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몸이 완전히 자라는 시기는 오로지 20대초반까지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한 30대까지?가 정서적인 면에서 성숙해질 수 있는 , 그 사람의 오감의 수용능력이 정해지는 나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특정한 전문분야에 있어 궤도에 오르는 것은 시기나 정도나 다 다를지도 모르겠네요...
그것도 남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는 것에 있어서...........
2년전 그때는 나름대로 봐줄만하다고 여겼던 그림들이었는데....
이삿짐을 싸면서 냉정하게? 보관여부를 판단해야할 싯점에서는
벽에 가득 붙여논 그림중 스스로의 안목에 통과한 몇개만 액자에 넣고는
(그중에는 어떤 분에겐 괜찮다고 여겨진 그림도 있었지만...)
모두 폐휴지 함에 넣어도 아쉽지 않더군요...........
어떻게 보면 지난 2년간 그림자체가 발전하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의 그림에서 스스로 보고자하는 표현의 방향에 대한 안목은 높아졌는지도...
그림을 그리는 이들의 공통적인 목표는 아마도
반 고흐가 그랬듯이 지금은 알아주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내 그림을 알아 줄거야라는 ..자기 그림에 대한 확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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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누가 자신의 그림에 대해 그런 확신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모든 것은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만
렘브란트나 고흐의 그림을 실제로 보았을 때
특히 말년의 그들의 그림을 보면 정말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거란 느낌이 듭니다.
마침내 그들은 그들 안에서 발전된 정서와 느낌을 오차없이 표현하는 방식을 알아내었구나...하는....공감과 감동의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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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면에서도 그러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목표는 영적인 생명이 자라서
전에는 참 근사하고 가치있다고 믿었던 여러 일들이 어린아이의 일들처럼 유치하게 여겨질 만큼 성숙하여지고
마침내는 나름 의의 면류관이 자신을 위해 예비되었다고 믿는 그런 정점에 이르길....
바울처럼...
바울은 자신이 장성하였다고 느낀 어느 싯점마다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담대히 말할 수는 있었지만
마침내 어느 순간
자신을 위해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확신있게 말할 그런 정점을 이르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그때 그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로마의 감옥에 갇혀 목을 잘릴 날만 기다리고 있으며
일생동안 섬긴 교회는 변질되어 가고 있고 심지어 그의 사람들에 의해 등돌림 당한 실패한 복음전도자처럼...
보이는 외적인 싯점에 처했을지라도....
의의 면류관에 대한 확신은
목을 잘리는 순간조차도
큰 희열로 인해 기쁘게 감수하였을 것이란...............
죄를 짓기전
죄를 알기전
소위 무흠의 시절인
아담과 하와 ..그러면 절대명철, 절대 순수...이런 상황일거라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에서 꼬임에 빠지고 실수하는 아담과 화와의 약점은
천연적인 우리가 가진 약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이를테면...
정확치 못한 질문을 듣고서도 부풀려 말한다거나 자기의 생각을 덧붙여 말하는 부주의함,
중대한 기로에서 현명치 못한 결단을 하는 것,
하나님의 믿는 것보다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하는 간교함에 맞장구침,
책임을 다른 이에게 전가시키는 비겁함,
자신의 실수와 부끄러움을 감추고자 하는 소심함 등등
사단의 간교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드러난 아담과 하와의
인격적 미성숙이나 정서적 결함을 드러낸 여러 정황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마땅히 정직하고 용감하고 사려깊고 결단력있고 소신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어진 사람이라면...........
모든 동물에 이름을 지어줄만한
지적인 판단능력과 예리함까지 갖췄다면............
사단이 어떤 존재이며 그의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간파했어야 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동산안에 있는 모든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고 한 그 질문자체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말라고 하신 것을 왜곡시키는 간교함이 숨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단추를 잘못끼웠다는 별명을 하더라도 계속되는 실패와 실수 그리고 수치스런 대응들....은
정말 실망스런 상황인 것이 결국 우리가 그런 조상의 자손들이며 그런 요인이 우리안에 유전되어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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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만약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
죄를 알기전에도 아담과 하와는 온전치 못한,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를 짓기 전에도
적극적으로 생명나무의 노선을 취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온전케 되는 길이었다는 결론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차별적인 대우는 참 불공평한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이를테면
같은 한 집안에 태어난 아들 둘이 있는데 먼저 태어났다는 것 만으로 두배의 몫을 유산으로 받고 게다가 왕권도 받고 한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둘째들은 장자권을 얻기 위해 싸우고 술수를 쓰고 속이고 사고 팔고 하기도 했지만...
약간 맥이 빠지는 일은 어떤 경우에는 둘째가 장자권을 갖도록 하나님이 이미 정해놓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죠.
앞일을 모르는 인생들만 자기가 파논 함정에 자기가 빠져 고생고생하는 것이 마음 싸~하기도 하고 ...........
이것이 구약에서의 상황들이라면,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정말 그것을 우리가 얼마나 누리고 있는지 ...그것의 몇백분의 일이라도 제대로 누리고 있는지..).
하냐님이 자신의 피조물들을 향한 전격적인 전환, 절대적인 사랑을 보이시고 구애하는 은혜의 시대에 와서는
누구든지
인종이나 성별이나 지위나 학력이나 배경이나 등등의 차별업이
원하고 침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장자권을 열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여기던 ,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던
마태복음 21장에서 주님은 죄인들(사람들이 멸시하는 '세리와 창기'로 구분되는 이땅의 모든 루저들) 을 향해
(비유적으로 그리고 일부러)장자권을 가진 맏아들로 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로 돌이키고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것에서),
하나님 나라 안에서 그분의 나라를 추구하는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으로 비유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을 당연히 맏아들, 영원한 특권을 가진 위너로 여겼던 유대인들에겐 얼마나 놀라운 폭탄선언인지..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만,
마태복음 21장에서 주님이 말씀하신바, 그들의 교만과 완악함은 말로 하나님을 속이고 뉘우치지도 않고 주님을 믿지 않았기에
결국 주님은 죄인들에게 뿐 아니라 상밑의 부스러기를 먹는 개같은 이방인들에게로 향하셨기에,
먼 후대의 우리도 교회안에서 그런 특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어쩌면 주님의 시대에 유대인과 죄인들 혹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관계처럼
2000년이 지난 교회안에서도 장자권을 가진 아들들이 가득한 가운데
집을 나가 방탕하게 지내는 둘째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현재진행형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아버지의 집에서 열심히 일한 첫째 아들이 있고,
자신에게 주어진 분깃을 가지고 나가 탕진한 둘째 아들로 비유된 구원받기로 예정된 이들이,
탄식하며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향해 돌이켜 나아오는 것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신실하고 성실하게 하나님의 집에서 섬기는 첫째 아들이 있는가 하면
때로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방황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을 대하는 아버지의 마음과 태도는 그러나 얼마나 긍휼과 사랑이 넘치는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기엔 너무나 턱없이 부족하고 작고 제한된 마음이라는 것외엔 달리 할 말이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환대가 못마땅한 첫째 아들은
우리의 타고난 선악의 관념, 계산의 잣대, 철저히 기분엔 테이크의 거래 관념, 율법적인 심판의 잣대............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아침부터 나와 일했던 사람이나, 다 저녁때 나와 일했던 사람이나 똑같이 삯을 지불한 포도원 주인의 맘을
이해하고 동의할 때까지 우린 결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중국고사에 있었던 ,,,얼핏 들은 이야기.
현군이 어느날 민심을 살피려고 촌부로 변장하고 시골마을 정찰을 나갔습니다.
마침 버드나무 아래에서 새참을 먹으며?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는 농부발견! 올커니~ 민심파악할 기회!
괜히 친한척 엉덩이를 들이밀고 현군은 이런 저런 얘길 묻다가
황제에 대해 말미를 꺼냈습니다.
농부왈 ~ 황제가 뭐고? 누구고? 뭐하는 사람인데? 뭐 이런 모드로 되물었다는 것.
..................................
어떤 소그룹모임이 가장 이상적인 상태인가....
만약 한 새로운 사람이 그 모임에 참석해서 끝날 때까지 다 보고 듣고 하다가
누군가의 권유로 한마디 말을 하길 청함받았을 때
그가 가진 종교적 관념으로 문득 궁금했던 한가지 일을 묻게 되는 일..................
"그런데....지금 이 모임의 리더 혹은 전도사 혹은 봉사자 는 누구인가요?"
...................................
뭐 부연설명이 필요할까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초창기의 교회생활에서 시작된 이런 저런 모임들은 분명 필요가 있기에 만들어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합니다.
대집회에서 몇백명,아니 수천명이 모여 연사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소지역으로 몇십명이 모여 각각 영의 느낌을 따라 서로 신언하기도 하고
기도하기 위해서 함께 모이기도 하고
낮에 자매들끼리 모이는 모임도 있고
깊이있는 교통을 위해 혹은 중대사와 심지어 치리하는 문제를 의논하기 위한 사도나 장로들의 모임도 있을 것이고
성경을 읽고 교통하는 모임도 있고...,,등등
사실 이 세상에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동성끼리가 아닌 이성이 같이 있는 것인데 그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한 집에 남자들만 죽 늘어서 앉아있는 모습은 딱딱하고 경직된 느낌인 것이,
실제로 남자들, 형제님들만 모이는 집회의 분위기가 그렇지 않을까 상상이 됩니다.
하지만 이런 집회에서는 연약한? 여자들의 다치기 쉬운 심성을 고려할 필요없이 직선적이고 강한 교통이 가능하겠기에 필요한 모임일 것입니다.
하지만 형제들이라도 강한 영과 심장을 가진 즉 조건과 자격과 위임이 되는 분들만 참석하는 거겠죠...
마찬가지로 자매들만 모이는 집회도 여린 자매들만 모였을거니깐 참 분위기 좋을 거야란 그림이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매들끼리 모이면 신기하게도 상대적으로 강한 기질의 왕언니가 꼭 한두명씩 드러나 서로 부딪히게 되고(빌립보교회의 두 자매처럼)
너무 격의 없이 친밀해지고 조잘조잘대다 보니 어떤 상황들이나 사실들이 치유되거나 조정되지 못한채 서로 공유되어
누군가는 마음이 다치게 되는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바울이 자매들이 이집저집으로 몰려다니며 말을
내지 말고 집에서 자녀를 키우고 가정을 돌볼 것을 경계한 배경처럼)
그러함에도 어떤 경우는 섬세한 여자들만의 필요를 채우고 서로 피차 보듬고 서로 위로하고 힘을 얻는 집회가 필요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모든 집회가 의무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
오랜 민주화투쟁끝에 마침내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시절 공중언론매체에는 이런 프로가 있었습니다.
"이젠 말할 수 있다" ..........
하지만 역사가 거꾸로 흐르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언론이 정권의 충견이 되었버렸으니 이런 프로만 남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쩌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어떤 당연한 것들,크고 작은, 대단하고 소소한 모든 자유가 그저 당연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신앙의 자유 역시 그렇겠지요.
인터넷상에서 또는 사석이나 지면에서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망언을 해도 되고,
누구는 정통이고 누구는 이단이니 지들맘대로 규정하고 정죄하는 이런 시비조차도
말할 자유가 주어지기에 가능한 호사이지 싶습니다.
게다가 저같이 그저 작은 별볼일 없는 믿는 이도 게다가 여자?가 교회모임에서 일어나 교회가 어떻고 말씀이 어떻고 신언하는 것조차 감히 얼마나 대단한 특권인가....
인터넷상에서 제한없이 마음속에 느낀 일들이 꺼리낌없이 솔직하게 쓰는 일이 가능한 이 시절 얼마나 놀라운가 .....
이 시기야말로 세기말 직전의 즉 대환란이 오기전의 마지막 자유로운 시기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믿음의 자유가 주어진 지금이라도
제가 만약 일반 교파에 적을 두고 있다면(물론 저로서는 아마 종교조직이 되어버린 곳에 적을 두지는 않았을테지만)
타락한 교파의 어떤 상황에 대해 거리낌없이 말하는 저같은 사람은 일찌감치 축출이 되었을 것이기에
주의 회복, 웟치만 니와 윗트니스리의 사역의 우산 밑에서 그분들이 밝히신 믿는 이의 특권에 힘입어 이런 저런 솔직한 교통이 가능하기에
그러므로 그분들의 사역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어떤 상황에 대해 조심하고 경계하게 되는데...
그건 주님이 굳이 십자가를 통과해 참되게 믿는 이가 갖게된 참다운 자유,
즉 어떤 좋은 명분이라도 주님이 주신 멍에외에는 어떤 멍에라도 그 아래 메여서는 안된다는 것~!
.
그런 의미에서
이왕 말이 나옴김에 한가지 솔직하게 토로하고 싶은 것은 자매집회가 갖는 성겪과 의미에 대한 재검토입니다.
자매집회는 낮에 시간이 있고 밤에 홀로?다니기가 쉽지않은 자매들을 위한 사역집회 즉 말씀을 공급하는 집회입니다..혹 일 것입니다,.혹 이어야합니다.
이외의 다른 부산물들은 배제하는 것이 합당할 듯 싶습니다.
예전에
딴 지방에서 교회생활할 때 어떤 자매가 아르바이트같은? 직장생활을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자매집회에 나오지 않아도?되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컨대 낮에 집에 있으면서 자매집회에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나오라는 압력을 받을 때 자매집회에 오고 싶지 않다는 말을 감히?할 수가 없어서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차라리 낮에 돈을 벌러 나간다는 것인데...............
왜 안나오고 싶은지는 묻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걸 알고 싶어 캐묻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울지도 모르겠네요,,,
어떤 분은 정말 자매집회에서 많은 양육과 공급을 받는다는 분도 있고보면 자매집회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님이 분명한데
문제는 자매집회에 나오지 않는 자매(낮에 집에 있음이 분명한)에 대한 따가운 시선과 왜 안나온데?라는 돌고 도는 말이 주는 압박감이란 것이
아마도 무서운 시아버지 더하기 깐깐한 시어머니와 탱글탱글한 시누이가 줄줄이 딸린 그런 철옹성을 보는 느낌?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것에 감히 자신의 선택을 당당히 밝히지 못하는 약한 마음으로 인해 자신의집에서 떨려나오는 정도가 된다는 것은 .....
(그 자매는 그 문제가 지금쯤 해결이 되었는지...)
.
필요하면 모이는 것이 믿는 이들의 모임인데 스스로는 모임을 만드는 것을 잘 못하는 것을 배려해
앞선 이들이
이런 저런 성겪의 모임을 만들고 선택권을 주는 것이
오늘날 교회안의 모임의 형태인 거 같습니다.
문제는 선택과 취함의 몫은 성도들의 몫이고 이왕 선택한 분들은 그 안에서 어떻게 행해야할지 주의해야 할 의무가 남는 것입니다.
이사를 하는 것은 참으로 번거로운 일이지만 정말 유익한 점이 하나 있다면
벽장안 구석구석 다 뒤집어 정리를 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걸 계기로 좀 더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단순한 삶의 질을 계획해 봅니다.
그중의 하나,
조금은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집에서 입고 있는 그대로 외출을 해도 큰 무리가 없을 만큼 그렇게
평상시에도?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있자~~~는 원칙을 세우고
아깝다 그냥 집에서 입자하고 남겨두었던 어중간한 옷들을 정리하려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 옷이나 그냥 꺼내 입는 것보다
비록 몇천원짜리 티셔츠라고 할지라도 이왕이면 색과 디자인을 고려하고 말끔한 옷을 골라 위아래 맞춰입으면
외출할 때 시간도 절약되고 스스로의 기분도 업그레이드되기 때문이죠.
(누구는 안 그러나? 할 분도 있겠지만...)
게다가 옷을 잘 갖춰입고 있으면
맘도 잘 정돈되고 몸도 늘어지지 않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윗트니스 리형제님이 집에서도 양복을 잘 갖춰입고 계셨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흐음~ 좀 피곤하게 사시는구나.
때로는 트레이닝복이니 편한 실내복 같은 것을 입으셔도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물론 내실에서는 그렇게 하시는 때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원칙적으로는
흐트러지지 않고 늘 깨어있는 영적 분위기로
매일의 삶을 유지하려 했던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보게도 됩니다.
어쩌면 그저 일상의 한 단편일 수 있는 이런 일은
보이지 않는 영적 투명성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 뿐이겠지만................
안과 밖으로 구분될 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보이는 것이 같게 되는 것처럼
영적인 면에서도 안과 밖으로 상징되는 모든 상황에 적용이 되는 일이란 생각이 들며......
.
우리의 많은 생활에서
안과 밖이 다른 많은 상황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심하고 무감각하게 행하는 것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영적 성장이나 주변의 사람들에게 미친 소극적인 영향들을 생각할 때
장로들이나 사도들만 무릎을 꿇고 회개할 뿐 아니라
교회안에 별로 영향력없다고 생각한 우리 하나하나도 그렇게 해야한다는 ....................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에서의 판단은 (어떤 성경역에서는 판단대신 비판이란 단어를 썼음) 가장 가장 강력하게 믿는 이를 경계하는 의미로
다른 이를 어떻게 긍휼히 여기는가
또는 강력한 의의 잣대로 정죄하고 심판하는 가에 따라
그날 심판대에서
자신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을지
엄격한 의의 잣대로 심판을 받을지가 결정된다고 말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라도
과연 모든 판단은 정확한 것인가?
어떤 사람이판단을 내릴 때는 객관적 정보를 파악한 것을 토대로 한 것이나
판단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지점 즉 그가 도달한 인격적 그리고 영적 상황에서 내려지는 결정이기에
객관적인 답이 아닌 주관적 오류가 다분히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더하여
객관적인 기준과 자료에 따른 파악이란 것 역시
잘못된 정보의 가능성과 그 정보를 주는 사람들의 어떠함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 그런 각각의 상황에 따른 것이기에
완전한 객관이란 불가능한 가정이라는 것도
짚고 넘어가야겠죠...
결국
우리의 많은 한계들 즉, 지적인 한계 , 정서적인 한계를 포함한 인격적 한계와 영적인 한계들로 인하여
판단이란 것을 한다는 것이
위치적인 자격에서 뿐 아니라
(같은 허물을 가진) 질적인 자격에서조차 매우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판단은 잘못된 것이라는 관념하에
모든 파악 모든 앎을 접어버리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되는 것은
우리의 영적 분량은
하나님의 영(고린도전서 7장)을 가진 자로서 어떤 일에 대하여 견해를 말 할 수 있는
즉
성육신의 원칙하에서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는
최고의 영성이야말로 회복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함에도...
정죄보다도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안전하다는 윗트니스 리 형제님의 권면의 말씀대로
우리가 주님의 빛가운데 어떤 사람인가를 알기에
모든 약함들 모든 상황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잃지 않음으로
주님의 면전에 서게 될 때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게 되길....................
딤후 2:24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믿는 이들의 모임이 활성화되기 위해선 많은 길들이 있지만 가장 고무적인 것은 아마도 서로 묻고 답하는 방식일지 모릅니다.
누군가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피차 하려고 하다 보면 모두가 깨어서 참여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닌 서로 가르치고 서로 배우는 분위기라면 말입니다.
이런 집회에서는 어떤 영적인 주제나 체험에 대해 질문을 하는 사람은 정말 몰라서 질문을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함께 교통할만한 좋은 영적 주제로 내놓기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기에
질문을 하는 사람이 꼭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가르치는 것을 하는 사람이 꼭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한 사람만이 가르치는 분위기라면
딤후서 2:24절에서 "가르치기를 잘하며" 라는 말씀과 앞뒤로 "다투지 아니하고 온유하고 참는" 미덕들에 대해 언급한 말씀이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만약 서로서로 가르치기를 실행하려 한다면
상대의 말을 듣을 때 그것이 맞다 아니다로 옥신각신 하거나
누군가 자신의 교통이 딴지를 거는 것처럼 느껴질때 성질을 내거나
채 말이 끝나기전에 가로채거나 하는 살벌한 상황이 되어서는 서로 가르치는 것이 실행되기 어려울 것이기에,
어떤 사람들의 잘못된 관념이니 태도들 대할 때 그리고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할 때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이런 저런 미덕들이 필요한 것이겠죠.
이런 집회를 실재로 해보면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교통한다음 누군가가 전체적인 맺음을 하는 예전의 방식대로라면 고려할 필요없었던 상황들이,
상호적인 서로 가르치기를 실행하는 모임가운데에서는 세심하며 민감한 영적인 상황들을 통해
피차 도움을 얻으며 피차 조정될 수 있는 정말 유익한 모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듣는 사람들의 유익을 고려하기 보다는 자신의 만족이나 스스로의 평가에 주의를 기울이지만
가르치기를 잘 하려면 듣는 사람들의 상황, 유익 , 집회의 분위기 즉 상호성에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래서 피차의 참여를 이끌어 내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잘 배우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교통을 들을 때 보다
자신이 반응하는 것을 통해 깨닫게 되는
어쩌면 가장 오래된 가르침의 방식통해서 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메시지를 전하는 사역집회에서조차
듣는 청중의 이해정도와 수용의 능력을 파악함이 없이
자신의 지식과 역량을 전시하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어쩌면 듣는 청중의 입장으로는
그 사람의 영적 역량이나 지식과는 관계없이 그 메세지는 최악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
일반적인 의미에서 가장 좋은 직업은 일단 돈을 많이 버는 직업입니다.
거기다 사람들의 존경과 신망과 주목을 많이 받는 직업이라면 더욱 신바람이 나는 일이겠구요.
엊그제 티비에서 본 캐나다에서 교육사업을 펼치는 한국인은 정말 보기드물게 훌륭한 분이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저 사업가로서의 재능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돈을 어떻게 합당하게 쓰는 가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가진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지혜겠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의 직업을
단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닌 서로서로를 위한 공헌의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이를테면
변호사는 돈을 벌기 위해서 나쁜 사람을 위해 변호하지 말고, 오히려 억울한 사람들을 변호하는 변호사로서의
원래의 의미에 충실하다면,
의사는 아픈 사람들의 병을 빌미로 몫돈을 착복하기 보다는 가난한 사람이라도 병의 고통에서 놓여나도록 돕는
원래의 의미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등등의 모든 직업이 그 직업의 원래의 가치에 충실하다면
이 세상엔 돈을 많이 번다 적게 번다라는 의미로서의 좋고 나쁜 직업의 개념이 사라질 것입니다.
사실 ..이 타락한 세상에서는 누구에게나 기대할 수 없는 가치관이겠죠...
아무튼 적어도 하나님에게는 좋은 직업이나 나쁜 직업의 개념이 사람과 달랐음에 틀림없는 것이
지금이나 옛날이나 이 세상의 관점으로는 별로 높게 쳐주지 않는 목수라는 직업을 이 땅에서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 목수였을까?
모든 억압받고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들의 친구요 그들과 같아지기 위한 배려?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갓난아이로 태어나서 어른이 되는 성장기간동안
즉 그분의 알려지지 않는 은밀한 시기, 하나님의 신약경륜을 수행하기 위한 사역자로서 자격을 갖추기 위한
합당한 시간, 합당한 환경을 위해서는
목수라는 직업보다 더 좋은 직업은 없었으리란 생각이 드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 가장 명료해지는 순간은 단순한 노동에 집중하여 일을 하는 순간이란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주부로서, 가장 영적인 일, 기도안에 들어가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는 순간은
바로 설겆이 같은 단순하게 집중할 수 있는 노동을 하는 때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목수가 하는 일들, 톱질을 하고 대패질을 하는 단순한 노동을 해야만하는 모든 시간동안
주님은 모든 번잡한 상황을 피해 하나님의 면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지내실 수 있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면에서 가장 유익한 직업은
어떤 상황을 제공하는 직업인가에 대한 답이 나온 것인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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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장
13.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
14.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
는 말씀이 있습니다.
문맥을 잘 살펴보면
먼저 좁은 문을 통과해서 좁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좁은 길을 가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죄사함, 즉 초기의 구원받음을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마땅한 고난을 충분히 받아야한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선 안되겠죠.
그렇다면 믿음으로 댓가없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과 상충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의 입문 즉 거듭남은 주님이 이미 값을 치룬 것이기에 쉽게 통과하여 얻었지만,
그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라
이제 나는 멸망하지 않으니 다 되었다 룰랄라~ 뒤돌아 놀러나가는 아이를 불러세워서
궂이 협착한 길을 걸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경고의 말씀을 발하는 뜻은
변화와 성숙의 유기적 구원의 좁은 길이 남아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겠죠.
하지만 시편 84편에 주께 힘은 얻고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라는 말씀이 있음을 상기할 때
영적인 면으로 우리 안에는 시온대로가 있지만
우리의 자아가 십자가를 통과하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는 면에서는 확실히 좁은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밖에서 주어지는 제재가 아니라 스스로 찾고 선택하는 길임도 알 수 있습니다.
.
에효~ 왜 사람은 긴 인생길(이렇게 빠른 시간인줄 몰랐지만)을 살아야하는가
그냥 거듭나고 이미 들림받은 거 같은 기쁨으로 충분하며 이것으로 끝나면 안되는가라는 의문에
온전한 답을 얻은 것도
충분한 체험도 부족하지만,
이런 저런 삶의 굴곡과
관념들에서의 돌이킴과
때로 반전의 체험을 거치는 중에
쬠은 그 뜻을 알 것도 같습니다.
새삼...
2013년도에 들어서면서
이 한해는
그런 좁은 길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좁은 길을 걷는 것이 무엇인지 내적으로 아는 한해이길.....소망하여 봅니다.
주일집회후 한 형제님이 산에 갑시다~!의 제안이 있어
이렇게 해서 원하는 사람이 모여 시작한 인왕산종주?
사진배열이 거꾸로 되었지만 강북삼성병원부터 시작된 ....
아래사진은
윤동주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본 북악산
유동주시인의 시비를 읽고 있는 중~
인왕산꼭대기에서 인증샷~
인왕산은 험준산 산입니다.
저렇게 목재로 길을 만들지 않았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오를 생각도 하지 못했을터....
홍난파의 생가? 말년에 살았던 집
삼일운동당시 독립선언서를 자기 아들의 침상아래 숨겨 외신에 알렸다는 어떤 외국분?이 살았다던 집
문득 사람과 사람이 친밀해지는 것은 인간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참 귀한 일이란 생각을 합니다.
공감할 수 있는 같은 정서, 같은 가치관, 같은 목적의식을 가진 친밀한 사람들이 있다면,
삭막한 사막길같은 이 세상일지라도 통과하는 동안 결코 외롭지않을 것이며 피차 격려하며 힘을 얻고 위로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이 세상사람들이 구하는 친밀함중에 가장 높고 가장 고귀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교회라는 거대한 가정안에서 피차간에 추구하는 친밀함일 것입니다.
교회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정안에서 거듭난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르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형제와 자매는 분명 아주 친밀한 관계이고 친밀한 관계여야 하기 때문에
함께하는 많은 시간들을 갖습니다.
이를테면
자주 한솥밥을 먹고 같이 여행을 가고 같이 찜질방을 가서 비질비질 땀을 흘리는 포장을 뜯어낸 모습도 서로 보이고 그러면서...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성격이 어떻고 기타등등 그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도 친밀해지는 것의 한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의 상황을 아는 정보는 상대를 배려할 때 참고가 될 수 있겠지만,
이런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친밀감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구나를 아는 데서 오는 편안함과 익숙함일지 모릅니다.
더하여 사람과 사람사이의 물리적인 근접성과 친밀함의 관계가 꼭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몸이 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속담이 있지만,
참다운 친밀함은 시간이 가거나 멀어지거나 상관없이 사람의 내면에 변함없이 남아있는 따뜻함같은 것이니까요.
누군가의 경혐중에는 한편의 시나 글 혹은 연주곡 또는 한 장의 그림을 통해 그것을 표현해낸 사람에게 깊은 공감을 느낀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은 내면의 사고와 정서적인 느낌에 있어 동질감을 갖게 되는 것으로
비록 물리적인 거리, 시대적인 차이가 있지만 그런 것이 친밀감에 방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사실 한시적인 시간을 이땅에 머물 수 밖에 없는 한계내에서 가장 풍요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동시대이건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 살았던 사람들이건
그들이 생각하고 발견한 지식과 내적 정서를 같이 느끼고 공감하는 정신적인 교류를 가질만한 이들을 갖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으로서도 가장 풍요한 누림을 갖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이해하고 그분의 뜻을 순수하게 따르는 분들과
생명의 말씀을 통해 깨닫고 얻은 모든 영적인 실재를 함께 나누고 공급받고 체험한 것들을 공유하는 교류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감당못할만큼 거대한 것이던 사소한 것이던 ....
2013년도에 들어서있는 이 싯점의 믿는 이로서 저의 사소하지만 새삼스럽게 발견한 것이 있다면,
얼마전 교회모임때 창세기라이프 스타디의 한 부분을 읽던 중, 뭐 크게 영적인 주제도 아니었고 그저 윗트니스 리 형제님 자신의 작은 에피소드를
예로 든 내용이 있었는데, 안에서 든 생각은 참 형제님이 귀여우시다~라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지고 이렇게 친밀한 느낌이 들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하고 기분이 좋아진 것이 생각납니다.
생각해 보면 한번도 개인적으로 얼굴을 대면한 적도 없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거나 한 기억도 없지만 사실,
교회안에서 그보다 친밀감을 느낀 분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마도 형제님의 많은 메시지가 그저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이야길 나누고 그분의 생각과 깨달음과 심지어는 성겪과 태도와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 이야기에 같이 웃고 공감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사실 주님과의 관계도 한번도 우리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했지만, 그분이 친밀하게 여겨지는 것은 삼층천에 꼭대기에 있는 멀고도 두려운
절대자가 아니라, 인간적이면서도 신성하고, 연약하며 섬세하나 심지굳고 강한 , 사모할만한 신성과 인성의 모든 것을 가진 그분을 내적으로 알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며
그와같이 느끼는 그분의 자녀들과의 교류 역시 시대와 장소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 그런 공통적인 주님에 대한 친밀함으로 인해
모든 참된 믿는 이들과 참되게 친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친밀함이야말로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이며 가장 영적이며 가장 귀한 친밀함이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겠죠...
이런 친밀함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하고..사랑을 드립니다...
골 4: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눔바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일장소가 없어서 비교적 넓은 어떤 성도의 집에서 모임을 가져야하는 일세기의 교회생활보다
높은 천장과 멋진 인테리어를 가진 예배당의 20세기에서의 교회모임이 더 발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진정성과 참됨에 목마른 건 이 세상뿐만이 아니라
소위 하나님의 나라라는 교회에서조차 보기 힘든 현상이 되었습니다.
물질이 부족하거나 사람머릿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내적인 실재가 부족해서입니다.
일반 기독교에는 없는 실재를 회복안에서 실재화하고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18. |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
19. |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
20. |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
21. |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
22. |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
23. |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
24. |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
25. |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
골로새서 3장의 마지막 부분은 지상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인,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상전과 종의 관계에서
어떻게 행하는가의 원칙을 교통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모든 인간관계를 경쟁과 갈등의 관계로 규정하지만
성경에서는 복종과 사랑,순종과 노엽게 하지 않음 , 성실함과 자신도 역시 종임을 깨닫는 낮아짐으로 피차 대하길 권면합니다.
그것은 단지 이땅에서 평강과 조화로움의 관계를 갖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그 결과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기업의 상을 보상으로 받는가 아니면 불의의 보응을 받는가로 갈립니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닌 것을 오는 왕국의 보상의 조건으로 건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위치와 어떤 분량인가에 대해 과장되이 부풀리지 않고 명철하게 생각해볼 때
이땅에서 합당한 인간관계를 갖는 것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모든 일과 모든 관계에 처음부터 완벽하고 흠없이 자신의 역활을 해 낼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같은 특별한 은사를 받은 그릇은
상대적으로 사소할 수 있는 자잘한 인간관계의 멍에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큰 멍에를 멜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한 달란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배우는 과정을 합당하게 통과하여
오는 왕국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영역을 충실히 다스릴만한 역량을 배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제:색다른 연말잔치
사실...
세상의 기존의 기독교의 크리스마스에 반간증으로서 모이긴 모입니다만
별다른 흥이 없다고 느껴지기 쉬운 때...
그에 못지 않은 의미있는 모임이 되려면?이라는 주제로 모색한 끝에
이번 연말잔치는
장기자랑 + 연극
으로 정하였습니다.
.
결론적으로 기대이상의 호응과 동역으로
그 어느때보다 화기애애하고 따뜻한 모임이 되었습니다.
각자 가지고 있는 기량을 기부함으로
누구는 어디에서도 맛보기 힘든 훈제바베큐를 ,
누구는 현역으로 활동하는 수준급의 바이올린과 대금연주로....
누구는 연극대본을 쓰고 누구는 무대배경을 그리고..
누구는 기꺼이 망가지는 ?명연기로 열연을 펼치는 가운데.....
방주짓은 아비 노아와 약간 반항적인 아들 셈이 옥신각신하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면서
마침내 서로 동역하는 감동적인 씬 #1
자기만 언제나 힘들게 일한다고 불평하는 마르다와 주님의 말씀을 종용히 듣고 순종하는 마리아의 갈등을 표현한 #2
.
하나님이 지으신 에덴동산에서 각종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아담의 장면
동물인형 2
사자로 분장한 실제 사람1
그리고
울집 고슴도치의 찬조출연으로 꾸며진.....#3
그리고
다니엘과 세친구의 #4
살다보면 원래 자기가 꿈꾸고 바랬던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마도 거의 없을지 모릅니다.
꼬맹이였을 때 이담에 커서 뭐가 될래 하고 질문을 당하면 뭣도 모르고 하는 답에서 부터
맘속에 남몰래 자리잡은 어쩜 실현불가하게 여겨진 그런 모습대로 사는 사람이......
모든 사회적 인간적 전통적 조직적인 틀에 얷매이지 않고
스케치북과 연필하나만을 배낭에 찔러넣은 채 들판과 마을과 강을 잠시 머물다 스쳐 지나가버리는 아니 그럴 수 있는 방랑객의 자유....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란 주님의 자유는 같은 뜻이었던 아니었던 간에
어느 싯점 삶의 길모퉁이에서
제 맘을 사로잡았었죠..........
그리고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제가 꿈꾸었던 것은 그저 세상의 외적인 틀에서의 자유였다면
주님이 약속하신 것은 우릴 좌절하게 만드는 내적인 억압에서 부터의 자유였다는 차이를 발견합니다.
그 어떤 것이 참다운 자유일까?
말할 것도 없이 내적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가 참된 자유입니다.
주님이 보장하신 이 자유,
과연 진리가 당신을 , 내 자신을 자유케 하였는가?
.
교회생활하다보면 왜 이렇게 집회도 많고 일도 많고 요구하는 것도 많고 공휴일조차 널널하게 쉬지도 못하는 억압적 삶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면
역설적으로 과연 나는 자유로운가, 정말로 자유로움을 누리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 봐야 합니다.
.
솔직히 집회나간다고 누가 알바비?주는 것도 아니고 집회안나간다고 법에 위반되는 것도 아니고
주님이 떽끼 꿈에 나타나서 혼내는 것도 아니고 출석첵크로 일등 이등만 왕국티켓준다고 하신 적도 없으니
외적압박감에 의해 할 수 없이 집회에 나가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
그렇다면 집회에 나가기 싫으면 집회에 나오지 않는 자유?를 취할 것인가는
물론 자유이지만, 대신 잃는 것이 있음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을 본 사람이라면 당연 집회를 자발적으로 그리고 좋아서 즐거워서 나올만큼의 누림을
다시 되찾아야한다는 절박감을 느낄 것입니다.
.
산에 올라가서 나무 기둥뿌리를 잡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던
골방에 들어가서 낱낱이 죄를 자복하며 씻김을 얻던
찬송을 부르며 주님을 찬양하면서 영적 흥취를 누리던......
갖가지 방법이 있겠죠.
.
저는 그런 때.....
집회에서 추구하는 모든 말씀이 딱딱하고 이론적으로만 느껴지던 때......
집회에 나가는 것이 재미없고 할 수 없이~ 라는 생각이 들던 때....
예전 윗트니스리형제님의 훈련멧시지중 미처 보지 못했던 혹은 가물가물하게 느껴졌던 메시지들을
하나씩 하나씩 비디오로 빌려서? 보았습니다.
마치 병자가 누워서 떠먹여주는 죽을 넙죽넙죽 받아먹듯이...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서 메시지 안으로 빠져들어가면서 환하게~ 회복이 되었던 기억이 .......
.
이 세상에 억지로 해야하는 일들이 있다하더라도 슬픈일일진대
하물며
주님의 약속이 있는 교회생활에서 억지로 그걸 해야한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이겠습니까
참다운 자유는 우리의 분깃이고 우리의 특권입니다.
중국 장안의 병마총에는 진흙으로 만든 군인상이 즐비한데
그 만드는 방법이 몸통과 머리를 따로 만들어
몸통위의 구멍에 머리를 얹어놓아 몸통이 머리를 지탱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
외면적인 면에서 보기에 우리 사람도 머리가 몸위에 얹어있는 듯 보이므로
몸이 머리를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유기체인 사람의 몸의 각부분은
머리의 통제와 공급으로 인하여 유지됩니다.
그러므로 내적인 생명율로 볼 때 머리가 몸을 유지하고 지탱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의 물질적인 몸이 보여주는 그림이 그런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생존과 유지에 있어서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골로새서 2장에서는 믿는 이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게
그리스도 즉, 머리를 붙들라고 권면합니다.
.
교회의 초기시대에 씌여진 사도의 서신의 이런 권면의 의미와 실상은
그리스도인들이
내적인 생명율에 주의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는
외적 각종 표식들 행사들 행위들 규례들에 주의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
하지만,
우리의 물질적인 몸에서 볼 때 만약 우리의 지체의 어떤 부분이
머리를 붙들지 않고 즉 머리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생존이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동일하게
영적인 부분에서도 머리인 그리스도를 붙드냐 불들지 않느냐는
영적인 생존인가 아니면 영적인 죽음이냐로 갈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
머리를 붙드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머리를 붙들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골로새서 2장에서는
철학, 사람의 전통,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
율법, 절기나 안식일같은 종교적 규례를 지키는 것
겸손이나 천사숭배같은 자기비하와 경건의 외양을 꾸미는 것등으로 인해
육체따르는 것을 금하려 하는 모든 노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하지만
머리를 붙듬이란 아주 단순한 생활방식입니다.
문자그대로 그냥 머리를 붙드는 것
사족을 달자면
사람들이 발명해 낸 모든 것을 다 뛰어넘어서
주님 자신만을 주목하는 것
그분의 생명률만을 주의 하는 것~~!!!!
회복의 뛰어난 점이 무엇인가고 묻는다면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결정적인 그리고 분명한 이상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그것은 회복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것이며
많은 믿는 이들이 의식하건 하지 못하건
그 목적을 향해 흘러가도록 주님이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회복의 전용 소유물이 아니다.
만약 회복이 실재적인 교회생활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거처인 새 에루살렘의 완결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의 축소된 모형을 보일 수 있다면
그건 영광스러운 간증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좀 더 많은 시간이 지나간 뒤에 이루어질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바톤이 넘겨질 수도 있는 문제이다.
이형제님이 경고하신 말씀은 다시 기억해 보면
회복이 우리라고 말하지 말라
주님은 다른 무리를 또 일으키실 수 있다고...
회복은 우리의 회복이 아니라
주님의 회복이다.
우리가 주님과 어떻게 합력하는 가에 따라
이 회복의 한부분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을지도 또는 없을지도 모른다.
또한
무엇을 보았는가는 참으로 중대한 일이다.
그무엇인가를 본다는 것도 쉽지 않으며
보되 그 길로 곧바로 행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회복은 두 뛰어난 자질을 가진 형제님들의
하나님의 경륜의 이상을 봄과 본바에 따른 올바른 행보의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두분의 사역은 아주 뛰어난 매개체인
출판물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중요하다.
니 형제님의 많은 멧시지들이 문서화되지 못하고 그냥 사라졌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나 ...남아있는 많은 문서화된 멧시지 만으로도
늘 주님앞에 새로이 서는 새신자들에게는
요셉의 곡식창고처럼 계속 퍼날라도 충분한 양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그 남아있는 문서는 그 후에 어떤 사람들이 회복을 변질시킨다면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한 그런 야심을 사전에 방지하는 예방책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큰 회복의 장점은
교회생활의 그 실행에 있어
니골라당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형제님은 주님 품에 가시기 전에 회복의 사역을
한 사람의 어깨위에 남겨놓지 않으셨다.
한 무리의 동역자 형제님들이 합력하여서
건축된 방식으로 사역하도록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몸된 교회의 중간계급으로 세우신 것이 아니다.
실재적인 교회생활에는 사도와 선지자와 그리고 교사,
또한 실재적 영적 아비인 장로들 같은
많은 관절과 같은 지체들이 있다.
그들의 몸된 교회안에서 자신들의 맡은 바 사역과 봉사를 충실히 수행한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들이 스스로 니골라당으로 나서기로 작정한다면
먼저 하는 일은 성도들의 말하는 입을 다물게 하고
그것이 보이는 것이던 보이지 않던
우상을 섬기게 하는 종교적 행위로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니골라당을 훼파하길 바란다면
그 첫번째 실재적인 길은 모든 사람이 집회에서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교회의 모임중에 말하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고 쉬운 일이 아니다.
영안에서 영으로 말미암아 영의 감동으로 주님 자신을 말해내는 것은
세상의 모임에서 좀 생각을 추스려 말해내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은 안에 주님의 영으로 말할 수 있다.
아니 주님의 영으로 말하는 것을 훈련해야만 한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주님이 안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합당하게 말하는 것이야 말로
모든 사람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영적 예배이다.
이것이 오늘날 회복이 점점 더
그 실재를 회복하고 있는 가장 귀한 부분이다.
그것은 회복이 추구하는 바
그 몸의 건축의 아주 실재적인 간증이기 때문이다.