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일어나고 있는 일이
이미 일어났던 일이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 있는지 모릅니다.
딸아이가 결혼을 했구나..
주님의 긍휼로
예비사위 시절,
회복안에서 새롭게 침례도 받고
주안의 형제가 된 사위.
역시 내 사위인가?
실감이나지 않으면서
그저...
뉘집 아그들인지 참 예쁘고 사랑스럽다~라는 건
...
그 와중에도
모든 엄마들의 꽁깍지 씌운 착각인지...
하지만
어제 소그룹에서 교통한
하나님께 분별된 "피남편"을 외쳤던 십보라처럼
마음에서 떠나보내는 것이
현명한 처사겠죠..
주님의 긍휼로 그분안에 교회안에 보존되길
구하며...
자주 외유를 하다보면
일박보다는 무박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판단도 생깁니다.
게다가 서울에서도 가깝고 시야도 뻥뚫린 야외에
오염안된? 해물을 먹을 수 있는 강화도로 정하고 나서는
준비과정도 일사천리로............
장소를 바꾸면 ...사람들도 다르게 보이고
매번 같은 구성의 모임도 새롭습니다.
그래서 아마 주님도 제자들을 데불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셨는지 모르겠네요.
우리도 가능만 하다면.....
각각 맡은바 누구는 떡을 굽고
누구는 운동경기 진행을 맡고
누구는 고기와 해물을 사고....
그리고 오랜시간동안 찬송도 부르고
2부 교통시간도 갖고....
족구와 발야구와 게임 게다가 바베큐와 불꽃놀이로 꽉채운...하루...
아이들은 알아서 놀이를 개발합니다.
정 할 것이 없으면 묵찌빠를 하거나....
파리의 지하철내에선... 문이 알아서 열리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앞의 파란단추를 꾹~눌러야 열립니다.
.......
바닷가는 다 물과 파도의 일렁임일거라는 관념과는 달리
강화앞의 바다는 그저 회색갯벌이 ~
게다가
물이 들어와 봐야
누런 회색빛이겠죠라는 생각도
나의 관념일지
..............
남들은 다 산으로 갈 때 가을 갯벌을 찾은 사람들은 넉넉하고 고즈녁한 순간을 누립니다.
떠나기 일주일전 부터 이미 시작된 여행의 느낌.
하루하루의 일정이 예견되어 있으며 정보가 빠삭한 이 세대에서
낯선 곳에 대한 기대나 설레임은 떠나기 전부터 그 느낌이 반감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끈적하게 늘러붙은 일상에서
삶의 계속성의 착각에서 벗어나 삶 자체를 멀리 떨어뜨려놓아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싶네요.
그래서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이 삶전체가 그저 나그네의 길이며
잠시 머물러 있음이 허락되는 일시적인 장소에 불과함을 ............
*( 어느날 문득 옆으로 누워있는 율이의 모습이 갑자기 얼마나 보송하게 보이든지.........노친네가 아닌 어린아이처럼...)
고슴도치 율이에겐 과연 몇달 ? 혹은 며칠?이 남은 것일까.
이제껏 아이들 등쌀?에 안 키워본 애완동물이 없지만 이렇게까지 자기 명을 다 하고도 그 이상으로 장수?를 하는 동물을 본 적이 없기에
율이의 마지막 날들을 보는 것이 ....
자기혼자 배변을 보는 것이 힘들었었나 어느날 좀 씻겨주다가 아랫배를 따뜻한 물로 맛사지해주니까(딸아이가)
검은 똥을 내 보내는 것도 보기 민망하고
먹이를 먹기위해 힘겹게 일어나는 것도
걷기는 커녕 엉거주춤 엉덩이를 깔고 앉아있는 것도 안스럽고
또
먹이는 얼마나 천천히 먹는지 딴 일을 보면서 한번씩 생각나면 밀웜애벌레를 코 앞에 놓아주는 데
문득 가보면 옆으로 누워있기 일쑤이고........
.
예전에 얼마나 기운이 넘쳤는지 밤새 뛰어다니고
쳇바퀴를 시끄럽게 돌려서
참다 못해 딴방에 넣고 문을 닫아놓기도 했었던 적이 있었었지..
문득 허망한 느낌....
전능자의 입장에서 보면 타락하여 버림받은 사람의 일생은 얼마나 더 무상하게 여겨질까...
그 짧은 생애동안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다투고 경쟁하고 애쓰지만, 결국은.........
(처음으로 수준의 궤도에 오른 오이지물김치 기념..그렇다고 내년도 같은 맛이라고 보장 못함..)
아주 공부를 잘해온 사람에게 공부하는게 재미있냐?고 물으면
공부가 좋아서 하는 사람이 있겠는가??하고 대부분 대답합니다.
하다보니 다른 것보다 공부를 비교적 잘해서 ..심지어는 공부외에는 잘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거 같아서..라는 변명들을 하는데
그런 모든 말들이 성적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열등감을 느껴본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차라리 염장지르는 발언이 아닌가 싶은데요....^^
선택이 아닌 필수여야하는 일중엔 공부외에 요리라는 항목도 있죠.
특히 결혼한 여자들에게 평생의 굴레와 같은 이 일은
(요리라는 과정이 정말로 부잡스럽고 성가신 것이기에)
어찌보면 공부보다 더 징하게 느껴질 수있는 분야임에도
개중에는 요리하는데 기꺼이 많은 시간과 힘을 쓸만한 열정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원치않던 원하던 공부나 요리는 특히나 교회생활을 하는데
자매들이 내내 감당해야하는 두 항목이라는데 이견을 가진 사람이 없으리라 봅니다.
지난 한 10주동안 네 사람의 자매들이 사무엘상하 라이프스타디 총 38메시지 공부?(추구)를 완성했습니다.(쁘듯~)
미팅때마다 각 한 메시지씩 추구해서 요약해서 발표하고 서로 교통하는 방식으로...
사실 말씀을 추구하고 교통하는 것에 준비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모임형식이기에
그래서 그 단계에 도달한 것만으로도 너무나 훌륭한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다된 것일까요?
그것이 우리의 목표일까요?
문제는 그 다음 단계입니다.
그러는동안 얼마나 빛비춤 받았는가 얼마나 만져졌는가
그리고 깊은 속에서 주님이 얼마나 증가했는가 ...의 단계입니다만
사실 이런 질문조차도 어쩌면 그것의 깊이에 충분히 들어가지 않앗다면 여전히 객관적이고 피상적인 가정일지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이 일을 행하고 역사하는 분은 주님자신이기에
우리가 교통하는 이런 말들... 빛비춤 만져짐 그리고 주님의 증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당장 무슨 변화의 증조가 보이지도 않은 영적인 상황에 대한 이런 묘사는 그 깊이를 모를때
여전히 바람과 기도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그것을 이루는 건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생활하면서 부단히 추구해서 얻은 성과들인 영적인 언어에 대한 능숙한 묘사와 표현이
영적 생명의 성숙과는 무관할 수 있다는 사실...
2년동안 전시간 훈련을 받고 몇십년의 교회생활을 해서 말씀을 노련하게 풀어낼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것과
영적 생명이 성장하고 영적인 열매가 있는 것과는 별개의 것일 수 있다는 것 우리는 솔직히 인정해야합니다.
여전히 자라게 하시는 것은 주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선 지체들이 계속 권면하고 권면하는 것은
주님께 열려있어야한다라는 또 대부분의 우리에게는 여전히 피상적인 상태에 관한 권면입니다.
머릿속으로 그 단어를 이해하고 알아듣는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론 불충분한 것이...
'열려있다'라는 상태에 대한 이해 역시 각각의 체험과 도달한 정도에 따라 그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함에도 마치 야곱이 수없이 환경의 다루심을 받을 때마다 여호와앞에 깨지고 부셔졌지만
전정으로 만져지지 않았기에 계속된 좌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야곱은 여전히 모르나 전지자인 주님만이 아셨던 것처럼....
우리는 모르지만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 모든 상황을 꿰뚫고 계시다는 것만이
여전히 우리의 위로와 보장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생활과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역시 자연스러운 자연~!
얼마전(장마철 전) 자매님들만의 섞임으로 간 백사실 계곡입니다.
비록 한 여름 찜통더위라도 산바람이 지나는 골목에 잘 자릴 잡으면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곳이네요.
고인돌처럼 보이는 이 돌무더기들은 이항복 별장터..
그리고 정자가 자랄잡고 있었을터.
찬송과 그리고 왜 이 시대의 마지막에 대한 교통이 이어지고...
그리고 각자 재량껏 싸온 도시락들...
정말 오랜만에 싸본 삼단도시락에 커피든 마호병까지...
사람의 나이로 치면 90세에 육박하는 나이에 접어든 율이...
이즘은 일부러 흔들어 깨우지 않으면 밀웜도 안먹고
최근에는 떠놓은 물도 제대로 먹는 걸 할까?는 의심이 드는....
그리고
냄새도 얼마나 심하게 나는지..이즘은 베딩도 그리고 덮개도 자주 갈아준다는...
(그 말이 맞음, 사람이 늙으면 더 자주 씻어야한다는...)
활기차고 호기심많은 동물을 가둬놓고 키웠다는 미안함 마음에...
,
만약...
자연상태에서 자기 힘으로 먹이를 찾고 그러다 먹히기도 하고 굶기도 하면서
그렇게 당연히 약육강식의 법칙대로 죽는 게 좋은걸까?
갇혀진 대신 공급해주는 먹이를 먹는게 좋은걸까?를
계속 묻게 되는데....
,
우리 사람은 어떨까...
당신의 노후는 어떤 것을 바라십니까?
,
양로원문화가 발달한 서양(우리도 그렇게 될 것임)에서는
양로원가기를 그렇게 싫어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무기력과 무능력해지는 것도 싫고
그런 류의 사람들만 주변에 보이는 것도 싫고..?
.........
장수의 시대가 왔다고 좋아들 하지만
....................................
몇십년을 더 산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냥 산다는 의미라면.
이라고 생각하며...
사람이 사람으로서 그리고 자신의 일과 목적에 있어 성숙해지지 않는다면...말임.
.
얼마전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더 이상은 안스러워 사진찍기를 안할 거 같은........율이..
참 멋진 고슴도치였어..넌...
.
.
널 만난 건...좋은 일이었어.
.
웬지 널 묻을 때를 생각하면 미리 눈물이 나.
.
이즘 다루는 메시지인 2013 초반 장로들과 책임형제님들을 위한 훈련중
첫번째 메시지의 개요중 ... 얼핏 이해가 잘 안되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영으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과의 수평적인 교통과
신성한 영으로 하는 주님과의 수직적 교통의 차이가 무엇인가?하는...
즉 사람의 영과 신성한 영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개요를 만드신 분에게 들어봐야 정확한 뜻을 알 수 있겠지만
사람의 영엔
그 영에 의해 변화된 인성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반면에
주님과의 교통을 가능케하는 신성한 영엔
인성의 어떤 부분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자체가 우매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떤 영역을 논리적 이론적 혹은 교리적 영역으로 명확하게? 나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때문입니다.
.
다만
첫째, 우리의 인성의 어떤 부분들의 변화되지 않은 날 것, 천연적인 영역안에서는 그냥 인간적인 관계를 갖을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안의 합당한 지체들간의 수평적 영적 교통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인내, 겸손 친절, 배려같은 기릴만한 것들 조차 천연적인 것이 아닌 영으로 인한 것인지 분별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그런 것에 대한 우리의 안목과 분별과 체험이 있어야 영역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다는 것이죠....
또한 주님과의 교통과 성도들간의 교통이 따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미치고 서로를 강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마치 계란이 먼저인가 닭이 먼저인가의 답이 애매하듯,
하나님과의 교통과 성도들간의 교통은 별개의 분리된 교통이나 우위의 문제가 아니라
긴밀히 연관된 교통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자아를 십자가에 넘기는 더 깊은 처리가 필요하다는 것~!!
자아를 처리하는 것에 대한 많은 오해와 잘못된 적용 그리고 실재가 없다는 것은
위의 모든 것
사람의 영과 신성한 영으로 인한 교통이 부재하거나 없다는 것~!!이기에
자아를 부인하는 실재는 위의 모든 것보다 먼저 있어야 하는 선결조건입니다.
자아를 부인한다는 것......
어떻게 보면 어렵지만 어떻게 보면 참 쉽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게 뜬 구름 같고 이론일 뿐이고 보고 듣는 것도 적고 체험도 별로 없지만
오래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적극적인 모든 예와 소극적인 모든 예는 우리로 비치는 거울처럼 보게 합니다.
적극적인 예는 감상할만한 따르고 배울만한 것으로,
자아를 내려놓지 않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폐해를 가져오는 것인가를 봄으로.........
그리고
다만 그것을 다른 사람을 지적하고 판단하는 것이라면 아무 유익이 없지만
배우고 적용하여 자신의 자아를 처리하는 것을 한다면....
모든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빠른 것이 미덕인 것이 이즘은 일반적 추세이지만
어떤 것은 시간이 오래 걸려야 제대로 되는 것도 있는 법이죠..
이를테면
나이가 먹으면 정말 운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항목입니다.
운동을 해서 건강해지기도 하고
더하여 쳐진? 살도 좀 올려붙고 탄력도 생기는 정도의 결과를 보고 싶은데 그럴려면
최소한 일년이상의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고
그리고 그상태를 유지하려면 계속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힘들고 지치고 별 효과도 없는 듯하여
포기하기가 쉬운데
꾸준히 한 사람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효과도 보고 그것이 동기부여도 되어
중간에 시행착오가 생겨도 극복하고
꾸준히 운동하는 궤도의 목표를 달성하게 됩니다.
정말 이런 목표를 달성한 분들이 있습니다.
단지 부러워하며 입맛만 다신다면 "날로 먹으려고 하지 마라~"고 한 소리 들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구처럼 나도 이젤앞에서 붓잡고 폼을 잡아보고 싶은
나름대로 그림을 그리는 여유를 갖고자하는 분들이
어느 정도? 그림을 그리려면
(사실 이건 질문자체가 애매한 것이지만)
얼마의 기간이 필요할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최소한 10년쯤 꾸준히 모색한 뒤에 자신이 뭘 표현하려고 하는지 알게 되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면
대부분 난감표정을 짓게 됩니다.
머 어디 그래서야 그림 그려보겠다고 덤빌 것인가?
무룻 한 세계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인가
귀한 것일 수록
얻거나 이루려면
많은 시간과 인내와 땀과 투자가 필요한 법.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할진대
더 높은 차원의 영적인 일은 그렇게 쉽게 도달하거나 이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이를테면 신언에 대하여.
새신자나 혹은 교파에서 막 들어온 분들이 모임중에 말하기가 어렵다고 호소하면
신언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라고 라고 우선 안심시키도 하고 , 또는 요령?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
시작은 미약해도 괜찮은 것이지만
사실 집회중에 일어나 말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일까요?
그냥 말한다~라는 것으로야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가령 이런 저런 생활에 있었던 일이나 경험담 소감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단계 더 나아가
메시지를 면밀히 읽고 참고서적도 읽고나서 주요맥락을 잡아서 잘 요약을 한 다음 그 내용을 발표하는 경우는 쉽지 않습니다.
집회의 오프닝이나 크로징하는 분들이 주로 이런 것에 주안점을 두어 교통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깔끔하고 잘 정돈된 오프닝을 하며 더하여 생명과 영을 공급하는 반면에
어떤 분들은 심지어 횡설수설하는? 그래서 욧점이나 내용전달조차 잘 안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차이는 기본적으로
그사람이 가진 지적 역량과 영적 지식과 그 이해의 차이에 따른 것입니다.
얼마큼 더 깔끔한 욧점정리의 전달을 하느냐는 그 사람이 축적한 영적인 지식의 기초에 달린 것이겠죠...
그러나 "부지런히 찾고 살핌"(벧전 1:10)은 그저 이론이나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받은 은혜를 확실히 잘 알고
말씀의 젖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집회중에 말씀을 공급하는 정도는 말씀안에서 그 사람이 얼마큼 목양을 받고 누렸는가에 달려 있다고 불 수 있겠죠.
더하여 또 차이가 있다면
신언자의 영적 생명의 성숙의 차이에 있을 것입니다.
즉 신언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말씀의 무게와 공급의 차이가 있는 것 부인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자신은 어리지만 성숙한 분들의 공급엔 깊은 속에서 아멘~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어떤 신언자의 영적 무게를 체험한 적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임에 이런 무게있는 신언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있다면
그래서 단지 영적 지식을 나열하여 다른 사람을 기죽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젖을 공급하는 목양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놀라운 광경일까요........
중요한 것은
힘들다고
어렵다고
요원하다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 이상과 목표가 멀고 까막득해 보일 지라도
꾸준히 추구하고 실행한다면
최소한 곁길?로 빠지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궤도에 오를 때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글의 제목은...어떤 분의 칼럼제목 " 청춘은 위로보다 역활이 고프다"에서 한 단어만 바꾼 것입니다.)
이즘 한국?에 있는 교회들안에서는 젊은 세대를 얻고자 하는
아니 기존의 젊은 층만이라도 붙들어두고자 하는 절박한 필요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젊은 층이 교회안에 적어지고 있는 추세는 단지 회복의 교회만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이 세대의 풍조로 보아
회복안에 많은 수의 젊은 이들이 넘쳐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대할 만한 것은 아니었어도
회복안에 있는 완전한 구원과 높은 수준의 사역은
진리를 추구하고 참된 것을 추구하는 소수의 젊은 층들이 어느 정도 퍼세트를 유지하는 것은 충분히 기대할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진리와 이상에 사로잡혀 자신을 헌신한 젊은 이들이
모든 집회에서 능동적으로 기능을 발휘하여 순수한 웅지가 주는 활기로 가득채우는 것은 물론
실재적인 모든 봉사의 한 부분을 맡아
교회의 일들을 척척 해내는 기동성과 추진력을 보는 것 역시
기대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
그런데 어느날 부터인가 교회안에 청년들의 그런 위임과 봉사는 커녕 그냥 숫자만으로도 줄어들고 있음은
숨길 수 없는 현재의 긴급한 위기상황인 듯 싶습니다.
.
꽤 여러해전이긴 하지만,
어느 날 대학생 모임에 참여해보게 된 적이 있었는데,
놀라웁게도 정말 놀라웁게도 ~!!!
교사 한분이 꽤 길게 말씀을 가르치고
다른 사람들은 한참동안이나 조용히 듣는 시간이 있고 나서야
듣고 깨달은 바를 교통하도록 독려받는데
젊은 이들이 다들 물에 삶은 파줄기 모냥 고개를 푹 숙이고 지적받으면 마지못해 한두마디...
...........
그것이 그 집회소만의 상황이었는지 아니면 대부분의 청년대학생의 모임이 그러했는지
혹은 지금도 그러한지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사역집회도 아닌 대학생들 모임에 궂이 가르치는 교사가 길게 말씀을 전하고 통제하고 독려하는 주체가 되어야할까라는
안타까운 의문이 ..............
사실 모든 집회에서 한 사람이 말하고 남은 사람은 듣고 있는 기존의 기독교의 모임을 지양하고
모든 사람이 한 사람씩 신언하도록 독려하고 있는 마당에 .
대학생들 정도면 아니 솔직히 고등학생 정도여도 이미 스스로 추구하고 교통하는 모임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나이가 아닐까? ...
.................... 그들이 주체가 아니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청년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먹어도 또 배가 고픈 청춘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분위기의 목양이 서포트라면
사실 청춘의 무시할 수 없는 필요는 교회안에서 그들의 역활에 대한 자각과 자부심일 것입니다.
그들이 교회안에서 교회를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활력소가 되고 있다는 중요성을 자각한다면 그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힘과 시간과 지성을 말씀을 추구하고 영을 훈련하는 것에 쓰는 것을 자발적으로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렇고 영적인 일에서도 그렇고 신바람이 나야 , 즉 목적과 동기가 자발적이 되어야 잘 굴러가게 되어 있기때문입니다.
................
.
요컨데 청년들에게 일거리를 줍시다.
그들로 하여금 교회의 중요한 주축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합시다.
.
사도바울의 마음은 얼마나 넓었는지...
어떤 사람들이 바울에 대한 경쟁과 다툼의 동기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그건 단지 그의 성품이 온화하고 남과 다투지않을 만큼 마음이 넓기 때문이었을까요?
빌립보믿는이들에게 쓴 편지에서 보면
자신의 형편이 어떠하던지
(즉 훌륭한 복음 전파자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던지 그렇지 않던지
혹은 감옥에 갇힌 가련한 죄수이던지 자유인이던지)
사도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구원에 이르는 것,
즉 그리스도가 사람들 사이에 전파되는 것과 자신안에서 존귀히 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목표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만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기뻐하리라고 진심으로 말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아는 그 그리스도가 어찌나 광대하고 다함없는 풍성이던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퍼주던지 나눠주던지 전혀 부족하지 않음을 알기에
그는 다른 사람들 다른 사도들 다른 복음 전파자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본 이상이었습니다.
.
아마도 부족한 자원과 좁은 땅덩어리에서 복닥복닥 살아가야한다는 각박함이 몸에 밴 탓일테지만
넓고 풍족한 미국땅에 가서도
경쟁하고 다투고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미리 점유하는 거 때문에
한국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정도를 지키며 평화로이 공존하는 분위기를 흐려놓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엄마들은 선생들에게 촌지이던 선물이던 뇌물공세를 벌이고 지나친 경쟁의식을 부추기는 일 같은 ....
그 모든 일의 목적은 혜택을 자신의 아이에게 더 많이 받도록 하고 싶은 욕심과 불안감 때문이겠죠...
.
이 세상의 모든 갈등, 경쟁, 욕심은
누가 더 많이 갖느냐 차지하느냐 즉 다른 사람이 차지하면 나머지 사람은 잃게 된다는 한정성 때문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누군가 권력을 차지한다는 것의 의미는 그 아래 억압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의미하며
누군가 1등을 하면 그 아래 줄줄이 등수가 매겨져서 상대적 우월감 또는 열등감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하며
누군가 땅을 많이 차지하면 누군가는 등을 댈 한평의 땅도 박탈당하는 위기를 당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좀 더 넓게 보면 이 세상에도 다른 사람과 경쟁이 필요없는 삶의 가능성과 기회는 많이 있습니다.
헛된 영광만 추구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
하물며 주님의 인격을 누리고 말씀을 추구하고 영과 생명을 누리는 것에도 한정됨이 있을까요?
진리가 다 밝혀지고 다 해석이 되었기에 더 추구해야할 진리는 없는 것일까요?
말씀안에서 새로이 깨닫고 체험되어져야할 영역은 없는 걸까요?
우스개소리로 ...
우리가 주님을 이땅에서 다 누리고 나면 영원시대에는 누릴 것이 다 떨어지는 걸까요?
...........
NEVER~!!
걱정 붙들어매랑께~~!!
친정엄마집에 갔더니 마침 티비에 회복의 위성채널을 깔아놓았다고 하셔 낼름 탐색전에 들어갔다.
라이프스터디코너가 있어 들어가 열었더니 리형제님이 멧시지 전하는 모습이 마치 그때처럼 눈앞에 생생~
문득...대형 티비속의 형제님이 살아계시고 일년 이차 훈련집회할 때마다 가슴두근거리며 흥분되었던 그날들로 돌아간듯
반갑고 행복하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참 그땐 그랬었지....
아..새롭다.
아 파워풀~ 짱한 카리스마~ 압도하는 분위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머리와 가슴에 꽉 박히는 강렬한 스피치~
그냥 회복식으로 말하면
그 영의 흘러넘침!!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말과 행동과 인격이 동일한 하나님사람~!!인 분에 대한 신뢰감~
한 십여분 보는 동안
가슴에 남은 한 문장
"믿음은 들음에서 부터 시작된다"
올커니 그렇지...추임새가 들어간다.
말씀전하는 분이나 반응하는 분들의 분위기가 판소리 마당같이 같이 어울려 논다.
..............................정말 그땐 그랬었지~
이제도 리형제님이 하시던 것을 누가 대신해주길 바라는 것은 아마 시대착오적인 착각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기준으로 말씀을 전하는 분을 평하는 잣대로 삼는 것도 너무한 일임에 틀림없다.
다만...어떤 집회에서든
크고 작은 위임을 받아 말씀을 전하는 분들이
이런 리형제님이 보이셨던 동일한 부담안에서
다만
말씀의 지식이 아닌
말씀안의 영을 만지도록
공급하는 기본룰안에 머물길 바래본다.
어른들이 주일집회를 가질 동안 (돌아가면서 하고 있음) 유치원부터 초등저학년을 돌보기로 하고 있는데..
어느 주일 제 차례였을 때 수수깡으로 만들기를 다하고 나서도
시간이 쫌 남게 되어서 아이들이 만든 것을 앞쪽에 쭉 진열하고 나서
어떤 것이 제일 잘 만들었나 말해보기로 했습니다.
결과는...놀랍게도 아이들이 보이고 느끼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보기에도 잘 만든 것을 지목한 것이 아니라)
그래야하는 대로 즉 누가 가장 힘이 세고 아이들 사이에 영향력이 있는가에 따라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없는 대로 사실 대충 성의없이 만든 것을)
잘한 것으로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일까요?
이 험한 세상에서 가능한한 편하게 살아가려면 처세야말로 가장 큰 덕목임을 우리는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지 않나요?
.
이천년전 주님이 유대땅에서 사람으로 사셨을 때,
지금까지의 인류의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시간을 살았던 유대 사람들 중
{성경의 기록에 근거해서}가장 잘 처세를 한 사람들을 꼽으라면
그중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도 그에 속할 것입니다.
한번도 장사지낸 적이 없는 굴을 갖고 있을만큼의 재력을 가진 요셉과
장사용품으로 백근이나 되는 몰약과 침향을 가져올 수 있을 만큼의 재력을 가진 니고데모
두 사람은 그 재력을 이미 가졌거나 그 재력과 지위를 가지기 위해 아주 처세를 잘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처세를 아주 합당한 삶의 지혜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지혜는 성경의 지식과 현재의 상황에 대한 판단과 사람의 대한 이해도 포함하기에
예수가 특별한 존재이며 어쩌면 예언된바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만...
현세에서 그들이 쌓은 재물과 인맥들 지위들을 포기하고 싶지도 더 나아가 핍박을 받고 싶지도 않았기에
몰래 숨어서 일의 추이가 어떻게 돌아가나 살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현세에서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유지하면서도,
예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한 할만큼 했다고 하는 자기합리를 하는 모습은
이땅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이 취하는 삶의 처세일지 모릅니다.
.
오늘날 이땅에도 이렇게 지혜로운 많은 종교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날의 기득권세력이 잘못되었다는 것뿐 아니라
종교조직이 쌓은 역사와 전통이란 것들이 원래의 성경이 말하는 것에서 상당히 멀어져 있거나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를 마땅히 그래야하는 그대로 믿음으로 인한 핍박은 피하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으로
위안을 얻거나 자기 합리를 하는 .............
하지만 예수가 이천년전에 어떤 식으로든 자기에게 선대한 사람들을 그날에 모른체 하지 않으리라는? 상당히 자기중심적이고
인간적인? 바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기릴만하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만은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점에 대하여 리형제님은 조직화되고 진리에서 멀어진 기독교의 상황에 대해 상당히 실랄하게 말씀하셨고 그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심지어는 회복안에 있는 지체들중에서도 기독교가 이룬 어떤 성과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반문하는 분들도 있지만...
타협이나 처세야말로 주님이 완강히 거절하고 배척하셨던 성경안의 모든 사례에 대해 말하자면
더 이상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혹 오해가 있을지 몰라서...
리형제님이 기독교계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하지는 않았나 하는 사과를 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혹 어리거나 마음이 여린 믿는 이들이 그들의 한계내에서 상처받고나 오해를 했을지 모르는 부분일지 모릅니다.
글쎄요...누가 그 안의 것을 다 감히 알아서 짐작할 수 있을는지요....
.
우린 각각 자신의 한계안에 갇힐 수 밖에 없는 한없는 긍휼이 필요한 연약한 그릇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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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 3, 31 자 서울교회소식지에 실렸던 란 캔거스 형제님의 미니스트리 제 12권 제 1호 메시지 8번에
실렸던 메시지중 일부를 게재한 것을 읽고 나서 요약해 옮겨놓습니다.
란형제님은 이 교통이 리형제님이 1981년 혹은 82년에 인도하는 이들과 나눈 말씀에 토대를 둔 것이라고 하는군요.
이 메시지가 오늘날 주의 회복의 상황에 대한 적절한 예방주사인 것을 느낍니다.
주님께서 땅을 얻으시는 유일한 길은 진리를 회복하고 확산하는 것이다.
진리는 유일한 처방책이자 예방접종이며 항생제이다
바울의 완성하는 사역의 중심계시를 오늘날 주님은 회복하셨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에 관한 것이며 이 이상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새사람, 우리와 주님과의 유기적인 연합이 포합된다
주님의 회복과 전통적인 기독교가 차이가 나는 것은 중심이상 때문이다.
우리의 주된 관심은 교회들의 확산이나 인수증가, 또는 기타 축복으로 보이는 표시들에 있지 않다.
(비록 우리가 이것을 위해 수고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중심이상에 관한 말씀을 해방하고 모든 교회들의 참된 상황을 돌보는 것을 주로 관심한다.
성경의최고봉은 바울의 완성하는 사역이다.,
요한의 보수하는 사역은 바울의 완성하는 사역을 강화시키고 확증해 준다.
이 두 사역은 두 봉우리가 있는 하나의 산과 같다.
우리의 이상은 내적으로 동기를 부여해 우리로 신선하게 하고 영안에서 불타게 하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로 모여 기능을 발휘하게 한다.
사역의 책임은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교회와 일과 사역이 있다
이들 모두가 몸을 지배하는 원칙으로 삼는다.
교회는 축소되어 표현된 몸이다,
일은 증가를 추구하는 몸이다.
사역의 기능은 수행하는 몸이다.
사역은 중심적인 이상의 초점을 유지함으로 교회와 일을 섬긴다.
누군가는 늘 나팔을 손에 들고 성벽 위에 있는 파수꾼이 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 곧 하나님의 기도, 하나님의 경륜의 영역 안에 있는 기도를 통하여
회복의 상황 전체를 지켜보면서 어떤 빗나감의 조짐이 있지는 않은지,
또 어떤 이상의 부족이 있지는 않은지 살핀다,
그다음 , 그러한 조짐이 보이면 사역이 앞에 나설 것이다.
이 단체적인 사역에서 섬기는 많은 형제들 중 한명으로서, 나는 호흡이 있는 한,
나의 사랑하는 동료 노예들과 더불어, 우리의 노정 동안에 우리가 결코 빗나가지 않도록
이것에 관해 기도하고 말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전통적인 기독교의 일부가 된다면, 우리는 끝난 것이다.
이런 교통이 있음으로 인해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오로지 고슴도치의 먹이가 되기 위해 작은 통에 오글오글 사는 벌레 밀웜.
하지만 그들중엔 애벌레 -> 번데기 -> 성충 -> 알까기의 순서대로 살아내는 강한 본능을 가진 놈들도 있죠.
애벌레일 때는 나무젓가락으로 집어올릴 때까지도 전혀 눈치를 못채지만
까만 성충이 되어서는 작은 소리나 움직임에도 민감한 반응의 발전을 보입니다.
일정기간 알까기를 다 한 다음에는 조용히~ 한쪽에서 죽고 다른 놈들은 죽은 놈의 머리를 먹어치우는데
아마도 그 부분이 연하기 때문이 아닐까 ...ㄷㄷㄷ
고슴도치에게 먹히도록 운명지어진 하찮은 벌레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생명률은 신비로운 것이 사실인데...
성경에서 특히 구약에서 사람이 비참한 스스로를 비하하는 비유로서
'구더기같은 사람, 벌레같은 인생'(욥)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시)라는 말씀이 있는 거 보면
아마도 사람이 알기에 벌레가 가장 낮고 천한 생명이라는 인식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낮고 천한 벌레의 존재조차 그 본능과 생명률의 섬세함이 놀라운진대
그리고
공중의 새와 들에 피는 백합화를 주님이 어떻게 먹이시는가에 대한 주님의 안배를 생각할 때
하물며
사람안의 영의 지위를 하늘과 땅과 같은 위치에 놓는 하나님에게 있어,
사람의 존재와 그의 가치에 대해서는
사람이 자신을 아무리 비하하던
자신을 아무리 높고 가치있게 여긴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아시고 여기시는 것의 어떠함을 헤아리기엔 역부족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평안하다 안전하다'할 때가 진짜 위함한 때
지금은 어느 정도 지난 이야기지만
최근 거의 뉴스를 보지 않아서 그런지 ...마치 딴나라에 사는 사람차럼 실감이 안났던 건
문득 전쟁발발에 대한 염려가 팽배했던 분위기 ..
알고 보니 북한이 쳐들어오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었더군요.
그래서 라면이니 통조림 또는 생수들을 사놓았다고들 하는데...
이사하기전 몇주전부터 가능한한 짐을 줄이고 있던 터라
생필품이나 음식물들을 사재기는 커녕
오히려 주방선반과 냉장고에 남은 음식물을 비우고 있었으니
혹 조그만 지엽전이라도 시작 되었다면...ㅠㅠ 정말 기가막힌 타이밍이었을듯.
최근의 이런 당면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사는 나라는
평안하다 안전하다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이땅의 마지막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느낄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문자그대로의 의미에서 한반도를 포함한 세상 전체는 평안과 안전모드로
우리나라는 통일이던지 아니던지 전쟁의 가능성이 희박한 때일지도 모르고
중동도 평화협정을 맺어 더 이상 총질이 없는 평화로운 싯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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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상황과 위협속에 살 때는
만약 전쟁이 나면
그래도 어떻게 해야겠다라는 막연한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보기라도 하겠지만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돌발적인 위기상황이 닥치면 더욱 더 우왕좌왕할 수 밖에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말씀은
마지막때에 이 땅은 피할 수 없는 산고속에 놓여진 산모의 상태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밖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뱃속에서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마침내 때가 되면
아무리 고통이 커도 낳는 것외에 달리 길이 없는 산모의 상태가 되리라는 것.
중요한 것은 아이가 뱃속에서 커가는 것을 다른 사람은 느낄 수 없어도
산모는 알고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