 않은 믿는 이들은 구원을 받지 않았다고 단정하기도 하고

구원을 받았어도 유기적인 구원의 체험을 하지 못했다고 단정하는 것등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어느정도 우리가 회복안에서 갖고 있던 관념들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진리를 아는 것과

유기적인 구원에 대한 지표도나 원칙을 아는 것이 마치 유기적 구원의 실제인 것으로

혼돈하던 것도 우리의 관념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회복안에 있다면 그리고 회복되어 있는 중에 있다면

과거에 가지고 있던 

사물과  사람 세상 그리고 진리와 그 실제에 대한

경직된 관념들에서 매번 새로워지고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관념의 변화는 사실상 혼의 변화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두 남자의 얼굴


일상누림 2014-11-19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499.html
이즘 우리는 단체적인 침몰의 위기속에 살고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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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쩌다가 우린 이렇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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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가지 아는 것은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하게 되리란 믿음입니다




먹고사는 그 지난한 문제


주님누림 2014-11-17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485.html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베드로와 그의 제자들이 고기를 잡으러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도 없고
무엇보다 당장 먹을 것을 해결해야하는 문제에 봉착합니다.

예언한 대로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
목자가 침을 당하자
양들은 각자 흩어져 버리게 됩니다.
아마도 그 이유인즉슨 
육신의 필요
먹고사는 그 지난한 문제를 각자 해결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 싯점은 이미 부활한 주님이 제자들에게 두번씩이나 나타나신 뒤였지만
그래서?
뭐 어쨌다고?
라는 거죠..............

사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고나서도 
제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믿음이 없이
먹고사는 문제에 집착할 수 있는가 라고 
쉽게,
너무도 쉽게도 반문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린 아마도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배반할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간단히 맹세한 또 다른 베드로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각자 먹을 것을 구하러 흩어지는 것은
생존하기 위한 당연한 대처였습니다.

그때 주님은  특별한 이적을 보이십니다.

한가지는 그들이 밤새 고기를 잡기위해 애쓰는 동안
바닷가에서 이미 먹을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이고
밤새도록 물고기 한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이
주님의 제시한 방향에서 
그물이 찢어질만큼의 많은 양의 고기를 잡은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내 양을 치라 돌보라라고 명하시기 전에
이 이적을 보이셨다는 것은
먹고사는 그 지난한 문제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보증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즉 당장 입에 들어갈 음식에 대해 염려하지않을 뿐 아니라
필요한 것들을 얻을 일에 대해서도 주님의 안배가 있을 것이란 것.

글쎄요.
이것을 얼마나 믿고 신뢰하고 안식할 것인가는
각각의 믿음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사실
몇십년전도 안되는 싯점에 웟치만 니 형제님은 문자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주님이 어떤 돌보심을 주었는지를 체험하였음을 간증하였습니다.

 




2014년 가을이 지남


일상누림 2014-11-1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468.html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을이란 날씨를 주셨다는 건 매우 창조적인 아이디어였습니다.
누가 뭐래도
가장 즐길만한 계절인
가을....

실제론 죽어가는 시절인 가을이 너무도 멋지다는 건
사람이 이땅에서의 끝도
매우
아름다울수 있다는 암시를 주시는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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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가을은 생각보다 무척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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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끝났다 싶은 주일이 몇번이나 지나고 나서야

                                                         정말 끝이다 싶은 지난 주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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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한 햇볕때문에 봄인줄 알고 튀어나온 얘는

                                                이번 주 한파로 쏙 들어가고 말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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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란한 색들의 조합은 자칫 촌스럽고 정신사납게 보이는데

                                 가을의 단풍은 예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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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청동 카페에서 내다본 거리

                                              어쩌면 다른 나라 어떤 도시에서도

                                                 이렇게멋진 거리를 보기가 쉽지 않을 지 모른다고

                                                                      맘대로     자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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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원들이 늘 귀찮게 어딜가시냐고 물어대지만 청와대 앞 은행나무 길도 너무나 멋지기에
그런 귀찮음과 살벌한 눈초리쯤은 무시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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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세계에의 인식-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하여


주님누림 2014-11-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401.html

보이는 물질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은

굶거나 춥거나 병에 걸리는 생존에 위협에 민감할 수 밖에 없고

이런 일에 대해 쉽게 요동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도 이런 일에 대하여 긍휼이 여기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조금의 긍휼도 없이 단호한 심판까지 말씀하는 영역은

하나님과 사탄의 대립 즉 보이지 않는 영적 대립에 대해

사람이 함부로 판단하는 죄에 대해서 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이던 뭐던 이런 것을 범하였다 정죄받음에 대해

크게 반응하지않으신 것과 달리

귀신들려 장애가 생긴 사람을 고치신 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말할 때는

아주 단호하게 성령을 거스르는 죄의 심각성을 설파하셨음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우리는  보이는 물질세계 너머에 있는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을 끊임없이 늘 새롭게 가져야한다는 의미입니다.


물질세계가 옥죄는 것이 더 심해질 수록

우리가 믿음으로 있는 영역인

더욱 영적 영역에 대해 돌이켜야 하며


그럴 때만이

우리의 싸움은

사탄과의 싸움임이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긍휼의 능력과 힘


주님누림 2014-11-01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385.html

하나님의 우리에 대해 갖는 여러 감정과 느낌중

가장 밑바닥에서 우릴 받치고 있는 건

바로 우리에 대해 불쌍히 여김 입니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너무나 나약하고 비참한 상황가운데 떨어져 있다고 여겨질 때

그래서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절망하고 포기할 때

예기치 않았던 하나님의 긍휼이 우릴 덮습니다.


긍휼은 그런 것입니다.

독자를 잃은 나인성의 과부에게 주님이 아들을 살려 돌려보내 주신 것과 같이

그건 단지 그녀의 슬픔 절망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주님이 그녀의 아들을 살려줄 때 무엇을 댓가로 기대하였을까요?

그저 그녀의 놀랍고 감사에 넘친 눈물 뿐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시간이 갈 수록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할 수 없음

우리의 하나님께 되돌릴 수 없는 한계와  나약함뿐입니다.

그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지식이나 메시지개요나 권면이 아니라

그저 우릴 긍휼히 여기소서라는 토함에서 얻는 그분의 돌봐주심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귀한 체험이며

가장 자랑할만한 체험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참된 힘을 얻게 될 것이고

그건 그날 주님의 심판대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의 왕에 대한 환상


주님누림 2014-10-2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366.html

우리 사람은 외적 내적으로 약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일이 너무나 버겁기 때문에

강력한 힘에 기댈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환상을 갖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모든 이방족속들은

강력한 국가와 왕아래 뭉치게 됩니다.

과연 그게 좋은 일이었을까요?


왕이 하는  일들의 대부분은

세금을 거두고 그들위에 압제하고

병사로 징집하여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과연 보호를 받는 일이었을까요?


하나님이 없는 이방인들은 어쩌면 그런 식으로라도

보호책을 마련할 수 밖에 없었노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왕중왕인 하나님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셨던 이스라엘 백성은 왜 왕을 요구하였을까?

바로 이것이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대신

땅에 속한 왕을 믿는 쪽으로 돌아섰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초적인 것은

우리의 믿음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두는 것에 있는 것에 있다는 것이 새롭습니다.


하지만 이것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다른 주머니를 차게 되는 것

다른 의지할만한 것을 세우는 순간부터 입니다.







소지역 복음집회


소지역삶 2014-10-2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3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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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효율적인 성과를 위해서 아마도 복음집회는 소지역별로............
앞서 두분의 간증이 있었고
찬양
말씀전하기
                의 순서로 진행된..............

대지역별로 하는 거 보다 보다 친밀하고 직접적인 목양이 가능한 모임형테가 아닌가 싶습니다.

문득 새삼스럽게 발견한 것은

현재 속해 있는 소지역의 형제님들 중에
소싯적에 한 뚝심?하셨던 분들이 꽤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타고난 자신의 능력을 무엇보다 믿고 의지했지만
날이 갈수록 주님의 긍휼을 의지하는
연약한 존재들이 되어 간다는 것.

회복에 오기까지 구원파에서
몇십년간이나 무보수로  일하며
청춘을 보낸 뒤에 회복에 연결된 한 자매님의 간증을 들으며

소위 유병언일가는 그 돈으로 호의호식하며
예술가입네하며
게으르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찍어
루브르같은 세계 최고의 전시장에서 전시를 열며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리며 살았겠구나.............

하지만
그 끝은 이 자매님이 유병언보다 더 좋은 삶의 결말을 갖게 될 것입니다.

패역한 자의 멸망은 나중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심판을 받았음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될려면 아직 멀었어..


주님누림 2014-10-2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53335.html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모욕적 말이 많이 있지만

그중의 하나가 사람이 될려면 아직 멀었어..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도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인격과 됨됨이는 갖춰야한다는
기준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즘의 우리나라의 위정자들 소위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사람이 되지 못한 사람들, 사람이 될려면 아직 먼 사람들의 집합체가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더하여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을 보면

2000년전의 주님이 이땅에서 보셨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저러하지 않았을까하는

그래서 아아도 주님이 오늘날 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아~라고 일갈하실 수도 있겠다싶은 생각마저 드는데요


답답하고 어이없는 마음에

왜 이럴까?는 생각만 하다

마음의 평강을 위해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얻어야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덕과 윤리가 중시되는 사회적 분위기

더 나아가

법과 처벌이라는 엄격한 틀이 적용되는 사회적 분위기라면

사람안의 무겁고 어두운 죄의 본성이 드러나지 않을 지 모르지만

반대로

그 모든 것이 느슨하게 된다면

2014년 대한민국의 실상과 같이 되게 될 것이란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신음하며 혼란스러워 하는 이즘

우리의 소망과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은 그냥 놔둬라

하지만 너희들은 사람이 되라.

너희를 낳은 아버지가 너희에게 원한 그대로의

참 사람이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